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최종길 사건 중간보고서

“中情은 고문으로 간첩 만들고 타살후 증거를 조작했다”

  • 김형태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 dordaree@hanmail.net

    입력2004-11-16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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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길 교수 사건은 1973년에 일어났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그 진상에 접근하기까지 이 사건에 관해 사회적으로 합치된 결론은 없었다. 1973년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공식발표와 1988년 검찰의 공식발표도 ‘최종결론’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수사발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입장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자살에 의한 단순사망 사건부터 고문치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차이가 존재해왔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의혹에 대해 그간 우리 사회가 성실하고 책임있는 답변을 못한 탓이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의혹을 그대로 방치한 결과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성질의 기억을 지니고 살아왔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에서 조직의 보호를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내던지는 간첩의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떠올린다. 또 어떤 이들은 중정의 살인적인 고문에 몸서리를 친다.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냉혹한 간첩들과 맞서 싸우는 중정의 대폭적인 권한강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수사상 필요를 앞세워 고문을 자행하는 행위는 반인간적 범죄이므로 고문을 근절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교수의 사망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공인된 답변을 찾지 못한다면, 사회적 갈등과 불신은 필연적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필자가 상임위원으로 재직해온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0년 10월15일 발족했다. 위원회는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간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함으로써 갈등과 불신을 최소화하고 진정한 국민화합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현재 위원회에서 조사하고 있는 의문사 사건들은 대부분 군사정권 시절에 발생했다. 따라서 상당한 시일이 지나 증거가 남아 있지 않거나, 인력과 권한의 부족, 기간의 제약 그리고 일부 조사대상 기관의 비협조 등으로 진상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건의 경?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어낸 것 또한 사실이며, 이 지면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최종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중간보고서를 쓰는 이유


    그간 신문 방송 잡지에서는 고문, 간첩 자백 여부, 타살의 정황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꽤 다양한 시각으로 최종길 사건을 다뤄왔다. 하지만 매체의 기본적인 속성과 이 사건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깊이 있는 분석에 이르지 못한 보도가 상당수였다. 그 중에는 이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 사실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사건의 진상과 무관한 방향으로 비약하는 보도도 있었다.

    필자가 이 글을 기고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국민들이 이 사건의 진상과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언론보도보다 좀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조사관’의 관점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자임하고자 한다.

    사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필자는 꽤 고심했다.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고, 향후 조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 우선 걸렸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사건을 방치하다가는 국민들이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잘못된 기억’을 지니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시점에 ‘월간조선’ 1월호에 실린 ‘정보부 조사요원 반격 /崔鍾吉 교수를 떼민 사람은 없다’라는 기사가 필자로 하여금 투고를 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월간조선’ 기사에서 전직 중정요원 P씨는 이미 작성 시간대나 장소 그리고 참여자 등 모든 내용이 허위로 드러난 현장검증조서에 기초해서, ‘반격’을 운운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위원회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최종길 교수 사건의 예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필자는 독자들이 이 과정을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한다면 최소한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더불어 P요원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인가도 알게 될 것이다.

    조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밝혀야 할 진상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핵심정보(information requirement)’라고 하자. 즉, 핵심정보를 파악하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셈이다. 최교수 사건의 경우 핵심정보는 ①간첩 여부 확증 ②고문 여부 확증 ③중정의 최교수 조사동기 ④은폐와 조작 여부 ⑤자·타살 여부 등이다. 핵심정보는 수많은 자료와 증언 등을 분석·가공·처리하여 얻어진 정보활동의 집결점이다.

