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3김정치 종식되고, 이념정치 확립된다

‘게임이론’으로 본 DJ의 당 총재직 사퇴

  • 모종린 <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국제정치경제학) >

    입력2004-11-15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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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5 재보선 패배 후 김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는 선진적인 당권 교체를 위한 전주곡이 돼야 한다. 10·25 재보선 결과는 3김 정치가 쇠퇴하고 이념 중심의 양당구조가 확립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10·25 재보선 패배로 다시 불거진 민주당 내분이 11월8일 김대중 대통령의 당총재직 사퇴로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의 정국 향방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민주당 분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누구도 총재 사임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선택을 예측하지 못했고, 그 결정과정과 배경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결정은 과거 사례와 비교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이다. 첫째, 1987년 민주화 이후 집권당 당권은 예외 없이 대선 후보자가 결정된 이후 그 후보자에게 이양되어 왔다. 그리고 이양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후보자와 현직 대통령은 이양시기와 조건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후계자의 입장은 조기 당권 이양이었고, 현직 총재는 레임덕을 우려해 가능하면 이양시기를 연기하고자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후보가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된 1992년 5월29일로부터 88일 지난 8월25일이 되어서야 총재직을 이양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후보에게 당권을 물려준 시기는 1997년 7월21일 후보자 선출일로부터 71일 지난 9월30일이었다. 그나마 대선 전에 후보자와 현직 총재와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완만했던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의 경우도 후보자 선출(6월10일)부터 당권이양(7월11일)까지 31일이 걸렸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은 차기대선 후보의 직접적인 압력이 없는 상황에서 당권을 이양한 것이다.

    과거와 다른 김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한 뒤에 평당원으로 남기로 한 결정이 이번 사건이 이례적인 둘째 이유다. 지금까지는 전임 총재를 명예총재로 위촉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모두 당권이양 이후 궁극적으로 당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렸지만 총재직을 물려준 직후에는 명예총재라는 신분을 유지했다. 명예총재는 실권이 없다지만, 그 같은 예우는 나름대로 리더십의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당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내분에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평당원 신분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지만,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대통령이 민주당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 사퇴를 결정한 후 지나치게 중립적 정국운영을 강조한다는 점이 이번 사태를 의아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대통령의 당직과 관계없이 다음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집권당은 민주당이고, 민주당이 이에 따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김대통령이 총재직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정부와 민주당을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은 아직도 민주당원의 신분이다. 민주당원인 김대중 대통령이 중립적 정부를 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노태우 정부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중립내각을 선언했지만 이는 노대통령이 이미 당적을 떠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과거와 같이 총재 사퇴가 탈당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마지막 특징이다. 한국 권력의 속성상 일단 대선 후보가 당권을 장악하면 전임자가 당에 남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후임자에게 탈당을 공개적으로 강요받았고,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도 형식적으로는 자진탈당 이었지만 실제로는 김영삼 후보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발생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적어도 대선 후보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탈당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 사퇴 후에도 민주당의 실질적 오너로 당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당총재 사퇴 결정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과거 경험에 비해 너무도 이례적이기 때문에 대통령 의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저의에 대해 그동안에 제기된 가설은 크게 국가적, 개인적, 정략적 포석으로 나눌 수 있다. 김대통령이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1년3개월 남은 임기 동안 경제회생, 남북관계, 월드컵 개최, 지방선거 및 대선 등 시급한 국정과제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김대통령 특유의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요인도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가 개인적인 중립을 통해 한편으로는 당내 경선 및 대선에서 공정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주당 내부의 쇄신압력을 약화시키면서 다음 정권의 정치보복을 방지하고자 하는 포석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즉, 이번 결정이 김대통령의 개인적인 정치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김대통령이 정권 재창출 등 대선 후 정치상황에 미련이 없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고령인 점을 감안할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가설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총재에서 사퇴한 이후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하는 부분은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략적 의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총재직에서 사퇴했고, 1992년 대선 후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두 번 다 총재직으로 복귀하거나 신당 창당으로 당권을 쟁취했던 전력이 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김대통령이 민주당의 당권에 의연하겠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김대통령의 신당 창당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략적 포석과 관련된 둘째 가설은 김대통령이 초당적인 정국운영의 명분을 내세워 국회와 정당의 정당한 견제를 무시하고 대(對)국민 직접정치를 추진한다는 가설이다. 현정부가 올해 초부터 강한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 후 꾸준히 대국민 직접정치를 시도해 왔기 때문에 이 같은 의심을 받고 있다. 특히 야당은 정부가 이 같은 탈(脫)정당 정치를 국민적 합의가 미약한 정책의 추진과 정권 재창출의 수단으로 동원할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셋째 정략적 가설은 차기 대선 후보를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배려라는 것이다. 조기에 당권을 차기 후보군(群)에 이양하여 그들이 김대통령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과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된 적은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현정부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크고, 또 현재는 누가 대권 후보자가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높은 가설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렇게 여러 가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국민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김대통령의 순수한 의도를 지나치게 배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일단 대통령의 공식입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앞으로의 진행과정을 관망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라고 본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략적 시나리오에 따라 급격한 정치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번 사태로 인해 정반대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대통령은 레임덕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민주당의 주도권이 대선 주자들에게로 급속히 옮겨진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와 같은 부정적 상황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총재직을 떠났다고 해도 민주당은 아직 집권당이기 때문에 민주당과의 당정협의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과거와는 다른 수평적인 관계에 기초한 민주적 리더십으로 민주당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한편, 국정의 공정한 운영은 대통령의 당적과 관계가 없는 대통령 본연의 의무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초당적 중립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민주당의 첫번째 리더십 교체

