2001년 10월호

후백제 견훤이 꽃피운 禪宗예술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입력2005-04-04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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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볕이 아무리 따사롭다 해도 겨울로 가는 길목을 막을 수는 없다. 신라의 국운도 이런 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 없었다. 경문왕(재위 861∼874년)과 헌강왕(재위 875∼886년) 부자와 같은 현군(賢君)을 만나 잠시 찬란한 단풍빛을 자랑하였지만 모두 단명하여 도합 25년의 재위 기간을 채우고 후사(後嗣) 없이 돌아가자 신라 왕국은 갑자기 기울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진성여왕(재위 887∼896년)의 무능과 난정(亂政; 어지러운 정치)은 이를 가속화하였으니 즉위 3년 만에 벌써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철없는 미소년들에게 국정을 내맡겨서 기강이 무너진 탓이었다.

    이에 진성여왕 3년(889)에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신호로 하여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은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과 완산주(完山州, 전주)에서 일어난 견훤(甄萱, 867∼936년)이었다.

    특히 견훤은 서남해안 방위를 맡은 신라군의 비장(裨將) 신분으로 진성여왕 6년(892)에 완산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주변 군현을 모두 차지하고 5000군사로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빼앗은 다음 자립(自立)하여 스스로 ‘신라남 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 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南 都統指揮兵馬制置 持節 都督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御史中丞 上柱國 漢南開國公 食邑二千戶)’라는 긴 이름의 관직을 표방한다. 갑자기 왕을 일컫기가 거북하여 구차스럽게 내건 직함이었다.

    그러자 양길의 휘하에 있던 궁예(弓裔)도 진성여왕 8년(894) 10월에 아슬라(阿瑟羅, 강릉)를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라 북부의 북한강 수계와 임진강·예성강 일대의 한산주(漢山州) 관내를 장악하고 나서 진성여왕 9년(895) 8월에는 관부(官府)를 베풀어 나라의 체제를 갖춘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년)이 19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궁예에게 몸을 맡기는데, 궁예는 19세 소년인 왕건에게 철원(鐵圓)의 태수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이렇게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할 즈음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10년경)(도판 1)이 당나라에서 돌아온다. 그는 1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18세에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당당히 급제하여 당나라 천지에 문명(文名)을 드날리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도통순관 사자금어대(承務郞 侍御史 內供奉 都統巡官 賜紫金魚袋)의 벼슬을 받은 다음 회남에서 신라에 보내는 공문을 받들고 오는 국신사(國信使) 자격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에서 연마한 그의 능력을 고국에서 마음껏 펼쳐 보이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때마침 헌강왕은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입으로 외울 정도였다 한다. 당연히 그 자신이 문필에 능하였고 문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래서 최치원이 귀국하자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즉각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원감(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院監)의 벼슬을 준다. 왕의 좌우에서 시종하며 문한(文翰)을 전담하고 문무(文武)의 권한을 총괄하도록 위임한 것이다.

    이에 최치원은 의 찬술을 명령받고 이를 짓는 데 골몰한다.

    그러나 헌강왕이 최치원을 만난 지 1년 만인 재위 12년(886) 7월5일에 갑자기 돌아가니 그 사이에 어느 비문 하나 완성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최후의 유명(遺命)이 된 을 우선 지어내서 정강왕 2년(887) 7월에 비석을 세우게 한다. 이것이 현재 쌍계사 안마당에 서 있는 국보 제47호 (제27회 도판 10)라는 것은 지난 호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남은 비문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開山祖; 산문을 처음 연 조사)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이 진성여왕 2년(888) 11월22일에 89세로 돌아간다. 경문왕과 헌강왕의 왕사(王師)였으므로 당연히 국가로부터 시호 추증과 탑비 건립의 예우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진성여왕은 낭혜화상이 돌아간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낭혜화상 제자들의 청에 따라 낭혜화상이라는 시호와 백월보광지탑이라는 탑호를 내리고 최치원에게 낭혜화상의 탑비문 찬술을 명령한다. 이에 최치원은 이 비문도 지어내게 되니 (도판 2)가 그것이다.

    이 비문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비문 내용에 이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제 이 비문을 비석에 새겨 세웠는지조차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비문 짓는 일을 명령받은 해에 최치원은 태산군(太山郡, 전북 태인) 태수로 나간다. 진성여왕의 난정을 견디다 못해 외직을 자원해 나간 듯한데, 이때 그의 사촌아우인 최승우(崔承祐)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한다.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 붙여 쓴 최승우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최승우는 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2년(890)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경복(景福) 2년(893)에 시랑(侍郞) 양섭(楊涉)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사륙집(四六集; 사륙변려체로 지은 문장을 모아놓은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에 쓰기를 호본집(本集)이라 하였다. 뒷날 견훤을 위해서 격서(檄書; 꾸짖어 따지는 글)를 지어 우리 태조(고려 태조)에게 보냈다.”

