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 김준하

    입력2004-11-15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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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친 윤보선과 박정희. 박정희의 좌익경력 시비에서 촉발된 사상논쟁은 선거기간 내내 박정희를 압박한다. 그러나 반역의 수레바퀴를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 이후 정국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인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였던 인사들이 해금돼 정치활동이 허용됐으나, 군정연장과 민정회복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정치권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또 야당통합의 명분을 내건 ‘국민의 당’ 창당이 결국 파탄으로 끝나면서 윤보선 허정 양씨의 대립만 격화시켰고, 반면 박정희 의장은 군복을 벗고 공화당총재이자 후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맞게 된 대통령선거는 야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선거일을 한달 앞둔 9월15일 후보자 등록을 마감한 결과, 기호 순으로 장이석(신흥당), 송요찬(자민당), 박정희(공화당), 오재영(추풍회),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당), 변영태(정민회) 등 7명이 대통령후보로 공고됐다. 대통령후보는 7명이지만 선거의 양상은 처음부터 박정희, 윤보선, 허정 3파전으로 압축됐다. 강력한 여당 후보에 야당 후보 2명이 맞서는 건 누가 봐도 야당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나는 그 무렵 급성맹장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었다. 박정희 후보를 이길 방법은 무엇일까? 막강한 조직력과 풍부한 자금으로 무소불위의 군대식 선거를 강행할 게 뻔한 박정희 후보의 공화당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야당을 하나로 묶어야 된다는 것이 초미의 조건으로 생각됐다. 윤보선 후보와 허정 후보를 하나로 묶는 방법은 없을까? 내 처지에서는 허정 후보를 선거 도중에 포기시키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지리멸렬된 민정당의 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야당통합 협상과정에 김도연씨와 유진산씨가 이탈한 민정당의 분위기는 썰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외국언론의 한국 대선 비판

    그러나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맹장수술로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안국동에 설치된 윤보선씨 선거캠프에 합류했다. ‘국민의 당’ 파동과 ‘진산 파동’으로 정신없이 시간을 낭비한 민정당은 윤보선씨를 중심으로 겨우 중앙당의 조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전부장에 이충환씨(후에 국회의원)가 임명됐다.



    이충환씨는 자유당 시절 예산결산위원장을 역임한 경제통이었으나 선전 분야에는 문외한이기도 했다. 선전부장에 특히 주목한 이유는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제5대 대통령선거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전전에서 결판이 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구당을 조직하고 도당을 발족시키면서 선거조직을 갖추기에는 한 달이라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나는 임시대변인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처음부터 입후보자를 수행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후보자의 견해를 대변하는 일을 맡으면서 수행기자들의 뒷바라지도 도맡게 됐다. 솔직히 말해서 대통령후보들이 9월15일에 등록은 마쳤지만 국민은 선거 자체에 대해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분열과 난투극을 계속하던 ‘국민의 당 파동’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예상을 넘을 만큼 심각한 것 같았다. 산산조각이 난 상태의 야당 후보들이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맞서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이라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더욱이 자금도 조직도 없이 맨손으로 선거판에 뛰어든 윤보선씨는 누가 보더라도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운명적인 선거전의 공은 울린 것이다. 박정희 후보와 최초의 대결은 신문지상을 통한 ‘대통령선거 출마의 변’이었다. 왜 출마를 했으며 당선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싸움의 주제가 됐다.

    먼저 박정희 후보가 포문을 열었다. 박후보는 출마의 변 첫머리에 “혁명 2년간에 있었던 몇 가지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의 거울로 삼으려 하며, 그로 말미암아 국민이 겪은 불편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군정 2년을 국민 앞에 솔직히 사과했다. 박후보는 또 출마의 변에서 구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배척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정정법의 폭거를 끝까지 합리화하려 했다.

    반면 윤보선씨는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를 소생시키려는 생각과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비민주주의적인 생각과의 결전”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정부 2년간의 암흑과 공포와 비밀주의와 국민분열정책은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비민주주의적인 상태를 계속 연장하려는 불가사의한 생각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윤후보는 또 “이번 선거는 정상적인 상황 아래서의 정책대결이 아니라 이에 앞서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군정이냐 아니면 민정이냐를 결정짓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윤후보의 선거출마의 변은 박정희 후보와는 근본적으로 그 방향이 달랐다. 10·15 대선의 성격을 처음부터 독재와 민주의 이념적 결전으로 못박고 나선 것이다. 군정 2년에 대한 신랄한 그의 비판은 선거의 앞날을 암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허정씨의 출마의 변은 윤보선씨에 비해 매우 부드러웠다. “불가능한 것을 허위 공약하는 것은 첫째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고, 둘째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행위”라고 전제하고 ‘시급한 민생고의 해결’ ‘정국의 효과적인 안정’을 첫째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허정 후보는 군정하의 현실을 가리켜 “천금 같은 중압 밑에서 질식 전야의 신음을 계속하고 있고 전국 도처에 퍼져있는 국민 감시의 검은 눈총 밑에서 겨우 눈치나 볼 뿐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전(前) 세기적인 폭정 밑에 놓여 있다”고 비난했다.

    박정희, 윤보선, 허정 3후보의 선거출마의 변은 당시의 어두웠던 세태를 엿볼 수 있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시국관과 국가경영 방식이 크게 다름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들의 ‘출마의 변’을 들은 유권자의 반응은 냉혹하리만큼 차가웠다. 군사정권과 분열된 야당의 대결을 비웃듯이 ‘선거 하나마나’ ‘선거 보나마나’로 체념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선거전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9월7일 미 국무성과 미국 언론은 한국에서 벌어질 대통령선거에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AFP통신은 7일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은 10월에 있을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참된 민주주의적인 분위기와 조건에서 실시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으로 체념의 빛을 보이게 됐다’고 전하고 ‘워싱턴 당국은 아직 자유선거가 실시되리라는 ‘환상’이라도 가져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박정희씨의 결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보인다’고 보도했다. 나아가 AFP통신은 ‘미 국무성은 한국 군사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발이 묶여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까지 비관적 보도를 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7일자에 제5대 대통령선거를 절망적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식 자유선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국민들이 내달의 선거에서 자유선택에 의해 투표하도록 허용되리라는 희망은- 만약 그와 같은 희망이 애당초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송씨(자민당 후보로 구속중이었던 송요찬씨)와 함께 앰뷸런스에 실려 군 형무소로 가버렸음이 명백하다”고 한국에서의 자유선거를 비꼬기도 했다. 또 뉴욕타임스는 “1961년 군사혁명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은 야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이 있어도 한국정부의 수반으로 계속 남을 생각임이 분명하다. 설혹 내달의 선거에서 비밀투표가 허용된다 해도 그네들의 행동에 대한 일체의 공개 비판을 허용치 않으며 유력한 야당 후보를 투옥한 사람들이 모든 선거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한 자유선거라고 할 수 없다. 워싱턴은 월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양심상 거리낌없이 지지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윤보선 진영은 선거사무장에 전진한(전 장관)씨, 회계책임자에 정해영(후에 국회의원)씨를 지명하고 이충환 선전부장을 돕기 위해 임시대변인으로 김영삼씨를 임명했다. 선거 구호는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잡자’로 정했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현수막 그림으로 ‘황소’를 채택하자 윤후보측은 기호 ‘5번’을 상징하는 ‘다섯 손가락’의 오른손을 현수막에 그려넣기로 했다.

