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평생 제과점 종업원으로 일한 아버지 생각하며 수사했다”

‘평범한 사람의 위대한 승리’ 차정일 특검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04-09-03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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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검수사하면서 교회 열심히 나갔다
    • 신승남 총장 동생 수사 때는 ‘검찰팀’ 배제
    • 검찰간부로서의 부담과 경제적 사정 탓에 일찍 변호사 개업
    • 정치검사 사라져야 진정한 검찰 독립
    • 특검제는 비상조치, 상설화엔 반대
    • 검찰과 정치권 유착, 과거 정권에선 더 심해
    • 대전법조비리사건 때 검찰총수가 책임졌어야
    • 대학시절 학비와 생활비 벌기 바빠
    • 1000원짜리 수수료 영수증으로 이수동 잡았다
    • 수사기간 내내 많이 외로워
    • 아내에 대한 느낌, 젊었을 때와 똑같아
    석달 여에 걸친 수사를 끝낸 후 특검팀은 사무실을 삼성동에서 서초동으로 옮겼다. 서울지법 동문 건너편에 있는 건물 9층이다. 겨우내 삭막함과 긴장감에 휩싸였던 특검 사무실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사무실엔 골치 아픈 수사 냄새가 사라지고 사람 냄새가 풍겼다. 전화를 받는 직원들의 목소리엔 활력이 넘쳤고 표정들도 밝았다.

    차정일(60) 특검과의 인터뷰는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점심을 먹기에 지장이 없도록 오전 중 끝내자”는 약속은 반만 지켜졌다. 12시10분전에 끝냈으므로 식사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인터뷰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 식사를 한 다음 오후 2시, 다시 마주앉았다. 시종 정중하고 엄숙한 자세를 유지한 차특검이었지만 더러 ‘불만’도 드러냈다.

    “많이 물어보고 싶겠지만 나는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나 자신을 많이 드러내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정말 인정사정 없군요.” “좋은 쪽으로 몇 가지 질문하고 끝낼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요.”

    오전 인터뷰에선 주로 차특검의 인간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특검수사와 관련해선 그동안 언론에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자연인 또는 법조인 차정일의 모습은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가정사를 비롯해 검사, 변호사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한편 법조계 개혁 등 사회 현안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오후엔 주로 특검수사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수사가 끝났다고 해서 특검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새로 제정된 특검법에 따르면 특검팀에는 공소유지 의무가 있다. 즉 법정에 나가 검사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특검활동은 계속된다. 규정대로라면 7개월 이내에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나오겠지만 재판이 꼭 그 기간에 끝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특검 임기는 그 이상 길어질 수도 있다.



    현재 특검 사무실에는 차특검을 비롯해 9명이 출근한다. 이상수, 김원중 특검보 두 사람, 특별수사관 세 사람, 파견 공무원 두 사람, 여직원 한 명이다. 변호사인 특검보 두 사람은 일단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공소유지를 위해 특검사무실에 나오고 있다. 차특검은 이를 ‘반관반민(半官半民)’이라고 표현했다.

    특검팀이 수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해 12월11일. 특검법에 따르면 수사기간은 60일 이내지만 1차로 30일, 2차로 15일을 연장할 수 있다. 특검팀은 법이 허용하는 한도인 105일을 다 썼다. 준비기간 10일을 포함하면 총 115일이다.

    ―그동안 격무에 시달리셨을 텐데 수사가 끝난 후 충분히 쉬셨습니까.

    “충분히 쉬지는 못했죠. 여행이나 해볼까 생각은 했는데, 재판 준비하느라 별로 쉴 시간이 없었죠.”

    ―지난 주말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청계산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일요일마다 산에 오르는 산악회 모임이 있는데 제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북한산도 가고 도봉산도 가고, 한 달에 한번씩은 설악산이나 지리산으로 장거리 산행을 떠나요. 특검수사 기간에는 통 못나갔지요.”

    ―휴일에 산으로 떠나면 가족들이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집에서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여가생활이고 취미니까…. 집사람하고 같이 가고 싶은데, 관절이 좋지 않아 못 가는 처지예요.”

    ―자제분들은 다 장성했죠.

    “예.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데, 딸은 작년 11월에 결혼해 분가했고 미혼인 아들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수사를 끝내고 나서 부인을 위해서 특별히 하신 일이 있습니까.

    “아직 못했습니다. 여행을 같이 할 계획을 세우고는 있죠.”

    ―종교활동은 안 하십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집사람은 교회 집사고.”

    ―일요일마다 산에 오르면 교회는 언제 갑니까.

    “새벽에 같이 예배를 보곤 합니다. 어차피 일요일 대예배에는 못 나가니까.”

    ―직분은 없으세요.

    “저는 독실하지 못해서… 그냥 평신도죠.”

    무심코 물어본 것인데 얘기가 길어진다. 이런 얘기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차특검처럼 무뚝뚝하고 점잖게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교회에 다니신 지 오래 됐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나가라고 해 다니긴 다녔는데, 나갔다 안 나갔다 했죠.”

    ―안정된 신앙생활을 못하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세요.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겠죠. 신앙심이 있었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교회에 나갔을 텐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건 믿으면서도 열심히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죠.”

    지난해 12월11일 수사에 착수한 특검은 20일 후 이기주 전 한통파워텔 사장을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여운환(이용호 게이트 관련, 사기혐의로 구속)씨에게 10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1월13일,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 신승환씨가 구속되자 다음날 신총장이 사퇴했다. 이때부터 특검수사는 불이 붙었다. 대검 중수부의 수사내용이 하나둘 뒤집어졌고 검찰이 밝히지 못했던 사실이 특검에 의해 드러났다. 1월18일엔 검찰이 수배만 해놓고 잡지 못했던 D신용금고 실소유주 김영준씨를 구속했다. 2월1일엔 김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씨가, 2월28일엔 김대통령의 가신인 이수동씨가 구속됐다.

