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소농사회론 vs 내재적 발전론

조선 후기사회 어떻게 볼 것인가

  • 이영훈 <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shamora@donga.com 최윤오 <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

    입력2004-09-01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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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사, 도덕을 버리고 역사를 보라

    조선후기는 공리적으로 실패한 사회였다. 대신 소농사회는 자본주의 흡수에 유리한 기반을 제공했다.

    한국 역사학의 도덕주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세상의 종말을 믿는다. 그 날에 예수가 강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열린다. 또한 그 날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 선한 사람은 예수와 함께 천년왕국에 머물지만, 악한 사람들은 영겁의 지옥불로 떨어진다. 종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 중세시절에 사람들은 그들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이같은 종교적인 역사관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역사는 천년왕국을 향하는 고난의 여행길이다. 그리고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기리라.



    이같이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인 중세의 역사관은 근대사회가 되어서도 한동안 맥이 끊이지 않았다. 헤겔의 철학과 역사학을 좌파적으로 계승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그 가장 훌륭한 본보기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인간사회는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인간사회의 역사는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제사회를 거쳐 다시 더 높은 차원의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 마르크스 자신은 이같은 이야기를 똑 부러지게 한 적이 없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그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고 단정했다.

    특히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역사학에서 그러한 억측이 심했다. 예컨대 스탈린은 인간사회가 위와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것을 두고 ‘철의 법칙’이라고 했다. 절대로 어긋남이 없는, 세계 도처의 어느 지역과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역사발전의 법칙이란 뜻이다. 마치 신의 섭리와도 같이 절대적으로 진리인 이 법칙을 거역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은 그 자신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숙청해버렸다. 그 자신이 역사의 선을 대변하고 있다는 믿음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이같이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출발했다. 1920∼30년대 일제 식민지기에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근대 역사학이 수입될 때 마르크스주 의역사학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제국주의가 온 지구상의 약소민족을 식민지로 억압하던 그 당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약소민족의 입장에선 해방의 약속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영향력은 압도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가 현저히 쇠퇴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필자까지 포함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펼쳐놓은 구도에서 그의 언어와 논리로 토론하고 논문을 쓰고 있음이 오늘날의 솔직한 실정이다.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도덕주의적 성향도 지금까지 극복되지 않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식민지로의 몰락, 해방과 뒤이은 남북분단의 지난 세기를 실패의 역사로 단정한다. 이 실패의 역사에서 주역을 담당했거나 조연으로 동참한 사람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반면 그에 저항했거나 불참한 사람들은 역사의 선으로 찬양된다. 이름을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단히 유명한 어느 역사학자는 얼마 전에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호언했다. “이선생, 식민지기는 독립운동의 역사요, 다른 것은 역사라고 할 수 없어요.” 이러한 도덕주의적 역사관의 도도한 풍조는 심지어 민족분단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건국까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역사로 치부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연구자까지 공공연히 배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명될 수 없는 ‘역사 발전‘

    이제 그러한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 역사학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도 그러한 비생산적이며 관념적인 역사학이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다소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역사에서 필연은 없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선과 악도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오로지 불확정적이며 확률론적인 선택과정일 뿐이다. 내외의 상황변화에 대응하여 지도자와 지식인이 유익한 선택을 거듭하면 그 국가는 발전하고 인민의 복지도 증대된다. 반면에 지도자와 지식인이 유해한 선택을 거듭하면 그 국가는 패망하고 인민은 침입자의 노예가 된다. 한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유능한 지도자가 나오면 그 사회는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 거꾸로 대중의 지적 수준이 높더라도 지도자가 무능하면 마치 흑자도산의 기업처럼 그 사회는 실패할 수도 있다.

    한 사회가 그러한 공리주의적 선택에서 실패한 역사를 필자는 19세기 조선왕조에서 발견한다. 당시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열국이 대치하는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중국에 의존함으로써 국체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반면에 세차게 중국에 도전하고 있던 일본의 국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당시 재정규모나 통화량 등의 경제지표에서 일본은 조선보다 무려 20배 규모의 대국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위정자나 일반 지식인들은 일본을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야만국으로 간주했다.

    사상의 자유가 없었던 것도 조선왕조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18세기초 노론의 장기집권이 성립한 이래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이나 사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성리학자 상호간의 활발한 논쟁도 19세기가 되면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권과 직접적으로 결탁되어 있는 서울의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퇴계의 사상이 절대적이었던 영남의 경우 19세기말까지 그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약간의 윤색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회가 사상적으로 동맥경화증에 걸리게 되면 그 사회는 조만간 패망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식민지로서 20세기 전반에 우리 민족이 겪은 치욕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이 공리주의적 선택에서 실패한 결과이지, 일본이 역사에서 강포한 악의 세력이기 때문은 아니다. 필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후세에 전할 역사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제가 이 땅에서 펼친 식민지 지배정책을 두고서도 그 때문에 우리의 정상적인 역사 발전이 왜곡되었다든가, 오늘날의 남북분단을 포함한 온갖 역사적 모순이 발생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역사 발전이란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명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앞서 비판한 도덕주의적 역사관이 작용하고 있다. 지금 필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최윤오 교수와 필자 사이에는 바로 그 점에서 기본 입장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1960년대 이래 역사학계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란 학설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18∼19세기 조선사회에서도 그냥 두었으면 언젠가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될 여러가지 싹들이 농업, 공업, 상업에서 발생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농업에서 발생한 싹에 대해 좀더 부연하면 농민들이 자본가적 부농과 노동자적 빈농으로 분해되고 있었음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싹들은 19세기에 들어서 사회·정치의 구조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는 힘으로까지 성장했다.

