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안기부장도 모르게 날아간 기자회견 강행지시 電文의 실체…

수지킴 살해사건· 張世東 전 안기부장의 심경과 사실 토로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1-10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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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장도 모르게 날아간 기자회견 강행지시 電文의 실체…
    수지킴(김옥분) 살해 사건이 윤태식 로비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되고 있다. ‘주간동아’가 수지킴 피살 사건 용의자는 윤태식(尹泰植)씨일 수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처음 내놓은 것은 2000년 1월이었다. 다음달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좀더 구체적인 정황 증거를 제시하며 수지킴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은 윤태식씨일 수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자 경찰청이 윤태식을 수지킴 살해 용의자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러한 경찰청의 수사를 중단시킨 것은 국가정보원의 핵심 간부들이었다.

    경찰청의 수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은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이 윤태식이 수지킴의 살해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2001년 1월, 벤처기업 대표가 된 윤태식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앞에서 지문인식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대통령 앞에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한번은 신원조회를 거쳐 문제가 없는 사람만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데, 윤태식은 당당히 대통령을 만났다. 경호실은 물론이고 국정원도 대통령 경호에 참여한다. 윤씨가 살인사건 용의자라는 것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만천하에 알려졌는데, 경호실과 국정원은 살인사건 용의자의 대통령 면담을 허가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국가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은 살인자가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방치했다. 벤처사업가 윤태식은 패스21의 주식을 헐값에 뿌리는 방법으로 정계와 관계·언론계를 상대로 로비를 펼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제 윤태식의 한마디에 청와대를 포함한 국가 주요기관의 요인들이 날아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1월14일 연두기자 회견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은 결국 “이러한 사태와 관련해 큰 충격과 더불어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며 사과까지 했다. 한 나라가 이렇게 흔들려도 되는 것일까.

    수지킴 사건과-윤태식 사건이 터지자 많은 연루자들이 구속되었다. 소환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검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억울하기로서니, 수지킴과 수지킴 유가족 이상으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수지킴 사건에 관련된 연루자들은 수지킴 유가족에게 솔직히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수지킴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張世東·66)씨만은 수지킴과 그 유가족에 대해 공개 사과를 했다.

    지난해 12월11일 서울지검 외사부의 소환을 받고 서울지검에 도착한 장씨는 기자들 앞에서 “금번 사안은 본인의 재임 기간 발생한 사건으로 그 근원과 처리 과정이 어떠했던지 저의 불찰이며, 얼마 후 부장직을 떠남으로써 공정한 마무리를 짓지 못한 데 대해 조직의 최고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 무엇보다도 피해자 유가족이 겪은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사죄 드리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무도 마음 아프고 무슨 말씀으로도 위로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아픔이 그 무엇으로도 회복이 되시겠습니까? 하루 속한 날에 슬픔이 치유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라며 미리 작성해온 사과문을 발표했다.



    장씨의 사과 성명은 제 허물을 감추는 것에 급급한 연루자들만 보아온 기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고석홍(高錫洪) 검사의 조사를 받은 장씨는 몇몇 어이없는 사안에 대해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지킴 유가족에게는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고 한 장씨가 정작 검사 앞에서 입을 닫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지킴 유가족에게는 사과할 수 있어도, 안기부가 관여한 조작과 은폐 부분만큼은 말할 수 없다는 장씨 특유의 ‘정의감’ 때문인가. 아니면 죄를 혼자 뒤집어쓰면서라도 보호해야 할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가. 기자는 ‘신선함’과 ‘혼돈’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다.

    윤태식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검찰에 윤씨를 송치하지 않은 당시의 안기부장 장씨에게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은 형법 제122조의 직무유기죄다(형법 제122조[직무유기] ;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 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그러나 형법은 이 죄를 물을 수 있는 시효를 3년으로 한정하고 있다. 장씨는 15년 전에 이 사건을 은폐했으므로 검찰은 장씨를 기소할 방법이 없다. 장씨는 이 사실을 알고 검찰 소환에 응했고, 또 수지킴 유가족에게 사과했을 것이다.

    -1987년 1월9일 윤태식의 진술을 확보하고도 안기부는 윤태식을 검찰에 송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월26일 홍콩에서 수지킴의 시신이 발견되자, 국내 언론은 윤태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때야말로 윤태식을 검찰에 송치할 수 있는 적기가 아니었습니까.

    “윤태식을 잘못 데려온 데다 기자회견까지 가졌으니 소극적으로 처리하다가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윤태식은 언제든지 검찰에 송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기자가 기사를 쓸 때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유추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당시 대공수사국은 해외공작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엉뚱한 놈을 잘못 데려와 놓고 그 책임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하느냐’하는 불만이었습니다. 해외공작국은 실수를 한 것을 알면서도 윤태식을 대공수사국으로 넘겼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책임 전가가 은폐를 낳았습니다. 조직 부서간의 갈등을 조종하는 것은 부장이 할 일이 아닌가요?

