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탱크부대장에서 안경名人으로 대변신

(주)서전 육동창 회장

  • 장인석 < CEO 전문 리포터 > jis1029@hanmail.net

    입력2004-09-03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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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비스’ ‘이브생로랑’ ‘로덴스톡’ ‘실루엣’ ‘구치’ ‘레이밴’ ‘오클리’…. 세계적인 명품 안경들만 진열해놓는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안경점에서도 손꼽히는 일류 브랜드들이다. 17년 전, 해외에서 그런 명품 안경점을 둘러보며 “왜 한국산은 없는 걸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초로의 동양 신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17년 후, 바로 그 남자가 만든 ‘코레이(Koure)’ 브랜드 안경이 세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주)서전의 육동창(陸東蒼·71) 회장. 일반인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안경업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이름 석자로 통한다. 육회장의 사업 이력은 그 자체로 한국 안경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때 바닥까지 추락했던 우리 안경의 품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고의 세월과 겹쳐 있기 때문이다.

    안경제작 일괄공정 갖춰

    그의 성공 과정과 비결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 의문부터 풀어가야 한다. 첫째는 그가 왜 하필이면 안경업을 선택했냐고, 둘째는 직업군인 출신으로 사업경험이 전무했던 그가 어떻게 성공의 길을 찾아갔냐다. 셋째는 그가 안경산업에 뛰어들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다는 점이다. 안경업은 디자인과 첨단 소재, 그리고 정밀가공으로 승부를 겨루는 초경량기술산업이다. 54세의 나이에 새로 시작하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업종이다.

    “안경업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습니다. 공직에서 물러나 이제 좀 쉬어볼까 하고 있는데, 집사람과 친척뻘 되는 재일교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일본에서 제법 규모가 큰 안경공장을 운영하던 그 분이 ‘한국에 합작회사를 차리려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냐’고 하더군요. 그 분은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대리점에 위탁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몇 차례 일을 도와준 적이 있죠. 그때 저를 잘 보았는지, ‘당신 아니면 안한다’고 강권하는 바람에 인연을 맺게 됐죠.”



    그때까지 육회장은 그야말로 안경의 ‘안’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사업을 해본 경험도 없었다. 그는 교육자의 길을 걸을 생각으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1학년도 마치기 전에 터진 한국전쟁이 그의 인생경로를 바꿔놓았다. 장교로 입대한 그는 진급을 거듭하면서 직업군인이 됐다. 기갑 주특기를 받은 그는 기갑부대 대대장을 거치며 국군 기갑부대 창설멤버로 활약했다. 1967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1980년 그만둘 때까지 중앙정보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3년에는 기갑병으로는 가장 높은 계급인 준장으로 진급했다.

    1980년, 후배인 전두환 전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부임하면서 옷을 벗은 그는 대한건설협회에서 상임감사로 4년, 삼환기업 전무이사로 1년 동안 근무하며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1985년, 당시 일본 3대 안경메이커인 이사야마사(社) 김병용 회장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김회장을 따라 일본에 가서 공장을 둘러보고 일본 유수의 안경점을 돌아다닌 끝에 결심했지요. 그때 국내 안경산업은 극히 낙후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를 발전시키면 보람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당시 일본은 안경의 품질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기술이전을 받고 전문인력도 양성한다면 우리 안경업계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김병용 회장과 합작회사를 차린 그는 고품질의 안경을 만든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가장 먼저 기술인력을 기르고 첨단설비의 공장을 짓는 데 진력했다. 사업 초기엔 충분한 자금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10년 뒤의 수익을 바라보는 장기적인 계획에 입각해 사업을 추진했다. 당장의 장삿속보다는 안경산업의 발전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을 알아준 관공서와 은행의 지원으로 계획은 가시화됐다.