    핵심정보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자료’나 ‘증언’ 등이 필요하다.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최교수 사건의 경우 검찰과 국정원이 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만으로 핵심정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필자와 조사관들은 기왕에 입수한 자료와 탐문조사를 바탕으로 해서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토대로 한 증언을 발굴·확보하는 것이 유일한 활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한 사건의 핵심정보를 확인해줄 수 있는 이들을 ‘정보타깃(information target)’이라고 부른다면 ‘정보타깃’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어렵게 노력해서 일단 ‘정보타깃’을 설정해도 이 타깃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진상을 규명할 수 없다(바로 이 지점에서 위원회의 조사활동은 교착상태에 빠진 경우가 많다. 조사주체의 전력은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가 칼이냐 화살이냐 혹은 M16이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비유하자면 애써서 타깃이 보이는 위치를 확보했지만, 위원회가 지닌 무기의 사거리가 짧은 데다가 적중률은 낮고 화력마저 부족해 도무지 과녁을 맞출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정보타깃’의 설정 역시 수많은 조사활동의 결과물이다. 누가 핵심정보를 갖고 있는가, 그는 증언을 해줄 수 있는가, 만일 증언을 유도할 장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유도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등을 알아내는 조사활동이 ‘정보타깃’의 설정작업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이 활동의 일차적 목표는 ‘정보풀(information pool)’의 형성이다. ‘정보풀’을 만들어 정보를 끌어모으지 못하면 ‘정보타깃’을 설정할 수 없다. 중정은 조직의 특성상 ‘정보차단(information denial)’을 기본으로 하는 폐쇄적 집단이다. 중정의 경우 조직의 구조와 규모, 조직간의 유기적 결합, 각 부서의 구체적인 활동목표조차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있다. 조사대상기관인 중정(국정원이 아니다)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높을수록 우리가 입수하는 정보에 대한 판단과 가공·처리의 수준은 높아지고, 그만큼 진상규명의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위원회에서 ‘정보풀’ 형성을 목표로 채택한 방법의 하나는 탐문조사였고, 실제로 최교수 사건의 경우 탐문과정에서 접촉한 사람만 800명이 넘는다. 탐문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비로소 ‘정보풀’이 형성되었고, 이 ‘정보풀’을 통해 첫째 최교수 사건과 관련된 중정의 움직임을 원근법을 적용해 파악할 수 있었으며, 둘째 ‘정보타깃’을 설정할 수 있었으며, 셋째 ‘제보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포착했다.

    위와 같은 조사과정을 거쳐 위원회가 목표로 한 ‘핵심정보’의 대부분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간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 중 상충되는 내용이 있고,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부분도 간혹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기왕의 언론보도를 가능케 했던 ‘증거’의 일부를 제시함으로써 사건의 이해를 돕는 한편, 불충분한 언론보도로 야기될 수 있는 혼선을 정리하고자 한다.

