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마사회 300일, 고공투하 ‘낙하산’과의 反부패 전쟁

서생현 전마사회장

  •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 ojong@donga.com

    입력2004-09-03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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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마전의 대명사’ ‘낙하산 인사의 전형’이라는 불명예스런 꼬리표가 따라다니던 한국마사회는 2000년 12월 서생현 전마사회장의 개혁작업 결과 ‘부정부패추방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변신의 모습을 보였다. 서 전회장은 마사회를 떠나면서 “내가 떠나면 개혁성과를 지키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정직’ 이 한마디 말만은 명심해달라”고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최근 ‘구조조정용 살생부’ 명단 파문으로 다시 오명을 뒤집어쓴 마사회에 대해 서 전회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2001년 마권 판매 매출액 6조원을 돌파한 한국마사회. 황금알을 낳는 공기업이라서 그런지 역대 정권 대대로 정치권 출신 인사들이 즐겨 찾아와 둥지를 틀던 곳이다. ‘물좋은 자리’로 알려진 마사회장직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오경의 전회장에서 DJ정부의 윤영호 현회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번째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가 이뤄진 곳으로 유명하다.

    1998년 DJ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공기업 구조조정에서 ‘마사회 살생부’ 파문으로 구설수에 오른 오영우 전회장의 뒤를 이어 2000년 초 마사회 수장으로 부임했다가 10개월 만에 돌연 사임한 서생현(徐生鉉·66) 전회장. 그 역시 육군장성 출신이지만 여느 낙하산 인사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김영삼정부 시절 석탄공사 사장을 맡은 이후 현정부 들어서서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거쳐 마사회 회장을 역임하기까지 무려 3개의 공기업 경영을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빽’이나 ‘연줄’이 아닌 공기업 CEO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됐다. 실제로 그는 이른바 ‘서생현식(式)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독특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적자 상태의 석탄공사와 광업진흥공사를 흑자로 전환시킨 바 있다. 또 얼마든지 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전남 광양에서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도, 각종 이권 및 청탁 거절로 고향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다는 이유로 손사래를 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2년여의 ‘보장된’ 마사회장 임기를 남겨두고 “마사회 개혁을 위해 내가 할 일을 다했으며 여생은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면서 사표를 제출한 게 2000년 11월의 일. 그러나 당시 서 전회장이 물러난 진짜 이유는 ‘여당 낙하산 간부들’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적잖았다. 자신의 사퇴 배경을 놓고 이러저러한 말이 나돌았지만 서 전회장은 침묵을 지킨 채 미국에서 연수중인 아들(서대헌 서울대의대 교수)을 만나기 위해 출국해버렸다.

    2개월여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귀국한 서 전회장은 2001년 2월 순천향대로부터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기업 경영자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았기 때문. 원래 서 전회장은 마사회장 재직 때 대학측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회장 재임시에는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대학측은 서 전회장이 사임한 뒤 연락을 취해 학위를 수여했던 것.



    서 전회장의 학위논문 제목은 ‘최고 경영자의 구비조건’. 그는 이 논문에서 최고경영자가 되기 위한 조건, 인재발탁 기준, 리더의 비전 제시 등 자신이 3개 공기업을 경영하면서 체득한 최고경영자의 자질론과 철학관을 제시했다.

    그러다 지난 3월, 마사회 구조조정 과정에서 벌어진 ‘살생부 명단’ 사건이 세상으로 불거져 나왔다. 1998년 당시 마사회장으로 부임한 오영우 회장(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출신)과 이경배 부회장(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후원회 사무총장 출신), 황용배 상임감사(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 출신), 김태규 사업이사(새정치국민회의 연수원 상근 부원장) 등 경영진이 정치성과 지역성이라는 잣대로 직원들을 편파적으로 해고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 이로 인해 해직된 마사회 직원들은 승복할 수 없다면서 법원에 소송을 걸었고 그 과정에 살생부 명단 문건이 언론에 공개돼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서생현 전회장이 오 전회장의 뒤를 이어 마사회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이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사건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려 50여 가지에 달하는 마사회 개혁작업을 이끈 뒤 “내 할 일은 다했다”며 물러난 서 전회장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물러난 이후 ‘복마전’의 대명사로 불리던 마사회는 과연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는 서생현 전회장과는 인연이 있다. 그가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 인터뷰를 하면서 지나치리만치 정직과 청렴을 강조하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출세 지향주의와 금전 만능주의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같은 사람이 어떻게 ‘낙하산 인사’의 전형인 공기업 사장으로 발탁돼 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실제 공기업 경영에 투영시킬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이것이 서 전회장의 경영철학을 눈여겨 살펴보게 된 이유다.

