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고통의 정점에서 맛본 오르가슴 같은 희열”

동아마라톤 완주 ‘보통 사람’ 9인의 감동인터뷰

  • 특별취재팀

    입력2004-09-06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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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라톤은 고난의 행군이다. 마라토너들은 극한의 고통에서 마약을 맞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본다고 말한다. 좌절을 딛고 희망을 품게 만드는 마라톤의 마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희망을 품고 달린다.”

    3월17일 열린 2002동아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 세계 29개국 99명의 선수와 아마추어 마라토너 1만2075명이 참가해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며 ‘인간한계’를 시험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출발해 잠실주경기장에 이르는 42.195km의 풀코스를 달리는 이날 대회에서 참가자들의 기록은 맞바람 탓에 다소 저조했다.

    남자부에선 아시아 최고기록(2시간6분51초) 보유자인 일본의 후지타 아쓰시(25·후지쓰)가 2시간11분22초의 기록으로 우승해 월계관을 썼고, 여자부에선 중국의 웨이야냔(21·인민해방군 소위)이 국내에서 벌어진 마라톤 역사상 최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한 마스터스 레이스에선 정관균(36·위아주식회사)씨가 2시간30분42초의 기록으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여자부에선 문기숙(45·주부)씨가 2시간53분32초의 기록으로 1위로 골인했다.



    ‘행복한 완주’가 목표

    출발 전, 1만2000여 건각(健脚)들이 모여든 경복궁 주변은 흥겨운 잔칫날 같았다. 42.195km의 지난한 역주를 앞두고도 참가자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고적대의 뒤를 따라 출발지인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이동하는 마라토너들의 모습은 열기와 흥분 그 자체였다.

    탕!

    출발신호가 울리자, 마라토너들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 마스터스 선수들은 ‘행복한 완주’를 목표로 자신의 심장소리를 벗삼아 고독한 승부에 나섰고, 엘리트 선수들은 치열한 선두다툼을 시작했다. 출발시각으로부터 2시간11분이 흐른 즈음 남자부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감시한인 5시간까지 완주자들이 끊임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각·청각 복합장애인 차승우(39·안마사)씨는 도우미 박복진(52)씨와 함께 4시간13분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끈으로 손을 묶고 방울소리에 의지해 100리(里)길을 달려온 것. 차씨가 3월초 인터넷에 도우미를 찾는다는 광고를 냈고 이를 본 박씨가 연락해 함께 출전하게 됐다. 그는 “시각장애인 마라톤동호회에 전화해 최고기록을 깼다고 빨리 알려주고 싶다”며 “앞을 보지 못하는 내가 풀코스 완주를 했다니 ‘빛’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신순화(32)씨는 코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최근 남자친구로부터 받은 프로포즈에 대한 답을 결승선에서 해주기로 했기 때문. 신씨는 “출발 전 기록이 5시간을 넘길 것 같은데, 기다리다 돌아가면 어떡할지 걱정했다”고 말했다. 기준시간을 초과한 5시간40분에 결승선을 통과한 신씨는 남자친구를 발견하고 힘찬 포옹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일하는 서정희(35)씨는 ‘공명선거’를 홍보하기 위해 마라톤 레이스에 나섰다. 선관위 ‘공명이 마라톤’ 클럽 회원들과 함께 풀코스에 도전해 3시간28분의 좋은 기록으로 완주했다. “방송으로 중계가 되잖아요. 이것보다 더 좋은 공명선거 캠페인이 어디 있겠습니다. 공짜로 공명선거 캠페인도 벌이고, 살도 빼고, 체력도 기르는 1석3조예요.”

    전라남도 순천 연수공단에서 기계정비사로 일하는 최영선(35)씨는 3시간47분의 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아내와 아들, 딸이 환호성을 울리며 결승점에서 ‘자랑스런 아빠’를 맞이했다. 최씨는 “30km지점에선 ‘낙오자 차량’을 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면서 “실패한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이를 다시 꽉 깨물었다”고 말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회 참가비도 부담스러웠다는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구경도 하고 오랜만에 외식도 한 때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완주한 날”이라고 말했다.

    특이한 주법과 복장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수일(37·학원경영)씨는 4시간30분 동안 줄넘기를 하며 풀코스를 완주했다. 줄넘기아카데미를 경영하는 김씨는 “세계 최초로 줄넘기로 풀코스를 완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일식당을 운영하는 문정복(46)씨는 반바지와 요리용 가운, 주방장 모자 차림에 일식용 접시와 젓가락을 들고 뛰어 참가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마스터스 참가자 중엔 마라톤 완주 목적뿐만 아니라 회사를 홍보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출전한 사람도 많았다. 얼굴에 상한가를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종합주가지수1000’이라고 쓰여진 머리띠를 두른 증권거래소 직원도 있었고, 트레이닝센터 정수기 회사 등을 선전하는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사람들도 많았다.

    마라톤은 고난의 행군이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40km를 달려온 병사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는 이겼노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을 때부터 마라톤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이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옹이나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몬주익의 신화를 창조한 황영조씨에게도 마라톤은 고독한 레이스였다.