    최교수가 간첩이 아니기 때문에 간첩이라고 자백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정이었다. 당시 최교수에 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던 곳이 중정이었던 만큼 이 말은 논리적으로도 맞다. 위원회 조사관들은 이 사건의 조사 초기부터 최교수를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의 증언, 국정원과 서울지검이 제출한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중정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최교수가 간첩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다만 중정 관계자들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검찰과 국정원이 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를 정밀분석한 결과 그간 중정에서 최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로 제시했던(이중 일부 내용은 아직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 이○○의 제보, 피의자신문조서, 자필진술서, 담당수사관의 주장(조서와 자술서) 등은, 최교수의 간첩혐의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능력과 증명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정은 그간 최교수를 간첩혐의로 조사에 착수케 된 것이 이○○의 제보 때문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우선 ‘이○○의 제보’에는 ‘최종길이 공산혁명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을 뿐 간첩행위와 연관지을 수 있는 사실이 전혀 없다. 더구나 제보자인 이○○가 조사결과 중정의 협조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제보내용 자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최교수가 평양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고 공작금을 수수했다는 등 구체적인 간첩활동 내용이 담겨있는 피의자신문조서는 최교수가 죽은 뒤에 작성된 허위문서라는 사실도, 이 문서의 작성에 관여했던 수사관들의 자백으로 밝혀졌다. 최교수의 자필진술서에는 간첩활동에 관한 내용이 단 한마디도 없다. 요컨대 중정이 이제껏 내세운 ‘증거’는 조작됐거나 무의미한 내용뿐이었다. 10여명의 담당수사관 중에서도 유독 주무수사관 한 사람만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대공수사 전문가인 내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므로 ‘최교수는 간첩’이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의 수사과정과 처리과정을 대공수사의 일반적인 관행과 비교해봐도 최교수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만약 중정에서 최교수를 간첩으로 의심한 것이 사실이라면 증거확보 차원이나 간첩망의 일망타진을 위해서 사전에 내사활동을 벌였으리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위원회 조사관들이 “1973년 당시 최교수 수사라인상에 있었던 중정의 수사관들이 최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므로 ‘엄밀한 증거가 아니어도 좋으니 최교수를 간첩으로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제시해 보라’”고 요구하자, 앞에서 말한 주무수사관을 제외하고, 중정의 수사관들은 물론 ‘제보자’라는 이○○ 조차도 예외없이 머리를 숙이면서 ‘죄송합니다. 최교수는 간첩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중정의 수사관들은 최교수에 대한 고문사실을 끝까지 부인하려 했다. 이들은 당사자인 최교수가 사망한 지 오래이며 고문에 참여했던 일부 수사관들은 해외로 이민가서 살고 있는 만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서 최교수에게 가했던 고문을 입증할 수 없을 것이란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의 방어막은 외곽에서부터 무너졌다. 당시 중정에 근무하던 경비원들이 5국(대공수사국) 수사관들의 무지막지한 고문관행은 물론 고문의 종류와 양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고, 평소 심한 고문을 가한 수사관들을 알려달라는 위원회 조사관들의 요구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상당수 고문 수사관들의 사진을 지목했다. 몇몇 경비원들은 어느 수사관의 사진을 지목하면서 ‘이 사람이 조사실에서 나올 때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하는지 도무지 사람 같지도 않았다’며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의무실에 근무하던 간호사와 의사들도 자신이 목격하거나 치료했던 끔찍한 고문의 상처에 관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고문에 대한 증언의 확보와 더불어 법의학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최교수의 부검사진을 검토한 대다수의 국내·외 법의학자들은 엉덩이와 다리 오금(무릎 뒤쪽) 부분의 상처는 시반(屍斑)이 아니라 피하출혈로서 고문의 명백한 증거라고 입을 모았다. 최소한 몽둥이(실제로는 야전침대에서 뺀 길이 1m 내외의 각목)로 심하게 매질하고 ‘통닭구이’ 고문을 자행한 것이 틀림없다는 데 대다수 의사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법의학적 접근을 통해 고문사실이 입증된 한편, 중정 수사관들이 최교수가 사망한 3~4일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찾아와 부검원장을 탈취하려고 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중정 수사관 두 명이 최종길의 부검감정서 원본을 달라고 요구… (중략) 이는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가 될 수 있고 또 불법 행위이기 때문에… (중략) 원본을 주지 않았습니다. 원본을 달라고 한 사람들이 중정 수사관이라는 것은 그들이 신분을 밝혔기 때문에 알았습니다.”(F의 진술)

    중정이 부검원장(촬영필름 포함)을 없애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최교수에 대한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사인(死因)을 영원히 미궁에 빠뜨리려는 목적은 아니었을까.

    외곽이 무너지자 ‘사건의 진상’으로 가는 접근로가 폐쇄되어 있다고 안심하던 수사관들의 내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사관들 중 몇몇이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했다. 이들의 증언은 목격담이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구체적이었고 그만큼 신빙성이 높았다.

    수사관들 내부에 균열이 생기자 이번에는 희생양을 만들어 책임을 모면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서로 ‘네 탓이오’ 공방을 펼치는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정의 내부자료와 폭넓은 증언의 확보를 통해 고문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확고한 증거를 확보한 만큼, 이런 시도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최교수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했다’ 이 두 가지의 분명한 사실에 근거하여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최교수를 남산분실로 자진 출두시켜 조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 표방하는 조사목적(간첩혐의 조사)이 거짓으로 드러난 이상 적어도 그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1년도 못되어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몰린 당시의 정치상황, 중정 5국 고위층의 출세욕, ‘현단계에서 밝힐 수 없는’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작용해 최교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중정의 원래 목적이 그랬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는지 여부는 더 많은 조사를 통해 확인해야겠지만, 모 신문에서 표현했듯이, 최교수가 중정 공작의 희생양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우선 최교수를 자진출두 형식을 빌어 출두하게 한 이유부터가 최교수의 간첩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신이라는 엄혹한 반공체제 아래서도 최교수에게 간첩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최교수의 담당 부서는 애초부터 수사과가 아니라 공작과였기 때문이다(중정 공작과는 수사권이 없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수도 없다). 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은 중정의 고위간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최교수는 수사의 대상이 아니라 공작의 대상이었다’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최교수 사후에 송치서류 등 다양한 공문서가 허위로 작성된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는 은폐조작의 양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는 조사의 필요상 당분간 독자의 판단에 맡겨놓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가. 송치서류