    유학한 지 3년 만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라면 나이도 상당하고 당나라 사정에도 꽤 밝았으리라 생각되니 혹시 최치원이 귀국할 때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귀국을 재촉하러 갔던 최서원(崔棲遠)이란 인물과 동일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최서원이 최치원을 영접하러 갔던 사실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권20의 ‘아우 서원에게 돈 주신 것을 사례하는 장문(謝賜弟棲遠錢狀)’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는 아룁니다. 아무의 사촌아우인 서원이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일을 영접하려고 드디어 신라국 입회사 녹사(新羅國 入淮使 錄事)의 관직명을 빌려서 큰 땅에 나왔다가 장차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어제 특별히 돈 30관을 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최서원은 멀리 안개 낀 물결을 건너오다가 풍랑(風浪)을 크게 만나 겨우 보잘것없는 목숨은 살아 남았으나 오직 빈 몸일 뿐이었습니다. 비록 뜻이 할미새처럼 간절하여 가만히 들에 있는 뜻을 사모하여(형제간에 서로 위급을 구해주어) 부끄러움을 기린다 하여도 빨리 달리는 말이 길 얻는 것을 기약하기 어려운 때를 당하면 갈대를 물고 다만 나란히 나는 것을 기뻐하며 나무를 띄워놓고 잃어버릴 걱정을 면하려 할 뿐입니다.

    이제 아무는 이미 사행(使行)을 받드는 영광을 누렸으니 곧 드디어 어버이를 편안케 하였는데 재물의 윤택한 이름은 실로 안팎을 꼭 맞게 해준다 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의 영광스러운 일은 모두 어르신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심정으로 은혜에 감사하여 뛸 듯이 기쁘고 공경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어떻든 최승우는 893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당나라에서 상당 기간 머물러 살면서 당나라 벼슬을 살았을 듯하나, 그에 관한 기록은 정사(正史)에서는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후백제로 가서 견훤을 돕다가 견훤이 망했기 때문이다.

    한편 최치원은 최승우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해에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 태수로 자리를 옮겨 이해에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길이 막히고 치안이 어지러워져서 비석을 세울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등극하여 견훤과 자웅을 겨루던 시기인 신라 경애왕 원년(924) 6월에야 세워진다. 이 얘기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해에 신라 조정은 병부시랑 김처회(金處會)를 납정절사(納旌節使)로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다가 바다에 빠져죽는 불행을 당한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서해안 군 태수로 있는 인물 중에서 다시 사신을 선발해 보낼 계획을 세우고 혜성군(城郡, 충남 당진군 면천)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이웃 고을인 부성군 태수 최치원을 하정사(賀正使)로 삼아 당에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길이 막히고 치안이 어지러워 물화의 유통이 순조롭지 않아 부득이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최치원과 최승우 사촌형제가 당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다음해인 진성여왕 8년(894) 2월에 국왕에게 시무(時務) 10여조(條)를 올려 정치의 기본 틀을 바로잡으려 한다. 진성여왕은 타당한 논리이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공으로 최치원에게 진골이 아닌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제6위 아찬(阿) 벼슬을 내린다.

    그러나 이미 고목이 되어 썩어가는 나무를 회생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해(895)에 궁예가 강릉을 차지하고 나서 한산주와 패서 일대를 차례로 복속시킨 다음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최치원은 차츰 신라 조정에 대한 환멸로 벼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듯하다.

    이해에 18세가 되는 또 다른 사촌아우인 최신지(崔愼之, 仁, 彦로 계속 이름을 바꿈. 878∼944년)를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진성여왕을 대신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이들의 국자감 입학과 장학 자금의 계속 지원을 간곡히 부탁하는 장문의 장계를 올려, 당나라 조정이 이들을 보호해주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에서 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동문선(東文選)’ 권47에 실려 있는 ‘숙위(宿衛) 학생과 수령(首領) 등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게 하는 장계(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신라국 당국은 숙위 학생과 수령을 뽑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게 하고 국자감(國子監; 대학)에 붙이어 학업을 닦게 하기를 청합니다. 삼가 인원 수와 성명을 갖추어 아뢰되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학생 여덟 사람(최신지 등), 대수령 여덟 사람(기탁 등), 소수령 두 사람(소은 등)입니다. (중략) 신은 지금 앞의 학생들을 뽑고 수령으로써 시중꾼에 충당하여 하정사(賀正使)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郞) 급찬(級餐) 김영(金穎, 845∼910년경)의 배편에 딸려 보냅니다. 대궐에 이르러 학업을 익히고 겸해서 숙위에 충당하게 하소서. 최신지(崔愼之) 등은 비록 재주가 미전(美箭; 아름다운 화살)에는 부끄럽지만 타고난 업은 좋은 활을 뒤이을 만하니 쓰면 움직이고 이로우면 가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문득 많이 배우는 것으로 귀함을 삼는데 어찌 예절을 멀리하겠습니까. 김곡(金鵠)은 죽은 해주현(海州縣) 자사(刺史) 김장(金裝)의 친아들인데 나면서부터 중국에 있어 양대를 지냈으니 가히 가업을 이어 가성(家聲; 집안의 명성, 집안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흥학(興學; 학교를 일으킴)을 먼저 할 일로 삼고 구현(求賢; 어진 이를 구함)이 임무라고 생각하여 책 살 돈은 이미 고루 조금씩 나눠주었습니다. 책 읽을 양식은 곧 가만히 큰 은혜를 바랍니다. 또 천리의 여행에 비용을 모으면 오히려 3개월분에도 힘에 겹습니다. 10년을 살아가면서 궁함을 구제함은 오직 구천(九天; 天子, 즉 황제를 상징하는 말)을 우러를 뿐입니다.

