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안데스의 축복' 티티카카湖에서 영혼을 씻다

  • 권삼윤 < 문화비평가 > tumida@hanmail.net

    입력2004-11-16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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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티카카는 해발 3800m가 넘는 고원에 펼쳐진 8300㎢ 넓이의 엄청난 호수. 평균수심도 280m에 이른다.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모여 생긴 티티카카가 있었기에 안데스인들은 자신의 삶터를 문명의 땅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최후’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비장함이 서려 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 순간,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한 가지만은 아니다. 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 고비를 넘겨보려는 사람도 있다. 명나라 최후의 황제 숭정제는 그 많던 신하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주위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쯔진청(紫禁城) 북쪽의 징산(景山)에 올라 나무에 목을 매 자진했는데, 이는 전자의 예라 할 것이다. 잉카의 왕 아타왈파는 정복자 피사로에게 붙잡히자 “내가 가진 황금을 다 바칠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것이 무망해지자 “죽이더라도 제발 화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며 또 황금을 뇌물로 바쳤다. 이는 후자의 예로 볼 수 있다.

    페루에 와서 잉카제국의 왕도인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며칠간 다니면서 본 것은 잉카제국의 최후 아니면 패망에 관한 것들이라 스산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신이 나지 않았다. 뭐 좀 재미나는 일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 잉카제국의 최후가 아니라 그 첫출발을 본다면 기분이 좀 달라질 것 같아 쿠스코 남쪽의 티티카카 호수로 발길을 옮겼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태양의 섬(Sun Island)’은 잉카제국의 시조 망코 카파크(Manco Capac)가 강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지붕에 고인 호수

    쿠스코를 떠난 아에로 페루 항공기는 한동안 눈덮인 안데스 산맥을 보여주다가 평탄한 고원 속에 자리잡은 훌리아카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동안 줄곧 가파른 산세만 보다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서 평탄한 고원을 만나니 솔직히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산들도 휴식이 필요해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훌리아카공항에서 푸노(Puno)까지는 40km. 공항버스가 푸노에 가까워지자 한쪽으로 호수가 가만히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넓어 처음엔 바다인가 했는데, 그것이 그토록 보고 싶어한 티티카카 호수다. 푸노는 바로 그 티티카카의 관문이다.

    티티카카는 금방이라도 태양의 섬으로 달려가고픈 내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너무나 태평스러웠다. 조용한 수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펼쳐진 하얀 모래밭과 초지, 이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흰눈 덮인 고봉들이 어느새 커다란 거울로 변해버린 호수 위에 어려 그대로 한폭의 풍경화가 됐다.

    해발 3810m에 이르는 고원에 8300㎢나 되는 엄청난 호수가 있다니 ‘세계의 지붕에 있는 호수’란 말이 실감났다. 티티카카는 평균수심도 280m나 된다.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모여 생긴 티티카카는 안데스인들에겐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 호수가 있었기에 이곳이 일찍이 문명의 땅이 될 수 있었다. 잉카제국은 그 대표적 물증이다.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가 거의 반반씩 나눠갖고 있으니 국경선이 호수 위에 그어져 있는 셈이다.

    페루를 찾은 관광객들이 볼리비아로 넘어가지 않고서도 티티카카 호수를 즐길 수 있는 푸노는 그리 작은 도시가 아니다. 성당만도 몇 개나 되고 호텔은 그보다 훨씬 많다. 또한 육로로 볼리비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푸노에서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버스는 하루 한 차례, 그것도 오전에만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는 모터보트로 40분쯤 걸린다는 호수 안의 우루스(Urus) 섬을 찾기로 했다.

    섬에 가까워지자 물결은 잦아들고 대신 갈대밭이 펼쳐졌다. 이곳 사람들이 ‘토토라’라고 부르는 갈대는 키가 몹시 커서(7m나 된다) 시야를 온통 가렸다. 배는 그런 갈대 사이로 난 수로를 따라 달렸다. 그러다 ‘우루스’라는 팻말이 나타나자 속도를 완전히 줄였다.

    그때 햇볕에 검게 그을린, 밝은 표정의 인디오 여인이 배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는 둥근 챙이 달린 옅은 밤색의 모자를 올려 썼으나 두 가닥으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은 등허리를 타고 내려와 엉덩이를 살짝 덮었다. 위에는 털스웨터, 아래는 발레복처럼 부푼 치마를 입었는데 그 안으로 바지도 보였다. 전형적인 인디오 여인의 차림이었다. 검은 직모(直毛)에 황색 피부, 몽골계 체구라 우리 여인네와 매우 닮았다. 사공은 그녀에게 입장료를 건네주고 다시 속력을 냈다.

