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천의 얼굴 지하드 신앙수행에서 전쟁까지

  • 이홍규·서울대 의대 교수·내과

    입력2004-11-09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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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의 얼굴 지하드 신앙수행에서 전쟁까지
    오늘날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정치사건들을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이슬람교와 무관한 것이 없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행위를 하는 것이 다반사다. 보수적인 왕정국가는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현대적인 공화정 국가에서조차도 정치이념이나 국가활동에서 종교의 간여를 공식화하고 있다. 이슬람 나라들에는 예외 없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종교단체나 정치조직이 결성되어 국가의 정치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56개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이란 하나의 공통분모 위에 범세계적인 ‘이슬람회의기구(OIC)’를 만들어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세계에서 종교와 정치는 평행선을 그으면서 불가분(不可分)의 교착관계에 놓여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어느 사회, 어느 종교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정교합일(政敎合一)이라는 이슬람 고유의 특징에 기인한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만이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양식이고,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조화로운 전체’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기독교사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누가 복음 20:25)라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으나, 이슬람사회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법(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사회다. 여기에서의 ‘정(政)’은 세속사회 일반을 말한다. 따라서 이슬람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군사 등 사회의 제반 영역에 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규범과 제도가 있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기타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특징이다.

    이슬람교 고유의 정교합일은 이슬람의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당연한 이념이고 제도였다. 이슬람은 출현 초기부터 정치와 종교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느 종교사에도 종교 창시자가 종교와 더불어 국가권력을 창출한 예는 없다. 유독 무함마드만이 종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공동체(움마)를 건설했다.



    그는 메카에서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출발했지만 메디나로 성천(聖遷)한 후에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고 이끄는 최고의 국가 통치자가 되었다.

    이 메디나 공동체와 그 권력구조(정부)는 비록 단순하고 불비한 점이 있었지만, 민족·영토·통치권 등 기간적(基幹的)인 권력구조를 두루 갖춘 국가형태였다. 무함마드의 신분은 이에 더해 전장에서는 군사들을 통솔하는 총지휘관이었으며, 공동체 내에서는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자, 재판관의 역할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규약이나 법령을 제정하고 각종 행정명령을 반포하며 그 집행을 감독하는 행정수반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다른 부족들이나 공동체들과 화약(和約)을 체결하는 등 명실상부한 최고 위정자의 지위에 있었다.

    정교합일적 일원론

    그의 뒤를 이은 칼리파(계위자)들도 무함마드의 계위자란 공식 직함을 가지고 그가 행사하던 종교와 정치 두 분야의 대권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들은 공동체를 통치하는 정신적 및 세속적 지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으며, 백성들도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정교일치의 신념은 알라의 계시에 의해서도 보증을 받았다.

    경전 ‘꾸르안’은 알라에 대한 복종(종교적 복종)과 현세 통치에 대한 복종(정치적 복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오, 믿는 자들이여, 알라께 복종하라. 그리고 알라의 사자(使者)와 너희들 가운데 권위를 지닌 자들에게 복종하라.”(4:59)고 알라는 계시했다. 여기서 ‘권위를 지닌 자들’이란 현세의 통치자들을 뜻한다. 알라께 복종하듯 무함마드와 칼리파들에게도 복종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믿는 자들(무슬림들)이 간직해야 할 신앙이라는 것이다.

    칼리파들이 통치하는 공동체의 주 기능은 사람들을 경전에 명시된 이슬람법에 복종시키고, 그 법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전을 정확히 해석하고 그에 따르며, 무함마드의 언행(하디스)에 비추어 제반 문제를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경전과 하디스는 종교와 정치를 가리지 않고 모든 행위의 근원적인 준거가 되었다. 사실상 경전과 하디스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 전반에 관한 원리들이 구구절절 명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명분과 정치적 명분이 항상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으면서 공동체 운영의 근본이념으로 기능했다. 1400여 년간의 이슬람 역사는 이러한 정교일치의 역사로서 오늘도 그 이념은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가 정치와 종교의 제반 영역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한 것처럼 그를 이은 후세의 칼리파들도 그것을 그대로 계승해 이슬람공동체를 다스려온 체제를 이슬람 정치사에서는 칼리파제라고 한다.