    윤후보는 첫 유세지로 목포를 택했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윤후보의 주적은 박정희 후보다. 그래서 처음에는 박후보의 고향인 구미 근처의 대구를 첫 유세지로 결정해 발표했다. 그러자 민정당 내에서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나왔다. 우선 시급한 것은 야당 진영에서 이탈해 민자당을 만들어 송요찬씨를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옛 민주당 구파 동지였던 김준연, 소선규, 조영규씨 등 호남세력의 기세를 꺾기 위해 목포를 첫 유세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목포역 상공에 나타난 헬리콥터

    마침내 윤보선 후보는 첫 유세지를 대구에서 목포로 변경했다. 그 무렵 나는 두 가지 가슴 아픈 소식에 접하게 됐다. 그중 하나는 윤보선 후보의 숙부이기도 한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씨가 공화당의장으로 취임하고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국적인 유세를 이미 개시했다는 소식이었다. ‘적을 이용해서 적을 물리치는’ 제갈공명의 전술이라고나 할까.

    또다른 가슴 아픈 소식은 동아일보 시절 나와 동고동락했을 뿐 아니라 군사정권에서 무고하게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내 딴에는 그의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만섭 동아일보 기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돌연 박정희 후보 진영에 가담해 찬조 연사로 나선다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놀라운 뉴스였다. 나는 윤치영씨나 이만섭 기자의 소식을 듣고 섭섭하기도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도리어 전의(戰意)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첫 유세지인 목포를 향해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신문사를 예방해 앞으로 벌어질 선거전에 대한 부탁의 말을 전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동아일보에 들렀다. 그 무렵 동아일보는 헬리콥터를 구입해서 때때로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도했다. 김상만 사장을 만났다.

    “사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어차피 21일 목포 유세에 헬리콥터가 오겠지만 한 시간 정도 일찍 와서 목포역 상공에서 취재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김상만 사장은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러한 요청을 하는지 쉽게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웃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며칠 후 나의 요청을 충분히 반영해주었다.

    당시 선거법은 목포나 순천 청주 정도의 중소도시에서는 후보자가 유세를 하게 될 경우 신문지 반쪽 크기의 벽보 50매 정도로 유세 시간과 장소를 알릴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가두 방송은 엄하게 금지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윤보선 후보 일행은 9월20일 밤 호남선 열차를 탔다. 21일 새벽 6시경 일행이 목포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10여 명의 당원뿐이었다. 처참한 심정이었다. 제1야당 민정당 대통령후보를 맞이하는 목포역의 광경은 너무나 쓸쓸했다.

    첫 유세에서 실패하면 캄캄한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용기를 내서 몇 사람이 서울에서 준비해온 플래카드를 펼쳐 들었다. 플래카드 내용은 ‘환영 윤보선 대통령후보 정견발표’였다. 단 한 장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10여 명의 기자단을 포함한 윤보선 일행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인 여관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인도에는 사람이 드물었고, 그나마 윤후보 일행을 쳐다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부둣가에 이르렀을 때 출어를 준비하던 어부들이 플래카드를 바라보고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일행 중 몇 사람이 ‘윤보선 후보 만세’를 외치며 그들 성원에 보답했다. 현지 당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바로 전날 공화당의장인 윤치영씨가 목포역 광장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청중이 고작 700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 청중의 숫자는 후보 인기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에 특히 야당 후보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50매 정도의 벽보를 가지고 목포역 유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플래카드를 앞세운 윤보선씨 일행은 일찌감치 길가로 나섰다. 목포는 항구라 시내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도로는 기복이 심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오늘 두 시입니다’ ‘목포역 광장입니다’ ‘윤보선 후보의 정견 발표가 있습니다’… 당원들의 외침이 애처롭기만 했다.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눌러쓴 윤후보가 끝까지 앞장을 섰다. 목포 시내의 주요 도로는 거의 돌아다닌 듯했다. 피곤하면 다방에 들러 커피를 들면서 강연회 선전 데모(?)를 계속했다. 무려 3시간 이상을 길가에서 헤매고 다녔다. 옛날에 서커스를 알리는 행렬이 연상되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유세를 알리기 위해 3시간 동안이나 시내를 걸어다닌 것이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 윤후보 일행이 목포역 광장에 도달했으나 수십 명의 청중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후 1시가 지났을 무렵, 동아일보 헬리콥터가 목포역 상공에 나타났다. ‘김사장님, 감사합니다’ 라고 나는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다. 헬리콥터가 목포역 상공을 몇 번이고 선회하자 크지 않은 목포시 일대가 헬리콥터 굉음으로 진동하는 듯했다. 목포 시민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세 시간인 2시 가까이가 되자 삽시간에 청중들이 모여드는 게 아닌가.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윤보선 후보는 후일 그때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목포의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종고산아 말하라, 너는 알고 있다”

    연단에 오른 윤후보는 감격에 못 이겨 눈가에 이슬이 맺힌 듯했다. 그는 첫 연설부터 2년에 걸친 군사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매섭게 비난하고 나섰다. 군사정권을 기아, 부패, 실업, 불법, 분열 등 ‘5악’으로 단정했다. 연설의 열기가 높아가고 있을 때 목포역 광장은 청중으로 가득히 채워졌다.

    이날 유세장의 청중에 대해 신문과 방송들은 ‘윤보선 후보 목포 첫 유세에 1만 청중 운집’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야당지로 알려진 동아일보만 ‘2시 현재 7000 청중’이라고 보도했을 뿐 여당지로 지목되던 ‘서울’ ‘연합’을 비롯해서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사도 ‘1만 청중’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천명 미만의 청중을 상대로 유세를 벌이던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유세계획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국민의 당’에는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일종의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는 이제 해볼 만하게 됐다’는 자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목포에서의 첫 유세는 윤보선 후보로서는 예상외의 대성공이었다. 솔직히 대통령선거의 초반전은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독무대였다. 공화당은 선거가 시작되기 무섭게 전국에 일제히 현수막을 내걸었다. 선거 첫날인 9월15일 경산 양산의 두 군데 읍에서는 500∼600명을 동원한 박후보측의 찬조 유세가 벌어졌고, 조치원에서는 예정된 시간에 청중이 모이지 않아 유세시간을 연장해가면서 연설회를 가졌다는 뉴스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광주에서는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뛰어가는 격’이라는 공화당 자체 내의 비판 때문에 유세 계획의 3분의 2를 줄였다는 신문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공화당은 방대한 조직과 자금을 이용해서 초반의 선거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 후보의 목포 유세는 야당 붐을 일으킬 수 있는 기폭제 역을 훌륭히 해낸 것이다.

    목포에서 폭발적인 선거 붐을 일으킨 윤보선 후보는 다음날인 22일 오전 광주 유세에 이어 오후에는 여수에서 세번째 유세를 했다. 여수에서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의 호응을 얻게 되자 유세반은 크게 고무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찬조연사였던 윤제술(후에 국회의원)씨가 등단했다. 그는 특유의 유머와 옛 고사를 섞어가며 박정희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돌연 오른손으로 연단 뒤쪽에 우뚝 서있는 야산을 가리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종고산아, 너는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 너는 분명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

    윤제술씨는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외우듯 목청을 높여 외쳐대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하단했다. 바로 그것이 10·15 대통령선거를 뒤흔들어 놓은 ‘사상논쟁’의 발화점이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윤제술씨가 “종고산아, 너는 알고 있다”고 소리쳤을 때 나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수행했던 기자들도 심지어 윤보선 후보를 비롯한 유세반원 누구도 전혀 짐작을 못했다. 다음날 조간 신문에 ‘종고산…’이라는 말이 한 줄도 소개되지 않은 사실만 보아도 당시 상황이 능히 짐작된다.

    윤제술씨는 호남에서도 널리 알려진 한학자요 교육자다. 익산 남성고교 교장 시절 그가 교육계에 남긴 공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여수에서 연단에 오르는 순간 이미 ‘여순반란사건과 박정희’라는 선거 테마를 부각시키기 위해 15년 전 ‘종고산’이 바로 굽어보는 여수시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군인들의 반란사건을 환기하기로 작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날 야간기차를 타고 다음 유세지인 전주로 향하고 있을 때 비로소 종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수행 기자들이 윤제술씨를 둘러쌌다. “아니, ‘종고산아 말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종고산과 이번 선거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윤제술씨는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잘들 생각해 봐요”라며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피했다.