    4월 초 진달래와 개나리가 활짝 펴 있을 무렵, 초야에 묻혀 살고 있는 서 전회장을 어렵사리 만나 인터뷰를 했다. 서 전회장이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지 않아 서울시내 다방과 공원을 오가면서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얘기를 취재수첩에 담았음도 밝혀둔다.

    “CEO가 약점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개혁저항 세력은 그 약점을 포착해 흔들려고 합니다. 한번 발목을 잡히면 개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임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허점이 보이면 그들한테 끌려다니게 됩니다. 두번째로 최고경영자는 모든 면에서 모범사원이 돼야 합니다. 직원들은 회장이 성실하게 일하는지 그냥 들러리로 앉아 있는지 금방 알아챕니다. 회장이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구나 하는 인상이 직원들에게 전달될 때 직원들도 마음이 동해 몸을 움직입니다.”

    서 전회장은 자신에게 약점이 없었기에 투명한 경영에서 노사화합에 이르기까지 50여 가지의 마사회 개혁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 서 전회장과 대립했던 마사회노조는 서 전회장의 개혁작업을 지지하며 그가 자진 사퇴할 때 황금 열쇠를 선물해주었다. 마사회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정권 말기에 들면 흔히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한다고 하잖습니까. 예를 들어 장관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려고 해도 공무원들이 정권 교체나 기다리면서 일하는 시늉만 보이면 개혁이고 뭐고가 잘 되지 않을 텐데요.

    “거, 말 한번 잘 꺼냈습니다. 저는 3개 공기업에 근무하면서 회사의 주요 현안은 반드시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임원회의가 만능이 돼선 안되고 주요 사항은 공기업의 처장, 실장 등 핵심적인 일을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운영회의에서 의견을 수렴토록 했습니다. 그들이 난상토론을 벌이다보면 생각도 못한, 좋은 기획과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또 자기들이 고안해냈기 때문에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서게 돼 있어요. 바로 그들이 회사의 주인들이니까요. 저는 이런 사항은 정부 부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봐요. 부서의 중·장기 플랜이나 중요 현안의 경우 서기관급, 필요하다면 사무관급도 참가시켜서 논의하도록 유도하고, 거기서 나온 것들을 그들 스스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장관의 역할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려면 역시 장관이 부하들에게 발목 잡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고 자기 직무에 성실해야 하겠지요.”

    서 전회장은 기자의 질문에 마치 답변을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막힘없이 얘기했다. 공기업 경영자로서의 독특한 노하우를 쌓다보니 직설적이면서도 시원스레 ‘해법’을 제시하는 듯 싶었다. 그런 그에게 기자는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서회장께서 마사회장을 그만둘 때 건강상 이유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무척 건강해보입니다. 임기를 2년여 남겨놓고 그만두게 된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제가 정부측에 약속한 대로 10개월만에 마사회 개혁작업을 해내고 내가 없어도 마사회가 잘 굴러갈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내 책임을 다한 것이지요. 또 개혁작업을 하면서 저는 하루 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고, 못 피우던 담배를 하루 3갑이나 피웠습니다. 항상 어금니를 깨물고 다니는 상황이어서 컨디션이 좋진 않았지요. 지금은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거지요.”

    ―어금니를 깨물고 다닐 만한 이유는 뭔가요.

    “허허, 거 참. 내 이것 하나만은 말해 드리지요. 누군가가 나한테 청탁을 해올 때는 3단계가 있어요. 처음은 당사자가 직접 찾아와서 이러저러한 부탁을 해요. 그러나 제가 이러저러해서 규정상 안된다고 거절하면 2단계로 들어갑니다. 마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치에 있는 ‘줄’들을 동원해요. 그래도 계속 버티면 내가 정말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을 최종적으로 동원해 담판을 지으려 합니다. 나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직접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그이의 부탁을 들어주면 나중에 출세하고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원칙은 한번 무너지면 그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아요. 내 평생 신념이 그렇게 흔들려서는 안되거든.