    “그렇겠지요.”

    -일을 저지른 것은 해외공작국인데 해외공작국에서는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대공수사국에서는 2000년 2월 당시 국장인 김승일씨가 경찰의 윤태식 수사를 중단시킨 혐의로 지난해 12월10일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일을 벌인 조직과 장본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뒤처리를 맡은 조직만 당한 것입니다. 1987년 당시 부장으로서 해외공작국이 잘못 판단했으면 감찰을 해서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나고 나니까 정보가치가 없는 살인자임이 밝혀진 것을, 감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윤태식에게 속아서 우리 조직이 망신을 당한 일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검찰에 가보니 뜻밖의 전문이 있어 저도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때 그런 전문이 간 것을 알았으면 조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아니 감찰에 넘길 것도 없이 차장한테 바로 조치하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윤태식을 검찰에 송치 못한 데 대해서는 유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장부장이 마음이 약했던 것 아닙니까. 정모 국장은 당시 실력자와도 가깝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의식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장부장의 리더십 부재가 문제를 꼬이게 한 것은 아닙니까. 조직의 책임자는 읍참마속(泣斬馬謖)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저는 부하에게 교육은 시키되 읍참마속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아랫사람이 올린 보고가 터무니없다고 판단되면 전혀 답을 하지 않습니다. 안된다고 말하면 왜 안되는지를 중언부언 설명해야 합니다. 저도 똑같이 24시간을 쓰는 사람인데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 주의를 줍니다. 잘못을 스스로 알고 고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약이나 수술로 병을 고치면 후유증이 있고 흠이 남으므로, 자연치유력으로 고쳐야 합니다.”’

    -감찰 조치도 못하면 국장 교체라도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국장을 교체함으로써 책임을 묻는 것도 과한 조치입니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는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한다고 해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못한 것은 처벌하기 보다는 잘못한 본인이 느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윤태식이 살인범이라는 것을 보고한 적은 없습니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할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수지킴 사건을 조작 은폐함으로써 김현희의 KAL 858기 폭파사건,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등 과거 안기부가 조사한 사건들이 전부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일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과 수지킴 사건은 다릅니다. 그리고 수지킴 사건도 조작 은폐된 것이 아니고, 과욕과 방치로 인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불교신자이시죠.

    “아닙니다. 기독교인입니다.”

    -불교의 업(業)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부장께서는 세 번이나 투옥됐는데 이번에 수지킴 사건으로 인해 또 한번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게 무슨 업입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지 않았나요.

    “남의 짐을 내가 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세 번 투옥되는 과정에서 국민들한테 의리의 사나이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이번에도 책임을 지겠다고 하신 것은 아닌가요.

    “살아가면서 생사와 실수는 언제든지 동반되는 것입니다. 본인의 실수는 물론 동료 부하 직원의 실수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모두의 실수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어느 것에 해당되든지, 비록 본인의 실수가 아닌 사안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은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 하지 않는 것이 제 성격입니다. 이렇게 사는 제가 못나서겠지요.”

    -네 번째로 감옥에 가게 된다면 가시겠습니까.

    “그건 저에게 좀 결례가 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잠은 잘 주무십니까.

    “잘 잡니다.”

    -장부장을 ‘의리의 사나이’라고 합니다. 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그처럼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까.

    “제가 듣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얘기를 하는군요. 의리의 사나이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충성이라고 거창한 표현하기 보다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을 위한 미력한 정성일 뿐입니다. 오히려 능력이 부족해 심려와 누만 끼쳐 늘 죄송스러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주관적인 고집을 객관적인 사실로 수정해주는 것이 정보를 다루는 국정원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국정원은 갖가지 게이트로 만신창이가 됐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에서는 국정원을 미국의 CIA와 FBI처럼 해외와 국내 정보기관으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걱정 마세요. 국정원은 언제든지 정상화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혜와 슬기를 배워왔습니다. 다리가 없으면 목발로 일어서고, 목발이 없으면 앉은뱅이로라도 제 일을 하려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국정원은 붕괴되지 않습니다. 일부 문제가 되는 사람이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할 것입니다. 국정원은 언제든지 재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국정원 사태 때문에 전혀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를 극복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정원을 둘로 쪼개는 것은 과연 우리 실정에 맞는지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을 달릴 수 있는 대평원에는 카우보이 복장이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카우보이 복장은 극장 프로를 소개하는 샌드위치맨에게나 어울릴 뿐입니다. 따라서 외국의 제도나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나라의 문화나 실정에 맞아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저리 공격을 했지만 장부장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수지킴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했지만 그가 살아온 삶은 온전히 지켜내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기자는 장부장이 단 한번이라도 고뇌에 찬 표정을 짓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뷰 후반부로 와서는 말이 빨라졌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은데 그의 자제심이 막기 때문에 빨라진 것으로 느껴졌다. 3시간 내내 약간의 손동작만 바꾸었을 뿐 시종여일하게 처음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1초의 여유도 없이 즉문즉답으로 이어진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틈엔가 그는 기자를 배웅하기 위해 미리 현관 밖에 나가 있었다. 가볍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는데, 언제 3 시간을 이야기했느냐는 듯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자는, 어떤 이념이냐 어떤 입장이냐 어떤 처지냐에 관계없이, 앞으로는 장부장처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로 돌아왔다.

