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아시아 시장 석권 꿈꾸는 ‘삼계탕 전도사’

화인코리아 나원주 사장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fwheej@hanmail.net

    입력2004-11-16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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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인코리아의 나원주(羅元柱·54) 사장은 요즘 머릿속이 온통 월드컵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축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월드컵을 보러 올 중국인들을 사로잡을 생각 때문이다.

    나사장이 중국인을 사로잡을 무기는 삼계탕. 삼계탕은 중국인의 80∼90%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인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들러가는 곳이 바로 삼계탕집이다.

    “올해 월드컵을 관람하러 오는 중국인이 순수 관광객을 빼고도 6만∼10만 명 정도가 될 걸로 예상하는데, 문제는 몇 명이 와서 몇 번을 먹느냐에 따라 계산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수요예측을 정확히 해 원활한 수급을 해줄 때 매출이 달라지게 됩니다.”

    화인코리아는 삼계탕용 삼계와 오리를 생산, 제조하는 육류 가공회사다. 전국에서 삼계와 오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회사로 서울에 있는 삼계탕 전문점의 4분의 3이 화인코리아의 삼계를 이용할 정도다.

    2000년 이 회사는 삼계와 오리로 66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40% 늘어 930억원을 기록했다. 삼계로 490억원, 오리로 440억원의 매출을 각각 올렸는데, 수량으로 보면 삼계가 2500만 수, 오리가 700만 수다.



    전남 나주시 금천면 고동리에 자리잡은 화인코리아 공장 앞엔 전국 각지로 물건을 싣고 나갈 냉장 차량들이 상차(上車)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장 위쪽에는 1만여 평의 대지에 200억원을 투자, 세계 최대 오리도축장인 도압(屠鴨)공장 건설이 한창이었다. 이 공장은 시간당 4000 수를 도압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간당 1100 수를 도압하던 기존 도압장과 함께 시간당 5000 수에 달하는 오리를 도압할 수 있어 올해 늘어날 수출물량과 내수시장 물량을 충분히 해결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

    현재 화인코리아는 ‘치키더키’란 상표로 닭과 오리고기를, 날것과 가공품으로 국내와 해외시장에 판매하고 있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호주, 중동 등 세계 1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일본이 가장 큰 수출시장이다. 나사장은 앞으로 일본과 중국 수출물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그 동안 중국은 수요는 많으나 관세가 너무 높아 대만이나 홍콩을 통해 소량이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올해 중국이 WTO에 가입하게 돼 관세가 대폭 낮아져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중국시장 진출이 이루어질 걸로 봅니다. 그러면 올해보다 수출물량이 배 이상 늘어날 것 같습니다.”

    현재 화인코리아가 생산하는 제품은 닭의 경우 생닭(삼계, 육계) 냉동닭(영계, 삼계탕 부재료를 넣은 삼계), 바로 데워먹을 수 있는 가공품이 있는데, 가공품에는 삼계탕 닭도리탕 바비큐가 있다. 오리도 닭과 마찬가지로 생오리, 냉동오리 가공품이 있는데 가공품에는 살코기만으로 만든 오리로스와 양념을 해 참나무로 훈연처리한 바비큐가 있다.

    오리 바비큐를 비롯한 육계는 항공기 국제노선의 기내식을 납품하는 아시아나캐터링을 통해 세계 각국 항공기 기내식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사장은 그 동안 기내식을 통해 오리 바비큐가 승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자, 최근 오리 바비큐의 시중 판매를 본격화하기 위해 전국 유명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입점을 시도하고 있다.

    생오리와 삼계의 경우 서울 부산 대전 대구 전주 등 전국 5개 지역에 직영영업소를 두고 250명의 도매업자들로부터 매일 주문을 받아 생산한다. 매일 오후 1시 정도가 되면 각 영업소의 주문이 완료되고 이 주문량에 따라 도축된 오리와 삼계는 냉장차에 실려 각 지역으로 보내진다. 이렇게 실려온 제품은 새벽에 배달돼 다음날 점심시간이면 소비자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삼계는 계절에 따라 주문량이 다르다. 요즘 같은 비수기에는 주문량이 하루 4만∼5만 수이고, 복날이 있는 여름 성수기 때는 30만∼35만 수에 달한다. 오리도 삼계처럼 가을 겨울보다 봄 여름의 수요가 다소 많긴 하지만 삼계처럼 계절 편차가 크지 않아 하루 평균 주문량이 2만5000 수다.