    그렇게 해서 2단계가 안 통하면 마지막으로 3단계에 들어가요. 그때는 나에 대한 뒷조사와 함께 매터도(흑색선전)가 흘러나와요. 뒷조사에서 뭔가 구린 것이 나오면 바로 철창행이에요. 내 뒤가 구렸다면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갔을 것이오. 그래도 안 통하면 예를 들어 ‘서생현은 집권여당의 정권창출에 방해되는 사람’이라느니 ‘야당 총재한테 줄을 선 사람’이니 해서 헛소문들을 내고 그것을 증폭시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보니까 여론조작이 훨씬 쉽지요. 아무튼 그래서 개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약점이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 전회장은 “세월이 더 지난 다음에 할 말이 있을 거요” 하고 답변을 피해갔다. 짐작건대 그의 성격으로 볼 때 3단계 매터도에 대해 서 전회장은 견딜 수 없어 한 듯했다. 제 아무리 청렴결백하다 해도 온갖 유언비어가 그럴싸하게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쉽게 버틸 수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서 전회장이 벌인 10개월간의 ‘부패와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외형적으로 보면 마사회는 서 전회장이 퇴임한 후 부정부패추방 우수기관으로 선정됐고, 후임 회장 역시 “(전임 회장 덕분에) 한결 일하기가 좋다”는 반응도 들려온다. 그런 반면 서 전회장이 실천한 50여 가지의 개혁작업이 어느 정도 후퇴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과연 서 전회장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을까, 아니면 실패했을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초야에 묻혀 살려는데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와 한가롭지가 못합니다. 대학 특강도 나가고 20여 군데에 강연하러 다녔습니다. 공직기관 강연회에서는 공직자의 청렴성과 도덕성을 강조하고, 일반 기관에 나가서는 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을 정직하게 살자’는 쪽으로 주제를 잡아 얘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직기관의 교육 담당자들이 서생현이를 강연회에 초청하겠다고 위에 건의하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기관장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대꾸도 없이 굳은 얼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제가 가면 으례 공직자의 청렴성, 도덕성을 강조하니까 ‘뒤가 구린’ 사람들은 싫어할지도 모르지요.(웃음) 반면에 김혁규 경남도지사 같은 분은 제가 경남도청에서 강연하는 것을 다 들은 뒤 산하 기관장들한테 제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어느날 그쪽의 모 기관장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는 ‘도지사가 공직자란 모름지기 서회장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데요.”

    ―우리 속담에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정직, 성실, 청렴이라는 말이 어찌보면 지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고 꺼려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고….

    “제 친구들도 저를 보면 적당히 살라고 충고합니다. 너무 그렇게 살면 나중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만년이 외롭다고 말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내 말이 맞다고 맞장구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저와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려하기도 하지요. 제가 이런 세상 사람들의 속내를 모르지는 않아요.

    얼마전에 고성군 고성경찰서장(박기선) 초청으로 고성군의 간부급 공무원들과 지역 유지 3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월드컵을 위한 공직자 기본자세’라는 주제로 두 시간 특강을 가진 적이 있어요. 제 강연을 듣고 난 뒤 한 인사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서선생님은 청백리의 표상으로 국보급 같은 존재이고 매우 감명을 받아 사인을 받으러 왔다. 다만 서선생님의 공직윤리관은 시대적 흐름과 변화에 비추어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해요. 그 분의 말씀도 일리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시대의 흐름이나 시세에 맞추어 살고 싶지는 않아요. 저 같은 외곬도 있어야지 우리 사회가 덜 심심할 것 아닙니까(웃음). 지금까지 인생을 제 원칙대로 살아왔고, 그런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공기업을 맡고 있을 때는 절대로 회사 직원을 집에 들이는 경우가 없지만, 그 기업에서 물러난 뒤 잊지 않고 명절 때 세배오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과일을 보내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제가 이제까지 인생을 헛 살아오지는 않았구나 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 활짝 웃는 서 전회장의 얼굴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한 기색이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50대의 혈색 좋은 얼굴로 보일 만큼 홍안(紅顔)이다. 서 전회장은 최근에 정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건강연령이 50대 초반으로 나왔다고 하면서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면 늙지 않는다”는, 그의 고유 트레이드 마크인 정직론을 또 한차례 설파했다.

    ―서회장 같은 분이 ‘복마전’으로 알려진 곳으로 부임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서회장을 아끼는 마음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광진공이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되고 제대로 자리를 잡아나가 공기업 경영자로서의 저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보였을 때인지라 저도 어디로 움직여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시 마사회 상급기관인 문화관광부의 박지원 장관이 저를 찾더니 ‘마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서사장 같은 개혁성이 강한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통령께서 새 마사회장 추천자로 올린 여러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단에 들지도 않은 서생현을 직접 지목하셨다’는 거예요. 주위에서 제가 마사회장으로 가는 것에 대해 만류하는 분위기도 있었는데, 대통령께서 챙기셨다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마사회장으로 부임하면서 1년 안에 정부측에서 내게 부탁한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즉 ‘복마전’이라 불리는 마사회의 오명을 씻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분규가 끊이지 않는 노사문제를 풀겠다는 것이었지요. 대신 저는 두 가지를 전제조건으로 달았어요. 첫째, 정치권 출신의 신임 부회장 내정자와 함께 개혁을 할 수 없으니 정치권 출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달라는 것과 둘째, 상급기관에 있는 박장관부터 마사회에 어떤 청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결국 제 뜻이 받아들여져 마사회로 간 것이지요.”