    장씨가 수지킴 유가족에게 사과한 것은 진심일까.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피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서는 면피용으로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검사 앞에서는 침묵하는 고차원의 생존전술을 구사한 것은 아닐까. 기자는 장씨의 본심을 알고 싶어 검찰 조사가 끝난 후부터 줄기차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측근이 전해온 답변은 언제나 “뜻은 고맙지만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였다. 그렇게 2001년이 지나갔다.

    새해 벽두인 지난 1월2일 수지킴의 유가족이 충북 충주시 직동에 있는 창룡사(蒼龍寺)에서 억울하게 숨진 수지킴의 영혼이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저승으로 건너가기를 바라는 천도재(薦度齋)를 올렸다.

    천도재가 끝난 다음인 1월6일 수지킴 유가족들은 “공소시효 때문에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금주부터 서울 시내에서 이들의 처벌을 위한 서명을 받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지킴의 동생인 김옥임씨는 “인권·시민단체와 언니의 천도재를 도와준 불교계의 협조를 얻어, 언니 피살 사건을 은폐하고 가족에게 고통을 준 국가와 장세동씨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기 위해 변호사와 상의하겠다”고 밝혔다. 분노한 수지킴 유가족이 장씨를 수지킴 살해사건을 은폐한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이 무렵 기자는 신뢰할 수 있는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윤태식을 반공투사로 만든 것은 장세동 부장이 아니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1987년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온 윤태식의 진술을 진실로 믿고 1월8일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강행한 것은 장세동 부장이 아니라 장씨의 부하로서 해외공작 업무를 맡고 있던 정모(65)씨라는 증언을 당시 안기부에 근무했던 간부들과 1987년 1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로부터 확보한 것이다. 정모씨는 한때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정형근 의원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기자는 장세동씨와 정모씨와의 관계도 추적해 보았다. 장세동씨는 정모씨를 보호해 줘야 할 이유가 있어, 사과 성명을 발표해 혼자 책임을 뒤집어쓰는 모습을 보였고, 검사 앞에서는 침묵하는 이중플레이를 한 것은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아니었다.

    장씨는 정씨를 보호할 이유가 없었다. 검찰에 출두하기 전 장부장은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무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나라도 책임을 지고 유가족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며 수지킴 유가족에 대한 사과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자는 또 한번 장세동씨에 대해 강한 흥미를 느껴 다시 한번 강하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장씨를 인터뷰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씨와의 통화가 이뤄져야 한다. 기자는 10여 번 이상 전화를 걸었지만 장씨와 직접 통화하는 데 실패했다. ‘인명사전’에는 장씨의 집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팩스번호도 나와 있었다. 기자는 팩스번호에 주목했다. 1월10일 장씨와의 통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자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팩스를 보냈다. 이 팩스 편지가 장씨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1월12일 만난 장씨의 측근은 ‘보낸 편지는 잘 받았다. 그러나 인터뷰는 사양한다’는 장씨의 짤막한 메모를 보여주었다. 장씨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느낀 기자는 장시간 동안 측근을 붙들고 장씨가 인터뷰에 응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사건은 장부장 혼자 끙끙 대다 끝낼 일이 아니다. 장부장이 수지킴 유가족에게 사과했으면 국민들에게도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밝혀주어야 한다. 검찰에서 조사받는 것과 언론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별건이다. 장부장은 수지킴 사건에 관여한 당사자로서 명확한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 장부장은 책임을 지겠다, 유가족에게 사과하겠다고 한 유일한 장본인이다. 책임지는 공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장부장은 인터뷰에 응해주어야 한다…”(이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장부장으로 표기한다)