    9월24일 아침 돌연 윤후보는 아침식사가 끝나는 대로 10시에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같은 여관에 묵고 있던 기자들에게 윤후보의 뜻을 전하고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10시가 되자 10여 명의 기자들을 앞에 놓고 윤후보는 ‘오늘 아침 박정희 의장은 라디오를 통한 정견 발표에서 구 정치인과 자기와의 대결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과의 대결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지적하면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윤후보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누가 민족주의자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란 말인가.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며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란 말인가. 누가 공산당이며 누가 공산당이 아닌가”라고 반문한 끝에 “이에 대한 해답은 각자의 경력을 캐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분위기가 돌연 심상치 않게 변했다. 느닷없이 공산당이라는 낱말이 나오는가 하면 경력을 캐보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윤제술씨가 ‘종고산아, 말해다오. 너는 알고 있다’고 소리쳤던 장면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윤보선씨는 “어제 여수에서 강연할 때 여수·순천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고 말하고, “여·순반란사건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신봉자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

    윤후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박의장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박의장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그의 저서에서 ‘서구의 민주주의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나 ‘나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를 쓸 만한 사람이라고 치켜올린 것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윤후보는 “여·순반란사건은 당시 정부와 애국하는 여수 시민이 진압했기 때문에 오늘날 군정 하에서라도 부족한 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윤보선 후보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후보는 물론이고, 공화당과 군사정권에 대해 사실상의 폭탄 선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군사정부 내에 있다는 발언이고, 둘째는 박정희 의장이 전력에 비춰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시사한 점이다. 윤보선씨는 분명히 ‘박정희 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며 그의 전력이 공산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역사적인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의 ‘사상논쟁’은 이렇게 해서 불이 붙은 것이다.

    흥분한 기자들은 앞을 다투며 우체국으로 달려가 기사를 송고했다. 24일자 도하 석간신문 그리고 전국의 지방신문들은 윤후보의 전주 ‘폭탄 선언’을 톱으로 보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선거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유권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게 됐다.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윤보선씨가 만일 허무맹랑한 발언을 했다면 과연 무사할 것인가. 온 국민의 시선이 박정희·윤보선 두 후보에게 집중됐다. 국가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던 최고회의가 24일 오후에 긴급 소집됐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의해 발표된 최고회의의 입장은 예상한 대로 심각했다. 이후락 실장은 “윤보선씨의 발언은 선거운동에 관한 발언이기보다 국가안보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만큼 최고회의는 비상한 관심으로 그의 발언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고 있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서인석 공화당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사가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을 쓰게 됐다는 것은 선거 분위기를 극도로 해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후락 공보실장이나 서인석 대변인의 논평을 들으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윤보선 후보를 수행한 기자들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그것은 최고회의나 공화당은 윤보선씨의 폭탄 발언에 대해 ‘국가 안보에 관계되는 문제’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 등을 들먹이면서도 ‘박정희 의장의 공산당 경력과 여·순반란사건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해명이나 부인하는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윤보선씨의 발언이 전혀 금시초문이었던 나로서는 긴장 속에서도 안도의 숨을 돌리게 됐다. 만일에 윤씨의 발언이 허위요 조작된 거라면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윤제술씨를 만나서 박의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 두 사람의 대결로 압축될 게 분명해졌다. 그때부터 ‘국민의 당’ 허정 후보를 비롯한 여타 후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 기자회견을 마친 윤보선 후보는 그날 오후 전주에서 1만5000명이라는 많은 청중이 모인 가운데서 성황리에 유세를 마칠 수 있었다. 유세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온 후 중앙에서 급히 달려온 간부와 유세반이 한자리에 모여 사실상 민정당 확대 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론은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박정희 의장이 공산당 당원으로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간부들에 따르면 최고회의는 앞으로 윤후보에 대한 고발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초법적(?)인 과격행동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박의장의 선배인 예비역 3성장군 두 사람과 접촉하고 박의장의 군 경력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예비역 고위장성들에 대해 일종의 함구령이 내려진 것 같다는 것이다.

    문제는 ‘종고산아 말하라’고 외친 윤제술씨나 ‘전주 폭탄 발언’을 감행한 윤보선 후보 모두 그들 발언에 대해 확실한 증거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믿을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그들이 제시한 증거의 전부였다. 만일 그 시점에서 군사정부나 공화당에서 ‘박정희 장군은 공산당원의 경력이 없다. 그뿐 아니라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일도 전혀 없다’며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나선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난상토론 끝에 윤 후보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나에게 지시했다. “이보게, 만사를 제쳐놓고 오늘밤 안으로 서울로 올라가게. 도서관이나 신문사를 뒤져서 박정희가 사형 언도(사실은 무기 언도였다)를 받은 증거를 찾아보도록 하게.”

    나는 뜻하지 않게 중대한 임무를 맡게 돼 그날 밤(24일) 호남선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해야 할 일은 첫째 여·순반란사건은 언제 일어났으며, 둘째 그 내용은 무엇인가, 셋째로 주모자에 대한 재판은 언제 어떻게 결말이 났는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근무했던 동아일보사다. 조사부에 들러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내용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949년 2월경에 있었던 군법회의 기사는 보관지에서 누락되고 없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소공동 근처의 시립도서관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서울 고등군법회의가 박정희 소령에게 내린 판결에 관한 기사를 실은 지면이 어떤 신문을 막론하고 빠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빼버린 게 분명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즉시 을지로 입구 부근에 있던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발견했다. 군사정부의 용의주도하고 민활한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모든 신문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들른 곳이 경향신문사였다. 친하게 지냈던 신문사 간부의 협조를 얻어 조사부에서 보관지를 뒤졌다. 마침내 박정희 소령에 대한 2단짜리 공판기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총살형 1명, 무기 4명, 군법회의서 73명에 언도’라는 제목으로 된 1949년 2월18일자 2단짜리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방부에서는 작년 10월 반란사건(여·순 반란사건) 이래 장교를 비롯해 사병에 이르기까지 1000여 명을 검거해 취조중에 있던 중 조사가 끝난 자들은 지난 8일부터 군법회의에 회부중에 있었는데, 지난 13일까지 판결언도를 받은 자는 73명에 달하고 있는 바 그중 전 마산 18연대장 최남근은 총살 언도를 받았으며 그외 김학림, 조병건, 박정희, 배명종 등은 무기 징역을 받고, 기타는 15년부터 5년까지의 징역 판결이 있었다”

    박정희 무기징역 언도의 증거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돼 박정희 소령에게 무기 언도가 내려진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친김에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에 들러 신문철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신문에서도 1949년 2월17일자 지면에서 ‘군법회의 숙군 공판 최남근 일파에 총살 언도’ 제하의 2단짜리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내용은 이랬다.