    대검 중수부는 신승환씨가 이용호씨로부터 받은 돈을 로비자금이 아니라 사장 직위에 따른 급여로 판단했다. 이에 대해 묻자 차특검은 “법정에서 논쟁이 될 부분이므로 답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신승환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나서 영장이 떨어질까 안 떨어질까 고민하셨다는 데요.

    “전혀 근거 없는 얘기입니다. 사람 구속하는 것이 뭐 그렇게 득이 된다고 마음 졸이며 구속되길 바라겠습니까. 그저 법원으로부터 정당한 판결을 받겠다는 심정이었어요.”

    ―혹시 영장사유가 불충분하거나 이론의 여지가 있어 고민한 건 아닙니까.

    “오히려 반대였죠. 이건 분명히 죄가 된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영장을 청구한 거죠. 다만 이것 때문에 검찰이 큰 충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뿐입니다.”

    차특검의 견해로는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대검수사는 특검수사와 비교해 폄훼만 할 것이 아니다. 대검에서 광범위하게 수사해놓은 것이 특검수사의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검찰에서 이용호씨를 구속하면서 작성한 수사기록을 보면 그 양이 엄청납니다. 그렇게 만들기도 쉽지 않은 일이죠. 또 신총장에 대해 나쁜 이미지만 남아있는 모양인데, 사실 그때 대검에서 이용호씨를 구속하지 않았더라면 피해자가 더 늘었을 거예요. 이씨가 구속된 건 신총장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지검에서는 풀어주지 않았습니까. 대검은 나름대로 수사를 열심히 했어요.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더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특검수사가 진행되면서 검찰에서 부실수사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신총장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언론보도에 따르면 신총장은 대검수사가 끝난 다음에 “특검 아니라 특검 할애비가 와도 더 나올 게 없다”고 장담했다는 것 아닙니까.

    “수사결과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특검을 맡은 후 예전에 저와 함께 근무했던 검사도 ‘검찰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 나올 것이 없을 것’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수사라는 것은 100%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 수사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수사팀이 다시 하면 또다른 것이 나올 수 있겠죠.”

    ―그런 일반론적인 얘기말고요. 예컨대 옷로비사건 때 김태정씨가 법무장관인데 검찰이 그 부인을 수사한 것을 두고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현직 검찰총장 동생을 총장 직속인 대검 중수부가 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 아니냐는 지적이지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실제로 수사를 해보시니 어떻던가요. 당시 대검 수사팀이 총장 동생 문제로 발목이 잡혀 수사에 제약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지는 않았습니까.

    “글쎄요. 나는 신총장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전해 듣기로는 상당히 결백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뭘 알면서 일부러 은폐할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죠. 특검팀은 계좌추적을 했잖아요, 신승환씨에 대해. 그런데 대검은 안했죠. 수사의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까.

    차특검은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며 비껴갔다.

    “계좌추적, 압수수색을 상당히 활용했죠. 이용호나 김영준 같은 사람이 조금만 입을 열어줬어도 우리가 좀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협조를 안 해줬어요. 그런 점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수사했다고 할 수 있죠. 현금 수십억원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데도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아요. 사실 현금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추적이 불가능하거든요. 그 점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검에서 이수동씨와 이용호씨 관계를 수사했던가요.

    “안했어요. 이용호씨는, 이수동씨가 돈을 받았다는데도 자기는 준 적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에요. 수사기간 내내 철저히 입을 다물었어요.”

    ―김영준씨와 정상교(L가구 이사)씨는 검찰에서 못 잡았던 것 아닙니까. 특별한 방법이 있었나요.

    “그 점에서는 유영돈 경위를 칭찬할 수밖에 없어요. 강남경찰서 강력반장인데 특검팀에서 검거조로 활약했지요. 그 사명감이라는 건 대단했어요. 밤잠을 설치면서 사람 잡는 데만 몰두했으니까. 대여섯 사람이 할 일을 혼자 해냈습니다. 휴대전화 발신지를 확인해 사람을 추적하는데, 정말 눈부신 활약을 보였죠.”

    이형택씨 수사에는 보물발굴수익 지분 관련자료를 찾아낸 SBS 특종보도가 한몫했다. SBS 보도 때문에 이씨에 대한 수사가 예정보다 빨라졌다.

    ―이형택씨는 국가기관에 로비한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죠.

    “부인한 건 아니죠.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부탁하고 해군을 찾아가 관계자들에게 얘기한 것은 시인했죠. 다만 대가성을 부인했을 뿐입니다.”

    ―보물선사업 자체는 문제 삼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국익에 관계된 것이라면 국가기관간에 업무협조를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적절치는 않다고 보죠.”

    ―이기호씨는 최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자기가 이형택씨 얘기를 듣고 국정원에 연락한 것은 정당한 업무였다고 주장했어요. 보물선사업이 국익 측면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기 때문에 업무협조 차원에서 국정원에 얘기했다는 주장입니다.

    “글쎄요. 그 분은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경제수석이 국정원 차장한테 직접 얘기한 것은 적절한 업무협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그런 취지라면 개인적으로 업무협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공식회의를 통해 조직적으로 해야죠.”

