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 정영기

    입력2004-11-16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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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서히 몸이 마비돼가는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병환으로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데리고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고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지켜야만 했다. 부모가 없는 우리 가정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우리의 생활도 점차 엉망이 돼갔다. 나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어머니 병환으로 우리 가정은 이미 거덜난 상태였고, 학교에 내는 납부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도 육성회비라는 것이 있어서 분기마다 납부금을 내야 했다.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5학년 때부터 납부금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그때는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살기가 훨씬 어려운 시절이어서 납부금을 제때 못내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어느 땐가 나는 우리 반에서 납부금을 내지 못한 마지막 학생이 됐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에게 여러 차례 불려갔다. 선생님은 납부금 독촉에 열심이었다. 아마도 학생들의 납부금 납부실적이 선생님들의 근무성적에 포함됐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교무실로 불러 혼을 내기도 했다. 언제까지 납부금을 낼 수 있는지 독촉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으로는 납부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저 묵묵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서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후 고기잡이배에 오르다

    나는 그때까지 학교생활도 잘하고 성적도 괜찮은 모범생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집이 가난해서 납부금을 못 냈을 뿐, 다른 면에서는 나쁜 학생이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마치 나를 문제아처럼 취급했다. 게다가 조회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 혼을 내고 망신을 줄 때마다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또래 아이들 앞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납부금 문제로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두려워 학교 가기가 싫었고 친구들이 놀리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자주 결석을 했다.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석을 밥먹듯이 해서 결국 6학년 때는 학교에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나는 졸업장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인지 아니면 납부금에 관계없이 졸업장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쳤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날아갈 것 같았다. 가기 싫은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납부금 문제로 선생님께 불려갈 일이 없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크나큰 안도가 됐다.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우리집 형편으로는 중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의 눈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집안사정이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생활전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처럼 배를 탔다. 동생이 넷이나 있는 장남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를 도와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됐다.

    친구들은 대부분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도회지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들이 부모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우고 있을 때, 나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가족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학교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납부금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가끔 초등학교 동창들을 동네에서 마주칠 때가 있었다.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황급히 몸을 피하곤 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나와는 달랐다. 그들은 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니고 나는 고기 잡는 어부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특히 같이 학교를 다녔던 여학생들과 마주칠 때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중학교 여학생들은 까만 바탕에 목에 하얀색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다녔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나에게 그 하얀색 칼라는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보였다.

    그렇게 지겨워했던 학교는 어느새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납부금을 제때 못내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있더라도 학교에 다닐 수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었다.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데 나만 혼자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늘 외톨이가 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 나는 이렇게 마음속에 열등의식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선원생활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고기잡는 일을 한다. 낮에는 고기들이 그물을 보고 피해다니기 때문에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 어두운 밤에 주로 그물질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낮에 잠을 충분히 자두고 어두워지면 그물을 치고 고기잡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처럼 선원들은 밤낮의 생활 주기가 바뀌어 보통사람들과는 반대로 생활한다.

    뱃일은 일의 성격상 아이들이 하기에는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작업을 하다가 바다에 빠질 위험도 있고 노동의 강도가 여느 일과는 달랐다. 그물을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작업은 마치 줄다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일로 작업을 시작하면 보통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그물을 바다에서 끌어올린다. 한번 그물질을 하고 나면 속옷은 땀으로, 겉옷은 바닷물로 다 젖어버린다. 이런 작업을 할 때면 나는 힘이 부족해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릴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밤이슬을 맞으며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고 새벽이 되면 하루일과가 끝난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아침햇살에 반사돼 빛나는 고기비늘은 눈부시지만 그 속에는 밤새도록 흘린 땀과 고통이 숨어 있었다. 나에게 아침은 하루가 끝났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런 기대도 설렘도 없었다. 삶이란 그저 고통일 뿐 아무런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밤샘작업을 하고 아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을 때면 긴장이 풀려 한꺼번에 졸음이 쏟아진다. 아침을 먹고나면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져든다. 밤과 낮이 거꾸로 된 이러한 생활은 열세 살짜리 아이가 견디어내기에는 너무 과중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빚더미

    계절에 따라 여러가지 고기를 잡았다. 봄에는 숭어와 낙지, 여름에는 새우나 꽃게, 가을에는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잡았다. 추운 겨울이 오면 뱃일도 쉬게 된다. 배를 타면 계절에 따라서는 며칠씩, 길게는 몇 주씩 바다 위에서만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는 먹고 자는 모든 생활이 배 위에서 이루어진다.

    고된 그물작업으로 몸은 힘들지만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생선이 들어간 고깃국도 먹을 수 있었다.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 우리집 형편에서 남의 배에 선원으로 따라가 하루 세 끼 먹는 것을 해결하고 얼마간의 돈도 벌어올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의 노동은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힘겨운 뱃일은 허약한 내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밤샘작업을 하는 그물질이 지겹도록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가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엄마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5남매 중 장남인 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았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남동생과 2학년인 여동생,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학교에 가지 못한 일곱 살과 다섯 살배기 여동생이 있었다.

    뱃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다. 엄마가 병으로 자리에 누운 이후부터 집안의 모든 일은 나의 몫이 돼버렸다. 밥하는 것에서부터 동생들 돌보는 것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가장 힘든 건 겨울에 찬물로 빨래하는 일이었다. 동생들의 옷가지를 거의 매일같이 빨아야 하는 것은 어린 내겐 너무 벅찬 일이었다. 차가운 물로 빨래를 하면 비누가 물에 녹지 않아 때가 잘 빠지지도 않았다. 한겨울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한참 빨래를 하다보면 손가락이 깨지는 듯 시려오면서 감각이 없어진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으면 금방 피부가 벌개지고 마치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둔해진다. 돈이 없어 고무장갑을 살 수 도 없었고 온수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전혀 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는 말도 하지 못하는 이상한 병이었다. 서서히 몸이 마비돼 얼마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었다. 식사에서부터 잠자는 것까지 모두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엄마가 몸져눕기 전까지는 우리 일곱식구가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조그만 어촌에서는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어선도 한 척 있었고, 시골에서 그렇게 가난한 살림은 아니었다. 엄마가 장에 갔다 오실 때면 알사탕이나 엿가락을 먹기 위해 우리들은 머나먼 동구 밖까지 나가서 엄마를 기다리던 그런 행복도 있었다. 그러나 행복의 여신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환은 우리에게서 이런 행복을 앗아갔고 얼마 되지 않은 재산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를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이런 노고도 중병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엄마는 3년 동안 그렇게 자리에 누워만 있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병명도 밝혀지지 않은 채, 빚더미와 고사리 같은 우리 5남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우리 가정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여름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때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가 있어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돌아간 지 하루가 지난 후에야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숨을 거둔 엄마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코흘리개 자식들을 험한 세상에 버려두고 가는 엄마의 심정을 보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나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서 처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 앞에 닥친 현실은 한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항상 자리에 누워만 있던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던 날 비로소 엄마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울긋불긋한 상여가 나가던 날, 어린 동생들과 나는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울먹이며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직 철부지였던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누워 있던 빈자리가 허전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중병에는 효자가 없다던가. 엄마가 몸져눕기 시작한 이후 3년이란 시간은 철부지 우리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짐을 주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엄마였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버리자 엄마의 빈자리는 유난히도 커보였다.