    “건전 한국군을 건설하고자 국방부에서는 특히 그동안 엄격한 숙군이 시행됐거니와 이와 관련된 제16연대장(경향신문에는 18연대로 돼 있었음) 육군 중령 최남근 일파에 대한 공판은 지난 8일부터 동 13일까지 6일간에 걸쳐 서울 고등군법회의에서 집행됐다. 즉 심판관 김완용 중령 이하 6명, 검찰관 이찬형 중령 이하 1명이 참석한 가운데 심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판결이 언도됐다고 한다. 총살 중령 최남근(연대장), 무기징역 소령 김학림, 동 조병건, 동 박정희, 동 배명종…”

    나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기사를 카메라에 담은 후, 현상까지 해가지고 대전으로 내려가 유세팀에 합류했다. 윤보선 유세팀에서는 내가 발굴(?)한 ‘경향신문’ ‘서울신문’ 기사를 당분간 극비에 부치기로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증거물을 공개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박정희 후보에 대한 ‘무기언도’, 그것도 여·순반란사건과 군대 내의 ‘숙군(남로당 관련)’과 연관돼 무기언도가 내려졌던 증거를 확보하게 된 윤보선 진영에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박정희 후보의 ‘과거 경력’과 ‘사상 배경’에 공격을 집중했다. 급기야 제5대 대통령선거는 초반부터 ‘사상논쟁’이라는 뜨거운 불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윤보선 후보가 전주 폭탄 선언에 이어 25일 이리 유세에서도 1만여 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박정희 의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을 의심한다’고 공언하자 격노한 공화당은 윤씨를 이날 오후 사직당국에 고발했다. 윤씨의 언동은 대통령선거법 148조 ‘허위 사실 유포죄’와 149조 ‘후보자에 대한 비방죄’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24일 오후에 소집된 최고회의의 태도였다.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윤씨의 발언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던 최고회의에서는 ‘윤보선을 즉각 구속하라’는 주장까지 대두했다.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도 최고회의에서 윤씨를 구속하자는 논의가 있었냐는 기자들 질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윤씨에 대한 구속 주장을 시인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야당은 최고회의의 위압적인 태도를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민정당의 김영삼 임시대변인은 “그러한 위협에 놀라지 않겠다. 그만한 정치적 발언(전주 발언)은 선거 기간중 대통령후보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공화당이 이를 고발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라고 반박했다. ‘국민의 당’ 송원영 대변인(후에 국회의원)도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는 것 같다는 윤보선씨의 발언은 중대한 문제다.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밝혀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의 김대중 대변인은 “정부 안에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있다. 박의장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내용은 중대 문제로서 그 진상이 국민 앞에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여·순반란사건과 박정희’ 문제가 윤보선씨에 의해 제기되고 최고회의와 공화당이 이를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고발까지 하자 온 나라가 사상 논쟁의 물결에 휘말리게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박정희 후보 자신을 비롯해서 최고회의나 공화당은 ‘박정희는 공산당원을 한 일이 없으며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떳떳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따라서 유권자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윤보선씨의 폭탄발언이 있은 다음날인 9월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 교정에서는 재야 6개 정당의 공명선거 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자민당 위원장인 김준연씨는 1961년 5월26일자 미국 타임지의 보도내용을 폭로했다. 타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소장은 1948년 군 반란을 음모하는 데 일부 관련된 사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씨의 장교들에 의해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보도된 바와 같이 그후 동료 상관들의 구명 운동으로 석방됐다. 지금 그는 명백하고 강력한 반공주의자로서 육군의 작전참모부장직에까지 이르렀다. 박장군은 정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지난해 일찍이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생의거로 이승만씨가 추방됨으로써 그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사상논쟁에 불이 붙기는 했으나 관련증거는 솔직히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울·경향 두 신문의 기사, 그리고 ‘타임’지의 보도 내용 등이 고작이었다. 야당측에서는 많은 예비역 고위 장성을 만나 그들로부터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아내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40년 전의 군사정권 시대는 예비역 장군들이 쉽게 입을 열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면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온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여·순반란사건의 진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박정희 의장 관련설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당시 지창수 상사가 주동한 사건의 전개과정은 거의 밝혀졌으므로 여기서는 금년에 방영된 MBC 보도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MBC는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여수 14연대, 반란’에서 “10월19일에서 반란이 진압된 10월말까지 최소 2600명의 죽음이 확실시되며 행방불명자 4300명,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고 피해내용을 전하면서 “여·순사건 후 7개월 동안 처벌된 군인 숫자만 4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박정희씨와 여·순반란사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건 이후 숙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좌익혐의 여부보다 군 내부에 뿌리박힌 남로당 조직체계였다. 바로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다. 여수 진압을 위해 광주작전 참모본부에서 정보 장교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군사 총책’이었다는 것이다”

    MBC는 박정희씨에 대한 군사재판 기록에 대해서 “그가 남로당 당원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문서는 재판기록이다. 그의 죄목은 반란기도죄와 군병력제공죄였다”며 “1945년에 남로당에 가입해서 군내에 비밀 조직을 심고 대한민국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소령이 무기형의 집행을 면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군내의 조직을 우리한테 제공했다. 시초에는 남로당의 전모를 몰랐다. 군대 조직을. 그런데 그분(박정희 소령)을 조사함으로써 전모의 일부가 드러났다”는 군사 평론가 김점곤씨의 회고담을 소개하고 있다.

    태풍 몰고온 간첩 황태성 사건

    사상논쟁의 모체는 여·순반란사건이 분명하다. 야당이 확실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문제 제기에 급급했던 것은 경솔한 처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박의장이나 공화당측의 대응조치는 더욱 졸렬한 감이 없지 않았다.

    국회의원선거도 아닌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의 전력과 사상 문제에 대한 철저한 조명은 당연한 게 아닌가. 충분한 해명도 없이 ‘국가안보’ ‘매카시즘’ 등으로 일시적인 사태 호도에 급급한 것이 도리어 국민의 의혹을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선거 투표일을 2, 3일 앞두고 남로당에 가입한 일이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일조차 전면 부인하는 만용(?)을 발휘했지만 진실을 숨긴다는 것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 차라리 사상 문제에 대처함에 있어 보다 더 정직하고 정정당당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선거 초반에 벌어졌던 사상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첫째는 ‘대통령 선거 하나마나…’라고 체념했던 분위기가 ‘이제 선거를 해볼 만하다’는 방향으로 반전된 것이고, 둘째는 허정씨를 비롯해서 난립한 야당 후보들을 제치고 박정희 후보와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는 윤보선씨뿐이라는 여론이 환기됐고, 셋째 공산주의자, 반란 관련자 등의 극단적인 공격을 받고도 제대로 변명을 못하는 박정희 후보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9월25일 오전, 윤보선 후보의 대전 유세장에는 예상을 뒤엎고 3만 청중이 모여들었다. 여야를 통틀어 10·15 선거전이 시작된 후 최대의 청중이었다. 윤후보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이 나라의 운명을 여러분의 손으로 결정해야 할 중대한 시기임을 명심해달라”고 외쳤다. 이날 오후 인구 5만의 고도 공주에서는 8000명의 청중이 모이기도 했다. 같은 날 4·19 의거의 진원지인 마산에서는 공화당의 찬조 유세가 있었으나 약 1000명 가까운 청중이 모였을 뿐이라는 소식이었다.

    목포의 기적, 전주의 폭탄 발언 등의 영향으로 중반전으로 서서히 들어선 10·15선거는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윤후보 진영에 불어넣었다. 나는 선거의 판가름은 박정희 후보의 고향 가까이 있는 대구에서 결판이 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구는 분명 정치 도시가 아닌가. 대구가 흔들리면 영남 전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대한 대구행을 앞두고 서울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사상논쟁 자료가 튀어나왔다.

    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재야 6당 공명투쟁위원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충격적인 내용의 삐라(전단)가 뿌려졌다. 삐라는 ‘구국청년동지회’ 명의로 돼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세칭 북괴 간첩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혀라’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당시 박정희의 실형(實兄)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황을 박정희의 형수가 수차례에 걸쳐 면회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황태성 사건의 관련자로 실형을 받은 자를 형집행중에 석방한 이유는?’ ‘박정희씨가 형식상 이끄는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공화당의 중견 간부인 김모씨가 6·25 당시 부역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등이다. 삐라를 입수한 윤보선 진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삐라 내용이 사실이라면 근본적으로 선거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남로당 당원이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시점에 그의 친형도 공산당 당원이었다니…. 거물 간첩 황태성이 박정희 후보 형수를 만나 당대의 권력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의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사정부는 윤보선씨의 폭탄 발언을 국가안보에 관한 문제로 규정한 바 있지만 그들의 말대로 10·15 선거야말로 국가안보를 가늠하는 선거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간첩 황태성 문제에 대해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무렵 ‘국민의 당’ 허정 후보가 선수를 치고 나섰다. 27일 아침 허정씨는 “간첩 황모 사건의 진상을 석연하게 밝혀라” “박정희 의장이 다액의 수표 4장을 일본 모회사로부터 받았다는 일본 잡지 보도의 진상을 밝혀라”고 요구했다. 사상논쟁의 핵심이 여·순반란사건에서 간첩 황태성 사건으로 옮겨가는 듯했다. 선거의 분수령을 이루게 될 윤후보의 대구 유세를 앞두고 영남지방, 특히 대구 일대에서는 황태성에 대한 루머가 난무했다.

