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영국정치 주름잡는 환상의 투톱 블레어와 브라운

  • 정재영 < 프리랜서·영국 워윅대 철학박사과정수료 >

    입력2004-11-17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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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당 시절 40대 초반의 두 젊은 정치인이 노동당 개혁을 외치며 새 바람을 몰고 왔을 때, 영국 정가에서는 그들을 개혁의 쌍두마차라고 불렀다. 정치적 센스와 추진력이 뛰어난 토니 블레어(TB)와 신중하고 논리적인 고든 브라운(GB). 다우닝가 10번지와 11번지로 흔히 불리는 영국 총리와 재무상으로 역할을 분담, 영국사 초유의 ‘이원 정치’를 펼치고 있는 TB와 GB의 우정과 경쟁을 지켜보면, 우리나라 YS와 DJ가 떠오른다.
    다우닝가 200년사(史) 최고의 명콤비, 영국을 움직이는 두 명의 제왕.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고든 브라운 재무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18년 집권 보수당의 대처리즘이란 물줄기를 ‘제3의 길’로 돌려놓은 두 사람은, 1997년 5월 노동당 집권 이후 인기와 영향력 면에서 1, 2위 자리를 다투는 경쟁자이면서도 서로를 정치 입문 후 최고의 친구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노동당 내부에서는 그들을 TB(토니 블레어)와 GB(고든 브라운)로 약칭한다. 영국 언론에서는 노동당 각료들을 블레어 그룹(Blarite 또는 the Blairs)과 브라운 그룹(Brownite 또는 the Browns)으로 분류한다. 영국 노동당 역사 이래 처음으로 연속 2기 집권에 성공한 이후, 정치적 무게가 더욱 커진 두 사람에게 영국 정치가 휘둘리고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없지 않지만, TB와 GB에게 보내는 영국인들의 신뢰는 여전히 두터운 편이다. 창간 이후 줄곧 보수당을 지지해왔던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와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2001년 6월 총선에서 노동당 지지로 선회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한때 그들을 한데 묶어 브라운-블레어 그룹으로 부르던 때가 있었다. 영국의 주요 언론사가 몰려있는 플리트가(街)에서는 브라운-블레어 그룹을 노동당 개혁파(reformists)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두 사람을 지칭할 때,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항상 브라운이었다. 적어도 1994년 5월까지는 그랬다. 지난 1994년 존 스미스 영국 노동당 당수가 심장마비로 급사했을 때, 브라운은 노동당 그림자 내각의 재무상, 블레어는 그림자 내각의 내무상이었다. 영국정치에서 당 서열은 웨스트민스터 하원의사당 어느 자리에 앉느냐로 정해진다. 브라운은 주요 각료가 앉는 프런트 벤치의 1번, 블레어는 그 다음 순위였다. 플리트가에서는 지금도 존 스미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없었다면, 노동당 당권은 자연스럽게 고든 브라운에게로 이양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1994년 5월의 마지막 날. 블레어와 브라운은 런던 북부에 있는 이슬링턴의 한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담판을 했다. 영국 언론은 이를 음식점 이름을 따 ‘그리니타 회동’이라 부른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영국 정가의 참새들이 온갖 입방아를 찧는 소재 중 하나다. 플리트가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약속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에 언뜻언뜻 밀약 내용을 암시하는 내용이 실리기도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블레어가 당권을 맡되, 노동당이 2기 집권에 성공하면 브라운에게 총리 자리를 넘긴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 내용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두 사람은 “밀약은 없었다”고 딱 잘라 부인해왔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블레어의 총리직 이양 약속을 ‘공개된 비밀’로 간주한다. 특히 브라운 그룹은 이를 기정 사실로 하고 있다.



    자세한 내막은 두 사람이 정계에서 물러나 회고록을 써낼 때쯤에야 밝혀지겠지만, 그리니타 회동 다음날 브라운은 당권 경쟁을 포기하고 블레어 지지를 천명했다. 브라운의 양보는 보수당 내부의 권력투쟁에 식상해 있던 영국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인기가 같이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블레어는 자신의 정치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었고, 브라운은 당권 대신 인품이 높은 정치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유력한 두 젊은 개혁파 후보의 연합으로 1994년 6월 노동당 당수 경선대회는 토니 블레어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블레어 57%, 존 프레스코트(현 영국 부총리) 24%, 마거릿 베케트는 19%. 당시 토니 블레어의 나이는 41세(브라운은 43세). 노동당 역사상 최연소 당수의 등극이었다.

