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미 하원, 탈북자 3명 은밀히 불러 북한인권 청문회 열었다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09-09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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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 문제가 남북한 간의 문제를 떠나 국제문제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 특히 4월 말부터 중국의 외국 공관에 탈북자들이 잇따라 진입해 망명을 요구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지고 있다. 4월25일 탈북자 1명이 베이징(北京) 주재 독일대사관에 진입해 한국 망명을 요구했고, 4월29일에는 탈북자 3명이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주변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

    또한 지난해 북한을 떠나 한국에 들어온 장길수(18)군 가족 5명이 5월8일 오후 2시께 중국 선양(瀋陽) 허핑(和平)구의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하려다 붙잡혀 중국 공안에 넘겨졌다. 거의 같은 시간에 선양 일본총영사관에서 가까운 미국총영사관에선 탈북자 2명이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9일에도 선양 미국총영사관에 탈북자 1명이 들어왔다.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눈여겨 볼 대상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미 하원의 움직임이다. 미국 하원은 5월9일 외국공관으로 진입하려다 체포된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하지 말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했다. 헨리 J.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과 제임스 A. 리치 동아시아소위원회 위원장은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이같이 촉구했다.

    미 의회는 지난 해 말부터 의회에 북한인권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위해 준비작업을 해왔다. 의회는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탈북자까지 미국으로 초청, 청문회에 참석시켜 증언을 듣고 있다.

    5월2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는 워싱턴DC 레이번빌딩 2172호에서 북한인권청문회를 열었다. 의회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3명(백두한라회 김성민 회장,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의 저자 이순옥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호원을 지낸 이영국씨)을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하며 초청, 이들의 증언을 들었다.



    아이오와주 출신의 공화당 의원인 짐 리치 위원장이 주재한 이 청문회에는 6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청문회는 1, 2부로 나누어 점심식사도 거른 채 6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 가운데 김성민씨와 이영국씨의 증언을 소개한다. 두 사람의 증언은 영문으로 작성돼, 청문회 공식 자료로 제출됐다.



    ▼ 김성민씨의 증언 ▼


    나는 1962년 6월5일 북한 자강도 희천시 전평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대동문인민학교와 련광고등중학교를 졸업했고,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78년에 북한군에 입대했다. 10년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1988년에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인 1991년 북한군 243군 부대 예술선전대 작가(소위)에 임명됐다.

    1996년 10월, 주민들은 물론 군인들마저 굶겨 죽이는 김정일체제에 환멸을 품고 북한을 탈출했다. 3년 동안 중국을 떠돌아다니다 1999년 2월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나는 인류의 양심 앞에 북한군의 비참한 처지와 중국내 탈북자들의 인권문제를 증언하려 한다.

    세상은 북한 군인들이 이른바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 아래 유복하고 배부른 생활을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정일의 친위대로 알려진 호위사령부, 수도방어사령부 명예위병대와 군악단을 비롯한 최고사령부의 몇몇 소속부대, 그리고 특수 수색부대인 민경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군은 1980년대 중반부터 극심한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86년 김정일은 인민군후방총국에 대한 국가 지원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게 이유였다. 1990년 겨울부터는 상급단위에서부터 내려오던 후방물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하루 800g의 쌀(입쌀70%, 강냉이쌀30%)과 소금만 나올 뿐 기름, 육류, 남새(채소)등 일체의 부식은 자체적으로 생산, 보급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이때부터 북한 병사들은 군사훈련과 작업은 물론, ‘부업’이라고 불리는 남새농사, 강냉이 농사에까지 동원됐다. 훈련과 작업의 강도는 높아지는 반면 먹는 것은 오히려 줄어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800g의 식량이 공급된다곤 하지만 장교와 고참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기 때문에 병사에게 돌아오는 밥은 500g도 채 되지 않는다. 기름 한 방울 안 묻어있는 염장 무와 염배추 반찬은 젊은 병사들의 영양상태를 극도로 부실하게 만든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에 어쩌다 고깃국을 한 그릇씩 얻어 먹게 되는데,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병사들은 국에 들어 있는 기름 몇 방울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다. 한때 ‘급성 설사증’이라고 불리던 원인 모를 설사증세를 앓다 죽어간 군인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있던 북한군 620훈련소 220여단에서만도 1991년 봄 60여 명의 병사들이 그렇게 죽어나갔다.

