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젊은 감각에 영합하지 않겠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영화감독 임권택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입력2004-09-16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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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 ‘취화선(醉畵仙)’이 ‘춘향뎐’에 이어 칸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들었다. 5월24일 개막되는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이 상을 받게 되면 임감독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중흥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의 경사다.

    임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여러 차례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경신했다. 1990년에는 ‘장군의 아들’로 서울 단성사에서만 68만명을 동원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93년 ‘서편제’는 전국에서 3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드문 행운을 누리고 있다. 국제영화제의 상복도 적지않게 따라주었다. 강수연이 198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탔고 1987년에는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신혜수가 ‘아다다’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모두 그의 작품이다. 1993년에는 ‘서편제’가 제 1회 상해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받았다.

    ‘서편제’는 흥행에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칸영화제 본선 진출에 실패해 임감독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본선에 들어선 영화는 ‘춘향뎐’이다. 그러나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50억∼60억원(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을 들여 찍은 영화가 개봉관에서 일찌감치 간판을 내리면 영세한 제작자는 그야말로 존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고 감독은 죄인이 된 기분에 빠져든다.

    언론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정일성 촬영감독, 임감독을 ‘노인 트리오’ 라는 불경스러운 호칭으로 부른다. 노인트리오는 요즘 ‘취화선’ 일로 늘 함께 다닌다. 개봉 전날 시사회에도 극장 입구에 세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영화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 세 영화인들의 얼굴에서 대학입시를 치르고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은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태흥영화사는 서울 한남동 단국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이태원 사장이 옛날에 살던 집을 개조해 영화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

    궁합 잘 맞는 ‘노인 트리오’

    반백의 스포츠머리를 한 임감독은 기침을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임감독은 말이 어눌한 편이다. 대답이 짧고 생각이 잘 안나면 ‘뭐인가’하고 더듬는다.

    ―이태원 사장은 “두 번씩이나 불러놓고 설마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지” 하고 기대가 대단하던데요.

    “두 번 왔다고 해서 인정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니거든요. 작품 자체의 질이 수상을 결정합니다. 상에는 운도 따라요. ‘취화선’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성향의 심사위원이 많으면 유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칸영화제 본선 진출 및 수상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세계에서 알아주는 큰 영화제로 칸, 베니스, 베를린, 모스크바영화제를 꼽습니다. 모스크바영화제는 망했지만. 내 영화는 베니스·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베를린에서는 상을 못 받았지만 본선 경쟁에 두 번 올랐습니다. 칸은 본선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내가 1980년대 초부터 칸영화제에 출품하기 시작해 2000년에야 ‘춘향뎐’으로 본선에 들어갔으니 20년이 걸렸죠. 그렇게 벽이 높은 영화제입니다.”

    ―남양주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영화미술사상 최초로 21억원을 들여 조선말기 서울거리를 재현했다지요. 영화 찍고는 그 아까운 걸 철거하는 겁니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6억원을 지원했습니다. 우리가 영화 찍고 난 다음에는 진흥위원회가 넘겨받아 관람객에게 공개할 계획이죠.”

    ‘JSA’의 촬영 세트도 거기에 있다. 서울종합영화촬영소는 로스앤젤레스 유니버설스튜디오처럼 유명 영화의 세트를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입장료 3000원을 받는다. 주말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꽤 장사가 된다고 한다.

    ‘취화선’은 조선말기 천재 화가 장승업(1843∼97)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오원(吾園) 장승업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의 3원(園)으로 불린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해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궁에서 뛰쳐나갔다가 붙잡혀 들어오기 예사였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미인이 곁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홍도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장승업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마흔 살에 화명(畵名)을 얻어 기행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쉰둘의 나이에 갑자기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소설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많던데 ‘취화선’은 소재를 어디서 취했습니까.

    “기록과 구전을 토대로 도올 김용옥 교수와 내가 함께 시나리오를 썼지요.”

    ―언제 장승업을 영화화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까.

    “1978년 유신시절에 장승업을 찍어볼까 생각했죠. 왕이 불러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자기가 싫으면 뛰쳐나가는 용기를 지닌 화가였습니다. 유신정권이 우리의 숨통을 완벽하게 조이던 시대에 자유인의 치열한 삶을 영화로 담아보려는 구상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의치 않아서 덮어두었다가 이번에 하게 된 거죠.

