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난초 기르는 즐거움을 아십니까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입력2004-11-17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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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 이병기 선생은 살아생전 ‘난(蘭)’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한편 유교는 “지초(芝草)와 난초는 숲 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고 가르쳤다. 예로부터 사군자의 하나로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아온 난은 흔히 군자나 선비, 은자에 비유되며 우리 문화에 그 향기를 면면이 전해왔다.

    한편 우리나라 재생(再生)신화인 마야고(摩耶姑) 신화에는 ‘풍란’의 유래가 담겨 있다. 지리산의 성모신(聖母神) 마야고가 사랑하는 반야(般若)를 위해 옷을 지었는데, 반야가 쇠별 꽃밭으로 가버리자 화가 난 마야고는 반야를 위해 지은 옷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 실오라기가 바람에 실려가다 나무에 걸려 자란 것이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풍란은 동양란에 속하는데 난은 자생지에 따라 크게 동양란과 양란(서양란)으로 구분된다. 동양란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주로 아시아의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난초과 식물을 일컫고, 양란은 열대와 아열대에서 자라는 난초과 식물을 통틀어 일컫는다. 양란은 원래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지만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수많은 품종개량이 이루어진 까닭에 ‘양란’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동양란으로 춘란·한란(심비듐속), 석곡(덴드로븀속)과 풍란(네오피비티아속)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양란은 카틀레야(Cattleya), 시프리페듐(Cypripedium), 덴드로븀(Dendrobium), 심비듐(Cymbidium), 온시디움(Oncidium), 밀토니아(Miltonia), 팔레놉시스(Phalenopsis), 반다(Vanda) 등이 있다. 이들 양란의 종류는 현재 세계 난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다.





    방을 휘감는 난의 향기


    난에 얽힌 고사나 전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올 만큼 난초의 자생지는 양극 지방을 제외하고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해 있다. 한국조직배양연구소 유인서 소장에 따르면 자생란을 포함해 현재 전세계적으로 7만여 종의 난이 등록돼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품종개량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등록되지 않은 난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종에 이를 정도로 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한국의 자생란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40여 속 10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난을 조직적으로 배양해 신품종을 개발하는 유인서 소장같은 사람. 즉 난을 직접 기르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애란인’ 또는 ‘난우’라고 부른다. 이들이 뭉쳐 만든 애란회 또는 난우회는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이름으로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각 동호회의 회원 수 또한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의 꽃말이 ‘미인’이듯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인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난에 빠져들고 한번 심취하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난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조금 넘었다는 이희배(농협 둔촌동지점장·농협난우회 회원)씨가 난에 빠지게 된 것은 향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협 평직원으로 근무할 때 제가 근무하던 지점의 지점장님이 난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 분 방에 들렀는데 창가에 놓인 난 화분에서 풍기는 꽃 향기가 방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관음소심’이라는 중국 난이었는데 지금도 그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난의 향기에 매료된 그는 난 전문가로 소문난 난우회 선배를 소개받아 술을 사주면서 장장 3시간에 걸쳐 난에 대해 배웠다.

    “얘기 도중 선배가, 아무리 노력해도 난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자기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말에 오기가 동해서, 5년 후에 제가 선배님을 실력으로 따라잡겠다고 큰소리쳤지요.”

    이씨는 집 베란다를 온실로 꾸며 한란과 춘란 등 600분을 기르고 있다. 그는 “난을 통해 참을성과 인내를 배운다”면서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난의 세계”라고 말했다.

    “어떤 난우를 통해 들은 얘기인데, 부산에 계시는 스님 한 분이 난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을 키우다보니 소유욕이 발생하고, 어느 날 문득 스님이 깨달았다는 거지요. 난에 자신이 잡혀 있다고 말입니다. 그 길로 스님은 기르던 난 분을 하나도 남김없이 난우들에게 나눠주고 아예 난과 인연을 끊었다고 합니다.”



    자신처럼 난에 빠진 사람한테는 그 스님의 행위가 해탈로 보인다는 이씨도 난이 자신을 구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겨울여행에서 돌아와보니 난이 여러 개 죽어 있었습니다. 애들에게 베란다 문을 시간 맞춰 여닫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만 깜빡해서 동사했던 겁니다. 그후로 지금까지 절대 부부동반 겨울여행은 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난이 저를 구속하는 경우가 많아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아직 스님처럼 해탈이 안됩니다. 가슴에서 난을 피우고 지우면서 난을 닮아가려 하는데 수양부족인지 어렵습니다.”