    갈대 위에 떠있는 섬

    우루스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보트는 섬과 섬 사이를 지나 가장 멀리 있는 섬으로 향했다. 그곳의 작은 부두(?)에는 갈대배 두어 척이 매달려 있었다. 섬 주민들의 자가용인 듯했다. 예고도 없이 방문객이 나타났지만 이내 젊은이 하나가 다가와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잘못 밟은 것 같아 낭패스러웠다. 섬에 닿았다고 아무 생각없이 땅바닥에 발을 내디뎠는데 촉감이 이상했다. 너무나 푹신푹신해서 어디론가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섬이라고 하지만 바닥은 흙이 아니라 그 일대에서 자라는 토토라를 베어다 깔아놓은 것이라서 그랬다. 우루스는 그렇게 ‘떠있는 섬’이다.

    갈대섬에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일년에도 몇 차례 갈대를 베어다 바닥에 깔아야 물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런 성가신 일을 하면서 이 섬에서 사는가 하고 묻자 안내원은 “우리 조상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호수 안에 인공 섬을 만들어 살았는데,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 갈대섬의 역사도 어느덧 500년이 된다. 지금은 60명쯤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우루스는 이처럼 무시 못할 역사를 자랑한다.

    이 섬에는 세 가구만 사는지 집은 세 채만 보였고, 그 앞의 넓은 공터에서 양과 돼지, 닭들이 노닐고 있었다. 먼저 안내된 곳은 집에 딸린 작은 박물관이다. 섬에 사는 새들을 박제해 전시하고 있는 곳이어서 ‘자연사 박물관’인 셈이다. 고립된 섬에 사는 그들인지라 멀리, 높이 나는 새를 좋아했기에 이런 것까지 세워놓은 것 같았다. 그들은 새 중의 새인 콘도르를 신성시한 잉카족의 후예들이기도 하다.

    또 다른 섬으로 갔다. 이번엔 꽤 큰 섬이다. 부두에는 대형 모터보트도 있었는데, 입구의 기념품 가게는 그걸 타고 온 관광객들로 포위된 상태였다. 색색의 털실로 짠 스웨터, 모자, 장갑과 미니 갈대배 등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15채 가량의 개인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옆으로는 학교와 의무실, 공동화장실, 운동장도 보였다. 초등학교엔 두 개의 교실이 있는데, 후지모리 전대통령이 직접 찾아와 기증했음을 알리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이라야 한두 개가 고작인 그들의 집은 오직 잠만 자는 곳인 듯 맷돌을 돌리는 일이나 털옷을 짜는 일, 빨래와 밥짓기 등 모든 활동은 밖에서, 그것도 여자들이 해내고 있었다. 양과 돼지, 닭 등의 가축을 돌보는 일도 여자들의 몫이다. 여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그 옆에선 한 남자가 갈대더미를 침대삼아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인디오 사회에서 남자들은 그렇게 빈둥거리는 대신 집안일에는 전혀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고 했다. 돈주머니는 모두 아내들이 관리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회에서 성인 남자의 직업은 그저 ‘남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옛 잉카시대에도 남자들은 저랬을까. 그랬기에 소수의 스페인 정복자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만 것일까.

    티티카카엔 방해꾼이 없다

    티티카카엔 우루스같은 작은 섬뿐 아니라 타킬레, 아만타니 등의 큰 섬들도 있다. 그날 밤 푸노의 호텔에서 타킬레를 다녀온 독일 관광객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타킬레는 우루스와 다를 바 없으며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우루스와는 달리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 사람들이 더 친절한 것이라고 했다. 덕분에 그들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었다며 시간을 내어 꼭 한번 찾아보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볼리비아로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볼리비아행 버스는 아침 8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그전에 푸노 근교(30㎞ 거리)의 시유스타니 유적을 둘러볼 참으로 택시를 불렀다. 시유스타니는 잉카제국 건립 이전에 세워진 석탑무덤 유적으로 잉카의 것과 같이 거석 축조물이다.

    푸노의 아침 날씨는 차가웠다. 차는 낡아서 덜컹거렸으나 태양이 막 잠에서 깨어난 대지를 비춰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유적 앞으로는 토토라가 자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뗏목을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의 모습도 보였다.

    시유스타니는 모든 게 돌이다. 작은 돌, 큰 돌들이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대개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무너지고 쓰러져 원래의 모양을 짐작하긴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것은 원통형 기둥처럼 우뚝 솟아 있는 석탑무덤이다. ‘나 여기 잠들어 있으니 제발 깨우지 말라’고 하는 듯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문을 나서는데 버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전날 예약해 놓은 관광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일일이 숙소를 찾아다니면서 태웠다. 그리고는 터미널에 가서 목적지별로 승객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승객을 잔뜩 싣고 푸노를 떠난 라파스행 중형버스는 티티카카 호수변을 따라 달렸다.