    다행히 당나라가 문덕(文德; 학문의 덕, 문교의 힘)을 널리 펼침을 만났으니 바라건대 종 칠 힘이 없는 것을 용서하시고 경쇠 칠 마음이 있는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시어 자석(磁石)이 바늘을 끌어가듯이 자비를 내리시고 시룻번이 시루에 생기듯 급함을 구해주십시오.

    특별히 홍려시(鴻寺; 외교를 담당하는 관청)에 선지(宣旨; 임금의 뜻)를 내리시어 지난 용기(龍紀) 3년(891) 하등극사(賀登極使) 판관 검교사부랑중(判官 檢校司部郞中) 최원(崔元)을 따라 입조했던 학생 최영(崔霙) 등의 사례에 따라 경조부(京兆府)로 하여금 달마다 글 읽을 양식을 지급하게 해주시고 겸해서 겨울과 봄에 시절 의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같은해 7월16일에는 (도판 3)를 지었으니 이 사실은 1966년 여름에 합천 해인사 부근의 3층 석탑 속에서 이 탑기가 새겨진 벽돌판이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최치원이 짓다. 당나라 19대 황제(昭宗)가 중흥(中興)하던 때에 전쟁과 흉년 두 가지 재앙이 서쪽(당)에서 멈추자 동쪽(신라)으로 와서 흉악한 중에 흉악한 것이 없는 곳이 없다. 주려 죽은 시체와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으니 해인사에 있던 별대덕(別大德; 승려의 지위) 승훈(僧訓)이 이를 슬퍼하였다.

    이에 도사(導師; 중생을 해탈로 이끌어 가는 법사)의 힘을 베풀어 시중(豕衆; 돼지처럼 욕심 많고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유인하니 각각 상수리 한 말씩을 희사하여 함께 3층 옥탑을 이루었다. 그 소원하는 간절한 뜻은 크게 말해서 나라를 보호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는다 하겠다. 이중에 나아가서 특별히 원통하게 비명횡사하여 지옥에 빠진 혼백들을 건져내었으니 제사에 화답하여 복을 받고 영원히 이곳에 있으라. 건녕(乾寧) 2년(895) 신월(申月, 7월) 기망(旣望, 16일)에 쓴다.”

    당시 사회의 비참한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이런 탑기를 남긴 것은 그의 친형인 현준(賢俊)대사가 해인사 승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41세 때인 897년 1월에는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伽倻山 海印寺 結界場記)’도 짓고 44세 때인 900년 섣달 그믐날에는 ‘해인사 선안주원벽기(海印寺 善安住院壁記)’도 짓는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최치원은 이 기간 중 어느 때에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둔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최치원이 국보 제8호인 (도판 4)의 비문을 지은 것도 895년에서 900년에 걸친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대체로 이 기간에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지어진 비문은 처럼 곧바로 비석에 새겨질 수 없었던 듯하다. 성주사 일대가 견훤의 판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효공왕 4년(900)에 견훤이 전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의 개국을 선포하였으니 이 무렵에 이미 성주사 일대는 견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라의 경문왕과 헌강왕의 왕사로 존숭받아 신라 왕도를 내왕하던 인물인 낭혜화상에 대한 후백제 의 감정이 좋을 리 없고 이런 분위기는 자연 그 탑비 건립을 생각할 수도 없게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낭혜화상은 후백제가 백제 멸망의 원흉으로 꼽고 있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이었으며 성주사 일대는 김춘추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세운 공로의 대가로 받은 봉토(封土; 제후로 봉하여 내준 땅)였음에랴!

    그래서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 은 ‘신라골품고(新羅骨品考)’라는 논문을 1922년에 발표하면서 건(建)·무(武)·순(詢) 자가 획을 빼놓고 쓴 것을 들어 고려 태조 왕건과 혜종 왕무(王武), 현종 왕순(王詢)의 이름자를 피휘(避諱; 임금이나 직계 조상 이름자를 피하여 쓰지 않음)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이 비석이 고려 현종 재위 기간인 1010년에서 1031년 사이에 세워졌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인 금석학자인 갈성말치(葛城末治)는 비문을 정밀 조사한 뒤 건자와 순자에 결획(缺劃; 획을 빼놓고 씀)이 없음을 확인하면서 이 비문을 쓴 최인연(崔仁)의 관직명이 창원 (도판 5)에서 지은이로 등장하는 최인연의 관직명과 동일한 것을 들어 (도판 6)가 세워지는 경애왕 원년(924)경에 이 비석도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1935년에 펴낸 책인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 실린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갈성말치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데 그의 확인 결과 건(建)자와 순(詢)자에는 결획이 없지만 무(武)자와 경(慶)과 민(民)의 세 자에 결획이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밝히지 못한 채 혹시 중국 황제들의 이름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추측만 남겨놓고 있다.

    필자가 정밀한 탁본을 통해 재확인해봐도 갈성씨의 확인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갈성씨의 주장대로 924년 건립을 전제로 생각할 때 혹시 후백제왕 견훤과 관련된 존호(尊號; 제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올리는 이름)를 피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어떻든 이 낭혜화상 비문은 첫이름이 최신지(崔愼之)였다가 그 다음에 최인연으로 이름을 바꾼 최치원의 사촌아우 최인연이 써낸 것이다. 이 최인연이 경순왕 8년(935) 11월3일에 고려에 항복하는 경순왕을 따라와 고려 조정에 귀순한 뒤에는 최언위(崔彦)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10여 개의 비문을 더 써냈다.