    TB-GB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출범시킨 토니 블레어 노동당은 이후 순항의 연속이다. 영국 노동당의 오늘을 보면, 정치는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노동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정당으로 취급받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10년 전의 영국 신문을 뒤지다보면 영국의 보수-노동 양당정치는 막을 내리고, 21세기는 보수당 일당체제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마저 눈에 띈다. 이런 성급한 분석은 1992년 노동당이 ‘대처의 꼭두각시’로 취급받았던 존 메이저의 약체 보수당에 총선에서 두번째 패배를 당했을 때 극에 달했다.

    존 메이저는 허약한 총리였다. 그는 당을 장악하지 못했고, 국민에게 인기도 없었다. 당 밖에서는 대처의 손바닥에서 노는 인형으로 조롱받았지만, 막상 당 안에서는 대처파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요즈음은 ‘포스트 대처리즘’으로 차별해서 부르는 존 메이저의 노선이 그를 지지했던 대처의 희망과는 달리 대처리즘의 궤도에서 이탈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저의 독자 노선에 대한 대처의 분노는 메이저가 가진 거의 유일한 정치기반의 상실을 의미했다. 메이저는 대처에게도 버림받고, 대처의 오랜 라이벌 마이클 헤젤타인 전 부총리가 이끄는 반대파로부터도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았다.

    국민들은 보수당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장기집권에 어김없이 따르는 것이 정치부패다. ‘슬리즈(sleaze)’라 불리는 정치뇌물 사건이 줄줄이 터져나왔지만, 메이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약체 메이저 보수당에게도 노동당은 거듭 패배했다. 노동당은 국민에게 잊혀진 존재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10년. 사정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래서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제 거꾸로 보수당이 보이지 않는다. 2005년으로 예정된 총선에서 노동당 3기 연속 집권을 의심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1997년, 그리고 2001년 총선을 통해 보수당의 텃밭이었던 영국 동남부 지역, 전통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해왔던 중산층, 보수적 색채가 강한 언론매체마저 모두 노동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중산층은 노동당이 내세우는 정책이 보수당 정책보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언론들은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정당으로 노동당을 꼽는다. 방송을 제외한 영국 언론들은 총선 때 지지 정당을 분명히 한다. 2001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지지한 권위지는 영국의 5대 일간지 가운데 데일리 텔레그래프밖에 없었다.

    무엇이 노동당과 보수당의 처지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가. 사실 정책 내용으로만 본다면 블레어 노동당 정부의 ‘뉴 레이버리즘’과 메이저 보수당 정부의 ‘포스트 대처리즘’은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지금까지 토니 블레어의 최대 공적으로 꼽히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해법을 제시한 이는 블레어가 아니라 메이저다. 바둑으로 치자면 블레어는 메이저가 깔아놓은 북아일랜드 포석의 끝내기 단계에 뛰어들어 깔끔하게 뒷마무리한 셈이다. 현재 블레어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영국의 2002년 유로화 가입에 대해서도 정책 차이는 별로 없다.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도 유로 참여를 대세라고 본 정치인이다. 다만 메이저는 유럽통합 회의론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영국 보수당 안에서 그것을 밀어붙일 힘도, 국민에게 이를 설득시킬 만한 인기도 없었다. 이것이 메이저의 한계이자 불행이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완벽한 호흡을 맞추어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전쟁에 뛰어든 블레어의 행보는 1991년 걸프전 때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과 어깨를 같이 하고 전장에 달려가 병사들을 격려한 메이저의 행보와 다를 바 없다. 유럽에서 영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과 가장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블레어는 자랑하지만, 그 열매 또한 대처리즘의 성과물이라는 것을 노동당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한다.

    물론 블레어의 신 노동당을 포스트 대처리즘의 연장, 또는 재포장 상품쯤으로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러나 포스트 대처리즘과 뉴 레이버리즘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은 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신 노동당이 대처리즘의 부정이 아니라 대처리즘의 재방문(revisit)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지금 노동당 정부를 이끄는 이론가들이 내세우는 수사학 중 하나다.