    특검수사가 끝난 것은 3월25일. 야당과 언론에서는 수사기간을 연장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특검팀은 이에 반대했다. 이를 두고 특검수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특검이 이것저것 잔뜩 벌여놓고 뒷감당이 안될 것 같으니 수사기간 연장에 반대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꺼내자 차특검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대통령 아들 문제가 막 불거지는 시점에 수사가 끝나니까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지 못할 텐데, 105일 동안 거의 매일 밤잠을 설치고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아마 취재기자들은 잘 알 겁니다. 우리가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기력이 탈진됐어요, 우리 팀 전체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사람들이 특검에 파견돼 올 때는 최대 105일이면 끝난다, 105일이 지나면 각자의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에 맞춰 각자의 일정을 조정한 상태에서 특검일을 시작했거든요.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수사를 더 하라고 하면 몇 사람은 사표를 내고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죠. 신체적으로 지쳐있는 데다 각자의 계획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야당이나 언론의 태도가 야속했겠습니다.

    “좀더 해주기를 바란다는 건 사실 우리한테는 고마운 일이죠. 그만큼 좋게 평가해준다는 얘기니까요. 우리 형편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도저히 못한다는 것뿐이지 야속할 건 없지요.”

    ―대통령 아들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지요. 특검이라면 그것을 밝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토대를 만들어놓은 것으로 우리 임무를 다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검찰간부 수사기밀누설 문제는 어떻게든지 마무리를 지어서 검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그것까지 넘겨주게 돼 검찰에 미안한 심정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이수동씨를 불러 그에 관한 진술을 확보하려 했죠. 그런데 나중에는 이씨가 몸이 아프다며 링거를 맞고 휠체어를 타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죠.”

    ―수사팀에서 잠정결론을 내린 걸로 들었는데요.

    “심증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심증만으로 수사할 수는 없지요.”

    언론보도에 따르면 차특검은 수사팀에 자비로 보너스를 지급했다고 한다. “수사활동비가 부족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국가 예산이라는 게 다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고는 허허 웃었다.

    ―국가에 봉사하는 건데 사재를 털어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희생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길가에 민들레가 꽃을 피워 사람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기 직분을 다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태어났다고 보거든요. 뭔가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자기 희생도 하는 거지요. 자신의 사회적인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때 세상사는 보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가치 없이 살다가 죽는 건 의미 없는 일이죠.”

    ―사람들에게는 이중적 잣대가 있는 것 같아요. 큰 정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정의는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정의를 부르짖다가도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정의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지요.

    “저는 성악설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착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이라고 봐요. 사회적으로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보거든요. 만약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만 모였다면 사회가 발전하겠습니까.”

    차특검은 아내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평생 사랑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다. 인터뷰 초점이 ‘특검 차정일’보다 ‘인간 차정일’에 맞춰진 만큼 마지막으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사법대학원 1학년 때 친구 소개로 만났죠. 지금은 사법연수원으로 불리는데, 그때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으로 2년 코스였어요. 아내는 그때 한국은행에 다니고 있었는데, 오래 사귀었죠. 그쪽이야 결혼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우리 집안이야 아까 얘기한 것처럼 집도 없던 처지였기 때문에 결혼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어요. 한 4∼5년 사귀었나 봐요.”

    ―부인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습니까.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중하로 따지면 상에 속했죠.”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셨습니까.

    “저는 첫눈에 반한다는 건 별로 믿질 않아요. 오랫동안 서로 지내보면서 얼마나 교감이 오가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 싫어지는 사람이 있고, 만날수록 좋은 사람도 있잖아요. 후자에 속한다고 봐야죠.”

    ―젊었을 때 부인에 대한 느낌과 지금 느낌이 어느 정도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전적으로 나를 이해해주고 영원히 내 편이라는 느낌이죠.”

    누군가가 자신을 전적으로 이해해준다는 것은 여간한 축복이 아니다. 차특검은 “어떤 점을 보고 평생 반려자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굳혔냐”는 질문에도 같은 대답을 했다. 거기에 ‘헌신적’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그의 부인은, 말하자면 전업주부다. 한때 학교에서 강의한 것을 빼곤 특별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집안일은 좀 도와주시는 편인가요.

    “그건 우리 집사람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이에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면 다른 걸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못마땅해하죠. 뭐 하나 하면 항상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집안 잡일은 거의 도와주지 못하죠.”

    ―혹시 살아오면서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를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가 웃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이들한테 좋은 아빠 노릇을 해오신 것 같습니까.

    “부모님한테 내가 별로 받질 못했기에, 자식한테 고통을 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신경은 많이 썼습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족함 없이 잘 뒷바라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대화는 자주 하십니까.

    “과거에는 자주 했죠. 지금은 성인이 됐으니 자주 하진 않지만, 항상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 관심사가 건강과 재산증식인데요.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건강에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일주일에 몇 차례 헬스클럽에 가 운동하고 일요일마다 등산을 빼놓지 않죠. 그런데 재테크 측면에서는 둔재죠. 아주 둔해요. 계산에 어두운 데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 재산만 있으면 되지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냐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어렸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잘사는 거니까.”

    ―주식 투자는 안하십니까.

    “전혀 해본 적이 없어요. 검찰에 있을 때 재형저축은 했지만 그것을 주식투자라고 할 수는 없겠죠.”

    ―주변 법조계 인사들은 대개 그런 성향인가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제 주변에도 재테크나 이재에 수완이 있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꽤 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 차라리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차특검은 담배는 안 피웠다. 검사 시절엔 하루에 세 갑까지 피웠는데 끊은 지 10여 년 됐다고 한다.

