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벤처에 칼 뽑은 ‘이명재 검찰’, 뇌관 폭발 임박!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4-09-03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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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망식 수사의 위력
    • 업계 “서초동 갔다 왔냐”가 인사말
    • 중수부·특수부 일선 지휘관, 영남 출신 포진
    • 독 품은 검찰, ‘이명재 정국’ 연다
    • 5대 게이트, 알고 보면 한덩어리
    • 증권 브로커-사채업자의 희한한 거래
    • “국민이 인정해줄 때까지 한다”
    • 5대 의혹, 그것이 알고 싶다
    • 비리 뇌관은 바로 이것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지휘관이던 유창종 대검 중수부장마저 사실상 ‘좌천’되자 ‘우리도 다 옷 벗고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만큼 좌절감과 자괴감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재 총장이 부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가 다 나가면 후속 수사는 누가 하나, 본때를 보여주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이총장이 ‘성역은 없다, 무조건 수사하라’고 강한 힘을 실어준 것이 주효했다.”

    대검의 한 고위 간부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이명재 검찰’의 서슬 퍼런 칼날이 벤처업계를 겨누고 있다. 두려움에 떠는 곳은 테헤란밸리만이 아니다. 은행·증권사·창투사 등이 몰려 있는 여의도의 분위기 또한 흉흉하기 짝이 없다. 그 곳에 권력의 핵심인 국회의사당이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검찰 수사에는 성역이 없어 보인다. 벤처기업, 이들이 줄을 댄 정·관계 인사, 펀딩 및 주가 조작에 참여한 금융권 인사들과 사채업자들…. 한 사안에 대한 수사는 그 다음 건으로 이어져 관련자들이 줄줄이 소환되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특정 기업에 대해 유리한 투자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갔다. 수사관 한 명이 동시에 3~4건을 진행하는 것 같더라. 작은 방에 들어가 조사를 받는데 방마다 다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했다. 내가 관련된 건 말고도 파일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물론 제목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뒷글자 몇 개가 눈에 띄길래 슬쩍 훔쳐보니 ‘무슨무슨 투자자문’이라고 써 있더라.”



    증권사 애널리스트 K씨의 말이다.

    “코스닥에서 큰돈 굴리는 사람은 다 부르는 것 같다. 소문에는 코스닥 투자액이 큰 사람부터 순서대로 100명을 잘라 조사했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나도 갔다.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나한테 무슨 특별한 혐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 조사 받은 다른 사람 얘기도 들어보니, 일단 중요한 게 ‘관상’이라더라. 이 사람이 정말 그렇게 큰돈이 있을 만한 인물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명의만 빌려준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일차 목적인 것 같다. 조사 받은 지 꽤 됐는데 연락이 없다. 죄 안 지었으니 별일 없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업계에서 제법 ‘큰손’으로 통하는 투자자 C씨의 증언이다.

    금융가에서는 지금의 검찰 수사를 두고 ‘투망식’이라는 표현을 쓴다. 먹이(범법자)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조사부터 한 후 그 중 문제가 되는 사람을 골라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날개식’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마치 독수리가 하늘을 날며 양 날개로 창공을 쓸 듯 ‘걸리는 건 모두 뒤집어보고 가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검찰 내사 및 조사 대상 1순위는 지속적으로 비리 의혹을 받아 온 인사, 구체적 제보가 들어온 사안, 각종 게이트 수사 중 추가로 인지한 범죄, 금융감독원·국세청 등에서 고발하거나 수사 의뢰한 사건 등이다. 범위가 워낙 넓다 보니 요즘 증권가와 업계 ‘선수들’(큰손·작전꾼·머니게이머) 사이에는 “서초동(대검·서울지검) 갔다 왔냐”는 질문이 인사말이 됐다고 한다.

    분명한 건 지금 진행중인 검찰 수사는 제스처나 생색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활을 건 싸움’이라는 점이다. 경제사범과의, 고위층 부정비리와의, 검찰 내부의 무기력·패배주의와의 한판 승부. 검찰 수사의 향방과 과제는 무엇인가. 금감원·국세청 등 유관 기관의 움직임은? 잠재적 수사대상인 기업·증권사·창투사들과 ‘큰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곧 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비리의 뇌관은 어디인가.

