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조직도 ‘리스트’도 없다. 더 이상 흔들지 말라”

김우중의 사람들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4-11-16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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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중이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만.”

    지난 연말 박정훈 전 민주당 의원의 부인 김재옥씨가 “1988년 김우중 회장의 돈을 받아 김홍일씨에게 전달했다”고 폭로하자 한 여당 정치인은 이렇게 내뱉았다. 희대의 사기범으로 몰려 궁지에 빠진 김우중(金宇中·66) 전 대우그룹 회장이 느닷없이 13년 전 대통령의 아들에게 건넨 정치자금 얘기를 끄집어내 ‘외곽’을 때림으로써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고 본 것이다.

    더욱이 김재옥씨는 자신의 폭로로 큰 파문이 인 뒤에도 “이번은 그냥 ‘인사’로 한 거다. 2탄, 3탄, 핵폭탄이 준비돼 있다” “김회장님이 들어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김 전회장과 그 측근들이 이른바 ‘김우중 리스트’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올 만도 했다.

    한 해 전의 대통령선거에서 낙마한 ‘별볼일없는’ 야당 총재에게 ‘사과상자가 서재 천장까지 쌓여 돈 냄새가 진동할’ 만큼 돈을 줬다면 그후 두 번의 대선과 세 번의 총선을 더 거치는 동안에는 또 얼마가 전달됐을까, 야당에 그만한 돈이 갔다면 여당에는 어땠을까, 현 정부 출범 후 대우가 붕괴위기에 몰렸을 때는 로비가 없었을까…. 갖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함으로써 ‘김우중 복귀’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계획된 움직임이 시작된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김재옥이 김우중 발목잡았다”


    그러나 김 전회장 측근들은 이같은 음모설을 하나같이 완강하게 부인했다. 김재옥씨의 폭로는 자신들과 아무런 사전교감 없이 이뤄진 돌출행동이라는 것이다. 김씨가 원망스럽다는 이들도 많았다.

    김 전회장?한 핵심측근은 “김씨가 김회장에 대해 고마움을, DJ에 대해 섭섭함을 표시한 것까진 좋다. 하지만 정치자금이 오고 간 과정에만 초점을 맞춰 김우중이라는 인물을 정치인에게 돈 대주고 뒷거래나 하는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시켰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따라서 김씨의 발언은 자신들에게 동정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재기하려는 대우인들과 김 전회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 그는 “김회장은 무슨 ‘리스트’ 나부랭이나 들고 나와서 정권의 옆구리를 찌를 정상배가 아니다. 그러기엔 그릇이 너무 큰 사람이다”며 정색했다.

    또다른 측근인사는 김씨의 주장을 ‘팩트’로 믿기 힘들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상자가 서재 가득 쌓였다면 수십억원은 된다는 얘긴데, 그런 액수라면 기업 총수가 직접 전하지, 그처럼 목격자를 여럿 만들 리 있겠는가. 그리고 돈이 전달됐다는 1988년은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이다. 수표로 주거나 가·차명계좌로 입금해도 탈날 게 없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돈을 왜 현금으로 주겠는가. 사과상자가 오간 것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1993년 이후의 일이다.”

    또한 “‘김우중맨’들에게 ‘김우중은 희생양이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김회장의 복귀나 명예회복을 위해 조직적인 행동에 나설 만한 여건도 갖춰지지 않았고, 그럴 만한 기반도 의욕도 없다”는 게 한 대우 퇴직 임원의 설명이다.

    김 전회장의 주요 측근들은 대부분 ‘대우 비리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한 상태라 언행이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며, 다른 인사들도 재판을 쫓아다니느라 경황이 없거나 새 일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기에 손발을 맞춰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 더구나 이들은 극히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된 나머지 바깥출입을 하거나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릴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 전회장이 돌아온다고 해도 ‘대우는 내 회사’라고 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 대우 복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우를 경영할 때도 김 전회장의 개인 지분이 미미해 경영권 방어가 불안한 실정이었는데, 그나마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 자구 차원에서 다 내놓았기 때문에 현재 대우와 김 전회장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는 얘기다.

    서울 퇴계로 대우재단 빌딩 15층에 ‘대우인회’라는 명패가 붙은 사무실이 있다. 대우의 퇴직 임원들이 얼굴을 맞대는 거의 유일한 공식 공간이다. 김 전회장의 복귀 음모설 중에는 이곳을 ‘작전사령부’로 지목한 것도 있다.