    기자는 ‘장부장 같은 원칙주의자는 명분을 중시하기 때문에 명분에 약할 것이다’고 판단하고 집요하게 명분론을 거론했다. 장부장의 측근을 설득하지 못하면 장부장도 설득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장부장의 측근을 기자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이 성공했다. 측근이 장부장에게 기자의 뜻을 제대로 전한 모양이었다. 그날 밤 측근은 “내일(1월13일) 장부장 집으로 오라. 수지킴 부분에만 한정해서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입이 무겁기로도 유명한 장부장은 월간지와 세 차례 인터뷰했다. 5공비리 청문회와 광주사태 청문회로 온나라가 시끄럽던 1988년 말 신동아·월간조선과 동시 인터뷰를 가졌다(1988년 11월호). 그리고 서울지검이 12·12사건에 대해 수사에 착수한 1994년 신동아와 인터뷰했다(1994년 7월호). 자신과 관련된 일로 사회가 시끄러울 때만 장부장은 인터뷰에 응해왔다. 수지킴 사건으로 장부장은 8년만에 인터뷰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위기 순간에 정면승부를 택하는 것은 장부장의 기질인 듯하다.

    과거 TV 화면을 통해 장부장을 봤을 때 ‘참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통스럽다’ ‘화가 난다’ ‘참을 수 없다’ 등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뚝뚝하고 어두운 표정도 아니다. 5공이 끝난 후 3번이나 옥살이를 했으니 억울함과 두려움이 얼굴에 드러날 만도 한데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다는 느낌을 받았다.

    1월13일 그의 자택에 들어서자 장부장이 현관에서 맞았다. TV에서 본 것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3번 옥살이를 한데다 수지킴 사건으로 또 얻어맞았으니 고통과 후회의 빛이 감도는 ‘보통 얼굴’ ‘보통 표정’ 보기를 기대했는데, 장부장은 예의 그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응접실 소파에 앉을 때 장부장은 양 무릎을 모으고 단전쯤에서 양손을 모아 잡는 겸손하면서도 빈틈없는 자세로 앉았다. 이런 자세는 상급자와 마주앉았을 때 의도적으로 취하는 자세다. 그러나 이곳은 그의 집이고 상대는 그보다 훨씬 젊은 기자다. 장부장은 이런 자세가 몸에 밴 듯했다. 자기 집에서도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을 하며 한국 경제를 이끈 김정렴(金正濂)씨가 그랬다. 이런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여간 만만치 않다. 기자는 ‘수지킴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과정에서도 장부장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내공(內功)이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그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려 보자’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무척 밝으십니다. 많은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저는 제 등뒤에서 총을 겨누거나 칼을 들이대는 사람도 일단 믿어주고 대합니다. 자신을 믿고 있으면 편안할 수 있습니다. 총칼을 겨눈 외면만 보고 판단하면 사람이 옹졸해집니다.

    일해재단 사건으로 투옥돼 있을 때 교도소에서 ‘꼬마성경해설’이란 책을 읽었는데, ‘가장 큰 복수는 용서다’라는 글이 새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가장 큰 복수는 용서다, 내가 복수를 하겠다며 앙앙불락 하면 내 마음만 불편해진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 내 마음으로부터 복수심은 떠난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석방되던 날 기자들이 자꾸 소감을 묻기에 피하고 피하다가 ‘가장 큰 복수는 용서다’라는 글귀를 인용하며 ‘성경을 읽고 지냈다’고 대답했었습니다.

    여유를 가지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기자도 중견이니까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갖는 여유를 갖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서 피해가는 그런 기자가 되지 말고, 같은 내용의 글이라도 부드럽게 써서 사람들이 다가오고 싶어하는 그런 기자가 되십시오. 눈총을 받는 기자가 되면 안됩니다. 등뒤에서 겨눈 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 눈총입니다.”

    -장부장은 12·12 주체세력입니다. 신군부가 뛰쳐나왔을 때는 나름대로 사회를 바꿔보겠다, 불안정한 사회를 안정시켜보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장부장은 지금도 그런 패기를 가진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을 때 서울시내의 포장마차가 문제가 됐어요(당시 장부장은 안기부장을 맡고 있었다). 많은 외국인이 서울에 올 텐데 길거리에 즐비한 포장마차가 서울의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지요. 그래서 포장마차 철거론이 대세를 이뤘습니다. 저는 포장마차 한 대에 한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다는 생각에 ‘서울 시내 전체를 세종로처럼 만든다고 해서 한국이 1등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포장마차를 한국적인 것으로 보고 찾는 외국인도 있을 것이다. 대로변에 있는 포장마차가 보기 흉하다면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기간만 큰길 안쪽의 골목으로 들어가게 하자’는 의견을 강력히 제시했습니다.

    제 의견이 관철되었죠. 그러자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들이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에 열심히 벌어서 아시안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일이 아주 잘된 것이지요. 국가라는 것은 똑똑한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힘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살아가는 곳이 국가입니다. 힘없는 사람들도 국민입니다. 힘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열린 사회를 만들 때 좋은 국가가 만들어집니다. 있는 사람들이 분별심이 있어야 합니다.”