    이러한 정교합일의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고유의 정치이념과 제도, 즉 정치관이 정립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이슬람 정치의 성격을 규정하는 제반 원리들, 칼리파제에 기초한 국가체제 및 이러한 체제의 운영을 규제하는 이슬람법, 그리고 지하드를 지향한 대외관계 등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보이고 있으나, 그 핵심만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종교이자 국가’라는 이슬람 고유의 정교합일적 일원론(一元論)만은 변함없이 지켜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근자에 와서 일부 학자들이 이 정교합일적 일원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아직은 입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는 이슬람 정치가 관철해야 할 제반 원리들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원리들은 이슬람 국가의 목적과 기능, 정치제도의 특성을 규정해줌으로써 이슬람 정치의 ‘최고 가치’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슬람 국가들은 여러가지 법적·행정적·군사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이 가치들을 지켜오고 있다.

    슈라, 이슬람식 민주주의

    이슬람 정치 원리 중 첫째는 이른바 슈라(협의제)다. 슈라는 무슬림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서 제기된 문제들을 공동으로 협의하여 해결하는 일종의 협의제다. 이슬람에서 슈라는 공동체운영의 한 원칙이고 이슬람법(샤리아) 상의 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무슬림 개개인이 간직해야 할 속성과 자격이라고까지 규정하고 있다.

    경전 ‘꾸르안’은 국가 수장(칼리파)은 반드시 공동체 성원들의 협의로 선출되고,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역시 공동체 성원들과의 협의를 거친 뒤에 처리해야 하며(3:159), 알라의 의지에 귀의하고 그 부름에 호응하며 공동체의 일을 서로 협의하는 자만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42:38)고 가르치고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생전에 여러 번의 전투를 비롯해 중대사가 발생할 때마다 성문도반(聖門徒伴, 솨하바·무함마드의 동 시대 교우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자주 슈라를 행했다. 그리하여 성문도반인 아부 후라이라는 “나는 라술라(聖使, 무함마드)보다 더 자주 성문도반들과 협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무함마드가 수범적으로 행한 슈라는 그의 뒤를 이은 위정자들에게는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어 정치행위의 원칙으로 공식화되었다. 이와 같이 협의제는 이슬람 정치를 펴는 데서 준수해야 할 가장 선결적인 원칙이며 법적 의무다.

    슈라는 무함마드가 계위자를 지목하지 않고 사망하자 제1대 계위자(칼리파)를 협의의 방법으로 선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제4대까지는 슈라의 방법으로 칼리파를 선출하여 이른바 정통칼리파시대(632~661)를 열었으나, 자식에 의한 세습제가 시작된 우마위야조시대(661~750)부터는 최고 통치자를 선출하는 ‘대슈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법학자들의 집단적 협의에 의해 입법하는 합의제(이즈마아)나, 이맘의 주도로 지역적 사회문제를 협의하는 ‘소슈라’는 상당기간 지속돼왔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를 슈라에서 찾고 있으며, 슈라정신이야말로 이슬람 민주주의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슈라는 하나의 협의체로서 그 구성방법이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그 구성원들은 독자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능한 법학자(무즈타히드)들이다. 협의에 상정되는 내용은 주로 경전이나 하디스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이다.

    예컨대 음주자의 처벌이라든가, 정복지의 땅 분배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경전이나 하디스에 명시되었거나, 이슬람법에 엄연히 위배되는 사항들은 협의에 상정될 수 없다.

    이슬람 정치원리, 정의와 자유

    이슬람 정치가 추구하는 두번째 원리는 정의(正義, 아들)다. 아랍어에서 ‘아들(adl)’은 ‘똑바름’, ‘바로잡음’, ‘동등’, ‘균형’ 등의 의미를 가진 낱말이나, 그것이 종교 및 정치사회적 의미로 승화되었을 때는 ‘신 앞에 올바름’이란 종교적 의미에다가 ‘공평’, ‘균등’, ‘절제’, ‘정직’ 등 윤리도덕적 의미를 가미한 복합적 술어로 쓰인다.