    하지만 대우인회는 순수한 친목·상조 모임에 불과하다는 게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해명이다. 원래는 ‘우인회(宇人會)’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퇴직한 임원들이 창업하거나 새 직장을 잡을 때까지 외부인을 만나거나 정보를 교류하는 공간으로 활용케 한 것인데,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후 대우인회로 이름을 바꿨지만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같이 식사하는 게 유일한 정기 모임이며, 그밖에는 시내에 일보러 나왔다가 자투리 시간을 때우려고 들르는 정도라는 것이다. 어쩌다 선·후배, 동료들과 마주해 과거를 떠올리다 억울한 심정에 비분강개할 때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끝날 뿐이라는 것. 무엇보다 아직 재판이 진행중인 회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조심스러워 대우인회 이름으로는 대우 사태와 관련해 지금껏 공식 성명 하나 낸 적이 없다고 한다.

    김우중 전회장의 ‘세계경영’을 보좌하다 실형을 선고받은 주요 측근으로는 강병호(康炳浩·59) 전 (주)대우 및 대우자동차 사장, 김태구(金泰球·61) 전 대우자동차 사장, 장병주(張炳珠·57) 전 (주)대우 사장, 전주범(全周範·50) 전 대우전자 사장, 추호석(秋浩錫·52) 전 대우중공업 사장 등이 있다.

    강병호 전사장은 그룹내 최고의 금융전문가로 손꼽히며 김 전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산업은행 국제금융파트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다 대우에 입사, 해외 주요 지사장을 거쳐 1981년부터 10년 넘게 (주)대우 영국 런던지사에서 그룹의 해외자금 조달창구인 BFC(British Finance Center) 관리를 주도했다.

    BFC의 금융통(通) 인맥을 일컫는 ‘런던스쿨’의 핵심멤버였던 그는 국제금융 베테랑답게 그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첨단 파이낸싱 기법으로 해외에서 저리 자금을 끌어들여 ‘세계경영’의 젖줄 노릇을 했다. 대우가 한때 마르지 않는 자금줄을 밑천으로 기업들을 잇달아 인수·합병해 재계의 부러움을 산 것도 런던스쿨의 선진 금융 노하우 덕분이었다.

    강 전사장과 같이 산업은행 출신인 김태구 전사장은 적자와 노사갈등에 시달리는 산업현장을 동분서주하며 해결사를 자임한 인물. 1982년 대우조선 부사장, 1987년 그룹 기조실장, 1990년 대우조선 사장을 맡아 당시 엄청난 누적 적자와 극심한 노사분규로 열병을 앓던 대우조선을 정상화시켰다. 1991년에는 대우조선과 사정이 비슷했던 대우자동차 사장으로 옮겨 특유의 뚝심으로 경영난과 노사문제를 풀어갔다.

    특히 1996년 10월 라노스, 1997년 2월 누비라, 4월 레간자 등 불과 6개월 사이에 소형·준중형·중형 3개 주력 차종을 동시 개발·판매하는 진기록을 세우며 침체일로의 대우차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김 전회장이 자동차를 앞세우고 세계경영에 나서는 터전을 마련했다. 김 전회장이 몇 번이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드물게 칭찬한 경영인. 그룹 해체가 경각에 달해 있던 1998년 10월 구조조정본부장으로 발령받아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직전인 1999년 7월까지 대우의 마지막 해결사로 운명을 함께했다.

    장병주 전사장은 공직으로 출발, 상공부, 청와대 비서실, 재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1979년 대우에 입사한 이래 20년 동안 수출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상사맨이다. 입사 3년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사장, 7년만에 미국법인 대표(이사)로 승진했고, 1992년에는 그룹 기조실 전무에 올라 인사·관리·전략 등 핵심업무를 총괄했다.

    외환위기가 찾아온 1998년 (주)대우 사장에 취임, “우리나라 무역흑자를 500억달러로 끌어올려 IMF체제를 벗어나자”고 주창한 김우중 전회장의 수출총력전을 보필했고, ‘나라사랑 금모으기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그해 (주)대우는 13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내 단일 기업으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김우중 전회장 못지않은 ‘일 중독자’로 유명한 전주범 전사장은 46세 때인 1998년 대우전자 상무에서 세 단계나 뛰어오르며 사장으로 전격 선임돼 화제를 낳았다. 취임하자마자 해외 사업장에 “본사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라”고 독려, 가동한 지 1년이 넘은 14개 사업장을 모두 흑자로 돌려놓았다. 김 전회장의 경기고 후배라는 후광도 있었다. 그러나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방침이 발표되자 “분노를 느낀다. 우리끼리 뭉쳐 독립법인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사내 메일을 띄우는 등 강력하게 반발하다 취임 1년을 못 채우고 경질됐다.