    엄마가 죽고나자 우리 가족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하루하루 동생들의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건 나의 몫이 돼버렸다. 엄마가 없는 우리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어느날 맨 아래 동생 둘을 보육원에 맡졌다. 막내 영숙이는 다섯 살, 그 위 명숙이는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도 안하고 동생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알려줬다. 어린 동생들은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듯이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나는 동생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작별 인사 한마디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보육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동생들이 고아원으로 들어가고 나자 여섯이던 식구가 네 명으로 줄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온 뒤부터 많이 괴로워했다. 여리고 여린 동생들이 낯선 곳에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을 상상하니 어린 내 마음도 아팠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 지어진 각자의 길을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고아원으로 떠났던 동생들이 입양돼 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소문을 통해 들었다. 입양이 뭔지 또 어느 나라로 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동생들이 이 땅을 떠나 어디론가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과 헤어진 후에도 우리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주 폭음을 했고 나는 남의 배에 선원으로 따라가서 얼마간의 돈을 벌어오는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봄날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배 위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바다 위에서 응급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육지로 돌아와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죽은 지 불과 2년도 안돼 아버지마저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죽음을 예견하고 동생들을 고아원에 맡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이 고아원으로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망의 세계로 떨어져버린 느낌이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되던 해 3월이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럽고 큰 불행이었다.

    나는 졸지에 우리 집 가장이 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도 알지 못했고 내 힘으로는 할 수도 없었다. 가까운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장례식을 치렀다. 아버지의 상여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나가는 동안 동네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같이 슬퍼해 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보다는 남겨진 자식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 속으로 던져지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만 닥쳐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남겨진 재산도 없었고 그렇다고 우리를 돌봐줄 만큼 여유 있는 친척도 없었다.

    사카린 탄 물에 국수를 말아먹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동안 친척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 가족의 어려운 사정이 지방신문에도 실렸다. 시골 군수도 친히 지프를 타고 우리 집까지 와서 라면 두 상자를 건네주고 사진을 찍고 갔다. 그리고 몇 군데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됐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이 잊혀지듯이, 이웃이나 친척들의 관심이 점차 줄어들었다. 불과 두세 달이 지나자 아무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상은 차갑고 냉혹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조차도 나중에는 우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우리는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내 나이 열다섯, 가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라고는 빚더미와 이름 석자뿐,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요즈음에야 소년가장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고 국가나 사회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관심과 도움을 주고 있지만, 1970년대 중반인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의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먹을거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끼니를 마련하는 게 내가 할 첫째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들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가를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만 했다. 아침식사로는 밀가루로 만든 죽을 먹고 점심은 그냥 지나치고 저녁은 고구마를 삶아서 먹으면 하루가 지나갔다.

    어린 가장 혼자 힘으로 하루 세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동생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날마다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익숙해지자 하루 한 끼 정도 굶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입에 풀칠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모가 없는 우리는 생활보호대상자(생보자)가 됐다.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집과 혼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해당자였다. 생보자에게는 면사무소에서 가족 수에 따라 얼마간의 밀가루를 배급해 주었다. 나는 매월 밀가루를 받으러 면사무소에 갔다. 도장을 가지고 면사무소에 가면 담당직원은 도장을 찍고 나서 저울로 밀가루 무게를 달아서 반 포대 정도를 지급해 주었다.

    나는 그 밀가루를 등에 지고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집에 가져와야 했다. 그것이 우리 식구가 한 달 동안 먹어야 하는 식량이었다. 하지만 밀가루 반 포대는 우리 세 식구가 죽을 끓여 먹어도 일주일 정도밖에 먹을 수 없는 적은 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밀가루를 아껴 먹어야 했다. 밀가루를 조금 넣고 물을 많이 부어 죽을 만들었다.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밀가루 수제비도 해먹었다.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국수를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장 먹을 끼니도 없는 우리 집에 국수를 말아먹을 국물이나 반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설탕처럼 단맛을 내는 사카린이라는 물질이 있었다. 지금은 발암물질이 들어있다고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당시에는 값도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단맛을 내는 데는 이 사카린을 주로 사용했다. 우리는 반찬 대신 사카린을 탄 물에 국수를 말아먹었다. 그래도 이런 특별한 음식을 먹는 날은 행복했다.

    가끔 남의 집 부엌에서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우리 옆집은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곤 했다. 나는 그 가족이 모두 교회에 나가는 시간을 틈타 그 집 부엌에 들어가 밥이나 반찬을 훔쳐먹기도 했다. 매일 죽을 먹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배고픔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도덕적인 판단능력까지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욕구였다. 나는 그저 배가 고팠고 뭐라도 먹고 싶었다. 먹을 것이 풍족한 그 집이 부러웠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그 가족이 교회에 가는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나의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 뱃길로 목포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어촌이다. 집 앞에 바다가 있어 방문을 열면 바로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마을이었다.

    우리 집에는 수도가 없었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는 개인 수도를 만들 수 없었다. 땅을 파면 짠 바닷물이 나오기 때문에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동우물을 사용해야 했다. 식수는 물론 빨래하는 물까지 물동이로 길어다가 써야 했다. 멀리 떨어진 동네 공동우물에서 물동이에 물을 담아 물지게로 지고 집까지 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물로 밥도 하고 빨래도 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물 긷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한파가 몰아치는 추운 날은 빙판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물지게를 지고 얼음판에 넘어지면 결국 얼음물을 뒤집어 쓴 꼴이 돼버린다. 젖은 손가락이 양동이에 닿았을 때의 쩍쩍 달라붙는 그 차가운 촉감에 심장까지 얼어버릴 정도였다.

    당시에는 영세민 취로사업이 있었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는 농어촌에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생계 지원사업이다. 취로사업에는 대부분 어른들이 나와서 도로를 넓히거나 새로운 길을 만드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한다. 아버지가 없는 우리 가정에서 나는 가장이기에 영세민 취로사업에 나가 어른들과 같이 일을 했다. 열다섯 살의 나이로 그해 겨울 내내 취로사업에 참여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최연소 영세민 취로사업자였다. 취로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우리는 얼마동안 생활이 가능했다.