    ‘춘향뎐’과 ‘서편제’에서는 판소리를 영상과 만나게 시도했습니다. 소리와 영화를 조화롭게 만나게 해서 판소리를 살려내고 영화로서도 성공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동양화와 영화가 만났습니다. 줄거리 자체는 장승업이라는 화가의 삶을 다루었지만 영상으로 그린 한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서화, 도예, 판소리, 기악, 의상, 다도 등 한국 예술의 모든 부문이 등장하더군요.

    “‘서편제’ 이후 내가 영화를 한다고 하면 도와주려는 쪽이 많아졌어요. 과거에는 외부의 도움 없이 미숙하고 모자란 대로 우리 안에서 해결했어요. ‘서편제’ 이후 문화 전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화에 얽히는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취화선’에서 그런 참여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진작 이런 풍토가 돼있었으면 우리 영화가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동안 서로 너무 갇혀 살고 있었는데 이제나마 열려서 고마울 뿐입니다.”

    ―‘춘향뎐’에는 조상현씨의 판소리가 영화 중간중간에 끼어들던데요. 춘향, 향단, 이도령, 방자, 월매가 서양 뮤지컬 영화처럼 각자 판소리를 하는 방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요. 판소리와 연기를 모두 잘하는 배우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조상현씨 판소리가 자주 길게 나오니까 영화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각자 소리를 하는 창극식으로 해갈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주는 소리의 감동을 일관성 있게 해갈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나눠서 하면 서양의 오페라하고 다를 게 뭐 있어요. 아마 외국에 나갔을 때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았을 거예요. 서양음악의 아류 방식이거든요. 영상이 갖는 효과와 소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서 영화의 평가가 높아집니다. 판소리의 맛에 빨려 들어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빨려 들어오면 지루함이나 단절감이 안 생깁니다. 우리의 원형을 추구하려는 모험적 시도였습니다.”

    ―100편에 가까운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가겠지만 그중에서 대표작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필름을 버려야 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고 싶습니까. 신문 인터뷰에 보니까 ‘서편제’는 나의 얼굴이라는 얘기를 했던데요.

    “나의 얼굴 운운은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기자가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기자들이 대표작 하나만 꼽아보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면 흠 잡을 데가 없이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영화는 없습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드러난 성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서편제’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선 흥행면에서도 한국영화 사상 최고 관객 동원 기록을 깼죠. 젊은 세대로부터 멀어져가는 판소리가 가치 있는 우리의 음악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서편제’를 계기로 전반적으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서편제’는 왜 그렇게 흥행에 성공했다고 봅니까.

    “이태원 사장에게도 이 영화는 절대 흥행이 안될 거라고 김 빠지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사장도 동의하더군요. 단지 판소리의 맛을 영상에다가 끌어 담아 관객한테 전달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필름에 대해 그렇게 엄청난 반향이 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워낙 먹고사는 데 급급한 세월을 살다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와 ‘서편제’의 제작이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춘향뎐’은 상영 기간이 짧아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이번 인터뷰를 위해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춘향뎐’은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너무 잘 아는 소재를 다루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했어요. ‘춘향전’은 14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누구나 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영화로 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세계 시장에 배급돼 해외 교포들이 많이 봤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만 4개월을 상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할리우드 아류의 한국영화와는 달리 평가가 썩 좋았습니다.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가 극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으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고, 세계 속에서도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영화사로서는 출혈이 컸지만 크게 봐서는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의 고향은 전남 장성이다. 판소리 발원지가 호남지방이다보니 성장기에 판소리를 들을 기회가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서편제’ 찍기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판소리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릴 만큼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판소리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습니까.

    “해방 직후에 임방울 선생 공연을 본적이 있지만 판소리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이청준씨의 ‘서편제’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몇 가지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판소리인데 소멸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서편제’를 찍을 당시에도 판소리에 대해서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습니다. 아마 감독이 소리의 깊은 세계에 빠져 있었으면 ‘서편제’ 같은 영화는 못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소리의 깊은 맛을 살려내려면 ‘서편제’와는 빛깔이 다른 영화가 나와야 했을 겁니다. ‘서편제’가 감독의 아마추어적인 수준을 영화에 담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죠. 깊은 소리의 세계를 담다보면 관객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서편제’를 할 무렵에 조상현씨의 춘향전을 듣게 됐어요. 조상현씨의 소리를 짤막짤막하게 들어봤지만 5시간 넘게 이어지는 완창을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누가 완창을 들어보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해서 조상현씨의 춘향전 완창을 들어보고 그 소리가 주는 감동에 매우 놀랐습니다. 춘향전 줄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뻔한 내용을 판소리로 하면서 사람을 엄청난 감동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서편제’를 하면서 언젠가 내가 소리에 좀더 빠지면 소리와 영상이 만나는 영화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와 영상의 조화로운 만남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춘향뎐’에서 방자가 춘향이 부르러 뛰어가는 장면을 봄 여름 초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찍었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서편제’를 찍으면서 판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춘향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귀가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판소리는 내부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동이에요.”