    김 전회장의 비서 출신인 추호석 전사장은 공채 입사 20년째인 1995년 전무에서 2단계 승진해 45세의 나이로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 역시 한때 런던스쿨을 거쳤으며, 부장에서 상무 시절까지 김 전회장이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그림자처럼 수행할 만큼 남다른 신임을 얻었다.

    이들 측근 CEO들은 분식회계와 사기대출 등의 혐의로 징역 3∼7년을 선고받고 2심을 기다리고 있다. 강병호·김태구 전 사장은 재판부로부터 보석을 허가받았으나 거주지역이 자택으로 제한돼 있고, 추호석 전 사장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재판과정에서 “김회장의 지시에 못 이겨 분식회계를 했다”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부도위기에 이르렀지만 김회장은 신규 투자를 계속했다”고 부실의 책임을 김 전회장에게 떠넘겨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 전회장이 “꼭 손봐야 될 놈들”이라며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대우의 한 전직 임원은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변호사들이 해외에 체류중인 김회장에게 책임을 미루라고 조언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는 “김회장도 ‘부하들이 나를 딛고 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대우를 떠나 다른 분야나 기업으로 진출한 김우중맨들도 많다.

    배순훈(裵洵勳·59)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그런 경우. 서울대 기계공학과와 미국 MIT를 나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하던 1976년 대우중공업 기술본부장으로 영입된 그는 대우조선 부사장, 대우전자 사장을 거쳐 1995년 대우전자 회장에 올랐다. 당시 대우전자 제품이 품질이 낮다는 평가를 받자 ‘탱크주의’라는 기술경영 바람을 일으키며 TV 광고에 출연, 소비자에게 직접 파고들며 지명도를 높였다. 김 전회장의 경기고 5년 후배로 김 전회장이 ‘배박사’라 부르며 총애했고, 대우에서 김 전회장에게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몇 안되는 경영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98년 1월 프랑스본사 사장에 임명됐으나 두 달 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돼 대우를 떠났다. 하지만 대우전자 회장 때부터 이미 대우에서 마음이 떠났던 듯하다. 대우의 간판 전문경영인이었음에도 전문경영인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것이다.

    “대우전자를 ‘독립경영’ 시키겠다고 하면서 나를 대우전자 회장에 앉혔는데, 사장 인사는 그룹 기조실에서 했다. 자금담당 임원들은 나를 제쳐놓고 김우중 회장이 주재하는 기조실 회의에서 결재를 받았다. 인사권도 주지 않고 돈도 마음대로 못쓰게 해놓고는 명색이 대우전자 회장인 내게 대우자동차를 팔라며 목표 대수까지 정해줬다. 하기야 그 시절엔 그게 우리네 기업의 ‘문화’였지만….”

    김 전회장이 세계 경제의 흐름이 바뀐 후에도 독립경영이 아닌 ‘독재경영’을 고수하다 곤경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배 전사장은 1998년 말 전국경제인연합회 간담회에서 “생산량의 95%를 수출하는 대우전자를 빅딜에 포함시킨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대우전자 빅딜에 반대 의견을 비쳤다가 재임 9개월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돌아갔고 벤처기업인 리눅스원 회장직을 맡았다.

    윤영석(尹永錫·64) 두산중공업 사장은 김우중 전회장의 창업동지나 마찬가지다. 1964년 경기고 2년 선배인 김 전회장이 무역실무를 배우고 있던 한성실업에 입사했고, 1967년 김 전회장이 500만원을 들고 독립해 대우실업을 설립하자 그 이듬해 이 회사로 옮겨왔다.

    그후 대우조선, 대우중공업, (주)대우 등 그룹 핵심 계열사 대표를 거치며 회사를 키웠는데, 김 전회장의 분신이나 다름없다는 뜻에서 ‘리틀 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 전회장이 1995년 세계경영을 표방하며 국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를 그룹 총괄회장에 임명, 안살림을 맡겼을 정도다.

    윤사장은 대우 미국본사 사장이던 1998년 민영화를 앞둔 한국중공업 사장 공채에 응모, 주무부서인 산업자원부의 낙점을 받았다. 1980년 산업구조조정으로 한때 한중을 경영했던 대우는 대우중공업의 사업확장을 위해 한중의 발전설비와 선박용엔진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후 한중의 발전설비부문은 한중을 인수한 두산그룹으로 일원화됐고, 엔진부문은 두산·삼성·대우의 지분 참여로 HSD엔진이 설립됐다.