    그가 지은 것이 확실한 비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비석이 모두 11개이고 그가 쓴 것이 하나다. 그런데 이를 모아 살펴보면 고려에 귀순하기 이전 신라의 관직명만 보이는 시기에는 모두 최인연이란 이름을 쓰고 있고 고려에 귀순한 이후 고려의 관직을 받고 나서는 한결같이 최언위란 이름을 쓰고 있다.

    924년에 지은 영월 에서는, 본문 중에는 최인연이라 쓰고 앞에 지은이 이름에는 최언위라 표기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이 비석을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우기 때문에 쓰고 새기는 이들이 지은이 이름만 당시 것으로 바꾸고 본문 중의 이름은 미처 바꾸지 못한 데서 기인한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오히려 최인연과 최언위가 동일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어 이 비석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높여 놓았다. 어떻든 낭혜화상 비문을 쓰면서 최인연은 자신의 이름을 비문 맨 끝에 이렇게 써 놓았다.

    “사촌아우 조청대부 전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신최인연이 교지를 받들어 쓴다(從弟 朝請大夫 前守執事侍郞 賜紫金魚袋 臣崔仁奉敎書).”

    비문을 지은 사람 이름 바로 다음 줄에 쓴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나란히 쓰는 것이 상례인데, 이 낭혜화상비에서만 쓴 사람의 이름을 맨 아래로 돌리고 있다. 최인연이 감히 존경하는 사촌형님인 최치원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쓴 듯하니 아마도 이 비문을 옮겨 쓸 때 이미 최치원은 돌아가고 없었던 모양이다. 이 비문이 언제쯤 옮겨 쓰였는지를 추정하려면 최인연이 언제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언제 귀국하는지를 먼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최치원이 최신지의 당나라 국학 입학과 장학금 지급을 위해 진성여왕을 대신해서 올린 장계가 진성여왕 9년(895)의 일이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 붙여 지은 최언위전이나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에 따르면 최언위가 헌강왕 11년(885)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최신지를 떠나 보내면서 지어 보낸 최치원의 ‘숙위 학생과 수령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가게 하는 장계’에서 이미 용기 3년(891)의 예에 따라 최신지 등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달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 기록들에는 10년 정도의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최신지가 18세에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42세까지 그 혼란한 당나라에 머물러 있을 리도 없다. 당나라는 907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신지가 42세 때인 909년에 돌아왔다는 것을 32세로 바로잡는다면 최신지는 895년에 18세로 당나라 유학을 떠난 것이어서 나이와 유학을 가고 오는 사실이 맞아떨어진다.

    최언위가 77세까지 살았다는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의 내용도 67세로 10년을 내려야 현존하는 비문 기록들과 부합한다. 법경(法鏡)대사 현휘(玄暉, 879∼941년)의 탑비문인 충주 은 최언위가 돌아가기 바로 전해인 태조 26년(943)에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76세 노인이라면 이런 비문을 짓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고려에 와서 지은 대부분의 비문이 940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나이 칠십의 노인이라면 가능하겠는가. 더구나 그가 고려에 오자 고려 태조는 일체의 문한(文翰)을 그에게 맡겼다 하였는데 칠십 노인이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최언위전에서 산출할 수 있는 나이에서 10년을 내리면 878년생으로 고려 태조보다 한 살이 어리다. 돌아가는 것도 태조가 돌아간 다음해인 혜종 2년(944) 12월이었다. 최언위의 생몰년을 대체로 이와 같이 바로잡아놓고 ‘고려사’ 권92 최언위전을 그에 맞춰 옮겨 보겠다.

    “최언위의 첫 이름은 신지(愼之)였다. 경주 사람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온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했다. 신라 말에 나이 18세로 유학하려고 당나라에 들어가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그때에 발해 재상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도 같이 급제하였는데 오소도가 당나라에 왔다가 그 아들 이름이 언위 아래 있는 것을 보고 표문(表文)으로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신이 예전에 조정에 들어와 급제함에 이름이 이동(李同; 신라 출신 급제자)의 위에 있었으니 이제 신의 아들 광찬도 마땅히 언위의 위에 올려야 합니다.’ 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고 풍부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32세(42세를 바로잡음)에 비로소 돌아오니 신라는 집사시랑 서서원학사(執事侍郞 瑞書院學士)로 삼았다.