    노동당 성공의 비결은 상호보완적인 두 젊은 정치인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각자 가지고 있는 매력, 그리고 그 둘이 하나로 뭉쳤을 때의 승수효과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블레어는 현실정치 속에서 정치적 꿈을 호소하는 이상주의자다. 그는 밝고 건강하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 속에서 영국 국민들은 미래의 희망을 읽는 것처럼 보인다.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서 영국 국민은 그의 선의를 읽는다. 그는 언론으로부터 한때 ‘무오염(無汚染, sleaze-free)’ 정치인이라고 불렸다. 보수당 정치인들의 ‘슬리즈(정치뇌물수뢰)’ 사건이 잇달아 터져나왔을 때 얻은 별명이다. 블레어의 말은 화려하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존 F 케네디의 1960년대 하버드대식 수사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메시지가 간결한 때문인지, 말장난한다는 느낌은 별로 주지 않는다.

    한편 브라운은 정치적 이상을 현실 조건에서 철저히 따져본다. 블레어가 9·11 테러 이후 반테러리즘의 국제연대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아프간에 영국군 참전을 신속하게 결정했을 때, 브라운은 지상군 참전을 위한 조건을 먼저 따졌다. 블레어가 2002년 영국의 유로 가입의 당위성을 이야기했을 때, 브라운은 유로 가입의 전제조건을 이야기했다. 그는 신중하고 논리적이다. 브라운이 내미는 두터운 보고서를 영국 국민은 신뢰한다. 그는 16세에 스코틀랜드의 명문 에든버러대에 들어간 수재다. 20대 초반에 경제학 박사가 됐으며, 한때는 모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두뇌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다. 그러나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대목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다. 블레어가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정치인이라면, 브라운은 그의 정책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노동당 각료 사무실 가운데 가장 일찍 불이 켜지는 곳도,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곳도 브라운의 사무실이다. 덩달아 일에 시달린 그의 스태프들의 소망대로 브라운은 2000년 봄 늦장가를 갔지만, 여전히 브라운 사무실의 불은 가장 늦게 꺼진다.

    브라운은 언제부턴가 ‘철의 재상 (iron chancellor)’이라 불리고 있다. 대처에게 따라다녔던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별명이 떠오른다. 국민에게 당장 박수 받기 힘든 정책을 꿋꿋하게 밀어붙이는 점에 있어서 브라운은 대처를 닮았다. 그러나 브라운에게는 대처에게 없는 블레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 있다. 브라운의 ‘강성 선택’은 블레어의 화려한 수사학을 통해 영국 국민에게 부드럽게 다가간다. 반면 블레어의 총론은 브라운의 각론을 통해 구체적 힘을 얻는다.

    두 사람의 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BBC 라디오 방송 ‘투데이(영국의 여론주도층은 이 프로그램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이야기되는 영향력 큰 아침 시사뉴스)’를 진행하는 제임스 노허티가 들려준 이야기다. 노허티는 ‘스코츠맨’ ‘가디언’ 등에서 정치담당 기자로 잔뼈가 굵은 언론인으로 블레어와 브라운을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다.

    1983년 6월,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흔히 웨스트민스터로 불리는 영국 하원에 처음 진출했을 때 일이다. 두 사람은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같은 사무실을 사용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의원회관의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한 셈이다. 물론 그곳에는 보좌관도, 비서관도, 여비서도 없다. 창문도 없는 비좁은 공간에 브라운은 자료 파일을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얼핏 보아서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브라운은 하루종일 일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에 비해 블레어의 책상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책상 옆에 세련된 고급 서류가방 하나를 단정히 놓고 깔끔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블레어는 언제든 손님을 맞을 준비가 돼 있는 변호사처럼 보였다.

