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노풍! 左·革·北 3각 파도 넘을 수 있나

색깔론과 2002 대선

  • 유창선 < 시사평론가·사회학박사 > yucs1@hanmail.net

    입력2004-09-03 11: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노풍은 색깔론을 돌파할 수 있을까. 일단 현재까지는 승산이 높다. 이인제 후보가 제기한 ‘좌파시비’를 너끈히 이겨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후보의 앞에는 더욱 강한 ‘상대’가 버티고 있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은 노풍을 잡기 위해 융단폭격식 이념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4월7일 인천전문대 실내체육관. 민주당 경선에서 선두를 다투고 있는 이인제, 노무현 두 후보간의 난타전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영부인이 남로당 선전부장으로 7명의 고위전사를 살해하는 현장을 지켜봤고 전향하지 않고 사망한 사람의 딸이라면, 우리나라의 정통성과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국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쳐선 안됩니다.”(이인제)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습니다. 이런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그러면 대통령 자격이 생기는 겁니까?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심판해 주십시오.”(노무현)

    가장 민감한 부분을 놓고 전개된 원색적인 공방이었다. 현장을 지켜본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제 상황은 당내경선의 금도를 넘어섰다”고 입을 모았다. 여야 대결도 아닌 당내에서 치러지는 경선에서 이런 식으로 치고받는 모습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회장 기자실을 지키고 있던 한 당직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다. “이건 경선이 아니라 전쟁이야”.

    그렇다. 민주당 경선 안팎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다. 후보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낱낱이 들추어졌다. 거기에는 묻어두고 싶었던 개인사도 있고, 민족의 아픈 역사도 있다. 어디까지 ‘검증’이고 어디부터 ‘검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인지 따져볼 겨를조차 없다. 이런 현장을 두고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교과서식 얘기를 떠올리기에는 얼굴이 뜨거울 정도다. 12월 대선을 향한 이념전쟁은 그렇게 불붙고 있었다.



    민주당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색깔론에 기름을 부은 것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좌파적 정권’ 발언이었다. 이후보는 4월3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지금 급진세력이 좌파적인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이후보는 같은 날 열린 강연회에서 “볼셰비키혁명과 나치 출현 등은 당시 대중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에 바탕을 두었으나, 방향을 잘못 잡아 역사를 거꾸로 가게 하고 인류를 고통과 파괴로 몰아가게 했다”면서, ‘노풍’을 볼셰비키혁명에 비유하는 이념적 적의를 드러냈다.

    예상보다 빠른 공격이었다. 민주당에서 노무현 후보가 선출될 경우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가 대선정국을 보혁구도로 몰고갈 것이라는 예상은 나왔지만, 그래도 경선 출마선언부터 강도 높은 색깔공세로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노무현 후보를 급진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보수세력의 결집을 통해 대선을 치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둘째, 그같은 보수세력 결집의 구심이 이후보 자신임을 선언한 것이다. 당내에서 ‘이회창 필패론’이 제기되고 최병렬 후보가 ‘원조보수론’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보혁구도 형성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의지표명이 필요했던 셈이다. 이같은 급격한 보수선회 모습에 당 안팎의 역풍이 거세게 일자, 이회창 후보는 ‘국민대연합론’을 다시 꺼내놓으며 ‘건강한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모두 껴안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게중심은 역시 12월 대선을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고가겠다는 쪽에 쏠려 있다.