    경남 마산 한우리난우회 총무 이춘호 씨는 17년 동안 난을 길러왔다. 현재 300분의 난을 기르고 있는 그는 “언뜻 보아서는 비슷한 것 같지만 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성이 다 제각각입니다. 난마다 꽃과 잎의 무늬가 하나하나 다 다르기 때문에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무아지경에 빠집니다”라고 고백한다. 야생란을 캐기 위해 전국의 산으로 ‘탐란(난 탐사)’을 다니다 몇 번 ‘공탕(허탕)’ 끝에 최초로 난 하나를 캤을 때, 그는 캐온 난을 심어놓고 밤새 지켜보며 술을 마셨다.

    “아마 그 기분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희국(대구난협회 회장)씨는 집에 온실을 만들어 500여 분의 난을 기르고 있을 정도로 난 애호가다. 그는 특히 한국의 자생 춘란에 푹 빠져 있는데 그 가운데 변이종에 특히 매료되어 있다.

    “난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변이종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신아(새싹)가 올라올 때 그 꽃과 잎의 무늬나 색깔, 모양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대충 짐작하더라도 다 자랐을 때 뜻밖의 변이종이 생겨나 화려하게 변신하는 걸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임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가장 고고한 아름다움이며

    환희의 새봄을 여는

    청아한 5월의 아침나절에

    봄을 안고 걷는

    아리따운 여인의

    감미로운 미소여서

    인생의 풍요로움과

    향기로움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가고픈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어라

    ‘난 박사’로 불리는 경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원예학과 정재동 교수는 ‘난지예찬(蘭芝禮讚)’과 여러 권의 난 관련 책을 낼 정도로 우리나라 야생란의 대가다. 정교수는 대학시절 전공시간에 식물조직배양을 하다 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조직배양실험을 할 때 재료로 난이 많이 쓰였습니다. 실험 때문에 자주 접하다 보니까 이걸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30여 년간 난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현재 야생란 10여 종과 품종별 춘란 50여 종을 기르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심산유곡에 터를 잡고, 천년을 두고 누구하나 찾아들지 않아도 몸가짐 하나 흐트리지 않고 우려 품어내는 그 기품의 뜻을 어찌 알겠냐는 말로 난의 매력을 얘기한다.

    영어로 ‘오키드(orchid)’인 난의 명칭은 그리스어 ‘orchis(고환)’에서 유래됐다. 이는 난초의 덩이뿌리가 마치 남성의 고환과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인서 소장은 “난의 형태미를 보면 식물 중 인체와 가장 많이 닮았다”면서 “뿌리가 남성 성기를 닮았다면, 꽃이 핀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여성의 성기 모양과 흡사한 것도 있다”고 설명한다. 감상의 경지가 이 정도에 다다른 애란인이나 초보 난 애호가를 구분하지 않고 우여곡절의 사연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산채(야생란 채집)’와 ‘경매’다.

    “탐란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엔 경험자들이 말하는 변이종 밭뙈기에 대한 동경도 많았지요. 줄창 다리품을 팔고 다녀도 산반(잎 전체에 빛살무늬가 있는 난을 말함) 한 촉 만나질 못한 다음에야 만만한 핑계감이 장소 탓일 수밖에 없는 게 초심자들의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심심찮게 하는 질문이 채란지 안내요청이고 채란요령에 관한 질문들이니 그 답답한 마음이야 제가 경험해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란 경력이 붙는다 해도 연이은 공탕 행진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 산채인들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농협난우회 한 애란인의 경험담이다.

    애란인들에 따르면 최근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탐란에 나서고 무차별적으로 난을 채집하는 바람에 예전처럼 야생란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이 가운데 변이종이나 희소가치에 따라 천정부지로 값이 뛰는 난을 전문으로 채취해 파는 ‘산채꾼’들이 있다. 한편 곳곳의 국토개발로 야생란이 서식할 수 있는 야산이나 산들이 많이 깎여 나간 것이 채집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흔히 종류별로 난의 자생지를 알려주는 ‘정보리스트’가 애란인들 사이에 많이 나돌지만 그것마저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명산(난이 자생하기 적합한 산)에 명품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라는 것. 때문에 채란에 나선 사람들이 명산이 아닌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희귀한 야생란을 발견하면 그 기쁨은 몇 배로 커지고, “난 봤다”는 외침이 산삼 발견에 비유된다.

    이희배씨는 관음소심의 향에 반한 뒤 혼자 책을 파고들며 독학으로 난을 공부했다. 당시 주말이면 그는 밤열차를 타고 전국으로 산채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초창기에 전라도 정읍이나 장성 쪽으로 많이 갔습니다. 서울에서 밤열차를 타고 새벽 4시경에 장성에 도착하면 여관에 들러 잠깐 눈 붙인 뒤 택시를 대절해 무작정 나섭니다. 시골길을 달리다 산세를 보고 차를 세우죠. 난은 산세가 높은 곳 외에 야산에서 자라는 것들도 있어 이름 없는 시골동네 산까지 구석구석 안 뒤진 데가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 야산에 내렸는데 나중에 택시기사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려니까 그 동네 지명을 모르겠더라고요.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아저씨 간첩이냐고 되물어요. 시골동네 뒷산을 어슬렁거리다 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찰에 잡혀간 적도 여러 번입니다.”