    서 전회장이 처음으로 밝힌 취임 배경이다. 서 전회장이 마사회장에 부임한 것이 2000년 1월5일. 서 전회장이 신임 회장으로 임명된 데 대해 마사회의 한 간부는 기자에게 “과천 서울경마장과 제주경마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대형 전광판을 수의계약하는 과정에서 경영진 사이에 알력이 빚어졌으며, 그 과정에 이 사업과 관계된 업자가 청와대에 투서하는 바람에 사직동팀이 내사를 벌인 바 있다”고 증언하면서 “서회장이 부임한 것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외에 사업이익률을 기존의 4.7%에서 6% 이상 높이라는 기획예산처의 주문에 반발해 마사회 노조, 조교사협회, 기수협회 등 경마 3단체가 합동으로 광화문 종합청사와 기획예산처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노사 대립이 심각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서회장이 마사회장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나돌자 언론에서는 ‘마사회가 떨고 있다’ ‘마사회가 오한이 들고 말았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마주협회, 조교사협회 등 마사회 관련 협회들도 긴장했다고 합니다만.

    “그랬던가요? 아무튼 저는 마사회장에 취임하면서 ‘나 자신부터 가장 정직한 모범사원이 될 테니 임직원을 비롯한 마사회 관련 인사들은 깨끗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청렴결백하지 못한 정신으로 공직을 수행하면 조직이 병들고 국민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요.”

    서 전회장은 공기업 직원들의 근무자세로 ‘정직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이지만, 막상 실천하자면 지극히 힘든 일이다. 기자는 광진공 사무실에서 액자에 새긴 이 글귀를 본 적이 있는데, 서 전회장은 그 이전의 석탄공사나 그 이후의 마사회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마사회가 복마전으로 인식된 원인 중 하나인 마사회 수의계약 건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저는 광진공 사장 시절에도 용역이나 물품 계약 등 조달업무의 경우 가능한 한 수의계약에서 공개 경쟁입찰로 전환시켰습니다. 수의계약 과정에서 있을지도 모를 잡음을 차단하자는 거였지요. 마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취임해보니까 경주마들이 뛰는 실황 장면을 보여주는 대형 컬러 전광판이 너무 낡아 새것으로 교체할 예정이었는데 6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돼 수의계약으로 추진되던 중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며 경쟁입찰에 부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체결 결과를 보니까 20억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낙찰됐어요. 그렇다고 전광판이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도 절대 아니었습니다.

    마사회는 크고 작은 것까지 다 합해 1년에 2000여 건의 용역 및 물품계약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취임하기 전인 1999년 94%에 달하던 수의계약률을, 제가 퇴임하던 2000년 10월말까지 8%로 낮췄습니다. 정부에서는 권유사항으로 공기업 수의계약률을 20% 내외로 제시하고 있지만, 저는 부정을 아예 막자는 뜻에서 이렇게 했던 겁니다. 물론 수의계약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은 아니고 어떤 경우는 회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마사회의 경우는 제가 판단하기에 대부분 공개 경쟁입찰로 해야겠더라고요.”

    ―흔히 마사회의 식당이나 매점 등 임대사업권은 고속도로 휴게소 사업처럼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어 웬만한 ‘빽’이 아니면 따기가 힘들다고 하던데요.

    “그게 바로 수의계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당과 매점 등 주요 임대물건이나 경마지 같은 간행물 판매소가 모두 수의계약으로 2∼3년간 업자에게 임대해주었더군요. 이게 돈이 되는 사업인지 전·현직 장관, 국회의원 등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 달려들더라고. 하긴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경마 때만 일하면서도 순수익으로 최소 월 500만∼1000만원씩 벌어들인다고 하니까 거저먹기 아니겠어요? 게다가 임대사업권을 딴 사람들이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2차, 3차로 사업권을 또 따니 신규로 이 사업을 해보려는 사람들에겐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이런 사업권을 마사회 간부들이 나눠먹기로 가졌대요. 매점이나 간행물 판매소의 경우 모두 250개 정도 되는데 회장이 몇 개, 부회장이 몇 개, 이사가 몇 개 이런 식으로 간부들 몫이 있었어요. 매점의 경우 한 개당 커미션이 3000만원이라고도 합디다. 나는 이런 관행을 뜯어고치기로 했습니다. 회장으로서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한동안 마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계약은 규모가 크든 작든 일일이 제가 챙겼습니다. 그래서 수의계약 형식은 무조건 사인하지 않고 돌려보냈지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알아서 공개 입찰로 바꿔오는 거예요. 이렇게 체계가 잡혀나가자 나중에는 아랫사람들한테 위임했지요.”

