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감성정치 vs 엘리트 정치

강점과 약점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 hades@donga.com 공영운 < 문화일보 정치부기자 > rabbit@munhwa.co.kr

    입력2004-09-09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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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후보 ▼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대선후보는 부산사람 치고는 말이 빠르지 않다. 약간 더듬는 듯 어눌한 투로 느릿느릿 얘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청중을 향해 곧장 말을 쏟아내는 이인제(李仁濟) 의원과는 정 반대 스타일의 연설을 한다.

    하지만 느릿느릿한 노무현식 연설이 달변가들의 연설을 누르고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상 밖의 현상이 벌어졌다.

    올해 초 만해도 노후보의 대중지지도는 10~15%로 이회창 이인제에 이어 줄곧 3등이었다. 그러나 광주지역 경선을 계기로 상황은 급변했다. 노풍(盧風)이 전국을 강타하더니 마침내 이회창 후보와의 가상대결에서 노후보가 앞서는 ‘경이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일대일 대결에서 지지율이 50%대까지 올라갔는데 이는 경선 전보다 30%이상 새로운 지지도가 더해진 결과였다. 그러면 30%의 새로운 지지도를 창출해낸 노무현 후보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한순간에 표를 몰고 온 노무현 후보의 장점이 뒤집어보면 곧 노후보의 단점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나라당은 최근까지도 노후보가 국제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며 “지금까지 단 세 차례 밖에 해외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국가의 외교정책을 조율할 수 있겠냐”고 공격했다.

    실제 노후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세 번밖에 못갔다. 일본과 영국, 캐나다에 잠깐씩 들렀을 뿐이라고 한다. 우리와 국가적 이해관계가 밀접한 국가인 미국에는 가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영어를 읽을 줄은 알지만 회화실력은 형편없다. 이런 노후보의 국제화지수에 대해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민답다”고 평가하지만 반대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으로는 자격미달”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노후보는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이 직선적이라고 말하는데 노후보 본인은 직선적인 성격을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노후보 주변 사람들도 “직선적인 노후보의 성격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한 측근인사는 “4월30일 노후보가 김영삼 전대통령을 방문했는데 두 사람이 마주한 모습을 보니까 배짱있게 일을 추진하는 능력에서는 두 사람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노후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괄괄하고 도전적인 스타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시국변호사시절 노후보가 법정에서 상대편 검사와 멱살잡이 직전까지 갈 정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청년시절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가끔 거칠고 투박한 언행을 언뜻언뜻 엿볼 수 있고, 이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후보는 자신의 견해와 다른 질문에 대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는데, 이런 노후보의 행동을 참신하게 보는 기자들도 있겠지만 그 반대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술자리이기는 하지만 언론관을 두고 기자들과 자주 언쟁을 벌이는 것도 이런 언어습관 탓이다.

    대중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할 줄 알아야 한다. 노후보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몇 안되는 대중정치인인데, 이는 그만의 소중한 자산이다. 노후보보다 학벌이 좋고 달변인 경쟁자들이 그에게 밀린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감동’일 것이다.

    노무현 후보는 두세 차례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정치인이다. 첫번째는 1988년 5공 청문회였는데 노후보는 이해찬 이인제 의원과 함께 청문회가 배출한 정치스타였다. 30~40대 연령층의 노후보 지지자들은 당시 그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사람들이다.

    20대 유권자들은 노무현 후보를 2000년 4·13총선 당시 민주당 불모지인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무모한 도전장을 내민 노후보의 용기에 감동한 사람들이 ‘노사모’라는 자발적 팬클럽을 만들었는데 당초 수백명 수준이던 노사모는 민주당 국민경선을 거치면서 회원수 4만이 넘는 거대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노사모의 출현과 성장은 정치인이 국민에게 감동을 주면 국민들은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통령후보 경선에 뛰어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한결같이 노사모를 벤치마킹한 네티즌 팬클럽을 조직했지만 노사모의 조직력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감동’과 ‘자발성’이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노사모는 분명 노무현만이 누리는 장점이다. 이들과 비슷한 정서를 가진 젊은층의 지지가 노풍 확산의 배경이라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있다. 노후보는 감동을 준 정치인이지만 뜻밖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다. 노후보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벌써 15년, 하지만 그가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시기는 불과 6년 남짓하다. 나머지 9년 동안 그는 출마와 낙선을 반복했고 정치권 주변부를 맴돌며 세월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치이력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은 정치인이다.