    따라서 정교합일의 이슬람 정치원리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이러한 복합적 의미를 지닌 낱말이 안성맞춤이다. 한편, 종교적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 정의와 불의(줄므)의 계선이 명확하고, 또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알라가 계시를 내린 목적이고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믿는 이슬람에서는 정의를 하나의 정치원리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당위성은 경전에도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경전은 “알라는 정의와 선행을 명하셨고… 부정과 악행을 금하셨다.”(16~90)고 정의의 구현을 명문화하면서 재판을 비롯한 모든 권력 행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것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압제를 행하고 지상에서 불의로 부정을 자행한 자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지어니…”(42:42)라는 경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 정치연구가들은 이러한 이슬람 정치의 원리를 일반화하여 ‘정의는 통치권자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덕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슬람 정치원리의 세번째는 자유(自由, 홀리야)다. 이슬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왜냐하면 원래부터가 착한 인간에게는 압제를 받을 아무 이유가 없으며, 자유가 잠재의식으로 온존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나 선택의 자유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한 속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슬람은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취한 것은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한 행위로 본다. 6신(信, 여섯 가지 종교적 믿음)의 하나인 정명(定命)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함으로써 유연한 정명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좇아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나, 그렇지 못하여 처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나를 막론하고 인간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앙도 이슬람은 강요가 아닌 자유선택에 맡긴다. “종교에는 강제가 있을 수 없다”(2:256), “사람들을 강요해서는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다”(10:99)고 신앙의 자유원리를 강조한다. 종교란 일종의 잠재적 의식형태로서 결코 강요에 의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 슈라시대에는 칼리파도 무슬림들의 자유선택에 의해 선정되었다.

    제4대 정통칼리파 알리가 임종에 처했을 때 원로들이 그의 큰아들인 하싼을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진정하자, 알리는 주저없이 “나는 명령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면서 통찰력을 가진 원로들이 알아서 자유로이 처리하라고 당부한 이야기는 이슬람 정치사상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의 이러한 자유는 무절제한 자유가 아니다. 이슬람법(샤리아)에 의해 허용(무바흐)되는 범위내의 자유라는 단서가 있다. 이를테면 조건부적 자유다.

    네번째의 이슬람 정치원리는 평등(平等)이다. 주지하다시피 평등원리는 현대 정치제도의 기본원리이자 인간의 기본권리다. 이 기본원리가 보장되었다고 호언하는 근대 서구국가들은 그 연원을 1789년 8월 프랑스혁명 개시 직후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제정 발표한 ‘인권선언(전문과 17개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사에서는 이보다 1000여 년 앞선 7세기에 벌써 인간 평등원칙이 선포되었다. 유목사회에 팽배했던 종족이나 계층간의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데 급선무임을 자각한 무함마드는 당초부터 인간의 창조나 사회생활에서의 만민평등사상을 제시했다.

    그가 별세하기 직전(632)에 행한 유명한 고별의 순례연설은 전인류를 향한 ‘인간평등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그대들의 조상은 하나이니, 실로 아랍은 비아랍에 우월치 않으며, 오로지 신에 대한 경외(敬畏, 타끄와) 외에는 황인종이 흑인종에 우월치 않다”고 열변을 토했다.

    경전에도 “사람들아 내가 그대들을 남녀로부터 만들었고, 그대들이 서로 알 수 있게 민족과 부족으로 그대들을 만들었도다. 알라 앞에서 존귀한 자는 알라를 경외하는 자이니라”고 타이르고 있다. 인간은 원래가 한 조상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서로의 다름은 오직 신에 대한 경외의 정도에서 나타날 뿐이지, 결코 선천적인 차별이나 불평등은 있을 수 없으며, 신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의 차등이나 우위를 현세에서는 불허하나 내세에서는 인정한다. 즉 현세에서 인간이 신에 대해 행한 경외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내세에서 그의 차등과 우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우위의 자리는 내세의 신 앞에 있지, 결코 현세의 인간 앞에는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앞에 있는 것은 오로지 평등뿐이라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실천행위로 이 평등원리를 보여주었다. 한번은 절도죄로 고소된 한 여인에 대해 주위에서 변호를 하면서 처벌하지 말 것을 청하자, 무함마드는 대로하여 “알라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만약 내 딸 파튀마가 도둑질을 했다고 하면 나는 그애의 손을 자르리라”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이슬람의 정치관에서 다음으로 고찰해야 할 것은 칼리파제에 기초한 국가체제다. 이슬람사에서 정교합일의 국가체제로 출발한 것이 바로 칼리파제다. 교조 무함마드가 별세한 후 슈라(협의제)에 의해 4명의 칼리파(계위자)가 계승적으로 선출되어 이슬람공동체의 최고권력자가 됨으로써 그들을 정점으로 한 칼리파제가 출현했다.