    블레어의 정치 학습은 대부분 브라운이 제공한 것이었다. 블레어는 브라운이 끙끙거리며 만들어놓은 각종 보고서를 자신의 언어로 간결하게 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블레어는 사람 만나기를 즐겼다. “각종 중요한 모임에 블레어가 빠지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블레어는 항상 인상적인 스피치를 했다. 반면 브라운은 노동당의 각종 위원회에 이름이 빠지는 법이 없는 일꾼이었다. 그리고 브라운은 항상 인상적인 보고서를 남겼다.” 노허티의 말이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두 사람의 특징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블레어가 각론에 약하다거나 브라운의 말솜씨가 형편없다는 뜻은 아니다. 블레어의 국정 파악 능력은 대처 전수상에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다. 주무장관보다 오히려 사안의 핵심은 물론, 수치까지도 더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각료들을 쩔쩔매게 하는 블레어다. 브라운이 입을 열면 주위가 조용해진다. 그의 말에는 힘과 권위가 묻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음으로 해서 시너지효과가 더 커진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토니 블레어는 1953년 5월6일 스코틀랜드 주도(州都) 에든버러에서 변호사 레오 블레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토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블레어 가족은 잉글랜드 북동부에 있는 뉴캐슬로 이사했다. 하지만 레오는 두 아들을 에든버러에 있는 명문 기숙학교 페테스 칼리지에 집어넣었다. 페테스는 엄격한 규율과 기숙생활이 특징인 영국의 전통적인 퍼블릭스쿨.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튼칼리지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퍼블릭스쿨이라면, 페테스칼리지는 스코틀랜드에서 첫손 꼽히는 퍼블릭스쿨이다.

    계급사회적 성격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영국에서 퍼블릭스쿨 출신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다. 가끔 공립학교로도 잘못 번역되는 퍼블릭스쿨은 사실은 1년 학비(등록금과 기숙사 비용 포함)만 2만파운드(약 3700만원)에 가까운 사립학교다. 웬만한 재력이 아니면 자녀를 퍼블릭 스쿨에 보내기 힘들다. 사회적 신분 상승을 기대하고 무리해서 보내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물론 레오가 아들들을 페테스에 보낸 것은 신분 상승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법정 전문 변호사 배리스터(영국에서는 변호사를 법정 변호를 하는 배리스터와 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터로 나눈다)인 레오 블레어는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를 갖춘 영국의 중산층이었다. 그는 한때 에든버러대에서 법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는 13~18세 시절을 에든버러 북부에 자리한 도시 속의 성, 페테스학교에서 보냈다(1966~1971). 토니 블레어는 1955년 노동당 당권을 잡은 휴 가이츠겔 이후 두번째로 퍼블릭스쿨을 졸업한 노동당 지도자로 꼽힌다.

    그 무렵, 고든 브라운은 페테스학교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에든버러대에 다니고 있었다. 브라운이 에든버러대에 들어간 것은 1967년. 유럽과 미국 대학에 거친 폭풍처럼 밀어닥친 68학생운동 1년 전이었다.

    고든 브라운은 1951년 2월20일생. 그는 장로교 목사 존 브라운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목사관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가난하지만 학식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브라운 가족이 그랬다. 존 브라운은 가난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지만, 뛰어난 인품과 설교 솜씨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에든버러 시내가 멀리 내다보이는 작은 도시 커크칼디에서 공립 고등학교를 나온 고든 브라운은 당시 스코틀랜드 시골 수재들이 으레 그러하듯 에든버러대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2년 먼저 대학에 들어가게 된 고든 브라운을 고등학교 선배들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고든 브라운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쪽 눈에도 상처 자국이 남아있다. 고교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선배들과의 럭비 시합 도중 머리에 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첫 해를 거의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브라운은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밤낮없이 책을 읽었다.

    1968년은 질풍노도의 해였다. 그해 여름 파리대학에서 불붙은 학생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상아탑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정희 정권의 강권 정치에 눌려있던 우리나라 대학에는 그 열풍이 미국의 반전가수 보브 딜런과 존 바에즈의 저항 가요 소개로 살짝 비켜갔지만, 1968년은 서구 지성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일대 전환기였다. 68운동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었다. 푸코, 카스트로디아스, 촘스키 등 당대 최고 지성들이 이 질풍노도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1968년 운동에 대한 평가는 마침표를 찍지 않은 상태다.