    ―수사를 하면서 많이 외로우셨을 법한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계속 외로웠죠. 전화를, 사무실에서건 집에서건 일절 안 받았죠. 그렇게 수도승처럼 지냈어요. 뭐든지 최종결정은 지휘관이 해야 하잖아요. 처음엔 워낙 바빴던 탓인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갈수록 외롭다고 느꼈죠.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그랬어요. 어떨 때는 누구와 얘기하고도 싶었지만 끝까지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나면 어떤 운명을 예감하듯 서늘한 느낌에 젖을 때가 있다. 그는 어떨까. 자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난 후 찾아들기 마련인 허탈감을 맛보고 있을까. 그의 부탁에 따라 여직원이 차를 한 잔 더 내왔다. 세번째 차다. 차를 마시며 10여 분 가량 여담을 나누었다. 그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검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검찰총장을 꿈꾸지 않느냐”는 물음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요” 하고 웃었다. 사무실 벽에는 한 시민이 보내온 족자가 가로로 길게 걸려 있었다. ‘여러분은 바로 우리 모두의 희망’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차특검은 이번에 수사를 하면서 신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하나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어요. 인간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사기간엔 열심히 교회에 나갔어요. 앞으로는 (신앙생활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누구처럼 한때 이름을 날리거나 고위직에 오르지도 못했던 ‘평범한’ 검사 출신인 그가 특검을 맡은 것은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고 “인생을 바꾸는 계기”였다.

    “그전까지 나름대로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됐어요. 어느날 정재헌 변협 회장께서 전화를 걸어와 특검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시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이건 내가 맡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맡고 있는 사건도 있어 고사했죠. 그런데 거듭 간청하시기에 함께 활동하는 손진곤 변호사와 상의했더니 ‘사건은 내가 대신 맡아 처리해주겠다’며 적극 권하더라고요. 또 사시 동기인 반헌수 변협 사무총장도 같은 얘기를 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국가에 봉사하겠냐 싶고 사람은 뭔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이런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드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맡게 됐죠.”

    ―수사를 시작할 때 자신감이 있었습니까.

    “자신감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특별히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어요. 검찰에서 나름대로 수사를 잘했기 때문에 특검이 해도 별로 나올 게 없을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검찰 내 비호세력도 수사대상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았는데, 과거에 김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나요?

    “전혀 없습니다. 저야 TV 등을 통해 알지만 그분은 저를 처음 보셨죠. 악수를 해본 것도 처음이고.”

    -청와대에는 처음 들어가 보셨습니까?

    “처음은 아닙니다. 대통령 접견실에는 처음이지만, 검사 시절 민정수석실에는 업무관계로 한두번 가본 일이 있죠.”

    ―검찰수사가 잘못됐다는 여론이 부담스러웠겠습니다.

    “부담스럽긴 했죠. 그렇지만 결론이 검찰수사와 같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을 은폐해서도 안 되지만 억지로 만들 수도 없으니까요.”

    지난해 12월1일 특검에 임명된 차변호사가 수사준비를 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수사팀 인선이다. 검찰과 경찰, 금융감독원에 ‘능력 있는 사람 몇 명을 보내달라’고 소극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조사를 거쳐 아예 이름을 명시해 특정인의 파견을 요구했다. 그 결과 계좌추적 1인자와 검거실적 1인자 등 ‘일기당천’의 수사팀을 꾸릴 수 있었다.

    “최적의 상태였다고 평가합니다. 두 번 다시 그렇게 모일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하고 좋은 사람이 모였어요.”

    ―1999년의 파업유도 발언사건이나 옷로비사건 특검 때는 수사팀 내에 출신성분에 따른 갈등이 만만찮았습니다. 신승남 전검찰총장 동생을 수사할 때 검찰 출신 변호사나 파견검사들이 이견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검찰팀’은 아예 수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차단했습니다. 검찰에 상당히 민감한 부분인 데다 검사들 자신도 심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이상수 특검보도 제외시켰어요, 검찰 출신이니까. 재조 경력이 없는 김원중 특검보를 중심으로 변호사팀을 가동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사했어요. 검찰이 관계된 부분은 ‘검찰팀’에서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죠.”

    ―수사와 관련된 부분은 뒤에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이력을 보니 서울지검 공판부장검사를 끝으로 1990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셨는데요. 검찰을 일찍 떠나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었습니까.

    “검사나 부장검사까지는 관리자가 아니죠. 부장검사까지는 나름대로 소신 있게 검사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관리자가 되면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고, 소신대로 일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도 부하직원한테 지시해야 하고. 물론 상부 명령에 불복하면서 충돌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그런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또 하나는 저는 원래 아주 가난한―극빈자라고 할까―환경에서 자라왔는데, 검사가 된 후 우리 식구만 부양하는 게 아니라 부모님 생활비도 부담해야 할 처지였어요. 애들이 커가면서 교육비도 많이 들었고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그만두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판단했습니다.”

    일찍 옷 벗는 검사 중에는 수사를 잘못했다든가 징계를 받았다든가 또는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특검에게는 그런 풍문이 뒤따르지 않았다. 사시8회 출신 중 선두를 달렸다는 얘기가 풍문이라면 풍문이다.

    ―극빈자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집안이 그토록 가난했습니까.

    “예. 우리 아버지가 능력이 없었다고 할까, 평생을 제과점 배달원으로 보내셨어요. 제 기억에 다른 일을 하신 적이 없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 대로 생활비나 학비를 꾸려갈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집에서 학비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가정교사 생활을 한 게 고시 합격할 때까지 한 10년간 계속됐어요. 남의 집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과외교사를 한 거지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벌어야 했습니다. 친구들 중에서 나처럼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한 것이죠.”