    모두들 사양산업이라고 등돌린 축산업에서 나사장이 연 1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성장 기업을 일구어낸 성공비결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사업의 계열화를 구축해 계열업체들로 하여금 전문화를 이루게 한 것. 둘째, 중량제를 실시해 제품을 규격화한 것. 셋째, 품질개선으로 제품을 차별화한 것. 넷째, 매년 수요기 때마다 전년보다 50%씩 생산을 늘리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새 거래처를 확보한 것 등이다. 현재 화인코리아의 생산시스템은 계열주체인 회사를 중심으로 부화장, 사육농가, 사료공장이 각각 독립적이면서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다.

    회사가 부화장에 병아리를 주문하면 부화장은 원하는 날짜에 주문한 만큼의 병아리를 회사가 지정한 사육농가에 넣어준다. 그러면 사료공장은 사육에 필요한 사료를 사육농가에 제공한다. 이렇게 병아리와 사료를 배당받은 사육농가는 배당받은 병아리를 삼계에 필요한 크기의 닭으로 길러 회사의 도축공장으로 보낸다.

    삼계탕을 끓이는 데 가장 적당한 크기의 삼계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서울·경기지역은 450∼500g을 선호하고, 부산·마산지역은 300∼350g을 선호한다. 농가에서 이 정도 중량의 닭을 키우는 데는 보통 30∼35일이 걸린다. 오리의 경우는 가장 선호하는 2∼2.5㎏으로 기르는데 보통 40∼45일이 걸린다.

    이렇게 회사를 중심으로 부화장, 사육농가, 사료공장의 계열화가 구축되고 각 업체들이 전문화하면서 오늘의 화인코리아가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중량제 실시는 상품으로서 닭의 가치를 높여 제값을 받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0년 삼계사업에 뛰어들어보니 제품이 규격화되지 않아 크고 작은 구별 없이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도매상인들의 경우 삼계에 부적당한 제품은 다시 헐값에 팔아 넘겼어요. 이걸 보고 처음부터 중량을 달아 판매하면 용도에 맞는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불필요한 돈 낭비를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사장은 50g 단위로 300∼750g까지 10단계로 나누고 가격도 그램 단위로 다르게 책정했다. 그러자 도매상들은 물론 소비자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당시 닭은 내장을 적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나사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장을 적출해 판매키로 했다. 대신 시중 판매가보다 마리당 50원을 더 받았다. 50원이 더 비싸도 소비자들은 깨끗하면서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화인코리아 제품을 선택했다.

    남편을 도와 내부업무를 관할하는, 나사장의 부인 최선 부사장은 “닭과 오리는 생물이기 때문에 공산품처럼 한꺼번에 많은 양을 생산해놓고 주문에 따라 아무때나 공급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이 사업의 관건은 수요예측”이라고 말한다.

    최부사장은 매년 생산량을 계획할 때 몇 년간의 주문 데이터를 기초로 수요기 때는 전년보다 50%씩 생산량을 늘렸다. 이는 수요기 때 공급을 잘 해주면 확실한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50% 가량 늘린 생산량 가운데 20%는 기존 거래처들에 넉넉히 공급하고, 나머지 30%는 물건이 달리는 새로운 거래처들에 공급했어요. 돈을 가지고도 물건을 살 수 없을 때 물건을 대주자 ‘화인코리아는 물건 달릴 때 잘 대주는 회사’로 인식되면서 자연히 거래가 이루어졌어요.”

    이런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화인코리아는 매년 30∼40%씩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처음부터 성장일변도를 달려온 건 아니다. 화인코리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1978년과 1987년의 일이다.

    나원주 사장은 지금의 화인코리아가 자리잡고 있는 나주시 금천면 고동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가 유일하게 고향을 떠났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다. 4남 2녀 중 장남인 그를 유능한 축산업자로 키우는 게 꿈이었던 그의 선친은 명문 중·고등학교를 가야 서울대 농축산과에 진학할 수 있다며 어린 그를 광주로 유학 보냈다.