    윤사장은 대우가 어려움을 겪던 1999년, 친정인 (주)대우가 발행한 CP(기업어음) 2000억원어치를 한중 자금으로 매입했다가 그중 상당액을 회수하지 못해 물의를 빚었다. 대우를 떠나고서도 김우중 전회장에 대해 의리를 다하려다 무리수를 둔 것. 이 때문에 문책론이 제기되자 그는 “대우 CP 문제는 한중 사장직을 그만둘 때까지는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윤사장이 지난해 3월 두산중공업(한중의 회사명이 바뀜) 주주총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유임돼 그가 향후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갈지 주목된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우중맨으로는 이한구(李漢久·57) 한나라당 의원, 박정훈(朴正勳·61)·이재명(李在明·54) 전 민주당 의원 등이 있다.

    이한구 의원은 1969년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 재무부에 들어가 외환자금과장, 이재과장 등 요직을 맡았으나, 1980년 ‘인사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재무부에서 퇴출됐다. 이의원은 당시 집권한 신군부가 1978년 말까지 4년 넘게 재무부 장관에 재임했던 김용환(金龍煥·70, 현 한나라당 의원) 인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칼을 댄 것으로 본다(김의원은 이의원의 손위 동서).

    그는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대를 거쳐 1984년 캔자스 주립대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대우로부터 도움을 받은 인연으로 그해 대우그룹 회장 비서실 상무로 영입됐고, 입사 직후부터 김우중 전회장과 110여 개국을 함께 돌며 해외 투자, 경영구조 개편 등의 현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1987년 김 전회장은 그를 불러 “이제 국내에서 안주하다간 살아남기 어렵다”며 대우경제연구소를 맡아 대우의 해외 진출을 위한 장기 계획을 수립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의원은 그후 13년간 대우경제연구소를 이끌며 세계경영의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2000년 한나라당에 영입돼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에 진출한 그는 여당으로부터 ‘대우를 망친 장본인’으로 지목돼 곤혹스러워 했다. 비록 경영 일선에는 없었지만 대우 싱크탱크의 수장이자 김 전회장의 브레인 역할을 했기에 대우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 이의원은 지금도 “세계경영의 방향은 분명 옳았다”는 소신을 견지하고 있다.

    운동권 출신인 박정훈 전의원은 1983년 대우그룹 이사로 입사, 1987년 상무로 승진했다. 김우중 전회장이 다리를 놓아 1992년 김대중 총재의 민주당 전국구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당시 전국구 공천헌금도 김 전회장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총선에서도 국민회의 지역구(전북 임실·순창) 공천을 받아 당선됐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민주당을 탈당, 민주국민당으로 적을 옮겼다.

    지난해 부인 김재옥씨가 김홍일 의원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폭로한 것도 박 전의원의 공천탈락이 주요 동기가 됐던 듯하다. 박 전의원은 교도소에서 나와 생계가 막막했을 때 일자리와 집을 마련해줬을 뿐 아니라 그후로도 여러 차례 경제적으로 도움을 줬고 국회 진출까지 밀어준 김 전회장에게 각별한 정을 품어 왔다고 한다.

    김 전회장의 경기고 후배인 이재명 전의원은 미국 유학중인 1977년 대우실업 과장으로 특채돼 김 전회장의 수행비서로 출발했다. 40대 초반에 대우자동차 부사장, 대우기전 사장, 기조실 사장 등을 지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인 신주연씨도 김 전회장의 비서 출신으로, 두 사람은 김 전회장의 중매로 맺어졌다.

    1993년 민자당 전국구를 승계해 14대 의원이 되면서 대우를 떠났는데, 1995년 2월 김 전회장이 그룹을 개편하면서 그의 대우 복귀를 제의하자 미련없이 금배지를 내던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민자당의 간곡한 만류로 일주일만에 다시 마음을 돌리긴 했지만 김 전회장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지역구(인천 부평을)에서 당선됐고, 1998년 정권교체 후에는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 한나라당 정책조정실장, 국민회의 제2정책조정위원장 등 중요 당직을 맡았고 실물경제에 정통해 의정활동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돌연 불출마를 선언해 또한번 화제를 모았다. 그는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가겠다”며 말을 아꼈으나, 주변에선 그가 대우의 몰락과 김우중 전회장의 불명예퇴진을 막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워하다 정계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6척 장신에 두주불사(斗酒不辭)의 강골인 이 전의원은 김 전회장이 물러난 후 건강까지 악화돼 현재 강원도 속초의 한 농장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있다.