    가없는 호수는 긴 수평선을 그려보였다. 한참을 달려도 방해꾼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호수 반대편에서 아도베(흙벽돌) 집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만한 규모의 호수라면 고기잡이배나 화물선이 떠있을 법도 하건만, 눈을 씻고 봐도 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호수 주위로 펼쳐진 넓고 또 평탄한 초지는 참으로 비옥해 보였다. 가축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국경도시 융구요에서 페루 출국수속을 끝내고 100여m를 걸어서 커다란 아치형 국경 관문을 지나 볼리비아 땅으로 들어갔다. 카사니 국경사무소에서 입국수속을 하고 얼마간의 돈도 바꿨다. 짐 검사가 끝나자 버스는 다시 움직였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포장상태도 좋지 않았다. 페루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그러면서도 도로 이용료를 받았다. 수금원이 버스에 올라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돈을 걷는 것이 마치 남한산성에 들어갈 때 관람료를 징수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몹시 가난하다. 국민소득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이티 다음으로 낮은 최빈국이다. 하지만 인디오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볼리비아는 17세기 스페인 지배 시절 포토시란 곳에서 대규모 은광이 개발돼 유럽의 웬만한 나라 못지않게 번성을 누렸다. 그런데도 지금은 너무나 낙후돼 있다.

    하지만 경제적 낙후가 인간성의 낙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볼리비아인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친절하고 순수하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한국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숙집을 운영하는 한 교민은 “그동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페루 볼리비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했지만, 한국 교민들이 가장 잘 뭉치고 화기애애하게 사는 곳은 볼리비아”라고 했다. 볼리비아는 살기가 하도 힘들어 ‘한건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흘이 멀다 하고 이집, 저집에서 “밥 먹으러 오라” “좋은 트루차(trucha, 티티카카 호수에서 잡히는 송어)가 있으니 한잔 하자”는 전화가 걸려오곤 한다는 것.

    그러나 페루는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데다 삶의 조건도 나쁘지 않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이고, 그러다 보니 남에게 고의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생겨서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가 페루에 살 때는 한인교회에 나간 지 몇 년이 되도록 누구 한 사람 “우리 집에 가서 한잔 하자”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볼리비아의 교민사회가 이럴진대 여기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는 정통 볼리비아인들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가로운 풍경은 카시니를 떠난 지 꼭 30분 뒤에 티티카카 호반 최대의 도시 코파카바나(Copacabana)가 나타나면서 곧바로 사라졌다. 브라질의 미항(美港) 리우 데자네이루의 아름다운 해변의 이름에서 유래한 코파카바나는 호수에 떠있는 ‘태양의 섬’과 ‘달의 섬’으로 가는 길목으로, ‘호수의 어머니’를 모신 성녀의 궁전이 있는 곳이자 ‘호수의 검은 성모제’라는 큰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숙소를 구하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성녀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궁전은 화려했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이들을 상대로 벌여놓은 좌판이 길게 이어져 주위는 어수선했다. 그리고는 부두로 가 태양의 섬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봤다. 오후에 떠나는 것은 없고 다음날 오전 8시에 출발하는 것만 있었다.

    다음날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도 동력선 티티카카호에는 20여 명의 승객들로 만원이었다. 인디오로 보이는 한 가족과 나를 제외한 승객은 모두 백인이라 관광선이 분명했다. 배가 얼마쯤 나아가자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를 가로막고 나선 태양의 섬을 조망하기 시작했다.

    티티카카 호수엔 모두 41개의 섬이 있는데, 태양의 섬은 그중에서 가장 크다. 폭은 좁지만, 남북으로 길다란 섬의 중앙에는 마치 등뼈처럼 높다란 산이 뻗어 있어 험악해 보였다. 수르(Sur, 南)에서 노르테(Norte, 北)로 달리면서 섬의 형상을 속속들이 보여준 배는 노르테의 찰라란 작은 마을에 승객들을 풀어놓았다.

    섬의 역사를 보여주는 미니 박물관에서 ‘성스런 돌(Sacred Rock)’의 위치를 확인한 우리 일행은 곧장 산행에 들어갔다. 간간이 돌로 지은 외딴집과 돼지를 키우는 우리들이 나타났지만, 좁고 험한 길의 연속이라 연신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40여 분쯤 걸었을까. 우리네 무덤 앞에 흔히 놓이는 상석(床石)같이 생긴 네모난 성스런 돌이 나타났다.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것과 주위에 그보다 작은 네모난 돌 몇 개가 뒹구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잉카인들은 태양의 신을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든 창조자라며 ‘인티(Inti)’라 불렀다. 인티는 그들에게 지고(至高)의 것이라 인티라미(태양제), 인티우와타나(해시계) 등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모두 인티라는 말을 붙었다.

    산중의 산 이이마니

    그런 인티가 아들 망코 카파크와 딸 마마 오크요(카파크의 아내이기도 하다)를 지상으로 내려보낸 게 바로 이곳이다. 그때 카파크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인티는 그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지팡이가 저절로 꽂히는 곳에 도읍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곳이 잉카제국의 400년 도읍지인 쿠스코다. 망코 카파크는 쿠스코로 가면서 안데스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잉카문명을 일구게 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곳은 잉카민족의 탯줄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잉카인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다 해서 이상할 게 없고, 성스런 돌이 우리네 상석을 닮았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는 성스런 돌 뒤의 커다란 바위벽에 인티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며 보라고 했으나 워낙 심하게 마모돼 알아보기 힘들었다. 성스런 돌을 둘러본 일행은 이웃한 친카나 유적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친카나’가 미궁(迷宮)이란 뜻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돌로 된 축조물 안에는 방들이 많았고, 그곳으로 찾아드는 복도도 좁고 꼬불꼬불했다.