    겨울에 땔나무를 준비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당시 우리가 사는 시골에서는 부잣집만 연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우리처럼 가난한 집에서는 연탄을 사다 쓸만한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산에 가서 땔나무를 모아다가 그것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가을이 되면 겨울에 쓸 땔감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미리 준비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해 겨울,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울을 맞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내리자 미처 땔감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얼음장 같은 방에서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때가 많았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밤에는 추위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시 잠이 들어도 추위 때문에 금방 잠에서 깨어버린다. 잠에서 한번 깨어나면 추위 때문에 좀처럼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배고픔만큼이나 힘든 것은 겨울 추위에 살아남는 것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져 눈이 녹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 방을 따뜻하게 해서 하루하루를 넘겼다.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그냥 견디어내는 수밖에 우리에겐 아무런 해결방법이 없었다. 힘들고 춥고 배고픈 겨울, 우리는 그날그날을 넘기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나갔다. 길고도 추운 그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봄이 되자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됐다. 각자 사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만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난 후 1년도 안돼 우리 가족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떤 가게 종업원으로 가기로 돼있었다. 바로 아랫동생 훈기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훈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큰집에 있기로 했다. 4학년인 경숙이는 충주에 사는 먼 친척이 데리고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목포에 있는 어느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 나이가 어려 취업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신발가게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도매하는 가게였다. 가게에서 심부름도 하고 배달도 하고 청소도 했다. 어릴 때부터 뱃일로 단련이 된 덕분에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아침 10시에 가게문을 열어 밤 10시쯤 되면 일과가 끝났다. 밤에 작업을 하는 뱃일과는 달리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잘 수 있어서 견딜 만했다. 점원생활로 더이상 끼니걱정을 안해도 됐다. 매일 따뜻한 쌀밥을 그것도 세 끼를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벽돌공장에 취직

    가끔 동생들이 보고 싶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도 꿈에 자주 나타났다. 같이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가족간의 사랑이 그리웠다. 빨리 돈을 벌어서 잃어버린 동생들을 찾아 우리 가정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일해도 아무런 보수가 없었다. 그저 밥이나 먹여주고 잠이나 재워주면 그것이 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의 전부였다. 돈을 벌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렸다. 신발가게에서 일하는중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조건이 더 좋아보이는 그 일자리로 옮겼다. 점원생활을 한 지 6개월 만이었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벽돌공장에 들어갔다. 새로 들어간 곳은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터에다 천막을 쳐놓고 시멘트와 모래를 배합해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공사판 같은 공장이었다. 기술자(기사) 한 사람이 있었고, 종업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이었다.

    벽돌공장에서의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아침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기사보다 먼저 작업장에 나가서 그날 작업할 양만큼 ‘공구리작업(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작업)’을 해놓는다. 보통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작업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한다. 그렇게 해야 기사가 출근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밥 먹는 시간과 새참 먹는 시간이 30분 정도 있을 뿐 쉬는 시간은 아예 없었다. 하루 종일 벽돌을 만들어 나르고, 완성된 벽돌은 트럭에 실어 건축공사장으로 보낸다. 벽돌을 트럭에 싣는 것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은 시멘트 두 포대 세 포대쯤 거뜬히 지고 나르는데, 나는 한 포대도 제대로 못 들어 끙끙거렸다. 무거운 시멘트 포대를 등에 지고 옮기는 작업을 할 때면 힘이 달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기사 한 명만 출퇴근했고 나머지 종업원은 함께 숙식했다. 합판때기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가건물, 그곳이 종업원들의 잠자리였다. 바람소리 빗방울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방안에서 전기장판을 한 장 깔고, 이불을 덮으면 그곳이 우리들의 보금자리였다. 밀려드는 피로와 잠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조차 없이 골아떨어지곤 했다. 아침 6시가 되면 자명종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고, 그렇게 또 고된 노동의 하루가 시작됐다.

    하루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고 밤 9시쯤 기사가 퇴근하면 우리는 작업장 정리를 한다. 밤 10시는 돼야 일과가 끝났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일만 하는 그런 생활이었다. 2∼3년 배우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불평도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힘든 일에도 차차 적응이 돼갔다. 몇 달이 지나 일하는 요령도 터득하게 됐다. 전보다는 일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꼬마녀석이 일을 잘 한다는 칭찬도 들었다. 벽돌 만드는 기술은 몇 달 만에 습득할 수 있었다. 벽돌을 찍어내는 기계를 다루기가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그 기술을 어깨너머로 익혔다.

    그러나 기왓장 만드는 기술은 벽돌 만드는 기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가 가르쳐주지도 않거니와 벽돌 만드는 것과는 달리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약간의 흠이 있거나 잘못 찍어내면 바로 부서지거나 못 쓰게 되기 때문에 상당한 노하우를 필요로 했다. 또한 기왓장을 기계에서 한번에 찍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소년은 기술을 익혀도 체력이 미치지 못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기사가 되면 상당한 대우와 일자리가 보장되는 괜찮은 일이었다. 기사가 되면 기와를 만들어내는 만큼 보수를 받는 성과급제였다. 기사는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일하는 견습생에 불과했다.

    휴일은 아예 없었다. 일요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일을 했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작업을 해도 벽돌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작업을 중단한다. 기사는 비오는 날을 ‘공치는 날’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비 덕분에 힘든 노동을 하루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기와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형들은 이곳에서 2,3년째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나처럼 견습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이 고된 만큼 사람들도 거칠었다. 기사가 퇴근하고 나면 나이가 가장 많은 고참이 기사인 양 행동했다. 그는 교도소에 다녀온 전과자였다. 그는 자신의 전과사실을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기사가 퇴근하고 나면 나는 더 힘들었다. 신참인 내가 모든 뒷정리를 도맡아 해야 했다. 이들은 나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들은 편히 쉬었다. 말을 듣지 않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합을 주고 구타를 했다.

    한번은 기사가 퇴근한 후, 고참이 사소한 이유를 들어 나를 심하게 구타했다. 그날 밤 그에게 몹시 두들겨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그는 어린 나에게 허튼 수작을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는 그저 겁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세상 경험이 많지 않은 나에게는 그들의 위협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졌다. 세상살이가 버겁다는 느낌과 함께 사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보복이 두려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나를 보호해줄 부모가 없고 보호자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무서움을 이겨낼 만한 담력이 없었다. 며칠 동안 그런 공포 속에서 지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몰래 도망치다 붙들리면 그들은 나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어느날 밤, 그들은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 나는 아무도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모든 소지품을 그대로 놔둔 채,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그곳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만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토록 지겨워했던 뱃일을 밥벌이를 위해서 또 시작해야 했다. 예전처럼 남의 배 선원으로 따라가 고기 잡는 생활을 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동네목사가 나를 딱하게 봤는지 서울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목사님은 서울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사나흘은 서울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영기야, 너 서울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니?”

    “서울 회사라고요?”

    “그래, 내가 아는 회사가 있는데 월급도 주고 기숙사도 있어 생활할 만할 거야.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월급도 준다구요. 그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그리고 벽돌공장에서 일했지만 돈은 한푼도 벌지 못했었다.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회사라면 전에 일했던 신발가게나 벽돌공장과는 다른 더 멋진 일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서울에 가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977년 4월, 목사님이 소개해 준 주소 하나만을 들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사님이 알려준 시간의 기차를 탔다. 내 주머니에는 전재산인 1만2000원이 들어 있었다. 고기잡이배를 타서 몇 달 동안 모은 돈이다.

    철부지 마음속에는 서울에만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서울 가는 기차는 지루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 시골뜨기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롭게만 보였다. 혼자서 찾아가는 서울길은 다소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돈을 벌러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다행히 서울역에서는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 1만3000원의 섬유공장

    나의 네번째 직장은 서울 연희동에 있는 조그만 섬유공장이었다. 서울 회사라는 곳은 공장이었고 일하는 사람이 30명 정도 됐다. 나는 그때까지 회사와 공장을 서로 다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공장생활은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오후 7시에 야간근무조와 교대를 하게 된다. 그것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고 밤 11시까지 다시 잔업을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격주로 야간근무를 했다. 일주일은 주간에 일을 하고 그 다음주에는 야간에 일을 하는 체계여서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고깃배를 탈 때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낮밤이 뒤바뀐 생활이 멀고 먼 서울 하늘 아래에도 있었다.