    무엇보다도 김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한국 정당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마무리 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10·25 재보선과 민주당 내부갈등을 정치발전 기준에서 평가하면, 가장 긍정적인 측면으로 민주당에서 처음으로 리더십 교체의 가능성이 열린 사실과 3김 정치의 영향력이 쇠퇴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순조로운 민주당의 당권교체는 민주당이 전근대적인 1인중심 정치에서 벗어나 리더십 교체 이후에도 정당일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3김 정치의 후퇴는, 현재 진행중에 있는 정당의 이념화가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이념에 바탕을 둔 양당 구조가 형성되는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정당 발전수준을 평가하는 데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특정 개인의 인맥에 대한 의존 정도다. 1인 중심은 특정 개인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그 개인이 떠나면 당 자체가 정체성을 상실한다. 이러한 정당에서는 리더십 교체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둘째 기준이 정당 리더십 교체의 정례화와 제도화다. 여기에서는 후계자 선출 방식과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에 따라 정당 발전수준이 나눠진다. 상대적으로 발전 수준이 낮은 정당에서는 현직 지도자가 후계자를 지명하고, 선진 정당에서는 자유경선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이 되어서야 여당 대선 후보자가 처음으로 자유경선을 통해 선출됐다.

    후계자가 정해진 뒤에 나타나는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가 정당 발전수준을 가르는 또 하나의 변수다. 전임자·후임자 관계 유형은 크게 당권이양 과정에서 당이 분리되는 정당해체형, 전임자가 후임자에 의해 축출되는 전임자 단절형, 그리고 전임자의 인맥과 정책이 상당부분 유지되는 네트워크 유지형이 있다. 리더십 교체의 제도화 기준에서 가장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도 아직 전임자 단절형 당권이양 패턴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기준이 정당 지배구조다. 우선, 정당지도자에 대한 책임 추궁이 가능하고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수의 당원이 지도자 선출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어느 정당도 이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로 민주당도 1인 중심의 정당에서 당권의 교체가 가능한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경쟁 정당인 한나라당이 벌써 세 번에 걸친 당권 교체를 통해 사당(私黨)의 체질을 대폭 정리한 것에 비하면 때늦은 감도 있지만, 민주당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수평적 당권교체를 이루어야 한다.

    한국 정당정치에서 당권교체의 정례화와 제도화가 시급한 이유는 그것이 없이는 여야 사이 상생(相生)의 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생의 정치는 국민적 요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당들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당들이 서로 협력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여야간의 상호불신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호불신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첫째가 불신의 원인이 상대방 개인이나 그가 표방하는 입장의 도덕성에 있는 경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그와 타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당은 이 같은 행동 유형에 예외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국의 야당들이 여당과 협력하기를 거부한 이유도 여당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의 둘째 유형은 상대방의 평판에 대한 불신이다. 협력은 합의된 사항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이 실제로 지켜진다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약속을 위반한 전력이 있는 사람과는 협력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의 정당들이 서로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면, 서로의 평판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 듯하다.

    불신의 마지막 형태가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불신이다. 상대방이 나와 협력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유리한 것을 안다면, 나는 그를 합리적인 기준에서 불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측이 합리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불신하면 협력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를 한국 정당정치에 적용하면, 한국에서 상생의 정치가 어려운 이유는 상대방이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당들의 기대에 합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의 정당들이 왜 서로를 불신하는 것이 합리적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 정당이 합리적 이익계산을 바탕으로 협력을 포기하는 배경에는 지나치게 단기간인 정당 수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거래관계와 마찬가지로 정당의 협력도 서로 거래가 반복되면 될수록 자율적 협력 가능성이 높아진다. 앞으로 거래를 계속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과 협력을 하기 쉽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친지나 동창생에게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한번 스쳐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1인 중심의 한국 정당은 그 지도자의 정치 수명 이상의 수명을 가질 수가 없다.