    이회창 후보의 발언으로 이제 색깔론은 민주당 경선의 틀을 넘어 정치권 전체의 논란거리로 확대됐다. 양상은 매우 복잡하다.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 한나라당은 노무현 후보를 향해 색깔공세를 퍼붓고 있다. 거의 양자간 연대수준이라 할 만큼의 협공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내의 이부영 후보를 비롯한 개혁파는 색깔론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색깔론에 관한 한 여야간의 경계가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네티즌은 인터넷에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이인제와 이부영을 트레이드하라”는 글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가세하고 있다. 김총재는 노후보의 등장이 보혁구도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환영하면서도, 노후보의 이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정말 복잡한 구도다. 그동안 지역과 인물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던 정당구도에 이념이라는 변수가 출현하면서 대선구도가 재편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내 보수파 결집체인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의원 모임’(회장 김용갑)은 4월11일 이회창 후보 지지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한나라당이 좌파세력을 차단하고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후보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좌파세력이 노후보를 가리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는 노후보의 사상문제에 대한 거친 의견들이 쏟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김용갑 의원은 “노후보의 과격성과 친북성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많았고,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는 우려까지 나왔다”고 말했으며, 다른 참석자는 “‘명백한 친북인사’, ‘급진 좌경세력’이라는 의견과 ‘사고가 의심스럽다’는 말도 나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요즘 사석에서 ‘노무현은 빨갱이’라고 말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본선에서는 그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얘기다. 안기부 출신의 정형근 의원은 “노후보는 나에게 맡겨달라”며 ‘노무현 저격수’를 자임하고 나섰다. 노후보가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경우 올해 대선정국에서 그를 향한 한나라당의 색깔공세가 강도높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움직임들이다.

    그동안 민주당내에서 이인제 후보가 전개한 이념공격은 주로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대체로 “노무현 후보는 유럽 좌파보다도 더 급진적”이라는 식의 공세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좌우논쟁을 넘어 친북논쟁으로 몰고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말한 ‘좌파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가치문제에서 북한에 유화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 좌파적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혀, ‘좌파적’이라는 용어를 ‘친북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드러냈다. 이렇게 되면 12월 대선의 이념논쟁은 좌우논쟁을 넘어 친북논쟁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색깔론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이인제 후보다. 국민경선을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고간 그를 바라보는 민주당내의 시선은 곱지 않다. 페어플레이의 원칙을 깼다는 지적이다. 이후보는 왜 비난을 감수하면서 경선 도중에 색깔론을 제기한 것일까.

    그 해답은 경선 이후의 장기적 포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중권 후보의 사퇴 직후 음모론을 제기하며 경선포기까지 결심했던 이후보가 이를 번복하면서 내놓은 것이 이념대결 선언이었다. 이것은 경선의 승패에 관계없이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였다.

    최근 이후보는 노후보가 승리해도 협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4월8일 한 방송인터뷰에서 “노후보가 대선후보가 되면 본선에서 지원할 것이냐?”는 질문에 “미국 공화당 예비경선에서도 존 매케인 후보가 보브 돌 후보에게 패한 뒤 지원연설을 하지 않았다”면서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니, 이인제에게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이후보는 “노 후보는 급진좌파 노선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노선을 가야 하고, 나는 중도개혁 노선을 걸으면서 당에 헌신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질적인 경선불복인 셈이다. 이후보는 지금 이념노선의 차이를 드러내며 명분을 쌓고 있는 중이다. 민주당은 중도개혁정당인데 노후보가 급진적인 방향으로 몰고가고 있으므로 협조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결국 경선이 끝난 뒤 이후보는 독자출마 여부와 상관없이 노후보와는 다른 진영에서 대선을 치를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노후보가 경선 이후 정계개편을 추진할 경우 이후보는 “당의 정체성을 거스르고 싶으면 민주당을 떠나서 하라”고 요구하며 당내투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만약 노후보가 민주당을 지키면서 정계개편을 추진할 경우에는 이후보가 당을 떠나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반(反)노무현 보수연합 정계개편’의 추이와 맞물리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포석 위에서 진행된 이념공세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내에서는 극단적인 색깔론에 대한 역풍이 불었다. 노후보의 과거발언이나 장인의 좌익활동 문제 등을 기초로 이념대결을 전개했던 이후보도 결국 정책대결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이후보가 노후보에게 주적론(主敵論)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한 것은, 정책적 차이를 부각시켜 결별의 불가피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노후보는 3월10일 ‘SBS-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처음 추월한 이후, 지지율 격차를 계속 벌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한 가지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노후보가 지지율에서 월등히 앞서면서도 당선 가능성에서는 이후보가 우세하다는 점이다. 노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지만, 12월 대선에서는 이후보가 승리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다.

    4월1일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에서 노후보는 이후보를 45.3% 대 34.6%로 10.7% 포인트 앞섰다. 그러나 ‘누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는 이후보 응답자가 35.3%로 노후보의 18.6%보다 많았다.