    따라서 칼리파제는 계위에 의한 정교합일의 국가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국가체제다. 이 제도에서 이슬람 국가의 계위자(칼리파)들은 최선임자인 무함마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를 수호하고 현세 정치도 올바르게 펴는 이슬람 본연의 정교합일체로 국가를 운영했어야 했다.

    그러나 칼리파제는 30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만 그 빛을 발하다가 우마위야조부터 세습제가 도입되면서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후 칼리파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기복무상한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적지 않은 위정자들은 칼리파란 이름으로 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지위에 오른 후에는 종교적 사명감은 뒷전으로 하고 비이슬람적인 강권과 술수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함으로써 이상적인 칼리파제는 점차 변질되었다.

    그 결과 중앙집권적인 칼리파제는 통치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판국은 1258년 몽골의 침입으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후 이집트인 맘루크조(1250~1517)가 전통 칼리파제를 복구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름뿐인 칼리파는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맘루크조를 정복하고 이슬람국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한 오스만 터키는 애당초 약 300년간은 칼리파란 명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구 열강의 내침에 대처하고 이슬람세계의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근세에 와서야 술탄제와 함께 칼리파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패한 터키는 1924년 잔명이나마 가까스로 유지해오던 칼리파제를 아예 폐기하고 정교분리의 공화제를 선포했다. 이로써 1400여 년의 이슬람 정치사에서 이상으로 꿈꿔오던 칼리파제는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

    칼리파제에서는 원칙적으로 3권(입법, 사법, 행정) 분립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권력이 칼리파 한 사람의 수중에 집중된다. 이것은 현대국가의 권력구조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제도다. 이것이 오늘 정교합일의 이슬람적 국가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그리하여 이슬람 법학자들은 칼리파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슬람은 여러가지 형태의 국가체제를 수용한다고 변을 토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 중에는 왕정제가 엄존하는가 하면 공화제나 술탄제 같은 다양한 국가체제가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사막에서 물가로 인도하는 ‘샤리아’

    현대 이슬람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무는 크게 종교업무와 국민권익업무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내용을 세분하면, 종교의 보호, 재판의 시행, 영토의 보존, 범법자의 처벌, 국경의 수비와 강화, 지하드의 수행, 세금의 징수, 예산의 집행, 관료의 임명, 공공업무의 감사 등 10가지다. 세부내용에서 보다시피 아직은 정교합일적인 국가체제 성격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지만, 현대적인 국가체제 성격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의 정치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국가체제나 그 체제의 지배에 있는 국민의 활동을 규제하는 샤리아, 즉 이슬람법이다. 원래 아랍어의 ‘샤리아(sharia)’는 ‘물가에 이르는 길’이란 뜻이다.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물은 생명이며, 물가로 가는 길은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 아닐 수 없다. 경전 ‘꾸르안’에서도 이 단어는 ‘길’이라는 보통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어원으로부터 인간에게 생활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알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법, 즉 이슬람법을 ‘샤리아’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슬람에서의 법의 개념은 현대법의 일반개념과 사뭇 다르다. 현대법은 주로 인간의 사회생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의 체계로서 공사(公私)의 사회관계만을 규제한다. 그러나 이슬람법은 사회관계뿐 아니라, 인간의 신앙적 관계마저도 규제한다.

    그리하여 이슬람법은 예배, 종교부금, 금식, 순례, 장례, 세정(洗淨) 등 종교적 신행(信行)에 대한 규범(이바다)과 혼인, 상속, 징세, 친자관계, 노예와 자유인, 계약, 매매, 종교기금, 소송, 재판, 비무슬림의 권리와 의무, 범죄, 전쟁 등 사회적 관계(무아말라)에 대한 규범의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슬람법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전자)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후자)를 규제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현대법이 ‘인간의 지혜와 이성의 산물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슬람법은 ‘신성한 신의 계시에 의한 불변의 것’으로 ‘예언자를 통해 계시된 신의 의지’다. 이러한 천계법(天啓法)에서 공동체의 주권자나 입법자는 국가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이다.