    “대개 새 사업을 시작하면 기존 업계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게 상식이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일본에서 신기술을 이전받아야 할 상황이라 전문대를 졸업한 신입사원을 선발해 곧바로 1년간 일본에서 기술 연수를 받게 했죠. 또한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려면 기술만큼 중요한 게 최신 설비를 갖추는 일입니다. 좋은 상품은 좋은 기계에서 나오는 법이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모든 설비를 들여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에서 안경 제작 전(全) 공정을 갖춘 업체로는 서전이 유일하다. 그러니 당시 국내 안경업체는 분업화된 가내공장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전도 기술연수를 받은 직원들이 귀국하기까지 1년간은 일본에서 들여온 부품을 조립하는 정도였다. 직원들이 돌아오면서 조립과 도금에까지 손을 대게 됐고, 창업 5년 만인 1990년 일괄공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막상 고품질의 안경을 생산했지만 초기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내 대다수 안경에 비해 가격이 높은 것이 문제였다. 서전안경은 당시 국내 고급 안경 소재의 주종을 이루던 니켈실버보다 한 차원 높은 하이니켈과 티타늄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회장은 할인판매를 일삼아 스스로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창업 때부터 다짐한 바 있었다. 그의 목표는 첫째도 품질, 둘째도 품질이었고, 목표의 끝은 세계 수준의 명품안경이었다.

    “고민 끝에 낸 아이디어가 특약점 판매였지요. 당시 전국에 약 3000개의 소매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규모가 크고 괜찮은 업소를 300개 선정해 서전안경을 취급할 수 있도록 특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특약점만으로는 서전의 품질을 알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약점으로 선정되지 못한 업소들의 반발도 컸다. 말만 국산 브랜드지, 사실은 소재부터 부품까지 모두 일본산이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TV 광고였다. 중소기업으로는 파격적인 TV 광고 덕분에 서전안경의 인지도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서전안경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육회장은 공장을 세울 때부터 품었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전 공정의 완전 국산화를 통한 자체 제작이었다. 이는 그가 사업경험이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전안경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됐다.

    “조립만 하면 전공정의 20%, 부품까지 만든다 해도 공정의 50%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공정 시스템을 갖추려면 공정의 40%를 차지하는 금형, 10%에 해당하는 디자인까지 갖춰야 했기 때문에 쉴새없이 몰아붙였습니다.”

    1990년 전공정 시스템을 마련한 육회장은 부품의 국산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합작파트너로부터 계속 소재와 부품을 수입해 안경을 만들면 결국 제조단가를 맞추기가 어려워 훗날 사업성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티타늄 등 특수소재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문의 국산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95년 합작파트너인 이사야마사가 부도를 냈다. 자기 브랜드를 키우지 않고 주문생산만 하다 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서전은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육회장의 국산화 드라이브가 파국을 막아준 셈이었다.

    “품질만 고급스럽게 해서는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애프터서비스 센터를 설치하는 한편 각 특약점에도 애프터서비스를 꼼꼼하게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던 1995년, 공업진흥청의 공산품 품질평가 발표가 있었습니다. 공진청의 조사관들이 안경점에서 무작위로 안경을 수거해 조사한 후 각 항목에 따라 품질평가를 했는데, 서전안경이 ‘올A’를 맞았습니다. 그후 2년마다 발표되는 품질평가에서 서전안경은 한번도 ‘올A’를 놓친 적이 없어요.”

    서전의 애프터서비스는 안경업계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안경업계는 영세업자의 난립과 무차별적인 할인판매 등으로 유통질서가 엉망이었다. 소비자들에겐 ‘국산 안경은 반 이상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었고, 품질도 형편없어 불신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애프터서비스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객이 구입한 안경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 각 점포가 대충 수리를 해줄 뿐, 생산업체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없었다.

    서전은 우선 서울과 부산, 전북 정읍 등 세 곳에 대규모 애프터서비스센터를 만들었다. 안경점에서 수리하기 어려운 경우 이곳에서 수리해 지역점포로 발송하는 전국적인 서비스체제를 구축한 것. 여기에 더해 육회장은 소비자 연구에 착수했다. 소비자를 연령별, 성별, 직업별로 분류한 다음 어떤 디자인과 색을 선호하며 어떤 부분의 고장이 잦은지까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고장이 자주 나는 부품은 협력업체와 함께 소재와 기초설계부터 다시 연구했다. 디자이너들과도 밤을 새워가며 토론했다.