    그곳에서 티티카카 호수를 내려다보며 그 옛날 망코 카파크가 강림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도 신단수 같은 나무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일까. 내 머릿속엔 단군신화가 스쳐 지나갔다. 하늘에 사는 환인(桓因)이 고난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도록 지상에 내려보낸 아들 환웅(桓雄)의 손에는 천부인(天符印) 3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강림했음을 뜻하는 증표로서, 당시 신기(神器)로 여겼던 거울, 칼, 구슬이다. 그래야만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코 카파크의 손에도 황금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금은 잉카 왕권의 상징이자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쿠스코의 왕궁이자 신전이었던 코리칸차는 온통 황금으로 뒤덮였으며, 죽은 왕의 얼굴에 영생을 기원하기 위해 씌우는 가면도 황금제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성스런 돌 주위에도 황금의 사원이 있다. 제국 최후의 순간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것까지 손에 넣고자 달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잉카인들은 그것만은 도저히 넘겨줄 수 없다며 그 모두를 수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간혹 그때 수장된 황금유물을 건져 올리려는 탐험대가 이 호수에 나타나곤 한다.

    각자가 준비해 온 음식으로 서둘러 점심을 해결하고는 곧장 달의 섬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 걸렸다. 배가 닿은 곳에는 둥글둥글한 자갈이 끝도 없이 깔려 있었는데, 표면에는 파란 이끼가 묻어 있어 누군가가 파랗게 색칠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서 고개를 들어 라파스가 있다는 볼리비아쪽을 바라보자 흰 눈을 뒤집어쓴 안데스의 준봉 이이마니(해발 6452m)가 모든 것을 어루만져줄 듯한 자세로 이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발 3810m의 티티카카 호수에서 바라봐도 그 모습이 별천지인 양 신비스러운데, 만약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라면 아마 눈이 부셔서 이이마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산중의 산 이이마니는 날씨를 좌지우지하는 기상의 신 투나푸가 사는 성지(聖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아가는 잉카인들에게는 투나푸가 좋은 기분을 갖는 것이 중요했기에 짝을 만들어줄 생각으로 이이마니에서 잘 보이는 이곳에다 지모신(地母神)을 모시는 달의 신전을 세웠다. 그래서 이 작은 섬의 이름도 달의 섬이 됐다.

    인디오 처녀의 미소

    배에서 내려 몇 개의 돌계단을 넘어서자 곧바로 신전이 나타났다. 벽만 남아 있어 그 전모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웬일인지 그 넓은 벽면에는 격자형 홈이 여러 개 패어 있었다. 이곳의 지모신전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며 자주 찾는 곳이다. 달은 물의 신을 겸해 출산과 생산을 관장한다고 믿어서다.

    신전은 말 그대로 신의 거소다. 인간은 여기에 모신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그러나 이것이 일방적인 ‘봉사’는 아니다. 거기에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바쳐 자기가 갖지 못한 또 다른 최고의 것을 구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잉카인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삼은 해의 신과 달의 신은 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으나, 그들은 한편으론 해와 달의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제사와 기도를 가졌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자신들을 해치려 나타났는데도 구세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와 달의 신이 함께 사는 티티카카 호수는 그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배는 다시 태양의 섬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노르테가 아니라 수르의 솔(Sol, 태양)이 목표였다. 부두 앞으로는 더러 이가 빠졌으나 100개도 넘는 계단이 45°경사를 이루면서 위로 이어졌다. ‘잉카계단’이란 이름이 붙은 그 계단을 몇 차례나 가쁜 숨을 몰아쉬고서야 겨우 올랐다. 정상에는 목을 축일 수 있는 ‘성스런 샘(Sacred Fountain)’이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 샘이 있기에 계단을 만들어둔 것이다. 잉카인들은 그 샘물을 마시면 영원한 젊음과 복을 누릴 수 있다 하여 순례하듯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바위를 타고 졸졸 흘러나오는 샘은 수량이 풍부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뿐 아니라 라마와 알파카(낙타과의 일종으로 등에 혹이 없다) 같은 가축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나도 잉카의 정기를 맛보고자 그 대열에 섰다. 물맛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성스런 샘 위쪽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코파카바나로 돌아가는 일정은 다음날로 바꾸었다. 좁다란 산길을 따라 걷다 하얀 털스웨터를 가볍게 걸친 젊은 인디오 처녀들을 만났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그들의 환한 미소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못 이기는 체하며 살짝 내쪽을 쳐다보았다. 고운 미소가 가슴에 깊이 꽂혔다.