    10·1 폭동사건의 근거지가 대구였던 만큼 간첩 황태성과 박정희 형제의 특수 관계를 둘러싼 소문이 꼬리를 물고 흘러 다녔다. 그러면 간첩 황태성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던가? 박정희 일가와 황태성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였던가? 선거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황태성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 황태성을 알아보기로 하자.

    황태성은 1906년 상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희전문 시절 퇴학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집안이 가난했다. 일제시대 때 ‘김천 청년동맹’ ‘경북 청년동맹’ 등에 관계했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 ‘경북책임위원’이 되기도 했다. 1928년과 1931년에 걸쳐 도합 세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경북 대표로 조선공산당에 참가했으며 1946년 ‘대구 10·1 폭동’에서 박정희 후보의 친형인 박상희 씨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 인물이다.

    1961년 12월27일자 육군 중앙군법회의 판결문은 황태성의 행적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황태성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4년시 항일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퇴교 처분을 받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재정난으로 2년을 중퇴한 자로서 일정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표지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하자 조선공산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경북도당 조직부장, 10·1 폭동사건의 주동역을 하고 월북한 후 북괴 치하에서 해주인쇄소 총무국장과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을 경유, 무역부상 겸 서리 등 요직에 재임한 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황태성 간첩사건’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국내에 잠입한 황태성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만나 통일논거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1961년 9월1일 남하, 서울에 잠입했다. 그후 황태성은 박정희 의장과 접촉하기 위해 박정희 의장의 친형 박상희(남로당 선산 군당위원장, 10·1폭동을 주도, 1946년 처형됨)의 처인 조귀분(김종필씨의 장모)씨에게 주선을 부탁했다. 조귀분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사위 김종필씨에게 전화를 걸어 황의 의사를 전달했고 김종필 부장은 자신의 처조카집에서 1961년 10월 황태성을 체포, ‘단순 간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해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송치했다. 1961년 12월27일 육군 중앙군법회의는 반공법,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를 적용해 황에게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고, 1963년 10월 최종선고를 한 끝에, 1963년 12월14일 박정희 의장이 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3일 전에 사형에 처해졌다’.

    야당은 선거가 시작되기 전까지 간첩 황태성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둠속에 숨겨졌던 사건의 정체가 짧은 선거기간을 통해 하나씩 세상에 알려지게 됐던 관계로 모두가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대통령 후보와 그의 가족이 거물 간첩과 복잡하게 엉켰던 관계가 노출됨으로써 온 국민은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구 유세를 하루 앞두고 윤후보는 청주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해 최후의 결전을 통고했다. 청주에서 소집된 민정당 간부회의에서도 대구 유세에서 여·순사건과 간첩 황태성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타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윤보선씨는 청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씨(박정희 후보)가 지적한 민족이념 없는 가식된 민주주의 자 중에는 나까지 포함된 것이 틀림없는데 다른 건 몰라도 사상적으로 나를 몰아대는 데 대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서구식 결투라도 신청, 박정희씨는 총 잘 쏘는 군인이지만 나는 맨주먹으로라도 싸우고 싶은 심정이다”고 비상한 전의를 내비쳤다.

    유세도 하기 전에 대구가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선거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돌연 간첩 황태성 사건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개했다. 고등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 언도가 있은 지 1년9개월만에 사건의 일부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김부장은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간첩 황태성이 박의장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간첩 황태성 사건이 논의되는 것은 혁명정부 고위층과 국민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북괴의 고등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황태성 사건이 논의되는 것 자체가 북괴의 고등전략에 휘말린 행위라는 것이다. 정부기관이 나서서 박의장에 대한 의혹을 전면으로 부인한 것은 김부장이 처음이다. 의혹을 제기해왔던 민정당과 윤보선 후보는 차츰 어려운 입장에 몰리는 듯했다. 윤후보로서는 알고 있는 사실 전부를 대구 유세에서 밝히기로 비상작전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대구에서는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10·1 대구 폭동사건은 간첩 황태성과 박의장 친형인 박상희씨가 주도했을 뿐 아니라 박의장의 형은 처형됐다는 말이 있다’ ‘박의장 형인 박상희씨는 간첩 황태성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더라’ ‘박의장도 어렸을 때부터 간첩 황태성을 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한다’ 등이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발언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말들이 아닌가? 여기서 간첩 황태성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가 주동했던 ‘10·1 대구 폭동 사건’을 잠시 뒤돌아보기로 하자.

    ‘대구 10·1 폭동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사건의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데 여러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돼 경북 전역으로 확산된 소요사건으로서 같은해 10월12일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 31명, 행방불명 36명, 부상자 20명, 피해 경찰서는 대구를 비롯한 도내 10곳, 전소 경찰서 2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구와 경북 일대에 걸쳤던 가슴 아픈 불상사였다. 간첩 황태성은 선봉에 서서 군중을 선동하고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상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인용).

    살벌한 분위기 속에 9월28일 대구 수성천에서 윤보선 후보의 선거유세가 벌어졌다. 운집한 군중이 10만을 헤아리는 대성황이었다. 그들은 윤후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연단에 오른 윤보선씨는 마침내 ‘여·순반란사건에 공화당 박정희씨가 관련됐다고 볼 수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며칠 전 전주에서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고 발언한 내용을 입증이나 하려는 듯 분명한 어조로 선언한 것이다.

    수성천변에 운집한 청중들은 박수를 치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엄청나게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폭탄선언을 한 윤씨는 “박정희씨가 정권을 다시 잡는 한 이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선거는 정책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고 하나의 사상과 또 하나의 이질적 사상의 대결이니 만큼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대구 유세를 계기로 앞으로 전개될 선거의 양상의 초점은 두 가지로 집약됐다. 첫째는 사상논쟁으로 승패가 가려지게 된다는 것과, 둘째는 야당후보들이 난립했지만 종국은 박정희·윤보선의 맞대결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윤보선 후보의 대구 유세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자 다음날 공화당의장인 윤치영씨가 전남 광주에서 협박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다. “만약 썩은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몇 달 안에 혁명이 또 일어날 것이며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라도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말하고 “2·27선서(박정희 의장의 정치불참 선언)에 참여한 모든 정치인들은 다 썩은 정치인”이라고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윤치영씨 발언에 대해 야당은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처사”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닌 쿠데타 신봉자임을 스스로 폭로한 처사” “이번 선거의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중대 발언” 등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박정희 공화당 총재도 당황한 끝에 윤치영씨를 송환하도록 명했으나 윤씨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발언 강도를 한층 높여 나갔다. “나의 발언은 정치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5·16 전과 같이 공산주의에 먹힐 우려가 커진다” “허정, 윤보선씨의 발언을 문제 삼아야 하며 국가기밀을 외부에 누설시킨 송요찬과 김재춘은 총살돼야 마땅하다” 등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공화당의장인 윤치영씨는 야당에 대한 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허정 후보의 사퇴