    -장부장은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어쨌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중언부언하게 되고, 제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자기 자랑만 하게 돼 결국은 추접스러워지고 맙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기본 생각입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인 것, 상상력을 동원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주제라면 밤새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일은 전부 나쁜 일이고, 과거 일을 주도한 사람은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모는 것은 폭력입니다. (인터뷰를 통해) 자꾸 과거 일을 말하다 보면, 그것을 읽고 억측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억측이 오해를 일으켜 피해보는 사람도 생길 수 있고요. 천 석꾼은 천가지 걱정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시름이 있다고 했는데, 왜 과거일을 거론해 걱정을 늘립니까.

    과거 일로 화를 내게 되면, 먼저 자기가 괴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괴로운 일을 왜 합니까. 화를 낸다고 해서 분노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입을 닫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수지킴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예상외로 확대되는 것을 보고 무척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입니다. 수지킴-윤태식 사건으로 인해 청와대까지 흔들릴 정도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이렇게 온 나라가 뒤흔들려도 되는 것입니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고, 문제에 봉착하면 풀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있는 것이 국가조직입니다. 이번 일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국가의 교훈이 되는 것이니까요.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이를 풀어보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슬기를 얻고, 그 일에 대한 조명을 달리해보면서 새로운 상식도 얻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갖고 나라가 흔들릴 지경이 되었다며 자괴적(自愧的)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양식으로 여겨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행동과 생각을 한 박자 늦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에 봉착하면 대개 말이 빨라지고 생각도 들뜨게 되는데 실수는 그럴 때 나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만, 현직에 있을 때는 하루 4∼5갑씩 피웠습니다. 위기를 맞았을 때 특히 줄담배를 피웠는데, 이유는 자제력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일수록 성급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고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이 일은 누구에게 시키고, 이것은 누구에게 협조를 구하고, 이 일은 어떻게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짰습니다. 일을 시작하는 초기의 시동은 어느 정도로 걸고, 2차 지시를 하기 위한 예보는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생각하고 난 다음에 인터폰을 눌러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성급함을 억제하기 위해 피운 줄담배는 경호실장으로 가면서 끊었습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진실(眞實)과 정도(正道)로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얕은꾀는 결국은 빠지는 길이 됩니다. 지름길을 택한 것이 운 좋게 성공을 거둘 수도 있지만 돈좌(頓挫: 중도에서 갑자기 꺾어지거나 틀어짐)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검찰에서 수지킴 유가족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는데.

    “수지킴의 유가족들은 순박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러저러한 일을 돌아보지 않고 꾀도 부리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 온 힘없고 순전(純全)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돼 제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저로서도 까맣게 잊고 있던 사건인지라….”

    -그런데 수지킴 유가족에게 서명운동을 하게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장부장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라며 권유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그렇겠지요. 옆에서 부추기면 견딜 장사가 없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사람들이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죠.”

    -제 개인적인 소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95년 수지킴의 오빠를 처음 만나 취재하고 헤어질 때 저는 이런 당부를 했습니다. “제가 보도를 하면 다른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 언론에서 동생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취재하더라도 오빠께서는 절대로 감정에 휩싸이면 안됩니다. 동생일은 동생일이고, 오빠일은 오빠일입니다. 동생일이란 동생을 죽인 사람을 잡아넣고, 간첩으로 몰렸던 동생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오빠일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이끌고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동생일의 억울함을 오빠 생활의 억울함으로 전가시켜 가족을 돌보는 일을 등한시하면, 또 다른 불행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보도를 하더라도, 그로 인해 윤태식이 벌을 받게 되더라도 죽은 동생은 살아올 수 없습니다. 절대로 흥분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취재 후 저는 주위의 이해 부족으로 보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 1월20일자 ‘주간동아’를 통해 1995년에 취재한 것을 처음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때도 주간동아 보도가 나가기 전에 수지킴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가 나오더라도 덤덤히 생업에 종사하셔야 합니다. 흥분하면 안됩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SBS에서 취재 협조를 요청해왔을 때도 똑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수지킴의 오빠가 흥분할까봐 저는 SBS PD에게 특별히 “오빠의 얼굴과 이름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까지 부탁했습니다.

    2000년 3월 수지킴의 오빠는 검찰에 동생 사건을 수사해 달라는 고소장을 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고소장을 낸 후부터 수지킴의 오빠는 크게 마음이 흔들렸는지 술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했는데, 2000년 7월 오빠가 술에 취해 가게 마당에서 자다 후진하는 트럭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앞이 깜깜하더군요.