    태조가 개국(開國)함에 이르러 가족을 끌고 오니 명하여 태자 사부(師傅)를 삼고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기었다. 궁전과 사원의 액호(額號; 앞에 내건 이름)를 모두 지었고 귀족들이 모두 귀의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벼슬은 대상 원봉성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 元鳳省大學士 翰林院令 平章事)에 이르렀다. 혜종 원년(944)에 돌아가니 나이 67세(77세를 바로잡음)였다. 부음을 듣고 왕이 몹시 슬퍼하며 정광(政匡)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여기서 보면 최언위가 마치 고려 태조가 개국(918)한 직후에 귀부해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현존한 선사들의 탑비를 통해 보면 고려 벼슬을 받은 다음 지은 것은 모두 신라가 항복한 935년 이후에 해당하니, 이 내용 역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최치원의 행장을 추적해 보면 최치원이 남긴 글 중에 연기(年紀)가 분명한 것으로 가장 늦은 것이 천우(天佑) 5년(908) 무진 10월에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 壽昌郡 護國城 八角燈樓記)’(‘동문선’ 권64에 실림)다. 따라서 최치원이 908년 겨울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가 최치원의 나이 52세 때인데 이후에 지은 문장으로 연기가 분명한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치원이 살아 있었다 해도 최인연이 귀국하여 신라 조정에서 서서원 학사가 되어 문한(文翰)을 전담하자 최치원은 더 이상 공식적인 저술을 맡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이 무렵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미 최승우는 귀국하여 후백제에 귀부했으니 이제는 최인연이 신라 조정의 공식 문필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의 일가 종친으로 생전에 스승으로 모셨던 낭공(朗空) 행적(行寂, 832∼916년)선사가 신덕왕 5년(916)에 입멸하여 경명왕 원년(917)에 시호와 탑호가 내려지고 탑비 찬술의 왕명이 그에게 떨어지자 이를 가장 먼저 지어내는 듯하다. 이 무렵에 최치원이 지은 낭혜화상탑비문을 써내면서 그 문투를 익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인연의 문투가 최치원과 거의 방불하여 일종의 최가풍(崔家風)을 이루어 놓았다.

    낭공선사 행적은 속성이 최(崔)씨이고 경만(京萬) 하남(河南)사람이라 했으니 지금의 경남 하동 출신이다. 최치원의 일족이 이곳 하동 일대에도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주 금마(익산) 출신의 최씨였던 진감선사 혜소가 하동 지리산 쌍계사에 터를 잡았고 최치원이 그의 비문을 제일 먼저 지어 손수 써서 세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최치원이 한때 천령군(天嶺郡, 경남 함양) 태수를 지냈다는 사실도 이와 연관 있는 얘기일 것이다.

    낭공선사의 행적을 추적하면 최치원과 발걸음을 같이했을 가능성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치원보다 25세가 많은 아버지뻘이지만 당나라 유학은 오히려 최치원보다 2년이 뒤져 870년이고 돌아오는 것은 같은해인 885년이라 하였다. 최치원이 금의환향하는 배에 동승해서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최치원이 그를 존숭하게 되고 그런 인연이 최인연으로 하여금 문인(門人)을 자처하게 하였을 것 같다.

    낭공대사는 사미 시절에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하였으니 해인사 승려였던 최치원의 친형 현준대사와의 인연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강릉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법을 잇고 다시 당나라에 가서 청원(靑原) 행사(行思, ?∼740년)의 법현손(法玄孫)인 석상(石霜) 경저(慶諸, 807∼888년)화상의 인가를 받고 돌아온 인물이었다. 귀국해서는 다시 범일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시봉하다가 889년 범일대사가 열반에 들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삭주(朔州) 건자암(建子庵)에 머문다. 그러나 894년 궁예가 강릉을 점령하자 난을 피해 왕도로 올라갔다. 이후 강릉 일대가 안정되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900년경에 다시 강릉으로 내려갔다가 효공왕 10년(906) 9월 초에 효공왕의 초빙으로 다시 왕도로 올라와 국사의 예우를 받는다.

    여기서 김해(金海) 지부(知府) 소율희(蘇律熙; 진경대사 비문에서는 金律熙라 표기하고 있으니 우리말 쇠유리를 한자 표기하면서 이런 차이가 나게 되었을 것이다. 소리와 뜻 중 어느 것을 취하는가에 따라 생긴 차이임)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907년에 김해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각처에서 찾아온 선지식들과 함께 지부 소율희의 각별한 외호를 받으며 8년을 보내고 신덕왕 4년(915) 봄에 왕의 초빙을 받아 다시 신라 왕경으로 올라와서 왕사가 되어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른다.

    이때 여제자인 명요(明瑤)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 경북 영일군 장기면 방산리에 터만 남아 있음)를 기증하여 이곳을 열반처로 삼고 머물다가 신덕왕 5년(916) 2월12일에 이곳에서 85세로 열반한다. 그 다음해(917) 11월 중에 석실에 이장하고 신종(信宗)선사 등 제자 500여 명이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워주기를 조정에 청하니,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한다.