    서 전회장은 또 경마장에 있는 매점이 음료수, 빵, 김밥 등을 시중가에 비해 30∼50%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하는 것을 보고 이를 금지시켰다. 과천 시내에서 파는 가격대로 낮추게 한 것. 이에 대해 매점업자들은 상행위에 대한 월권 행위이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거세게 대항했다. 서 전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는 해수욕장이 아니라 공기업”이라고 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은 사람은 배상을 해줄 테니까 그만두고 나가라”고 맞섰다. 그렇게 마사회장에 맞선 매점업자 중에는 DJ정부 이전 마사회장을 지낸 사람의 직계 가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손해배상을 받고 나간 매점업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나중에는 서 전회장의 뜻대로 전부 가격을 낮췄다고 한다.

    “매점의 상품 가격을 낮춰도 순수익으로 월 300만원에서 500만원 정도는 벌어갑니다. 그 정도면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잖습니까.”

    서 전회장은 회장 직권으로 경쟁입찰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내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 전회장이 수의계약을 없애겠다고 말하니까, 마사회 간부 중 단 한 사람도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노사회의 때 노조측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들고 나와 서 전회장에 따지고 들 정도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았다는 것.

    “나하고 한판 붙어보겠다는 식이었지요. 그래서 노조측에 최고경영자가 회사를 투명하게 하고자 경쟁입찰제를 하겠다고 하는데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합당한 이유를 대보라고 하니까 제대로 말들을 못해요. 아마 당시 수의계약 라인에 있는 사람들이나 관계된 임원들이 노조를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했던가봐요. 나중에는 노조측에서 이해하고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사회 수의계약으로 먹고 사는 업자들도 바깥에서 나를 모략하고 다녔어요. 나보고 악덕업자래, 허허 참, 자기들이 악덕업자라면 모를까…. 내가 그런 것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엔 까마귀가 백로 보고 놀리는 짓이 허다해요.”

    서 전회장은 그때의 ‘아픔’이 기억나는지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해서 식당 등 주요 임대물건의 수의계약은 경쟁입찰로 하고, 매점과 간행물 판매소의 경우 국가유공자 중 비과세 대상자만이 신청할 수 있도록 회사 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세금을 못낼 정도로 가난한 국가유공자들이 임대사업권을 딸 수 있도록 신문공고로 공개 모집해 컴퓨터 추첨으로 배분케 했다.

    “어느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비서실을 통해 면회를 신청해왔어요. 우연히 신문을 봤다가 자신이 그 자격조건에 해당돼 혹시나 하고 신청해봤는데 덜컥 담청됐다면서 인사하고 싶다고 해요. 그 분은 한국전 때 부상당한 상이용사 출신인데 그동안 대한민국이 자신 같은 사람들을 섭섭하게 대우했는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면서 제 앞에서 눈물을 흘려요.

    제가 국가유공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치한 것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래요. 1985년 합참에 근무할 때인데, 미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갔었습니다. 제가 투숙한 호텔 앞에 센트럴파크라고 하는 큰 공원이 있어서 아침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공원 벤치에 한 동양노인이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그 분은 나보다 열세 살 더 먹은 한국 사람이에요. 벤치 옆에 목발이 있기에 말을 붙여보니까 한국전 때 부상당한 상이군인 출신이에요. 그러면서 자기가 미국까지 오게 된 사연을 얘기해요. 부상을 당해 군에서 제대하고 나오니까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병신 아들’이라고 학교 친구들한테 놀림당하고 있지, 자신도 일을 할 수 없는 처지라 배급을 타먹고 사니까 이웃사람들이 거지처럼 산다고 싫어하더래요. 나중에 아들이 커서는 애국자를 병신 취급하는 한국이 진절머리난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고, 자신은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살다가 아내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 아들에게 얹혀 살려고 왔대요. 그러면서 그 분은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면서 눈물을 줄줄 흘려요. 저도 그 분의 손을 붙잡고 함께 펑펑 울었습니다.”

