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금융전문그룹’으로 제2창업 꿈꾸는 한화그룹

대한생명 인수 임박!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4-09-03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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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환위기 직후 사지(死地)로 내몰렸던 한화그룹이 강도높은 구조조정 끝에 회생했다.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든 한화는 이를 계기로 굴뚝산업 위주에서 금융업 전문그룹으로 거듭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한화는 창사 50주년을 맞으며 제2의 창업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기사회생(起死回生).

    오늘의 한화그룹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확한 말도 없다. 외환위기 직후인 불과 4년 전, 불치의 암(癌) 판정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던 한화는 이후 한계사업은 물론, 알짜 계열사까지 서둘러 매각하는 전방위 구조조정으로 최악의 사태를 면했다. 한화는 이미 IMF 관리체제 이전부터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두산그룹과 함께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구조조정 모범사례로 평가받았다.

    환부를 도려내고 몸집을 줄여 천신만고 끝에 기력을 회복한 한화는 그 여세를 몰아 대한생명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다. 화학·유화·기계 등 전통적인 ‘굴뚝산업’에 주력해온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를 계기로 그룹 주력사업을 금융·유통·레저 등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산업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오는 10월 그룹창업 50주년을 맞는 한화는 이런 청사진을 내걸고 ‘제2의 창업’을 선언할 요량인데, 이것 또한 소비재 중심 산업을 영위하다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후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간판’을 바꿔 단 두산을 떠올리게 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화는 재계 순위 9위의 대재벌이었다. 하지만 외화내빈이었다. 재계 순위를 매기는 기준은 총자산 규모다. 기업의 실속을 보여주는 지표인 매출액이나 당기순익은 고려되지 않는다. 총자산은 자기자본에 부채를 더한 것이므로 장사를 못해도 부채가 많으면 순위는 올라가게 돼 있다.

    한화그룹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계열사가 32개나 됐지만 수익을 내는 곳은 서너 개에 불과했다. 한화는 1997년 한 해 동안 3270억원의 적자를 냈으며, 그해 말의 부채는 7조5000억원으로 부채비율이 1200%에 육박했다. 기업을 경영해 돈을 벌기는커녕 부채 이자 갚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한화는 적자사업을 털어내기로 하고 그해 한화에너지의 윤활유사업부문과 한화종합화학의 조립식 욕실(SBR)사업부문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8월에는 빙그레 유도단을 해체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시중에는 한화그룹의 자금악화설이 확산됐다. 10월부터는 외국계 은행에서 한화에 대한 자금 회수에 착수하면서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뒤이어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한화도 위기에 처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신용하락으로 한화의 주력기업 중 하나인 한화에너지는 원유를 도입할 때 필요한 유전스(usance·기한부 수입신용장)를 개설할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과거에 개설한 유전스의 결제시기가 닥쳐오면서 이중으로 자금압박을 받았다. 한화그룹은 유전스 대불(지급보증 대지급)을 발생시키고 한화에너지의 교통세를 연체하는 등의 방법까지 동원해 근근히 부도를 막았지만, 마침내 한화에너지는 그룹 구조조정 계획의 매각대상에 포함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김승연(金昇淵) 그룹 회장이 주거래은행인 한일은행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를 찾아가 호소한 끝에 1998년 1월 어렵사리 3000억원의 협조융자를 얻어냈지만, 융자를 받은 후에도 자금사정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한화에너지에 대한 수입신용장 개설이 이뤄지지 않고 매각추진 사실이 알려지자 원유공급사들은 현금 거래가 아니면 원유를 주지 않았다. 한화바스프우레탄 등 몇 개 기업을 팔았지만, 매각대금은 주력기업에 투자할 틈도 없이 단자사인 종금사 등에서 곧바로 회수해갔다.

    한화는 협조융자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협조융자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른다. 1차 협조융자를 받고도 자금 경색이 계속되자 화의 준비에 들어가기까지 했던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계열사 주식과 집문서 등 사재(私財)와 경영포기각서를 담보로 내놓고 2차 협조융자를 신청, 4420억원을 긴급 수혈받았다. 한화 관계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소유주의 사재 출연을 요청한 이후, 실제로 재벌회장이 사재를 담보로 잡히고 기업 운영자금을 마련한 것은 김회장이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한화는 협조융자를 얻는 대가로 금융권에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약속했다. 외형만 잔뜩 비대해진 한화는 설사 이런 약속이 없었다 해도 그룹을 살리기 위해 부실 계열사는 물론, 몇몇 전략업종 외에는 흑자사업이라도 손을 떼는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했다. 김회장은 절친한 사이였던 삼미 김현철 회장, 동아 최원석 회장, 대농 박영일 회장 등의 오너들이 잇달아 부도를 내고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구조조정 말고는 대안이 없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IMF체제 이후 한화는 ‘실험적’이라 할 만큼 다양한 유형의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형태가 외국업체와 합작한 기업의 지분을 합작 파트너에게 매각한 경우다.