    고든 브라운은 부끄러움 많은 어린 소년으로 에든버러대에 들어갔지만, 68학생운동 와중에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대학생 정치가로 변모했다. 그는 학생신문 ‘스튜던트’의 편집인으로 대학당국을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이 시기 그는 현재 노동당을 움직이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스타 정치인을 만난다. 블레어 정부에서 첫 외무장관을 지내고 현재 하원의장으로 있는 로빈 쿡과 내무장관을 거쳐 현재 외무장관으로 있는 잭 스트로가 그들이다. 고든 브라운보다 다섯 살 위인 로빈 쿡은 에든버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빨간 머리의 열정적 학생 활동가. 한편 잭 스트로는 68학생운동 당시 잉글랜드 학생위원회 회장 자격으로 스코틀랜드 학생위원회와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에든버러를 방문했을 때, 고든 브라운과 첫 대면을 했다. 현재 영국 노동당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68세대가 주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에든버러의 학생 정치가로 이름을 날린 고든 브라운은 1970년 에든버러대의 렉터(rector)로 선출된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학장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대학생들의 직선 총장 선출 참여문제를 놓고 말이 많았던 학생 총장 또는 학생 학장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대학 행정을 운영하는 주요한 자리라는 점에서 학장이라 번역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브라운은 ‘레드 페이퍼’라는 진보적 색채의 신문을 창간, 스스로 편집인을 맡는 한편 대학원에 진학,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든버러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한 브라운은 그러나 대학보다 현실정치를 선택했다.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 고든 브라운이 학생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토니 블레어는 옥스퍼드에서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블레어는 68학생운동 이후 대학가를 휩쓸던 좌파 학생운동조직과 무관했다. 그는 학생노동조합에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블레어는 ‘흉흉한 소문(Ugly Rumours)’이라는 록 밴드를 이끌고 있었다. 그 무렵 ‘선데이 타임스’에 기고한 옥스퍼드대 좌파 학생운동가의 한 글을 보면 “60년대 세대는 이제 자취가 사라졌다”는 탄식이 나온다. 혁명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 뒤, 록 밴드의 선율이 들리는 대학 캠퍼스의 풍경이 떠오른다. 토니 블레어를 두고 “대학 시절 계집애 꽁무니나 좇던 파티꾼”이라는 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블레어와 함께 옥스퍼드 시절을 보낸 친구 데이드 퍼든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파티에서 항상 인기 만점이었다. 그러나 시계가 밤 1시를 알리고 파장 분위기가 됐을 때 주위를 살펴보면 토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마 그는 몇 시간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파티 다음날 그는 새벽 5시쯤 일어나 단정한 자세로 에세이를 쓰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1983년 웨스트민스터 중앙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노동당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두 젊은 정치인은 무기력에 빠진 노동당을 현대화하겠다며 닐 키녹 당수가 내세운 ‘모더나이저 그룹’의 선두 주자들이었다. 토니 블레어는 1988년 노동당 그림자 내각의 에너지장관, 1989년 그림자 내각의 노동부장관으로 발탁됐다.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토니 블레어는 정계 입문 후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이 말은 고든 브라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브라운은 1987년 그림자 내각의 통상장관, 1989년 통상산업부장관을 맡았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 닐 키녹이 당수직을 사임했을 때 모더나이저 그룹은 브라운 또는 블레어가 당총재 경선에 뛰어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당내 분위기는 존 스미스가 닐 키녹의 후계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39세의 블레어, 41세의 브라운이 당권 경쟁에 뛰어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다. 당수직에 오른 존 스미스는 블레어를 그림자 내각의 내무상, 브라운을 그림자 내각의 재무상으로 각각 임명한다. 재무상과 내무상은 당내 노른자위 자리다. 모더나이저 그룹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블레어와 브라운, 두 사람 중 한 명이 언젠가 존 스미스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점이 자명해졌다. 그리고 그 시기는 스미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앞당겨졌다.