    부친의 기대대로 그는 당시 광주에서 최고 명문이던 광주서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무난히 진학했다. 그리고 고교 2학년 때까지는 여느 아이들처럼 대학진학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고3에 올라가면서 부친이 갑자기 위암 선고를 받고 다니던 배 조합까지 그만두고 병석에 눕자 그는 정상적인 학교 생활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그해 12월에 부친은 세상을 떠났고 그는 부친 대신 가장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의 어깨엔 다섯 동생의 생계와 부친이 1년여의 투병생활을 하며 진 빚 500만원이 지워졌다. 친척들은 전재산이라고 해봐야 300만원 정도밖에 안되니 파산선고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이 걸리더라도 갚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당장 빚 갚을 상황도 못 되다보니 고향을 뜰 수도 없었다. 일거리를 찾았지만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이때 그는 오리사육을 생각했다. 오리는 질병에도 강하고 잡식성이어서 먹이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다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농가가 없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1965년 나사장은 금성축산이란 이름을 내걸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오리 50마리를 샀다. 들과 저수지 등에서 잡은 개구리, 물고기들을 방앗간에서 얻은 겨와 배합해 직접 사료를 만들어 먹였다. 정성을 다해 보살피자 한 마리도 병에 걸리지 않고 오리들은 잘 자랐다.

    오리가 자라 알을 낳게 되자 알로도 팔고 부화를 시켜 새끼오리로도 팔았다. 오리 사육수도 늘어 1968년에는 1만여 마리로 늘어났다. 그런데 사육하는 오리가 늘어나자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가격이 폭락하고 판로가 문제 되었다. 그래서 저장해두었다 생산량이 적을 때 판매할 수 있는 통조림을 생각해냈다.

    당시 은행에 근무하던 외삼촌을 통해 500만원을 대출받아 100평짜리 통조림공장을 지었다. 주위 친척들에게 자금을 빌려 시설도 갖추었다.

    통조림공장을 완공하고 1969년 회사 이름을 금성축산에서 나주식품공업주식회사로 바꾸었다. 나사장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통조림은 ‘오리표’라는 상표를 붙여 내놓았다. 판로개척도 안된 상태에서 제품을 만든 탓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통조림을 먹어본 소비자들이 다시 찾아 해가 갈수록 판매량은 늘어났다.

    1973년 나사장은 이왕에 사업을 하려면 좀더 큰 시설에서 제대로 해보자 생각하고 시설 확장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닭, 오리 통조림의 경우 한번 통조림으로 만들면 다른 용도로 사용이 불가능해 물건이 부족할 때 공급을 해줄 수 없는 단점을 깨닫고 제품을 냉동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통조림공장과 냉동공장을 함께 지었다. 공장은 1974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준공식 날 나사장은 이 공장에서 최선 부사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그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사업의 최대 조력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최선 부사장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광주의 명문인 전남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온 재원이었다. 이 정도 학벌이면 조건 잘 갖춘 일등 신랑감을 고를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친척소개로 만난 나사장을 첫눈에 마음에 들어했다.

    당시 그녀는 맨손으로 시작해 사업을 그 단계까지 일구어왔다는 점에서 나사장의 능력과 성실성을 높이 샀고, 다른 것은 보지 않았다.

    현재 이들 부부에겐 개인 소유 재산이 하나도 없다. 집도 없다. 일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회사 내 사무실 옆에 방을 마련해 생활하고 있다. 몇 해 전 국세청에선 최부사장이 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급료 챙기기 방편인 줄 알고 조사를 나왔다가 남편 못지않게 회사 업무를 훤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집도 없이 회사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갔다고 한다.

    결혼 이후 나사장은 아내와 함께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과일철에는 과일 통조림을 만들고, 그외 계절에는 닭과 오리의 값이 떨어질 때 통조림을 만들어 냉동시켜 놓았다가 값이 오를 때 팔았다. 그러다 1978년 천연과즙 음료를 개발, 생산했다. 사과 배 복숭아 귤 포도 다섯 가지 과일을 과즙으로 만들어 한 통에 넣었다. 다섯 가지를 하나에 넣었다해서 ‘하나사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뚜껑도 국내 최초로 따기 쉬운 원터치로 했다.

    이 제품은 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전국 각 대리점에선 물건을 받아가기 위해 돈을 들고 와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해도 주문량을 다 생산해내지 못하자 공장을 더욱 확장하려고 준비하는 사이 대기업들이 유사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막대한 자금력과 기술력으로 밀어붙이자 선금을 받아 겨우 물건을 만들어내던 나사장으로선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때 ‘하나사와’는 율산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당시 율산실업이 위기에 처하면서 수출길마저 막히게 되었다. 어음을 끊어주고 1년치 포장용 빈깡통을 주문하고 원자재도 대량으로 구입해놓은 상태에서 닥친 위기라 더욱 충격이 컸다.

    이런 와중에 같은 해 축산물 파동까지 겹쳐 1978년 10월, 회사설립 13년 만에 부도가 났다. 1979년에 나사장 부부는 축산경기가 좋아지리라 예상하고 오리를 대량 부화했으나 그 이듬해도 축산물 파동은 해소되지 않았고 회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살아있는 오리를 굶겨 죽일 수 없어 사료공장에 전화를 하면 모두 피했다. 그리고 집에는 항상 빚쟁이들이 와서 살다시피 했다.