    ―‘서편제’와 ‘춘향뎐’은 지금 국립극장장하는 김명곤씨가 각본을 썼죠.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하려고 준비하는데 문화부에서 아직 이념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작사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도리 없었지요. 1년 후면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씨와 김대중씨 중에서 누구든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리되면 형편이 풀릴 것으로 판단하고 한 1년 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서편제’ 생각이 난 거예요.

    1970년대에는 연기자 중에 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소리꾼들이 없었어요. 동학교주 최시형 선생을 그린 ‘개벽’이라는 영화에서 김명곤씨가 전봉준 장군 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판소리를 너무 잘해 연기자 중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알고 지냈습니다.

    김명곤씨는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의 기자로 있을 때 판소리꾼들을 많이 취재하고 이 분야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김명곤씨를 만나 내가 ‘서편제’를 만들고 싶은데 당신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될 수 없는 영화이니 도와달라고 했더니 선뜻 수락했습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으로 전북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선발전 행사를 보는데 카메라가 오정해 얼굴을 탁 잡았습니다. 아마 준결승인가에서 그 아가씨가 그 자리에서 판소리를 하더군요. 이런 연기자들을 입력하고 있다가 ‘서편제’에서 써먹게 됐죠.”

    최근 한국영화는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영화에 종속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는 한동안 방화 육성책으로 방화 4편을 찍으면 외화 1편의 수입쿼터를 줬다.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쿼터를 배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설렁설렁 찍고 정작 돈벌이는 수입 외국영화로 했다. 한국영화에는 저질 싸구려라는 말이 붙어다녀 관객들로부터 점점 외면당했다.

    그러나 작년에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거의 비슷해졌다. 외국영화도 무제한으로 들어오다 보니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과 본전 생각나게 하는 저질도 적지 않다. 영화인들이 사활을 걸고 스크린 쿼터제 폐지를 반대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한국은 수입 장벽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실력으로 할리우드에 뺏긴 시장을 수복했다.



    조폭영화와 대리만족


    ―한국영화의 미래가 안 보이던 시대가 한 때 있었잖아요. 그런데 최근에 한국영화가 국내 시장에서는 할리우드영화를 누르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국영화가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영화판에 양질의 인력이 많이 들어왔어요. 외국 유학 갖다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텔레비전과 함께 성장한 영상문화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만드는 자본도 과거에는 지방 배급업자들에게 의존했지만 지금은 금융회사에서 펀딩을 합니다. 1960년대를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고 했지요. 그 뒤로는 쇠퇴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나는 1960년대에 감독을 해본 사람으로서 지금이 그보다 더 좋은 황금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기계와 기술도 좋아지고 유능한 인력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손님도 늘어나 옛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제작비를 투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하던 영화가 1970년대부터 왜 쇠퇴했다고 봅니까. 텔레비전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요.