    초창기 올림픽에서는 마라톤 코스 거리가 개최도시마다 달랐지만, 1908년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42.195km 풀코스가 확정됐다. 이때부터 마라톤은 단순한 완주를 넘어 기록경쟁으로 치달았다. 프로선수들이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동안, 아마추어 동호인들은 마라톤을 생활체육으로 끌어들였다. 초창기엔 장거리 육상선수들의 전유물이었던 마라톤이 보통사람들의 스포츠로 거듭난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마라톤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스포츠였다는 점에서 뒤늦게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국내에서 마라톤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한 것은 88올림픽 이후부터다. 현재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아마추어 마라톤 인구는 2만명 남짓. 하프코스까지 포함하면 3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마라톤 대회의 수도 늘었다. 3~4월중에 열리는 대회가 전국적으로 40여 개에 이른다. 국내에서 일반인들이 마라톤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제65회 동아마라톤 대회부터다. 당시 하프코스에서 실시된 마스터스 분야의 참가자는 겨우 194명. 그러나 참가자 수가 매년 늘어 지난해엔 1만786명이 참가했고, 올해에는 1만2000명을 선착순으로 마감하는 데 37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마라톤 마니아가 늘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유럽 미국 일본 등의 예를 들면서 산업화에 따른 도시인들의 운동부족과 인구증가를 이유로 꼽는다. 1인당 국민소득(GNP) 5000달러 수준부터 붐이 일기 시작해 1만달러 수준에서 생활스포츠로 자리매김한다는 것.

    몸매를 관리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마라톤은 안성맞춤이다. 비교적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 달릴 공간과 러닝화, 체육복만 있으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올해 동아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어떤 이유로 마라톤을 시작했고 어떻게 연습했을까. ‘희망을 품고 달린’ 동아마라톤 완주자 9인을 만나봤다.

    골인 지점에 설치된 전광판의 시간이 4시간을 넘어서면서 잠실주경기장으로 들어오는 마라토너들도 점점 많아졌다.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쓰러지는 사람, 담담히 걸어 선수 휴게실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 기다리던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사람, 동호회 회원들과 떼지어 응원가를 부르는 사람들로 경기장이 떠들썩했다.

    동료들을 부둥켜안고 우는 사람도 있다. 지워진 화장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얼굴 일그러지는 것도 괘념치 않고 마구 울어대는 여성 참가자도 있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처음 도전한 풀코스 대회에서 4시간33분57초라는 좋은 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한 김종옥씨(35). 끝까지 달렸다는 벅찬 감동에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기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잘했어. 기특해, 기특해.”

    김씨의 등을 두드리며 연신 ‘기특해’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은 김씨를 마라톤에 입문시킨 스승 윤영로씨다. 윤씨는 인천의 한 헬스클럽 회원들끼리 결성한 오사마(오 사랑하는 마라톤) 클럽 회장. 운동하러 헬스클럽에 찾아온 김씨에게 마라톤을 해보라고 적극 권유하고 기초 지도부터 대회 출전까지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운동하러 다니는 모습에 끈기, 오기가 있어 보였다”는 게 윤씨가 김씨를 발탁(?)한 이유. 김씨는 윤씨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다. 처음 출전한 10km, 하프 대회에서 연속 완주에 성공했고 드디어 2002동아마라톤 풀코스 대회에서도 완주하며 예상기록까지 뛰어넘는 ‘괴력’을 발휘했다.

    “처음 도전하는 거라 큰 욕심 안 부렸어요. 완주하면 좋겠다 생각했고 너무 늦지 않게, 5시간대에 들어오면 더욱 좋겠다 했죠.”

    김씨가 헬스클럽을 찾은 것은 약 1년 전의 일이다.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몸이 비대했기 때문에 살을 빼기 위해 독하게 마음먹고 운동을 시작했다. 사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본인이 느낀 점도 많았지만 남편의 ‘냉대’가 결정적이었다.

    김씨는 지난 1999년에 결혼했다. 결혼에 적령기가 없다고는 해도 서른두 살이면 이른 편은 아니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로 남편과 다투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미인도 아닌 데다가 몸매마저 점점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닫자 김씨를 보는 남편의 시선이 차가워지기만 했다.

    결혼 후 김씨는 전업주부로 집안일에만 매달렸다. 부부뿐인 조촐한 살림살이에 크게 신경 쓰이는 일도 없었다. 별일 없이 집안에 머물자니 답답했다. 남편은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고 잠 타령, 휴식 타령만 했다. 특별한 관심거리도, 마음에 맞는 대화 상대도 없었다.

    1년 전, 첫아이를 출산하면서 김씨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망가진 몸매를 위해서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마라톤이 정신건강에도 아주 좋다는 말을 듣고 조금씩 달려보기로 했다.

    “1년새 많은 변화를 겪었죠. 처음에는 5km만 걸어도 힘들고 조금만 뛰면 금방 숨이 찼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42.195km를 달릴 정도가 됐잖아요.”

    마라톤을 시작한 후 건강도 좋아지고 살도 많이 빠졌다. 끈기 있게 운동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의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뭘 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운동하러 간다면 물통에 수건까지 챙겨주며 격려한다고.

