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민간 교류에 NLL은 없었다

한국이웃사랑회 방북단 동행 취재기

  • 신석호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 kyle@donga.com

    입력2004-09-01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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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일 화요일 오전 11시 반 천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한측 백두산 장군봉 정상. 1950년 고향인 함흥을 떠나 남하한 뒤 북녘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김설봉옹의 넋을 달래기 위해 작은 기도회가 열렸다.

    열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아들 남국(64·범아보험대행 이사)씨가 아버지의 영정을 꺼내들었다. 그 옆에 남국씨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최기서(63·전 한보주택 사장)씨가 섰다. 최재화(51·성남제일교회)목사의 기도가 시작됐다.

    “지난해 당신의 품에 안긴 어린 양이 이제 아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살아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이들과 같은 안타까운 이산의 한이 없도록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내려주시옵소서….”

    남국씨는 눈을 감고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기도가 끝나자 기서씨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는 “내 친구는 효잡니다. 저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라며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아버지도 북녘 땅을 그리다 세상을 버렸다.

    김남국씨와 최기서씨는 각기 아버지가 생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정부에 낸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번번이 기각됐다.



    두 아버지가 떠난 뒤 두 아들이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북한측 민족화해협의회가 한국이웃사랑회의 대규모 방북단 입국을 허용한 것. 방북 목적은 1997년부터 이웃사랑회가 지원하고 있는 목장 5곳, 육아원 14곳, 병원 한 곳 가운데 목장과 병원을 방문해 지원한 물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두 친구는 이웃사랑회와 함께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원 자격으로 이웃사랑회와 함께 고향 땅을 밟았다. 기도를 마친 남국씨는 백두산 장군봉 어딘가에 아버지의 유품 하나를 묻었다. 그것을 통해 백두산 천지의 기운을 받아 하늘에서도 늘 건강하시라고.

    하늘에서 본 고향땅

    북한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대표단은 북한에 입국하기 전부터 몹시 흥분했다. 남국씨와 기서씨와 같은 실향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남국씨는 6월28일 인천국제공항에서부터 “이웃사랑회 같은 민간단체도 실향민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안북도 철산이 고향인 김용상(62) 원주제일교회 목사도 “그저 실향민들에게 고향에 다녀오시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물론 이산가족 상봉은 현재로서는 민간단체들이 할 수 없는 일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에 들어가기 전 실향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우세근(48) 의정부신촌교회 목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을 기억한다.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인 자신을 불러 두 시간 동안이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향 마을 어귀에는 밤나무가 있고 우리 집 옆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었단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장손의 기억에 고향을 심어준 할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29일 대표단이 북한에 들어간 뒤 실향민들의 기억은 더욱 생생해졌다. 평양시 사동이 고향인 유상국(75) 안산광림교회 원로목사는 평양시가 한눈에 보이는 만수대 동산에 올라 고향 마을을 가리키며 “지금은 길이 많이 났지만 옛모습이 기억난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두 친구는 다행히도 하늘에서 고향인 함흥 땅을 보았다. 남국씨는 7월2일 대표단이 평양에서 백두산까지 비행기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행기가 함흥 상공으로 선회해서 가면 좋으련만…” 하고 기도했다.

    꿈은 이루어졌다. 이날 오전 8시17분 대표단을 태운 고려항공 ‘뚜벡33’기가 이륙하자 북한의 산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후 잠시 운해(雲海) 위를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남국씨의 외침이 들려왔다.

    “함흥이다, 기서야 함흥이다.”

    대표단 일행은 복도쪽 자리에 앉아 있던 기서씨에게 남국씨 뒤의 창가 자리를 양보했다. 축구공만한 창문에 얼굴을 맞댄 두 친구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야, 저건 청천강이구나. 저건 신포비행장이고.”

    “그래 근데 물이 많이 말랐네….”

    두 친구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고향집을 찾을 수 없었다. 10여 분 뒤 비행기는 벌써 흥남 상공을 날고 있었다. 기서씨는 “고향 땅 위를 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록 고향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대표단은 북측 초청자인 민족화해협의회의 배려로 통상 북한방문단이 볼 수 없는 북한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6월30일 점심식사 시간에 평양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은 대표단 가운데 절반은 소형 승합차에 올라타고 평양시내를 출발해 비포장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려 강동군 구빈리의 협동농장을 방문했다.

