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다시 ‘1만 시간 공부’에 도전하는 희열

이초식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 입력2004-11-16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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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빠져든 논리경험주의의 매력은 진리에 대해 논쟁하기에 앞서 참이라고 주장하는 말의 의미부터 분명히 하자는 데 있다. 가령 유신론·무신론 논쟁에서 ‘신’의 의미가 다르면 생각이 같아도 의견이 다르다. 따라서 ‘의인화한 신’은 없다는 무신론과 ‘자연의 조화를 가능케 하는 존재로서의 신이 있다’고 믿는 유신론은 공존할 수도 있다.
    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하며 감사해 할까. 돈이 많은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까, 이 땅에 태어났기에 서로 만나 행복을 기약하며 결혼하는 젊은 부부들일까,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그밖에 보호와 혜택을 많이 받은 계층일까, 아니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일까. 도대체 우리 중에 몇 퍼센트나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할까.

    요사이 뜬금없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36년간의 대학강단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자유의 세상에 직면하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고 옛 스승과 친구들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에 태어나 복된 이유

    1947년 초등학교 6학년 국어교과서에 ‘자유의 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자유의 종이 울렸다’로 시작해서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로 끝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은 이 시로 시범수업을 하셨다. 장학사들인 듯한 외부 손님들이 수업을 참관했다. 선생님은 나이도 지긋하고 대범하며 소신 있는 분이라 예행연습 같은 것은 하지 않고 그저 평소의 국어시간처럼 수업을 이끌어가셨다.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업 마지막 무렵에 선생님은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은 질문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라는 대목에서 왠지 분노 같은 열기를 느꼈고, 이를 참지 못해 손을 들고 일어나 격앙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선생님,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대우를 받았고, 하고 싶은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겨우 해방이 되고 나선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큰 범죄를 저지른 범인처럼 몰래 38선을 넘어야 하게 된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인데 복되다는 말씀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형벌이지 결코 복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나는 평양에서 해주로 월남하다 잡혀 이른바 ‘38감옥’이란 것도 구경했고, 간신히 풀려나서 어선 고기통 속에 숨어 북측 경비대가 총을 쏴대는 바다를 지나 월남하긴 했으나 개성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여정을 마친 지 불과 3, 4개월쯤 된 때였다.

    나의 당돌한 질문에 대해 선생님은 너그럽게 이해하는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너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더 행복하고 우리보다 못한 처지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나쁜 조건에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그러니 이 시처럼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복 받았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까닭들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당시는 선생님의 그런 말씀이 납득되지 않았으나, 그후 반세기 이상을 보내고 난 오늘에 이르러 회고해 보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게 여겨지는 까닭을 무척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해방 후 혼란기에 허송세월하지 않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엄히 가르쳐주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한국전쟁 당시 부산 송도 뒷산에 천막을 쳐놓고 학생들을 모아 열심히 가르치신 여러 선생님들, 서울수복 전 지역별로 훈육소를 마련해 가르치시고 영국군이 주둔해 있던 교사의 한 모퉁이를 얻어 포성이 들리는 교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철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철학교수 생활을 하려던 게 아니라 내가 몸 받쳐 섬기고 싶은 종교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존경하던 목사님에게 “신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상담을 청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은 내가 목사라는 사실”이라며 내게 철학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신학을 하고 싶으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충고였다.

    신학 예비학문으로 철학 선택

    나는 그분의 충고가 계기가 되어 철학과를 지망했고 그후 철학교수로서 한평생을 보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그분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말처럼 내 젊은 시절의 고생은 참으로 소중한 밑천이 되었다. 동란 당시 나는 나이가 모자라 군대에 가진 못했으나 고달픈 ‘생활전선’에서 잠시나마 다양한 장사경험을 쌓았다. 수원-남양-사강을 맴도는 장돌뱅이, 온양-천안-성안-둔포를 거쳐 다시 온양으로 회귀하는 ‘양키물건’ 장수, 구포-삼량진-창원을 오가는 기차에 무임승차해 김해 배를 파는 장사, 부산 도떼기 시장에서 땅콩을 사와서 영주동 골목에서 파는 장사 등의 경력은 내게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때도 철학을 하면 배가 고프다고들 했지만 나는 아직 철학하다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나는 대학을 못 나와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왕이면 하고 싶은 공부나 마음껏 해보자는 심산으로 철학과를 지원했다. 내가 신학을 하기 위한 예비학문으로 철학과를 택했다가 신학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과학철학과 논리학, 특히 확률과 의사결정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장사경험에서 얻은 삶의 방식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후 3년 정도의 무급조교와 시간강사 생활을 끝내고 1965년에 운 좋게 서울교육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무급조교를 시작했을 때는 ‘칸트도 10여 년간 가정교사 생활을 했고 스피노자도 평생 안경알을 갈며 철학을 했으니 나도 장기간 가정교사 등 사교육으로 생계를 돌보며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빨리 시간강사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바라던 전임강사가 되고 보니 한편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철학으로 밥벌이를 하다니 소피스트가 따로 없구나. 나는 소피스트야, 그것도 애송이 말단 소피스트….