    “물론 텔레비전 영향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결정적으로 숨통을 조인 거예요. 영화는 어떤 소재든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 손님이 모입니다. 그런데 안보 환경 등을 이유로 도무지 영화로 만들 소재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제작사들은 국산영화로는 타산을 맞출 수가 없었지만 1년에 4편 만들면 영화수입 쿼터를 주니까 날림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시절에는 1년에 수입되는 외화가 20편 정도에 불과하니까 어지간하면 흥행이 되었습니다. 한국영화가 숨쉴 공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수영화라고 찍어 수입 쿼터만 따먹고 극장에서 개봉도 못해보고 묻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최근에 ‘친구’ ‘조폭 마누라’ ‘신라의 달밤’ 등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 중에는 조폭 시리즈가 많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실망스러운 대목이 있어요. 마피아 영화에도 ‘대부’ ‘언터처블’ ‘애널라이즈 디스’ 등 명화가 많지요. 우리는 이 수준에 현저히 못미치는 것 같아요. 임감독도 ‘장군의 아들’이라는 조폭 영화를 찍어 히트한 바 있지만 조폭영화의 유행이 언제까지 갈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조폭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어지럽다보니까 힘의 논리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관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리만족에서 그쳐야지 동경의 대상이 돼서는 안됩니다. 조폭 영화가 히트하다가 유행처럼 수그러들면 코미디나 멜로 드라마로 바뀌어갈 겁니다. 조폭 시리즈가 언제까지 인기를 누린다고 할 수는 없죠. 대부 같은 좋은 영화가 안나오는 것은 아직 우리 영화계에 숙련된 인적 자원과 첨단 기술 기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에서 살인법을 아주 상세하게 지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허파에 칼을 꽂아서 90도 틀어주라는 식으로. 할리우드의 잘된 마피아 영화를 보면 너무 끔찍한 장면은 생략하거나 암시로 끝내잖아요. ‘친구’를 보면서 과연 저런 살인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장면들이 영화에 그대로 나와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그런 기능을 하고 있잖습니까. 가령 사람을 납치해 신용카드를 사용해 돈을 빼내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오잖아요. 영화뿐만 아니고 텔레비전도 사회에 대해서 밝고 건강한 쪽으로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사건들이 빈발하다 보니 유난히 그런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임감독은 1970년대까지는 흥행사의 요구에 따라서 영화를 마구 찍던 싸구려 저질 감독이었다고 스스로 술회한다. 영화 두 편을 동시에 ‘가케모찌(겹치기)’로 찍었다는 전설도 있다. 1962년 데뷔해 1972년까지 10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었다. 한해에 평균 다섯 편 꼴이다. 지금은 2년에 한 편 만들고 있으니 그때는 엄청나게 찍어댔다고 할 수 있다.

    ―액션 영화감독에서 예술영화 감독으로 전환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영화촬영이 스케줄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고 어떤 연유로 촬영이 늦어져 새 작품과 시기가 겹치면 가케모찌를 했습니다. 완전히 흥행만을 목적으로 찍은 허황한 영화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허구의 쓰레기들이었습니다.

    10여 년 그런 생활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허황한 영화만 찍다보면 내 인생도 허황한 것으로 끝날 게 아니냐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삶 자체의 목적을 영화 만들기에 두고 있는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도 거짓 없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는 현실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이 입도선매식으로 지방 판권을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호남 영남 충청 강원 경기 등의 배급업자들이 자기 지역의 판권료를 미리 내고 사는 거죠.

    3류 감독으로 살던 사람이 진지한 작품을 하고자 해도 누가 믿어주나요. 저질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꼬리표가 붙어있었으니까. 그래서 변신의 몸짓으로 ‘잡초’(1973)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지방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직접 제작했는데 흥행에서 참패했습니다. 그러나 저 친구가 진지한 영화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 성향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동안 저급한 취향이 체질이 돼 있었지요. 이런 독소를 빼내는 작업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1970년대는 한국영화사상 최악의 암흑기였습니다. 유신정권 때는 흥행과는 무관하게 단지 건전한 영화를 찍어 편 수를 채우거나 쿼터가 배정되는 영화제에 출품해 상을 타면 됐습니다. 흥행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한 10년 동안 작품에서 저급한 취향을 빼냈지만 그러다보니까 정말 영화가 재미없어져요. 굵직한 주제는 있으되 영화로서의 흥미는 없는, 뼈만 있고 살은 없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 10여 년간 그런 과정을 거쳐 1980년대 들어와 ‘만다라’(김성동 원작) 같은 영화를 하게 됐습니다.”

    ―영화 ‘태백산맥’은 원작하고 지향성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지요. 소설을 영화화할 때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새롭게 창작한다는 기분으로 임합니까.

    “‘만다라’도 원작이 하고자 했던 테마와는 다른 내 생각을 넣었기 때문에 원작자는 불만이 많았어요. 원작은 주인공이 소승적 수도를 해가다가 대승적 세계로 들어가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소승적이든 대승적이든 관계없이 각(覺)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원작이 해놓은 걸 일부러 비틀 이유는 없지만 테마를 보는 견해가 원작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조금 좌편향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좌와 우의 충돌, 그런 혼란의 시대를 체험한 세대가 직감적으로 갖는 생각이 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회의라고 할까요. 6·25라는 동족끼리의 참담한 전쟁을 일으켜 좌와 우 쪽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국토는 황폐해지고 사람들한테 엄청난 희생만 요구했던 거죠.”