    중반을 향한 10·15 대통령선거의 전망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대구 유세를 계기로 야당 진영에 뜻하지 않은 변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허정 후보의 ‘국민의 당’ 안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났다.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박정희 후보와 대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는 여론이 ‘국민의 당’ 안에서 퍼져나갔다. 유세 청중 수에서 윤보선과 허정 후보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일례를 들면 충북 제천에서 윤후보 유세시에는 2만 청중이 모였으나 허씨 유세 때는 불과 500명의 청중이 모였을 뿐이다. 그리고 선거는 항상 ‘양극의 대결’로 결판이 나는 속성이 있다는 통설 때문인지 박정희·윤보선의 양극 현상이 대세를 이룬 마당에 허정씨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대구 유세를 계기로 허정씨의 ‘국민의 당’ 경북지부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북 제5지구가 해체되고 당원 전원이 민정당에 합류했다. 중구에 이병하(후에 국회의원)씨가 중심이 된 ‘허정 후보 사퇴 성명’에 대한 당원들의 서명 공작이 진행됐다. 마침내 그들은 대세가 민정당의 윤보선씨에게 기울어지고 있으므로 ‘국민의 당’을 해체하고 윤씨를 강력히 지지해서 야당의 승리를 쟁취하자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서울에서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민의 당’ 소장파들은 본격적으로 민정당측에 협상을 제의해왔다. 허정씨를 지지하던 박순천씨의 민주당도 거중 조정역을 자임하면서 윤·허 양씨의 단일화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게 됐다.

    9월30일 마산에서 유세중이던 윤보선 후보는 단일후보 문제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중앙에서 진행중이던 허정 후보측과의 협상 내용을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윤씨와 허씨는 10월5일 같은 날짜에 서울에서 유세를 벌이게 됐다. ‘국민의 당’ 대변인 송원영씨는 10월1일 수원에서 주목을 끌 만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서울 유세를 계기로 허정 후보와 윤보선 후보간의 우열이 현저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정치적 명분이 있는 사람이 야당 단일후보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서울에서 어느 쪽에서 많은 청중을 동원하느냐, 누가 많은 지지를 받느냐 하는 것을 단일화의 바로미터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윤씨가 마치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게 자가도취였다는 것을 서울 유세에서 실증하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은 대변인 입만 가지고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처럼 보였다.

    ‘국민의 당’ 대변인이 민정당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 지 하루만인 10월2일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국민의 당’에서 일어났다. ‘국민의 당’ 당수이며 당 대통령 후보인 허정씨는 이날 오후 지방유세 계획을 돌연 중단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허정씨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서 “내가 금년초부터 오늘날까지 결심해온 것은 군정을 종식시켜야만 하겠다는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일야당을 선두에서 제창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후보가 7명이나 난립하고 있어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되는 한 군정종식은커녕 오히려 군정의 재집권을 합리화할 명분을 줄 게 분명하다”고 후보 사퇴 이유를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내가 물러서는 길만이 단일 후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야당 진영은 쌍수를 들어 그의 결정에 대해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허정씨의 대통령 후보 사퇴가 그를 지지해왔던 ‘국민의 당’의 공식 결의나 당의 총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당을 대표하는 대변인은 바로 전날 서울 유세에서 결론을 낼 것을 제안한 바 있었고 당의 중진들은 그들대로 당의 조직과 유세 문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허정씨의 돌연한 사퇴는 결국 허씨 자신의 독단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여하튼 허정씨의 사퇴는 선거의 양상을 박정희·윤보선 양 후보의 1대 1 대결로 굳혀 놓았다.

    “이제는 해볼 만한 싸움”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광주에서 사상논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격전을 개시했다. 대통령 후보로서 대중연설을 처음 갖게 된 박정희씨는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제목으로 선거연설을 했다. 그는 야당후보가 집중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단호히 일축했다.

    “새 민정은 그와 같은 폭로나 비난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지도체계 아래 정국의 안정이 우선”이라고 역설했다. 야당인 윤보선 후보가 10·15 대통령선거를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이질적 사상과의 대결’이라고 규정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 ‘이번 선거는 구악세력과 민중세력의 대결’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그러면서 박후보는 “폭로전술과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만 잡아 가두면 선거방해라고 떠들려는 심리를 알기 때문에 선거기간 동안은 처벌하지 않겠으나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법에 따라 엄단할 방침”이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박정희 후보는 끝까지 사상논쟁의 핵심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선거가 시작된 지 10일이 지났다. ‘이제는 해볼 만한 싸움’이 됐고 유권자들도 날카로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자금도 없이 조직도 미완 상태에서 호남, 충청, 영남권을 몰아친 윤보선 후보의 유세 투쟁은 문자 그대로 피나는 싸움이었다. 10월5일 서울 남산공원 유세가 선거 중반전을 향한 큰 고비가 됐다. 10만 청중을 앞에 둔 윤보선 후보는 “혁명이라는 것은 국민 대중의 사무친 한을 풀어주고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도 군사정부는 총칼로 국민을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고 무력으로 온갖 부정을 감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씨는 반혁명자다’라고 비꼬았다. ‘3000만의 이름으로 박정희씨의 사상을 규탄한다’고 또다시 사상논쟁에 불을 지피는 한편 각 대학에 결성된 ‘YTP’라는 비밀조직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10·15 선거는 처음부터 정책대결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중반전 이후에도 폭로와 인신공격이 지속될 게 분명했다. 윤보선 후보의 서울 유세가 끝나고 이틀이 경과됐을 때 돌연 송요찬 후보(송후보는 구속중에 있었다)가 옥중에서 대통령 후보 사퇴 성명을 나병삼 변호인을 통해 발표했다. 윤보선씨를 기피해 오던 박순천씨의 민주당도 기획위원회의 결의를 통해서 윤씨 지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제는 선거를 해볼 만하다’에서 ‘이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게 됐다. 그러나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진영은 만만치가 않았다. 박정희 후보가 또다시 정면으로 나섰다. 박후보는 충남 유성에서 군정이 종식되면 행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현역 군인들을 전원 원대 복귀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야당에서 단일화 붐이 일어나는 데 대해서는 “정부 요직을 구 정치인이 독점물처럼 여기고 추잡한 흥정이 벌어지고 있다”고 역공세를 취했다.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비위에 맞지 않으면 공산당으로 모는 그들(구정치인)의 한민당식 수법 탓에 억울하게 공산당 누명을 쓴 불쌍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간접적으로 변명했다.

    박정희 후보는 10월6일 대구에서 일대 반전을 시도했다. 10만 청중을 앞에 둔 박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공산주의자나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박후보는 자신에 대한 미국의 날카로운 관심을 의식한 듯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찬조연사로 나선 이만섭(후에 국회의장)씨는 “박정희 후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느니 또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이 있다느니 하는 윤보선씨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관제 빨갱이로 몰아치는 한민당식 수법의 재연이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후보 면전에서 이만섭씨는 박씨와 관련된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사상논쟁의 기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발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0월8일 마산에 내려간 박정희 후보는 마침내 ‘여·순반란사건’과 자신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여·순반란 사건에 자신이 관련된 것처럼 발설한 데 대해 “당시 여·순지구에 주둔한 국군은 14연대이고 자신은 육사생도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므로 동 반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선거가 시작된 이래 박정희 후보가 여·순사건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주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박후보는 “야당측에서 이질적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개인공격을 일삼고 있는 것은 정책대결을 할 수 없으니 사상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흉계”라고 비난까지 했다.