    서 전회장은 25년이 훨씬 넘은 그때의 일이 새삼 기억났는지 눈이 물기로 젖어들었다. 목소리도 울먹거렸다.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눈물기를 닦고서는 “앞으로 내가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마사회장에 부임해 그 일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서 전회장은 175cm의 훤칠한 키에 눈초리가 매서워 첫인상은 차가워 보이는 편이다. 그러나 그를 겪어본 사람들은 매우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회장께서는 광진공 사장 이임식에서도 이임사를 읽다 말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눈물과 정이 많은 사람이 외부인의 청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정직하게 살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군인이 되기 위해 몸담았던 육사에서도 거짓말, 시험 부정행위, 여자라는 3대 금기사항을 실천하라고 배웠구요. 저는 이것을 양심을 따르고, 부정하지 말고, 사생활을 깨끗이 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정직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자’는 제 삶의 원칙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직성과 거리가 먼 청탁이나 외압은 체질적으로 멀리하는 성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할 수 있어요.

    (느닷없이) 이봐요, 기자 양반. 마사회 회장한테 이러저러한 인사청탁과 뭐를 해달라고 압력을 넣을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센 사람들이에요. 내가 그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밝히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내가 그런 사람들한테 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렇게 뻣뻣하게 살아오셨는데 어떻게 해서 육군소장까지 지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셨는지요.

    “거 참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나는 임관하고 나서도 불의에 저항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대신 내 능력껏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신임하는 윗분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저같은 사람은 보직이 ‘국물’이 안 생기는 분야, 예를 들어 인사나 보급 분야가 아닌 운용 분야 쪽으로 주로 배치됩니다. 그런데 그 분야가 군의 골간을 이루고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사람 없이는 일이 안된다’고 해서 승진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어쨌든 제 소신을 한번도 어김없이 지켜오면서 이만큼 살아왔으니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서 전회장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76년 3군사령부 전자과장을 시작으로 주로 통신분야의 전문 장교로 커왔다. 1978년 합참기획과장, 1979년 통신단장을 거쳐, 1980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부 통신참모로 일했고, 1982년 육군통신사령관을 지낸 데 이어 1985년 소장으로 진급해 합참지휘통제통신국장이 됐다. 1987년 군에서 예편한 뒤 잠시 항공화물협회 이사장, 세한금속 회장직을 맡다가 1992년 석탄공사 감사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공기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이듬해인 1993년에는 석탄공사 사장을 지냈고,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1998∼99)을 거쳐 마사회장을 맡았다. 또 현재 대통령직속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전남 출신의 예비역 장군인 그가 김영삼정부가 들어선 후 국영기업체 임원들이 일체 물갈이되는 상황에서 석탄공사 감사에서 사장으로 발탁된 데도 사연이 있다. 1993년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그를 불러 대뜸 석탄공사 사장을 맡아달라고 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장군 출신으로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 있었는가”하면서 서감사를 지목해 “석탄공사 사장에 임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흔히 마사회장 하면 물 좋은 자리로 알려져 있는데요. 회장 재직 때 급여를 얼마나 받으셨는지요. 서회장께서 마사회에 재직할 때 감사원 감사에서 마사회 소속 운전기사의 1999년 연봉이 6100만원이라고 밝혀져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잖습니까.

    “비록 1년도 채우지 못했지만 그때 제 연봉이 6400만원 정도 됐어요. 월급을 받아보니까 330만원 나왔는데 그중에 150만원은 직원들의 경조사비로 지출되고 집에 갖다주는 돈이 180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리고 업무추진비라고 해서 판공비가 월 250만원씩 나왔는데 저는 직원들과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는 일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어요. 나중에 절감한 돈은 부서의 업무추진비로 지원했구요. 지금은 제가 받던 때보다 조금 더 올랐을 거예요. 그런데 1997년 IMF 사태가 터지기 이전 전임 회장들은 판공비가 한 9억원 됐다고 말하더군요. 아마 이것 때문에 마사회장이 예전부터 물좋은 자리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가 회장 재직 시절에 불거진 운전기사 연봉은 좀 과장된 측면이 있어요. 어떻게 기사 연봉이 회장 연봉과 비슷하겠습니까. 그 기사 연봉은 4900여 만원인데 마침 20년 근속에 따른 보너스를 받았고, 정치인 출신으로 퇴임한 마사회 한 임원의 승용차를 운전하다보니 휴일근무와 시간외 업무로 760여만원이 추가된 데다 마사회에서 전세자금 2000만원을 무이자로 빌린 데 따른 이익 70여만원이 포함된 것이에요.”