    “요즘 안양교도소가 증권사범으로 만원이라더라. 지난해 말부터 차근차근 집어넣어서 그렇다는데 요즘은 구치소 쪽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검찰에 있는 친구가 ‘버스 2대분은 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문제가 된 벤처캐피탈이나 투자자문사의 경우에는 정년퇴직자까지 불러 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우리 동네 분위기 정말 흉흉하다. 아마 잠 못 자는 사람 많을 거다.”(금융부띠끄 대표 L씨)

    “이용호 게이트가 터진 직후부터 검찰이 약 300명의 요주의 인물 명단을 작성해 사전 조사를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거기 끼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 회사 성장 속도가 빠르고 주가가 높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그중 실제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얘길 들었다. 다행히 나는 빠졌다.”(벤처기업 대표 K씨)

    “지금은 벤처 비리 수사 때문에 너무 바빠 누구를 만나고 말고 할 시간이 없다. 밥 먹는 짬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손님은 다 사절이다. 조사 받으러 온 사람들 때문에 사무실에 앉아 있을 자리가 없다. 다음에 와 달라.”(얼굴 좀 보자는 연수원 동기 변호사에게 서울지검 특수부 모 검사가)

    취재중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다. 소문 수준의 이야기도 있지만 벤처 주변이나 금융권의 요즘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업계와 각종 비리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지도층 인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건 검찰만이 아니다. 금감원·금감위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이들의 주 관심사는 다양한 방식의 주가 조작. 조사 및 검사 범위가 검찰보다 더 광범위하다. 한 벤처기업인은 “금감원 조사는 검찰 수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 대상 업체마다 초긴장 상태”라고 전했다. 증권사 또한 조사 대상이어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검찰의 초강경 수사 방침은 1월17일 이명재 총장의 취임과 함께 예견됐다. 2월10일 단행된 검찰 인사는 이총장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케 했다. 대검과 법무부에 포진했던 호남 출신 핵심 참모들을 전원 교체했고, 검찰의 꽃이랄 수 있는 서울지검장에 비호남 출신의 이범관 인천지검장을 발탁했다. 이로써 서울지검장과 함께 검찰 내 빅4로 꼽히는 대검 중수부장, 대검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에 각각 호남 출신과 충청 출신 두 명씩이 포진하게 됐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각종 권력형 비리 수사의 최일선 지휘관이랄 수 있는 대검 중수1·2·3과장과 서울지검 특수2·3부장, 경제사범 수사를 전담하는 형사9부장이 모두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들 대부분이 영남 출신이라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학연, 지연에 얽매임 없이 현정권 인사들을 수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민유태 대검 중수1과장은 경기 출생에 중경고를 졸업했다. 김진태 중수2과장은 경남 사천 출신. 진주고를 졸업했다. 차동민 서울지검 특수2부장은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제물포고를 졸업했다. 서우정 특수3부장은 경남 충무 출생이다. 중앙고를 졸업했다. 신남규 형사9부장은 부산 출신에 여의도고를 졸업했다. 새로 발령 난 서울지검 부부장검사 3명도 각기 부산(손기호·해동고), 대구 달성(김부식·경북고), 경남 울산(차동언·경기고) 출신이다. 이재원 대검 중수3과장만이 광주 생이다.

    ‘성역 없는 수사’의 실질적 신호탄은 지난 3월 중순 전 새한그룹 부회장 이재관씨와 유종근 전북지사의 구속이었다. 여당 경선주자인 이인제 후보의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해 온 김운환 전의원도 뇌물수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검찰은 “양대 선거 출마예정자라도 비리 혐의가 잡히면 예외 없이 수사대상에 오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3월25일 검찰은 차정일 특검팀으로부터 이용호 게이트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다. 그 며칠 전인 3월21일, 이총장은 주요 간부들에게 ‘검찰의 명운을 건 수사 의지’를 천명했다. 국민에 사과성명을 내겠다는 것을 참모진이 나서 만류하기도 했다. 이총장은 또한 수도승 같은 고립 생활을 자처해 부하 직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퇴근 후에는 외부인사를 전혀 만나지 않고 점심식사도 구내식당에서 때운다. 골프도 그만뒀으며 집무실에는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다. 총장 자리에 어떠한 사심도, 미련도 없음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검찰 행보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가하려는 쪽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흔히 떠도는 소문이 ‘양대 선거를 염두에 둔 기획전의 하나’라는 것. 모 재벌기업 경영전략실 간부 H씨는 “첫째가 선거에 앞서 통화량 증대로 경제를 띄우는 것이라면, 각종 부정·비리에 대한 강력한 수사로 욕먹을 여지를 미리 없애는 것이 두번째 목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다른 대기업 간부는 “코스닥 활황으로 정말 ‘대박’을 터뜨린 건 1999년 이전에 투자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다치는 이들이 여권 인사만은 아닐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구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초강경 대응은 총장 이하 검찰 조직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라 보는 것이 옳은 시각일 것이다. 또한 ‘벤처입국’ ‘증시부양’이라는 명분으로 적당히 덮어두기에는 우리 자본시장과 벤처업계의 탈법·불법이 도를 넘어섰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이기도 하다.