    서울은 내가 마음속에 그리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꼭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리란 꿈을 안고 올라왔지만 서울은 새로운 생활을 쉽게 보장해 주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뭐든지 가능하리라고 믿은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곧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는 게 전부였다. 서울생활은 나 같은 시골뜨기에게는 여전히 힘든 생활이었다.

    하지만 도망쳐 나온 벽돌공장과 비교해 보면 근무조건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멘트 포대나 벽돌을 져 날라야 할 정도의 힘든 육체노동이 없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게 고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점심시간이 한 시간이나 주어져 점심을 먹고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공장에서는 먹고 자고 일하는 모든 생활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공장 바로 옆에 방이 붙어 있어 일과가 끝나면 바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고, 식사도 공장 안에서 바로 먹게 돼있었다. 첫 월급으로 1만8000원을 받았다. 그중 밥값으로 5000원을 공제하고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1만3000원 정도였다. 당시 라면이 한 봉지에 50원이었고, 영세민들을 위한 새마을취로사업 일당이 2000원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임금이었다. 그러나 그때 대부분의 근로청소년들, 특히 나같이 어린아이들은 그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 못했다.

    내가 서울에 취직하고 나서 큰집에 연락을 하자 동생을 빨리 데려갔으면 하는 전갈이 왔다. 하지만 공장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나는 동생을 데리고 있을 만한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월급을 타면 매달 만원씩을 동생의 생활비로 보냈다. 외출을 하거나 놀러다닐 시간이 없는 공장에서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울에 온 지 2년이 지나 공장이 경기도 용인으로 이전했다. 새 공장은 규모가 전보다 훨씬 컸고 일하는 종업원 숫자도 많이 늘어났다. 나는 운 좋게도 주간에만 일을 하는 부서로 일자리를 옮기게 됐다. 비록 월급은 야간작업반에 비해 적었지만 그래도 밤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새로 이사온 공장은 서울 공장에 비해서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가 정해진 근무시간이었다. 잔업도 많이 줄어들었다. 월급도 주변의 다른 공장들과 비슷한 수준인 3만원으로 인상됐다.

    동생 훈기는 시골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동생의 학비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받는 월급은 뻔하고 따라서 보낼 수 있는 돈은 한정돼 있었다. 훈기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큰집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어려운 시골 형편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동생을 맡아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큰집에 동생을 맡기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훈기를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같이 생활하면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동생은 시골에서 용인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먹고 자고 학교에 다닐 만한 집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네 집에 부탁을 했다. 얼마간의 생활비를 주기로 하고 같이 지내도록 했다. 동생은 친구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나는 공장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해야만 내 월급으로 동생을 중학교라도 보낼 수 있었다. 훈기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진학문제로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형편에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월급으로는 고등학교 학비를 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훈기는 고등학교 진학을 고집하지 않았다. 결국 훈기도 나와 같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기로 마음의 결정을 했다.

    그런데 희소식이 들려왔다.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국비로 운영하는 학교인데 기숙사가 있고 일체의 학비가 없고 교과서 교복까지 준다고 했다. 공장에 취직할 예정이었는데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자 동생은 무척 좋아했다. 경북 구미에 있는 금오공업고등학교다. 동생은 무사히 시험에 합격해 그곳으로 가게 돼 우리 형제는 또 헤어졌다.

    그런데 동생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배우는 내용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 차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동생을 설득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나는 동생이 그래도 고등학교라도 마치기를 바랐다. 그 덕분인지 동생은 3년의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나처럼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고 지방에서 상경한 아이들이다. 학력이 기껏해야 중졸이며 나처럼 국졸자도 더러 있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 졸업자를 국졸이라고 했다.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희망을 가지고 올라온 이들은 고된 노동과 무거운 회사 분위기에 짓눌려서 그저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갈 뿐이었다. 부모 밑에서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돈 몇푼을 벌기 위해 산업전사가 된 것이다. 그래도 월급을 받아 다달이 고향에 얼마간의 돈을 보내고 나머지를 저축하며 그것으로 공장에서의 힘든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중에는 가끔 고등학교 졸업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학력이 낮은 우리보다 훨씬 빨리 작업현장에서 조장이나 반장 등 더 나은 위치에 올랐다.

    공장작업은 하루 24시간 동안 2교대 근무를 한다. 주간작업반은 아침 8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난다. 물론 주간작업을 할 경우 일하는 부서에 따라서는 밤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때도 있다. 따라서 하루에 15시간 정도를 일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잦은 잔업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월급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반 직장에서는 토요일 반일 근무가 일반적이지만 내가 일했던 공장에서는 토요일도 평일처럼 하루 종일 일했다. 더욱 힘든 것은 낮과 밤이 뒤바뀌는 근로시간이다. 1주일은 주간반에서 일하고, 다음 1주일은 야간반에서 일하는 식으로 격주로 낮과 밤이 바뀌는 체제다. 보통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서울공장에서 일한 2년 동안 내내 주간과 야간을 번갈아가며 작업을 했다. 야간작업반은 저녁 7시에 교대를 해서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꼬박 13시간 일을 했다. 물론 중간에 야식을 먹기 위한 1시간 휴식이 있다. 야식이라고 해봐야 라면 한 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고급 음식이었다. 낮에는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을 수 없어 결국 야식이 우리에게는 점심식사나 마찬가지였다.

    새벽 1시에 야식을 먹고 2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 따라서 새벽 3시 경부터 가장 졸음이 많이 오는 시간이다. 낮에 잠을 충분히 자도 새벽에는 졸음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도록 돼있는 인간의 생체리듬을 우리는 억지로 맞추어나갔다.

    경력보다 더 중요한 건 고등학교 졸업장

    공장의 작업장은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이 없어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 바로 밑 벽에 작은 창이 있지만 그것은 창이 아니라 환기를 위해 만들어놓은 환기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장 안은 낮에도 항상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된다. 외부의 빛이 차단된 공장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기계의 작동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아마도 공장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된다면 직공들이 작업에 몰두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생산성이 그만큼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서 공장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다.

    공장생활을 오래하면 계절 감각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작업장에 들어가면 대부분 밤중에 그곳을 나온다. 반복되는 이런 생활로 주변의 변화에 감각이 무뎌진다. 하루 종일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심지어는 날씨변화조차도 알 수가 없다. 작업장은 제품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밖에 나오지 않으면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계절이 바뀌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결국 밤중에도 주인이 불을 밝혀주면 낮으로 착각하고 열심히 계란을 만들어야 하는 양계장의 불쌍한 닭과 같은 존재가 1970년대 공장근로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직공들은 출퇴근이 필요없었다. 관리자나 사무직 근무자들은 가정을 갖고 외부에서 출퇴근하지만 직공들은 대부분이 시골에서 상경해 먹고 잘 만한 데가 없어 공장에 붙어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공장의 구조도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능률적으로 돼있었다. 작업장 바로 옆에 기숙사가 붙어있어 눈뜨면 밥 먹고 일하고 또 잠을 자는 생활에 매우 효율적이었다.