    이 지경에 이르자 북한군 수뇌부는 사단과 여단마다 100여 명 규모의 ‘위생중대’라는 것을 만들어 건강이 악화된 군인들을 격리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양실조가 심각한 병사들은 좀처럼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해 훈련소 군의부 통계에 따르면 영양실조로 사망한 군인이 200여 명이나 됐다.

    북한군에서는 사고로 죽는 병사들도 허다하다. 1987년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장에서는 예성강 다리가 통째로 무너지는 바람에 2군단 소속 2개 대대 병사 600여 명이 사망했고, 1994년 7월에는 평양-향산 고속도로 건설장에서 9군단 군인 300여 명이 굴속에 묻혔다.

    이밖에 1993년 금강산 발전소 건설장 물길(지하터널)공사장에서 40여 명의 군인이 흙더미에 깔리거나 지하수에 빠져 죽은 사건, 허가 없이 산림을 도벌했다고 4군단 28사단 133연대 3대대 병사 7명을 재판도 없이 총살한 사건 등 북한 병사들이 죽어간 사례는 내가 보고들은 것만 해도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10∼13년 간의 군 복무를 강요하고, 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날마다 자행되는 비행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이들도 김정일의 맹목적인 충성경쟁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북한 주민의 일원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북한 병사들에게도 진정한 삶의 권리와 자유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빈다.

    한편 중국내 탈북자들의 실태는 세상에 많이 알려졌지만, 내 고향의 누이들이 그곳에서 개나 돼지 값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언하고 싶다. 나는 1997년 중국의 다롄(大連)항에서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적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보위부가 탈북 군인들이나 간부들, 정치적 성향을 띤 사람들을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대하는 지 똑똑히 알고 있다.

    일단 정치범으로 판명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2001년 혜산 사건에서처럼 공개처형감이 된다. 이러한 탈북자들의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정부가 지금도 강제송환이라는 비인도적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며, 탈북자 강제송환을 당장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끝으로 북한인권을 위한 이런 청문회가 내 조국인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열릴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 이영국씨의 증언 ▼


    나는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경호원이었다.

    나는 북한의 함경북도 무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기관사였고 어머니는 지방 집단농장의 농사꾼이었다. 북한에는 4명의 누이가 있다. 나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8년 5월 인민군에 입대해 의무복무 기한 10년을 채웠다.

    제대 후 1988년 6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고향에서 상급 당원 일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북한체제의 부도덕성과 억압통치를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인민들에 대한 잔악한 행위가 예사롭게 저질러졌다. 나는 남한 라디오를 몰래 들으며 외부세계의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1991년 4월에 평양에 있는 중앙당군사대학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내가 북한에 계속 있었다면 미래가 보장되는 특권층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1994년 4월, 나는 다시 고향의 지방당 고위간부직으로 돌아갔다. 현장 경험을 더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늘 북한의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내 관심은 바깥 세상에 있었고, 자유에 대한 염원은 날로 깊어갔다.

    나는 1994년 10월1일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탈출한 지 두 달 만인 1994년 12월4일 베이징에서 북한 요원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북한대사관에 끌려가 무자비하게 구타당했고, 이틀 뒤 평양으로 압송됐다. 비행기에 타기 전에 나는 무슨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 팔과 다리는 붕대를 감은 쇠막대기에 끼여 단단히 결박당했고, 몸은 들것에 묶였다. 평양의 국가보위부에서 6개월 동안 심문받으면서 매질을 심하게 당해 이가 6개나 부러졌고, 왼쪽 눈을 심하게 다쳤으며, 한 쪽 고막이 터졌다.