    임감독의 집안은 좌편에 가담하고 있었다. 임감독의 할아버지 3형제 중 큰 할아버지의 둘째아들(당숙)이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물들어 옥고를 치르고 귀국했다. 그의 영향으로 집안의 젊은이가 모두 사회주의 운동에 나섰다. 찬탁 반탁을 두고 시국이 들끓던 시절에 임감독은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서투른 글씨로 ‘신탁통치 지지하자’는 전단을 만들어 경찰 모르게 동네 곳곳에 뿌리고 다녔다.

    빨치산이던 삼촌은 보급투쟁(식량조달)에 나섰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죽고, 아버지도 빨치산에 가담해 산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는 자수했지만 사회와 절연한 생활을 하며 병을 앓다가 1965년에 작고했다. 임감독은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지리산 빨치산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실체를 씁쓸하게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태백산맥’은 군경에 쫓기고 굶주림과 동상에 시달리며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는 좌익 이념의 투사들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목숨을 바쳐 건설하려던 사회주의 조국 북한의 모습을 보면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안은 지주 집안이었습니다. 집안의 근거지가 전남 장성군 남면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나주(지금의 광주시 평동)에도 위토를 갖고 있어 소작료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도 소작인들이 세워놓은 할아버지 송덕비가 남아 있어요. 파묻어 버려야 할 물건이긴 하지만. 당숙이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가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했어요.

    당숙은 일본에서 옥고를 치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들어가 있습니다. 호남지방의 좌익운동은 농민들이나 무산대중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유학 다녀온 지주집안의 자제들이 선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주계급의 사람들이 이상적인 사고에서 평등사회를 부르짖으면서 무산대중의 편에 섰던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분들의 한 많은 삶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망하기 직전의 동구 국가나 소련을 둘러본 소회가 복잡하더라고요. 지리산 일대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이상향이 그런 모습으로 전락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구체적으로 소련의 어떤 모습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습니까.

    “전체주의가 갖는 획일성, 비능률성이라고 할까요. 개인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조직에 눌려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한심했습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발전적으로 실천되지 않고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형편없이 주저앉은 실체를 보고 돌아온 거지요. 지리산 빨치산들이 꿈꾸던 이상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줄 사전에 알았겠어요? 하여튼 소련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세계를 구현하겠다고 개인의 삶은 물론 집안을 풍비박산냈던 사람들이 피땀 흘린 결과가 그런 참담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충격을 넘어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이청준 소설 좋아한다”


    ―이청준씨 소설 중에서 ‘서편제’와 ‘축제’를 영화로 만들었지요.

    “이청준씨는 얄팍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데 눈을 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 소설을 보고 있으면 믿음이 갑니다. 외국 소설은 읽을 틈도 없고 별로 안 읽어요. 영화의 소재를 찾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화제가 되는 것은 봅니다. 최근에 김훈씨가 쓴 ‘칼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많았으면 소설 쪽에 그렇게 기웃거리지 않았을 겁니다. 시나리오 쪽이 워낙 약해서….”

    ―2000년 11월 북한에 들어가 평양에 있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둘러보고 왔지요. 북한의 감독, 배우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셨을 텐데…. 김정일 위원장은 영화광이어서 북한의 영화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지요.

    “북한의 영화인들과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촬영소에서는 우리를 맞을 준비를 꽤 했더군요. 전에 나왔던 영화를 촬영하고 녹음하는 과정을 일일이 재연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물자가 부족해 어려움이 많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영화인들이 영화에 관심이 깊은 지도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지요.”

    ―혹시 기회가 닿으면 북한하고 합작 영화를 찍어볼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가능하다면 북한의 인력이나 자연을 활용해 영화를 찍어보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례인 줄은 알지만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요. 이번 ‘취화선’에서는 감독료로 얼마나 받았습니까.

    “한 1억원.”

    한 1억원과 정확히 1억원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얼마만한 금액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에서 손 꼽는 명감독치고는 수입이 높은 편이 아니다. 1년에 한편 또는 2년에 한편을 찍으니 연봉으로 치면 5000만∼1억원 정도다.

    ―생각보다 적게 버네요.

    “그렇죠. 감독 생활하려면 쓰임새도 많아요. 이것 저것 자료 수집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어가요. 흥행이 잘되면 보너스를 타는데 근자에 통 안돼서…(웃음)”

    ―서편제 때는 보너스를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약간 받았어요.”