    험한 길을 오랫동안 달려야 하기 때문에 대표단에서 나이가 어린 절반은 ‘농장팀’으로, 나이가 많은 절반은 ‘병원팀’으로 나누어졌다. 실향민인 원로 목사 2명은 “시골 모습을 보고 싶다”고 목장행을 요구해 2명의 청장년층이 자리를 양보했다.

    구빈리의 협동농장은 1999년 이웃사랑회가 지원한 우유멸균기, 치즈제조기, 우유포장설비, 우유운반 냉장차량 등으로 염소젖을 가공해 산유(요구르트)와 치즈를 각각 하루 2t, 800kg씩 생산해 인근 육아원 탁아소 인민학교 등에 공급하고 있었다. 지난해 총생산량은 310t이며 올 생산목표는 400t. 우유 가공공장 뒷산에는 ‘풀로 고기를 만들자’는 구호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우유 가공공장에서 생산된 요구르트와 치즈는 바로 옆 천연동굴에 하루 동안 보관했다가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전기와 냉장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장을 이 동굴 옆에 세운 것. 이 동굴은 사계절 한결같이 실내온도 15℃를 유지한다.

    구빈리 주민 2700명 가운데 1200명이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중 젖 가공 공장에서는 10명이 하루 2교대로 일한다. 이곳에서 4년 동안 일한 김종실(43)씨는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산유의 질이 좋다고 평양시내에 소문이 나 6월19일에는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도 이곳을 방문해 격려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이웃사랑회는 올 가을에는 젖소 10마리를 특별히 지원할 계획이다. 림기남(44) 지배인은 “이웃사랑회가 지원한 물품을 요긴하게 쓰고 있다”며 “인민들의 건강을 위해 내년 총 생산량을 1000t으로 늘릴 욕심이며 이를 위해 이웃사랑회의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북한 낙농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말을 좀더 자세히 들어보았다. 림지배인은 “젖소도 젖소지만 사료를 만드는 분쇄기와 전동기 및 사료 가공기술과 사료에 들어가는 첨가제를 배합하는 기술 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첨가제를 만드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겠습니다. 강냉이와 풀 콩기름 등 사료를 만들 원료는 있는데 비타민과 영양제 등 첨가제가 문제입니다. 또 배합하는 기술도 중요합니다.”

    이웃사랑회는 이 마을에 낙농기계와 기술말고도 현대자동차가 만든 스타렉스 자동차와 경운기 10대도 지원했다.

    이웃사랑회는 1998년부터 북한 내 다른 4개 목장에 300마리의 소를 지원했다. 1998년 9월 1차분 104마리가 인천항을 출발해 남포시 대안구역 대안젖소목장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해 11월에도 96마리가 남포시 용강군 용강젖소목장과 중화군 교잡소목장으로 보내졌고, 올 4월에도 100마리가 추가로 지원됐다.

    7월 현재 지원된 젖소가 낳은 새끼를 포함해 남한에 호적을 둔 소 480마리가 연간 3만명의 북한 어린이들에게 매일 200ml의 우유를 제공하고 있다. 이웃사랑회는 구빈리에 갈 젖소를 포함해 올해 안에 100마리의 젖소를 더 지원할 예정이다.

    이렇게 북한의 낙농업이 활성화되면 토지를 알칼리성으로 변화시켜 농업 생산량 증가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 농장은 인민들에게 일거리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낙농 지원사업은 젖소를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해야 옳다. 림지배인의 고민처럼 우선 젖소가 먹을 사료가 필요하다. 또 젖소가 아프면 치료할 수의학 기술과 의약품이 있어야 한다. 우유와 산유 치즈를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다.