    “긴급구속장, 피의자신문조서, 압수수색영장, 첩보보고서, 수사보고서 등 송치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는 최종길 사후에 작성된 것입니다. 결국 범죄사실이라는 것도 최종길이 사망한 이후에 A의 지시로 B가 작성한 것으로 모두 허위문서입니다.”(C의 진술)

    “중정은 상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최종길 사후에 송치서류를 허위로 작성하였다 해도 도장을 찍으라면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서류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으라고 지시한 사람은 A입니다. (중략) D의 묵인하에 최종길을 간첩으로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E의 진술)

    여기에서 A∼E로 표현된 사람들은 당시 중정의 수사관과 고위 관계자들이다. 물론 이밖에도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동원해 송치서류가 사후에 허위로 작성된 문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지만, 위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 현장검증(조서)

    “10월19일 새벽에 현장검증은 없었고, 19일 오후에 현장검증 서류를 조작한 행위는 있었다. 현장검증을 했다면 최종길을 마지막으로 수사했던 김○○과 차○○을 참여시켜야 하는데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그 외에도 G, H, I, J 등 사건 관련자 중 아무도 현장검증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장검증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없다.”(G, H, 차○○의 진술 등)

    따라서 현장검증을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관련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검증’ 자체가 불가능했고, 실제로 현장은 검증되지 않았다.

    “중정에서 작성한 현장검증조서는 그 시간대가 조작되어 있음이 분명하고, 현장검증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이 참여한 것처럼 조작돼 있다. 또 검증조서를 작성한 장소는 사체가 있던 현장도 아니고 7층 사무실이었다.”(K의 진술)

    “현장검증조서에는 현장검증을 한 시간이 19일 새벽 4시30분에서 새벽 5시라고 적혀 있으나 이 시간에 이미 최종길의 사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진 뒤였다.”(L의 진술)

    물론 이것보다 더 결정적인 증언도 확보되어 있으나, 조사의 필요상 여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중정이 발표한 최교수의 자살동기(즉, 간첩임을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긴 나머지 자살에 이르렀다)는 명백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자살동기가 허위로 드러난 이상 타살되었거나,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자살동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정(수사관들을 포함)은 이제껏 공식발표 이외에 다른 내용의 자살동기를 내세운 적이 없다.

    우선 중정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자살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크게 보아 ①최교수의 간첩 자백(자살동기) ②담당수사관 김○○의 목격담 ③7층 화장실 소변기에 나타난 발자국 사진 ④부검감정서, 이렇게 네 가지다.

    이 중 첫번째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허구임이 입증됐다. 두번째 근거인 김○○의 목격담을 살펴보자. 우선 김○○의 목격담은 실제로 ‘투신자살’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의 진술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김○○의 목격담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 중 한 가지만 예를 들어 살펴보자.

    1. “창문틀에 거의 다 올라가서 구부린 자세로 바깥쪽을 향하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발목 쪽을 잡았으나, 용의자가 놓지 않으면 뛰겠다는 말을 듣고 순간 당황하여 몇 발 뒤로 후퇴하였고, 잠시 후에 신체접촉 없이 최종길이 투신했다.(김○○ 1973년 진술)

    2. 창문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신체 접촉이 없었고, 뛰어내리는 순간 다가서면서 바짓가랑이를 스칠 정도로 손이 닫기만 했다.(김○○ 1988년 검찰 진술)

    3. 창문 위에 올라가 있는 최종길의 우측 발목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김○○ 1973년 또 다른 진술)

    요컨대 상황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진술했다고 보기에는 1, 2, 3의 진술내용이 너무 다르다.