    무엇보다 김씨 자신이 정신적 여유를 찾은 것이 마라톤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활기가 생기고 무엇이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마음에 여유를 갖게 되면서 남편을 이해하기도 쉬워졌어요. 예전 같으면 이해하지 못해서 곧잘 싸움이 됐을 법한 일도 웃고 이해하면서 말하다 보면 다 좋은 쪽으로 풀려요. 전업주부들은 꼭 마라톤을 했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의 마라토너들은 30∼35km 지점을 통과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30km 장벽을 넘을 때 사람들은 ‘오로지 완주한다는 생각만 한다’거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아니 딱 죽겠다 싶은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땐 내가 달리는지 다리가 저절로 몸을 끌고 가는지 분간조차 안돼요. 고통이 사라지면서 평생 맛보지 못한 희열이 찾아와요. 마약 한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돼요. 달리면서 느끼는 희열은 마약 하는 기분 이상일 거예요. 안 뛰어본 사람들은 몰라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리는 ‘나’가 있다. 김씨는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이전까지 맛보지 못한 희열을 알게 됐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가 1년 만에 ‘마라톤교’의 열성 신도가 돼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4시간35분07초. 황주석(44)씨는 첫번째 마라톤 풀코스 도전에서 기대 이상의 기록을 냈다. 일반인들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년 이상의 몸 만들기와 식이요법, 그리고 두세 차례의 하프코스 경험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하지만 황씨는 별도의 훈련이나 식이요법도 없이 평소 컨디션으로 풀코스를 뛰었다. 지난해 11월 부산 다대포마라톤대회에 참가해 하프코스를 2시간2분에 주파한 것이 그의 유일한 경력이다.

    “직장(부산시청 시민봉사과) 일을 하면서 공무원 노조까지 준비하다보니 따로 연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냥 대회를 앞두고 아파트를 몇 바퀴 뛴 게 전부죠. 마라톤이 쉬운 운동은 아니지만,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난 황씨는 어릴 때부터 건강 체질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800m 학교대표로 뛰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재미로 탁구와 축구를 즐겼지만, 그보다는 왕복 8km를 걸어서 통학한 것이 체력의 밑바탕이 되었다. 또 한 가지 황씨만의 건강관리법이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난히 양파를 좋아했는데, 요즘도 하루 1개 이상씩 된장에 찍어 먹는다고 한다.

    황씨는 1984년 부산시 서구청 9급 공무원이 됐다. 이때부터는 아무런 운동도 하지 못하고 기계처럼 일에 파묻혀 살았다. 황씨는 1999년 5월 부산시 직장협의회 사무국장에 취임하면서 공무원 사회의 개혁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 황씨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산시청 공무원들이 ‘아뛰모(아무 생각도 없이 뛰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었는데, 공무원노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황씨가 여기에 가입한 것이다.

    “처음에 마라톤대회에 나간다고 하니까 아내는 ‘다리가 부러지면 어떻게 하냐’고 말리더라고요. 아이들도 ‘아빠가 다치면 우리집은 어떻게 되냐’면서 포기하라는 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받은 완주기념 메달을 보면서 뿌듯해합니다. 마라톤을 통해 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 같아요.”

    황씨가 바쁜 와중에 연습도 없이 동아마라톤 참가를 결심한 직접적인 이유는 공무원 노조의 출범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공무원 노조의 성패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하고, 자신과의 싸움을 자청한 것이다. “공무원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이겨야 한다.” 이것은 황씨가 동아마라톤을 앞두고 자신에게 던진 화두다. 그가 ‘노동3권 쟁취, 공직사회 개혁’이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레이스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마라톤 초보자에게 풀코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km에서 다리가 빠지는 것 같더니, 30km에서는 쥐가 나기 시작했고, 40km를 넘어서자 머릿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가슴에 붙어 있는 구호 때문에 끊임없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라톤을 뛰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제게도 앞으로 많은 걸림돌이 있겠지만,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완주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어요.”

    마라톤은 황씨의 삶을 질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가족들이 마라톤에 동참했다. 5월초 부산 다대포마라톤대회에는 아내와 아들까지 참가할 예정이다. 직장동료들에게도 마라톤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으며, 황씨 자신은 본격적인 기록단축에 나설 참이다. 마라톤에 빠져들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별도의 건강관리가 필요없기 때문에 일석삼조라는 것이 황씨의 주장이다.

    마라톤 선수 중에서 종씨인 황영조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황주석씨. 그는 “나도 일찍 이 길로 들어섰으면 황영조 못지않은 선수가 됐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황씨가 이번 동아마라톤에서 아쉬워하는 점 한 가지. 황사와 매연 때문에 부산에서처럼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황씨는 “서울 도심도 시골처럼 깨끗해졌으면 좋겠다”며 2003년 동아마라톤을 기약했다.

    마라톤 대회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싱글벙글 주방장’ 문정복씨(48). 모자에 새긴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라는 문구며,손에 든 모형 회접시가 남다른 사연을 짐작케하는 이색 마라토너다.

    문씨는 압구정동에서 ‘배터지는 집’이라는 횟집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자 주방장이다.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건강 때문이다. 6년 전 의사는 문씨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2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신 술과 담배가 화근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문씨는 아침저녁으로 달리기를 하면서 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문씨는 1996년 동아마라톤에 처녀 출전했다. 성적은 초라했다. 100m도 못가 고꾸라지더니 결국 기권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오기가 동한 문씨는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자신의 몸을 단련시켰다.