    이 모든 점에서 북한은 초보 단계다. 이 때문에 지난 4월 말에는 서울우유 지도소장과 수의병원장, 사료회사 사장 등 남측 낙농관계자들이 이웃사랑회 집행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소들이 남북 낙농인 교류의 폭을 점점 더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낙농 지원사업은 1995년부터 인도적 지원사업을 시작한 이웃사랑회가 옥수수와 빵 등 ‘당장 먹을 것’보다는 ‘먹을 것을 만드는 방법’을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1998년 시작한 첫 사업. 당시만해도 낙농업이 낙후돼 있어 투자효과가 가장 높았고 또 생산된 우유로 어린이들의 식량과 영양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이웃사랑회의 낙농 지원 활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1998년에 보낸 소 200마리 가운데 70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중 80%는 남한에서 브루셀라병 예방접종을 잘못 맞았다고 이일하 회장은 전했다. 박성락(27) 간사는 “최근에는 남측에 구제역이 발생해 젖소는 물론 북측의 소들에게 먹일 사료 등을 일절 지원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잘 도와달라”

    ‘농장팀’이 구빈리를 다녀오는 동안 ‘병원팀’은 평양시내에 있는 평양시 제2인민병원을 방문했다. 기자는 농장팀이었기 때문에 이날 오후 병원에 다녀온 일행에게 귀동냥을 했다.

    이 병원은 평양시내 대성구역에 있으며 4층짜리건물 6개 병동에 병상이 700개의 종합병원이다. 이웃사랑회는 2001년 3월부터 이곳에 앰뷸런스 2대와 초음파기, 내시경, 심전도기, 가습기 등 의료기구와 다량의 의약품을 지원했다. 지붕도 고치고 창문에 알루미늄 창틀도 달았다. 최근에는 주방설비 일체를 지원했다.

    일요일 오후인데도 박기석 원장과 여의사 등 의료진과 소아과 병동과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중인 환자 7, 8명이 일행을 맞았다. 박원장은 이웃사랑회가 지원한 물품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건물과 기계가 낡아 어려움이 많았는데 남측의 지원으로 진료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며 “앞으로도 잘 도와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병원팀이 경험한 객관적인 사실. 하지만 현장을 본 일행의 평가는 개개인마다 조금 달랐다. 이장우(46) 이메이션코리아 사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병원이 깨끗하고 시설도 잘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대표단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북한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라고 하는 곳이 한국의 보통 병원과 비교하더라도 설비가 많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영옥(52) 영생감리교회 전도사는 “병원에 소모품이 많이 부족하고 건물 자체가 너무 낡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통 심전도기를 쓰면 기록기가 결과를 기록하는데 이곳에는 기록기가 없었어요. 의사에게 물어보니까 ‘우리는 보기만 하고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또 측정기를 몸에 붙이는 전극풀이 다 떨어졌다며 지원을 부탁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실제로 의료기구마다 다양한 소모품이 필요하므로 때맞춰 이 소모품을 지원하는 것이 이웃사랑회의 중요한 일이다. 양소영(29·여) 간사는 이날도 내시경 램프를 네모난 종이상자에 넣어 전달했다. 내시경 램프는 보통 200시간 쓰면 수명이 다한다. 교체가 늦어지면 내시경 자체를 쓰지 못하게 된다.

    이웃사랑회는 한국복지재단, 동방사회복지회 등과 함께 남포 해주 사리원 원산 해산 등 북한 전역에 있는 육아원 14곳을 지원하고 있다. 지원의 혜택을 보는 어린이는 모두 4700명. 지원하는 물품은 분유와 밀가루 등 영양식과 아동의류 등 육아용품이다. 평양시내 평양육아원도 지원하고 있지만 이번 방문 일정에서는 제외됐다.

    구빈리농장을 오가는 길 주변은 한국의 1960~70년대 시골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구빈리는 행정구역상 평양시 동북부인 강동군 소속이다. 그러나 북측안내원은 “산세가 험해 개발이 제대로 안된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웃사랑회가 농장을 지원하게 된 것도 낙후된 이 지역을 개발해달라는 북측의 요청 때문이라는 것.

    평양 시가지를 벗어나자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3, 4층짜리 집단가옥들이 길옆에 늘어서 있었다. 페인트가 부족한 탓인지 외벽은 시멘트색 그대로다. 가끔씩 나타나는 터널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마치 기차 터널 같았다.

    도심에서 조금 더 벗어나자 넓적한 돌을 얹은 기와집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주변 밭에서는 옥수수와 담배 벼 등이 자라고 있었다. 어떤 밭 한가운데는 무덤과 비석이 서있었다.