    부인에게 숨겼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작년 1월에 받은 제6회 일민 예술상 상금 5000만원은 신문에 기사가 나는 바람에 부인이 통째로 압류해갔다.

    부인 채혜숙씨는 MBC 탤런트 3기 공채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임감독의 영화 두 편에 출연했다. 방년 20세에 임감독의 ‘요검’(1971)에 출연하면서 은막에 데뷔했다. 채령이라는 예명을 임감독이 직접 지어주었다. 8년 뒤인 1979년 결혼할 때까지 결혼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임감독이 44세 때 비로소 가정을 꾸렸다. 신부와의 나이 차이는 15년.

    “무명감독 시절이라 가정을 꾸려나갈 만한 자신도 없었고, 아내가 예쁘다보니 사치에 빠져들면 뒷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누가 먼저 좋아한 게 아니고 서로 같이 좋아했죠. 워낙 나이 차이가 많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는 무명감독에다가 모아놓은 재산이 없으니 주저하게 됐지요. 시간을 오래 끌다보니 아내 쪽에서 더 적극성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요.”

    ―대한민국에서 한다 하는 여배우를 주연으로 등장시켜 영화를 찍다보면 혹시 부인한테 숨기는 로맨스 같은 것도 있었을 텐데요.

    “영화판에 예쁜 여자들이 많잖습니까. 로맨스가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요. 그러나 없었습니다. 없었던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내가 배우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화에 애착을 갖기 때문이지요. 나도 젊고 예쁜 여자를 보면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내가 배우 출신이어서 집사람 체면도 생각해야 하고…. 집사람 모르게 감쪽같이 하기가 어렵지요.

    가령 내가 어떤 여배우와 좋게 지내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다음에 그 배우를 또 써야 되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내가 하고자 하는 영화보다는 그 여배우에 맞는 역할이 있는 소재를 구하려고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망하게 돼요.”

    그가 순순히 자수할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임감독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가장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그의 아내일 것이다. 한번 더 확인 사살을 시도해봤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영화에 출연시켜 달라고 다리 붙잡고 매달린 영화 지망생이나 신인배우들은 없습니까.

    “젊어서부터 내가 성격적으로 상당히 차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런 부탁이 통하지 않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불리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내가 소시적인 1968년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 공전의 빅 히트를 했다. 서울 인구가 400만명일 때 100만명이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 신영균과 전계현(본처), 문희(애인)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다.

    ―최근 우연히 ‘미워도 다시 한번’을 다시 봤어요. 그런데 눈물 대신에 웃음이 자꾸 나와요. 멜로드라마가 코미디로 바뀐 것이지요. 문화의 코드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지…. 몇십년 사이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세요.

    “어떤 시류나 유행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면 생명이 짧아요. 그러나 시류나 유행과 관계 없는 소재를 찍으면 생명이 깁니다.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준다고 해서 갔을 때 내 회고영화전을 했습니다. 거기서 1986년 작품 ‘씨받이’를 상영하더군요. 15년 동안 어디서 흘러다닌 필름을 구했는지 화면에서 계속 비가 내려 영 민망했습니다. 한달 후에 관객이 뽑은 최고인기상을 받았다는 연락이 오더군요. 샌프란시스코영화제가 경쟁을 시켜 상을 주는 영화제는 아니지만 10년도 훨씬 넘은 필름이 아직도 그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행이나 시류와 관계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지요.”

    ―사적인 친분 관계를 떠나 한국 감독 중에 영화를 잘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감독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있긴 있어요. 그런데 내가 누구를 찍어서 얘기하면 후배 감독들이 싫어할 테니까 말은 못합니다. 좋은 감독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국내 영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히트 영화를 다 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봐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상당히 좋은 영화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본래 소설을 쓰던 사람인데 영화도 잘 찍었어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도 좋고요.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도 인상에 남아요.”

    ―외국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 몇 편을 추천해주시죠.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르네 크레망의 ‘태양은 가득히’,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 찍다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습니까.

    “오손 윌슨 같은 사람은 뛰어난 배우이자 감독입니다. 찰리 채플린도 그렇고….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나를 너무 잘 알거든요. 얼마나 배우의 소질이 없냐 하면 취재온 사진 기자들한테 수없이 사진을 찍혔지만 아직도 수줍음을 탑니다. 이런 마당에 배우는 언감생심이죠.”