    가게를 하는 문씨는 달리는 시간을 온전히 따로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리기와 생업을 접목시키는 아이디어를 냈다. 싱싱한 활어를 매일 조달해야 하는 횟집의 특성상 노량진수산시장에 매일 들러야 하는 사실에 착안,압구정에서 노량진까지 한강변을 따라 왕복달리기를 한 것이다.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을 가리지 않고 매일 새벽 6시만 되면 압구정동 집을 나서서 노량진까지 달렸다. 처음에는 1시간30분 정도 걸리던 시간이 지금은 50분으로 줄었다. 그날 쓸 횟감을 일일이 확인해서 구입한 후에 물고기는 차태워 보내고 문씨는 갔던 길을 되밟아 뛰어온다. 만 5년을 쐬어온 새벽바람이지만 한겨울에도 시원하기가 그지없다.

    새벽바람의 기운과 첫 실패의 오기로 무장한 문씨는 33회 완주에 최고기록 3시간8분을 자랑하는 정상급의 마라토너가 됐다. 뉴욕 런던 베이징 호눌룰루 등 세계 유명 마라톤대회에도 참가했고,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100km달리기대회에 참가해 11시간30분의 기록으로 완주, 철인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왜 이런 복장으로 뛰냐고요? 즐기기 위해서죠. 나도 즐겁고 남도 즐거우면 좋은 일 아닌가요. 이 옷 입고 마라톤을 해 가게에 손님이 몇 배 늘어 돈도 많이 벌었다우.”

    처음 문씨가 주방장 복장을 하고 마라톤을 하자 사람들은 “한두 번 저러다 말겠지”라며 무시했다. 일부 마라토너는 상술에 눈이 먼 사람이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문씨가 마라톤 대회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호기록으로 골인지점을 통과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확 달라졌다. 지금은 주방장 옷을 벗겠다고 하면 도리어 주변 마라토너들이 난리란다.

    문씨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주방장 복장을 고집한다. ‘마라톤은 즐거운 여정’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한 가지 실천이기 때문이다. 행색이 특이하다 보니 다른 마라토너들이 알아봐 주는 것도 덤으로 얻는 기쁨이다. 레이스 내내 다른 이들과 악수하고 손을 흔드느라 정신 없는 문씨. 그는 뛰면 즐겁고,세상만사 모든 시름을 잊는다고 한다.

    30~35km 구간에 이르면 머리카락 하나도 천근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손에 든 2kg짜리 모형 회접시는 오죽할까. 내팽개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문씨는 그때마다 골인지점의 환희를 떠올리며 이를 악문다.

    33번 골인지점을 통과하며 움켜쥐는 희열에다 그는 건강도 얻었고,돈도 벌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삶의 여유와 행복도 느끼게 되었으니 마라톤은 그의 인생 최대의 선물인 셈이다.

    마라톤 완주의 고통과 기쁨을 아는 문씨이기에 그의 가게에서는 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1만3천원 하는 정식을 1만원으로 깎아준다. 먹성 좋은 마라토너들에게는 횟감도 아끼지 않아 그의 가게는 항상 마라토너들로 문전성시다.

    “마라톤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일단 달려보세요. 건강은 물론 다른 것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유부남이 뛰면 부부싸움이 사라지고,여자가 뛰면 가정이 평안해진다니까요.”

    마라톤 풀코스를 100번 완주하는 게 꿈인 마라토너 문정복씨가 몸소 체득한 경험이다.

    결승선의 시계가 4시간21분을 막 넘어섰을 때. ‘안양여중 이중휘’라는 글씨가 쓰여진 유니폼을 입은 마라토너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안양여중 체육교사 이중휘(59)씨는 손목시계로 자신의 기록을 확인하자마자 잔디밭에 쓰러졌다. 얼굴 색은 창백하고, 다리엔 서있을 기운조차 없었다. 5분 남짓 가쁜 숨을 몰아쉬었을까. 얼굴에 붉은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자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다.

    “30km 지점부터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무아지경에서 달리는 것이지요. 그런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마라톤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땅을 밟고 앞으로 달리는 것 외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 부대끼는 삶을 모두 뒤로 하고 자신과 싸우는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씨는 1998년 첫 풀코스 도전에서 4시간54분의 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이번 대회 목표는 3시간대 진입. 목표달성엔 실패했지만 기록을 단축해 날아갈 만큼 기분이 좋다고 했다. 초반 10km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바람도 적당히 불고 최근 두서너 달간 집중적으로 만든 몸 상태도 좋았다.

    10km 통과기록이 51분.

    “4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맞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라톤은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더군요. 자연의 법칙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해야지요.”

    20km 통과기록은 2시간을 훌쩍 넘어버렸다. 4시간대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포기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할 때마다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만 넘기면 완주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이날 동아마라톤에 참가한 사람 대부분이 맞바람 때문에 기록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록이 예상한 대로 나오지 않아 실망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씨의 말처럼 자연조건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 아닌가. 그래서 마라톤에선 ‘신기록’이란 말을 쓰지 않고 ‘최고기록’이란 표현을 쓴다. 코스와 기상조건에 따라 기록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초등학교 때 시름선수였다. 어린 시절엔 마을에서도 소문난 강골이었다고 한다. 학교 때 전공은 격기. 교편을 잡은 뒤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쉰 고비를 넘긴 뒤로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런 그에게 젊은 시절의 혈기를 되찾게 해준 것이 바로 마라톤.