    그 첫 케이스는 1997년 12월 한화바스프우레탄의 한화측 지분 50%를 합작법인인 독일 바스프사(社)에 매각한 것. 단열재, 합성피혁 등의 필수 재료인 MDI를 생산하는 한화바스프우레탄은 1996년에 매출 955억원, 당기순이익 87억원을 기록한 우량기업이었지만, 유동성 부족으로 그룹의 명운이 흔들리던 한화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 바스프는 아시아지역 사업전략에 따른 생산기지로써 한화바스프우레탄을 활용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었기에 매각협상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한화는 양해각서를 교환한 지 불과 2주일 만인 12월9일에 매각계약이 체결되자 곧장 계약서를 들고 은행으로 달려가 800억원을 차입, 위기를 넘겼다.

    한화는 매각과정에서 환율변동을 이용해 260억원에 달하는 환차익까지 챙겼다. 당시 원화 가치가 연일 급락하자 한화는 국가간 거래에서 자국 화폐를 단위로 삼는 관례를 깨고 독일 화폐인 마르크화(1억2600만마르크)로 계약을 했는데, 12월9일 계약체결 당시 환율은 1마르크당 745.37원이었다. 하지만 매각대금이 입금된 12월19일에는 1마르크당 838.12원으로 올라 있었다. 이로 인해 117억원의 환차익이 발생했다.

    또한 한화는 최악의 신용경색으로 금융권에서 선물환 거래를 꺼리는 상황에도 5개 금융기관을 통해 선물환을 거래, 바스프로부터 유입된 금액의 실제 환율을 1마르크당 951.22원까지 끌어올려 143억원의 환차익을 남겼다.

    한화바스프우레탄처럼 경영을 같이 해온 외국 합작사에 지분을 매각할 경우 몇가지 이점이 있다. 바스프는 한화와 공동으로 이사회를 구성, 운영했기 때문에 회사의 현황과 가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화의 자금난을 기화로 헐값 인수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금융컨설팅이나 자산 실사작업도 생략해 협상을 신속하게 매듭지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사에서 일하는 한화측 임직원의 업무능력을 신뢰, 계약서에 100% 고용승계를 명문화했다. 바스프는 오히려 한술 더 떠 한화측 임직원이 지분매각 이후 한화로 복귀하는 것을 우려해 이를 계약일 6개월 전까지 소급해 막는 조항까지 넣었다.

    한화는 한화바스프우레탄 외에도 한화NSK정밀, 한화GKN, SKF한화자동차부품 등의 합작법인 지분을 해외 합작사에 매각했다.

    한화NSK정밀은 일본 NSK와 한화기계가 합작해 세운 초정밀 볼 베어링 회사로 연 24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었다. 1998년 1월 한화는 지분의 50%를, 액면가의 두 배인 200억원을 일시불로 받고 매각했다. 이와 함께 한화NSK정밀에 대한 한화 계열사의 지급보증 402억원도 해제됐다. 아울러 직원 270여 명의 고용안정도 보장됐으며, 한화기계와 NSK는 매각 후에도 기술교류와 제품거래 등 협력관계를 지속하기로 했다.

    1998년 8월 단행된 한화기계 베어링사업부문 매각은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단순히 자산이나 지분을 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외국업체와 새로운 합작법인을 만든 후 여기에다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독특한 유형의 구조조정으로 외자를 유치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한화기계 전체 매출의 60%대를 차지하는 주력사업이고, 국내시장 점유율이 70%대에 이르며, 연간 매출 2633억원에 20억원의 흑자를 내는 우량기업을 팔았다는 사실이다. 이 회사가 매출규모에 비해 흑자가 작았던 것은 부채비율이 높은 한화기계에 소속돼 있어 차입금 상환 등 영업외수지가 마이너스였기 때문이다.