    “이때 둘째딸이 태어났는데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으니까 젖이 안 나왔어요. 그러나 사업자금은 빌리러 다녀도 우리 먹고살겠다고 돈 빌리러 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자살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도 처음에는 그러자고 하더니 ‘그럼 우리 부도난 줄 알고 돈 빌려준 사람들한테 고통을 주게 되는데 그래도 좋겠냐’고 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우리는 자살할 권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최부사장을 다시 일어서게 한 작은 사건이 있었다. 하루는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 아주머니가 네 살짜리 첫째아이에게 “어머니 계시냐”고 물으니까 아이는 뻔히 방에 아파 누워있는 걸 알면서 “안 계신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친정 부모님에게 아이들을 모두 맡기고 두 팔 걷어붙이고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1980년이 되면서 축산경기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약용으로만 먹던 오리를 식용으로 먹기 시작하면서 광주 유동 근처에 오리탕 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리탕 붐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오리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오리 붐이 일자 1983년 이들 부부는 살코기만 발라 롤 모양으로 말아 오리로스를 만들어 내놓아 시장의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이렇게 돈벌이가 되자 1986년 한 업체가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자금지원을 받아 오리사업에 뛰어들어 대량생산을 해댔다. 얼마 뒤 과잉생산으로 재고가 쌓이자 아예 덤핑 판매까지 하기 시작했다.

    시장성 있는 제품을 개발해놓고도 자금력 때문에 번번이 시장을 빼앗기게 되자 나사장 부부는 대기업이 할 수 없는 품목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것이 삼계(蔘鷄)였다. 삼계는 생물이기 때문에 수시로 물건값이 변동하는데 대기업의 경우 결재과정을 거치다보면 값이 이미 내려 팔 때를 놓치게 되는데다 수급을 맞추기도 어렵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삼계를 하기로 하고 최부사장은 미원그룹 회장 부인이 된 대학 2년 후배를 찾아가 병아리 살 자금과 사료비를 빌려 달라고 했다. 후배는 9000만원을 빌려주며 사료는 미원 사료공장에서 가져다 먹이라고 했다.

    1990년 나사장은 오리 사업을 접고 자금 9000만원으로 닭을 사육할 사육 농가 20가구를 확보하고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가져다 가구당 2만∼3만 수씩 넣어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삼계 사업은 1990년 첫해 매출이 15억원이 되었다.

    이후 매출은 매년 30∼40%씩 늘어났다. 그러나 삼계는 여름과 겨울의 수요 편차가 심해 비수기인 겨울에는 공장을 놀리는 시간이 많았다. 나사장은 수출을 생각했다. 1992년 나사장은 삼계탕을 들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 30여 개국을 대상으로 시장개척에 나섰다.

    “삼계탕을 수출하러 시장개척을 나왔다고 하니까 우리 대사관 사람들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봤어요. 뒤에 들으니까 삼계탕 수출을 빌미로 관광다니는 사람으로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품을 내놓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는 이때 전세계 어디라도 삼계탕을 좋아하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안 사는 나라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먼저 이들을 타깃으로 삼아 일본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1993년 일본에 수출을 시작했다. 그후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으로 수출시장을 넓혀갔다. 이렇게 삼계로 회사가 안전궤도에 오르자 1995년 오리생산도 재개했다. 이때 회사명도 나주식품공업주식회사에서 화인코리아로 바꿨다.

    오리 50마리로 시작한 나사장의 화인코리아는 36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연 1000억원대의 매출을 자랑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회사의 성장은 사육농가에도 영향을 끼쳐 초창기 20여 가구이던 사육농가가 300여 가구로 늘어났다. 가구당 병아리 사육수도 한번에 2만∼3만 수이던 것이 10만∼15만 수로 늘어났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계열업체들도 함께 성장한 것이다.

    원칙을 지키며 합리성, 투명성을 중시해온 나원주 사장은 과거와 달리 이젠 건강음식을 먹는 시대인 만큼 앞으로 항암과 치매를 예방하는 기능성 닭과 오리를 사육, 시판할 계획이다. 더불어 내년부터는 닭과 오리를 이용한 프랜차이즈 식당사업도 시작할 생각이다. 식품사업은 고향 나주에서 시작했지만 식당은 서울에서 시작해 그 반응을 보고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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