    그리고 최인연에게 탑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을 내린다. 이에 최인연은 대사에게 일찍이 자애로운 가르침을 많이 받았고 항상 일가 어른(宗盟)으로 돌봐주었으므로 이에 보답하기 위해 정성를 다해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비석은 세워지지 못하다가 37년 만인 고려 광종 5년(954) 7월15일에 경북 봉화군 명호면 태자리 태자사에 김생(金生) 글씨의 집자비로 세워진다. 이것이 일제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 놓은 (도판 7)다. 그런데 이때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이 비석이 세워지는 내력을 비석 뒷면에 새겨 놓는다. 그중에 비문을 지은 최인연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였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인연이라는 이는 진한(辰韓)의 번성한 집안 사람이다. 세상에서 일컫는 바 일대(一代; 한 세대) 삼최(三崔; 세 최씨)가 금방(金榜; 문과 급제 방목은 황금 칠판에 썼기 때문에 문과를 금방이라 함)으로 급제하고 돌아왔다 함은 최치원과 최인연과 최승우를 말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학문은 바다와 산악을 두를 만하니 읽은 책은 다섯 수레에 두 수레를 더 보태었으며, 재주는 바람과 구름을 감쌀 만하니 7보시(七步詩;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어내는 시)에서 3보(三步; 세 걸음)를 덜어내었다. 실로 군자국(君子國; 우리나라를 가리킴) 중의 군자이며 대인향(大人鄕; 역시 우리나라를 가리킴) 중의 대인이라 하겠다. 이는 혹시 계수나무 속의 꽃을 꺾어 향풍(香風)을 상국(上國; 중국)에 부채질해 보내거나 그물에서 고기를 얻어 동향(東鄕;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주는 것인가. 대사의 무거운 은혜를 받들었기에 대사의 위대한 비문을 지었다.(其仁者, 辰韓茂族人也. 世所謂一代三崔金榜題廻, 曰崔致遠 曰崔仁 曰崔承祐, 於中一人也. 學圍海岳, 加二車於五車, 才包風雲, 除三步於七步. 實君子國之君子, 大人鄕之大人. 是或折桂中花, 扇香風於上國, 得魚羅域, 曜榮色於東鄕. 承大師重席之恩, 撰大師鴻碑之記)”

    ‘일대삼최금방제회(一代三崔金榜題廻)’의 출처가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인연이 최초로 지었다고 생각되는 의 비문은 바로 비석에 새겨지지 못하고 37년이나 지난 뒤에 새겨졌다. 그래서 글쓴이의 직함을 표현하는 데서 세울 당시의 기준이 첨가된 느낌이 짙다. 이때는 최인연이 최언위라는 이름으로 고려에서 대상(大相)과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한림학사(翰林學士)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고 이미 돌아가고 난 뒤였다. 그래서 직함을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원사 사자금어대(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院事 賜紫金魚袋)로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923년 4월24일에 돌아가고 924년 4월1일에 비석이 세워져서 그 사이에 비문이 지어졌던 진경(眞鏡)대사 심희(審希, 855∼923년)의 창원 에서는 다만 조청대부 전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朝請大夫 前守執事侍郞 賜紫金魚袋)라는 직함만을 써 놓았다. 이것이 당시 최인연이 가진 직함의 전부였을 듯하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직함을 최치원이 지은 의 비문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주사 낭혜화상비를 최인연이 써서 세운 것도 봉림사 진경대사비가 세워진 924년 전후한 시기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더구나 사자산문의 개산조인 징효(澄曉)대사 절중(折中, 826∼900년)의 비문도 924년에 최인연이 왕명을 받들어 짓는데 여기에 쓴 직함 역시 이와 동일함에랴! 그렇다면 성주사 낭혜화상탑비도 92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 최치원이 893년에 지은 도 바로 이해인 용덕(龍德) 4년(924) 갑신(甲申) 6월에 세워지고 있다.

    고려 태조 천수(天授) 7년, 후백제 정개(正開) 24년, 신라 경애왕 원년에 해당하는 이해는 아마 후삼국의 판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고려와 후백제가 호각지세(互角之勢; 소의 양쪽 뿔이 서로 같아 우열을 가릴 수 없으므로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일컫는 말)를 이루게 되자 서로 문화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그 동안 미황지사(未遑之事; 꼭 해야 할 일이나 겨를이 없어 미뤄두었던 일)로 남겨둔 선사들의 탑비 건립을 이와 같이 경쟁적으로 진행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후삼국 판도 안의 모든 곳에서 같은해에 이런 불사(佛事; 불가에서 시행하는 모든 일)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다. 후삼국 각처에 분산된 선사들이 통문을 돌려 이런 행사를 동시에 거행하도록 준비했을 수도 있다. 그럴 만한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때 세워지는 탑비는 살기(殺氣) 등등한 전시(戰時) 풍조가 배어날 수밖에 없고 상호 대결의 과장과 허세가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924년에 세워진 것이 확실한 보물 제63호 (도판 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탑비는 언뜻 보아도 과장이 심하다. 귀부에서 용머리 형태의 거북 머리가 몸체에 비해 너무 커서 가분수(假分數; 분자가 분모보다 큰 분수) 형태임을 간파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입을 너무 크게 벌리게 하고 앞이빨을 지나치게 크게 표현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양쪽 뺨 뒤로 뻗친 수염이나 지느러미도 너무 과장하였고 눈과 코도 할 수 있는 한 크게 표현하였다. 그러자니 가분수 형태의 머리인데도 이를 다 수용해 내지 못해 오히려 정수리 부분을 밋밋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결과는 맥빠진 허세의 표출로 나타나 너무 벌린 입 속에서 여의주(如意珠)가 떨어질까 걱정되고 지나치게 큰 눈은 겁먹은 느낌을 준다.

    네 발의 발가락도 껍질 주름살을 너무 세밀하게 표현하여 벌레의 몸통처럼 만들어 놓았다. 당연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등판의 귀갑무늬도 너무 자잘하며 그 둘레의 꽃구름무늬도 머리 크기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섬세하다.