    이런 자화상을 그리며 고민하다가 속죄하는 뜻으로 학생들과 철학책을 함께 읽기로 했다. 방학 때 철학책을 읽을 학생들을 찾는다고 게시판에 써붙이니 여러 학생들이 모였다. 당시 교육대학은 2년 과정이었므로 과제물이 많았고 학생들은 성적순으로 발령을 받게 되므로 학교 성적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학점 따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철학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이 있을까 의아해 했는데, 철학에 대한 학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서울교육대학 철학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발족했고, 그후에는 ‘서울교육대학 철학동문회’도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꾸준히 공부해 오고 있다.

    서울교대에서 ‘교육’을 배우다

    나의 교단생활에서 보람이 컸던 일을 꼽으라고 하면 서울교대 철학연구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 노릇도 10년 가까이 했는데, 그때 가르친 제자들은 돈을 주고 받는 것으로 ‘계산’이 깨끗하게 끝났다. 그런데 돈도 안 받고 학점도 안 주며 바쁜 시간을 빼앗은 철학연구회 제자들과는 30년이 넘도록 ‘관계정산’이 잘 안되어 요즘도 가끔씩 만나고 있다.

    오늘날엔 교육을 장사에 비유해 ‘소비자 위주의 교육’이니 ‘잘 팔릴 수 있는 교육’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교육장사’야말로 우리 사회와 교직자들이 숙고해야 할 중대사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장사라고 할 수 있어도 특수한 장사이며, 교육자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특수한 노동자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백화점 점원이라면 손님에게 물건을 주고 물건값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지식이나 인격이라는 상품을 사고팔 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돈 외에도 무엇인가가 오가는 것이다. 바로 그 ‘무엇’ 때문에 존경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애를 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임금투쟁을 하는 가까운 제자 교사들에게 “나라면 임금투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은 손해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임금투쟁은 이겨도 손해고 지면 더욱 큰 손해기 때문이다. 이기면 돈은 좀더 받는 대신 그 돈보다 더 큰 ‘그 무엇’을 잃기 때문이고, 지면 돈도 더 못 받고 그 큰 ‘무엇’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의 가치를 영(零)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기면 득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겠으나 나는 ‘그 무엇’에 큰 비중을 두므로 그렇게 믿는다.

    이 기회에 학부모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학부모들은 교사보다 학식도 많고 가진 것도 많다보니 무심코 선생님들을 경멸하는 언사나 행동을 하기 쉽다. 교사라는 직업은 권위 없이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므로 교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는 양질의 교육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서 인사를 받듯이, 아직 명예교수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거북하지만 “전국의 학부모들이여,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십시오”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교사들 중에는 믿을 수 없고 존경스럽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존경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모두 자신을 하늘같이 믿고 사랑하는 자녀를 맡겼으며 그들로부터 존경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어떤 교사도 아이들을 소홀히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는 의사들이 의료봉사를 하듯이 돈을 안 받고 가르치는 ‘교육봉사’를 꼭 해보기를 권한다. 나는 그것이 크게 득이 되는 장사라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길을 모색해 보고 싶다.

    서울교대에서 보낸 12년의 교단생활은 경험이 부족해 서투른 것도 많고 실수도 많이 했으나 학생들이 철학에 목말라하며 열정적으로 학문을 수용했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할 흐뭇한 보람을 맛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아! 교육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교대에서 교육을 배웠고 건국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이르러 비로소 연구생활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20년에 걸친 나의 고려대학교 시절은 연구생활의 황금기였다. 내가 고려대로 간 1980년대 고려대에 학생시위가 그치지 않던 혼란기였는데 어째서 연구생활의 황금기라고 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은 교수들의 연구생활을 여러 면에서 방해했으나 고려대 당국은 교수들을 보호하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울타리 노릇을 해줬다.