    근로청소년들은 중요한 성장기의 대부분을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보냈다. 가난하기 때문에 나쁜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었다. 이들에게는 고독이나 방황 같은 사춘기의 감상을 누릴 여유조차 없다. 이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적은 임금을 주고 고용할 수가 있으며 나이가 어려 말을 잘 듣는다는 이유로 힘이 많이 드는 일들은 대부분 이들에게 맡겨졌다. 이렇게 12시간 이상을 노동에 시달리다 형편없는 시설과 난방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기숙사에 몸을 던지고 잠에 빠져드는 것이 내가 경험한 1970년대 후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청소년들의 모습이다.

    내가 일했던 공장은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요즈음 신발이나 의류 등 일상용품에 흔히 사용하는 벨트로 일명 ‘찍찍이’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다. 서울공장에서 2년, 그리고 새로 이전해간 용인공장에서 4년을 일했다. 나는 공장의 거의 모든 부서에서 작업을 해보아 작업내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상세히 알 수 있다. 불량품이 발견되면 어떤 과정 어느 단계에서 나왔는지 알아낼 정도로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장생활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다른 희망이 없었다. 공장직공들의 희망은 기껏해야 자기 부서의 작업반장이 되는 것인데 국졸자에게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공장에서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고 학력이 별로 필요없는 단순한 작업이다. 하지만 같은 작업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학력에 따라 여러가지 차이를 두었다. 공개적으로 학력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항상 밑바닥 위치에서 일했다. 국졸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고 열등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장에서도 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고졸자는 처음부터 대우가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온 아이들 앞에서 나는 기가 죽어야 했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고졸자는 처음부터 나보다 월급이 많았다. 경력은 내가 더 많았지만 그들은 나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았고 얼마후에 나를 지시하는 작업반장과 같은 자리에 올랐다. 좁은 세계인 공장에서조차 학력은 사람은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경력보다도 작업의 숙련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이었다.

    ‘선데이서울’에 실린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 광고

    그때까지도 미래에 대한 꿈이나 장래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내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얼마간의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동생의 중학교 학비를 대는 것이 전부였다. 공장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먹는 것과 잠자리는 해결이 됐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생활에 나는 차츰 싫증을 느꼈다. 365일 하루도 다르지 않은 공장생활이 너무 답답했고 벗어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러웠지만 그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끔 동생이 공부하는 중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나도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한글이나 읽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어상표 하나 읽지 못하는 내 자신이 창피했다. 길에 붙어있는 영어간판이라도 알아볼 수 있고 신문에 나오는 한자라도 읽고 싶었다. 나는 그저 뭐라도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무슨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장생활이 싫었다.

    1970년대에는 ‘선데이서울’이라는 유명한 잡지가 있었다. 아마도 매주 일요일에 나오는 잡지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어쨌든 공장근로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잡지였다. 나는 어떤 책이 교양서적인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 ‘선데이서울’이라는 잡지를 사서 읽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는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연애사건이나 비화 등을 주로 다루는 흥미 위주의 성인잡지였다. 그러나 가판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내용도 재미있어 우리들은 이 책을 즐겨보았다. 나도 심심할 때 이 잡지를 여러 번 사 보았고 친구들이 사온 것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잡지에는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 광고가 몇 개씩 실렸다. 이 광고에는 독학으로 중학교 3년과정을 1년에 마칠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 합격자의 사진까지 실려있었다. 이 책만 사서 공부하면 누구나 쉽게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처럼 돼있었다. 책을 사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잡지 광고에 나온 강의록을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구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7년의 세월이 지난 열아홉 살이 돼서야 공부를 하겠다고 중학교 강의록을 펴보았다. 정상적으로 공부를 했으면 대학에 들어갈 나이인데 남들이 볼까봐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래서 옷장 속에 책을 숨겨두고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강의록을 꺼내 읽어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초등학교 때 배운 것조차 다 잊어버려서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너무 오랫동안 책을 놓고 있어서인지 머리도 굳어 있었고, 직장에 매어 있어 공부할 시간을 갖기도 쉽지 않았다.

    강의록을 보고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광고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동안 공부하기 위해 책을 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 갑자기 강의록을 본다고 공부가 저절로 될 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에 시달리다가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계획은 쉬웠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강의록에 나와 있는 진도표는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욱 힘든 것은 공부를 하다가 이해되지 않거나 모르는 것이 나오면 더 이상 진도가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부하다 의문점이 생기면 즉시 질문하고 그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의문점을 그대로 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처음에는 모르는 내용이 하나지만 나중에는 알아야 할 내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물론 출판사에 질문을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우편으로 질문하면 2주 후에나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어려운 강의록의 내용을 번번이 편지로 질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서 몇 차례 질문도 해보았다. 하지만 글로 써서 보내주는 설명은 강의록 내용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방법은 독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독학이 갖는 또 하나의 단점은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 요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내용이 핵심인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공부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나도 모르게 지쳐 공부를 중도포기했다. 결국 아까운 책값만 낭비하고 말았다.

    그러던중 우연히 길을 가다가 검정고시학원 학생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학원에 직접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운 내 학력을 또 드러내는 것 같아 쉽게 학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용기를 내어 중학교 과정을 배우는 검정고시학원 야간반에 등록했다. 열아홉이라는 너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원에 나가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결혼한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학원에 나가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후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학력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혼자서 독학을 하다가, 또는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학원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시간에 맞춰서 학원에 나가는 게 힘들었다. 공장생활에 익숙한 하루일과 중 저녁에 시간을 내서 학원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학원에 나가도 공부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으로는 검정고시에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오랫동안 책을 놓고 있던 탓에 기초지식이 없었고, 예습·복습할 시간도 없어 수업진도를 따라가기가 힘겨웠다. 거기다가 공장 퇴근시간과 학원 수업시간이 맞지 않아 늘 지각을 했다.

    공장 일은 오후 7시에 끝나는데, 학원수업도 7시에 시작했다. 공장 일이 끝나면 시간이 없어 저녁식사도 못한 채 바로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나갔다. 공장에서 학원까지 버스로 30분 이상 걸려 아무리 서둘러도 항상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 도착하면 근처 가게에서 빵 한 개로 저녁식사를 때웠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100원짜리 단팥빵이 나의 저녁식사였다. 나중에 가격이 150원까지 올랐지만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던 시절 내내 나는 그 빵으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한참 성장기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빵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빵을 먹고 목이 마르면 학원 화장실에서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유도 하나 먹고 싶었지만 내 주머니사정으로는 빵보다 값이 비싼 우유를 사 먹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은 월급으로 매달 내야 하는 학원비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속에 꿈을 키웠다. 검정고시에 떨어져 중학교 졸업장을 못 얻는다 해도 영어상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신문에 나오는 한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기쁨을 주는지 미처 몰랐다. 우리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에 붙어있는 영어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고졸자들에게 처음부터 월급을 많이 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눈에 맞는 안경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부는 힘들기는 하지만 이처럼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학원에 나가면 새로운 힘이 생겼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학원은 학교와는 달랐다. 결석하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쫓기는 듯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부담은 또 다른 마음의 짐이었다.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나를 늘 초조하게 했다. 시험에 떨어져봐야 결국 그 자리인데도 그동안 고생이 헛되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외국으로 입양간 동생들 생각을 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영어단어라도 몇 개 배워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만두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평생을 열등감과 패배감 속에서 괴로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코피를 쏟으면서도 공장일을 마치면 학원에 나갔다.