    3월27일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전화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노후보는 52.3%의 지지율로 이후보의 35.2%를 17.1%나 리드했다. 그러나 당선가능성에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40.9%로 민주당 후보 34%보다 높았다.

    이런 현상은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노풍의 위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이회창 후보의 당선가능성을 더 높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국정치에는 두터운 보수의 벽이 존재한다’는 통념, 그리고 ‘과연 노후보가 보수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유권자의 의구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색깔론이 정치권 전체로 확산된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노풍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격화되는 이념공세 속에서도 노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질 기미는 없고, 오히려 소폭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화일보’와 ‘YTN’의 4월 정기여론조사에서 노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56.2% 대 29.5%로 이겼다. 조사를 앞두고 이인제 후보와 한나라당이 1∼2주일 동안 집중적인 이념공세를 퍼부었음을 감안한다면, 결국 이념공세가 노후보의 지지율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노후보는 이후보의 색깔공세가 집중되었던 시기에 보수적 색채가 짙은 강원 대구 경북지역 경선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후보가 나름대로 보수의 벽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진보적 정치인은 당선될 수 없다’는 그간의 통념과, 노풍이 이념공세를 견뎌내고 있는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 상황까지 온 것만 해도 우리 정치가 엄청나게 변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노후보 지지층을 분석해보면 노후보가 이념공세에 대한 내성(耐性)을 키워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름대로 근거있는 주장임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3월23일 여론조사에서 노후보는 이회창 후보와 맞대결했을 경우 30대, 사무노동자, 대학재학 이상 학력자, 월소득 151만∼300만원, 호남지역 등에서 각각 50%씩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연령에서 젊은층, 직업에서 회사원, 학력에서 고학력자, 소득에서 중산층이 노풍의 진원지라는 얘기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치의식이 높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념공세에 따라 쉽게 생각을 바꾸는 층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후보측에서 색깔론이 노풍을 꺾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에서 소개한 ‘문화일보’ 조사에서는 향후 이념대결의 추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올해 대선에서 진보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가 71.7%에 달한 반면, 보수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는 17.5%에 그쳐 우리 사회의 보혁 이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진보’의 개념이 이념적인 기준이라기보다 새로운 인물을 선호한다는 뜻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만, 그래도 국민의 70%는 보수라는 통념과 거리가 먼 셈이다.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는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7대3”이라며 자신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해왔다. 흩어져 있는 보수세력을 결집하면 7대3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나라당 안팎의 보혁구도론자들은 보혁대결이야말로 노풍을 잠재울 수 있는 필승전략이라고 믿는다. 한국사회는 그래도 보수층이 다수이며, 보혁구도를 통해 보수층의 안정희구 심리를 발동시키면 결국 최종 승리는 보수의 것이라고 이들은 확신한다.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 보수파 의원들은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내 보수파의 대표격인 김용갑 의원은 “설문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결과는 상식을 뛰어넘는 위험한 조사”라며 “보수가 다 없어졌다는 얘기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식은 변화하고 있는데 보수파 국회의원들이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은 8개월의 과정은 이를 분명하게 가려줄 것이다.

    노후보를 향한 이념공세는 현재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노후보가 이념공세의 파고를 완전히 넘었다고 볼 수도 없다. 아직까지는 예선에서의 공방에 불과했고, 12월 본선을 향한 진짜 승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본선을 생각한다면 노후보의 대응방식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논란이 된 과거발언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한 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거나 “생각이 달라졌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있는 점이다. 이인제 후보가 문제삼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재벌해체’ ‘재벌주식의 노동자 분배’ 발언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 서명 등에 대해, 노후보는 “지금과는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재는 생각이 다르다”고 말했다.