    그래서 법을 어기는 행위는 사회조직과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불신과 불경의 죄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에서는 시종 법학(피끄흐)을 신학보다 우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중시한다. 그것은 이슬람이 ‘신앙과 실천의 체계’로서 현세의 삶을 중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법의 4가지 근거

    무슬림들은 철두철미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샤리아는 종교와 사회윤리도덕을 기준으로 하여 무슬림들의 행위를 5대 부류로 규범화하고 있다. 5대 부류의 행위는 다음과 같다.

    ①의무(와집): 예배, 금식, 효도 등과 같이 행하면 보상되고 행하지 않으면 처벌되는 행위 ②금기(하람): 음주, 절도, 이자놀이, 뇌물 등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보상되고 행하면 처벌되는 행위 ③권유(만둡): 친우나 이웃 방문, 외모 단정 등과 같이 행하면 보상되고 행하지 않아도 처벌 안 되는 행위 ④비난(마크루흐): 흡연, 해뜰 때까지의 늦잠 등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보상되고 행하면 처벌은 없으나 비난을 받는 행위 ⑤허용(무바흐): 직업이나 음식, 주택의 선택 등과 같이 행해도 보상이 없고 행하지 않아도 처벌이 없는, 즉 법과 무관하여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행위.

    이슬람법에는 4가지 법원(法源)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법원은 경전 ‘꾸르안’이다. 총 114장으로 구성된 이 경전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인간에 관한 알라의 모든 계시를 집대성한 대법전이다.

    법학자 압둘 와합의 통계에 의하면, 경전 속에 있는 부분별 관련 구절의 수는 대략 신분법이 70개, 채권이나 물산권 등 민사법이 70개, 형사법이 30개, 형사소송법이 13개,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법이 10개, 국제법이 25개, 재정법이 10개 정도로서 샤리아의 사회적 관계법 영역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그밖에 종교적 신행법에 관한 내용은 경전의 전편에 널리 깔려 있다. 법원의 견지에서 볼 때 경전 내용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법적 원칙만 제시했을 뿐이며, 초기 이슬람시대의 사회환경을 반영한 것으로 그 적용에서는 시대적 한계성을 면할 수가 없다.

    샤리아의 두번째 법원은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준경전격의 ‘하디스(일명 쑨나)’다. 이 언행록에는 무함마드가 생전에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 묵인한 것 등 3가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법적 준거로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경전과 언행록의 두 법원에서 판결의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이른바 유추(類推, 끼야스)와 합의(合議, 이즈마아)의 두 가지 법원이다.

    이미 발효된 법적 범례에서 유사한 사항을 찾아내어 비교 유추하거나 관행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이 법원으로서의 유추다. 이와는 달리 종종 유추해서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주로 법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협의해 결정을 도출한다. 이것이 법원으로서의 합의다. 이러한 법원, 특히 유추와 합의에 의한 법원의 당위성이나 효력성에 관해 많은 논란이 계속되어오다가 8세기 말엽에 이르러 법학자 샤피이가 최종적으로 정리해냄으로써 마침내 4대 법원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일단 확정된 법원일지라도 그 해석이나 적용범위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발생하여 결국 법학파가 생겨나고, 법학파들간의 논쟁 속에서 이슬람법학(피끄흐)이 정립되었다. 그 결과 8~9세기에 정통 이슬람사회에는 4대 법학파가 출현했다.

    가장 이른 법학파는 8세기 초 이맘 아부 하니파(699~ 767)가 이라크에서 세운 하나피야파(일명 이라크파)다. 이 파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경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견해(라어이)에 따라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추를 법원으로 인정하여 법적 판단에 가장 많이 적용했다.

    다음으로 이맘 말리크 븐 아나스(714~795)가 메디나에서 결성한 말리키야파(일명 메디나파)다. 당시 메디나는 이슬람공동체의 발원이자 중심지로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잘 보존되어온 고장이었으며, 이맘 말리크는 하디스 수집의 대가였다. 그리하여 이 법학파는 메디나의 전통과 구전되어온 하디스에 준하여 법이론을 발전시켰다.

    세번째 법학파는 이맘 말리크의 수제자인 무함마드 븐 이드리스 알 샤피이(767~820)가 이끈 샤피이야파다. 말리키야파뿐 아니라, 하나피야파의 법학까지도 정통한 샤피이는 815년 이집트 카이로에 옮겨가 전승을 위주로 하는 말리키야파와 이성을 중시하는 하나피야파의 법학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새 법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하나피야파가 즐겨 적용하던 유추를 최소화하고 말리키야파의 중심체계를 이루고 있는 메디나 전통과 관행 중에서 오직 하디스만을 골라 법원으로 채택했다.