    이미 약점이 드러난 이회창 후보의 경우 지지도가 급격히 오르지도 않지만 웬만해서는 떨어지지도 않는 특징이 있다. 아직까지는 일반국민들 사이에 정치신인과 다름없는 노후보의 경우, 치명적 약점이 공개된다면 한순간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당내 계보의원이 없다는 점 역시 노후보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계보의원이 없으니 국민을 상대로 직접 바람몰이를 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결정하고 가볍게 움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선주자가 된 뒤 당과의 의견조율에 적지 않게 애를 먹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후보는 민주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민들에게 내가 훈육받아야 할 대상으로 비치지 않도록 해달라”며 민주당 의원들과의 상견례가 편치만은 않았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한나라당은 노후보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검증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장점만 부각되고 있을 뿐이라는 게 한나라당의 시각이다.

    한나라당은 국방부의 주적(主敵) 개념 변경 움직임에 대해 “왜 노후보는 말이 없냐”고 따지고 나섰는데 이런 식으로 현안에 대한 노후보의 생각을 따지는 한나라당의 공세는 선거직전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여기에 더해 과거 노후보가 주장했던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철수 등에 대한 혹독한 사상검증도 준비하고 있다. 노후보는 이념공세에 곧잘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대선까지 앞으로 7개월간 노후보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의 공세는 계속될 것 같다.



    ▼ 이회창 후보 ▼


    이회창 후보는 1997년 대선에서 ‘3김식 정치 청산’을 내세우며 선거에 나섰지만 3김 중의 한사람인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지난 4년여 동안 김대통령과 정치생명을 건 투쟁을 계속했고 이제 자신이 펼친 정치역정의 공과(功過)에 대해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두번째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번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가장 유리한 측면을 정치이슈의 흐름과 정치지형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김대중 정권의 권력형 비리가 계속되면서 만들어진 ‘비리 이슈’가 몇 가지 이유에서 이후보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가져다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선 비리 문제가 정국의 주요쟁점으로 등장하는 한 원칙과 대쪽, 청렴과 강직을 자신의 이미지로 내세워온 이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비리 정국’은 이회창 후보가 출마명분으로 내세우는 ‘DJ정권 심판론’과 ‘정권교체론’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이후보는 지난 4년간의 야당생활에서 정권과 강경한 투쟁을 계속하며 반DJ정서에 의존해 왔지만 이는 자발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측면도 강했다.

    이후보는 지난해 8월 총재취임 3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총재에 취임한 당일인 1998년 8월31일 여권이 ‘세풍사건’을 터뜨리고, 안풍, 총풍 등 이른바 ‘3풍’사건으로 ‘이회창 죽이기’에 나서는가 하면, 의원 36명을 빼가는 상황에서 생존투쟁은 ‘강요된 현실’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만큼 그가 해온 반DJ투쟁은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비리 사건은 그의 반DJ투쟁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것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선으로 떨어진 것, 50%를 상회하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비리 정국에 묻혀 속락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 비리 이슈는 노무현 돌풍 당시 만들어진 ‘보혁구도’의 틀 속에 갇혀, 입지가 좁아진 이회창 후보에게 극적인 탈출구를 만들어줬다. 정국을 부패-반부패 구도로 바꿔놓음으로써 이후보가 보수, 기득권, 특권층 이미지라는 부정적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깨끗함과 강직함을 부각시키고, 계층적 약점을 보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이슈의 지속성 여부다. 한나라당이 세 아들 비리에 대한 국정조사와 특검제 도입을 주장하고 김대통령에 대한 직접조사를 촉구하는 것도 이 문제를 대선까지 연결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또 하나 이회창 후보의 강점은 지역적 기반이다. 그는 영남권에서 비교적 탄탄한 지지를 받고 당내 영남권 의원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원을 얻고 있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후보가 탈락한 결과로 충청권에서도 상당한 약진세를 보이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또 지난 대선 이후 5년간 지속적으로 검증을 받아와 부정적 이슈에 대해 저항성과 내성이 생겼다.