    “나이는 속일 수가 없더라고요. 처음엔 건강을 생각해서 혼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운동장 동네 산책로 등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마라톤동호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마라톤은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여럿이 모이면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이씨는 군포시 해오름마라톤팀 소속이지만 연습은 대부분 혼자 한다. 하루 중 시간이 날 때면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계속 달린다. 그의 마라톤 연습법은 전력달리기와 천천히 뛰는 것을 되풀이하는 방식.

    이런 훈련법을 YASSO800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지구력을 기르는 데 안성맞춤이다. 800야드(1yd=약 91cm)를 빨리 뛰다가 천천히 뛰는 것을 반복해서 10세트를 하는, 일종의 인터벌 훈련으로 10세트 중 제일 나쁜 기록을 풀코스 완주 시간대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800야드를 2분50초에 뛰면 2시간50분이 풀코스 예상기록이다.

    이씨는 “내일부터 다시 마라톤 연습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라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 하는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살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다이어트 효과를 볼 수 있고 사회생활에 찌든 중년 남성들은 다시 삶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이번만은 시련이 내게서 빗겨가길….”

    1997년 가을이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권찬노(45)씨는 절박한 심정으로 매제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릉.

    화들짝 놀란 권씨는 잠깐 전화를 노려보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매제의 목소리가 귀에서 윙윙거렸다. 경제위기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권씨는 설마했다. 두 번의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낼 자신이 있었다. 제법 규모 있는 회사의 하청업체로 일을 따내는 데 성공했을 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 믿었던 회사의 부도설이 나돌았다. 동업 형식으로 함께 사업을 시작한 매제가 사실을 확인하러 간 동안, 권씨는 기도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 조금만 자신에게 관대해 달라고.

    무작정 차를 몰아 달려간 곳은 어느 바닷가였다. 바람이 제법 찼다. 하지만 권씨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회사 부도 소식을 전해들었을 가족들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슴 가득 걱정을 안고, 들어오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마음 한 구석에서 권씨를 괴롭혔다. 권씨는 가족들 목소리가 간절히 듣고 싶었다.

    “아빠, 어디세요?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아들이 울먹이는 소리로 권씨를 찾았다. 권씨는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겨우 기력을 찾은 어머니는 권씨의 손을 잡았다.

    “애비야, 넌 잘할 수 있어.”

    권씨는 지금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준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다. 세번째 사업에 실패한 후 권씨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매제도 함께했다. 어리기만한 줄 알았던 아들과 딸도 어느새 아버지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그래 나는 해군 UDT 출신이야. 다시 해보는 거야.’ 마음속에 오기가 생겼다.

    그는 IMF가 가져온 불행을 이겨내겠다며 시작한 마라톤에 점점 빠져들었다. 이것저것 운동을 해봤지만 마라톤만큼 매력 있는 운동이 없었다고 한다.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에요. 훈련한 대로 결과가 나오거든요.”

    물론 변수는 있다. 달리는 코스나 그 날의 일기도 영향을 미치고 달리는 사람의 정신상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올해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리던 날, 권씨의 각오는 비장했다. 올해 꼭 보스턴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겠다는 것이다. 보스턴마라톤은 자기가 참가하고 싶다고 해서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다. 보스턴체육회, 미국육상연맹 또는 그와 동등한 자격의 외국기관이 인정한 대회에서 일정한 기준의 기록을 보유해야만 한다.

    올해 만45세인 권씨는 3시간25분 이내에 들어와야 한다. 권씨는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그 기록을 달성해 참가자격을 얻고 싶었다. 작년 최고기록이 3시간39분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기준 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 동아마라톤 대회 골인지점에는 권씨의 어머니가 계셨다. 일흔의 병약한 몸을 이끌고 보스턴에 가겠다는 아들을 응원하러 나오신 어머니. 대회 직후, 어머니는 아들 곁을 영영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권씨는 수염을 길렀다. 2001년 대회, 2002년 대회에 추모마라톤으로 참가하면서 보스턴에 꼭 가겠다고 어머님 손을 붙잡고 드린 약속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10km까지는 3시간16분대에 주파할 수 있는 속도로 달렸다. ‘올해는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키는구나’ 싶었다. 욕심이 앞서 조금 더 힘을 냈다. 하지만 초반에 과욕을 낸 것이 화근이었을까. 20km 지점이 가까워오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20km 지점 통과기록을 보니 보스턴 참가자격을 얻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올해 못 가면 내년에 다시 도전하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완주는 해야 했다.

    “풀코스 도전은 이번이 일곱번째예요. 조금 나이 들어 시작해서 경험이 많지는 않아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속상하지만 끝까지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풀코스에 도전한다는 것은 일생에 몇 번 없는 기회이기도 하거든요.”

    2002년 동아마라톤 기록은 4시간22분20초. 목표에 훨씬 못미치는 기록이지만 권씨는 뿌듯했다. 마라톤이 행운을 가져왔는지 새로 시작한 통신관련 사업은 제법 탄탄하고, 가족들은 재기에 성공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달리는 그를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보스턴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죠. 마라톤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멋진 스포츠입니다.”