    ―100번째 작품으로 어떤 걸 찍고 싶으십니까.

    “나의 경우 100번째 작품이라는 것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1960년대에 말도 안되는 작품을 부지기수로 찍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합해서 100번째 작품이라고 헤아린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편 수가 갖는 의미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임감독은 1960년대에 날림으로 찍은 작품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임감독이 몇년 전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1960년대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영화 같기도 하고 어디서 한번 본 영화 같기도 했다. 중간 쯤에서 보기 시작해 뒤에 자막을 보니까 그가 감독한 작품이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잊어버릴 수 있냐며 주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임감독처럼 부끄러운 일에 대해 망각의 기제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유익하다.

    ―‘취화선’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신 건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이거 끝나고 한번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외국 영화 중에는 공해, 흡연의 폐해, 독재정권하의 민주화 운동 등 정치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작품성이 뛰어나고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가 많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전대통령 시절에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가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소재 선택이 아주 자유로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회 문제를 영화화해서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찍은 박광수 감독은 사회문제를 아주 깊이 파고 듭니다. 우수한 작품들을 만들고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근자에 와서 그런 작품이 눈에 안 띌 만큼 제작 편 수가 줄었다는 거죠. 영화사 쪽이 아닌 독립영화 쪽에서는 지금도 하고 있을 겁니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 자기 소신대로 찍는 거죠.”

    영화를 찍다보면 이익단체들의 예상치 못한 반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임감독은 1983년 태흥영화사 창립작품으로 ‘비구니’를 제작하다가 불교 종단의 반대에 부딪쳐 중도에 포기했다. 이렇게 되면 제작사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는 ‘태백산맥’을 촬영하면서도 우익단체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시달렸다. 태흥영화사를 통해 “빨갱이의 자식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도 되냐”는 압력이 공공연하게 들어왔다.

    “한국은 영화 만들기에 참 힘든 나라예요. 가령 의사를 소재로 다루면 의사협회에서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내용으로 사극을 찍었는데 자기 조상을 부끄럽게 그렸다고 문중이 펄펄 뛰었습니다. 참 영화 해먹기 힘든 나라입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령 ‘투캅스’ 같은 영화는 경찰관의 비리를 거리낌없이 드러냈는데도 큰 문제없이 받아들여졌지요.”

    ―이태원 사장,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을 가리켜 노인 트리오라고 하는데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까. 젊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만드는 팀워크로서는 문제가 없지 않나요. 제작 감독 촬영이 전부 60대인데….

    “우리가 젊은이 취향의 감각적인 영화를 찍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런 감각이나 유행과는 무관한 영화를 찍고자 합니다. 흥행시키기 위해 젊은 감각에 영합해 영화를 찍고 싶지도 않고 그럴 나이도 아니예요.”

    이태원 사장은 ‘취화선’에서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장승업이 기와지붕 용마루에 걸터앉아 올라가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지나가던 선비로 등장해 “여보게 승업이. 기왓장 깨지네. 내려와 이 사람아”라고 한 마디 하고 사라진다. 영화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감독 제작자 등이 잠깐 단역으로 나오는 기법을 카메오라고 한다. 서양의 명화 중에도 화가의 얼굴이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들어가 있는 그림이 있다. 가벼운 재미를 주는 예술 기법이다.

    ‘취화선’ 제작에 투입된 55억원은 시네마서비스가 하나은행 SBS MVP 창투사 등을 끌어들여 투자했다. 이익금을 태흥영화사와 영화 투자회사인 시네마서비스가 4대 6으로 나누어 갖는다. ‘춘향뎐’의 흥행 실패로 어려움을 겪은 태흥영화사로서는 위험부담이 적은 투자 방식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이외에 취미는 뭡니까.

    “취미랄 것이 특별하게 없는데요. 어디가 순대국 잘한다 곰탕 잘한다 그런 데 쫓아다니는 재미 외에는 별로 다른 취미가 없어요.”

    태흥영화사 트리오는 식도락이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인터뷰를 하다보니 점심때가 되었다. 임감독이 점심을 함께하자고 해 따라나섰다. 이태원 사장이 운전하는 차에 정일성 촬영감독 임감독과 함께 탔다. 차에 오르고 나니 강남 예술의전당 근처에 유명한 돈가스 집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돈가스를 먹고 나서 근처 양복점에서 칸영화제에서 입을 턱시도를 맞추러 가는 길이었다.