    9월24일 선거가 막 시작됐을 때 윤보선 씨의 전주 발언으로 표면화된 ‘여·순반란사건과 박정희’ 관련 발언, 곧이어 벌어졌던 사상 논쟁은 14일 만인 10월8일에 일대 고비를 맞이하게 됐다. 여론이 분분했다. “윤보선씨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박정희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분명히 어느 한쪽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사상논쟁이 날이 갈수록 혼미 상태에 빠져들고 있을 때 군사정부에서 근무하던 관계인사가 중대한 정보를 지참하고 민정당을 찾아왔다. 그가 제공한 정보는 공보부 조사국에서 발행한 ‘한국 관계 해외 논조연간’(1961년 5월16일∼1962년 5월16일)이었다. 정부가 직접 발행한 간행물이니만큼 누가 보더라도 신빙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바로 전기 ‘연간총집’이 기록한 시기가 군사정권 시대였던 관계로 ‘한국 관계 해외논집’은 크게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정당에서는 ‘연간총집’ 내용을 대통령 후보의 기자회견을 통해서 직접 발표하도록 했다.

    윤보선 후보는 ‘연간총집’에 수록된 1961년 7월6일자 시사통신 기사를 공개하면서 “박의장은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했는지 안했는지 분명히 대답하라”고 강한 어조로 요구했다. 더 이상 논란을 거듭할 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매듭을 짓자는 태도였다. 윤보선 후보는 ‘연간총집’ 927페이지에 수록된 박의장에 관한 프로필을 기자들 앞에서 직접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박의장은 제1군 참모장 당시 남로당(공산당)의 군사부장으로 복무, 1948년 북조선 정부를 지지한 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우인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군에 다시 복무하게 됐다”는 것이다. 민정당 당원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색다른 주장을 들고 나왔다. “윤씨가 폭로한 자료는 국내의 자료가 아니고 외국의 자료를 공보부에서 수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공작금 20만 달러의 행방

    한쪽에서 ‘너는 공산당 당원이었다’고 공격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공산당 당원이 아니었다’고 되받아치는 진흙탕 싸움의 양상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소령이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것은 선거일로부터 14년 전인 1949년 2월13일이 아니었던가? 14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었건만 생존하고 있을 서울고등군법회의의 7명의 심판관과 2명의 검찰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소령에게 무기형을 선고한 심판관들은 왜 떳떳하게 증언을 못하는가? 군법회의 설치 장관을 비롯해서 박정희 소령의 구명 운동을 벌였던 당시의 고위 장성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야당 진영에서는 넋두리 같은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마침내 투표일을 일주일 앞둔 10월9일 안동과 부산에서 절정을 이뤘다. 안동 중앙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유세에서 윤보선 후보가 먼저 폭탄 선언을 했다. “공화당은 민주정당도 아니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당도 아니다. 공화당은 완전히 불법, 위법으로 사전 조직된 정당이다. 그뿐 아니라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의 간첩이 와서 공산당식으로 만든 정당이므로 민주정당이 될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 다음 대목이 파란을 일으켰다.

    “간첩 황태성은 20만달러를 가지고 내려왔다. 김종필은 그를 조선호텔에 모셔놓고, 그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식으로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 가면서 점선식 조직으로 공화당을 조직했다. 이런 정당이 과연 자유주의를 국시로 하는 이 나라에서 민주정당이 될 수 있는가?”

    폭풍의 검은 구름이 몰아치는 듯했다. 즉각 중앙정보부가 반박하고 나섰다. “윤보선 후보의 안동 발언 중 공화당 조직에 황태성의 공작금 사용 운운은 전혀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부인하고, “황태성의 공작금 20만달러 운운은 지난 9월28일 치안국장이 발표한 바 있는 간첩 이만희로부터 압수한 20만달러 건과 착각 또는 혼돈한 것으로 인정되며, 동 금액은 이만희 검거 즉시 압수해 국고에 귀속 처리하고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 시설 기금으로 충당했다”고 해명했다. 간첩이 가져온 달러로 텔레비전 기재를 사왔다는 정보부 발표는 당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표일을 가까이 두고 윤보선 후보의 연속적인 강공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정희 후보는 9일 부산에서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박정희 후보는 10만 청중 앞에서 자기를 빨갱이로 모는 야당 인사에게 묻는다는 전제를 달고 “가령 내가 빨갱이라면 어째서 그들 밑에서 육군 소위에서 소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전방 사단장도 하고 야전군 참모장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단을 몰고 이북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 뻔했나? 또한 그러한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혁명을 했는데 왜 대통령으로 앉아 그것을 비호했는가?” 하고 윤후보를 육박해 들어갔다.

    이판사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사상논쟁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준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의 육탄공격은 유권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만일에 내가 공산주의자였다면”이라는 말을 전제로 우회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해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로서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윤보선 진영에서는 ‘최후의 카드를 언제 사용할 것인가’를 신중히 검토했다. “정부가 간행한 출판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외국 기사는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는가 하면 “빨갱이가 아니었다”고 직선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공화당이나 박정희 후보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시기가 다가온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 게재된 서울고등군법회의 언도 공판 기사는 누구도 변명하기 힘든 국내의 증거물이었다. 투표일을 이틀 앞두고 전격적으로 공개할 것을 민정당 간부회의가 극비리에 결정했다. 그런데 “내가 빨갱이라면 어떻게 사단장을 지냈겠나?” 하고 육탄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박정희 후보도 ‘간첩 황태성’과의 관계에 대한 빗발치는 공격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박후보는 유세차 안동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박후보의 입을 통해 자신의 신상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10월10일자 동아일보를 참고해보자.

    “일제 때부터 황(황태성)과 형(박상희)은 친구였다. 해방 후에 보니 황은 빨갱이였고 그가 북에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경 당시 정보부장 김종필이가 황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했다고 보고해 왔다. 황은 나를 만나야만 이야기를 하겠다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나중에 김종필이라도 만나야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치안국 직원을 시켜 김종필로 가장해 조선호텔에서 만나게 했더니 자기가 이북 괴뢰 무역부상이며 나를 만나면 남북협상 문제를 충분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해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았다. 처음 단서는 대구에 있는 나의 형수를 만나려고 사람을 시켜 보낸 것을 형수가 김종필에게 연락해 잡게 된 것이다. 그 뒤 재판을 하고 법에 의해 처리했다. 이밖에 야당이 떠드는 이야기는 모두 허위 날조된 것이다.”

    이상이 박정희 후보가 황태성에 관해 기자들에게 설명한 요지다. 박후보는 처음으로 간첩 황태성이 자신의 형과 친구 사이였고 해방 후 빨갱이였으며 그후 북한의 무역부상을 지냈을 뿐 아니라 남하해서는 자기 형수와 전화연락을 했고 조선호텔에 묵은 일도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야당으로서는 엄청난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간첩 황태성과 관련해 제기해왔던 의문점에 대해 박정희 후보가 스스로 해답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여·순반란사건’을 위시해 대구 10·1 폭동사건, 그리고 간첩 황태성 사건에 이르는 사상논쟁의 뿌리가 서서히 드러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선거 초반 전주에서 테이프를 끊었던 사상논쟁은 투표일을 3일 앞둔 10월13일에 이르러 마지막 결판을 낼 계획이 수립됐다.

    내가 20여 일 동안 가방 속에 지니고 다녔던 1949년 2월18일자 경향신문 기사와 동년 2월17일자 서울신문 기사를 10월13일 민정당 이름으로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동아일보의 호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민정당 여·순사건 자료를 공개’ ‘당시의 두 신문 보도 제시’라는 통단 제목을 붙이고 상하 5단 제목으로 ‘49년 2월13일 군법회의서’ ‘박정희씨에게 무기 언도’ ‘심판관은 김완용 중령 등 7명’ 등으로 돼 있었다(양 신문의 기사 내용은 이미 소개했음).

    박정희 후보측과 공화당은 대경실색했다. 확실한 증거 앞에 변명할 여지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다. 군사정권은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동원해 동아일보에서 발행한 13일자 호외를 강제로 압수하는 소동을 벌였다. 서울 시내 가판은 말할 것도 없고 철도편으로 수송되는 지방판을 열차 안에서 강제로 압수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발행한 호외는 그 일부가 독자들 손에 들어갔고 대부분은 기관원들 손에 넘어갔다.