    워낙 알짜사업이었기 때문에 한화가 매각 용의를 내비치자 독일 FAG, 스웨덴 SKF, 일본 NSK, 미국 팀켄 등 세계 유수의 베어링 제조업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한화는 처음에 SKF와 접촉했는데, SKF의 경쟁사인 FAG가 이에 자극받아 새 경영진을 한국에 급파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한화는 대등한 위치의 두 경쟁업체를 저울질하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또한 한화는 환율이 요동치던 당시 FAG와는 마르크화, SKF와는 원화로 가격협상을 진행함으로써 환율 변화에 따라 유리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FAG는 베어링사업을 실사한 후 2500억원을 적정 인수가로 제시했다. 그러나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한화는 “향후 3년간 매년 300억원, 즉 900억원의 이익을 내지 못하면 차액을 배상하겠다”는 파격적인 히든 카드를 제시해 최종 협상가를 3000억원(3억8000만마르크)으로 끌어올렸다.

    한화기계가 FAG와 30 대 70의 비율로 자본금 2500억원 규모의 합작회사인 FAG한화베어링을 설립하고, 이 회사에 한화기계가 베어링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에 유통망이 없고 국내 경영환경에 낯선 FAG는 인수가를 높여주는 대신 베어링사업 운영과 국내 판매 노하우를 가진 한화기계에 지분 참여를 요청했던 것.

    이로써 한화기계는 FAG한화베어링에 지분 30%인 800억원을 출자하고도 2200억원을 남겨 그룹의 협조융자를 갚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또 베어링사업부문을 정리하고도 합작사 경영에 참가, 베어링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임직원 고용승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FAG한화베어링은 설립 이듬해인 1999년에 벌써 순이익이 400억원을 넘어섰다. 이 회사는 현재 FAG그룹 전체 매출의 14%와 순이익의 65%를 차지하는 등 FAG그룹에서 최고의 경영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한화의 구조조정 작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한화에너지·한화에너지프라자 매각이었다. 한화에너지는 김승연 회장이 선대 회장인 김종희(金鍾喜)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한화그룹의 모체기업으로, 그룹 외형의 43%를 차지하는 주력기업 중의 주력기업.

    하지만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한 국내 정유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 메이저 업체와 신규 수입판매사들까지 뛰어들어 경쟁이 더욱 격화된 마당에, 한화에너지는 시장점유율이 12%에 불과하고 과열경쟁에 따른 적자 누적으로 성장에 한계를 보였다. 게다가 한화에너지의 부채가 무려 3조원에 육박해 두 회사를 팔지 않고서는 그룹의 자금사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어려웠다. 마침 정부가 빅딜을 권유한 터라 한화에너지를 시장점유율이 10%에 머물던 현대정유에 매각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1999년 4월 본계약이 체결됐다. 현대정유는 3조원 규모의 한화에너지 정유부문과 한화에너지프라자를 가져오는 대신 한화에너지의 부채 3조원을 떠안기로 했다. 한화는 정유부문 빅딜로 당시 328%였던 그룹 부채비율을 255%로 낮췄다. (주)한화 한화종합화학 등 주력 계열사들이 안고 있던 한화에너지에 대한 채무보증도 일시에 해소됐다.

    비슷한 시기에 한화석유화학은 대림산업과 나프타 분해공장(NCC)을 통합경영하고 사업을 맞교환하는, 또 하나의 이채로운 구조조정 유형을 선보였다. 이는 정부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기업간 ‘자율빅딜’의 첫 사례였다.

    국내 유화산업은 1990년대의 과잉투자로 시장규모에 비해 NCC를 갖춘 업체가 8개사로 지나치게 많고, 각 업체의 규모도 작았다. 게다가 당시 호남석유화학이 대림산업 인수를 시도하고, 대산단지의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이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한화석유화학은 고립된 군소업체로 전락할 게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류비와 설비투자비를 절감할 수 있는 통합안이 모색됐고, 한화석유화학과 대림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1999년 4월 두 회사는 50 대 50의 지분으로 여천NCC 생산라인을 통합해 단일법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한화가 뒤늦게 진출해 어려움을 겪던 폴리프로필렌 생산라인을 대림에 넘겨주고, 대림은 별 재미를 못보던 저밀도 폴리에틸렌과 선형 저밀도 폴리에틸렌 생산라인을 한화에 인도했다. 그 결과 두 회사의 NCC 통합사는 연간 생산능력이 122만t으로 아시아 1위, 세계 17위로 뛰어올랐다. 비용절감, 공정개선, 재고감축 등으로 연 500억원 이상의 수익개선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1999년 1월 한화가 한화투자신탁 지분 20%를 보유한 미국의 얼라이언스캐피탈에 경영을 위임한 것도 국내에선 보기 드문 ‘경영권 아웃소싱’으로 주목을 끌었다. 대주주 기업이 소수 지분을 가진 합작 파트너에 경영권을 넘긴 것은 이례적인 일. 한화투신은 당시 18개 투신사 중 16위에 머물고 있어 선진 금융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경쟁이 치열해지는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소유권에 연연하지 않고 믿을 만한 파트너에게 경영을 위임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한화는 IMF체제 직후인 1997년 12월부터 계열사가 소유한 비사업용 부동산을 매각하고 사업성이 불투명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중단해 약 1800억원을 조달했다.