    칸영화제를 취재하려면 기자들도 턱시도를 입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양복점은 세 사람에게 턱시도를 만들어 공짜로 대여해주고 칸영화제에서 돌아온 뒤에는 돌려받는다. 양복점 진열장에 임감독이 입고 칸영화제에 참석한 턱시도라고 써서 걸어놓을 계획이란다. ‘취화선’이 뜨면 턱시도 양복점 홍보에 도움이 될테니 칸영화제에 실로 여러 업종의 사람들이 목을 매고 있는 셈이다.

    내가 “과거에는 나는 한국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좋다는 평판이 도는 작품은 가끔 본다”고 말하자 이 사장은 “어디서 정보를 얻느냐”고 물었다. 역시 제작자는 관심이 다르다. 내가 역으로 인터뷰를 당하는 처지가 됐다.

    “기초적인 정보는 신문 문화면이나 광고에서 얻지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보고 나온 사람들의 입소문이지요.”

    임감독 세대 중에는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가난의 혼란 속에서 정규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드물다. 이 점에서는 임감독도 마찬가지다. 한 분야를 계속 파고들며 연구하고 실험하며 쌓은 현장 실력은 정규 교육과정의 박사학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종 학력이 중학교 3학년 중퇴입니다. 광주에 있는 숭일중학교. 6·25 이후 좌익 부역자의 가족이 버티고 살아날 길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임감독은 부산 피란 시절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중고 군화를 수리해서 팔아 생계를 이었다. 수복 후 미군 군화 판매상들 중에 영화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들을 고리로 임감독도 영화판에 들어와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잡역부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임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나면 신문에 인터뷰도 많이 하고 영화평에도 오르내립니다. 신문의 영화평이나 영화담당 기자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까.

    “영화담당 기자도 전문인의 안목을 가져야 되는데 회사에서 막 돌리잖아요. 영화를 겨우 알만하면 다른 데로 갑니다. 영화를 바르게 읽어내는 기자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독이 무엇을 했는지,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기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고 전문기자가 필요하다는 거죠. 외국에는 50~60대까지도 영화 한 장르에만 매달리는 기자들이 많잖아요.”



    두 아들 모두 영화 지망생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얼마 전 제대한 장남 동준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2학년에 재학중인데 감독 지망생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고 한다. 둘째 동재는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휴학하고 군복무중이다. 둘째는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 임감독 부부는 자녀들이 힘들고 어려운 영화판으로 들어오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영화라는 유전자가 자녀들 속에도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내가 여기까지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거든요. 애들한테 그런 끈기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원인 제공을 내가 했고 저희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냥 놔두고 있는 거예요.”

    ―신영균씨처럼 배우들 중에는 돈을 번 사람이 있는데 감독은 어떤가요. 감독과 제작을 겸하는 분들도 있던데….

    “감독들 중에 크게 돈을 번 사람도 있어요. 강우석 감독이 ‘투캅스’, 강제규 감독이 ‘쉬리’를 제작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댈 수 없지만 더러는 제작에 손 댔다가 다 털어먹고 주저앉은 감독이 더 많죠.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우리 한국영화에 좋은 영화를 보탰을 사람들인데 그만 주저앉았다는 아쉬움이 남는 감독들이 있어요. 나는 그런 곳에는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관심이 없어요. 큰돈은 못 벌지만 오래도록 밀려나지 않고 감독생활을 하고 있는 이점도 있죠.”

    임감독은 한번 촬영을 마친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 일단 제작을 마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 고통이라고 한다.

    “저런 장면은 그 수준밖에 생각을 못하는가? 더 잘해낼 수 있었던 것을 겨우 그 모양으로 찍었는가? 이런 후회가 밀려오지요. 어떤 데는 대충 넘어가다가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깜빡 실수할 때도 있어요.”

    인터뷰에 앞서 임감독의 말이 짧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보다 질문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 질문의 양이 보통 사람 같으면 대답하는 데 세 시간은 걸릴 거라고 계산했는데 두 시간 만에 바닥났다.

    ―인터뷰가 예상보다 짧아졌습니다. 내가 신동아에서 받는 원고료 수입이 줄어들 것 같아요.

    “더 보탤 게 없으니까요. 제가 지어서 말하질 못해요. 기억나는 것들을 정리해서 재미있게 말씀드려야 되는데 그게 안돼요. 지나간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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