    길을 따라 흐르는 맑은 개천에는 어린이들이 십여 명씩 모여 멱을 감다가 일행이 탄 차를 바라보며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답례도 어린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보니 머지않은 곳에 오리와 소 돼지 등이 개천 주변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은 길을 지나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차려입은 옷가지는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손을 흔드는 그들의 순박한 얼굴엔 외지인에 대한 호기심과 반가움, 해맑은 웃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평양 시내 보통강과 대동강 유역에는 일요일을 맞아 물고기를 낚으러 온 강태공들이 즐비했다. 시가지는 잘 알려진 대로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게 계획됐고, 도로의 넓이에 비해 자동차와 행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자는 건축물과 탑 등에 쓰여진 구호에 주목했다. 4박5일 동안 관찰한 결론은 ‘쳐부수자’ ‘박살내자’ 식의 네거티브(negative)성 구호는 거의 없고 ‘뭉치자’ ‘한다’ 식의 포지티브(positive)성 구호가 많아졌다는 것. 다음은 기자가 메모한 구호들.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선군(先軍)정치의 위대한 활력을 발휘하자’ ‘위대한 장군님을 혁명적 신념과 사랑으로 받들자’ 등등.

    이번 북한행으로 17번째 방북한 이일하(55) 회장은 “1997년 처음 방북했을 때는 보기에도 섬뜩한 구호가 많았지만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한국을 비방하는 내용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북한측 이에 대해 한 안내원은 “공동선언은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며 “새로운 시대에는 사고방식도 새롭게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표단은 월요일인 7월1일,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아리랑축전을 관람했다. 당초 6월29일 열리는 폐막식을 보기로 돼 있었지만 공연이 7월15일까지 연장되면서 일정이 바뀐 것.

    아리랑축전의 형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경기장 반쪽 스탠드에는 관객이 앉고 맞은편 반쪽에는 북한의 학생들이 앉아 카드섹션을 벌인다. 또 운동장에는 한번에 수백명씩 학생들이 나왔다 사라지며 다양한 집단 안무와 묘기를 펼친다.

    총 10만명에 이르는, 스탠드와 운동장의 학생들은 서장을 포함해 6장11경(장을 이루는 하부 단위)으로 구성된 거대한 악극을 연출한다. 1장의 제목은 아리랑민족, 2장은 선군아리랑, 3장은 아리랑무지개, 4장은 통일아리랑 그리고 종장은 강성부흥아리랑이다.

    아리랑이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이유는 2장4경 인민의 군대에 잠깐 나오는 인민군의 총검술 시범 때문. 대표단 가운데서도 “섬뜩했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대체로 “전체 구성이 너무나 예술적이어서 일부만 따로 떼어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다음은 당시 기자가 스탠드에 앉아 관람하면서 1시간 반 동안 취재수첩에 기록한 내용이다.

    ‘능라도 5월1일경기장 파란 잔디 위와 거대한 스탠드에서 북한의 젊은 남녀 10만명이 춤과 카드섹션으로 1시간20분 동안 펼치는 거대한 악극. 한민족의 시작에서 북한의 정권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 등 북한의 현대사를 그린 듯.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을 표현.

    색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춤을 추는 북한의 젊은이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음. 앗, 앙증맞은 어린 아이도 나오네. 그런데 덤블링과 줄넘기가 거의 프로 수준. 비록 멀리 관중석에 앉아서나마 북한 젊은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북한의 미래는 저들의 것이 아닌가.

    봉체조, 훌라후프, 덤블링, 안마, 평행봉, 부채와 장고춤, 고공 공중곡예, 군인은 단 한번, 잘 사는 미래, 건강한 미래의 청사진과 다짐의 한마당.

    4장 통일아리랑은 6·15 공동선언으로 막을 내린다. 한민족기에 나오는 한반도의 형상. 제주도 울릉도 독도까지. 하늘색과 백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춤춘다.

    종장인 5장 강성부흥아리랑은 ‘반갑습니다’ 노래가 울려퍼지며 참여한 10만 젊은이가 다함께 작별의 인사를 하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저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내 그들의 속에 들어가 그들의 삶과 생각을 듣고 싶었다.’

    기자가 감상기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사이 북한 땅 이곳저곳을 틈만 나면 화폭에 스케치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병주(77) 홍익대 도시계획학과 명예교수. 박교수는 어릴 적 평양의 을밀대와 모란봉을 봤던 기억이 있지만 실향민은 아니다.