    사실 벤처업계를 둘러싼 주가조작, 정·관계 로비, 펀딩 관련 부정·비리가 횡행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문기자 출신의 한 벤처기업인은 “요즘도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CEO가 적지 않다. 서로 다 알면서 해먹는 것이다. 죄의식도 별로 없다. 회계 조작이나 ‘가라(가짜)’매출, 허위 공시, 내부자 거래, 권력자에 대한 로비, 차명 투자, 불법적 자금 조달, 공금 유용, 하룻밤에 수백 만원씩 하는 룸살롱 접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저지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며 답답한 속을 털어놓았다.

    반부패국민연대는 지난해 11월부터 한 달간 주요 일간지 증권업협회 출입기자단 17명과 증권사 직원 42명 등 총 59명을 대상으로 ‘벤처기업 윤리와 투명성 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들은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투명성에 대해 10점 만점에 4.5점이라는 박한 점수를 주었다. 경영 공시 등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제공하는 벤처기업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66.1%가 ‘그렇다’, 15.3%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벤처기업이 대기업보다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52.6%가 ‘그렇지 않다’와 ‘매우 그렇지 않다’는 답을 했다. 긍정적인 응답은 10.2%에 불과했다. 51.7%는 ‘벤처기업의 자금조달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했고, 60.3%는 ‘투자된 자금이 공적용도로만 사용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우리 벤처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현재 검찰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사의 큰 갈래는 ▲진승현·정현준·이용호·윤태식 게이트 관련(대검 중수부·서울지검 특수부 및 형사9부) ▲공적자금(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본부) ▲4대 구조조정기금 및 정보화촉진기금(서울지검 특수2부) ▲금감원을 통해 인지한 사안(서울지검 형사9부 및 특수1부) ▲최규선(스포츠토토) 게이트(서울지검 특수2부) ▲기타 벤처비리 기획 수사(서울지검 특수3부 및 형사9부) 등이다. 각각의 큰 덩어리는 다시 ‘작은 사안’들로 이어진다. 윤태식 건을 조사하다 산업은행 벤처투자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여기서 다시 IT벤처기업 한아시스템의 뇌물상납과 한국통신 및 자회사인 한국통신진흥 임직원들의 비리가 적발되는 식이다. 전체적으로는 권력형 비리로 발전한 경우와 각종 기금 등 나랏돈을 제대로 썼느냐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검찰 수사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까.

    우선 각종 게이트와 ‘스포츠토토’ 관련 수사에는 시한이 따로 없다. 대검 중수부의 모 검사는 “국민들이 ‘여기가 끝’이라고 인정해줄 때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끝’은 권력 최상층부나 대통령 친인척이 될 공산이 크다. 지금으로서는 그 파괴력을 가늠하기 쉽지 않으나, 검찰이 지금과 같은 자세로 수사를 밀고 나간다면 머지 않아 ‘이명재 정국’이 시작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각종 게이트는 각기 따로 노는 것 같으나 사실상 하나의 큰 덩어리다. 관련자들의 면면이 겹치는 데다 수법도 비슷하다. ‘선수 중의 선수’들이 이중, 삼중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각 건마다 여러 벤처기업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들에게 자금을 대준 은행, 벤처캐피탈, 상호신용금고와 사채업자들도 요주의 대상이다.

    공적자금 비리 수사는 공적자금비리특별수사본부(본부장 김종빈 대검 중수부장)에서 담당한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특별수사본부는 올 3월 새한그룹 전 부회장 이재관씨를 구속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씨는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이며 이건희 회장의 조카다. 최근에는 최기선 인천시장이 ㈜대우자동차판매에서 사업 청탁과 함께 3억원을 받은 혐의를 잡아냈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과 이재명 전의원도 같은 업체에서 각 1억원씩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본부의 모 검사는 “역시 덩치가 큰 것은 대우그룹”이라며 “쌓아놓은 것이 아직 많다”고 밝혔다.