    대우에서 20년 동안 그룹 홍보를 맡아온 백기승(白起承·45) 전 구조본 이사는 2000년 9월 대우를 떠나 홍보대행사 코콤포터노벨리 부사장으로 옮긴 후에도 ‘영원한 대우 홍보맨’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우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챙기면서 옛 대우 임원들 간의 연락업무도 맡고 있다.

    김 전회장의 대변인격인 그는 간간이 김 전회장의 근황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전회장과 연락이 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노코멘트”라고 답했다. 대우를 떠날 때는 ‘신화는 만들 수 있어도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책을 펴내 DJ 정부의 재벌·경제개혁의 문제점과 대우 구조조정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다 이렇게 됐는지를 제대로 알리는 게 대우맨으로서의 내 마지막 임무”라고 했다.

    백 전이사는 “DJ 정부 초기의 경제관료들이 회생 가능성이 높던 대우를 벼랑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가.

    “외환위기로 국가와 기업 신용도가 하락하면서 수출금융시스템이 마비되자 은행에서 정상적으로 신용장을 개설하고 네고(수출조건 협상)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수출확대에 총력을 기울이던 대우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단기 회사채 발행을 통한 수출자금 운영을 강화했는데, 금융감독위원회는 ‘대우만이 한도를 초과했다’며 1998년 7월과 8월 회사채 발행 규제조치를 취했다. 당시 대우 계열사들은 대부분 영업이익을 내고 있었다.

    또한 대우는 연불수출분 중 네고가 안된 50억달러와 시설재 수출분 40억달러에 대해 금융지원조치를 해달라고 정부에 끊임없이 건의했지만 허사였다. 김우중 회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부탁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는데도 관료들이 틀어쥐고 있다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후에야 풀어줬다. 정부가 그때 수출금융지원을 해줬다면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대우를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사인을 시장에 주는 셈이므로 대우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우가 관료들에게 찍힐 만한 사정이 있었나.

    “김회장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김대중 당선자와 독대해 나름의 경제정책을 건의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경제관료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그후로도 대통령이 김회장의 얘기를 듣는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김회장은 그런 자리에서 관료들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는 등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안다. 김회장은 1998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수출확대에 주력, 외환보유고를 늘려야 IMF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지원책을 요구했다.”

    -당시 대우의 차입금이 너무 많았고, 또 그렇게 조달한 돈을 해외로 도피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 않나.

    “대우는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 기간산업이 주력업종이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또한 세계경영이 궤도에 오르면서 외환위기 직전까지 400여 개의 해외 사업장에 투자한 돈이 11조원에 달했다. 해외 투자액은 대부분 해외 금융기관에서 조달했는데, 한국이 IMF체제로 들어가자 이들이 한꺼번에 자금 회수에 나섰다.

    지급보증을 한 (주)대우가 하는 수 없이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해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환율이 두 배로 치솟고 금리가 30%에 육박해 11조원이 순식간에 26조원으로 불어났다. 결국 국내에서 빚을 얻어다 해외에 있던 빚을 갚은 셈인데, 이걸 두고 ‘다시 못 들여올 돈을 나라 밖으로 내보냈으니 재산도피 아니냐’고 몰아세우니 답답하다.”

    -김 전회장의 무리한 세계경영이 결국 화를 불렀다고 보진 않는가.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한국에서만 외면당했다. 1998년 말에 해외법인 지사 연구소 등 대우가 해외에 깔아놓은 네트워크가 600개에 달했다. 이게 무너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했다. 한국 기업이 언제 다시 이런 네트워크를 갖추겠나.

    김회장은 동유럽과 중동 등지의 신흥시장에 진출하면서 TV 한 대 달랑 들고 간 게 아니다. 전자제품 일습에서 자동차, 호텔, 건설장비 및 인력, 산업설비에 이르기까지 패키지로 들고 가서 그 나라 지도자와 마주앉아 담판을 벌였다. 개발연대의 한국형 근대화 프로그램을 통째로 수출한 것이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전환하는 신흥시장에 미국식 자본주의 대신 한국식 개발 프로그램이 유입되는 꼴을 보다 못해 선진국들이 견제에 나섰을 수는 있다.”

    -김 전회장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할 정도로 전횡이 심했다던데….