    차특검은 1965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당시 수석졸업자가 바로 5, 6공 때 검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박철언 전의원이다. 차특검은 2년 후 박 전의원과 나란히 사시에 합격했다. 역시 법대 동기인 이명재 현 검찰총장은 그보다 3년 늦은 사시11회 출신. 대학 졸업 후 은행에 다니다 뒤늦게 시험에 붙은 탓이다. 이총장은 박 전의원의 경북고 1년 후배이기도 하다. 한편 심재륜 전 고검장은 차특검의 서울고, 서울대 1년 후배인데, 사시기수로는 한 기수 빠르다. 차특검의 서울대 법대 동기생은 약 300명. 학비와 생활비 벌기에 바빴던 그는 동기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저 같은 경우는 가정교사 생활하느라 동기들과 친할 기회가 별로 없었죠. 거기에 법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다보니 공부할 시간도 별로 없었어요. 동기생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저는 바깥에서 맴돌았죠.”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애초 그의 꿈은 판·검사가 아니었다.

    “사실 사시 쪽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걸 위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입학할 때는 신문사 사회부기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률 공부도 특별히 하지 않았죠. 1, 2학년 때는 대학신문에서 일하느라 법률책 한번 펴보지 못했어요. 3학년 올라가 법률책을 처음 사서 만져봤으니까.”

    ―사시 쪽으로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지내다보니 학교 분위기가 고시 공부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저도 그 분위기에 휩싸였어요. ‘기왕 내가 여기 들어왔는데 나중에라도 공부 안하고 놀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남들과 같이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면 기대가 남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아무도 제가 공부하는 것에 관심을 갖거나 충고해준 사람이 없어요. 말하자면 개척자라고나 할까. 부모님은 인수분해도 몰랐던 분들이니까요.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해야 하는 처지였던 아버지에게는 꿈이란 게 없었죠.”

    그의 아버지는 작고했고 어머니는 현재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여동생은 남편이 젊어서 암으로 죽는 바람에 일찌감치 홀몸이 됐다. 어머니 생활비는 그가 대고 있다. 집안에서 법조인은 그가 처음이다.

    ―집안의 큰 경사였겠습니다.

    “경사로 볼 만큼 안목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아, 이제 우리 집안도 살게 됐구나, 하는 정도였죠.”

    ―우리나라에서 검찰은 대단한 권력집단이고 엘리트 계급이지요. 그 기득권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는 그렇게 야심이 있는 축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당시 저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판단했죠.”

    ―혹시 인사와 관련해 검찰 조직에 좌절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까.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죠. 부장검사까지는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올라가는데 관리자는 가만히 앉아선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차특검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지내다 변호사 개업을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검찰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주변에서 명예보다는 실리를 찾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지요. 특별히 실익을 추구한 건 아니었지만 봉급 가지고는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 건 사실입니다. 1990년 부장판사를 하던 홍석제 변호사와 함께 개업했는데, 그때까지 부장검사 출신과 부장판사 출신이 공동 개업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죠. “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며 검사 시절엔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맛보았다.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따른 성취감”이었다.

    “개업 초기 김복수라는 할머니 사건을 맡았어요. 어떤 사람이 이 할머니의 집을 빼앗았는데 적반하장으로 할머니를 횡령죄로 고소까지 한 사건이었습니다. 1심에서 할머니가 패소했어요. 그런데 제가 맡아 무죄를 이끌어내 집을 찾아줬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할머니가 사무실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이렇게 훌륭한 분인지 몰랐다’며 고마워하더군요.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보람도 느꼈고.”

    ―검사와 변호사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셨을 법한데요.

    “그랬죠. 검사 시절엔 그 사람한테 유리한 점보다 불리한 점을 찾았어요.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 같은 사실이라도 그 사람한테 유리하거나 정상참작이 되는 쪽으로 보게 돼요.”

    차특검은 1997년 말 변호사 사무실을 문 닫고 캐나다로 떠났다가 1년 후 귀국했다. 특검 수사기간 중 그에게 따라붙었던 소문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민을 준비했다느니 외환위기 때 환차익을 봤다느니 하는 소문이 그것이다.

    “함께 변호사 활동을 하던 홍석제 변호사가 골프를 치고 혼자 운전하고 돌아오다가 터널벽을 받아 즉사했어요. 매일 보던 친구가 그런 일을 당해선지 한동안 충격이 큽디다. 그후 변호사 업무에 점차 흥미를 잃게 되고 매너리즘에 빠지더라고요. 뭔가 전기(轉機)가 필요하던 차에 딸에게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딸이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한 대학의 교환학생으로 가게 됐어요. 마침 잘됐다 싶었습니다. 딸도 공부하고 나도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삶의 전기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에서 떠났죠. 모처럼 자기 과거를 돌아볼 기회도 갖고 그곳 대학에서 경제 공부도 하고 1년 만에 돌아왔어요. 이 일을 두고 제가 환차익을 봤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문이 났어요. 당시 출입국 비자를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제가 1997년 12월30일에 떠났는데 그때 환율이 1800대 1이었어요. 얼마나 올랐습니까. 그래서 달러도 당장 필요한 것 외에는 바꾸지도 못한 채 출국했어요. 한국인들이 IMF 사태로 고통을 겪는 데 동참하는 뜻으로 캐나다에서 차도 없이 버스 타고 지냈어요. 완전한 낭설이죠.”

    한편 그의 아들은 고교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그후 귀국해 군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4월부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이민을 생각해보신 적은 없나요.

    “내가 거기서 뭘 하고 삽니까. 국제변호사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할 게 있어야 이민을 갈 것 아닙니까. 평생 법률 공부한 것밖에 없는데 외국에서는 그걸 써먹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캐나다에서 해보실 만한 일이 없던가요.

