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불법체류자 추방정책은 국가적 테러다”

외국인 노동자의 ‘수호천사’ 이금연씨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09-03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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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여고에 수석입학한 학생이 가난 때문에 신당동 ‘마치코바’에 취직했다. 노동자에서 대학생으로, 복지관 생활지도 교사에서 인권운동가로. 이금연씨는 늘 낮은 곳으로 향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왔다. 고뇌하고, 포용하고, 투쟁하면서.
    대한민국은 과연 살 만한 나라인가? 적어도 1980년대 초 가수 정수라씨가 불렀던 ‘아 대한민국’의 수준은 아닐 것이다. 정씨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이룰 수 있어’라고 호소했지만, 한국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5%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살아가기 막막할 정도로 불행한 나라도 아니다. 이미 절대 빈곤의 시대를 넘어섰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는 기계처럼 일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26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이른바 3저 호황을 맞아 경제가 급성장하고 광범위한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3D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고, ‘한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무작정 입국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는 애매하기 짝이 없어, 한국사람보다 더 많이 일하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사람 중에는 이국땅에서 한맺힌 삶을 마감한 사람들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IMF 외환위기 직후 일시적으로 줄어들기도 했지만, 어느덧 한국경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다가설 수 없는 땅’이다. 2001년 10월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는 한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25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밀폐된 어창에서 참혹하게 질식사했다. 또한 2002년 1월엔 경기도 포천의 가구공장에서 최초의 외국인 노동자 집단파업이, 4월엔 경기도 안산의 종이박스 회사에서 작업거부투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는 정부가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차원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금연(42)씨는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전진상(全眞常)복지관 관장이다. ‘전진상’은 AFI(국제가톨릭형제회)의 모토로 ‘완전한 희생, 진실한 사랑, 일상의 즐거움’을 뜻한다. 전진상복지관은 1965년 유럽지역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안양청소년근로자복지회관(이하 근로자회관)’으로 출범했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기 북부지역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씨는 1997년 관장으로 부임한 뒤 사회복지 개념을 좀더 강조한다는 취지에서 직원들과 토론을 거친 끝에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씨가 걸어온 세월은 한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이씨는 홍천여고에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형편과 어머니의 수술은 그를 휴학으로 몰고갔다. 혹시나 장학금을 기대했지만, 학교는 그를 외면했다. 서울 가면 취직도 시켜주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기차에 몸을 싣던 날, 이씨의 아버지는 무거운 플라스틱 쌀통을 주었다고 한다. ‘남의 집에 가서 공짜밥을 먹으면 안된다’는 당부와 함께.



    이씨의 서울살이는 1970년대 노동자의 삶 그대로다. 처음 들어간 신당동 마치코바에서는 일감이 너무 많아 1주일 동안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청계피복 시다들의 눈물겨운 삶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또한 골프장갑 공장에서는 수출물량을 맞추기 위해 36시간을 쉬지 않고 혹사당한 적도 있다. 이 시절 이씨는 ‘샘터’에 실린 채플린 영화평을 읽고 진한 감동을 느꼈는데, 1987년이 돼서야 난생 처음으로 ‘모던타임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영화와 현실이 똑같던지….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몸으로 때우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노동자들 덕분입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아직까지 노동의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가진 자들과 지도층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1만7000원. 이씨가 한달 동안 휴일도 없이 일하면서 받은 월급이다.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지만, 이씨는 그걸 쓸 시간조차 없었다. 전자부품 회사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 종일 조립만 하면서 보내던 시절, 이씨는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안양에 있는 근로자회관에 가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전진상복지관’과의 기나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은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유화 조치로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 같은 노동을 감수하고 있던 근로자들에게 통행금지 해제는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통행금지 이전에는 밤 10시가 되면 대부분 퇴근했지만, 통행금지가 풀리면서 야근과 철야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지독스럽게 공부에 매달린 이씨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2년 세종대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이씨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하긴 1980년대 초반에 정상적으로 대학을 다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마는.

    “하필 우리가 졸업정원제 1세대인 데다 세종대가 재단비리의 온상이었잖아요. 그러니 날마다 데모하면서 지냈죠. 등록금은 내야 하니까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고요. 입주과외를 하면서 먹을 것을 싸가지고 농성하는 친구들을 찾아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가 졸업을 앞두고 ‘나는 직접 나서기보다 남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운동권에서 빠졌어요. 후배들은 계속 싸우는데, 혼자서 내 길을 찾아나서는 것 같아서 미안했고….”