    4대 구조조정기금 수사는 뜨거운 감자다. 서울지검 특수2부가 전담해 왔으나 현재는 최규선 게이트에 매달리느라 잠시 손을 놓은 상태다.

    한강·아리랑·무궁화·서울부채기금 등 4대 구조조정기금은 환란 직후인 1998년, 회생 가능한 기업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조성한 일종의 공적자금이다. 약 2조원이 74개 상장·등록업체 및 60개 비상장업체에 투입됐다. 기금 관리는 공정성을 담보하고 투자 수익 극대화를 꾀한다는 이유로 스커더캠프인베스트먼트(한강), 템플턴에셋매니지먼트(무궁화) 등 외국계 자산운용사에 맡겨졌다. 그러나 한국 실정을 잘 모르는 데다 일손도 달렸던 그들은 국내 투자자문사에 기금 운용을 전담시키다시피 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기금 별 운용인력이 5~7명에 불과한 탓에 업체와 기금을 연결시켜주는 브로커들이 활개를 친 것.

    지난 2월 서울지검 특수2부는 구조조정기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거액을 받은 전 국정원 정통부담당 사무관 김규현씨를 수배했다. 그외에 한강기금 지원과 관련해 비리를 저지른 서울대 교수, 투자자문사 간부, 과기부 사무관 2명과 특허청 사무관 등도 구속 기소했다. 문제는 김규현씨가 뇌물로 받은 벤처기업 스마트디스플레이사 주식 2만5000주 중 2만주를 주변 인사들에게 시가의 10분의 1 가격에 판매한 것. 이것이 국정원 내부 직원이나 정통부 관계자 등에 상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문제제기가 있자 검찰은 구체적인 경위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 김씨는 검찰 수사를 받던 중 공용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피, 국정원이 도피를 지원·방조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검찰 관계자는 “전체 기금 자산 중 절반 가량이 부실화할 우려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금감원이 검찰에 통보하거나 행정처분을 내린 주요 내사대상 업체만 해도 기금 투입 상장사 74개 중 21개에 이른다. 이중 상당수는 기금이 자사의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주식 등을 인수하는 시점을 이용해 주가조작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전에 주식을 매집한 후 기금을 투입해 주가가 오르면 되파는 수법으로 거액을 챙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금을 받거나 금감원 조사를 피하기 위해 관계부처 공무원, 권력층 인사에게 적극적인 로비를 펼친 흔적도 발견됐다. 따라서 4대 기금과 관련한 검찰 수사는 권력층과 국정원, 경제부처 등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특수2부는 4월5일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위원회 손홍 상임위원(2급)을 구속했다. 정통부가 조성한 정보화촉진기금 지원과 관련해 유니와이드 테크놀로지 장갑석 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다. 이로써 정보화촉진기금도 검찰의 주요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다. 관련 부처 공무원 여럿이 내사와 소환 조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는 전직 고위공직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지검 특수3부, 형사9부 등이 진행중인 주가조작 사범 및 벤처관련 비리 수사는 갈수록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그 중 큰 줄기가 산업은행 벤처투자 비리 건이다. 3월28일 특수3부는, 대표적 인터넷 보안업체인 장미디어인터랙티브 대표 장민근씨가 투자 유치 대가로 산업은행 임원 및 간부들에게 총 10억6000만원의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밝혀냈다. 장씨와 산업은행 박순화 이사 등 4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통신 및 한국통신진흥 직원에 대한 한아시스템의 뇌물 제공 사건도 산업은행 조사중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수사가 한국통신 등 IT 관련 공기업 쪽으로까지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서우정 특수3부장은 “장미디어의 경우 이런저런 의혹이 많아 좀더 깊이 수사를 진행해 볼 생각이다. 산업은행이 투자한 또 다른 벤처기업 C사에 대해서도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규모가 큰데다 회사 내용도 좋고 주가에 미칠 영향도 작지 않아 고민중”이라고 밝혔다.