    “내가 해볼 만한 일은 현지 로펌에 들어가는 정도인데 자격이 없으니…. 할 일이 없죠, 노는 것 외에는. 어학도 공부하고 법률공부도 하다 왔습니다.”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삶의 질은 확실히 여기하고 다르죠. 한국은 좁은 땅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바글바글하고 시끄러운데 거기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린다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죠. 꼭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란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빈둥빈둥 놀면서 산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니에요.”

    ‘평범한’ 검사 출신인 차정일 변호사가 차정일 특검으로 거듭난 데는 검찰의 ‘공’이 크다. 검찰이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수사를 했더라면 특검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차특검은 검찰위기의 첫째 요인으로 ‘정치검사’를 꼽았다.

    “검찰이 바로 서려면 정치검사가 사라져야 합니다.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독자적으로 수사하려면 정치권, 또는 정권 실세들과 단절돼야 합니다. 정권의 방패막이라느니 시녀라느니 따위의 비난도 정치검사 때문입니다. 소수의 정치검사가 지휘체계를 흔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정치검사가 사라졌을 때 진정한 검찰 독립이 이뤄질 거로 봅니다.”

    ―김대통령이 검찰을 원망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검찰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청와대의 잘못된 인사가 검찰을 망친 주요인이 아니냐는 비판이었지요. 굳이 잘잘못을 가리자면 어느 쪽에 더 문제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정치권에서도 검찰을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었고, 일부 검사는 스스로 정치권의 활용 대상이 돼 그것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 정권 실세와 연결돼 주요 자리를 차지했지요. 어느 일방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양쪽이 서로 호응해 검찰조직을 망쳐놓았습니다. 과거에도 검찰에 그런 풍조가 있었어요. 청와대나 안기부에 파견되는 것을 기피하는 게 아니라 그런 기관에 파견된 검사를 유능하게 여기는 풍조였지요. 검사는 어디까지나 검찰에서 인정받아야 해요. 검찰권이 엄정하게 행사돼야 국가기강이 서고 나라의 기틀이 잡힙니다. 국민들로부터 다른 기관은 못 믿지만 검찰은 믿는다, 검찰에 가면 정의가 밝혀진다는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검찰이 망가지면 국가기강이 무너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무너지는 거나 마찬가지죠.”

    ―현 정권에서 검찰의 정치권 유착이 과거보다 심해졌다고들 하는데요.

    “과거부터 누적돼온 결과지 현 정권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화됐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5공이나 6공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권이 검찰을 휘어잡았지요.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죠.”

    차특검은 1993년초 문민정부 사정수사의 신호탄이었던 슬롯머신사건 때 박철언 의원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무료변론이었다. 당시 박의원은 슬롯머신업자 정덕진씨 형제로부터 5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박철언씨의 무죄를 확신하셨나요.

    “정치가니까 사람들한테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적어도 그 사건에 관한 한 돈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인정됐잖아요.

    “유죄가 인정됐더라도 각자의 소신은 있는 거지요. 헌 수표로 건넸다는데, 계좌추적에서 밝혀진 게 없었어요.”

    ―당시 여론 때문에 박철언씨를 변론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까.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고 동기생이라는 이유로 맡은 것뿐입니다. 또 전적으로 내가 책임진 것도 아니고 대학동기 여러 명이 변론을 맡았기 때문에 크게 심혈을 기울인 사건은 아니었어요.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모 변호사가 주전이었고 저는 보조만 했어요.”

    화제를 변호사업계로 돌렸다. 문민정부 시절 변협은 법조개혁에 반발했다. 당시 핵심 개혁안 중 하나가 사시합격자 정원을 늘리는 것이었다. 차특검은 이에 대해 “숫자만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며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국민 1인당 변호인 수가 적다고 하지 않습니까?

    “선진국하고 비교만 할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미국 같은 나라는 법이 생활화돼 있기 때문에 웬만한 분쟁은 다 법으로 해결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법보다는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보니 법정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죠. 미국은 또 법무사 관세사 공인중개사가 따로 없고 그 업무를 변호사가 맡습니다.”

    ―당시 법조계의 반발에 비난 여론이 일지 않았습니까.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냐는.

    “찬반 얘기가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많이 뽑는다고 하니 이쪽으로 생각지도 않다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생기지 않았습니까. 고시공부를 많이 하는 풍조가 좋은 건 아니잖습니까. 유능한 인재가 몇 년씩 고시에 매달려 끝내 폐인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변협 회원이실 텐데요. 변협이 이익단체로서의 성격이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최근 활동을 보면 변협에서 변호사이익을 많이 보호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봉사활동을 요구하는 등 오히려 공익적 요소가 강하게 부각된 것으로 보는데요. 또 징계위원회를 통해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옛날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익단체적 성격이 약화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심지어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점점 힘들게 하는 변협이 뭐 필요하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그는 “변호사업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며 “고소득을 올리는 변호사도 많지만 반수 정도의 변호사는 현상유지가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민들한테는 형사사건 수임료가 너무 비싸지 않나 싶습니다. 법적 상한선도 없고, 규제도 없지요. 개선방안이 없을까요.

    “자본주의사회니까 수입이 많은 변호사도 있는 반면에 수입이 적어 변호사 그만두고 페인트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택시기사 하는 사람도 나오는 거지요. 수임료를 얼마씩 받으라고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시장경쟁 원리니 어쩔 수 없다는 거죠.

    “다만 그 방법은 공정해야겠죠. 이게 장사는 아니니까. 돈벌이를 위해 브로커를 고용한다든지 하는 일은 안되죠. 기본적으로 변호사라면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하겠죠. 그렇다고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한테 봉사를 요구하는 건 무리죠.”