    둘째, 감성적 대응방식이다. 이인제 후보가 노후보 장인의 좌익활동을 문제삼고 나섰을 때, 노후보는 “그러면 나보고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는 식의 감성적 호소로 상황을 돌파했다. 이것은 노후보 진영이 논리나 정책보다 정서적 접근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후보가 국가보안법 폐지론처럼 일관된 생각을 보이는 사안도 있지만, 대체로 ‘방어’의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노후보가 생각보다 일찍 이념공세를 만나 부담을 느낀 탓이다. 노후보는 당내경선에서 이후보가 원색적인 색깔론을 전개한다거나, 예선이 끝나기 전부터 한나라당의 공세가 시작되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념공세를 막다보니 ‘불끄기식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수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포지티브한 정책노선으로 전환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민주노동당이 정치권의 이념공방에 대해 내놓은 성명은 눈길을 끈다. 민주노동당은 작금의 색깔론이 정책과 노선을 기반으로 한 이념논쟁이 아니라 인신공격과 상호비방에 바탕을 둔 저급한 정치공방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노후보의 어정쩡한 대응자세를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노후보가 과거의 발언을 스스럼없이 번복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과연 노후보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변이 없는 한 노후보는 당내경선을 1위로 통과해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것이다. 그럴 경우 노후보는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이념적 색깔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걸림돌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첫째, 당선가능성과 정체성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문제이다.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력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한국정치의 불문율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2년 ‘뉴DJ 플랜’을, 1997년 ‘DJP 연합’을 들고나온 것도 당선가능성에 비중을 둔 전략이었다.

    현재 노후보는 개혁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개혁대연합을 의미하는 정계개편 구상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개혁 정체성이 강해질수록 껴안을 수 있는 세력의 폭은 좁아지게 되어있다. 노후보로서는 당선가능성을 앞세워 무지개연합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개혁대연합을 택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심할 수밖에 없다.

    둘째, 방어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이념과 정책노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평가받는 일이다. 아직까지 노후보는 일관되고 체계적인 정책노선을 보여주지 못했다. 개별 현안들에 대한 견해는 밝혔지만, 자신의 정치이념과 정책노선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이제 노후보가 당내 예선을 통과할 경우 이에 대한 적극적인 답을 내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이념과 정책검증에 당당히 임하라는 상대편의 요구를 무조건 색깔론으로 반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노선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색깔공방이라면 포지티브한 정책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노후보 자신에게도 유리할 것이다.

    노후보가 과연 색깔론을 넘어설 수 있을지, 더 나아가 그가 민주당 후보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적합한지 여부는 결국 그가 이같은 숙제를 얼마나 잘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념대결의 양상을 좌우할 최대 변수는 정계개편의 추이다. 아마도 여야의 경선이 끝나고 나면 정치권의 화두는 정계개편 문제일 것이다.

    이미 노후보는 자신이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경우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내가 대통령후보가 되면 지역구도를 타파해 민주당 중심으로 큰 틀의 정계개편을 추진할 것이고, 이를 위해 (후보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특히 이인제 후보측이 후보직 포기 의사와 관련, “그렇다면 국민경선은 왜 하느냐”고 공격하고 당내 보수성향 의원들마저 동요하는 조짐을 보이자, 노후보는 일단 경선중에는 더 이상 정계개편론을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민주세력과 개혁세력이 통합해 큰 판을 새롭게 짜겠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같은 노무현식 정계개편론이 나오자 먼저 환영하고 나선 쪽은 개혁파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이었다. 한나라당과 자민련 등에서는 보혁구도로의 정계개편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노풍을 누구보다도 반긴 사람이 가장 보수적인 김종필 총재였다는 사실에서 보혁구도 형성에 대한 보수 정치세력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노무현식 정계개편론에 대해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보혁구도의 정계개편론으로 화답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까지의 과정이야 어찌되었든간에 노후보가 등장할 경우 정계개편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계개편의 내용과 폭이 어느 정도냐는 가변적이지만, 크게 보아 양대 진영으로의 재편가능성이 크다. 무소속 박근혜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제3후보의 가능성도 있지만, 노풍이 위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힘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정계개편의 성격에 대한 정치권의 시각차는 크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노후보의 입지를 축소시킬 수 있는 보혁구도를 선호하는 반면, 노후보측은 개혁과 수구의 구도를 상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 개혁파는 노후보의 정계개편론을 민주당 중심의 정계개편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막상 노후보가 속한 민주당에서조차 정계개편에 관한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지 예측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순수한 의미의 개혁대연합보다는 기존의 민주당에다 외부세력을 영입하고 당명을 바꾸는 수준의 판짜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계개편의 내용이 갖게 될 내용상의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양대 세력으로의 재편과정이 유력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이탈세력이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일 양대 세력으로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진다면 현재의 이념대결은 한층 격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 확실하다. 보수 대 혁신 구도 혹은 개혁 대 보수 구도는 출발부터 이념과 노선의 대결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대선은 구조적으로 이념대결이 격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치러질 전망이다.