    검정고시란 주로 학업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혼자서 단기간에 많은 양의 학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학원에서의 수업은 내용을 이해하든 못하든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매일 공부해야 할 학습량은 엄청나게 많은데,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주변환경 또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근무했던 공장에서는 기숙사 방 하나에 7명이 함께 생활을 했다.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생활을 하다보니 사생활은 전혀 보장이 안되고 잠만 겨우 잘 수 있었다. 공장 주변에 방을 얻어 생활할 수도 있지만 적은 월급으로는 방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다.

    고입 검정고시란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즉 초등학교 졸업자가 중학교에 다니지 않고 시험을 통해서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는 시험이다. 우리들은 이 시험을 ‘고검’이라고 불렀다.

    검정고시는 매년 4월과 8월에 시험이 있다. 하루 동안 총 9개 과목의 시험을 치른다. 각 과목은 100점 만점에 40점 이상이 돼야 하고, 9개 과목 평균 60점이 돼야 전과목 합격으로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게 된다. 전과목 합격이 안되면 과목별로 60점이 넘는 과목만 합격하게 되고 다음에 불합격한 과목만 시험을 보면 된다.

    학원에서는 일반 중학교에서 3년 동안 배우는 내용을 속성으로 1년 만에 진도를 마친다. 중학교에서는 하루 6시간 수업을 하지만 학원에서는 4시간 수업을 했다. 학습량도 많고 진도도 매우 빨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검정고시반은 처음 시작할 때는 한 반이 30∼4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개강 때는 대체로 정원이 다 차지만 한 달이 지나면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이 학원에 등록하기까지는 대단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원에 나간다고 해서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학원진도는 직장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벅차다. 대부분 너무 오랫동안 손에서 책을 놓았기 때문에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공부는 의욕과 결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공부할 만한 여건과 환경이 주어져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공부는 학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습과 복습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학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후 학원에 나온다. 학원도 어렵게 짬을 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습이나 복습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일반학생들이 3년 동안 배우는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1년 만에 끝내버리는 학원 수업은 어지간한 끈기와 노력 없이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검정고시생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공부에 대한 열등의식만 더욱 키운 채 책을 놓게 된다. 어쩌면 이들은 평생을 학력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검정고시반이 모집돼 1년이 지나 교과진도가 끝날 무렵이 되면 처음 시작한 인원의 3분의 1 정도가 남는다. 교과내용을 이해하든 못하든 그래도 이들은 열심히 따라온 사람들이다. 이들 중 실제 검정고시에서 10여 명 정도가 전과목에 합격해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는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 돼 그해 8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드디어 나도 중학졸업자가 됐다. 합격증을 받아들고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서 공부한다는 게 기껏해야 공장일이 끝나면 학원에 나가거나 시간 날 때마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펴놓고 외우는 방법이 전부였다. 참고서에 나오는 문제를 교과서에서 찾아 외우고 빨간 색연필로 교과서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지우는 원시적인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원 진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중학교 과정을 1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학원수업은 학생들의 수준이나 이해도와는 관계없이 오로지 시험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이런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혼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해가야 한다.

    하는 수 없이 잠잘 때와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다. 길을 걸을 때는 단어를 외웠고, 학원에 통학하는 버스에서는 교과서를 읽었다. 작업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몰래 꺼내 중얼중얼 하다가 작업을 망친 적도 있었다.

    소등 후 기숙사 복도에서 새벽까지 공부

    학원수업이 끝나고 막차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돌아오면 자정이 가깝다. 공장기숙사는 11시가 되면 모든 방에 불을 끄게 돼있다. 기숙사에서 나름대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소등시간이 되면 기숙사 방은 불을 다 끄지만 복도는 밤새도록 불을 켜놓았다. 나는 복도구석에 의자를 갖다놓고 새벽까지 그곳에 앉아 공부를 했다.

    수학과 영어는 혼자서 공부하기에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다. 하지만 영어는 나만의 공부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날 배운 영어단어는 반드시 암기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작은 단어장을 만들어 그날 배운 단어는 그곳에 적어두었다. 영어단어를 먼저 쓰고 그 옆에 한글로 읽는 법을 적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나는 발음기호를 정확하게 읽는 방법을 몰랐다. 그리고 맨 끝에 단어의 뜻을 적었다.

    공장일을 마치고 학원수업을 받으러 갈 때 이 단어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공장에서 수원에 있는 학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단어를 쓰면서 스펠링을 익힌다. 단어가 완전히 암기됐다고 생각되면 영어단어를 손으로 가리고 우리말만 보고 영어단어를 머리에 떠올려 손가락으로 써보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단어 암기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할 때도 손은 작업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영어단어가 반복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공부란 일정한 시간만 확보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집중력과의 싸움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단 몇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공부한다면 얼마든지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중졸학력을 취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은 있으나마나한 학력증명서에 불과했다. 그나마 영어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큰 소득일지 몰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것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인정해 주는 이도 없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얻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교복에 모자를 쓴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한번이라도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녀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았고 학교를 다닐 만한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정고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고졸 검정고시 합격증이 있으면 공장에서도 대우가 달라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는 검정고시학원 야간반에 등록을 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중학교 과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려웠다. 9개 과목 중 수학·영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은 중학교 과정과 비해 특히 어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어와 수학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수학은 공부에 대한 의욕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수학이라는 과목은 내용을 이해하고도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아야 그 원리를 터득할 수 있는데, 문제를 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듬해 4월 고졸 검정고시에서 수학과 영어를 제외하고 7개 과목에 합격했다. 그해 8월 합격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이미 합격한 7과목을 제외한 수학·영어 두 과목만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수학은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때도 기초가 부족해서 애를 먹었는데 고등학교 과정은 더 어려웠다. 그해 8월 시험을 치렀다. 영어는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수학은 간신히 40점을 넘겼다. 1980년 8월, 드디어 나는 전과목 합격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합격을 못했으면 여전히 중졸 학력인데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하루아침에 고졸 학력자가 됐다. 시험 합격여부에 따라 3년이란 시간이 왔다갔다 했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대학에 간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고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칭찬이나 애정에 굶주린 나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검정고시 합격증보다는 남들이 인정해 주는 학교를 한번이라도 다녀보고 싶었다. 거리에서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열등감과 비애를 늦게나마 보상받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처지에 대학은 희망사항일 뿐,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 들어갈 실력도 모자랐고 설령 대학에 입학한다 해도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는 야간 전문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해 12월 대학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그때는 대입 예비고사라는 시험제도였다.