    수지킴 살해 사건과 관련해 가장 억울한 사람은 수지킴 자신이고, 다음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수지킴이 죽은 후 가슴앓이를 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199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빠마저 수지킴 일로 마음의 안정을 잃고 방황하다 숨졌으니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수지킴의 언니도 가정적인 불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지킴 가족에 몰아닥친 불행이 저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동생일을 잊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상처를 건들여 덧나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저는 수지킴 유가족이 또 다시 감정에 휩싸일까 염려됩니다. 유가족의 아픔을 달래준다는 명목으로 하는 일들이 유가족들을 또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벌을 주는 것으로 수지킴 사건은 끝냈으면 합니다.

    “이기자도 책임을 느끼는군요. 그래도 이기자는 글을 쓰는 기자이기 때문에 여러 번 생각을 고쳐볼 여유가 있었군요. 이기자에게도 수지킴 가족이 분수를 넘지 않도록 권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자가 팩스에서 그런 마음을 적은 것을 보고 만나봐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지킴 천도재를 올린 절을 찾아가 수지킴의 영혼을 위로할 의향은 없습니까.

    “제 나름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수지킴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수지킴-윤태식 사건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1987년 1월3일 새벽 0시쯤 윤태식이 수지킴을 죽인 살해사건 부분이고, 둘째는 1987년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온 윤태식을 반공투사로 만들어 기자회견까지 갖게 하는 조작 부분입니다. 당시 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안기부 직원들까지도 윤태식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는데, 안기부는 윤태식의 말을 믿고 그를 반공투사로 만들었으니 이는 조작에 해당합니다. 셋째는 서울로 데리고 온 윤태식으로부터 수지킴을 죽였다는 자백을 받고도 2001년 11월13일 서울지검 외사부가 윤태식을 살인 혐의로 기소할 때까지 검찰에 송치하지 않은 은폐 부분입니다. 넷째는 벤처 사업가로 변신한 윤태식이 에인절(angel: 벤처사업 투자가)들의 투자금을 갖고 정계·관계·언론계 인사를 상대로 로비한 윤태식 게이트 부분입니다.

    윤태식이 수지킴을 죽인 살해 부분은 전적으로 윤태식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윤태식이 패스21의 자금과 주식을 정·관·언 인사에게 뿌리거나 싸게 제공한 것은 윤태식과 윤태식의 로비에 말려든 사람들이 책임질 부분입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윤태식을 반공투사로 만든 조작부분과 윤태식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도 검찰에 송치하지 않은 은폐 부분은 장부장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수지킴-윤태식 사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군요. 잘 정리하셨습니다. 그러한 분석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저도 이 사건이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검찰이 확보한 자료를 보고 새롭게 안 사실도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보태서 종합적으로 제가 아는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분석한 것이 이기자나 다른 언론이 보도한 것과 다를 수 있지만, 이 분석은 저의 진실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관련된 부분은 이기자가 지적한 대로 조작과 은폐 부분입니다. 조작과 은폐라는 말에는 악의적이고 고의적이며, 정도(正道)가 아니고 계략적(計略的)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소박한 진실은 저는 조작과 은폐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추적해온 이기자나 검찰이 제 말을 얼마나 믿어줄지 모르겠습니다. 또 제가 드리는 말씀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듣고 판단해 보십시오.

    제가 이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데에는 사건의 조작·은폐와 실제 사실에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 어느 누구나 실수는 하게 마련입니다. 개인을 떠나서, 열심히 살고 있는 국민에게 국가 공기관이나 국가체제가 ‘조작’ ‘은폐’ 같은 수치스런 이미지로 인식되거나 우리 스스로를 오욕의 함정에 밀어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조작부분입니다. 검찰은 안기부가 부장인 저의 지시를 받아 단순살인범인 윤태식을 반공투사로 만들었다며 이를 조작사건으로 분류했습니다. 윤태식이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온 것은 1987년 1월5일입니다. 윤태식이 북한대사관에서 납치될 뻔했다고 주장했으므로 당연히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있던 안기부의 IO(Intelligence Officer·정보 수집관)들이 윤씨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윤씨의 진술을 적은 보고서를 본부로 보냈습니다. 이때 윤태식은 부인을 죽였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기부는 윤태식을 평범한 홍콩 교민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평범한 홍콩 교민이 북한으로 납치될 뻔했으나 안전하게 탈출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북한에게 납치됐다면 달라졌겠지만, 어쨌든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해 왔으니 안기부로서는 크게 취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최은희-신상옥 정도로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정보를 가진 사람도 아니니, 부장으로서는 더 이상 주목하거나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굳이 윤태식 납북미수사건의 가치를 찾는다면 앞으로 홍콩에 갈 사람들에게 북한에 납치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교육하는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정도겠지요.