    동료 교수로부터 고려대에서 나와 같은 전공의 교수를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나가는 말처럼 “그럼 내가 가볼까?”라고 말한 지 1주일 후에 고려대 관계자에게서 “철학과 교수 전원의 동의를 얻었으니 총장 면담을 하러 오라”는 통고를 받고 고려대학교로 옮기게 됐다. 나는 그 이전에 여러 대학에 출강한 경험은 있었으나 고려대에서 강의한 적은 없었고 철학과 교수님들도 많이 알고 있지 못한 처지였다. 그렇지만 고려대에 대한 첫인상은 아주 흡족스러웠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동료교수 한 분이 “이게 우리 학교 농장에서 재배한 것이니 한번 맛보시라”면서 버섯을 선물했다. 그분은 당시 학교 행정을 맡아 내가 고려대로 오는 데 힘을 써주신 분인데, 그 이전에는 나와 안면도 없던 터였다. 나는 얼김에 선물을 받아들고 당황했다. 내가 그분께 선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분이 먼저 내게 선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선물을 하는 것보다 그 분이 ‘앞으로 수고 많이 해달라’는 뜻으로 내게 선물하는 ‘그림’이 더 멋있게 보였다.

    나는 고려대에서 과거의 교육·연구경력을 모두 인정받아 높은 호봉의 정교수로 임명됐다. 또한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처음엔 1년으로 계약했다가 다음 번에는 5년을 계약했는데, 고려대에서는 처음에는 3년, 다음에는 10년을 계약하는 파격을 보였다.

    그래서 교수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고 느끼던 차에 동료교수의 따뜻한 마음을 읽게 되니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한 학교는 뭔가 다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고려대 교무수첩을 보면 다른 대학들과는 달리 교원 대부분이 정교수였으며 전임강사나 조교수는 몇 안되었다. 직위와 호봉은 재정과도 직결된다. 그 시절은 교수 임명의 계약제가 교수들을 위협하고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되기 쉬운 때였다. 따라서 고려대가 호봉책정과 계약문제에 그처럼 성의를 보인 것은 ‘학교는 최선을 다해 재정을 지원하고 신분을 보장해줄 테니 자유로이 연구에만 몰두하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학교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된다. 강제로 출근부에 도장을 찍게 하고 승진과 계약제를 들이밀며 직접, 간접으로 위협할 때 느끼는 책임감과는 질이 달랐다.

    가령 문과대학 교수들에게 논문을 강요하는 게 요즘은 당연한 것이 되고 있으나 이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논문을 강요하면 논문은 나올 것이며 일정한 수준의 교수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학교 운영으로는 규격화한 중간 크기 정도의 고기를 낚을 수는 있어도 대어를 낚을 수는 없다.

    과거의 학교 운영자들이 진급과 계약제를 요즘처럼 활용할 줄 몰랐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나름대로 많은 투자를 하고 통제를 풀어 자신을 공격하는 자유까지 부여했을 때는 무엇인가 크게 바라보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참고 기다리는 도량도 있었을 것이다. 교육자들에게 자유와 자율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타율적인 제재와 지배를 통해 바로잡으려는 것은 진정한 교육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격이다.

    “젊은 교수는 집에 가서 공부나 해”

    격렬한 시위로 학생과 경찰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그 시절 다른 대학들은 학생들의 시위 조짐이 있으면 교수들을 대기시키거나 때로는 “어느 교수는 어디에서 시위를 막으라”고 장소까지 정해 주기도 했다. 그때 교수 휴게실에 많은 교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어느 노(老)교수가 젊은 교수들에게 “학교는 보직교수와 늙은이들이 맡을 것이니 당신네들은 모두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했다. “젊은 교수들은 자칫하면 학생으로 오인될 지도 모르니 뒷문으로 나가되, 혹시 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르니 웃거나 농담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라”고 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학생들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시위를 한다고 판단됐을 때 시위를 막기 위해 몇 차례 자발적으로 나선 적이 있었지만, 그런 학교 분위기 때문에 시위가 있을 때는 곧바로 귀가하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고려대 철학과는 다른 학과에 비해 시위에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다.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학생들 중에는 나와 의견이 다른 학생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교수인 나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지켰으며, 사제간의 두터운 정에도 변함이 없어 연구실에 찾아온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곤 했다.

    당국은 학생시위가 좌경화하고 그것이 자생적인 데 그치지 않고 북쪽에 추종하는 것으로 의심했고, 학생들은 “우리를 터무니없이 빨갱이로 몰고 있다”며 반박하는 공방전이 거듭됐다. 그때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충고를 건네곤 했다.