    “김회장이 오히려 너무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던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우는 국내외에 벌여놓은 사업이 워낙 광범위해 회장 혼자서 다 챙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김회장은 틈만 나면 실무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김회장이 폴란드 FSO 회의를 주재하면서 자동차 생산과 판매를 분리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회장은 ‘S사장, 생산에만 전념하지, 왜 꼭 판매까지 가져가겠다는 거야?’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자 사장은 대뜸 ‘저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 그만두라는 뜻이라면 당장 그만두겠습니다’고 내뱉았다. 회사 분위기가 그렇듯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남 선재씨를 잃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기업 총수의 부인이 미국에 가면 지사 직원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김회장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중이던 선재씨가 직접 차를 몰고 보스턴에서 뉴욕공항으로 어머니를 마중나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언젠가 김회장과 함께 출장을 갔을 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 새벽 4시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는데, 몇몇 주재원 부인들이 공항에 나와 찬합에 담은 김밥을 내놨다. 이걸 회장과 임원, 말단직원들이 함께 둘러서서 집어먹느라 시끌벅적한 걸 보고 놀랐다. 어디에고 ‘회장용’을 따로 챙기는 문화가 없었던 것이다.”

    -‘김우중 리스트’가 있는가. 김 전회장이 책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인가.

    “리스트 같은 건 없다. 쓰고 있는 책도 ‘진솔한 반성’과 ‘비전 제시’가 주내용이다.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겨냥하려는 게 아니다.”

    또 한 사람의 핵심 김우중맨은 석진강(石鎭康·63) 변호사다. 김 전회장의 법률 대리인인 그는 ‘대우 분식회계·사기대출·외화도피 사건’에 대한 대우측의 법적 논리 정립을 책임지고 있다. 대검 특수부장을 지낸 검사 출신으로, 1977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대우그룹 고문변호사로 대우와 인연을 맺었다. 대우전자 등 계열사 사외이사를 맡기도 했다.

    김 전회장보다 세 살 아래지만 30대 검사시절에 처음 만난 후 깊은 속까지 털어놓는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석변호사는 “지금 김회장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고 했다.

    “김회장은 위 절제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소장이 확장됐다 수축됐다 하면서 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심하면 장이 좁아져 붙어버리는 협착증세가 생겨 음식물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지난 연말께도 이 증세로 고생하다 겨우 고비를 넘겼다.”

    -김 전회장이 건강 때문에도 당장은 귀국하기 어렵다는 뜻인가.

    “지금 들어와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시달리면 또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겠지만, 들어오고 말고는 전적으로 김회장이 결정할 문제다.”

    -김 전회장과 적절한 귀국 시점을 논의한 적은 없나.

    “김회장은 나가기 전에도 나와 상의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나간 후에야 내게 연락해 법적인 부분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도 그때부터 대우 사장들한테 하나하나 물어가며 재판에 대비했다. 원래 변호사는 ‘사고’가 터지고 난 뒤에야 찾게 마련이다. 김회장이 왜 못 들어오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김회장은 들어오는 시점도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김 전회장과 연락은 되고 있나.

    “연락을 받을 방법은 있다.”

    -김 전회장이 DJ 정부 초기에 경제관료들에게 밉보여 희생됐다고 보나.

    “IMF체제에 들어간 정부가 구조조정 성과를 내기 위해 큰 회사 하나쯤은 손봐야겠다고 별렀던 것 같다. IMF체제가 아니었어도 당시 반(反)재벌 정서가 피크에 있었기 때문에 대우가 재벌해체의 상징으로 찍혔을 것이다. ‘진보’ 학자와 정치인들이 재벌 한두 개 작살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나. 더구나 정부가 ‘급하다, 팔 만한 건 다 팔아라’고 하는 마당에 김회장은 설비를 풀가동해서 수출에 매진하자고 했으니….”

    -대우 본사에서 런던의 BFC로 들어간 돈은 대출 원리금 상환과 계열사 지원 등에 쓰였으므로 재산도피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김 전회장의 신용카드 대금과 미국의 아파트 관리비, 김 전회장 아들이 다니는 미국 대학에 기부한 돈 등이 BFC 계좌에서 빠져나간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김회장은 1년에 200일 이상 해외 출장을 가는데, 항공료 숙박비 체재비 등을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따라서 카드대금은 그의 출장경비로 나간 것이다.

    뉴욕에 있는 아파트는 (주)대우 현지법인 소유다. 출장자나 회사 손님들이 머무는 숙소로 활용하므로 관리비가 회사 공금에서 나가는 건 당연하다.

    하버드대에 기부금을 낸 것은 일종의 홍보비용이다. 세계적 명성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대우그룹의 성장사를 연구해 저널을 낸다기에 그 비용 일부를 부담한 것이다. 이곳에서 발간한 저널은 전 세계의 경영인과 경영학도들이 읽기 때문에 1년 동안 TV 광고를 한 것보다 홍보효과가 더 높다. 대우가 BFC로 재산을 도피시키지 않은 것은 금감원에서도 잘 안다.”