    윤태식이 북한으로 납치될 뻔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안기부는 이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부국장(기자 주: 장승옥 해외담당 부국장)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부국장은 경험도 많고 싱가포르에 근무한 경력도 있으니 현지의 IO를 지원하면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싱가포르 정보기관으로부터 협조를 구할 수도 있다고 판단돼 1월7일 그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국장과 현지의 IO들은 종합적인 판단을 해 ‘윤태식의 행동이 석연치 않다. 그러니 현지에서의 기자회견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검찰이 이 전문을 확보하고 있는데, 전문은 1월7일 저녁 7∼8시쯤 도착한 것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윤태식이 기자회견을 한 것이 조작의 핵심으로 꼽히는데, 사실 기자회견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간첩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기자회견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곤 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해서 득을 본 것도 있겠지만 손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윤태식은 북한 사람도 아니니 반드시 기자회견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9시쯤 윤태식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부국장의 의견을 본부에서 승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확보한 전문에 찍혀 있는 시간을 보니 대략 1월8일 새벽 0시50분쯤부터 여러 장의 전문이 안기부 본부에서 싱가포르 대사관으로 보내졌습니다. 전문의 발신자는 모두 국가안전기획부장이고 수신은 싱가포르 현지의 IO로 돼 있었습니다. 이기자도 잘 아시겠지만 공공기관에서 보내는 공문은 전부 기관장 이름으로 갑니다. 기관장이 알든 모르든 그렇게 합니다. 과장이나 국장이 보내는 것도 발신자는 전부 기관장으로 돼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신·발신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공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공문에는 ‘부장의 지시니 현지에서 윤태식 기자회견을 가져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국가정책 판단’을 강조하며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열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부국장과 IO들도 공문의 발신자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돼 있어도 실제로는 그 부처의 과장이나 국장이 보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공문에 ‘부장의 지시다’ ‘국가정책 판단이다’란 문구가 있으면 정말로 부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고 그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저는 이 공문을 처음 보았습니다. 공문을 보는 순간 치욕과 모멸감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1월7일 저녁 9시 이후에 기자회견을 보류한다는 전문을 보냈고, 이를 뒤집을 만한 합당한 사유나 상황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음날 새벽에 그것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의 전문을 여러 장 싱가포르로 보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수지킴 살해 사건을 은폐-보다 정확히 말하면 방치입니다만-한 데 대한 책임은 제게 있다고 생각하고 ‘유가족에게 사죄하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힌 후 검찰 조사에 응했는데, 검찰은 그 전문이 부장 지시로 보내졌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똥개는 도둑이 들어오면 겁이 나서 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왕왕 짖습니다. 그러나 셰퍼드는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에 짖지 않고 제 힘으로 도둑에게 덤벼듭니다. 발신자만 국가안전기획부장이라고 하면 될텐데 왜 공문 내용에 ‘부장의 지시다. 국가정책 판단이다’란 문구를 넣습니까? 그런 전문을 보니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 직원들이 윤태식에게 속아서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알고 검사실에 갔는데, 검사는 안기부장이 기자회견을 하라고 지시한 전문을 내놓으니…, 누워서 침 뱉기를 할 수도 없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검찰 발표문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간 부국장은 해외공작국의 장승옥 부국장이었습니다. 부국장을 현지로 파견하고 부국장이 보내온 전문을 결재한 근거는 있습니까.

    “안기부장은 무척 바쁜 자리입니다. 전문 결재는 부장의 결재 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서류를 읽고 결재한다면 하루가 48시간이라고 해도 모자랍니다. 중요하지 않은 대부분의 일은 구두나 전화로 요약 보고를 받는 것으로 끝냅니다. 해당 국과 과에서 결정하고 부장에게는 구두나 전화 정도로 알리는 것이 있고, 부장의 결심을 받아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윤태식은, 당시로서는 정보가치도 없고 또 우리가 신병을 확보한 상태니 부장의 결심까지 받아야 할 중요 사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주체가 되었든 살인자를 반공투사로 만들었으니 조작은 조작이지요.

    “윤태식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공투사로 꾸밀 수는 없습니다.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라 공명심과 과욕에 의한 판단처리 미흡이 가져온 실수라고 봅니다. 조작을 했다면 무엇 때문에 조사까지 시켜 살인자백을 받았겠습니까? 남이 뭐라고 하든 제가 보는 소박한 진실은 과욕과 공명심에 의한 판단처리 미흡에서 나온 실수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장부장이 설명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부장이 지시하지 않았는데 그런 전문이 내려갔으니 그것 자체가 조작입니다.