    양대 진영으로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진다면 본래 의미의 이념대결과 정책대결을 백안시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구도의 재편은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이념공격을 퍼붓는 쪽에서는 색깔론이 아니라 이념검증 또는 정책검증이라는 논리를 폈다. 말 그대로라면 여기서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후보들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검증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그 내용은 자세히 국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국민들은 그것을 보고 후보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노선을 둘러싼 후보들간의 토론과 논쟁은 정책선거로 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정책노선에 대한 검증과 색깔공세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검증의 범위 내에 드는 것이며, 어디부터가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나누기는 쉽지 않다. 구시대의 색깔론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던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논쟁은 한마디로 그 수준에서 함량미달이다. 수십년 전부터 사용되었던 구태의연한 방법과 내용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구체적인 내용과 실체 없는 주장만이 난무하고 있다. 특정 후보가 좌파라면 어떤 정책이 어떤 이유에서 좌파적인가를 설명해야 하고, 친북적이라면 어떤 정책이 친북적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방어하는 후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정책이 어떠한 측면에서 ‘좌파’또는 ‘친북’으로 매도될 수 없음을 당당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논쟁에서는 이같은 내용들이 빠져 있다.

    둘째, 정책은 없고 정치적 언어들만 춤추고 있다. 공격거리가 되는 것은 과거 발언 아니면 후보 신상에 관한 사항뿐이다. 이념대결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정책노선에 관한 비교와 검증은 없다. 조세제도, 재벌정책, 노동정책, 사회보장제도, 환경정책 등 수많은 정책의제에 대해 서로가 어떤 입장차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결국 이념대결이 철저히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전개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진짜 보수’를 자임하며 한나라당 경선에 뛰어든 최병렬 의원은 “이인제식 색깔논쟁은 구태의연해 젊은이들에게 안 먹힌다. 정책으로 붙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 보수’다운 이야기다.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셋째, 기계적인 이분법에 기초해 있다. 지금의 이념대결에서는 우 아니면 좌밖에 없고, 반북 아니면 친북밖에 없다. 한마디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낡은 방법론이다.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지향하는 이념과 정책노선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분화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에서는 ‘나보다 왼쪽에 있으면 모두 급진 좌익이고, 나보다 오른쪽에 있으면 모두 극우’라는 비이성적인 이분법이 횡행하고 있다.

    최근 유럽정치의 흐름을 보면 우리의 색깔논쟁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좌우의 역사적 고장인 유럽에서도 선거 때마다 좌우파간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노선과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지, 상대방에게 딱지를 붙이고 색깔을 덧씌우는 난폭한 대결이 아니다. 게다가 날로 확산되는 좌우간의 동거현상은 이념의 전통적 개념을 해체시키고 있다. 공공개혁, 고용보장, 민영화, 재정적자 축소 같은 문제들에 대해 유럽의 좌우파는 상호 수렴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좌우보다 오히려 ‘중도’라는 상표가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제 유럽에서 정권의 향배는 좌우 이념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누가 더 대중적이고 중도적인 정책노선을 제시하냐에 달려 있다. 영국, 독일과 같이 좌파가 집권한 경우라도 좌파 본래의 성격은 크게 희석되었으며,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처럼 우파가 집권한 경우에도 좌우대결보다는 보편적인 국가이익이 중시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프랑스 대통령선거에는 모두 16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가장 왼쪽에는 아를레트 라귀예 노동자투쟁당 후보, 가장 오른쪽에는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 당수가 서있다. 16명 가운데 8명이 좌파, 나머지 8명이 우파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상대가 좌파 혹은 우파여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극좌부터 극우까지 갖가지 이념과 노선을 가진 후보들이 총출동한 프랑스 대선은 다양한 정치노선을 포용하고 있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처럼 다양한 가치와 정책노선이 서로 인정받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 경쟁하는 정치문화가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마녀사냥식 색깔론으로 덮여가는 2002년 대선정국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의문이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전개될 이념대결의 양상은 결국 2002년 한국정치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