    이어서 계단식 밭이 나타났다. 좀더 올라가자 ‘포사다 델 잉카’란 이름을 내건 호텔도 보였다. 현대식 시설에다 아름다운 정원까지 딸려 한눈에 고급이겠다 싶었다. 그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방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닌게 아니라 들려온 대답은 “예약 없이 찾아온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곳은 라파스-티와나코-티티카카-코파카바나를 잇는 ‘크리온(Crillon) 투어’를 운영하는 회사 소유의 특급 숙박시설이었다. 티티카카 호수에 작은 동력선이 아니라 공기 부양선을 띄울 만큼 상품은 고급이라고 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랐다. 민가라도 보이면 무조건 하룻밤 신세지자고 할 참이었다. 얼마후 다행히 ‘민박’이란 작은 팻말이 보였다. 그것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외딴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해 지기 얼마 전이었는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 부부는 집앞 텃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소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나무로 만든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삽으로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하룻밤 숙박비는 5볼리비아 노스. 미화로 단돈 1달러다. 이제까지 인도를 포함해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그렇게 싼값에 숙소를 얻기는 처음이다. 방안에는 침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을 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작은 초 한 자루를 주는 게 전부였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따로 돈을 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모든 소리로부터, 모든 빛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밤을 보냈다.

    영혼을 씻어준 안데스 소년

    그 부부에겐 여덟 살 난 아들이 하나 있다. 내가 그 소년을 본 것은 집에 들어설 때였으나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아침, 그곳으로부터 3km쯤 떨어진 필코카이나 유적을 찾기 위해 길잡이로 삼으면서였다. 길 같은 길이 없다는 말을 들은 데다 먼길을 다녀오려면 아무래도 말동무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년과 길을 나섰다.

    돌부리가 연신 발에 차이는 좁은 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넘고 넘어 목적지에 이르는 동안 아이는 서툰 스페인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내가 행여 넘어지지나 않을까 몹시도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나자 나보다도 더 반갑게 손가락으로 필코카이나를 가리켰다. 소년은 ‘필코’가 달의 여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코카이나는 달의 섬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정말 그곳에선 태양의 섬보다는 작지만 길다란 달의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는 작고 동그란 입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소년이 하도 기특해서 누구에게서 그런 걸 배웠냐고 물었다. 소년은 매일 아침 배를 타고 통학하는 코파카바나의 학교에서 오래전에 배운 것이라고 했다(그때는 마침 방학이었다). 귀여운 꼬마 가이드는 유적 관리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필코카이나에서도 줄곧 내 뒤를 따라다녔다.

    하루 숙박비로 겨우 1달러를 내고 그 소년과 인연을 맺었으나 나는 그로부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을 선물 받았다. 그저 가난하고 외딴 곳에서 살아가기에 사람을 그리워해서 나를 친절하게 대해준 것은 아닌 듯했다. 팁 같은 것을 바라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높은 지대에 사는 안데스인들은 원래 마음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소년은 그런 민족의 후예였다. 안데스의 연봉(連峰)이 어려 있는 티티카카 호수의 물살을 가르고 그곳을 떠나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맑아지는 듯하다.

    소년과 헤어지고는 곧바로 솔 부두로 내려가 코파카바나로 돌아가는 동력선에 몸을 실었다.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서 올라탄 라파스행 버스 안에는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등 유럽에서 온 젊은이들로 가득 차 영어가 마치 공용어처럼 돌아다녔다.

    내 옆자리에는, 안데스의 고봉을 보고는 “우리나라에 온 기분이 든다”고 한 스위스 처녀 리다가 앉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인도에서 6개월을 보냈고, 이미 이스라엘 이집트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를 여행했으며, 앞으로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태평양의 타히티를 거쳐 뉴질랜드 호주 홍콩을 돌아보고 스위스로 돌아가는 원대한 여행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라파스에 머물다 태양의 섬을 보기 위해 코파카바나를 찾았다면서 라파스에 숙소를 예약해 두지 않았다면 자신이 묵고 있는 라 레푸블리카 호텔에 머물라고 권했다. 하루 숙박비가 10달러에 불과하고 식사와 서비스도 ‘그만’이라면서.

    호수와 비탈진 계곡을 한동안 교대로 보여주던 버스는 티키나란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호수 가운데서 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서 호수를 건너기 위해서다. 버스와 사람은 따로따로 건넜고, 뱃삯은 승객들이 개인적으로 냈다. 실질적으로는 이곳이 국경역할 하는지 여권도 검사했다. 도강시간은 15분 정도. 승객이 먼저 건넜기에 한동안 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사이에 우리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혔다.

    100km 정도 떨어진 라파스까지는 줄곧 평탄한 고원이 계속됐다. 푸노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알티플라노(Alti plano)라 부르는 이 거대한 고원은 고도가 해발 4000m라 나무는 자라지 않고 풀마저도 겨우 바닥에만 납작하게 엎드려 있을 뿐인데, 안데스 사람들은 그것으로 양과 알파카, 라마 등을 기르며 살아간다. 그래서 양떼를 몰고 가는 인디오들의 모습이 간간이 나타나곤 하여 여행길은 꽤 낭만적이었다. 길이 포장되지 않아 먼지가 일긴 했지만.