    이 무렵 이씨는 ‘시몬 베유 수상록’에 빠져들었다. 시몬 베유는 프랑스 파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페인 내전 때 독재자 프랑코에 맞선 의용군이다. 그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으며,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동포보다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신념을 지키다가 ‘기아와 폐결핵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3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씨는 시몬 베유의 사상에서 가톨릭의 향기를 맡았다고 한다. 그래서 명동성당을 찾아가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얼마 뒤 영세를 받았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근로자복지관으로 돌아갔다. 시몬 베유의 삶과 가톨릭에서 느낀 점들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이곳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국 청소년들을 돕고 있는 서정림 말가리 관장을 만났다. 말가리 관장의 편지를 받고 고향집을 다시금 떠나던 날, 이씨의 아버지는 “물같이 살아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이씨는 근로자복지관의 생활지도 교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청소년들이 겪는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더라고요. 내가 피눈물을 흘렸던 공장을 다시 둘러보면서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걸 느꼈어요. 비실비실 쓰러질 것 같은 아이들이 기계 앞에만 앉으면 동작이 빨라지는 거예요. 기계에 의해 짜맞춰진 인간, ‘모던타임스’에 나오는 채플린의 모습 그대로죠.

    1987년 민주화 투쟁 때는 아이들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데모하기 바빴고, 그 다음엔 노조 만드는 거 도와주다가, 상처 입고 쫓겨난 아이들 위로하고…. 그러다보니 복지관도 어느새 경찰서와 교육청에 불온한 단체로 찍혀 감시 당하고…. 모두가 시대의 비극이었죠.”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투쟁의 전면에 나서던 1980년대 후반, 이씨는 조금 색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유흥산업이 발달하면서, 청소년들의 탈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는 낮엔 공장에 다니고, 밤엔 다방에 나가는 아이들을 다잡기 위해 바쁘게 뛰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는 다방과 술집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법 피라미드 조직도 독버섯처럼 번졌다. 숨막히는 공장을 떠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청소년들이 늘었다.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친구를 유혹하고 가족을 끌어들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씨가 그들을 붙잡고 울면서 매달려도, 피라미드의 불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청소년들이 피라미드 조직에 유혹돼 하나둘씩 근로복지관을 떠날 때마다 이씨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씨는 1987년 소토론회에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처음 접했다. 한국 청소년들이 유흥가로 빠져나간 자리를 외국인들이 대체하고 있으며, 그들이 산업재해 임금체불 상습폭행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그즈음 이따금씩 외국인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관을 찾아오기도 했는데, 영문과를 나온 이씨는 이들과 직접 상담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렵 이씨는 자신의 삶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AFI 가족이 되었다. “결혼보다 훨씬 급한 일이 많았다”는 게 이씨의 얘기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으면,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항의하고 그랬어요. 저는 외국인들이 일하는 공장을 다니면서 ‘세상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또 한번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안전대책도 없이 착취당하는 거예요. 코를 찌르는 냄새, 프레스에 잘린 손가락, 불법체류자라고 월급도 주지 않고 내쫓는 기업주…. 정말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이를 악물고 싸웠어요.”

    이씨의 노력은 때로 엉뚱한 벽에 부딪혔다. “아가씨는 애국할 줄 몰라요? 외국인만 그렇게 생각해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당신, 생각이 있어 없어?”라고 따지는 근로감독관이 있는가 하면, “왜 외국인만 편드느냐? 회사 문 닫으면 책임질 거냐? 외국인 때문에 우리도 죽겠다”고 항의하는 한국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이씨는 같은 노동자이면서 국적에 따라 이해가 엇갈리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이주노동자(migrant)’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외국인이라는 말은 이미 그들을 대상화하고 차별하는 겁니다. 국적이나 지역, 업종이 달라도 노동자는 노동자예요. 외국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것과,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것은 크게 볼 때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농촌 사람들을 ‘외국인’처럼 보지는 않잖아요.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그들을 우리 사회의 틀 안에 놓고 풀어야만 해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미 한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거든요.”

    이씨는 1995년부터 1년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 근처 바공바리오 지역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필리핀으로 떠나기 직전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이중적 시각을 목격했다. 하나는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던 필리핀 여성 노동자가 “외국인 며느리를 들일 수 없다”는 남자측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쫓겨나다시피 필리핀으로 떠난 사건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기류가 나타났다. 한국의 극성 부모들은 자식의 영어공부를 위해 필리핀 여대생을 가정부로 채용했고, 한국 노총각과 필리핀 여성의 결혼을 중재하는 업체가 대거 등장했다.

    “직접 가서 본 필리핀은 처참했어요. 가족들이 외국으로 돈벌러 가는 바람에 대부분의 가정이 이산가족이 돼버린 거죠. 사람이 죽어도 장례를 맡아줄 유족이 없어서 관에 방부제를 뿌려서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개인이나 한 국가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은 한마디로 구조적이고 세계적인 모순인 셈이죠.”