    자신보다 꼭 반 발자국 앞서 가던 고든 브라운의 양보로 1994년 당권을 잡은 토니 블레어는 강력한 당 개혁 드라이브를 펼쳤다. 블레어는 닐 키녹이 모더나이즈라고 부르던 당 혁신을 ‘뉴 레이버’라 칭하고 지금까지의 노동당 정책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블레어는 “새 노동당은 대처 이전의 옛 노동당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전후 노동당의 기조를 이루어왔던 케인스식 경제학, 국유화와 계획경제, 그리고 평등주의에 기초한 사회정책의 포기였다. 더 나아가 블레어는 대처리즘에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떤 점에서 새 노동당은 대처리즘보다도 오히려 더 대처리즘에 충실했다. 블레어는 자유시장 경제,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자유기업 정신을 고양한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웠다. 모두가 대처리즘의 골간을 이루는 요체였다.

    한편으로 블레어는 “우리는 경제학 원리에 의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995년의 한 연설에서 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공공선을 상실할 때, 사회는 파편화하고 분리된다”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보수당의 경제 개인주의에 반대했다. 옛 노동당의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수당의 길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블레어는 선언했다.

    노동당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블레어의 노선에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노동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당의 전통노선에 충실한 옛 노동당과 이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새 노동당 사이의 충돌은 노동당 당헌 4조 개정을 둘러싼 논쟁으로 불붙었다. 옛 노동당은 당헌 4조 개정을 사회주의와의 공식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한 반면, 새 노동당은 이에 대해 사회주의를 국유화와 동일시하는 편협한 해석일 뿐이라고 공박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블레어를 앞세운 당 개혁그룹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당헌 개정을 통해 토니 블레어는 당을 완전 장악했다.

    제임스 노허티의 관찰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는 업무시간의 30%를 고든 브라운과 토의하는 데 쓰고 있다고 한다. 과장이 아니다. 다른 정가 관측통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현 노동당의 의사결정구조는 블레어와 브라운 두 사람이 쥐고 있다는 지적은 하다못해 대학생들이 읽는 영국 정치학 교재에도 등장한다. 매주 목요일 아침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열리는 각료회의는 1시간을 넘지 않는다. 각료회의에 올려지는 현안은 이미 다 해법이 나와있다. 물론 블레어와 브라운 두 사람이 결정한 것이다.

    2001년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태 이후 블레어는 통상적인 각료회의와 달리 매주 전시(戰時) 각료회의를 열고 있다. 전쟁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8명의 각료들 모임이다. 이 회의에 고든 브라운도 참여한다. 물론 전시각료회의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대처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전시각료회의를 한시적으로 상설화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재무상이 전시각료회의 멤버가 된 것은 처음이다.

    두 사람의 정치적 키가 부쩍부쩍 커지는 것과 비례해서, 그 역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각료회의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2000년 봄 내각에서 사퇴한 전 북아일랜드 장관 모 모울램(여)의 비판이다. 그녀는 2001년 11월 BBC 특집 프로그램 ‘프레지던시’에서 “영국 정치는 블레어와 브라운에게 인질로 잡혀있으며, 더욱 불행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균열(rift)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모울램은 또 “토니 블레어는 영국의 총리가 아니라 영국의 대통령”이라며 직격탄을 쏘아댔다.

    모 모울램의 지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당시 북아일랜드공화군(IRA) 지하조직 지도자를 비공식 접촉하는 등, 대담하면서도 솔직한 자세로 영국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준 모울램의 비판은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가진 장점이 언제든지 치명적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녀의 비판은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신권위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1997년 첫 각료회의에서 블레어가 각료들에게 “나를 토니로 불러주세요(Call me Tony)”라고 말했을 때 국민들은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젊은 정치인다운 비권위주의적 발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울램의 비판이 맞다면, 블레어의 ‘토니’ 발언은 엄숙해야 할 국정토론의 장인 각료회의를 사모임으로 격하시키는 상징조작으로 볼 수도 있다.