    비신꽂이에서는 사방 표면에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가득 새겨 넣었는데 윗면의 뒤집어진 연꽃무늬와 함께 과도한 장식성의 표출이라는 지적을 면치 못할 듯하다. 더구나 비신(碑身; 비석의 몸체) 양쪽 측면에 가득 채워진 운룡문(雲龍文; 구름 속에 잠긴 용무늬) 장식에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수(首; 이무기나 용으로 장식한 비석 머릿돌)도 과장과 장식으로 허세를 부려 놓았다. 우선 네모 반듯하게 아랫단을 다듬고 그 아래에 위로 핀 연꽃잎을 둘러 아랫부분을 산뜻하게 정리한 다음 구름 속에 잠긴 두 마리의 용이 각각 정면에서 여의주를 다투게 하고 그 아래에 비석의 이름을 전서(篆書)로 써넣는 네모진 전액판(篆額板)을 설치했다. 그리고 좌우 측면에도 각각 두 마리의 용을 새겼는데 앞뒤 모서리에 물매처럼 머리를 내려뜨리고 있다.

    비석 글씨(도판 5)는 문하승인 행기(幸期)가 썼다고 했는데 안진경(顔眞卿, 709∼785년) 장년기의 대표적 글씨인 (도판 8)의 서체와 방불하다. 장중한 필세를 자랑하기 위해 구사한 의도적인 필법이라 하겠다.

    이 탑비는 선종을 극진하게 외호하며 신라 판도 안에서 독립적인 군사권을 유지하고 있던 김해부 지사 소율희가 세운 것이다. 같은해에 후백제에서 세운 탑비가 국보 제8호인 (도판 4)다. 이 비석에서도 살벌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에 비해서 강건하고 대담한 느낌이 더 든다.

    귀부의 파손이 심하여 자세하게 관찰할 수는 없지만 귀부의 머리도 가분수가 아니고 용머리 형태의 거북 머리는 두 귀와 정수리의 뿔이 높이 솟아나 맥빠진 형상이 아니다. 비신도 넓어 안정감이 있고 이수도 과장 없이 묵직한 모습이다. 구름에 잠긴 두 마리 용이 전액판을 사이에 두고 기세를 다투는 모습을 전면에 조각하였는데 용머리 하나가 전액판 위 중앙으로 내려와서 여의주를 대신하고 있다.

    측면에도 각각 두 마리의 용머리가 아래로 내려와 있다. 용과 구름 조각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이루어졌으나 보물 제360호인 제천 (제27회 도판 6)의 이수 모양으로 입체성이 강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김이 깊고 분명하여 과단성 있는 기개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를 주도했던 견훤의 성품이 바로 이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최인연이 쓴 의 글씨(도판 2)는 최치원이 직접 쓴 하동 의 글씨(제 27회 도판 11)와 방불하여 최가체(崔家體)의 동질성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조금 더 규각(圭角; 모서리)이 예리하여 구양순(歐陽詢, 557~641년)의 아들 구양통(歐陽通) 글씨와 흡사한 느낌이 든다. 부형의 글씨를 의식한데서 온 부자연스러움이 나타내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서서 견훤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보물 제34호인 (도판 9)를 세운 듯하다. 수철화상(817∼893년)은 속성이 김(金)씨인데 진골 출신으로 그 증조부가 소판(蘇判; 신라 제3위 관등)이었다 한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출가했고 흥덕왕 10년(835)경에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洪陟)선사에게 입문하여 그 법통을 이은 인물이다.

    경문왕 7년(867)에 경문왕의 초청으로 왕도로 가서 교(敎)와 선(禪)의 차이를 묻는 경문왕에게 명쾌한 대답을 하여 경문왕으로 하여금 선종을 이해하게 하고 왕사가 되었다 한다. 이어서 헌강왕도 왕사로 대접하여 지리산 심원사(深源寺; 실상사 부근에 있었을 듯)에 머물게 했는데 견훤이 진성여왕 6년(892)에 이 일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다.

    공교롭게도 수철화상은 바로 그 다음해인 진성여왕 7년(893)에 이곳 심원사에서 77세로 열반에 든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연히 신라 조정에 시호와 탑명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고 진성여왕은 수철(秀澈)화상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견훤의 판도 안에서 이 시기에 수철화상의 탑과 탑비를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반신라적인 후백제 초창의 광기(狂氣)가 이를 용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 기간이 지나 실상산문이 후백제 통치에 필요하다는 판단이 선 이후에야 이의 건립을 허락하고 후원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후백제가 정식으로 개국을 선포한 정개(正開) 원년(900)으로부터 적어도 10년이 지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 탑비 양식이 양식보다는 앞서는 느낌이니 910년에서 924년 사이에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남원 실상사 조계암(曹溪庵) 터에 남아 있는 보물 제35호인 (도판 10)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상사 편운(片雲) 부도. 개창조 홍척(洪陟)의 제자이며 안봉(安峯)의 개창조인 편운화상 부도. 정개 10년 경오세에 세우다.”