    “자네들이 공산당 누명을 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학 게시판에 남쪽의 군사독재를 타도하자는 대자보를 열 번 써 붙일 때 한 번 만이라도 ‘우리는 모든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며, 그것은 남쪽 독재에 한정되지 않고 북쪽의 독재에도 해당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여봐라. 그리고 이쪽 독재자를 비방하는 것과 같은 어법으로 북쪽 독재자도 비방한다면 너희들을 어떻게 빨갱이로 몰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충고가 실현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독재를 타도하자, 인권을 존중하고 옹호하자, 북한 동포도 우리와 같은 동포니 증오하지 말자, 하루속히 통일을 하자는 학생들의 주장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 있게, 그리고 편향되지 않게 주장하는 일인 듯하다. 북한문제 연구가 나의 전공은 아니지만, 나는 북한이 고향이며 그곳에는 아직도 일가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크다.

    열악한 처지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도록 힘쓰는 것은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로 찬양할 만하다. 하지만 북한 동포를 우리처럼 생각한다면 울산 노동자와 인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돕듯이 함흥 노동자와 남포 노동자들의 권익도 언급해야 할 것이며, 부산과 광주 교원들의 교권을 생각하듯이 의주와 원산 교원들의 교권도 열 번에 한 번쯤은 옹호하고 나서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논리경험주의의 매력

    나는 지난 20년간 여러가지 악조건에서도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어 비교적 좋은 연구환경을 가질 수 있었으나, 이에 부응하는 연구성과를 내지 못해 지금도 빚을 진 느낌이다. 언젠가 그 빚을 갚아보고 싶다. 그래서 정년퇴임식장에서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선 1만 시간 공부를 해보겠다”고 했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만 시간을 생각하게 된 것은 조종사인 중학교 때 친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비행시간 1만 시간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시간만큼을 책상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이면 얼마나 될까? 음악을 전공한 내 친구는 “이제 나이가 나이니만큼 공부도 ‘아다지오(Adagio)’로 쉬엄쉬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대충 주당 20시간씩 공부한다고 가정하니 1년(50주)에 1000시간을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1만 시간을 공부하려면 10년이 걸리는 셈이다.

    나의 유한성을 고려할 때 내가 할 공부는 그동안 해왔듯 과학철학과 연결된 과학기술학에 기여하고 논리교육을 연구,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과학철학과 논리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학부 3학년 때부터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철학을 선택했기 때문에 학부 초기에는 실존철학과 노장철학 등에 심취했으며, 현대문명 비판의 철학적 성향에 끌렸다. 하지만 철학사 공부를 통해 다양한 철학적 성향을 알게 된 후에는 과학의 기초를 새롭게 확립하려는 논리경험주의와 현실을 개척하려는 프래그머티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과학기술이 뒤떨어져 식민지 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 그때껏 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철학적 사유도 그 부정적인 측면을 폭로하고 배척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규명하고 이를 우리의 삶에 맞도록 재구성하는 철학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철학계에서는 적자(嫡子)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이 분야의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논리경험주의 철학에서는 새로 개발된 기호논리를 철학함의 도구로 사용하므로 이 논리를 모르면 그 분야의 철학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논리공부를 해봤더니 고등학교 시절 수학에 취미가 있던 터라 내 적성에도 맞았다.

    논리경험주의의 매력은 진리에 관해 논쟁하기에 앞서 참이라고 주장하는 말의 의미부터 분명히 하자는 데 있다. 철학사에서의 다양한 논의나 일상생활에서의 논쟁에서 서로 참이라고 주장하고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이때 서로 주장하는 의미가 다르면 논쟁의 성과를 얻기 어렵다. 가령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에서 ‘있다는 신’과 ‘없다는 신’의 의미가 서로 다르면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의견이 다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의인화한 신은 없다’는 무신론과 ‘자연의 조화를 가능케 하는 존재로서의 신이 있다’고 믿는 유신론이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논리경험주의의 인식적 의미 기준과 그에 의거한 반(反)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상언어학파나 프래그머티즘과 결부되면서 여러가지 비판의 대상이 됐으며, 나도 철학을 과학의 논리에 한정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됐다. 과학연구는 과학의 논리와 과학적 지식이론뿐만 아니라 과학의 역사학과 사회학 및 정책학 등으로 확장돼야 하고, 따라서 앞으로 기술철학을 본격적으로 다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환경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술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적 음미는 1970년대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기호논리를 기계공학적으로 응용한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초로 기억된다. 1971년에는 앞으로 컴퓨터 지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생산성본부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강좌를 몇 달 동안 청강했다. 연필로 종이 위에서만 풀어보며 상상해 오던 기호논리가 컴퓨터를 통해 역동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해 이 길을 좀더 파고들고 싶었으나, 이미 교육대학에서 도덕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직에 있었으므로 실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두뇌를 모방한 컴퓨터와 컴퓨터를 통해 인간의 인지활동을 연구하는 데에는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으며,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언어학, 논리학, 철학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 관해 학제적인 연구를 하는 학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를 1993년 ‘인공지능의 철학’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또한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 과학언론학, 과학관리학을 통합 운영하는 과학학 협동과정이 고려대 대학원에 설치되면서 지난 6년 동안은 이 일에 주력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한국과학기술학연구회를 책임지고 있다.