    4시간 20분35초. 골인지점을 막 통과한 노인 한 분이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았다. 정리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그게 아니다. 마치 더 뛸 힘이 남았다는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속속 도착한 젊은이들이 레이스를 끝내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나뒹구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라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당연한 일.

    가까이서 보니 성성한 백발, 검버섯이 핀 주름진 얼굴이 기나긴 42.195km 마라톤 코스만큼이나 녹록지 않은 나이를 증거하고 있었다.

    “살려고 뛰지. 일 할려구. 마누라 먹이고,나도 먹고. 또 늙어서도 자식새끼들한테 신세 안질라믄 내가 먼저 건강해야제. 그래서 달리는 거여.”

    일흔을 넘긴 정현모(70)씨에게 마라톤은 ‘튼실한 몸뚱이’가 생명인 농군의 호구책으로 시작됐다. 농사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 땅에 뿌린 정성만큼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여름 뙤약볕 아래 하루종일 엎드려 땀을 흘려야 알알이 오진 소출을 만져볼 수 있는데 어느 날부터는 힘이 예전만 못했다. 그러다 오십 고개에 올라서자 평생을 해온 일이 버겁기까지 했다. 자주 드러누워 삽자루를 잡지 못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부터 정씨는 논두렁 밭두렁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73차례 마라톤 완주

    남의 속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은 ‘힘이 남아도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달아 주고 농을 걸었다. 부인 역시 틈만 나면 볼썽 사납게 핫팬츠 차림으로 논밭길을 내달리는 남편이 나이값 못한다며 노상 불퉁해 있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농번기에도 달리기만큼은 거르지 않았던 정씨.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감기 한번,잔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 요것이 보약보다 좋다는 마라톤의 효험이구나!”

    ‘옳다꾸나’ 싶어 정씨는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소박하게 5km 구간에 도전했다. 논두렁이 윤이 나도록 달린 이력에도 불구하고,“끌탕을 치다 겨우겨우 끝낼 수 있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십수년을 넘게 달리다보니 ‘73차례 크고작은 마라톤대회 완주’라는 자랑스러운 기록이 오롯이 그의 이름 앞에 붙게 되었다.

    마라톤을 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엔 건강한 삶이 펼쳐졌다. 덤으로 여러 행운이 찾아왔다. 마라토너들 사이에선 인기가 연예인 못지않다. 마라토너들이 깍듯하게 웃어른으로 예우하고 차편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 김제 지평쌀 모델이 되어 광고사진을 찍는 호사도 누려봤으니 이만하면 시골노인 출세기가 제법 화려하다.

    “나는 절대 무리는 안해. 42.195를 뛰고도 다른 일을 챙길 힘은 남겨둬야제. 집에 혼자 내려갈 일도 생각허구. 생각 같아선 2시간 반이면 완주할 자신도 있는디 내 방식대로 달리는 거여.”

    최고기록 4시간10분. 기록보다는 뛴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그에게 골인지점의 영광은 별 의미가 없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오버페이스 하지 않다보니 다른 마라토너들이 얘기하는 ‘마의 구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 힘든 상황에 닥치면 정씨는 항상 허허벌판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이겨야지, 이겨야 해.”

    세월은 못 속인다는 나이,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하는 육체. 도대체 얼렁뚱땅이 통하지 않는 농삿일. 이 모두와 싸워 이겨야 하는 그에게 마라톤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인 셈이다.

    논 400평과 밭 1000평이 전부인 가난한 농군 정씨는 지난해 79만원이 없어 못간 백두산마라톤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고 했다. 다행히 김제농협과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올해는 맘껏 달릴 수 있게 돼 정씨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세계 방방곡곡을 달리며 ‘대한 노인’의 기개를 떨치고 싶다는 정현모씨. 그러지 않더라도 뭐가 그리 대수랴. 여생을 논두렁에서 마라톤과 함께하면 그것이 행복인 것을….

    ‘2: 53 : 25’

    멀리 골인지점에 설치된 전광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이 점점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이 번쩍 올라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잠깐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전광판의 시간이 2시간 53분 50초를 막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 여자부 1위로 들어왔다는 승전보와 함께 2시간53분32초라고 알려줬다.

    지난해 동아마라톤에서 3시간1분대의 기록을 얻었을 때만 하더라도 3시간 벽을 깨기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전주-군산 대회에서 2시간58분, 춘천대회에서 2시간57분을 기록하면서 올해 동아마라톤 대회는 남다른 각오로 준비해왔다. 출발 전부터 왠지 자신의 기록을 한발 경신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산을 떠는 문기숙(44)씨를 보고 남편은 평소같지 않게 툴툴거렸다.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이라 푹 쉬었으면 했는데 부인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니 응원하러 가기는 해야겠고, 일주일의 피곤이 겹친 터라 공연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 대회를 위해 여느 때보다 열심히 운동해 온 문씨는 남편의 투정이 조금 서운했다.

    “일어나지마. 나 혼자 갔다와도 돼.”

    미안한 마음 반, 서운한 마음 반으로 내뱉은 말에 남편은 정말 이불을 도로 덮고 누워버렸다.

    “이 사람이 정말?”