    마지막 법학파는 샤피이의 제자인 아흐마드 븐 한발리(780~855)에 의해 출현한 한발리야파다. 한발리는 앞 3파가 유추와 합의를 법원으로 채택한 것을 반대하면서 오직 경전과 하디스만을 법원으로 인정하고 독자적인 법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성의 적용으로 인해 인위적인 것이 출현하면 그만큼 순수한 진리에서 멀어지는 위험성이 있다고 역설하면서 비록 확실성 검증에서 판시(判示)된 약한 하디스일지라도 이성에 의한 법원보다는 진리에 더 가깝고 옳은 법원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한발리야파는 유추나 합의의 법원을 부정하고 보수적이며 경직된 법학을 고집했다. 한발리는 얼마나 보수적이고 경직적인 사고를 했는지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어도 좋다고 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4대 법학파 사이에는 법 구성의 특성 때문에 세부적인 측면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서로를 정통 법학파로 인정하고 있다. 대체로 10세기에 들어와서 법학자들은 인간행위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최종 결정도 내려졌다고 판단하여 향후 종교법에 대해 독자적인 법 견해를 세우는 행위(이즈티하드)를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이 4대 법학파가 이슬람 사회의 법무를 관장하고 있다. 무슬림이면 누구든 반드시 이 4파 중 한파에 소속되어 자파의 법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

    오늘날 4대 법학파의 분포상황을 보면, 대체로 하나피야파는 이라크 터키 동유럽 아프가니스탄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중국 파키스탄 인도 하(下)이집트의 카이로와 델타지역에서, 말리키야파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스페인 상(上)이집트 수단 쿠웨이트 바레인 등지에서 우세하다. 샤피이야파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 동아프리카 인도양 연안에 퍼져 있다.

    한발리야파는 북부와 중앙아라비아반도(사우디아라비아)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가 여느 이슬람 지역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한발리야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무슬림들 중에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통 이슬람파(쑨니파)에서 적용되는 법체계와 법원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소수파인 쉬아파는 나름의 법학체계를 세우고 법이론을 발전시켜왔다. 쉬아파도 역시 경전과 하디스를 법원으로 삼은 것은 쑨니파와 같다. 다만 하디스에 대한 해석과 적용 및 채택에서 두 파간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쉬아파는 합의제 법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이맘(예배 인도자, 쉬아파교권의 수장)의 역할로 대체한다. 왜냐하면 이맘은 법 해석과 판단의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는 무오류의 절대적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두 파는 비록 전통과 법 해석에서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종교이념이나 신행(信行)은 다를 바가 없다.

    이슬람의 정치관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전쟁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지하드다. 자고로 이슬람역사에서 지하드만큼 논의가 많은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전이나 하디스 속에는 지하드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만 있어서 그 해석이 시각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전쟁이라는 민감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시대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하드론은 이슬람의 전시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정치문제로 부각되어 왔다.

    특히 이슬람세계의 대내외적인 갈등이 그 어느 시대보다 첨예한 오늘에 와서 지하드는 더욱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작금의 끔찍한 자살폭탄이나 테러 같은 행위에 영락없이 ‘지하드’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니, 그 해석을 두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갖가지 자기합리적인 해석과 주장에 지하드의 본질은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지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러로 얼룩진 지하드

    지하드는 그 내용의 일부가 전쟁이라는 대외관계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이슬람의 국제질서관을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은 출현 초기부터 세계를 ‘이슬람영역(다룰 이슬람)’과 ‘전쟁영역(다룰 하릅)’으로 이분화하고 그 대응관계를 모색해왔다. 이슬람영역이란 이슬람식 정의가 실현된 지역이고, 전쟁영역이란 비(非)이슬람식 질서가 온존하는 지역이다.

    이슬람영역은 무슬림들의 공동체와 무슬림이 아닌 피보호민(아흐룰 짓마)들의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피보호민이란 이슬람 정복지에서 이슬람법을 존중하면서 인두세를 지불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를 받고 자신들의 신앙과 법률이 허용되는 그러한 이교도인을 말한다.