    -김 전회장은 조풍언씨가 대리인인 홍콩의 KMC에 대우정보통신을 시가보다 훨씬 싼 값에 팔았는데, KMC의 인수자금이 BFC 계좌에서 흘러들어간 것으로 밝혀져 김 전회장이 페이퍼 컴퍼니를 내세워 대우정보통신을 매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BFC에서 KMC로 돈이 간 것은 ‘가수금(假受金) 반제(返濟)’, 즉 꿨거나 임시로 받아둔 돈을 돌려준 것으로 정리됐을 것이다. 회사와는 무관한 돈이 BFC로 입금됐다가 KMC로 갔다는 얘기다. 의혹대로라면 이 돈이 회사 자금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이 부분은 조풍언씨가 증언할 문제다.”

    -김 전회장이 상당한 재산을 가족 명의로 돌려놨다는 의혹도 있다. 딸 선정씨가 대우의 계열사였던 이수화학 주식을 대량 보유한 것도 구설에 올랐는데….

    “이수화학은 김회장의 사돈인 김준성 회장(전 경제부총리)이 이미 오래 전에 대우로부터 인수한 회사다. 김준성 회장 부자는 인수 당시 보잘 것 없었던 이 회사를 오늘의 이수그룹으로 키워냈다. 회사 주인은 당연히 그분들이며, 대우와는 지급보증은 물론 거래관계도 전혀 없다. 그 집 며느리인 선정씨가 그 회사 지분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친정아버지인 김우중 회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오늘은 예금보험공사에서 김회장의 차남과 3남에게 지어준 빌라 한 채가 은닉재산이라면서 압류통보를 했는데, 이 빌라는 장남이 사망한 후 남은 두 아들에게 소유이전을 해주면서 증여세까지 낸 집이다. 도대체 누가 언제 ‘은닉’을 했단 말인가.

    예금보험공사는 직원 대부분이 계약직이고 임금도 실적급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다들 한 건이라도 더 적발하려고 눈이 벌겋다.”

    1971년 대우그룹 공채1기로 입사, (주)대우 무역부문에서 주로 근무하며 김 전회장의 세계경영 현장을 누볐던 권영철(權榮哲·54) 전 대우자동차 전무는 ‘김 전회장이 회사를 키울 줄만 알았지, 수익개념이 희박했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어느 CEO가 수익성을 따져보지 않고 투자하겠는가. 대우는 완제품을 내다파는 수출에는 한계가 올 것으로 보고 해외에 많은 공장을 지었다. 해외 공장은 투자를 시작한 후 투자금이 회수될 때까지 대개 7년 정도가 소요된다. 대우가 해외 투자를 본격화한 게 1995∼1996년부터였으므로 외환위기만 없었다면 올해나 내년부터 투자금이 회수되기 시작해 결국 김회장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됐을 것이다.”

    그는 “김우중은 아무 사심 없이 일에만 미친 사람이었고, 많은 대우인들이 그런 매력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김회장을 닮아갔다”고 했다.

    “대우사태가 터진 후 전·현직 대우 임원들의 재산을 조사한 국세청 관계자가 ‘대우 임원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일한 사람들이 대부분 집 한 채 달랑 가진 게 전부였다.

    내 밑에서 과장으로 있다 보험회사에 재취업한 후배가 찾아왔길래 나도 보험을 들어주고 주변의 대기업 임원들도 여럿 소개해줬는데, 이 친구가 그 사람들 라이프 플랜을 짜주려고 재산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나더러 ‘전무님은 거지군요’라고 하더라. 우리도 김회장처럼 일만 알았지, 재산 늘리는 데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대우엔 골프 못치는 임원이 수두룩했다. 일 중독, 출장 중독인 김회장 밑에서 일하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주)대우 후신인 (주)대우인터내셔널의 한 현직 임원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김회장처럼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고 자신한다. 그는 개인적 치부를 몰랐고 밤낮없이 현지로 직접 날아다니며 협상하는 것을 즐겼다. 덕분에 대우는 막강한 해외 무역 네트워크를 갖췄다.

    그런 회장을 보고 배운 직원들도 프로근성이 강하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다른 종합상사들은 다 철수했지만 대우 직원들은 끝까지 남았다. 그 인연으로 대우는 종전 후 이란으로부터 굵직굵직한 사업을 따냈다. 거리에 나서면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유고연방에서도 대우맨들은 일하고 있었다. 요즘 다른 종합상사 직원은 오지로 발령받으면 못 가겠다고 나자빠진다는데, 대우 직원은 군소리없이 짐을 싼다.

