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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에 맹세코 나는 최교수를 죽이지 않았다”

최종길 교수 조사한 車鐵權 전中情수사관 최초증언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천지신명에 맹세코 나는 최교수를 죽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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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길 교수 건을 인지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1971년 1월인가 2월쯤 서독으로 유학 가 경제학을 공부한 A씨가 귀국 직전, 서독 주재 우리 대사관에 찾아와 자기는 북괴에 포섭됐다며 자수해왔는데, A씨에 대한 심사(審査, 차씨는 수사공작과에서는 수사나 조사라는 용어 대신 심사라는 용어를 썼다고 강조했다)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자수한 간첩은, 관련법에 따라 면책 처분을 받게 돼 있으므로 혐의점이 있어도 기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혐의점을 밝히기보다는 그가 진짜로 자수한 것이냐 위장 자수한 것이냐를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가 진짜로 자수했다면 우리에게 협조할 것이므로, 그의 협조 정도를 검증하는 데 노력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심사하며 저는 그에게 ‘서독 유학기간 당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북한에 갔다왔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스무 명 정도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최종길 교수였습니다. A씨와 최교수는 ㅇ시의 ㅈ고 동창이었습니다. A씨는 ‘최교수는 나보다 먼저 서독으로 유학 가 법학을 공부했다. 최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소리로 “곧 귀국하게 되는데 나는 서독으로 유학 온 것을 후회한다. 너도 조심하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A씨는 여기서 ‘최교수도 십중팔구 나와 같은 처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A씨로 하여금 자필로 진술서를 작성케 한 후 이를 존안(存案) 파일로 보관했습니다.”

-왜 바로 심사에 착수하지 않고 존안처리 했습니까.



“당시 진행하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닥친 일이 많아, 상부에는 이런 첩보가 있다는 보고만 하고 존안처리해버렸습니다.”

-그런데 2년6개월이 지난 1973년 가을, 그 존안자료를 다시 꺼내셨군요.

“존안자료를 다시 꺼낸 것은 제가 아닙니다. 1973년 4월쯤 서울 시내의 대학가에서 산발적인 데모가 있었는데, 특히 서울대의 데모가 심했습니다. 그때 수사1과에서 구라파 간첩단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었는데, 위에서 최교수에 관한 존안자료를 수사1과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저는 ‘잘됐다’는 심정으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10월초쯤 상부에서 최교수 건은 우리 과에서 심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냄과 동시에 존안자료가 되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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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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