    참고로 마사회측 자료에 의하면 현재 마사회장의 연간 보수는 7776만원이고, 부회장은 6280만원 선. 이사급 임원들의 경우 6000만원 내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서회장께서는 돈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는 것같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집에다 월급을 갖다주면 어디 은행 이자율이 높은 데 없나 하고 돈을 굴려볼 생각도 해봅니다. 단 정당한 돈이어야 하고 제 힘으로 노력한 돈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돈은 저하고는 상극(相剋)이고, 제 아내도 그런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서 전회장은 가난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서 전회장은 1963년 육군 중위 시절에 은행원 출신의 아내(정정애씨)를 만났다. 당시 쌀 한 가마에 2800원 하던 때인데 중위 월급은 3700원. 이 돈으로 쌀 들여놓고 주택 임대료, 연탄값, 수도세, 전기세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급여 일부가 밀가루로 지급된 적도 있었다 한다. 외아들인 대헌씨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돼 죽을 끓여먹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 어느날 서생현 중위가 출근하면서 아내에게 “오늘부터 도시락을 싸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에 쌀이 없으므로 점심을 굶기로 한 것이다. 영내에서 식당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 점심 때면 서중위는 빈 서류봉투를 들고 자리를 떴다. 당시 상관이었던 김세환 대위로부터 “왜 남편 도시락을 싸주지 않냐”는 말을 전해들은 부인 정정애씨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마사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마사회의 한 임원이 장외발매소 설치 건으로 뇌물을 챙겼다가 서회장이 퇴임한 후 들통나 검찰에 구속된 사건도 있지요.

    “참 간 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마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아니라 정치권 출신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밝히긴 뭐하지만 정치권 출신 중에서는 청와대를 팔거나 실력자 이름을 들이대면서 은근히 압력을 가해 공개 경쟁입찰제 같은 회사 규정을 완화시켜서라도 자기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도 있어요. 마사회가 무슨 이권사업을 따먹는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기회만 생기면 그러려고 하고… 그래서 낙하산 인사라고 지탄받는 겁니다.

    제가 부임해 보니까 마사회에 고문 제도가 있었어요. 법률고문이나 노사문제 고문 같은 것은 전문직이니까 회사에 도움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고문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비상임고문이라서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월급을 300만원씩 타가는 거예요. 마사회 직원들도 필요없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제가 봐도 그래요. 그래서 그 분들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물러나게 했습니다. 물론 이 분들이 예비역 장성, 전직 국회의원들이고 또 뒷줄이 든든한 사람들이라 저항이 대단했지요.”

    ―최근 언론에 불거진 구조조정용 살생부 사건은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가 취임할 때는 살생부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해고된 사람들이 억울하다면서 법원에 소송을 내고 있던 상황이라서 보고를 받긴 받았습니다. 저는 그 보고를 받고 법이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잘랐냐고 무척 화를 냈습니다. 구조조정이든 인사든 공정한 잣대로 공정하게 처리해야 조직이 살고 회사가 발전하는 겁니다.”

    참고로 마사회의 직원 살생부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현정부 주도로 공기업과 산하단체, 정부투자기관 등에 대한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마사회도 정리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2급 이상 간부들은 물론, 기능직과 기수 등 전직원에 대해 개인별로 현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와 정치 성향을 분석하고 이를 중요한 자료로 삼아 정리 대상을 선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마사회 현직 간부의 말.

    “나는 영·호남의 지역색과 무관한 사람이지만 마사회가 오래전부터 경북 출신의 정치권 인사들이 회장으로 부임해와 그쪽 출신 직원들이 혜택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호남 출신은 승진이나 표창, 외국여행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사회 내에 실제로 학연을 기반으로 한 특정 인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후 회장을 비롯해 호남 출신 임원들이 대거 부임하면서 무원칙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는 점이다. 사내에 특정 인맥이 파벌을 형성했다면 이는 회사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살생부 문건을 보면 출신 지역이라든가 직원들의 정치 성향까지도 파악해 사람들을 잘랐으니 당연히 해고된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겠는가.”

    ―서회장께서는 공정한 인사를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학연이나 지연 같은 것을 가리지 않고 능력 본위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조직을 잘 꾸려나가려면 우수한 사람을 그에 합당한 자리에 앉혀 놓으면 돼요. 고향 사람이나 학교 후배를 심어놔야겠다는 사욕은 금방 다른 직원들에게 드러나고 그럴 경우 조직이 서서히 망가져버리지요. 그래서 저는 어느 직원을 승진시키려 할 때 세 사람한테 묻습니다. 세 사람 모두 ‘그 사람은 그 자리가 맞다’거나 ‘당연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면 거의 정확한 인사라고 봅니다. 반면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해당자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면 한번 더 생각해보지요.