    주방에서 식구들 식사를 대강 챙겨놓느라 뚱땅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로 가는 차안에서도 남편은 별말이 없었다. 라디오 뉴스에선 오늘 바람이 많이 불겠다는 기상 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화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출발점으로 집결하기 전, 남편은 결승점인 잠실주경기장에 먼저 가 있겠다고 했다. 출발하는 모습도 안 보고 먼저 움직이려던 남편이 이렇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오늘 나 피곤하고 안 피곤하고는 당신한테 달렸다. 다른 때보다 더 잘해야 하는 거 알지?”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바빠야 할 주부가 마라톤 한답시고 틈날 때마다 운동하러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가족들의 이해 덕분이었다. 선수생활을 하자니 자연 식생활 관리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어린 자식들도 불평 한번 없이 엄마를 이해했다. 오히려 엄마가 마라톤 선수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해온 마라톤을 그만둔 지 4년 만에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가족의 이해, 특히 남편의 적극적 권유와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문씨는 원래 대전 서구청 소속의 마라토너였다. 그저 재미있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한 마라톤을 13년간이나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마라토너의 길’이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직업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잖아요. 일하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고된 훈련 속에서도 행복했습니다.”

    달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 35km 지점을 지날 때쯤이면 달린다는 행위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빠진다. 자잘한 일들로 끊임없이 속 썩이는 아이들, 하루도 편할 날 없이 골골하신 아버지, 회사일로 힘들어하는 남편과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도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진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선수생활을 계속하기가 힘들어졌다. 주위 시선도 그랬지만 본인 스스로도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눈 딱 감고 마라톤을 그만뒀다. 혹시라도 미련이 생기거나 속상해질까봐 취미로 달리는 것조차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달리기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 커져만 갔다.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가족들이 문씨에게 다시 달릴 것을 권유했다. 명예와 기록과 보상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그저 달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달릴 수는 있잖아요. 미련이 남았는데도 왜 굳이 마라톤을 그만두겠다고 완전히 접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일등을 해서 기쁜 건 사실이지만 기록이나 등수는 부차적인 문제예요. 스스로 해냈다는 느낌, 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하죠.”

    “좋은 기록으로 들어온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기록은 괘념치 않습니다. 맑은 공기를 벗삼아 마음껏 달리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3시간25분08초로 골인한 현대중공업 민계식(61) 사장.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운동으로 다진 다부진 몸매가 이순을 넘긴 나이를 믿기 힘들게 한다. 그는 동아마라톤을 비롯해 매년 국내 마라톤 대회엔 빠지지 않고 출전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2000년 동아마라톤에선 3시간7분대에 풀코스를 완주한 기록도 갖고 있다.

    “마라톤은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가다듬을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마라톤을 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게 됩니다. 지금 바로 시작해 보세요.”

    민사장은 1961년 9·28서울수복기념 마라톤 대회에서 ‘맨발의 마라토너’로 유명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와 함께 뛰어 2시간23분18초의 기록으로 7위를 기록한 ‘정식 선수’ 출신. 달리기가 유일한 놀이였던 어린시절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어른들이 달리기 시합을 시키곤 했어요. 다섯 살이던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형들을 제치고 1등 상품인 알사탕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육상을 접했다.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선 축구 핸드볼 장거리 선수로도 뛰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운동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학문도 체력을 갖춘 다음이다. 문약(文弱)에 빠져선 안된다”는 부친의 가르침 덕분. 경성제대 의대를 졸업한 그의 부친도 당시 독일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마라토너 출신이다.

    민사장은 대표선수가 돼 태릉선수촌에 입소하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달리기만큼 잘했던 공부를 포기할 수 없어 서울대 공대에 진학했다. 미국유학 시절 첫아들의 병원비 문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위안과 용기를 준 가장 좋은 벗이 마라톤이었다.

    “아들의 병원비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애리조나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트럭으로 고기를 실어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 평균 900km를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죠.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트럭 운전사들의 휴게소가 있었어요. 그곳에서도 뛰고 또 뛰었습니다. 달리기로 투지를 북돋운 셈이죠.”

    민사장은 올해 동아마라톤에 70여 명의 현대중공업 직원들과 함께 참가했다. 현대중공업 직원 중 1위로 골인한 그는, 참가한 직원들 모두가 들어올 때까지 결승선 부근을 떠나지 않았다. 한명 한명이 들어올 때마다 민사장과 먼저 골인한 직원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완주를 축하해줬다.

    “마라톤엔 직급도 ‘가방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달리고 땀을 흘리고 숨을 고르면서 공동체 의식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어요.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회사 분위기도 더욱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민사장은 현재 현대중공업 마라톤동호회의 명예회장이다. 마라톤동호회는 1996년 민사장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현대중공업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단축마라톤 대회를 열고 있다. 봄에는 개인별 대회가 열리는데, 청년 여성 일반 장년 4개 부문에서 28km의 코스를 전사원이 달리며 우정과 애사심을 다진다. 가을엔 여성사원 1명을 포함한 6명이 팀을 이뤄 릴레이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마라톤 열풍’으로 사원들 대부분이 10~20km 정도는 거뜬히 뛸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직원들과 함께 환상적인 코스에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동해안 방파제를 달리는데 저절로 호연지기가 길러집니다. 동호회원들은 경주의 보문단지, 언양의 영남알프스 배내골 등 산자수명한 곳에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민사장은 해박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현대중공업의 R&D부문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50여 편의 기술보고서를 발간하고 국내외 학술지에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국내 및 국제특허 4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 또 1995년 제1회 한국공학상을 수상하고, 2001년엔 과학기술훈장 웅비장을 받기도 했다.