    정개(正開)는 견훤이 900년에 후백제를 세울 때 연호이니 정개 10년은 910년에 해당하는데 이해가 경오년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수철화상의 법형제인 편운화상이 정개 10년에 돌아가자 바로 이 부도를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당이나 후량의 연호를 쓰지 않고 후백제 연호를 떳떳하게 쓴 것을 보면 이즈음 실상산문에서는 후백제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에 적극 협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홍척선사의 상수 제자였던 수철화상의 사리탑과 탑비의 건립도 이후에 견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건립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견훤의 측근이 된 최승우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낭혜화상 탑비 건립을 추진한 것도 최승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가 존경하는 사촌형님인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었으니 당연히 이를 세우고자 했을 터인데, 자신은 신라의 적국인 후백제에 벼슬 살고 있으므로 직접 쓰지 못하고 신라 조정에서 벼슬 살고 있던 사촌아우인 최인연에게 이를 쓰게 해서 세웠을 것이다. 이때 아마 최인연은 어떤 문제(최승우 문제일 수도 있다) 때문에 현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던 듯, 벼슬 이름에 전수집사시랑(前守執事侍郞)을 일컫고 있을 뿐이다. 이것조차 최승우의 간여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는 특이하게도 귀부가 없다. 네모진 비신꽂이 위에 바로 비신을 세운 형식이다. 그러니 보통 선사들의 비석 형식에서 거북을 생략하고 비신꽂이 이상만을 세워놓은 형태인 셈이다. 물론 크고 넓은 비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비신꽂이가 확대되어야 하므로 뒤집어 놓은 연꽃잎도 커지고 그 아래 안상 무늬도 커졌다.

    그 밑으로는 네모진 지대석만 놓여 있을 뿐이다. 형식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혁신적인 의장(意匠)이다. 과연 후백제 초기의 참신한 기상을 대변한 미술양식이라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장식성을 배제하고 실용적 효용성을 배가시키려 한 예술 의지가 돋보이니 이것이 당시 견훤의 건국이념이었던 듯하다. 그러니 비신도 넓고 낮아서 안정된 비례를 찾으려 하였고 이수도 낮고 넓은 긴 네모꼴에 가까운 단순 소박한 형태를 취하였다.

    그 전면에는 정면 중앙의 전액판을 사이에 두고 구름에 잠긴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거의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에 가까울 만큼 낮은 새김법을 구사하면서 용들의 몸통을 구름 속에 가려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구름무늬만 가득 채우는 단순성을 보이고 있다. 의 화려한 장식성과는 대조되는 단순·소박성이다. 이것이 당시 노쇠의 극치에 이른 신라문화와 혁신의 첨단을 달리는 후백제 문화의 차이점이었을 듯하다.

    가야 왕손 세력의 선종 보호

    진경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는 신김씨(新金氏), 즉 김해 김씨로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의 먼 후손이었다 한다. 그는 경문왕 3년(863)에 9세로 경기도 여주 혜목산(慧目山)의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787∼868년)에게 출가하였다.

    원감선사는 일찍이 헌덕왕 16년(824)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강서(江西) 도일(道一, 709∼788년)의 제자인 장경(章敬) 회휘(懷暉, 754∼829년)의 인가를 받고 희강왕 2년(837) 9월12일에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남악(南岳;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러 살면서 민애왕과 신무왕·문성왕·헌강왕의 귀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수철화상보다 30년 선배이나 실상사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함께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수철화상이 19세로 835년경에 실상사의 홍척선사에게 입문하기 때문이다. 원감선사는 실상사에서 10년을 머문 다음 문성왕 8년(846)에 여주 혜목산으로 옮겨 초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861년경에 고달사(高達寺)를 짓고 혜목산문(慧目山門)을 개설한다.

    이 직후에 진경대사 심희가 9세 동자로 출가해 왔던 것이다. 심희는 14세 때 82세로 돌아가는 원감선사로부터 임종시에 인가를 얻고 산문의 책임을 부탁받는다. 그래서 원감선사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자부심으로 당나라 유학을 거부하고 전남 강진 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주석하는 등 수행을 계속하여 30대에 벌써 명성을 크게 떨친다.

    그리고 진성여왕(재위 887∼896년)이 초빙해도 응하지 않는 기개를 보이다가 김해부(金海府) 진례성(進禮城, 경남 창원) 제군사(諸軍事) 김율희(金律熙, 蘇律熙와 동일인으로 가야 왕족의 후손인 쇠유리의 한자 표기일 것이다)가 선종을 보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의 외호를 받아 이곳 봉림사에 머물면서 봉림산문을 개설한다. 이때 김해부 진례성 제군사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도 정성으로 외호했다 하는데 이들은 모두 가야 왕손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호족이었을 것이다.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는 다시 경명왕 2년(918) 12월4일에 경명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 왕도로 올라가 왕사가 된 다음 법응대사(法膺大師) 존호를 받고 돌아오는데, 이해 6월14일에 고려 태조 왕건이 등극하였다. 신라 조정은 아마 고려 태조와 관계가 깊은 혜목산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두기 위해 이런 포석을 깔았을 것이다.

    심희는 곧 창원 봉림사로 돌아와 경명왕 7년(923) 4월24일에 70세로 봉림사 봉림선당에서 열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에서는 곧바로 소현승(昭玄僧; 불교를 관리하는 관부의 승려) 영회(榮會)법사를 보내 조문하고 37일 만에 진경(眞鏡)대사 시호와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 보낸다. 다른 어떤 선사들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는 신속한 조치였다. 당시 신라 조정이 처해 있던 절박한 상황과 진경대사가 선종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맞물려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해의 실력자이며 진경대사의 일족이자 대외호자인 김율희는 막대한 노동력과 재력을 기울여 사리탑과 그 탑비를 세우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돌아간 지 1년 만인 924년 4월1일에 이와 같은 탑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그 규모도 장대 화려함을 자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천년 신라 왕국이 망국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화려한 안목만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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