    이른바 이슬람영역과 전쟁영역은 이슬람세계와 비이슬람세계로 대변되는데, 전자의 견지에서 보면 후자는 언젠가는 자신에게 병합돼야 하는 대상이다. 그 병합을 실현하는 방도가 바로 전쟁일 수도 있고, 평화적일 수도 있는 지하드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하드는 이 두 영역(세계)의 관계 처리에서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된다.

    원래 아랍어 단어 ‘지하드(jiha-d)’는 동사 ‘자하다(ja-hada)’의 동명사로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함’이란 뜻이다. 이러한 복합적 뜻이 이슬람의 종교적 지향과 교감을 이루어 ‘신의 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분투)함’이란 종교적 함의로 승화되었다. 여기에서 ‘신의 길’을 ‘이슬람’ 혹은 ‘이슬람의 정도(正道, 후다)’라고 풀이할 때, 지하드란 곧 이슬람을 위해(이슬람을 위한 정도에서) 헌신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을 ‘무자히드(muja-hid)’라고 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함의에서도 엿볼 수 있다시피, 이슬람적인 지하드에는 세진(世塵)으로부터 자신을 순화(純化)하기 위한 개인적인 신앙차원의 노력과 이슬람영역의 발전이나 방어 및 확대를 위한 집단적인 공헌차원의 분투라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전자는 내면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후자는 다분히 외향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종 이 후자의 전투적 성격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 확대 과장되어 지하드가 마치 그것뿐인 것으로 오인되어 왔다. 지하드가 서구식 ‘성전(聖戰, 영어로 the Holy War, 프랑스어로 la Guerre Sainte)’으로 오해되고, 급기야는 그렇게 의역(意譯)되고 말았다. 그 영향은 한자문명권에까지 미쳐 결국 그대로 한자역(漢字譯)되고 말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적 ‘지하드’에는 신앙 차원의 노력과 공헌차원의 분투(전쟁)라는 두 가지 내용이 있기 때문에 지하드 일반을 ‘성전’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적어도 편파적인 번역)일 수밖에 없음으로 마땅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별로 합당한 역어(譯語)가 없으므로 아랍어 그대로 ‘지하드’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단, 집단적인 공헌 차원의 분투는 왕왕 전쟁의 방법으로 진행되므로, 그러한 형태의 지하드만은 ‘성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지하드론에 의하면 이러한 전쟁은 ‘신의 길’에서 이슬람을 위한 일종의 헌신으로 신성한 전쟁이며, 또한 원론적으로 이슬람에서는 ‘신성한’ 전쟁밖에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특히 유의할 것은 지하드의 전쟁부분만을 지칭하는 ‘성전’과 이때까지 지하드 일반을 부당하게 지칭해온 ‘성전’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굳이 지하드의 두 가지 내용을 분리하여 지칭해본다면, 개인적인 신앙차원에서의 노력은 ‘노력지하드’라고, 집단적인 공헌차원의 분투는 ‘성전지하드’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지하드는 노력지하드와 성전지하드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하드가 지니고 있는 중차대한 종교적 의미와 역할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그것을 무슬림들이 수행해야 할 종교적 실천의무의 하나로 규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소수파인 쉬아파는 지하드를 실천의무의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수행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이 파는 지하드를 대·소 지하드로 양분하는데, 대지하드는 신에 가까이 가기 위한 정신적 지하드고, 소지하드는 전쟁수단에 의한 지하드다.

    종교신앙적 가치로 보면 대지하드가 소지하드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그러나 다수파인 쑨니파는 지하드를 격려하면서도 원래 실천의무는 개인 차원의 의무사항이기 때문에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무슬림들이 꼭 수행해야 할 의무도 아닌 지하드를 일반 무슬림들의 종교적 실천의무의 하나로는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다수 정통파의 주장을 따라 이슬람의 종교적 실천의무는 다섯 가지(5行, 5柱)로만 한정하고 지하드는 의무에서 제외되어 있다. 아무튼 지하드는 종교적 의무가 되리만치 이슬람에서 중요한 종교적 행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다양한 성전지하드

    이렇게 중요시되는 지하드는 마음으로, 입(말)으로, 손으로, 검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경전은 그 방도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과 입으로 한다는 것은 정신적 수행을 말하고, 손과 검으로 한다는 것은 육체적 수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하드는 정신 및 육체적 행위 전반을 포괄하는 정교합일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지하드에서 노력지하드는 어디까지나 무슬림 개개인의 내면적인 수행문제이기 때문에 별로 논의의 대상이 아니지만, 성전지하드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와 법리(法理)문제를 야기해 오늘날까지도 구구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법학자들은 성전지하드를 대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하고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①다신교자들에 대한 지하드:유일신을 믿지 않는 다신교자들은 처음부터 가장 완강하게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반대하고 박해를 가했으므로 그들과는 성전을 할 수밖에 없다.