    이처럼 전사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한 결과 한화그룹의 부채비율은 1997년 1200%에서 2000년에는 130%로 떨어졌다. 2000년 한화는 창업 이래 최초로 전 계열사가 흑자를 내는 진기록을 세웠고, 계열사 간의 상호지급보증도 그해 말 완전히 해소됐다.

    1999년 6월7일 김승연 회장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를 찾았다. 이날은 대한생명 2차 입찰신청 마감일. 김회장은 입찰서류를 제출하면서 “서류에 담긴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으니 담당국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재벌총수가 직접 서류뭉치를 들고 관청을 찾은 것도 파격적이거니와, 위원장이 아닌 국장 면담을 요청한 것도 뜻밖이었다. 한화가 대한생명 인수에 얼마나 공을 들여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한화는 ‘가장 경쟁력있는 가격’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생명은 1999년 9월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됐고 지금까지 3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급한 불을 끈 정부가 대한생명을 매물로 내놓자 김승연 회장은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하면 그간의 구조조정 노하우를 바탕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정상화시킬 수 있다”며 강한 인수의지를 보여왔다.

    한화는 일본의 오릭스그룹 등과 컨소시엄을 만들어 대한생명 인수전에 참여했는데, 막판까지 한화와 경합을 벌이던 미국계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가 지난 3월 협상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유일한 인수 후보로 남았다. 이에 따라 한화는 현재 단독으로 정부측과 매각대금 등 구체적인 인수조건을 놓고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를 계기로 금융부문을 핵심으로 하는 사업 재구축을 구상하고 있다. 화학, 기계 등 기존 주력사업은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금융부문을 근간으로 유통·레저부문을 강화해 3각 편대를 형성하겠다는 것. 대한생명은 보유중인 신동아화재 지분 66% 및 여의도 63빌딩과 패키지로 매각될 예정이다. 따라서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하면 그룹내 한화증권, 한화투신에다 생명보험, 손해보험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금융사업부문을 갖춰 ‘금융전문그룹’을 표방할 수 있게 된다.

    한화 구조조정본부 정이만 상무는 “대한생명을 인수할 경우 자금운용의 다각화 등에 힘입어 금융부문의 효율이 높아질 뿐 아니라 금융 이외의 분야에서도 커다란 시너지효과가 창출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가령 63빌딩의 경우 상가와 음식점을 한화 계열사인 갤러리아백화점·프라자호텔과 연계해 레저·관광 상품화하고, 각종 행사장을 계열 광고대행사인 한컴 및 프라자호텔과 연계, 컨벤션산업을 확대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대한생명이 소유한 부동산을 (주)한화 건설부문이 개발해 분양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화는 이에 대비해 그룹 이름을 바꾸는 것을 포함해 과감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화약그룹’에서 따온 ‘한화’라는 이름이 굴뚝산업 그룹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기기 때문.

    오는 10월9일 한화는 창립 50주년을 맞으며, 김승연 회장도 올해로 50세가 됐다. 김회장은 김종희 선대 회장이 1981년 58세를 일기로 급서하는 바람에 29세의 나이에 회장으로 취임했다. 부친이 장수했다면 지금쯤에나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김회장은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삶을 대신 살았지만, 앞으로는 김승연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천명할 계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부동산 유동화 작업에 착수했다. 2200억원대의 한화유통 잠실부지, 700억원대의 마포부지를 매각한 후 개발하기로 하고, 서울 장교동 한화 본사 빌딩을 CR리츠(구조조정 부동산투자회사)에 매각하는 등 올해 상반기까지 5100억원 가량을 확보했다고 한다.