    장미디어의 경우 자금내역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차명 계좌를 통해 세탁된 뭉칫돈이 여러 차례 현찰로 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이 돈의 용처를 찾는 것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장미디어 대표 장민근씨는 10여년 전부터 정치권 주위를 맴돌던 인물이다. 이후 벤처업계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회사의 내실이나 기술력에 비해 주가가 지나치게 높다는 평판을 들어왔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장씨가 2000년 6월 계열사 데일리시큐어의 주식 1만9000주를 윤태식씨의 패스21 주식 1만주와 맞교환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엔 패스21 감사 김영렬 서울경제신문 전사장의 아들이 운영하는 벤처기업 Y사에 3억원을 투자한 사실이다. 그 얼마 후 Y사는 한국보훈복지공단이 운영하는 복권사업의 단독사업자로 선정됐다. Y사와 패스21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다.

    그렇지 않아도 Y사의 복권사업자 선정에 대해 동종 업계에서는 “뭔가 있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온 터다. 윤태식-김영렬-장민근씨의 숨은 관계가 밝혀질 경우 Y사의 복권 사업 수주는 또 하나의 ‘스포츠토토 게이트’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6월14일 금융·증권사범 전문수사부로 출범한 서울지검 형사9부는 주로 금감원에서 고발·수사의뢰·통보한 사건을 수사한다. 기획수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용호 게이트 관련 수사도 담당한다.

    “지금 같은 수사 강도가 언제까지 가겠냐”고 묻자 신남규 형사9부장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금융·증권사범 수사는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데다, 말 나기 쉽고, 오가는 돈의 액수도 커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 만큼 더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부 검사 중에는 요즘 열흘씩 집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 앞으로 검찰이 관심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구조조정전문회사(CRC) 관련 비리, 전·현직 증권사 직원과 사채업자 등이 결탁한 주가조작 사건 등이다. 이중 증시와 관련한 부분은 이미 금감원 조사가 상당부분 진행된 상태. 금감원도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올해를 ‘금융소비자 보호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가시적 성과를 재촉하고 나서면서 눈에 띄게 바빠졌다.

    CRC가 참여한 주가조작은 금감원이 올초부터 심혈을 기울여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CRC란 기업구조조정을 전문으로 하는 상법상 주식회사. 기관이나 개인으로부터 유치한 투자자금으로 펀드를 조성한 후 채권금융기관으로부터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주식을 넘겨받아 정상화에 나선다. 구조조정에 성공하면 기업공개, M&A, 장외매각 등으로 투자자금을 회수한다. 4월1일 현재 산업자원부에 등록한 CRC 숫자는 무려 100개. 문제는 이 중 일부 회사가 고도의 금융기법을 활용, 불법 기업인수, 주가조작 등 위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용호 게이트의 진원지인 G&G사도 CRC다.

    사채업자-창업투자사-CRC 등이 짜고 자금조달 루트를 만든 후, 권력층 인사의 힘을 빌어 채권자(주로 은행)로부터 주식을 싼값에 넘겨받은 뒤, ‘무늬만 구조조정’을 단행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전형적인 행태다. 투자자금도 ‘허수’에 가깝다. 은행 융자와 사채업자 자금을 교묘히 활용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기업을 인수한다. 특정 인사가 차명을 이용해 아예 CRC 주주로 참여할 수도 있다. 금감원은 이 중 주가조작 부분만을 조사 대상으로 하나 검찰 수사에서는 CRC에 힘을 보태준 고위층 인사가 누구인지에 초점이 모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금감원은 지점장급이 주가조작에 관여한 2~3개 증권사 영업점을 폐쇄할 예정이다. 점포 내에 별도의 사설 투자자문사(부띠끄)를 만들거나, 4~5명으로 구성된 팀이 본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고 불법 영업을 해 온 곳도 포함된다. 금감원의 조종연 조사1국장은 “증권사 전·현직 영업직원(증권 브로커)에 세금 없이 고리로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도 조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사실 증권 브로커가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건 늘 있어온 일이다. 과정은 이렇다. 우선 사채업자가 아는 사람 명의로 증권계좌를 튼다. 명동에는 이럴 때 주로 쓰는 차명계좌용 이름이 따로 있다. 아마 금감원도 리스트를 갖고 있을 거다. 어쨌든 거기에 사채업자와 작전세력(브로커)이 각각 돈을 입금한다. 사채업자의 돈이 50억원이라면 브로커 쪽에서는 10억원 정도를 넣는다. 이 10억원은 일종의 담보다. 작전이 실패해 ‘50억원+이자’에 손실이 발생할 지경이 되면 사채업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카드와 도장으로 자기 돈만큼을 미련 없이 찾아가 버린다.” 모 증권사 임원 I씨의 설명이다.