    ②배신자들에 대한 지하드:이슬람영역을 이탈하여 전쟁영역에 들어간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데, 응하지 않으면 성전을 하되, 전쟁영역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③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하드:비록 의견을 달리해도 이슬람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면 성전은 하지 않고 이슬람영역 내에서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이맘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슬람법을 어기면 성전을 한다. 이견(異見)이 이슬람 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불만이라면 화해를 시도한다. 그들에 대해 성전을 할 경우, 다신교자들이나 배신자들에 대한 처우와는 달리 재산을 전리품으로 몰수하지 않는 등 다소 다르다.

    ④도망자나 도적에 대한 지하드:처벌을 하되, 그 형태에 관해서는 법학자들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 살해나 투옥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체로 추방을 주장한다. 추방의 경우도 이슬람영역 밖으로의 추방과 거주지로부터의 추방 두 가지가 있다. 이들에 대한 처우는 이견자들에 대한 처우와 비슷한 수준이다.

    ⑤피보호민(아흘룰 짓마)에 대한 지하드:피정복지에서 이슬람에 개종하지 않고 인두세를 납부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이나 법을 지켜나가는 피보호민들이 만약 규정된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신교자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성전을 한다.

    ⑥주둔(駐屯, 리바트):이슬람영역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지에 주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성전지하드에 속한다. 이슬람 초기부터 무함마드는 전쟁영역과 접경하고 있는 지대에 방어군을 주둔시킬 것을 장려해왔다. 그는 하루의 주둔이 1000일의 기도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둔의 의의를 강조했다.

    성전지하드는 일종의 전쟁과 폭력행위이기 때문에 아무나 임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만이 참여하게 된다. 그 자격은 다음과 같다.

    ①이슬람교 신자여야 한다. 말리키야파와 샤피이야파 법학자들은 무함마드가 비무슬림의 입대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지하드 참가자, 즉 무자히드의 자격을 신자로 제한한다. 그러나 하나피야파 법학자들은 무함마드가 비무슬림들의 원조를 구한 바가 있다는 예를 근거로 그들도 무자히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②심신이 건강한 성년남자여야 한다. 어린이나 환자는 성전지하드에 참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여성도 육체적 한계성으로 인해 직접 참전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무함마드는 “여성에게는 순례가 곧 지하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상병을 간호한다든가 참전자들을 고무하는 일에는 참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도 일종의 지하드라고 법학자들은 해석한다.

    ③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경제적 자립이란 본인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경제력이 없이 호주가 전장에 나갔을 때 가족은 생계가 끊기게 되며, 따라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주인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노예는 무자히드가 될 수는 없지만 전선을 도울 의무는 있다.

    ④참전 전에 양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적이 급습한다든가 하는 비상시에는 받지 않아도 무방하다.

    ⑤알라와 이슬람을 위해 헌신 분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져야 한다.

    ⑥경전과 이슬람법에 충실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앙을 정화하고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지하드는 신성시되고 그 수행자 무자히드는 전사하면 순교자(샤히드)로 추서되어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 이러한 지하드가 전쟁과 폭력으로만 왜곡되어 이슬람의 ‘호전성’을 대변하는 징표인 양 회자인구(膾炙人口)되어왔다. 한편, 이슬람세계에서는 지하드의 이름 아래 음양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운동과 투쟁, 전쟁이 벌어지고 단체와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오늘도 그 양상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지하드 본연에 충실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지하드란 이름을 걸고 지하드와는 무관한 행위들이 자행되기도 한다. 비문명적인 테러나 무모한 자폭은 어떠한 명분으로서도 지하드를 합리화할 수 없다. 오늘의 가장 큰 폐단은 지하드의 본연을 망각하고 정치를 빙자한 지하드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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