    친척이 힘을 써준 덕분에 그들은 나를 죽이지는 않았다. 나는 1995년 5월26일 여독 집단수용소에 수감됐다가 4년 뒤인 1999년 1월5일 석방됐다. 하지만 그해 4월28일 친구와 친척들에게 ‘바깥 세계’에 대해 언급한 죄로 다시 체포됐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수갑을 채워 압송했다. 나는 붙잡혀 가다가 그들을 때려눕히고 도주했다. 그들은 등 뒤에서 총을 쏴댔지만 맞지 않았다. 밤새도록 산을 넘어 달린 끝에 이튿날 마침내 중국 땅에 닿았다. 그후 거의 1년 동안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0년 5월22일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나는 북한의 수용소에서 보낸 악몽 같은 생활을 틈틈이 기록했는데, 2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죄수들은 대변을 본 뒤 배설물을 손에 담아 근처 옥수수밭으로 옮겨야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아직도 손에 피부염을 앓고 있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다반사기 때문에, 죄수들은 주위에서 누가 죽어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나는 수용소에 있을 때 200구 이상의 시체를 등에 업고 수용소 안에 있는 언덕으로 옮겨 매장한 경험이 있다.

    내가 목격한 것 가운데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떠올려보겠다. 1997년 7월 어느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철’이라고 불리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탈북했다가 중국에서 붙잡혀 강제 송환된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그는 수용소를 탈출하다 붙들렸는데, 체포될 때 한 쪽 다리에 총을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수용소의 남녀 죄수 1000여 명은 그가 붙잡힌 언덕 근처 길 양 쪽에 늘어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비병들은 ‘영철’에게 재갈을 물리고 두 다리를 밧줄로 묶은 뒤 러시아제 트럭 뒷범퍼에 단단히 붙들어맸다. 그러고는 트럭으로 그를 4km나 끌고 갔다. 죄수들은 이 잔인한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는 피를 엄청나게 흘렸다. 트럭이 멈춰섰을 때 그의 등가죽과 뒤통수 가죽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공개처형됐다.

    수용소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누구라도 탈출하면 이와 똑같은 일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젊은이의 시체 위로 지나가게 한 다음 시체의 피에 손을 적시도록 강요했다. 그때 참다못한 한 젊은이가 갑자기 줄 바깥으로 뛰쳐나가 경비병의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 외쳤다.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다룰 수 있습니까….”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공개처형을 위해 설치해둔 기관총을 그 젊은이에게 발사했다.

    나는 중국에서 체포될 때 체중이 94kg이었으나, 4년 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석방됐을 때는 53kg으로 줄어 있었다. 죄수들은 예외없이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다뤄졌다. 수많은 젊은 죄수들이 죽거나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죄수들은 이들이 생체실험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북한에서 자행되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자세히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곳에서 죄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다.



    격분한 미국 의원들


    청문회에서는 이들 탈북자 3명 외에 존 파월 세계식량계획(WFP) 아시아지국장,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제스퍼 베커 전 베이징지국장, 탈북자를 지원하는 독일 출신 의사 폴러첸 박사의 증언도 있었다.

    파월 지국장은 “WFP의 지원이 없으면 올해 7∼8월에 북한의 식량이 바닥난다”면서 “당장 5월부터 67만명의 초·중등학생들에 대한 급식을 삭감해야 할 처지며, 35만명의 노인들도 WFP를 통한 식량배급을 못받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 북한이 생산 및 수입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은 북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에 150만t이 모자라며, 특히 임산부·아동·노약자를 위주로 한 식량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

    베커 전 베이징지국장은 “대북 식량원조를 협상도구로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고, ‘국경없는 의사회’의 소피 델로니 북한 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식량이 지급되지 않고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폴러첸 박사는 “북한 주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세계가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라며 “국제사회가 언론의 협력을 얻어 북한 사회가 개방되고 인권이 개선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목할 점은 청문회에 참석한 미국 의원들의 반응이다.