    박정희 후보측과 공화당은 그들이 선거 기간 동안 일관되게 부인하고 부정했을 뿐 아니라 야당의 허위선전으로 몰아붙였던 사상논쟁의 진실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자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했다. 공화당은 “박정희 후보가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돼 재판을 받은 일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기 언도는 고사하고 재판 자체를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서울신문 기사에서 심판관으로 거명된 김완용(당시 중령)씨가 “나는 박정희 장군에 대해 재판을 한 사실이 없다”고 재판장을 맡은 사실까지 부인하고 나선 사실이다.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고는 하지만 서울신문과 경향신문 보도를 전혀 없었던 일로 일축하려는 공화당의 저돌적(?)인 전술은 크게 빛을 볼 것 같지 않았다.

    흥분한 공화당은 좌충우돌한 끝에 마지막에는 윤보선 후보에게 빨갱이 시비를 걸어왔다. “박정희씨를 빨갱이로 모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씨도 그 가족 중에 공산당원이 있음이 드러났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공화당은 또 성명서를 통해 “윤씨의 사위 신모씨는 6·25 당시 부역한 후 9·28 수복 이후 피검돼 무기징역을 받은 바 있고 또다른 사위 남모씨도 6·25 당시 부역한 사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인 윤보선 후보는 “나는 사위가 하나밖에 없는데…”라는 반응을 보여 화제가 됐다. 사상논쟁의 종말이 흙탕물 싸움으로 변질하는 듯했다.

    10월15일은 역사적인 선거의 날이다. 박정희 후보나 윤보선 후보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는 심정으로 1298만 5015명에 달하는 유권자의 심판만을 기다렸다. 15일 아침 투표를 일찍 끝내고 안국동 윤보선씨 댁에 도착해보니 집 주위가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1700여 평의 윤보선씨 댁이 완전히 기관원에 의해 포위돼 있지 않은가? 검은색 지프가 담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윤보선의 도피작전

    대문 안에 들어서자 김영삼 대변인이 기자들에 둘러싸여 긴급회견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대변인은 “윤보선씨 자택은 13일 밤(선거 이틀 전)부터 10여 명의 기관원에 의해 포위됐으며 실질적으로 연금 상태에 있다. 신변 보호를 위해 5명의 경찰관이 지키고 있는데도 별도의 감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대변인은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일 뿐 아니라 이러한 사태는 공포 분위기에서 부정선거를 치르겠다는 저의로밖에 볼 수 없는 만큼 3000만의 눈으로 감시하며 부정을 적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선거운동은 끝이 났지만 공포 분위기는 사라질 줄 몰랐다. 그때 돌연 윤보선 후보가 부인을 동반하고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병원길에 나섰다. 김남씨와 내가 수행했다.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윤후보를 뒤따랐다. 정체불명의 기관원을 태운 지프들도 부지런히 뒤따라왔다. 수십 대의 자동차 행렬이 을지로2가에 있는 백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김남씨가 안국동 집을 떠나기 직전 “이봐, 백병원에 도착하거든 윤보선씨가 치료를 마치고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원에 들어오지 말고 한두 시간 기자들과 같이 기다리도록 하라”고 내게 귓속말을 했다.

    윤보선 후보 내외가 백병원 현관문에 들어서자 뒤따르던 기자들과 기관원들은 나와 함께 병원 앞마당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윤씨 내외의 모습은 현관 정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기자들과 기관원에게 둘러싸였던 나는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하게 됐다.

    “윤보선씨가 어디로 갔는가?”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우리를 따돌린 게 아닌가?” 기관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나를 연행하려는 듯한 기색까지 보였다.

    “나는 모른다. 사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나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윤보선씨가 백병원에서 행방을 감춘 사건은 신문기자들보다 수많은 기관원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협박을 가해왔다. “당신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말을 안해주면 재미없다”고 대들었다.

    기관원들을 뿌리치고 안국동 윤보선씨 댁에 돌아온 나는 대문을 굳게 잠가버렸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끝날 때까지 윤보선씨 내외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윤씨의 피신 행각은 007작전을 능가했다. 후일 윤보선 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윤씨 내외의 도피 작전은 미 정보부에 근무하던 케디 중령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됐다는 것이다. 윤씨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윤씨 측근의 요청으로 케디 중령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윤씨 내외가 백병원에 도착, 치료를 가장해 2층 원장실에 들렀을 때 그 자리에 원장은 없었고 대신 간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간호원의 안내를 받아 병원 뒤쪽 후문으로 윤씨 일행이 빠져나가자 거기에는 미국 여성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폴크스바겐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미국 여성은 케디 중령의 부인이었다. 윤씨 내외는 개표가 끝날 때까지 케디 중령 집에서 신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마치 첩보활극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따지고 보면 10·15 대통령 선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15일 투표가 끝나고 곧 전국적으로 개표가 시작됐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중간 개표는 방송과 신문사에서 때때로 발행하는 호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논쟁에 대해 이 나라 유권자들은 과연 어떠한 판정을 내릴 것인가? 15일 밤 11시 첫 중간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10만여 표를 개표한 결과 윤보선씨가 7000여 표 앞섰다. 다음날 16일 아침 오전 중에 나온 중간 발표는 윤보선씨의 10만여 표 리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표 결과는 역전됐다. 윤보선씨가 서울에서 박정희씨를 배 이상의 표차로 압도하고 강원, 경기, 충남, 충북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박정희씨는 경남에서 압승한 데 이어 경북, 전남, 전북에서 우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 후보의 득표 성향이 추풍령을 사이에 두고 중부와 남부로 확연하게 갈라진 것이다. 17일 오후 3시 개표가 완전히 끝났다. 박정희씨가 470만 2642표, 윤보선씨 454만6614표였다. 두 사람 사이의 표차는 15만6028표로 나타났다.

    사상논쟁, 누구한테 유리했나

    유권자의 최종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박정희·윤보선의 숙명적인 대결은 박정희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됐다. 10월17일 경주 관광호텔에서 개표결과를 지켜보던 박정희씨는 서울 안국동 윤보선씨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왔다.

    “윤보선 귀하. 민주정치 재건에 역사적 과업인 제3공화국 대통령선거에 있어서 귀하의 선투에 대해 만강의 경의를 표합니다. 비록 앞으로 여야의 입장을 달리하더라도 새로운 정치 기풍의 조성과 전통의 수립을 위해 더욱 협조와 편달이 있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박정희 당선자로부터 전문을 받은 윤보선 씨는 같은 날짜로 박씨에게 다음과 같은 답신 전문을 보냈다.

    “귀전을 감사하며 귀하의 당선을 축하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표시된 민의를 존중하며 이 나라 민주발전에 노력하기를 빕니다. 윤보선.”

    선거 직후 박정희·윤보선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던 축하와 위로의 전문은 사실상 국민 심판에 깨끗이 승복하는 아름다운 증표가 됐다.

    5·16에서 시작해서 꼭 30개월 동안 계속돼왔던 박정희씨와 윤보선씨의 숙명적인 대결은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대미를 장식했다. 결국 “민정의 회복이냐? 군정의 연장이냐?”의 싸움은 형태만을 바꾼 군정의 연장으로 끝마침이 된 셈이다. 그런데 남은 문제는 사상논쟁을 유권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는 점이다. 10·15 대통령 선거가 40년 가까이 흐른 2001년에 와서도 사가나 학자들은 “사상논쟁 때문에 박정희씨가 승리했다” 혹은 “윤보선씨는 사상논쟁 때문에 많은 득표를 했다”는 의견으로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는 한 이와 같은 논쟁은 끝을 모르고 평행선을 달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0·15 선거에서 사상논쟁이 대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만일에 사상논쟁이 대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선거결과는 일방적인 게임으로 끝났을는지 모른다는 게 나의 변치 않는 생각임을 이 기회에 분명히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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