    알티플라노를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곳이 고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움푹 패인 골짜기의 경사면에 건물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라파스가 내려다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라파스의 지형은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에서 “이 움푹 패인 계곡은 태고에 엄청난 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위와 자갈이 격류에 휩쓸려내려와 만들어졌다”고 했을 만큼 매우 특이했다.

    수도 라파스는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세워진 도시다. 그래서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병존한다. 그 사이의 거리도 매우 짧기 때문에 경사가 아주 급하다. 더욱이 고도 자체가 높아 산소가 부족한 탓에 입이 마르고 숨쉬기가 어려운데 경사마저 급해 걷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몇 발짝 떼어놓고는 길게 숨을 한 번 내쉬고 미네랄 워터 한 모금으로 목을 축여야 했다. 밤에는 저기압이 되어 증세가 더욱 심해진다고 해서 적이 걱정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부자들은 숨쉬기가 한결 편한 해발 3400∼3500m의 저지대에, 가난한 자들은 그보다 높은 고지대에 살고 있다.

    시내를 대충 한 바퀴 돌고나자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 교민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이삭다마요 거리를 찾았다. 리마의 하숙집 아저씨가 라파스에 가면 꼭 최아헌 사장을 찾아보라고 해서 물어물어 계곡 7부 능선쯤에 위치한 이삭다마요를 찾아갔다. 그곳은 포목상, 원단가게, 옷가게가 즐비한 거리로, 대부분의 가게는 우리 교민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한 가게에 들러 최사장의 이름을 대자 두말않고 그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최사장은 생면부지의 내 손을 잡고 “잘 오셨다”며 “문 닫을 시간이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연신 웃음 띤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며 한동안 선전을 하고 다녔다. 가게문을 닫기가 무섭게 그는 “그럼, 가실까요?” 하면서 나를 저지대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부자들의 동네인 만큼 공원 같은 것도 제법 가꾸어져 있고 집들도 세련돼 보였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예고없이 찾아주셔서 준비해 놓은 것은 없지만, 시장하실 테니 우선 요기부터 합시다”며 식탁으로 안내했다. 밥과 김치를 내오더니 곧이어 붉은빛이 감도는 싱싱한 트루차회까지 올랐다. 트루차는 차고 깨끗한 티티카카 호수에서만 잡히는 것이라 오염이 전혀 안된, 신선한 물고기라는 이야기를 코파카바나에서부터 많이 들었다. 쫀득쫀득한, 그러면서 차가운 육질이 혀끝에 와닿는 느낌은 말로 다 옮길 수가 없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최사장은 남미 대륙으로 이민 와서 지낸 20여 년간 남몰래 겪어야 했던 애환을 하나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문자답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특히 교육수준이 낮은 현지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보니 속 터지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가게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부인도 덩달아 “20년 동안 이방인으로서 겪은 온갖 설움과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막막해했던 애통함 등 내 가슴에 맺힌 것은 남편도 모를 것”이라며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글로 쓰고 말겠다”고 했다.

    볼리비아의 한국인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바닥이 나고, 그래서 그들이 내게 서울 사정을 물으려 할 즈음 이웃에 산다는 젊은이가 주인 내외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군대를 가게 됐다며, 또 한 사람은 서울에 사는 언니가 결혼하게 되어 이튿날 서울로 가게 됐다며, 인사차 들른 것이다.

    라파스의 한국인들은 안데스 산맥에 기대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서울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끈은 이런 인간적인 것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업 또한 서울과 끈질기게 이어져 있었다. 다음날 저녁 이삭다마요 거리에서 만난 안정일 사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파는 물건 대부분은 서울에서 가져온 겁니다. 그것도 정식 무역루트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골라 갖고와 팔고 있어요. 우리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가져와 팔고 있는 포목이나 원단, 옷 등은 한국의 무역계정에는 포함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한국의 당당한 수출 역군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도 먹고 살지만요.”

    사실 알티플라노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도 그리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그들도 매일 코카차를 마셔야 고산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듯 열악한 생활여건에도 불구하고 안데스인들은 이곳에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냈다. 잉카문명만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태어난 수준 높은 티와나코(Tiahuan ako 또는 Tiwanaku) 문명도 안데스가 고향이다. 라파스에는 티와나코에서 발굴한유물을 별도로 전시하는 티와나코 박물관이 있으며, 그 현장 역시 티티카카 호수 쪽으로 80km 떨어진 알티플라노에 있어 그걸 보기 위해 라파스를 찾는 사람도 많다.

    라파스에서의 둘째날 아침 8시30분, 티와나코 투어버스는 유적을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라자란 곳에 잠깐 쉬어 17세기에 세워진 교회를 구경했는데,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원숭이 형상의 부조가 아주 특이했다.