    리치 위원장은 “오늘 청문회를 계기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란다”면서 “탈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에드 로이스(공화당·캘리포니아) 의원은 “우리는 탈북자에게 안전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의 협조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며 몽골 근처에 난민촌을 세우는 방안을 제의했다. 또한 그는 중국 정부에 탈북자의 난민 지위를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이 이른 시일 내에 상·하원에서 채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크 커크(공화당·일리노이) 의원은 자신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연변지역에서 탈북자 실태를 조사한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과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니 팔레오마베가(민주당·미국령 사모아) 의원은 “북한은 굶주린 아동들마저 방치하는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이라면서 “희망이 없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고 했다.

    한편 이 청문회 직전인 지난 4월말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미 하원 인권협의회(Congressional Human Rights Caucus)에서 북한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1998년 국제종교자유법을 근거로 설치된 연방정부위원회(2003년 5월까지 활동)로, 그동안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인권 특별보고서(2000. 12), 연례종교자유보고서(2001. 5) 등을 발표하면서 북한을 ‘종교탄압 특별 우려 대상국가’로 지정해 달라고 건의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보고서는 미국 정부에 13개항을 건의했다. 그 내용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으로 이슈화하고 미국이 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인데, 7항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의회는 비정부기구를 통해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미국과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발간하는 북한인권상황보고서는 포괄성과 객관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 따라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문제 전문가가 중요한 정보원인 탈북자를 면담해서 포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②국무부는 북한 인권침해에 대한 정보획득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2002년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 이벤트를 활용해서 국제적으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③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유엔총회 연설 등의 계기를 활용해서 북한의 인권상황을 언급해야 한다.

    ④의회는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의회 내 협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이 협의회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하고, 대북 인권정책을 검토해야 한다.

    ⑤의회는 북한 인권을 위한 조직과 북한 인권개선 활동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하다.

    ⑥정부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을 대상으로 한 방송(VOA, RFA)을 적극 확대하는 방안과 개인간 정보 교환 채널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⑦정부는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유엔 결의안 채택과 유엔 특별보고관 임명을 유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일과의 협조를 통해 북한과 대화할 때 종교의 자유 같은 인권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촉구한다. 또 EU(유럽연합)의 대북 정치대화 때 종교의 자유문제를 포함시키도록 협조한다.

    두 번째는 탈북자 보호 및 인권개선에 대한 사안이다.

    ⑧정부는 중국, 러시아 등의 국제사회가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⑨정부는 중국정부가 북-중 국경지방의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한 한국과 국제사회 NGO의 접근을 허락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번째는 미·북 양자접촉을 통한 인권개선 노력에 관한 사안이다.

    ⑩정부는 북한당국과의 대화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나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인권 보호(종교적 자유 포함), 재미 이산가족의 상봉 같은 의제가 대화 의제에 포함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 문제를 논의할 때 미 정부는 지원규모와 인원을 늘려야 한다. 지원 인원에는 민간단체도 들어가야 한다. 모든 대북 지원에서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분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⑪정부는 국제사회와 협조, 북한 인권상황에 접근해서 감시해야 한다. 또 외국의 외교관과 언론인이 북한 내부에서 이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⑫정부는 북한이 2001년 7월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사항을 이행하도록 국제사회와 협조해야 한다.



    인권과 종교로 김정일 목조르기


    미국은 클린턴 정부 때까지만 해도 핵과 미사일 문제로 북한과 협상을 계속했다. 그러다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래식 병력과 대량파괴무기 문제를 새로운 의제로 들고 나왔다. 여기에 더해 제기하는 사안이 바로 북한 인권문제와 종교의 자유다.

    핵과 미사일, 재래식 병력 문제는 주권사항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권문제와 종교의 자유는 모든 국가가 공감할 수 있는 현안이다. 향후 미국의 김정일 정권 목조르기는 북한 인권과 종교의 자유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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