    “조작은 악의적이고 계략적인 뉘앙스를 깔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을 꾸밈으로써 꾸민 사람이 더 큰 이익을 얻게 될 때 조작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쯤에서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갖게된 과정을 검증해 보기로 하자. 장씨가 말한 대로 1987년 1월8일 새벽 0시50분쯤 ‘부장의 지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문 여섯 통이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날아들었다. 그로 인해 이 전문의 지시를 따르려고 하는 안기부 직원들과 이를 반대하는 외무부 직원들간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반대 의견의 총대를 멘 이는 이장춘(李長春) 대사였다. 이대사는 ‘안기부장이 소속이 다른 외무부 직원(이대사를 비롯한 외무부 직원)에게 지시를 내려도 되는가. 유권해석을 해달라’라는 내용의 전문을 만들어 서울에 있는 총무처로 보냈다.

    이대사가 강하게 반발하자 장승옥 부국장을 비롯한 안기부 직원들은 싱가포르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갖지 못하고 윤태식을 방콕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주로 홍콩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을 방콕으로 불러들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렇게 윤태식 기자회견을 강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건 관련자들은 당시의 해외공작국장 정모씨를 지목한다. 그러나 정모씨는 서울지검 조사에서 윤태식의 기자 회견을 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7년 1월5일 윤태식이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온지 9일 후인 1월14일 서울에서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이 고문을 받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월8일 함경남도 청진에서는 김만철(金滿鐵)씨가 일가족을 배에 태워 탈출했다. 1월20일 이 배가 일본 근해에서 일본 해상보안청의 순시선에 발견되었다. 최초의 일가족 탈북인 데다 배를 이용했고 일본 근해에서 발견되었으니 국제적인 사건이 돼,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김만철씨 일가를 한국에 데려오는 일도 안기부 해외공작국이 담당했다. 한·일간의 물밑 교섭이 있은 후 2월8일 김만철씨 일가족은 한국에 도착했다.

    이렇게 김만철씨 일가족의 귀순 과정이 길어졌기 때문에 언론은 그에 관한 보도를 많이 내놓았다. 김만철씨 일가 귀순에 대한 보도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를 눌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언론은 김만철씨 일가 귀순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를 눌렀다며 ‘이철제철(以鐵制哲)’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냈다.

    서울지검 외사부는 정모 국장에 대해서도 조사를 했다. 그러나 정모 국장은 “당시 김만철씨 일가 귀순 사건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윤태식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일관했다고 한다. 장부장과 달리 그는 수지킴 유가족에 대해 사과한 바도 없고 책임을 느낀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장부장과의 문답으로 돌아간다.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한 다음날(1월9일) 윤태식은 서울에 도착해 김포공항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하고 안기부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수지킴을 살해했다고 자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태식에게는 대공(對共)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서울에 온 다음부터는 대공수사국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해외부분에서 일하는 요원들은 사람을 조사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속을 수 있어도 대공수사관들은 사람을 많이 다뤄 봤기 때문에 잘 속지 않습니다. 조사에 착수한 지 한 시간도 안돼서 대공수사관들은 윤태식에게서 수지킴을 살해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답니다.

    이런 자백을 받아내는 순간 윤태식의 정보 가치는 제로가 됩니다. 안기부로서는 더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쓰레기를 언제 검찰로 송치할 것인가만 남게 됩니다. 윤태식 부분이 정리됐으니 남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윤태식은 검찰에 송치하면 되지만 북한이 이를 빌미로 역선전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북한에게 역선전 빌미를 주지 않도록 적당한 시기를 택해서 검찰에 송치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윤태식이 방콕과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한 직후라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습니다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잘 처리(검찰로 조용히 송치)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김만철씨 일가 귀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적 정권교체 과정에서 예상되는 크고 작은 일들, 4·13 호헌조치 등 산적한 현안들을 처리하던 도중 5월26일 내각 총사퇴가 결정됨에 따라 안기부장 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장으로서 윤태식의 살해 자백을 받는 순간 즉각 검찰에 송치하지 못한 것과 이임하기 전에 직원들을 채근해서 이 사건의 마무리를 짓게 못한 것이 잘못이며 아쉽습니다.

    제가 안기부를 떠난 후에라도 언제든지 윤태식을 송치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의 정치상황이 너무 복잡해 그렇게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저도 떠났고 윤태식 기자회견을 한 것 외에는 망신당할 것도 없는데, 왜 적극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는지 안타깝습니다. 그후 정권이 3번이나 바뀌었으니 얼마든지 윤태식을 송치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검찰에 가보니 당시의 서류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은폐와 조작을 하려면 왜 서류를 남겨 놓습니까. 은폐가 되려면 제가 퇴임하면서 송치하지 말라는 지시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부분은 은폐가 아니라 ‘수사종결 없는 방치’로 봅니다. 모든 서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영구적으로 감추어 질 수 없는 사안이며, 감추어서 얻게 되는 것도 없어서, 은폐가 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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