    버스는 얼마후 또 하나의 볼거리를 선사했는데, 이번에는 수령이 1000년도 넘은 노목이다. 몇 사람이 두 팔을 벌려서야 겨우 품에 안길 정도로 큰 나무다. 키도 커서 가지들이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 직경 50m 이상을 뒤덮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뤘다. 알티플라노처럼 생육조건이 좋지 않은 곳에 이런 고목이 살아 있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졌다.

    유적을 대면하게 된 것은 라파스를 떠난 지 2시간이 지나서다. 넓은 평원에 유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형체를 갖춘 건물은 보이지 않았으나 건물이 있었던 기단과 부서진 돌기둥, 몇 개의 인물 석상, 그리고 피라미드의 유구(遺構)를 보면 이곳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건축재료가 석재(石材)였기에 그나마 지금껏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리라. 티와나코는 이렇듯 돌의 문명권이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칼라사사야(Kalasasaya) 신전은 동서 128m, 남북 118m 크기의 직사각형 구조로 유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칼라사사야’는 이곳의 원주민인 아이마라인들의 말로 ‘돌이 수직으로 서있는 곳’이라는 뜻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사각 기단을 이루는 벽면에는 거대한 단검처럼 생긴 높이 3.75m의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한눈에 거석 유적으로 보였다.

    칼라사사야 내부엔 두 개의 인물 석상과 하나의 석문(石門)이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서있다. 머리엔 각이 진 모자를 쓰고, 부릅뜬 눈을 하고 있는 ‘폰세’란 이름의 한 인물석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볍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놀랍게도 그의 온몸에는 재규어나 퓨마로 보이는 동물의 형상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티와나코인들이 이런 동물들을 신성시했기에 그런 것이리라. 또 하나의 인물 석상은 제주도의 돌하루방을 닮은, 수도사란 뜻을 가진 엘 프레일레. 앞서의 폰세에 비해 마모가 심한 편이다.

    칼라사사야의 명물은 태양의 문이다. 옅은 밤색의 안산암 통돌을 다듬어 세운 높이 3m, 폭 3.75m 크기의 태양의 문 상단에 새겨진 인물상과 동물상이 심상치 않았다. 중앙의 아주 큰 신상 좌우로는 각기 3단 8열, 총 48개의 동물 형상이, 그 아래의 긴 띠에는 11개의 신상 얼굴과 장식문양이 잇따라 그려져 있다. 어떤 이는 중앙의 대형의 것을 포함한 12개의 신상은 1년 열두 달을, 48개의 동물상은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부조(浮彫) 전체를 하나의 달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칼라사사야를 왕궁이나 신전이 아닌 천체 관측소로 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은 중앙의 대형 신상 조각이다. 그런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 있다. 그것은 불멸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벼락 화살이다. 얼굴 주위에는 공작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것처럼 볏이 만개한 형상이다.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린 듯 작은 조각 속에 이렇듯 많은 상징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신상의 주인공은 티와나코인들이 해와 달, 산과 강, 별과 호수 등을 창조하고 석상에 기(氣)를 불어넣어 마지막으로 인간까지 탄생시킨, 그리하여 그들이 창조자로 믿었던 콘티키 비라코차(Kon Tiki Viracocha)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가 문의 두 기둥 사이로 성큼 들어서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비라코차 미스터리

    비라코차의 온전한 모습은 칼라사사야 아래의 반(半)지하 신전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등신대보다 더 큰 사이즈로, 인간의 얼굴을 새긴 돌을 박아 사면을 장식한 길이 28.5m, 폭 26m, 깊이 1.7m의 반지하 신전 한가운데에 마치 이들을 호령하듯 서있었다. 마른 몸매에 깊고 둥근 눈, 오똑한 콧날, 긴 턱수염에 외투를 걸친 중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이곳 원주민인 인디오의 형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통 백인에 더 가깝다. 그레이엄 핸콕이나 문명전파론의 제창자이자 해양인류학자인 토르 헤이에르달 등도 오래전에 이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비라코차가 이곳 태생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어디서, 왜, 어떻게 이곳으로 온 것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의 최후도 미스터리다. 헤이에르달은 비라코차가 외부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에콰도르(페루 북쪽에 위치) 해변에서 배를 타고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Easter Island, 흔히 ‘라파누이’라고도 한다)으로 갔으며, 거기서 새로이 문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이스터 섬에 남아 있는 수많은 모아이(Moai, 거대한 인물석상)가 그곳 원주민의 형상이 아니라 티와나코 반지하 신전에 있는 비라코차의 모습이라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1947년 고대 선박 형태의 통나무 뗏목을 만들어 고대의 항해 방식대로 해류와 바람의 힘만으로 직접 남태평양을 항해했으며, 1955년에는 이스터 섬에서 장기간 고고학 발굴 조사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비라코차의 최후는 물론 모아이가 누구를 모델로 해서 제작된 것인지도 여전히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설혹 그의 주장을 100%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가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다. 비라코차가 그렇게 서둘러 남태평양으로 갔다면 그 외부세력이란 누구이며, 그가 떠난 후 티와나코는 또 어떻게 됐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과연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반지하 신전 위에는 ‘아파카나’라는 이름의 거대한 피라미드 유구가 자리잡고 있다. 그 위에 오르면 칼라사사야가 제대로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그곳에서 800m 떨어져 있는 푸마푼쿠 유적도 시야에 들어온다. 티와나코 유적의 한 축을 이루는 푸마푼쿠에 다가가 보니 배를 정박시켰던 구축물의 흔적이 뚜렷해 그 옛날에는 이곳이 티티카카 호수와 맞닿아 있었음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지금 호수는 20km나 떨어져 있다.