    또 저는 공기업 경영자 시절부터 지켜오는 인사원칙이 있어요. 바로 ‘7+2’라는 원칙입니다. ①정직한 사람 ②성실하게 일하는 사람 ③자기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④고과성적 ⑤고과표에는 없지만 잠재능력이 있는 사람 ⑥사생활이 건전한 사람 ⑦ 품성 및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7원칙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는 본인이 나한테 와서 진급시켜달라고 ‘와이루(뇌물)’ 먹이는 경우와 외부를 통해 나에게 인사청탁 압력을 가하는 경우입니다. 인사 승진 해당자가 7원칙에서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2원칙 중 한 가지라도 걸리면 무조건 0점 처리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범법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사회장으로 부임해서도 이것을 전직원들에게 교육시켰어요. 여러분이 일만 열심히 하면 승진시킨다, 그리고 앞으로 뒷줄로 엉큼하게 움직여 출세하는 사람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된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그는 자신이 세운 2원칙에 관한 한 지나치리만큼 엄격하다. 그가 통신사령관으로 군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모 소령이 진급을 청탁하기 위해 아내만 있던 그의 집으로 불쑥 찾아와서는 금으로 만든 행운의 열쇠를 슬쩍 놓고 갔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바로 그 이튿날 당사자를 불러 군복을 벗겨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후로 그는 ‘하늘이 청탁을 해도 안 통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공기업 재직 때도 ‘커피 한잔도 뇌물’이라고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인사청탁의 빌미를 줄 수 있다 하여 자신의 집은 어떤 경우에도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마사회장 재직 때도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임원들이 집 근처까지 찾아와도 집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공기업 구조조정 문제와 관련해 서회장께서는 광업진흥공사에서도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광업진흥공사 사장 시절 30%의 인력감축 구조조정을 하면서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나 떠나는 사람들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식을 가졌습니다. 노조, 노무사, 변호사 등이 끊임없이 토론하고 검토한 끝에 나온 구조조정 결과여서 떠나는 사람들이 승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내보내는 것이 가슴이 아파 그때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구조조정한다고 해서 단순히 직원들의 수를 줄이는 데서 끝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조조정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데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실업자로 전락해 사회 문제로 커지지 않습니까. 경영의 합리화와 효율성을 위해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직원들을 내보내야 할 경우 반드시 제2의 직업을 찾도록 해당 기업이 책임져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내보내기 전에 기술 습득이나 전직 교육을 시켜서 재취업장까지 알선해주는 것입니다. 마사회의 경우 유관단체가 참 많아요. 제가 마사회에서 인력감축 구조조정까지 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얼마전 발전노조 파업 등으로 사회가 시끌시끌했습니다. 핵심은 민영화였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영화 역시 경영 효율성을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민영화는 그 공기업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이 주인이 되는 형식을 취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우리사주 형식으로 직원들이 회사의 주인이 돼야 사기가 올라가고 그 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민영화한다고 해서 다른 기업 혹은 외국인에게 단순히 팔아넘기는 것에 그친다면 100% 민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발생한 발전노조 파업 문제는 최고경영자에게 많은 책임이 돌아간다고 저는 봅니다. 발전사업 민영화 문제는 오래 전부터 논의돼왔고 여야 정당이 합의해 법으로 통과한 사안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최고경영자는 노조와 대화를 통해 그들을 이해시키고 합의를 얻어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 자리의 밥값을 하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공기업에 근무하는 분들은 머리가 우수하고 또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만나 충분히 대화하고 설득했으면 지금처럼 대규모 파업은 없었을 것이고 정부에 큰 부담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편으로 서 전회장은 공기업의 민영화든 구조조정이든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공기업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밝힌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투자기관 10여 곳을 비롯해 정부가 통제하는 공기업이 100개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런 공기업들이 과연 효과적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지, 또 경영은 잘하고 있는지,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평가·관리·조언하는 전문가 그룹이 필요합니다. 각 정부 부처 산하 공기업들을 통제하는 공무원들은 외부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해당 기업 내부사정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공기업에 경험있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총체적으로 모든 공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공기업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예요.

    ―정부 부처 입장에서는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간다고 보고 그런 기관이나 단체가 존립하는 데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공기업에 대한 상위기관의 인사권이나 재정권 같은 것은 물론 그대로 놔둬야겠지요. 다만 공기업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비효율적인 면은 무엇인지 등을 평가하는 일이라면 굳이 반대할 것도 없겠지요.”

    서 전회장은 공기업 개혁과 관련해 최고경영자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는 최고경영자는 무엇보다도 금전문제나 인사문제, 사생활에서 약점이 없어야 하고, 둘째 회사에서 가장 모범사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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