    이씨는 1997년 전진상복지관 내에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정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남 광명 안산 등지의 지역단체와 연대해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하 외노협)’를 구성했다. 그러자 전진상복지관으로 이씨를 찾아오는 노동자들이 급증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엔 복지관 1층이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의 쉼터로 쓰일 정도였다. 이씨는 그들과 상담하면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시적 구호사업보다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60% 이상은 이른바 불법체류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핵심에 연수취업 제도가 있다. 정부는 중소업체의 어려운 여건상 외국인 노동자의 채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 1998년부터 송출회사를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에게 2년 동안 산업연수를 시키고 있다. 말이 좋아서 ‘산업연수’지 실제는 일선 노동자로 일하는 것이다. 2년 동안의 연수가 끝나면 시험을 통해 1년간 근로자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이 제도의 특징인데, 작업현장에서는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임금이 터무니 없이 적어서 연수원을 이탈해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외국인들이 속출했다. 아예 불법체류자가 되기 위해서 연수원을 잠시 근거지로 활용하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일단 연수원을 떠난 외국인들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추방될까 두려워 숨어서 지내야 했고, 일부 악덕 기업주들은 그것을 이용해 임금체불과 폭행 등을 일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연수원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 감독이 강화됐고, 이 과정에 외출금지, 감금 등 심각한 인권유린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인들보다 더 오랫동안 일하면서도, 임금은 형편없이 적게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부족한 인력을 공식적으로 채용해 불법체류를 막겠다는 취지의 연수원 제도가, 오히려 불법체류를 조장하고 기업주의 횡포를 강화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외국인 노동자들과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연수취업 제도를 가리켜 ‘현대판 노예제’라고 규정하고 전면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인정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우리가 필요해서 불러들였으면, 그들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죠. 그동안 실컷 이용해먹고 불법체류자로 몰아서 내쫓는 건 아주 파렴치한 국가적 테러라고 생각해요.”

    이씨는 정부가 3월12일 발표한 ‘불법체류방지 종합대책’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것은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불법체류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3개월간 자진신고 기간을 두고 이 기간에 신고하면 고용주의 처벌을 면제해주고 1년 내에 출국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는 조치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 관련단체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정부의 대책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신변불안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열심히 기술을 배운 노동자는 한국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떠나야 하고, 브로커에 돈을 바친 외국인들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합니까. 이런 바보 같은 정책이 어디 있어요?

    법무부는 불법체류자를 없애겠다고 나팔을 불고, 노동부는 일손이 모자라니 고용허가제를 도입하자면서 딴소리를 하잖아요. 정부는 이제라도 근시안적 처방에 머무르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해야 돼요. 외국인 노동자는 엄연히 실체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실체로 대해야 합니다.”

    이씨는 한국이 역지사지의 태도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정부는 한국의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추방하려 했을 때, 한국인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영주권을 허용했으며, 미국정부도 사면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했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외국인 노동자의 실태를 파악하는 과정에 여성 노동자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여성들은 이중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감시하면서 놀고 먹는 남자들이 있는가 하면, 성희롱과 성폭행 사건이 은폐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씨가 외노협 산하에 ‘국제결혼가정문제 대책기구’를 만들고, 뒤이어 ‘이주여성인권연대’를 출범시킨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국 남자와 여성 외국인 노동자가 결혼해서 낳은 혼혈아는 법적으로 어머니가 없습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는 임신해도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가 없어요. 또 가정부나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한 여성들은 폭행과 성추행의 위험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어디 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도 없어요. 저는 거시적인 노동운동만으로는 이런 모순을 풀기가 어렵다고 봐요. 그래서 앞으로는 여성단체와 연계해서 가족해체나 성폭력 문제에 접근할 생각입니다.”

    이씨의 말처럼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언젠가 한국인 애인에게 맞아죽은 베트남 여성 노동자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베트남 노동자들은 ‘때리지 마세요. 남자가 여자를 왜 때려요?’라는 문장이 들어있는 한국어 교재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한국말 공부를 그런 식으로 시작했을까.

    우리 사회에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희생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씨는 이런 주장에 강하게 반발한다. 1970년대부터 한국기업들은 항상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이윤을 남겨왔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한국 기업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다. 가진 자들은 다 누리면서 힘 없는 자들에게만 고통을 전가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씨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가난한 자의 행복’이다. 이씨는 특히 물질적으로 부족해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네팔인들의 삶에서 그 모델을 찾고 있다. “네팔인들은 하루 두 끼만 먹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명상을 즐깁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한국땅에 와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그들이 겪은 만큼 보상해야 합니다. 그러고나서 그들과 교류하면서 정신적 풍요로움을 되찾아야죠.” 언뜻 들으면 철학적인 얘기 같지만, 속뜻은 간단하다. ‘넉넉한 사람들이 베풀면서 살자’는 거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세계 만방의 토산품들이 가득했다. 그동안 만났던 외국인들이 주고 간 물건이라고 했다. 네팔 이집트 파푸아뉴기니 필리핀 독일…. 이씨는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사연들을 떠올리며 참 많은 사람들이 전진상복지관을 거쳐갔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들 모두는 이씨의 모습에서 ‘한국이 그래도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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