    “엔지니어로 성공한 것은 달리기를 통해 기른 정신력과 의지 끈기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오늘부터라도 달리기를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루 1시간만 투자하면 삶이 행복해지고 풍만해집니다.”

    민사장의 올해 목표는 마라톤 풀코스 10회 완주. 지난해 회사일로 시간을 내지 못해 5차례밖에 완주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풀 작정이다. 회사일도 야심차긴 마찬가지. 올해는 따놓은 물량이 많아 조선수주도 50% 늘릴 계획이다.

    민사장은 “목표를 줄이면 줄였지 한 번 세운 목표는 반드시 달성하는 게 마라톤의 미덕”이라며 “회사일도 마라톤과 매한가지”라고 말했다.

    운동화 끈을 다부지게 동여매고 올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그는, 로테르담 런던 북경마라톤 대회 등 세계 유명대회에 아내와 함께 참가할 꿈도 키우고 있다.

    100리 길을 달려왔다.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달리고 또 달렸다. 박정목(48)씨는 두 손을 치켜들고 결승선에 세워진 시계를 올려다봤다. 3시간30분15초.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래! 시련과 고통은 있어도 좌절과 패배는 없다.’

    1987년 봄, 박씨는 허리를 다친 뒤 하반신 마비로 고생했다. 혼자서는 양말은 물론 바지도 입고 벗을 수가 없었다. 큰애가 세 살, 막내가 갓 태어났을 때다. 그는 아버지 노릇,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병원 창 밖으로 아침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걸을 수만, 달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맹세했다.

    “아이들이 한 살, 세 살 때예요. 적막한 병실에 혼자 남은 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2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조깅을 할 정도로 다리에 힘이 붙었습니다. 다시 달릴 수 있게 된 거지요.”

    박씨는 “다시 달릴 수 있는 게 너무 행복해 마라톤을 시작했다”고 했다. 1998년 겨울,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IMF외환위기로 회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정부의 삼성자동차 빅딜 발표가 뒤따랐다. 박씨에게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서울역 명동성당 서울본사 부산시청을 돌며 집회가 이어졌고, 삭발과 철야농성 단식농성으로 삶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4년 동안 회사는 앞만 보고 뛰어왔습니다. ‘모든 것은 품질로 승부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고 별별 소문이 다 돌았죠. 이런 혼란을 달리기로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1999년 70회 동아마라톤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1999년 3월21일 동아마라톤이 열린 경주의 날씨는 마라톤을 하기엔 다소 쌀쌀했고 바람도 심했다. 의욕만 앞세운 짧은 기간의 무리한 훈련으로 양쪽 무릎에 통증도 심했다. 의사가 대회참가를 말렸지만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달리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하반신 마비를 이겨낸 것처럼 마라톤을 통해 시련을 이겨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첫번째 풀코스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졌고 날씨는 무척 추웠습니다. 결국 30km지점에서 주저앉고 말았어요.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지난날의 일들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다시 힘을 냈습니다. 차도는 차들로 채워지고 인도로 올라가 절둑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가는 사람들이 “완주하세요”라고 격려했다. 응원소리 너머로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구호소리가 섞여 들렸다. 환청이었다. 그는 다시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보문단지의 골인점이 눈앞에 들어왔고 걱정스럽게 그를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를 보자마자 눈꺼풀이 따듯해지면서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박씨의 아내는 앰뷸런스가 들어올 때마다 남편을 찾느라고 안절부절했다고 한다.

    기록은 5시간30분03초. 완주로 인정하는 제한시간(5시간)을 넘겼지만, 완주 후 그는 심적 혼란을 극복했고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회사일도 거짓말처럼 하나둘씩 풀려나갔다.

    “집에 돌아와보니 왼발 엄지와 검지 발톱이 빠져있더라고요. 아픈 줄도 모르고 뛰었던 거예요. 중요한 건 결국 육체적으로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마라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게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박씨는 마라톤을 시작한 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리고 있다. 주중엔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집 주변의 운동장에서 개인연습을 하고, 주말엔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경상남도 김해시 신어산 MTB(산악자전거) 코스에서 ‘지구력 강화용’ 인터벌 달리기(15~20km) 훈련을 한다. 틈나는 대로 낙동강 하구언에서 20~30km의 자세훈련도 하고 있다.

    “달리기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줄어들어요. 동호회에 가입하면 나쁜 습관도 서로 지적해주고 교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 지 4년 만에 2시간 가량을 단축했다. 4시간 벽을 넘기기도 힘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초보자들의 페이스 메이커 역할도 하고 주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됐다. 그는 김해마라톤과 르노삼성마라톤팀의 회장 노릇도 하고 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잔병치레 한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아테네 병사처럼 국가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손기정옹이나 황영조씨처럼 국민적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은 보너스일 뿐입니다. 한계와 고통 너머에 있는 고요하고 정돈된 마음, 불굴의 자신감을 찾아서 뛰는 게 마라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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