    주요 부동산을 CR리츠를 통해 유동화한 것은 한화가 첫 사례다. 한화는 산업은행 등이 주축으로 출자해 설립한 ‘코크렙 CR리츠’에 1800억원을 받고 한화빌딩을 매각했다. 한화는 이 돈으로 부채를 상환하고, 코크렙 CR리츠로부터 빌딩을 임차해 사용한다. 동시에 한화는 코크렙 CR리츠에 1대 주주로 출자해 안정 지분을 확보하며, 코크렙 CR리츠는 예상 배당수익률을 제시하고 일반 공모를 통해 자금을 펀딩한다. 이로써 한화는 건물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게 됐다.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협상은 막판에 이르러 지지부진한 양상을 띠고 있다. 늦어도 4월까지는 협상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것도 불투명하다. 결정적인 장애물은 인수가격. 정부와 한화의 ‘희망가격’ 사이에는 아직도 수천억원의 갭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자세다. 대한생명은 1999년 11월 정부가 의뢰한 새 경영진이 들어선 이래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영업망을 대폭 감축하는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계속했다. 2000년에 300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던 대한생명은 구조조정 결과 지난해 7000억원의 흑자를 내고 순자산가치(총자산-총부채)도 플러스로 돌아섰다. 정부가 매각가격을 높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더욱이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제일은행을 헐값에 내다팔고 풋백 옵션(추가 부실이 드러날 경우 정부가 보상하는 조건)까지 줬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정부로선 대한생명을 ‘설욕’의 기회로 여길 법도 하다. 만만한 한화에 풋백 옵션을 줄 리도 만무하다.

    이에 비해 ‘창업 50주년’ ‘제2의 창업’ ‘사업 재구축’ 등을 염두에 둔 한화는 상대적으로 초조하고 조급해하는 눈치다. 한화 관계자는 “정부가 구체적인 협상일정을 제시하지 않아 우리가 끌려다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우리는 창사 50주년 때문에 서두르는 게 아니다. 대개 선거 정국에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미뤄지는 경향이 있어 자치단체장 선거나 대통령 선거 바람이 불기 전에 협상을 끝냈으면 하는 바람뿐”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인수가격에 대한 견해차도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밝혔다. 1조원 남짓한 선에서 조율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다만 최근 경제부총리와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이 교체되면서 그 여파로 협상이 미진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한다 해도 금융업을 주력사업으로 이끌어갈 역량과 경쟁력을 갖췄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한다. 한화가 금융업과는 별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제일생명을 경영한 적은 있으나 이미 오래 전에 계열에서 분리됐다. 한화가 계열사로 거느렸던 한화종금과 최대주주였던 충청은행은 한화그룹에 무리하게 대출을 해주는 등 부실경영을 거듭하다 외환위기 당시 퇴출되는 운명을 맞았다. 한화투신은 만년 업계 하위를 벗어나지 못하자 미국계 합작 파트너에 경영권을 위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한화측은 “그간은 금융부문을 ‘변방 사업’으로 여겨 소홀히 한 측면이 있었다”며 “하지만 향후 금융업을 축으로 그룹이 나아갈 방향이 정해지면 한화라는 기업의 컨셉트가 바뀌는 것이므로 그룹의 핵심역량을 여기에 쏟아붓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재계 인사도 “한화가 그동안 워낙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을 인수, 경영해봤기 때문에 대한생명도 큰 시행착오 없이 끌고 갈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한생명은 한화가 지금껏 인수한 기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덩치가 큰 조직이고, 선진 금융기법을 구사하는 외국계 대형 보험사와 방카슈랑스(은행·보험 겸업)의 위협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생명보험업계에선 시장에서 열심히 발품을 파는 게 영업력의 기본요소인 만큼 보험은 한화에게도 전혀 생소한 분야는 아니라고 본다. 한화는 유통과 레저부문에도 경험없이 뛰어들었지만 그럭저럭 잘 꾸려왔다.”

    그러나 한화가 대한생명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크다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룹 차원에서 대한생명 인수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니 기업의 활력이 떨어지고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한화가 IMF 관리체제 당시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한 자금은 대부분 협조융자 등 그룹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됐다. 예컨대 한화에너지 매각대금은 3조원이나 됐지만 한화에너지의 부채가 3조원대였기 때문에 한화가 이 회사를 팔고 실제로 손에 쥔 돈은 거의 없었다. 이런 사정 탓에 한화가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들었을 무렵에는 사내 유보금 규모가 극히 미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위 임원들 간에 대한생명 입찰 참여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는 것.