    필자가 서울교대에서 도덕교육을 담당하면서, 그리고 학생들과 철학책을 읽는 동아리 모임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교육에 철학교육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학생들이 철학공부를 절실하게 요구했으며, 교육의 근본을 새롭게 하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는 지적 욕구가 강한 어린 시절부터 수준에 맞게 철학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대 출신의 많은 현직교사들도 이에 동감, 철학동문회를 연구회 모임처럼 자주 갖고 고민하면서 어린이 철학교육의 모델을 모색했다. 그러던중 1980년대 초에 우리가 주목한 것이 미국 어린이철학개발원의 철학교육 이론서 및 그와 연결된 어린이용 교재와 교사용 지침서였다.

    한편 한국철학회를 비롯한 철학계에서는 고등학교 철학교육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철학교육, 특히 논리교육을 기반으로 한 철학교육의 연구개발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어 1990년 중반부터 한국철학교육아카데미의 책임을 맡게 됐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내게 남은 공부시간은 과학철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학과 철학교육을 지향하는 논리교육 분야에 할애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서울교대 철학회에서 쓰던 표어로 거창하게 말해보면 ‘인간교육에 의한 인간혁명’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달라지는 인간혁명이 절실히 요망되며, 그것은 철학적 인간교육에 의해서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간교육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날마다 변해가는 사회 안에서 수행돼야 하므로 과학기술 일반에 관한 기초지식을 수반해야 할 것이다.

    오래 공들여 만들어진 땅

    뿐만 아니라 인간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는 자주적인 인간이므로 늘어나는 과학정보들을 그저 축적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과학정보를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데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교육에서 논리교육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필자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했고 저런 일을 해보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로부터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와 가족, 친척들의 보살핌은 물론이고, 학교 및 학회의 동료와 선후배 교수들의 도움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왔다. 게다가 나는 제자 복도 많아서 나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산하를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그런 우수한 제자들이 직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런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지 못하는 것은 큰 손실로 여겨진다.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는 ‘이 땅’을 인간관계의 모태로서만 이야기했는데, 한반도라는 이 땅이 다른 땅과 구별되는 특색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공통과학 교재에 지질시대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구의 나이 46억년을 1년으로 환산해 인류가 출현한 시점이 언제인지를 알아보라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 1시간이 약 52만5000년에 해당하니 인류의 탄생시점을 100만년 이전으로 잡는다 해도 지구가 1월1일에 출발해 현재 12월31일 자정에 이르렀다고 가정하면 인류가 출현한 것은 12월31일 밤 10시가 지난 시점이 된다. 이렇듯 인류의 출현은 지구의 차원에서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일찍이 경기도 연천 전곡리에 살았던 전기 구석기인들은 겨우 5, 6분 전에 출현했고, 우리의 ‘반만년 역사’도 40초 전부터 시작됐으며, 사람의 한 평생 70년은 고작 0.5초 정도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도봉산 관악산 불암산 등지의 화강암은 1억6000만년에서 2억년 전의 것이라고 하니 12월 중순 정도에 생성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바닷속에 있었던 증거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현재의 형태로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은 2억년 전 경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는 크기는 작지만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20억∼30억년 전의 지층에서부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에 이르는 지층들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고귀한 땅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그처럼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진 땅이 바로 이 한반도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도 중요하고 되찾은 땅을 잘 가꾸는 일도 시급하지만, 그에 앞서 땅의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는 일이 더욱 중요할 것 같다. 땅의 의미를 모르면 땅을 되찾아 가꾼다는 것이 오히려 땅을 망치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땅의 개간과 보존을 비롯한 환경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환영할 일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이해타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고, 환경문제가 정치적 투쟁의 수단으로 오용돼서도 안될 것이다. 환경문제는 우리 세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와 지구인 모두의 문제이므로 깊고 폭넓은 철학적 숙고가 필요하다. 하여간 그런 숙고가 후세인들이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라는 귀결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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