    티와나코가 언제쯤 태어난 문명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1904년 이곳을 찾았다가 그후 50년간 티와나코 유적 연구에 평생을 바친 오스트리아 태생의 고고학자 아르투르 포스난스키(라파스대학 교수) 같은 이는 칼라사사야가 건설된 때의 황도경사(하늘의 적도면과 황도면이 이루는 각도. 현재는 23도 27분)와 오늘날의 황도경사와의 차이를 근거로 1만 5000년 전에 건설되어 1만1000년경 자연의 대변동으로 멸망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티와나코 문명이야말로 아메리카 최고(最古)의 문명이며, 티와나코는 아메리카 문명의 요람이라 말했다.

    다른 몇몇은 기원전 2000년경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2세기경에 태어나 9세기까지 존속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포스난스키의 ‘초고대문명설’은 분명 매혹적이긴 하나 신빙성에 문제가 있어 ‘2∼9세기설’이 아직은 우세하다. 따라서 잉카는 티와나코를 선대문명, 다시 말해 그걸 기반으로 해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갈대배 타고 세계일주

    티와나코에서 헤이에르달을 떠올린 김에 그와 함께 원양항해를 한 적이 있는 리마치(Limachi) 형제를 만나볼 생각으로 다음날 라파스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티와나코 인근의 와타야타까지 버스로 갔다가 거기서 모터보트를 빌려 타고 그들이 사는 티티카카 호수 속의 수리키(Suriki) 섬으로 갈 요량이었다.

    와타야타에는 크리온투어가 운영하는 ‘안데스의 뿌리(Andean Roots)’란 이름의 문화관광 단지가 있다. 호텔과 함께 민속박물관이 있는데, 안데스 민족의 의식주에 관한 것은 물론 ‘카야와야(Kallawa ya)’라 부르는 민간의술(대체의학의 일종)에 관한 것들도 보여줬다.

    그곳을 둘러본 후 모터보트를 전세 내 곧장 수리키로 향했다.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그곳은 우루스 섬처럼 토토라 천지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수리키 섬의 주민들은 섬에 자생하는 토토라를 이용하여 집과 배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만들어 쓰는 데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뗏목을 이용해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무대로 탐험활동을 벌였던 헤이에르달이 1977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갈대배(티그리스호)를 만들어 인도양 항해에 나서려 했을 때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차드(Chad) 호수변에 있는 사람과 이곳 수리키 섬의 리마치 형제를 불러 갈대배를 만들게 했을 뿐 아니라 티그리스호 항해에도 참여시켰다면 이들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리키 마을 입구의 관광 안내소에서는 티그리스호의 항해코스와 그 제작과정을 담은 대형 패널이 섬의 최고 자랑거리라는 듯이 정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곳 사람들에게 리마치 형제의 안부와 사는 곳이 어딘지를 물었다. 리마치 형제는 데마트리오, 호세, 후안, 파울리노 넷이다. 마침 셋째인 후안이 집에 있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그도 30년이 지난 지금은 장년의 티가 역력했다. 집이라고 하나 방 하나에 창고 하나가 딸린 게 고작이다. 내가 ‘헤이에르달’ ‘티그리스’ 같은 말을 읊어대자 그는 방에서 커다란 사진틀을 들고 나와 보여줬다. 그들의 항해 모습을 찍은 대형 사진이다. 그리고는 그때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때 차드 친구들하고 많이 다퉜죠. 배를 만드는 방식이 우리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헤이에르달에게 말했죠. ‘우리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가겠다’고. 그의 중재로 갈대배를 무사히 만들었고, 항해 또한 성공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좋은 시절이었죠.”

    그는 나를 따라 나와서는 조금전 다녀왔던 관광안내소에 들러 갈대배 제작과정을 설명해 줬다. 못과 철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드는 게 갈대배의 특징인데, 갈대로 만들어 약하게 보일지 몰라도 앞과 뒤가 높아 웬만한 풍랑에도 끄떡없다고 했다.

    수리키 사람들은 오늘도 갈대배를 만든다. 그 배로 호수를 건너고 트루차도 잡는다. 세계를 일주하는 해상 탐험활동에도 참여한다. 1996년 수리키 항해사들은 갈대 뗏목을 이용한 세계일주 항해에 나서기도 했다. 이곳 최고의 베테랑인 60대의 에스테반이 그 다국적 탐험대의 배 제작책임자 겸 항해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리키가 있는 티티카카는 문명의 땅이다. 아니, 문명의 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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