    차특검은 “권위자도 아닌 사람한테 자꾸 물어봐서 뭐합니까” 하며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최성진 변호사라고, 판사 출신인데 전관예우를 거부해 화제가 됐더군요. 전관예우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닌가요.

    “없어져야죠. 지금은 옛날과 달리 전관예우 풍토가 많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특검께서는 과거에 전관예우의 덕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덕을 안 봤다고 할 수는 없죠.”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불합리하지만 당시에는 인지상정으로 그렇게 했죠.”

    전관예우와 더불어 법조계에서 오랜 관행으로 논란이 돼온 것이 전별금 풍습이다. 1999년 대전법조비리사건 당시 이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올라 몇몇 고위직 판·검사가 옷을 벗었다.

    ―검사 시절 전별금을 받아보셨습니까.

    “받아봤죠.”

    ―대전법조비리사건 당시 수사결과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지요.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의 항명파동이 있었고, 평검사들이 검찰 지휘부 사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까지 벌였지요. 당시 사태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글쎄요. 나는 전별금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전별금이라는 것은 본래 새로운 임지로 떠날 때 교통비나 이사비에 보태 쓰라고 십시일반으로 건네주는 것이거든요. 상부상조하는 측면이 있었죠. 그 지역에서 알고 지내던 유지들도 석별의 정을 나누는 뜻에서 돈을 주는 것인데, 그게 지나치게 많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몇 만원 정도의 전별금을 받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이 있죠. 다만 그런 뜻이 아니라 앞으로도 자기를 잘 봐달라는 뜻으로 주는 것이라면 문제지요. 그건 전별금이 아니죠.”

    ―변호사들이 판·검사에게 건네는 전별금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까.

    “사시 동기라든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그 지역을 떠날 때 석별의 정으로 전별금을 주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전법조비리사건 당시 그런 경우까지 다 처벌한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라리 그때 검찰 책임자가 ‘지금까지 이런 풍토가 있었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정 처벌이 필요하다면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면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변호사들이 판사와 접촉하는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그건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령 변호사가 자기가 맡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해 향응을 베푼다거나 돈을 준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죠. 하지만 새로운 임지로 떠날 때 주는 전별금, 즉 그동안 우리 지역에 와서 수고했으니 그냥 보내기 아쉽다고 해서 주는 돈마저도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화제는 다시 검찰개혁으로 돌아갔다. 차특검은 공정한 인사가 검찰개혁의 열쇠임을 강조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인사입니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면 인사가 공정하고 원칙에 맞게 운용돼야 합니다. 지금은 어떻게 운용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검찰인사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대검차장이 위원장이었는데, 자문기관이라 별로 힘을 못 쓰고 유명무실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문기관이 아니라 의결기관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죠. 인사가 제대로 되면 다른 문제는 쉽게 풀 수 있죠. 능력 있고 윗사람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인사가 확립된다면 정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죠.”

    차특검은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특검제 상설화는 반대했다.

    “특별검사는 비상조치적 성격이고 한시적인 제도죠. 검찰이라는 조직에는 고시에 합격한 우수한 인적자원이 몰려 있어요. 전문성도 있고 수사경험도 많이 축적돼 있어요. 이런 조직을 잘 활용해야죠. 일본의 경우 검찰을 국민이 신뢰합니다. 일본에서는 특별검사제를 한다는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죠. 그런데 우리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니까 특검이 나서면 제대로 되지 않겠냐는 기대감에서 특검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국가는 정상적인 조치로 운영돼야지 비상조치로 운영되면 안되죠.”

    ―여당 법사위 몇몇 의원도 특검제 상설화를 주장하는데요.

    “특별검사제도 입법화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는 지금처럼 구체적인 사건마다, 가령 ‘이용호 게이트’라고 하면 ‘이용호 게이트’에 관한 특별검사 법률안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일반적인 특별검사법을 만들어놓고 고도의 정치적인 사건이라든지 고도의 권력형 비리사건이 발생하면 국회 의결을 거쳐 특별검사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일반법을 만들어 상설화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면, 옥상옥인데, 특별검사제를 할 필요가 없죠.”

    오전 11시50분이 되자 차특검은 “식사 약속이 있다”며 “더 할 거냐”고 물었다. “수사와 관련된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끝낼 수가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오후에 인터뷰를 재개할 것을 약속했다. 오후 2시, 특검사무실에 다시 들어서자 직원들이 의아해 했다. 안내하는 직원이 “아직 (인터뷰가) 안 끝났냐”며 농담조로 “특검님을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제부터 특별수사와 관련해 여쭤보겠습니다. 특검수사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특별히 큰 수확이라고 지적할 만한 건 없다고 봅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보죠. 수확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말이에요.”

    ―그래도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은 없구요. 우리가 수사의 대가는 아니지만 수사라는 것은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상을 발견하기 위해 기초를 쌓아놓고 계속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이죠. 우리끼리는 실체 진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에 최대한 접근하는 것이 수사과정이지요. 그렇기에 어느 부분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죠.”

    ―우문에 현답인 것 같습니다. 이수동씨는 동교동계 가신 중 최고참으로 오랜 세월 김대통령을 보좌해온 측근입니다. 청와대에도 자주 드나들고 대통령 내외의 사적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수동씨를 수사하기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습니까.