    시험이 있던 날, 나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도 거른 채 공장기숙사에서 수원에 있는 시험장으로 갔다. 아침 7시, 교문 앞에는 벌써 수험생들의 선·후배, 학부모 등 수많은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시험 보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교문에는 수많은 사람이 자녀나 가족의 행운을 빌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 나는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공장기숙사에서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고 시험장에 왔다. 아침에도 차디찬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는데 또 점심시간이 됐다. 벤치에 앉아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다른 수험생들은 집에서 가져온 따뜻한 도시락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이었고 나와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스물한 살의 성인인 내가 엄마의 따뜻한 도시락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누군가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작은 행복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갑자기 헤아릴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목이 메어 더 이상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나에게만은 결코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졌다.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EBS 라디오의 ‘가정고교’ 강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정보도 경험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학입시를 혼자서 준비한다는 건 무리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배워야할 내용을 단지 1년 공부한 검정고시 실력으로 대학에 가겠다고 덤벼든 것이 무모한 짓이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힘든 건 좌절감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후에도 내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검정고시 졸업장을 얻었지만 여전히 그 공장 그 자리에서 전과 마찬가지로 일했다. 공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것을 해결할 만한 돈도 없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을 하면 최소한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에 공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싼 이런 환경은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주변환경은 내 힘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 1년 동안 공장에서 열심히 일만 했다. 대학입학금이라도 마련해 두어야 다시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해, 공장에서 근무를 하면서 저녁에는 대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나가기로 했다. 5월말 대입학원 야간 직장인반에 등록했다. 그러나 5월은 대학입시 준비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학원 수업은 이미 진도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와 대학입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입시제도가 또 바뀌어서 예비고사가 없어지고 대입학력고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학력고사는 검정고시에 비해 과목수가 많았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과목도 있었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이미 배운 과목을 다시 복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는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이해도 못하는 학원수업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학원진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한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혼자서 공부하기로 했다.

    헌책방에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구입했다. 각 과목에 따라 문제집을 한 권씩 준비했다.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기숙사에 틀어박혀 문제집과 교과서를 대조해 가며 공부했다. 문제로 등장한 교과서 내용은 검정펜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같은 내용이 두 번 문제로 등장할 경우 빨간펜으로 또 표시를 했다. 이렇게 교과서를 문제집과 대조해 가면서 공부했다.

    세 번 정도 반복했더니 교과서의 주요 내용은 거의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영어와 수학이었다. 영어와 수학은 공부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 수학은 아예 포기를 하고 나머지 과목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런 공부방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찾아드는 불합격의 예감과 불안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른 수험생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정보를 접하면서 공부할텐데 나는 낮시간 동안 공장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그나마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돼준 것은 라디오였다. 당시 교육방송(EBS)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가정고교’라는 강좌가 있었다.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현직교사들이 문제풀이를 하는 입시 강의였다.

    매일 밤 공장일이 끝나면 라디오 앞에 앉아서 방송을 들었다. 과목별로 15분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의 강의였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공장에서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방송을 녹음해 두었다가 밤늦게 강의를 들었다. 나에게 라디오는 세상과 연결된 끈이었으며 정보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디오는 나의 스승이면서 학교인 셈이었다.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서너 시간밖에 안됐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항상 수면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눈은 충혈돼 있고 입술은 늘 터져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코피가 터졌다. 건강이 많이 나빠진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건강에 대한 투정은 나에게 사치고 허영이었다. 육체적인 고통도 힘들었지만 그보다는 시험에 떨어지면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더 힘들었다.

    마침내 국립사범대에 합격하다

    대학을 나온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의 눈에 대졸자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인다. 공부가 힘이 들수록 대학 나온 사람이 그렇게 위대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한번 시작한 일이니만큼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해 12월, 마침내 대입학력고사를 치렀다. 시험은 예상했던 것보다 쉬웠다. 나중에 점수를 받아보니 수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야간 전문대학을 목표로 했던 나는 예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아들고 진로를 수정해야 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다. 국립사범대학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시안내서에서 읽고난 다음 주저없이 목표를 사범대학으로 정했다.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을 보상받고 싶었다. 항상 그랬듯이 물어볼 사람도,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을 혼자 해왔기에 진로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국립사범대학은 학교에 내는 등록금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대학졸업후 4년을 의무적으로 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는 내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나는 마침내 대학에 합격했다. 온갖 고생 끝에 합격하고 난 순간 그 형언키 어려운 기쁨은 그간의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뿌듯한 성취감은 물론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공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다들 부러워했다. 회사 사장도 나를 직접 불러 격려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공장생활을 끝내야 할 때가 됐다. 나의 성장기 대부분을 보냈던 공장,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 손때가 묻은 기계들을 닦으며 작은 희망을 보았다. 그 걸레에 묻어나는 기름때 속에는 나의 과거가 묻혀 있었다. 1983년 2월 공장에 사표를 냈다. 그렇게 해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공장생활에서 마침내 해방이 됐다.

    그해 3월, 나는 스물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내가 드디어 대학 신입생이 됐다. 소위 남들이 말하는 공돌이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때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를 공돌이라고 불렀고, 여자를 공순이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설렘과 기대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였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얼굴만 해도 이전까지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무표정한 공장직공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뽀얀 얼굴에 솜털이 뽀송뽀송한 게, 다들 내 눈에는 마치 동화 속의 왕자나 공주처럼 보였다.

    게다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는 강의실은 굴속 같은 공장에 비하면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화창한 봄날 아이들의 밝은 표정과 싱싱한 젊음이 어우러진 캠퍼스의 풍경은 나하고는 인연이 먼 딴나라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을 주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상, 내가 꿈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데 길들여진 나에게 대학은 엄청난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서인지 남아도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한동안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대학수업은 하루에 고작해야 서너 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물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저녁에 한두 시간 투자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한가하게 공부하는 곳이 바로 대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내게 시간은 금보다 더 소중했다. 2학년이 돼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데 투자했다. 그 계획이 헛되지 않아 졸업하면서 어렵지 않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합격했고 동시에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대학 4년은 내 일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의 사장이 대학 4년 내내 후원자가 돼줬다. 비록 작은 도움이었지만 나에게는 휴학을 하지 않고도 대학을 마칠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방학 때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부족한 학비를 보충해야 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대학생이 돼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이전에 직공으로 일할 때와는 달리 전혀 힘들지 않았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대학생 신분으로 일하는 것은 즐거운 노동이었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렴풋이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은 새로운 힘을 솟아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연락이 왔다. 외국으로 입양된 동생들이 한국의 가족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직접 홀트로 찾아갔다. 홀트측에서 전달해 준 봉투 속에는 양부모의 편지와 동생들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동생들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답장을 써서 내 사진과 함께 보냈다. 여러 번 편지가 오고갔다. 얼마후 양부모로부터 미국방문 초청장을 받았다. 당장 가보고 싶었으나 여름방학을 이용하기로 하고 서류준비를 했다.

    미국에 가려면 미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기에 먼저 여권을 만들고 미국 비자 받을 준비를 했다. 비자 인터뷰를 하기로 예정돼 있는 날, 새벽 4시에 대사관 앞에서 줄을 서있어야 했다. 이미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있었다. 꼭두새벽인데도 미국에 가겠다고 줄 서있는 사람들의 길이가 족히 100m는 넘어보였다.

    미국이란 나라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해서 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전 11시가 돼서야 내 차례가 됐다. 비자 인터뷰에 들어가자 대사관의 영사가 물었다.

    “미국에 가려는 목적이 뭡니까?”