    그러다 인수전 참여가 결정되자 각 계열사별로 마련해야 할 인수자금 규모가 할당됐고, 구조조정본부의 주도로 자금 확보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부터 본격화된 부동산 유동화 작업도 그 일환이다. 추가로 매각할 자산도 없고 이익도 많이 나지 않는 회사는 차입금으로 할당액을 메울 각오를 했다. 하지만 계열사들이 어렵사리 확보한 자금이 일부 부채 상환용 외에는 대한생명 인수자금으로 꽁꽁 묶이는 바람에 돈이 돌지 않고 신규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계열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화의 한 임원은 “자금을 무작정 묶어놨다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준비한 것으로 봐달라”고 했다. “신규 업종으로 진출하려면 어차피 그 쪽으로 투자가 집중돼야 하므로 다른 부문은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투자를 줄이고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

    가령 국내 화학산업이 이미 설비과잉 상태인 마당에 설비투자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화학산업의 주요 수출시장은 중국인데, 외국의 메이저 업체들이 중국에 대한 설비투자를 완료해 5∼10년 후면 풀가동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부문은 가능한 한 경량화로 가져가는 사업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화 퇴직간부 출신의 한 기업인은 우려섞인 견해를 내놓았다.

    “한화는 신규 사업을 개척하기보다는 기업인수를 통해 성장한 그룹이다. 많은 회사를 인수하다보니 한화는 늘 자금사정에 여유가 없었다. 특히 새로운 업종의 기업을 인수할 때마다 그 업종을 주력사업으로 삼겠다며 투자를 집중했다. 덕분에 피인수 기업은 성장했을 지 몰라도 인수 여파로 기존 계열사들은 축이 났다.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가 유력해지자 한화 계열사들의 주가가 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한화는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인수할 때는 석유화학을, 오트론을 인수해 한화전자정보통신과 통합한 한화정보통신을 설립했을 때는 정보통신을, 한화국토개발을 인수했을 때는 레저를 주력업종으로 삼겠다며 그때마다 ‘제2의 창업’류의 표현을 썼다. 1998년에 한화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한화종합화학을 중심으로 질적인 경영을 하겠다”고 했다. 2000년에는 정보통신·인터넷·바이오·신소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다시 금융·유통·레저로 바뀌었다. 불과 2년 전에 주력업종으로 강조했던 정보통신부문은 현재 사업정리 수순을 밟고 있다.

    이렇듯 잦은 주력업종 전환과 ‘제2의 창업’에 식상한 부장급 이상 간부급 중에는 대한생명 인수와 금융업 중심의 사업 재구축을 근거로 한 ‘제2의 창업’ 선언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제2창업의 공감대를 갖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게 한화 주변의 지적이다.

    한화 계열사들은 2000년에 모두 흑자를 냈지만, 지난해엔 일부 서비스업을 제외한 상당수 회사가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한화그룹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0.26%로 10대 그룹 중 가장 낮았다. 지난해 상반기까지의 이자보상배율도 0.82에 그쳤다. 영업이익으로 부채 이자를 갚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얘기다. 그룹의 간판회사인 (주)한화의 주가는 4월15일 현재 주당 3995원으로 액면가에도 미치지 못한다.

    시장이 기업의 투자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실적과 성장가능성이다. 한화 계열사들의 경우 수익이 낮은 데다 신규 투자가 원활하지 않아 성장가능성도 낮게 본다는 의미다. 한화의 한 퇴직간부는 “예를 들어 석유화학 분야가 설비과잉이라고 해서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회사 문을 닫겠다는 발상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울산에 대단위 석유화학단지가 만들어진 것은 선진국들이 환경문제 때문에 생산기지를 한국 같은 개도국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도 생산기지 노릇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하지만 우리 설비는 이미 노후한 데다 이전비용도 엄청나 중국, 동남아 등으로 옮길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투자가 필요하다.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투자는 설비투자가 전부가 아니다. 사람과 기술에 투자해 생산공정을 개선하고 신기술을 개발해 현재 설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한화의 조직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그룹의 모기업이 한국화약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화약업종의 특성상 책임을 회피하려는 조직문화를 낳았다는 것. 그래서 1980년대만 해도 한화의 결재라인은 30개나 됐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임직원들이 다른 계열사나 피인수 기업으로 옮겨가면서 ‘무사고’와 ‘보신’을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성향도 그룹에 퍼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제2 창업의 성공여부는 외형의 변화 못지않게 기업문화의 혁신에 달려 있다는 것이 재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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