    “도시계획학자로서 북한의 도시를 보고 싶었습니다. 또 오래 전부터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아왔는데 북녘의 산하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일행에서 다소 떨어져서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도 부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박교수, 6월29일 평양행 고려항공을 타러 가는 베이징 관광버스 안에서)

    이후 박교수는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가 무리에서 이탈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일행이 차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스케치를 하다가 일행이 떠날 때가 되면 가장 늦게 차에 올랐다. 박교수는 7월2일 백두산 방문을 위해 순안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평양시에 대한 구두 성적표를 발표했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 그리고 그 사이의 모란봉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여기에 국가가 주도적으로 적절한 시간에 도시계획을 했습니다.”

    그는 도로 옆 좁은 인도 지역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모든 것이 사람 중심이어서 인도를 넓히는 추세”라고 안내원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대표단은 울산감리교회 익산영생감리교회 안산감리교회 등 이웃사랑회에 많은 후원금을 내는 교회의 목사와 신도, 그리고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원 등으로 구성됐다. 그 어느 누구도 이번 방북과 관련해 사연이 없는 이가 없다.

    서기석(60) 영실애육원장은 당뇨병성 신부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표단에 합류했다. 고집을 꺾지 못한 의사는 “약을 꼭 챙겨 먹을 것과 다녀오면 바로 다시 입원할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대표단 최연소자인 최진우(21)씨는 한양대학교 재학생. 그는 안산광림교회 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방북 길에 올랐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북한에 대해 궁금해할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알리겠다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표단 방북 일정의 절정은 7월2일 백두산 등정. 북한에서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다. 오전 8시50분경 비행기가 삼지연공항을 향해 고도를 낮추자 운해를 뚫고 장백의 거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행은 원시림이 빼곡히 들어찬 백두고원의 웅장함에 매료됐다.

    9시 정각. 비행기가 해발 1400m인 삼지연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버스 3대가 일행을 나눠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키가 1m 남짓한 침엽수가 길 양옆에 들어차 마치 끝없는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9시46분. 해설원과 관리인이라며 인민군복 차림을 한 20대 여성과 30대 남성이 선도차에 올랐다. 여성 해설원은 “참 좋은 날씨에 오셨습니다. 아침에는 비가 왔는데”라며 일행을 반겼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설원의 백두산 자랑이 이어졌다.

    “백두산은 정확히 해발 2750m입니다. 북한주민과 해외동포 등을 합해 한해 10만명이 다녀갑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눈 위를 걷다가 신발을 잊어버리면 봄에 신발이 나무 위에 걸려있습니다.”

    10시7분.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 고도인 해발 2000m를 넘으면서 비로봉과 장군봉이 지척에 나타났다. 자동차가 장군봉 바로 아래까지 오를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었다.

    10시35분. 장군봉 바로 아래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의 입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천지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일행은 허겁지겁 짝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10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오더니 천지를 삼켜버렸다.

    막간을 이용한다며 해설원이 백두산과 천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백두산에 화산이 분출한 것은 100만년 전인데 마지막 분출은 1898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116~67년 사이의 분출이 지금의 분화구를 형성했습니다.”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탐사를 왔다가 겁만 먹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1981년 무게가 500kg이나 되는 곰이 내려와 괴물소동이 빚어진 이야기, 1984년에 산천어가 방류돼 살기 시작한 이야기, 하루에 열두 번이나 변해 시집 못간 노처녀에 비유된다는 날씨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11시반이 되도록 해설원의 구성진 백두산 자랑이 이어졌지만 천지를 삼킨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일행은 그래도 즐거운 듯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남국씨의 ‘작은 기도회’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대표단 전체의 기도회가 시작됐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을 기원하는 모두의 마음이 모아졌다. 기도가 끝나자 누가 선창했다고 할 것도 없이 모두의 입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화답해 북한 안내원과 여성 해설원들이 ‘우리는 하나’를 부르면서 일행은 서로 어깨를 결어 하나가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일행은 12시반경 장군봉에서 내려와 백두고원 위에 자리를 폈다. 가까이 백두산 고봉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넓게 펼쳐진 풀밭에 앉아서 먹는 김밥 도시락의 맛은 그 어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을 듯하다.

    기자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이 즐거움이 머지않아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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