    “동생들이 미국에 입양돼 있는데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딱 한마디 물어보고 바로 서류를 되돌려주었다. 너무 허망했다. 어제 저녁에 올라와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딱 한마디 물어보고는 끝이었다. 초청장이나 비행기표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 비자를 거절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에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직업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집도 가족도 없고, 직장도 없는 사람이 미국에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내 능력으로는 미국에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미국 가는 것을 포기했다. 미국 양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양부모는 다시 비자 인터뷰를 신청하고 그 날짜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양부모는 인터뷰 날짜만 정해지면 자기가 직접 대사관에 연락해서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한번 더 번거로운 일을 하기로 하고 비자 날짜를 받아 새벽에 줄을 섰다. 인터뷰 차례가 됐다. 영사는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서류도 보지 않고 그냥 1년짜리 비자를 내주었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갔다. 서울에서 LA로, LA에서 또 두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애리조나 남부 ‘스카츠데일’이라고 불리는 어느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더이상 한국인이 아닌 미국 입양 동생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동생들을 만났다. 일곱 살, 다섯 살배기 코흘리개로 한국을 떠났던 동생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돼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만도 한데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9년이란 세월은 모국어를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었다. 나는 말이 안 통하는 동생들을 꼬옥 껴안아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도시 근교의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동생들을 입양해서 살고 있는 그 집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이었다. 잔디가 넓게 깔린 정원과 뒤뜰의 수영장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집이었다. 자신들이 낳은 자식 한 명에, 내 동생 명숙이와 영숙이, 그밖에 다른 한국 남자아이 두 명을 더 입양해 함께 살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매우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만나본 동생들은 더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 생김새만 나와 비슷할 뿐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미국인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완벽한 서양사람이었다. 비록 피를 나눈 형제지만 살아가는 과정에 따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혈육의 정보다는 미국이란 나라만큼이나 먼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동생을 몹시 보고 싶은 심정에 그곳에 갔는데 동생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서투른 영어로나마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들은 자기들을 버린 모국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들이 미국이란 나라에 와서 배고픔은 해결했을지 모르지만 자기를 버린 모국에 대한 반감은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 내면의 모습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또 한번 삶의 비애를 느껴야 했다.

    동생들이 살고 있는 주변환경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 4명 이외에는 동양사람이나 흑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백인들만 사는 마을이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자신들의 초라한 외모에서부터 주변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머리도 까맣고 피부도 노란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미국인이 되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양부모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내 동생들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입양한 다른 아이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자라면서 ‘나는 누구인가’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기와는 다른 모습의 사람들 속에서 그들처럼 행동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국시민이면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서로 생김새가 비슷하고 불행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우리는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이야 할 수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이야기는 나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손수 초청장과 왕복 비행기표를 준비해 주고 비자 받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 동생들이 외출하고 없을 때 양부모는 나에게 여러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어렸을 때는 쉽게 적응을 했는데 사춘기에 들어선 동생들이 요즈음 들어 부쩍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 것 같다고 했다. 나를 초청한 이유도 이들이 이곳에서 적응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이국땅에서 느껴야 했을 이질감과 소외감이 어떠했는지 나를 대하는 동생들의 말과 행동에서 어렴풋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을 그곳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입양아들은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자나라에 떠밀려 와서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모국에 대한 반감과 열등의식이 있었다. 미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같이 경쟁하면서 마치 자기도 백인인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다. 행복은 풍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었다.

    “느그덜, 고생 겁나게 했지야”

    나는 헤어지면서 동생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입양아의 고뇌와 고통이 그들의 눈물 속에 묻어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부모의 잘못인가, 아니면 자기를 버린 모국의 잘못인가. 아니면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운명에 이끌려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란 말인가.

    자기들과는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낯선 곳에서 그들에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철들기 전에 알아야만 하는 해외 입양아들, 그들의 마음속에는 행복이 없었다. 동생들을 만난 기쁨보다는 버림받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동생들과는 그후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4년 후인 1987년, 그들은 자기를 버린 모국을 찾아왔다. 자신이 태어난 땅, 자신의 어린 시절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고향땅을 다시 밟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한국에 살면서도 고향을 떠나온 이후 한번도 가지 못했다. 사는 것이 힘들었고 고향을 찾을 만한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 나를 반겨줄 사람도 없는 그곳을 굳이 가야할 이유도 없었다.

    미국에서 온 동생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내가 태어나고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농토로 변해 있었다. 마을 앞에 있던 바다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바뀌어 있었다. 도시로 떠난 사람이 많아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어느 낯선 마을을 찾아간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대번에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어르신 안녕하신지요? 저 아랫집에 살았던 영깁니다.”

    “누구라고? 오매, 니가 영기라고? 이것이 뭔일이다냐? 그래, 느그덜 어찌고 살았냐? 고생 겁나게 했지야. 오매, 징허게 반갑구만잉.”

    오랜만에 들어보는 전라도 사투리가 정겨웠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부둥켜안고 울었다. 동네사람들은 갑작스런 우리의 출현에 놀라워하기도 했고 대견해 하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불행했던 과거가 동네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미국에서 온 동생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동생들은 한국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주변의 흔적들을 통해서 잃어버린 과거를 하나씩 더듬어 내고 있었다.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있는 부모 산소를 찾아갔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오랫동안 버려진 부모의 묘지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과 동네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찾아낸 산소는 여러 해 동안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흔적만 남아있을 뿐 잡초가 무성했다. 동생들이 사온 꽃을 산소에 두고 우리는 돌아왔다. 동생들은 2주간 한국방문을 마치고 자기들이 살아가야 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선택의 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불우한 환경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 그것에 우리를 묶어둘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설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늘 불만은 있게 마련이며, 아무리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늘 마음이 풍요로울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풍요롭지 못했다.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지나친 가난은 인간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흔히 말하기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의 감당할 수 없는 고생은 그 자신의 성장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 그 시련을 극복하고 자라난다고 할지라도 곳곳에 지뢰밭 같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

    눈물로 이룬 열다섯 소년가장의 꿈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제때에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할 때 받지 못했고 공부를 해야 할 때 공부를 하지 못했다. 이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 결국 그 짐은 본인이 평생 지고다녀야 할 멍에로 남게 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삶이란 하루하루 경험의 묶음이며 각각의 경험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배우지 못하고 돈이 없고, 부모의 뒷바라지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결국 사회의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오자가 돼 이 사회에 부담만 되는 존재가 되지 않고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많은 유혹과 혼돈의 미로 속에서도 어긋난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래도 밝은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힘은 우리 가족을 다시 찾아야 된다는 어린 소년의 꿈이었다.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동생 훈기, 지금은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경숙이, 그리고 코흘리개 어린 나이에 머나먼 타국에 입양돼 천신만고 끝에 연락이 닿은 명숙이와 영숙이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이다. 나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28세에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신혼살림은 단칸 월세방에서 시작했지만 행복했다. 늦게나마 가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내 나이 마흔, 가정을 꾸리고 나도 이제 두 아이의 부모가 돼 내 자신을 돌아본다. 살아온 세월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모든 것이 참으로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지나고 난 뒤에는 그 시절이 가장 소중하게 그리워지나보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많은 시련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고난은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인내의 미덕을 배웠고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선물로 받았다. 아직도 나에게 주어진 시련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됐다. 어쩌면 나는 40년 동안 그런 자신감을 얻기 위해 줄곧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성공해 돌아오리라’던 열다섯 살 철부지 소년의 꿈을 이제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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