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협상하라, 그리고 성공하라

  • 표정훈 < 출판칼럼니스트 >

    입력2004-09-07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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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고시에이터’란 영화가 있다. 억울하게 살인자로 몰린 대니(새뮤얼 잭슨)가 누명을 벗기 위한 방편으로 인질을 잡자 협상전문가 크리스(케빈 스페이시)가 그와 협상을 벌이며 함께 사건을 해결한다는 줄거리다. 상대방 심리를 정확히 읽어내 적절한 화술과 태도로 협상에 임하는 영화속 대니 같은 협상전문가는 우리에겐 아직 낯선 존재다.

    일본과의 어업 협상, 제일은행·대우자동차·하이닉스 매각 협상,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 협상, 우루과이라운드의 쌀시장 개방 관련 협상, 의약분업 관련 협상…. 우리는 국내 이익집단들간 협상은 물론 외국 정부 및 기업과의 협상에서 속시원한 결과를 이끌어낸 경험이 매우 드물다. 혹 성공한(?) 협상이라고 한다면 정치권에서 종종 볼 수 있던 이른바 ‘밀실야합’ 정도랄까.

    봇물 이루는 ‘협상도서’

    그러나 대내외적 환경은 우리에게 협상의 전문성을 점점 강하게 요구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독자 수요를 예측하는 데 열심인 출판계가 그런 요구의 증대를 그냥 봐넘길 리 없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협상을 주제로 한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책은 ‘한국인은 왜 항상 협상에서 지는가’(굿인포메이션)이다. 게임이론과 정보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김기홍씨는 현재 산업연구원(KIET) 디지털경제실 연구위원으로 활동중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내부협상의 중요성. 1992년 스위스 제네바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본부 앞에서 한국 농민대표들이 삭발시위를 벌였다. 그곳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주요 의제가 쌀시장 개방이었기 때문. 이 시위를 두고 한국정부와 언론은 ‘나라 망신시키는 추태’ 운운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당시 정부와 언론의 그런 시각은 협상의 기초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위는 정부의 협상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적당한 부정적 여론은 오히려 협상 대표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준다. 따라서 대외협상 이전에 내부에서 힘을 모아가는 과정, 즉 내부협상이 무척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국내 이해당사자측에 협상정보를 미리 알려 동의를 구하거나, 협상에 비판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활용하는 일 등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과 협상할 때 자국내 이해당사자인 각계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 조언을 구하고, 그것을 우회적인 압력수단으로 활용하는 미국이 그 좋은 예다.

    협상은 흥정이 아니라 ‘과학’

    기업활동을 사실상 협상의 연속이라고 볼 때,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이 펴낸 책을 번역한 ‘갈등을 창조적으로 푸는 협상의 기술’(21세기북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영학자, 기업인, 회계사, 변호사, 컨설턴트 등 12명이 공동집필한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협상의 체계적 관리를 강조한 데 있다. 협상에 임하는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지 않고 협상의 원칙과 과정을 관리해 기업 전체의 협상 역량을 높이는 한편 정기교육을 통해 전문 협상인력을 양성하고, 협상을 할 때마다 택했던 접근방식과 결과, 교훈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이 심각해지면 마지못해 협상에 나서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따가운 일침인 셈이다.

    이쯤에서 그동안 우리에게 성숙한 협상문화가 부재했던 까닭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김기홍씨는 한국이 외교·통상 협상에서 패배하는 요인으로 합리적 협상 과정을 ‘흥정’이라며 터부시하는 한국적 협상문화, 중립적인 제삼자의 부재, 압력단체에 끌려다니는 정부의 협상력 부족, 냄비근성의 여론, 장기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협상가 등을 든다. 상명하복과 책임회피를 유발하는 권위주의, 흑백논리, 조폭식 해결방법, 비합리적 지역주의와 연고주의 등도 협상문화 낙후의 요인으로 꼽는다.