    금감원이나 검찰 조사가 예상되는 벤처기업은 ▲회사 규모나 내실에 비해 수출 실적이 지나치게 좋은 회사 ▲기업인수개발(A&D) 관련사 ▲CB나 BW 발행이 잦은 회사 ▲CEO의 ‘외도’가 잦고 활동이 지나치게 활발한 회사 등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사석에서 “항간에 떠도는 ‘5대 의혹’ 중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건은 터졌고 나머지 두 건이 남았다. 그 중 금융전문가 K씨 건은 생각보다 문제가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정작 골치아픈 건 M사다. 공무원, 권력층 인사에 호남 폭력조직까지 얽혀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M사는 각 수사·정보기관의 동향 보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업이다. 중소기업에 가깝지만 자산 규모는 1조원에 달한다. 이는 부채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외 조사설이 돌고 있는 업체로는 IT벤처기업인 A사, C사, D사, E사 등이 있다(이하 성명 및 회사명은 실제 이름의 이니셜이 아니라 기자가 임의로 붙인 것임).

    A사는 미국특허 취득과 함께 현지 유통회사인 B사와 대규모 수출 계약을 맺는 등 호재로 인해 지난 1·4분기 화제의 급등주로 떠올랐다. 그런데 B사는 사실상 국내 벤처기업 C사의 전 대표이자 최대주주인 J씨 소유 기업이었던 것. C사측에서도 C사와 B사가 특수한 관계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J씨는 국제전화를 걸어와 “나는 미국 시민권자다. 내가 B사를 창업한 것은 맞지만 지난해 초 재미교포 모씨에게 지분을 넘겨 이젠 더 이상 대주주가 아니다. 그런 B사와 A사가 거래한 것이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증권가에서는 “공시 어디에도 B사가 국내 업체와 특수관계에 있는 회사라는 언급은 없다. B사의 자본 규모와 자산 규모에 의문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실 관계를 잘 따져봐야 할 일”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전자인증 관련 업체인 D사는 표준 결정과 관련해 모 경제부처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D사 대표는 대외활동이 매우 활발한 인사로, 검찰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월의 대표적 작전주로 꼽히는 E사의 K씨는 엔터테인먼트사인 F사 설립을 지원한 후 소속 연예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나 F사 사장이 약속한 지원금을 요청하자 이를 묵살해 갈등을 빚었다. 화가 난 F사 사장이 연예인과의 애정행각을 담은 비디오를 공개하겠다고 하자 K씨는 F사 사장을 공금횡령혐의로 고발, 구속시켰다고 한다. 엔터테인먼트 관련사인 G사는 대주주가 작전에 참여했고, 또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H사는 국정원 출신을 임원으로 채용했는데 이는 대규모 주가조작을 은폐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I사는 대규모 중국 수출을 공시했으나 아예 제품을 만들지 않았으며, 전직 고위공직자 아들 L씨가 사장인 J사의 경우 폭력조직의 자금이 들어가 있는데다 코스닥 등록 과정에도 의혹이 많다는 소문이다. 이외에도 지난해 상반기 돌풍을 일으켰던 A&D기업 K사와, 주가조작 전력이 있는 M씨가 사실상의 주인인 L사 등에 대해서는 조만간 금감원의 공식적인 조사 발표가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벤처기업에 대한 검찰·금감원의 대대적인 공세가 자칫 자본시장과 벤처업계를 냉각시키고 외국인들에게 우리 증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증권 브로커 C씨는 “옥석을 가릴 때가 왔다. 이렇게 한번 회오리가 지나가면 아무래도 좀 정화될 것”이라며 조심스런 기대를 내비쳤다.

    어쨌거나 이제 칼자루는 검찰 손에 쥐어졌다. 단호하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벤처대첩’에 임하는 것만이 검찰이 살고 나라가 바로 서는 길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최규선 게이트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성규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의 해외 도피는 “이명재 검찰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검찰 내에 잔존하는 일부 권력형 라인이 물밑에서 작동해 최총경 출국정지 같은 기본 조처를 방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이명재 검찰’이 출범한 이래 최초로 맞닥뜨린 시련이라 하겠다. 최규선 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의혹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국민 앞에 떳떳이 펼쳐놓는 것만이 ‘이명재 검찰’이 사활을 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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