    “잘 몰랐어요. 이수동씨가 이 사건으로 구속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이용호 게이트’가 경제범죄사건이기에 수사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이 계좌추적이었어요. 이수동씨가 받은 돈의 경우, 이용호씨가 자기 회사에서 현금으로 5000만원을 갖고 나와 은행에서 1000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으로 바꿔 이수동씨한테 건네준 돈입니다. 회사에서 가지급금이 현금으로 나간 경우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죠, 본인이 말을 하지 않는 한.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현금 5000만원을 1000만원짜리 수표 다섯장으로 바꾸면서 수수료를 1000원 낸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수표발행 수수료죠. 이 영수증이 어느 은행 것이냐, 어떤 수표를 발행했냐를 추적했습니다. 그러니까 수표 다섯 장이 나왔고 수표 행방을 추적하니 여자 두 명이 그 수표를 사용한 사실이 확인됐어요. 그 두 여자를 조사해보니 이수동씨가 그 수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죠. 만약 수수료 영수증을 무심코 지나쳐버렸다면 이수동씨 관련 사실은 영원히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1000원짜리 수수료 영수증은 이용호씨 회사의 경리장부에서 찾아냈다. 차특검은 “계좌추적팀이 밤 10시까지 추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대통령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이수동씨 수사가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도 얘기했지만, 첫째는 성역이 없는 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둘째는 순리와 정도에 따른 수사를 하자, 이 두 가지 기본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일절 성역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수동씨가 조사받는 태도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제가 직접 조사하지 않아서…. 아주 겸손하고 우호적인 태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특검팀을 고소했잖아요. 허위공문서 작성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인데, 어떤 사정인가요. 일부 진술이 빠진 조서에, 그것도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서명을 강요했다는 주장이죠.

    “제가 보고들은 바로는 검사가 이수동씨와 도승희씨 두 사람을 대질조사한 후 각자에게 상대방 진술은 보여주지 않은 채 서명날인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수동씨 불만은 왜 도승희씨 진술내용은 보여주지 않느냐, 왜 한참 있다가 조서를 갖고 와서 서명을 요구했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조서를 작성하더라도 결재권자인 상관에게 보고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다시 조서를 받아 보충한 다음 본인 서명을 받아야 하거든요….”

    여기까지 얘기한 차특검은 “공소유지를 안 한다면 모를까, 법정에서 다뤄질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입을 다물었다.

    ―옷로비사건 특검 때도 피의자인 정일순씨가 특검을 고소한 적이 있었지요.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어요. 언론 취재가 과열되다보니 우리가 하지도 않은 얘기가 신문에 실렸어요. 이수동씨 입장에서는 맨날 특검 관계자의 얘기라며 신문에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보도되는 것이 불만이었던 거죠. 그래서 특검 관계자가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고 고소한 겁니다. 그때 어느 신문에 이수동씨 진술이라며 ‘청탁을 해오면 대부분 다 들어줬다. 모 검사가 서울지검장이 되지 못했는데, 내가 뛰었으면 됐을 텐데’ 이런 내용이 실렸어요. 내가 조서를 다 봤는데 그런 말은 없어요. 이수동씨로서는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보도해 명예훼손을 하느냐’고 항의할 만한 일이었죠.”

    이수동씨가 특검팀을 고소한 날 차특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특검을 맡은 이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다. 고뇌 끝에 중간수사결과 발표라는 정공법으로 난관을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생각엔 이랬죠. 이대로 놔두면 취재경쟁이 과열돼 자꾸 오보가 나올 것이고, 그러다보면 특검 관계자에 대한 고소가 줄을 이어 수사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닥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습니다. 차라리 지금까지 수사한 내용을 투명하게 밝히고 더 이상 오보도 없고 고소하는 사태도 없도록 하자. 그래서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게 된 것이죠. 물론 특검법에 1회에 한하여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요.”

    ―일부에서는 특검이 ‘이용호 게이트’와 직접 관련 없는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됐지요. 언론개혁문건이나 이수동씨의 인사개입 부분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수사 본질과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계좌추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압수수색이에요. 객관적인 물증을 확보하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거든요. 물론 언론문건이나 인사청탁이 범죄사실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죠. 이용호씨가 이수동씨한테 주가조작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무마해달라며 돈을 줬어요. 그러면 과연 이수동씨가 그런 청탁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냐는 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죠. 그것말고 다른 인사청탁도 있었다, 언론문건 같은 것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은 중요한 정황증거가 되죠. 그래서 우리 수사범위에 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특검법에 당사자가 수사범위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면 고등법원에서 판단해주도록 돼 있어요. 몇 차례 이의신청이 제기됐는데, 고등법원에서 전부 수사대상에 포함된다는 판결이 나왔죠.”

    이용호씨와 공범관계로 인정된 김영준씨는 “나는 이용호도 아닌데 이용호 사건을 다루는 특검이 왜 나를 수사하고 구속하느냐”고 이의신청을 했다. 이형택씨도 자신이 개입한 보물선사업은 ‘이용호 게이트’와 직접 관계없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사실 특별수사 명칭으로만 보면 그렇게 볼 소지는 있죠. ‘이용호 주가조작·횡령’ 및 그와 관련된 ‘정·관계 로비의혹’이 수사대상이니까요. 그런데 그 문구만 두고 김영준씨가 수사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 따지는 것은 문제가 있죠. 우리는 이용호씨의 공범도 당연히 수사대상에 포함된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거죠. 이형택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이형택씨는 자신은 이용호씨의 주가조작이나 횡령과는 관계없고 보물 찾는 데 동참한 것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특검수사대상이냐고 이의신청을 했죠. 그렇지만 우리는 보물을 발굴했다고 신문에 광고 낸 행위를 주가를 조작하기 위한 사전활동으로 봤고, 역시 법원에서 인정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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