    그는 또 후보의 자질부문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에 비해 안정감과 국정운영 능력, 경력과 학력 등 여러 측면에서 골고루 앞서 있다. 최근 문화일보와 YTN이 여론조사전문기관인 TNS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후보는 ‘안정감’에서 노후보를 29%대 15%, ‘국정운영 능력’면에서 25.8%대 14.5%, 경력 및 학력면에서 12.5%대 2.9%로 앞서 ‘개혁성과 참신성’(26.6%대 59%)을 제외하고는 전 부문에서 앞섰다.

    지지층의 견고성 면에서도 이후보가 앞선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후보 변경의사를 묻는 질문에 ‘계속 지지할 것이다’는 응답자는 이후보 측이 노후보 측을 10%포인트 이상 앞선다. 반대로 ‘지지후보를 바꿀 수 있다’는 응답자는 노후보 지지자가 이후보 지지자보다 10%포인트 가량 많다. 투표의향을 묻는 질문에도 노후보 지지율이 높은 20~30대는 60~70%만 “반드시 투표할 것”이라고 답한 반면, 이후보 지지율이 높은 40~50대에서는 80~90%가 투표의사를 밝혀, 이후보측 지지가 실제 득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이후보의 최대약점은 이미지가 고착화하고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입문 당시 가졌던 ‘변화’‘개혁’‘현상타파’의 이미지를 거의 상실했다. 야당 지도자 4년여 동안 여권과 극한대립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국을 ‘투쟁형’으로만 이끌고 대안제시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으로 비친 반면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개혁반대세력’ 또는 ‘기득권 옹호세력’의 오명을 뒤집어 쓴 측면도 적지 않다.

    이같은 측면은 그의 개인지지도가 여권의 잇단 실정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선 이하에 묶여 있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한나라당이 지난해 10·25재보선에서 승리하고 여권이 국정난맥과 비리사건으로 크게 흔들리는 시기에도 개인지지도가 당지지도에 못미치거나, 김대중 대통령보다도 개인지지도가 낮은 이상현상을 경험해야 했다.

    그에게 불리한 또 하나의 측면은 우리사회의 계층구조 변화양상이다. 1997년말 IMF사태 이후 지금까지 중산층이 몰락하고 경제적 양극화현상이 심화돼 이른바 ‘20대 80의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40~50대 가장의 강제퇴출, 고학력실업자 양산, 정규직 근로자의 감소와 비정규직 근로자의 증가, 대졸 실업의 폭증 등 전통적 중간층의 두께가 얇아진 상황에서 이후보의 보수적 이미지는 절대적 지지계층의 왜소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후보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지지층의 적극성이다. 노무현 후보의 경우 지지층의 안정성은 부족하지만 매우 활동적이고 자발적이다. 반면 이후보의 지지층은 활동성이 떨어지는 ‘점잖은 사람들’이다. 이는 ‘노사모’와 이회창 지지모임인 ‘창사랑’의 행동양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후보의 리더십 행태도 불안요인이다. 고비마다 반복된 당 내분과 탈당도미노는 이후보의 리더십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이후보는 또 3김 정치 청산을 주장하면서도 김영삼·김종필씨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수시로 관계변화를 모색하는 모습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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