    블레어 정부의 국정 운영을 신권위주의로 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비판이 있다. 첫째는 토니 블레어의 내부 그룹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다. 이 비판의 골자는 국정이 공식 각료회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블레어의 이너 서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토니 블레어의 국정 운영 스타일이 전통적 영국 총리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학자 헤네시는 블레어의 국정운영이 총리직보다 대통령직 수행에 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 셋째는 블레어 노동당 정부의 의사결정구조가 블레어와 브라운 두 사람에게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 뒤집어 생각해보면, 위와 같은 사항들이 블레어 정부의 단점으로만 작용해온 것 또한 아니다. 토니 블레어는 한 인터뷰에서 “쟁점도 결론도 없이 표류하는 각료회의 운영이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마디로 각료회의 이전에 자신은 공부를 많이 하고 온다는 이야기다. 현 다우닝가 10번지(블레어)와 11번지(브라운)의 관계가 역대 어느 정부의 총리와 재무상보다 잘 맞는 강팀이라는 것은 블레어 진영에서도 브라운 진영에서도 인정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영국 국민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블레어가 공식기구 이외에 내부 그룹에 많이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메이저 당시보다 2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인원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의 크기에 있다. 블레어의 핵심 측근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피터 만델슨을 들 수 있다. 그에게는 항상 토니 블레어의 친구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어둠의 황태자’라는 좀 끔찍한 별명도 가지고 있다. 블레어 그룹의 핵심을 두 사람 꼽으라면 피터 만델슨 이외에 알레스테어 캠벨을 거론할 수 있다. 캠벨은 언론담당비서다. 영국 언론에서 “다우닝가 10번지에서는…” 또는 “블레어의 측근은…”이라고 하면 대부분 캠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때로는 “블레어의 스핀 닥터(spin doctor, 사실을 왜곡하는 명수라는 뜻)”라 불리기도 한다.

    피터 만델슨과 알레스테어 캠벨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점은 플리트가에서도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들만큼 언론에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없다. 어떤 점에서 보면, 토니 블레어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고 완화시키는 스펀지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캠벨은 타블로이드 언론인 출신. 그는 다우닝가 10번지의 대변인이자 블레어 정부의 대 언론정책을 책임지는 사령탑이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언론 이외에 국정 전반에 그의 입김이 묻어 있다고 보고 있다.

    피터 만델슨은 캠벨보다 훨씬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다. 그는 새 노동당의 이념을 설계한 입안자로도 알려져 있다. 만델슨은 노동당 모더나이저 그룹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94년 고든 브라운을 버리고 토니 블레어를 선택했다. 당시 정가 관측통들은 피터 만델슨의 치밀한 작전에 의해 선두주자로 꼽히던 고든 브라운은 대세가 불리함을 직감하고 토니 블레어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이야기한다. 블레어 쪽에서 보자면 최고의 정치 참모가 제 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요, 브라운 편에서 보자면 크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피터 만델슨은 블레어 정부에서 두 번 장관을 지냈고, 두 번 모두 정치 스캔들에 연루돼 불명예 퇴진했다. 그때마다 영국 언론은 ‘어둠의 황태자’의 낙마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블레어의 유력한 후계자 한 명이 일찌감치 퇴진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추락이 브라운 그룹의 폭로와 견제 때문이었다는 암시를 슬쩍 끼워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만델슨은 노동당 모더나이저 그룹의 핵심 멤버 중 막내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만델슨이 북아일랜드 장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지역구 활동에만 전념할 것이며, 앞으로 중앙 정치무대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델슨이 ‘주방 내각(kitchen cabinet, 총리와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내부 그룹)’을 떠났다고 믿는 정가 관측통은 아무도 없다. 토니 블레어가 2001년 11월 만델슨을 영국과 적대관계에 놓여있는 시리아에 보내,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 그 단적인 예다.

    2001년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태 후, 블레어의 행보에는 부쩍 힘이 붙었다. 아울러 그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대한 비판도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전까지 언론의 블레어 정부 비판이 주로 블레어 내부 그룹을 향한 것이었다면, 9·11 이후에는 블레어에게 직격탄을 쏟아대는 새 양상을 보이고 있다. 블레어의 전쟁 지도자 역할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혼재해 있다. 찬성론자들은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블레어의 발빠른 행보가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본다. 이러한 분위기가 영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반대론자들도 전쟁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인정한다. 물론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장삼이사 영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고, 영국 군대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한다. 그러나 힘 있는 비판론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블레어의 전쟁 참전 결정이 아니라 과속 질주다.

    2001년 10월 영국의 보수 언론들은 블레어에게 브레이크를 밟을 것을 주문했다. 영국 총리의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블레어에게 세계총리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이 이 무렵이다. 칭찬이 아니었다. 세계의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던 대영제국 시절 팔머스톤 총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 좀더 짓궂은 언론은 블레어가 미국총리냐고 이죽거렸다.