    그는 소비자 못지않게 안경사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안경사법이 제정되어 안경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안경사만 안경점을 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이 소비자들에게 어떤 안경테를 권하냐가 판매율에 큰 영향을 끼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안경사들이야말로 가장 큰 고객인 셈이다. 서전은 안경사들에게 분기마다 ‘서전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발송해 안경업계의 소식과 안경상식, 각종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이전에는 업체가 한 점포와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많은 부대조건을 들어줘야 했지만, 서전이 등장하면서 그런 요구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품질 좋은 제품으로 수익을 보장해주자 서전의 특약점이 되려는 점포가 날로 늘어났던 것이다.

    서전안경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특약점이 300개에서 500개, 다시 1000여 개로 늘어났지만 육회장은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서전안경이 본 궤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1992년부터 해외수출을 겨냥했다. 좁은 국내시장만으로는 매출액 신장에 한계가 있기도 했지만, 오래 전 외국을 다니며 가슴에 품었던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불신이 가장 높은 장벽이었다.

    “외국 바이어들에게 서전안경을 보여주면 품질은 뛰어나다고 인정하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이기 때문에 절반 가격밖에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울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게 우리 수준이었으니까요.”

    그는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길은 독창적인 제품을 만드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고, 디자이너들을 독려하며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 스스로 영감을 얻기 위해 환갑을 넘긴 나이에 세계의 유명 안경 디자인과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다 안경테에 꽃시리즈, 자연시리즈, 악기시리즈를 디자인하자는 의견이 올라왔지요. ‘바로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외국인들이 그런 디자인을 선호한다는 얘길 언뜻 들은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런 디자인은 공이 많이 들고 제조단가가 높아 엄두를 못내고 있었어요. 최고급 안경이 아니면 마음먹기 힘든 디자인이니까요.”

    고생 끝에 색소폰 형태의 안경테를 비롯, 트럼펫이 조각된 안경테, 나뭇잎 모양을 본딴 안경테, 기계와 우주 등을 표현해 실용성과 예술성이 겸비된 안경테들이 잇따라 탄생했다. 해외수출 상품에 대해서는 브랜드명도 바꿨다. ‘코리아’의 유럽식 발음하는 것에서 따온 ‘코레이(Koure)’가 그것이다.

    1993년 3월 서전은 국제적인 안경 전시회인 뉴욕의 ‘비전 엑스포’에 국내 안경업계 사상 최초로 참가했다. 서전은 6개의 부스를 빌려 60여 종의 제품을 전시했다. 예상밖의 반응이 이어졌다. 서전의 부스는 밀려드는 바이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해 전시회에서 최고의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안경을 집어들고 “이게 정말 한국산이냐?”며 몇번씩 확인하는 바이어들이 허다했다.

    100만달러에 달하는 수출계약을 즉석에서 따낸 육회장은 이제 한국산 안경이 유럽이나 미국의 일류 브랜드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위치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코레이’가 호평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고급소재였다. 육회장이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디자인은 이탈리아를, 품질은 일본을, 가격은 미국을 앞서자’는 모토가 이제 머지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서전의 지난해 매출액은 150억원. 그중 수출비중이 30%에 가깝다. 지난해 세계 30여 개국에 300만달러어치를 팔았다. 특히 순 티타늄 재질의 초경량 제품인 ‘플라이어 베타’는 개당 13만∼15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제품으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업계 최초로 KS마크, GD마크, ISO9001 등도 획득했다.

    현재 서전안경의 국내 특약점은 약 1500개로 전국 6000여 개의 안경 소매점 중 25%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지만, 육회장은 그다지 만족하지 않는 눈치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얻은 ‘탱크’라는 별명답게 지금도 여전히 오전 8시10분이면 사무실에 나와 꼼꼼히 업무를 챙긴다.