    이처럼 한국 정당들은 상대방과 지속적으로 거래할 가능성을 높지 않게 평가해 협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이 본 민주당의 수명을 평가해 보자.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협력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의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즉, 지금 한나라당이 민주당에 협조해 주면,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야만 현재의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민주당이 야당이 되어서 한나라당을 도울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은 한나라당의 협조로 혜택을 받을 민주당 지도층이 미래에, 즉 2003년 이후 제일 야당으로서의 민주당을 이끌 확률에 달려 있다.

    만약 민주당의 현재 구도가 유지되고 2002년 선거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를 은퇴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정치의 속성상 김대중 대통령이 지목하게 될 후계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맥 중심으로 당의 지도층을 구성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직계로 분류되는 그룹은 실각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민주당이 신구파로 분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한번 실각한 인사들이 응집된 정치세력으로 재기할 확률은 매우 낮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현재 ‘거래’해야 할 민주당 지도층 인사의 대부분이 2002년 대선 이후 한나라당의 협조에 보답할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민주당이 인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면 한나라당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도 당의 현 지도층은 제도적인 장치 아래서 대부분 리더십 위치를 보전할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2007년 대선 후 집권세력으로 다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인사들이 8년 동안의 야당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부시 행정부로 대거 진출한 사실이 미국 공화당 인맥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정당체제에서 정당들은 서로 상대당의 ‘수명’이 길다고 인식한다.

    한나라당을 보는 민주당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2년 대선에 한나라당이 패배할 경우, 현재 이회창 총재 중심의 지도체제가 대선후에도 유지될지의 여부가 민주당이 보는 한나라당의 정당수명을 결정한다. 민주당과 달리 한나라당 지도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은 사실이다. 한 예로 지도층의 연속성을 들 수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부총재단의 대부분이 5공화국 민정당 출신이다. 그래서 민정계가 세 번의 당권교체에도 권력을 잃지 않았다는 평가가 일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지도부의 연속성이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특정 인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정당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정당의 지도자가 교체되면 핵심 인맥이 전면적으로 개편되거나 당 자체가 분리되는 관행 때문에 재임기간을 뛰어넘는(inter-administration) 정당협력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한국 정당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물 중심의 굴레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진적 당권교체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 현재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그 시발점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대선 후보의 선출이다. 더 나아가 당권교체 후 조직의 일체성 유지를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한 정당의 당권이 민주적인 절차와 예측 가능한 주기로 교체되고 교체에 따른 지도부 변화가 제한적일 때, 그 정당은 상대당의 협력을 유인할 수 있는 정도의 장기적인 수명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10·25 재보선 결과와 이에 따른 김대중 대통령의 당총재직 사퇴의 둘째 의의는 그동안 정당정치의 이념화에 걸림돌이 되어 온 3김 정치,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3김식 집단정치와 지역정치가 약화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0·25 재보선이 한나라당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가장 정치적 타격을 받은 세력이 바로 3김이기 때문이다. 선거 후 민주당의 내분에서 볼 수 있듯이,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 대한 제어력도 상실한 심각한 수준의 레임덕 상황을 맞고 있다.

    이번 선거는 또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영삼 전대통령의 입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도권에 남아 있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현재의 한나라당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자민련이 내년 지방선거전에 와해될 확률도 적지 않다.

    이렇게 3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3김 정치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3김 정치의 본질은 집단정치와 지역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3김 영향력의 원천이 지역적 기반에 있다는 것이 지역정치이며 3김 모두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충성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집단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3김 정치가 후퇴한다는 것은 지역정치와 집단정치의 약화를 의미한다.

    현재 상황을 보면 3김식 가부장적 집단정치가 먼저 청산될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쳐오면서 가신정치와 실세정치의 폐해를 수없이 경험한 결과 이에 대한 경각심이 국민들 사이에 높고 포스트 3김 정치인들의 집단정치적 성향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3김의 퇴장과 함께 지역주의도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계가 어떤 형식으로 개편되든지 호남과 영남이 지지하는 정당은 다를 것이고, 이들 지역에서 한 정당만을 지지하는 편중성도 당분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 3김 시대에 지역정치가 유지된다고 해서 그 성격도 3김식 지역정치와 유사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3김식 집단정치가 청산되면서 지역정치는 집단정치가 아닌 이념과 조합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화될 것이다. 한국 정당정치의 미래는, 호남이 진보성향의 민주당을 지지하고, 영남이 보수성향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패턴이 상당기간 유지되면서 이념변수의 중요성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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