    ‘소심(춘란의 일종)’ 채집까지 6년이 걸렸다는 이씨의 말이다.

    “춘란은 중투, 복륜 등 꽃과 잎의 색깔과 무늬에 따라 여러가지 변이종이 있습니다. 그중에 소심을 꼭 채집하고 싶은데 유독 이게 눈에 띄질 않아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라도 광주 근교 어등산에서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감격에 겨워 동행했던 지인과 그날 밤새도록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그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한다.

    산채에 있어 ‘공탕’은 초보자든 경력자든 열에 여덟 번은 으레 겪는 일로 치부해야 한다. 오랜 경험을 쌓은 경력자는 산행을 겸해 여유 있게 산채를 다니는 반면 초보자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서지만 채란은 쉽지 않다.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오래 난을 기르면 산채의 기대나 공탕의 허탈함에서 비로소 초연해진다.

    한편 애란인들에 따르면 ‘경매’ 또한 초보자와 경험자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입을 모은다. 이희배씨는 처음 난을 수집하면서 아내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월급쟁이 봉급은 빤한데 그걸 축내 아내한테 핀잔을 들으면서 난을 수집했습니다. 10만원에 산 걸 만원에 샀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많이 했지요. 아내 눈에 그깟 풀 한 포기를 몇만원씩 주고 샀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나중에 안되겠다 싶어 아내를 난 경매장에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난이 몇십만원에 팔리니까 그때서야 우리집에 있는 난이 돈덩어리가 아니냐며 이해를 하더군요. 지금이야 초창기만큼 경매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이씨의 아내는 그날 이후 난을 정성껏 돌보는 ‘관리인’이 됐다고 한다.

    “어느 날 기가 막힌 변이종이 경매에 나왔는데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못냈습니다. 빈손으로 오자니 난이 눈에 밟혀 영 발길이 안 떨어지더군요. 다음 번엔 집에서 키우던 난 중에서 품질이 좀 떨어지는 몇 개를 내다 팔고 그 돈으로 경매에 나온 좋은 난을 사곤 했지요. 한 10여 년 지나니까 경매에 놓쳐도 저건 내 것이 아니구나 하고 단념이 되더군요. 여유가 생긴 거지요.”

    한우리난우회 이춘호씨의 말이다.

    유인서 소장에 따르면 난의 가격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한 촉에 몇천원부터 많게는 수억원대를 호가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품종이 귀할수록, 또 희귀한 변이종일수록 가격이 매우 비싸집니다.”

    정재동 교수에 따르면 재배종 한국춘란의 경우 꽃을 기준으로 적색·주황·자색·황색 순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적색 중에서도 부판 배열이 일직선이고 꽃잎이 둥글며 크기가 다소 큰 것이 좋은 것으로 취급된다.

    난 꽃은 작은 것에 비해 크기가 클수록 명품으로 꼽힌다. 또 잎에 무늬가 있는 것일수록 좋은 난으로 취급되는데, 이 가운데 잎 가장자리가 녹색이고, 가운데는 투명한 색깔을 띠는 ‘중투’가 제일 좋은 품종으로 꼽힌다. 잎의 무늬가 자라면서 그대로 꽃에 들어오는 것을 ‘복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꽃과 잎의 무늬를 같이 즐길 수 있다. “잎과 꽃에 무늬가 있는 반면 꽃잎에 붉은 선이 없고 설점(입술꽃잎점)이 없는 건 ‘중투화소심’으로 한 촉에 천만원이 넘어갑니다.” 한편 난 경매장에서 ‘희귀종은 부르는 게 값’이다.

    난 세계를 보면 꽃이 형편없을 수록 향기가 짙다. 꽃이 아니면 향기로라도 관심을 끌게 한 걸 보면 조물주가 공평한 것 같다는 유인서 소장은 “생활이 각박해지고 급하게 돌아가면서 동양란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차츰 줄어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양란에 비해 꽃이 화려하지 않고 대체로 청아한 느낌을 주는 동양란은 단번에 사람들 눈길을 끌지는 않습니다. 그에 비해 즉흥적이고 화려함에 길들은 요즘 사람들은 양란에 눈길을 많이 주지요.”

    난은 생육환경이 맞지 않으면 꽃을 피우기 어렵다. 때문에 몇 년에 걸쳐 꽃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유소장은 “난은 정성을 주는 만큼 꽃과 향기로 보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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