    “성공이라니요? 이제 시작하는 중인데….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은퇴는 꿈도 못 꾸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스포츠고글 분야에 발을 내디딘 데 이어 보석이 달린 안경을 내놓는 등 새로운 사업구상에 여념이 없다. 그가 요즘 추진하고 있는 분야는 이른바 ‘토털 패션’. ‘구치’ ‘던힐’ ‘아르마니’ 등 세계 유명 패션 메이커들이 구색으로 안경을 만들어 내놓듯이 그도 모태인 서전안경을 중심으로 셔츠나 액세서리 등을 내놓아 토털 패션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디자인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안경산업에서 디자인은 기업 경쟁력과 고부가가치의 원천이다. 더구나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시대. 과거에는 한 디자인당 1200개 정도를 만들었으나 요즘은 그 절반인 600개이고, 어떤 디자인은 300개만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서전의 디자이너들은 매달 평균 50∼60개의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이중 제품으로 탄생하는 것은 15∼20개. 서전의 디자인실이 밤늦게까지 불을 밝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전의 안경 디자이너는 12명. 이들 중 해외 유학파는 한 명도 없다. 모두 서전에 입사한 후 해외 연수와 자체 훈련을 통해 ‘서전맨’으로 성장한 토종 디자이너다. 육회장은 디자이너들의 눈을 키워주기 위해 해외 유명 안경디자이너들을 초청해 디자인 특강과 교류를 정례화했다. 이탈리아의 알베르토 프레이저 등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대부분 다녀갔다.

    젊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대학생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전국 22개 대학 안경학과 학생들을 초청해 공장을 견학시키고 세미나를 연다. 서전의 자료전시실은 안경사 배출의 산실로 꼽힌다. 매년 안경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안경디자인 공모전을 열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도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

    “저희는 국내 안경업체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전의 경쟁상대는 해외에 있으니까요.”

    한국광학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육회장은 다른 안경회사에도 공장을 개방한다. 이들과 노하우를 교환하거나 기술융합을 도모하면서 외국 업체들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안경산업은 가공, 용접, 도금, 금형 등의 공정마다 각 회사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 경쟁사에 대한 공장개방은 금기시돼 왔다.

    하지만 서전이 공장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하자 업계도 변하기 시작했다. 품질관리시스템 도입에 앞장서는 업체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 가격경쟁보다는 기술개발에 노력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 업계가 서로 힘을 합치자 그동안 좀체 풀리지 않던 해묵은 문제들도 하나둘씩 해결됐다. 의무가격표시제가 폐지됐고, 업체들이 고품질의 제품개발에 주력할 수 있도록 자유가격표시제가 도입됐다. 또 중소기업 고유업종 지정기간을 연장해 업체들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토양도 마련됐다.

    육회장은 “안경도 외제면 다 좋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경은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되고 제작되기 때문에 서양인의 골격에 맞춰 제작된 외제 안경은 한국인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외국산 제품은 애프터서비스가 안되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것.

    그는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활기찬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인다. 그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다보니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저더러 ‘그 나이에 어떻게 중소기업을, 그것도 최첨단 산업인 안경업을 하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나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원래 나이와 정신연령, 육체연령 말이죠. 제가 호적 나이는 많지만 정신연령은 아주 젊습니다. 육체연령도 젊은 직원들과 족구를 즐길 정도니까 괜찮은 것 같구요.”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로 일관한 그는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난다. 집 마당에서 맨손체조와 간단한 운동을 하고 화초에 물도 주다보면 한두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30분 정도 명상을 통해 그날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다. 그렇게 해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한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인생관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합리적으로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는 것이 몸에 뱄습니다. 많은 일을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긴 해도 아랫사람들과의 미팅을 거쳐 의견을 구하는 편이라 부하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큰 갈등은 없는 것 같아요.”

    (주)서전 정읍공장이 ‘무분규 직장’이 된 것을 보면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닌 듯하다. 그는 한 달에 두 번씩은 정읍공장에 내려가 파트별로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소주도 따라주고 흥이 나면 직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길은 가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고, 일은 하지 않으면 이룩하지 못합니다. 도전이 있어야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죠. 저는 직원들에게 늘 ‘3신(信)’을 강조합니다. 인간관계의 신뢰, 상도덕의 신의, 하면 된다는 신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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