    여기에 중요한 요인을 하나 덧붙이자면, 밀실 뒷거래로 상징되는 투명하지 못한 거래 및 의사결정 관행이 아닐까 한다. 합리적 협상의 자리를 향응과 금품이 대체해온 게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협상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최근의 현실은 비록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차원일지언정 우리 사회의 투명성이 조금은 높아졌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협상에 임할 때 제로섬 게임, 즉 ‘너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란 식의 자세를 보이는 경우가 잦다. 상대방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는 자세로는 협상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이 문제와 관련, 미국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이자 협상가인 론 샤피로의 충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샤피로는 1994년부터 2년간 벌어진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의 역사적 파업사태를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협상 세미나 및 컨설팅을 제공하는 샤피로 협상연구소(Shapiro Negotiat ions Institute)를 이끌고 있는 그가 집필한 책으로 ‘파워 오브 나이스: 협상의 새로운 강자’(미래의 창)가 있다.

    샤피로에 따르면 협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어느 정도까지 상대방이 원하는 걸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때문에 협상을 하면서 가장 주의할 사항은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

    샤피로는 상대를 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앞으로도 계속 거래와 협상을 할 동반자, 나아가 친구로까지 만드는 것이 최고 수준의 협상전략이라고 한다. 이 경우 당장 내가 약간 손해보는 것 같아도 결국은 상대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윈-윈 게임이 될 수 있고, 장기적으론 내가 더 크게 이기는 결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샤피로는 그 실천방법으로 협상 상대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할 것,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데 노력할 것 등을 제시한다. 불굴의 의지마저 느껴질 만큼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며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보다는 부드러운 사람이 협상에 강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협상하지 않는 게 상책일 때도 있다는 주장이다. 협상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협상목적을 잊고 협상가치가 전혀 없는 협상에 스스로 발목이 잡히는 일을 경계하라는 충고다. 결국 문제는 어떤 협상이 가치가 없으며, 또 언제 그만둬야 하는지 잘 판단하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한 샤피로의 충고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당신에게 최저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때, 상대방 제안보다 더 좋은 대안이 있을 때, 상대방이 거래 내용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 때, 그리고 단기수익보다 장기적 문제가 앞설 때 등이다.

    협상은 자신과의 싸움

    앞서 영화 ‘네고시에이터’를 언급한 바 있지만, 카터와 레이건 대통령 시절 대(對) 테러리스트 협상자문을 맡았던 세계적인 프로협상가 허브 코헨이 ‘협상의 법칙’(청년정신)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미국 기업들을 대표해 협상활동을 벌이는 코헨은 이 책에서 풍부한 협상 사례들을 들려준다. 그 가운데 각별한 협상방식이 ‘메뉴제한 방식’인데, 1977년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한 TWA 소속 비행기 납치사건이 좋은 예다. 미국에서 납치된 비행기는 파리 드골공항에 착륙했다. 당시 프랑스경찰은 비행기 바퀴를 쏘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선택범위가 제한된 최후통첩을 보냈다.

    “지금 여기 미국경찰이 도착해 있다. 만일 투항해 미국경찰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길어야 2년 정도 복역할 것이다.” 납치범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준 프랑스경찰은 다시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체포한다면 너희들은 프랑스 법률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라.” 납치범들은 결국 투항했다.

    구 소련과의 협상에 여러 차례 나섰던 코헨은 이른바 ‘협상에서 제한된 권한이 갖는 의미’를 실감나게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조직간 협상에서는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거나 협상자에게 전권을 일임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의 우두머리는 최악의 협상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코헨의 지적이다. 뛰어난 능력과 인내심을 갖췄더라도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 협상에서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높다는 것. 코헨의 이런 통찰은 협상이 상대방과의 싸움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싸움임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거론한 책들은 협상의 얄팍한 기법과 술수에 치중한 책들이 아니다. 구체적인 협상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협상에 임하는 사람이나 조직의 태도, 지켜야 할 원칙 등을 더 강조한다. 협상 전술보다는 전략, 전략보다는 원칙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협상의 예술’로서의 정치

    지방선거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선을 앞둔 올해는 연중 내내 선거의 계절, 정치의 계절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정파나 정치인들간 이합집산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선거의 계절은 곧 협상의 계절이기도 하다. 밀실의 테이블에서 이뤄지는 음습한 정치거래 관행이 여전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 거래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협상관련 도서들이 얼마만큼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어쨌든 비합리적 지역주의와 연고주의에 바탕한 거래는 진정한 의미의 협상이 아니다.

    최고 수준의 정치는 곧잘 예술에 비견된다. ‘협상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보게 될 날, 정치인들의 공허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생(相生)의 정치를 볼 수 있을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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