    그렇게 다져진 네트워크와 노하우가 워낙 탄탄해 대우사태로 큰 상처를 입고서도 제 기능을 해낸다. LG처럼 상사가 있는 기업도 대우 네트워크를 통해 무역을 할 정도다. 이건 국가적 자산이다.”

    대우에 공과대학 출신 1호로 입사, 대우정밀 전무, 그룹 기조실 부사장 등을 역임한 임효빈(任孝彬·59) 전 대우고등기술원장은 “김회장이 잘못한 일을 굳이 든다면 기업인이 기업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웠던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김회장은 국내 유통업 등 비교적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수출입국’ ‘산업보국’의 기치를 내걸고 더러는 손해를 보면서도 수출만 했다.

    다른 재벌들이 부동산 투기로 재미를 볼 때 누군가가 ‘노다지가 눈에 보입니다. 우리도 땅을 사놓읍시다’고 청했는데, 김회장은 ‘야, 우리가 물건을 만들면 물건이 늘어나지만, 땅을 사재면 대한민국 땅이 늘어난다냐?’며 단박에 퇴짜를 놨다. 말이야 멋있지만, 이게 어디 장사꾼이 할 소린가.”

    대우맨 가운데는 대우를 정치논리에 의한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으나, 유독 대우가 외환위기에 더 취약했던 원인을 ‘내부 저항력 부족’에서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창업 초기부터 끊임없는 기업 인수·합병으로 성장과 확장에 급급했던 나머지 차분히 내실을 다질 기회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입사한 대우의 한 전직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우가 스스로 부담하기 어려울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사내 의견이 양분됐다. 내실을 기해 기술력을 키우고 재무구조를 탄탄히 하자는 주장과, 회사가 뻗어나갈 때 탄력을 받아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전자 쪽 사람들은 외곽으로 내둘리고, 후자 쪽 사람들이 요직에 중용되며 득세했다. 김우중 회장이 내실을 챙기자는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것은 큰 실책이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외교안보팀을 보라. 럼스펠드 국방장관,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 민간 출신의 강경파가 몽둥이를 휘두르고 지나가면 무장(武將) 출신의 온건파 파월 국무장관이 쪼르르 달려가 얼르고 다독거리지 않는가. 우리 같으면 한 조직 안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 세력은 당장에 내쳤겠지만, 부시 대통령은 매파와 비둘기파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외교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김회장에게도 그런 지혜가 필요했다.”

    수익보다 확장을 중시하는 김 전회장의 경영관은 개발독재시대에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대우는 정부의 특혜와 지원을 약속받고 ‘밑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부실기업을 잇달아 사들이는 바람에 자신까지 부실해졌다.

    대우가 1978년에 인수한 조선공사(지금의 대우조선)가 그 한 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 전회장에게 부실투성이인 조선공사를 떠넘기면서 잠수함사업, 지하철공사 등을 주겠다고 밀약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박대통령이 비명에 가면서 약속은 물거품이 됐고, 대우조선은 이후 10년 넘게 대우그룹의 밑둥을 흔들어대다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로 겨우 진정됐다.

    김 전회장의 이런 경영관은 대우의 기업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다. 대우에서 근무하다 다른 대기업으로 직장을 옮긴 한 과장급 직원은 “다른 기업에 와서 일해보니 대우의 시스템이 얼마나 구형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대우에는 ‘자금조달’은 있었지만 ‘재무관리’는 없었다. 돈을 끌어와서 쏟아붓기만 했지,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꼼꼼하게 챙기는 시스템이 없었다. 지금 근무하는 회사에서 감사를 받고 있는데, 너무도 공격적이어서 놀랐다. 사소한 절차 하나라도 잘못된 게 있으면 다 들춰낸다. 받아야 할 돈을 한푼이라도 못 받은 게 드러나면 담당자더러 직접 받아오라고 닦달한다.

    이에 비하면 대우의 감사는 허술하기도 했지만, 설사 잘못한 게 나와도 웬만하면 ‘이건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며 덮어주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대우라는 기업과 김우중이라는 인물은 따로 떼놓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회장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30년이 넘는 개발연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기업인이다. 엄청난 변화의 격랑 속에서도 살아남아 기업을 키우고 세계화를 선도했다. 비록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마지막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앞의 공(功)은 깎아내리고 뒤의 과(過)만 부각시키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공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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