    2001년 11월 BBC 방송은 블레어에게 대통령 같은 총리라는 의문부호를 붙여주었다.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당시 앤서니 에덴 총리가 내각 동의 없이 독단으로 이집트를 침공, 전쟁에도 실패하고 그 자신도 총리직에서 물러난 실패담, 1982년 아르헨티나에서 벌인 포클랜드 전쟁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가 내각의 여론을 수렴해 전쟁에 승리하고 이후 정치 기반을 굳건히 한 성공담 등을 블레어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과 넌지시 비교하기도 했다.

    불문법의 나라답게 영국에서는 총리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명문화한 법규정이 없다. 물론 총리가 행정 수반이고, 입법과정과 정책결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왕정체제에서 각종 왕립단체의 행정 및 단체장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규정에 나와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를 대표해 G7회의, 4개의 유럽평의회, 그리고 영연방회의 등 정례회의와 비정례 정상회담을 갖는 것도 주요 역할이다. 사실 블레어는 집권 이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코소보 문제, 중동 문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등 국제문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일이 총리의 고유 업무인지에 대한 규정은 찾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토니 블레어가 국제 정치무대에서 영국 총리의 새로운 역할 모델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고든 브라운이 국내 경제문제를 꼼꼼히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란 점이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떠나 역할 분담에 관한 한 거의 흠잡을 데 없는 팀워크라 할 수 있겠다.

    블레어와 브라운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모울램의 주장은 호수 위에 돌을 던지듯 2001년 연말 영국 정가에 잔잔한 파문을 던졌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블레어와 브라운은 둘 사이에 아무 갈등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고 언론도 이 문제를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수백년 역사를 가진 영국 의회 민주주의의 두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모울램의 경고 사인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디펜던트지다. 이 신문은 11월19일 1면 톱으로 차기 총리직에 관한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는 한편, 두 사람의 정책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디펜던트지의 분석에 따르면, 블레어는 차기 총선 이전에 유로 가입을 지지하는 반면에 브라운은 차기 총선 이후로 유로 가입을 미루겠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블레어는 국가의료보험제도(NHS)에 예산 투입을 원하는 반면, 브라운은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아울러 이 신문은 사설을 통해 자신들은 토니 블레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영국의 권위지가 두 사람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기사였다.

    그동안 언론이 양측의 갈등을 암시한 적은 있어도 이를 분명하게 밝힌 적은 없었다. 이 기사가 나온 다음 날 이번에는 가디언지가 뒤를 받치고 나섰다. 가디언지는 두 사람의 정책 차이보다 이들에게 쏠리는 권력의 지나친 비대화를 경계했다. 가디언지는 두 사람을 “영국을 움직이는 두 명의 황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을 축으로 한 노동당 정계지도를 그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더 타임스지는 고든 브라운을 인터뷰했다. 2002년 예산보고서에 대한 심층 인터뷰였지만, 관심은 역시 두 사람의 갈등에 맞춰져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고든 브라운은 자신이 반(反)유로파처럼 취급된 인디펜던트지 기사를 겨냥한 듯 자신은 유로 가입을 지지하는 친유로파임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토니 블레어의 말 중에서 내가 반대하는 대목은 단 한 단어도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둘 사이에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어떤 이견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정계 입문 후 토니 블레어는 최고의 친구”라는 이야기도 했다.

    블레어는 11월 마지막 수요일 웨스트민스터 하원의사당에서 열리는 총리 질문시간을 통해 브라운에게 화답했다. 블레어는 “유럽 어느 나라 재무상도 우리나라 재무상과 같은 고성장률과 저실업률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브라운을 추켜세웠다. 바로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브라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현실 정치인인 이상 그들에게 정치적 야망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토니 블레어가 고든 브라운을 위해 단지 둘 사이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만약 그런 약속이 있었다면) 2005년 총선 전에 총리직을 양보한다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것을 우정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에게 총리를 맡겨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가 된다면 블레어가 이를 거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94년 블레어에게 대세가 흘러가자 브라운이 그것을 수용한 것처럼. 우정과 경쟁은 이런 점에서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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