    다음으로 중정이 자살의 증거로 내세우는 소변기의 발자국 사진이다. 최교수가 투신하기 위해 소변기를 딛고 올라갔다며 중정이 제시한 이 사진은, 최교수의 자살을 뒷받침한다기보다 오히려 타살의 의혹을 더해주는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변기 사진이 붙어있는 현장검증조서가 사후에 허위로 작성된 문서임은 이미 위에서 밝혔다. 다음으로 사고 직후 7층 화장실에 가보았던 중정 간부인 I와 M은 “소변기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발자국 같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중정간부 M은 “소변기에 발자국이 없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내가 직접 소변기를 딛고 올라가 보았으나 (사진으로 나타날 만큼의) 발자국은 남지 않았다.”(1988년 M의 진술)고 증언했다. 이렇게 볼 때 중정에서 투신했다는 증거로 제시한 ‘발자국이 찍힌 소변기를 촬영한 사진’에 나타난 발자국은 최교수의 발자국이 아니라 M의 발자국이거나 아니면 제 3자의 발자국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중정의 수사와 계호관행에 비추어 보더라도 자살정황은 납득하기 힘들다. 당시 최교수는 중정의 계호규칙에 의해 바지에 허리띠를 차지 않은 상태였고, 신장은 158cm에 불과했다. 또한 수사관은 바짝 붙어서 감시하는 것이 엄격히 적용되던 통상규칙이었다.

    만약 화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면 김○○은 오히려 최교수에게 바짝 붙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게다가 중정에 들어온 피의자가 구두를 신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며, 또 설사 구두를 신었다고 해도 사진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선명한 발자국이 남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최종길의 부검사진에 나타난 엉덩이의 피멍도 중정의 ‘투신자살’ 주장을 조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다. 몽둥이로 맞아 이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라면 걸어다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정의 발표처럼 소변기를 딛고 창틀로 올라가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소변기의 사진은 어떻게 된 것일까. 대답은 독자에게 맡긴다.

    마지막으로 부검감정서를 검토해보자. 부검감정서에 나와 있는 부검사진(원본 필름은 모두 33장)은 위원회의 조사관들이 ‘타살’을 의심하는 단서가 되었다. 우선 최교수의 경우 부검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사망진단서나 사체검안서가 전혀 없다. 당시 국과수 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진단서나 사체검안서 없이 부검한 것은 최교수 이전에도 없었고, 최교수 이후에도 없는 오직 단 한 번의 예외였다(최교수의 매장지 관할 관청에 가서 확인한 매장허가서에도 사망진단서나 사체검안서는 붙어있지 않았다).

    부검감정서에서는 사인을 심낭 파열과 두개저(머릿속 부위) 골절로 보았으나, 사망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직장(直腸)내 온도를 측정하지 않았고, 추락사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X-레이 촬영도 하지 않았다. 감정서에 나와있는 사진과 부검의의 설명이 불일치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3곳이나 됐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부검감정서를 검토한 국내외의 전문가들은 맨 처음으로 당시 부검의의 ‘자격’부터 의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타살’을 의심케 한 것은 부검사진에 ‘사후손상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왼쪽 족저부의 상처와 전두부 양팔 골반골의 골절은 응혈과 혈종 괴사의 소견이 없는 등 다른 상처들과 발생한 시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며, 그 차이는 생전과 사후로 구분된다는 의견을 일군의 (법)의학자들이 위원회에 보내왔다.

    한편 당시의 부검감정서는 육안으로도 쉽사리 확인되는 고문의 뚜렷한 흔적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973년 10월19일 오전 최교수의 부검의는 궁정동(이후락 부장의 집무실이 있던 안가)으로 불려갔다. 당시 부검의는 자신이 그날 오후 최교수를 부검하게 될 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부검의에게는 궁정동에서 들은 사망사고에 관한 설명이 곧 자신에게 보내는 중정의 부검관련 메시지였다.

    “이곳(궁정동) 3층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누군가가 설명하더군요.”(당시 부검의의 진술)

    언론은 그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타살의혹에 대해 마치 위원회가 ‘최교수를 7층 비상계단에서 밀어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당시 중정 간부의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타살의혹을 제기하는 근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또 아직 밝히지 못한 부분을 포함해서) 다양한 자료와 증언에 입각하고 있으며 이는 조만간 보고서 형태로 국민들 앞에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국민들과 언론이 최종길 사건은 물론 의문사 사건 전체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싶다. 필자도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와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최교수의 사망사건은 자·타살의 의혹을 넘어 우리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답변을 갖고 있는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생명을 관리해왔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국가기관은 국민들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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