    민란과 동학농민혁명이 밑으로부터 제기된 근대적 개혁의 요구라면, 그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이 부세賦稅수취제도와 관련하여 취한 개량주의적 정책은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위아래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은 일제의 침략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에 의해 비정상적인 형태로 왜곡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른바 맹아론의 주요 내용인데, 지금 필자와 논쟁하고 있는 최윤오 교수의 입장도 ‘대체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간 필자는 이러한 맹아론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가장 중요한 실증적 논거는 자본주의적 공업의 초기형태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형태라 함은 상인들이 농민들의 가내공업을 대상으로 도구와 원료를 임대하고 공산품을 제작하게 한 다음, 일정한 가공임료를 지불하고서 제품을 회수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를 보통 선대(先貸)제라고 하는데, 서유럽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선대제 형태를 한참 경과하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형태로서 공장제 생산이 성립했다. 그런데 18∼19세기 조선 농촌사회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선대제나 그와 유사한 공업형태가 상인들에 의해 조직된 적이 없었다. 이처럼 맹아론은 가장 중요한 핵이 실증되지도 않은 채 널리 주장되었던 셈이다.

    농촌사회가 자본가적 부농과 노동자적 빈농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주장도 실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를 보통 양극분해설이라고 하는데, 최초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성립시킨 영국의 농업에서 그러한 양극분해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양극분해가 증명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위의 경지에서 적어도 2∼3세대의 장기간에 걸쳐 농민들의 경작규모의 차이가 위아래로 확대되고 있음이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당초 양극분해설을 주장한 연구자가 제시한 증거를 보면, 어느 특정 연도에 한하는 정태적인 자료 뿐이다. 원래 그러한 자료에서 동태적인 양극분해설은 주장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필자는 동태적인 시계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말까지의 것으로서 대략 30여 사례를 모을 수 있었다. 분석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농민들의 경작규모가 양극으로 분해되기는커녕, 위아래가 수렴하는 평균화 경향에 있었다. 이어 20세기전반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를 보니 역시 그러하였고, 나아가서는 1950년대까지도 그러했다.

    돌이켜보면, 맹아론은 농업의 발전방향을 규정한 생태적 조건의 차이를 무시하고 서유럽의 한전농업과 아시아의 수전농업이 동일한 방향과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단순한 전제에 입각하였다. 그렇지만 거기서는 경지면적을 확대하는 것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이지만, 여기서는 더 작은 경지면적에 면밀하고 반복적인 제초노동을 행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첩경이었다. 명청시대의 중국이나 근세 일본의 농업 발전을 보아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와 같이 농민들의 경작규모가 하향 평준화했던 것이다. 소농계층은 해체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고 있었다. 한국의 농업에서 서유럽처럼 경지면적의 확대가 생산성의 상승을 동반하기 시작하는 것은 제초제가 보급되어 고된 김매기 노동으로부터 농민들이 해방되기 시작한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같은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필자만이 한 게 아니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들이 맹아론의 실증적 근거에 회의를 표명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에커트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부질없이 오렌지밭에서 사과를 찾고 있다고까지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들 비판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초 제기된 맹아론 그대로는 더 이상 곤란함이 어느 정도 명확해진 것만은 사실이며, 그에 관한 학계 일반의 공감도 어느 정도 성립해 있다고 봄이 필자의 관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교수가 당초 제기한 그대로의 맹아론이 완고하게 계승되고 있음은 결국 최교수와 필자의 입장 차이가 역사적 사실인식의 수준을 넘어 전술한 바와 같은 역사관의 근본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에 적이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벗어나야할 ‘민족주의‘ 굴레

    맹아론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역사상을 건설적으로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 포도주는 새 포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사고틀로서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 몇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 가운데 첫째는, 역사는 반드시 일국사적으로만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일국사적인 폐쇄된 공간에서는 역사가 정체하기 쉽고 나아가 실패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북한이 더 없이 좋은 실례가 아닌가. 역사는 개방적인 국제환경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의 조류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운데, 외래 문물과 전통의 접합으로서 발전할 뿐이다. 그런 취지로 필자는 역사의 발전이란 생물학적으로 이종교배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한국사도 크게 보면 몇 차례 국제환경이 개방적이거나 외부로부터 강한 충격이 가해진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지난 20세기 전반 일제와 미군정의 지배에 있었던 시기도 그러한 관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역사는 성공과 실패가 되풀이되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실패의 쓰라린 고통은 성공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선물하며, 성공의 달콤함은 인간들을 교만하게 만들어 실패로 이어지는 선택을 유도한다. 필자가 보기에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의 조선왕조는 번영과 성공의 역사였다. 그렇지만 19세기의 조선왕조는 너무 관념적이고 폐쇄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의 역사를 일본인들이 지적했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강변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긴 역사에서 35년에 불과한 짧디짧은 기간의 식민지 경험에 너무 강박되어 역사가의 자유로운 의식과 사고가 제약당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한국자본주의의 번영과 민주주의의 성숙을 두고 세상의 어느 역사학자가 이 민족이 천성적으로 열등한 민족이라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셋째, 앞서 한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목적론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역사의 발전은 한 가지 근본 요인에 의한다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과는 보통 밀접한 연관성을 보인다. 역사의 발전 동력은 흔히 생각하듯이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치도,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무엇보다 전술한 대로 개방적인 국제환경이 중요하며, 그와 관련해서 그것을 선택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렇게 역사는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한다. 요컨대 근본주의 대신에 다원주의를, 도덕주의 대신에 기능주의를 새로운 역사관의 틀로 권장하고 싶다. 필자가 보기에 최교수는 너무 근본주의적이다. 예컨대 최교수는 해방후 남북분단의 비극까지도 맹아론이란 틀의 사정권에 넣어 설명코자 한다. 그렇지만 역사학에서 그러한 만능이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넷째, 한국만큼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나라를 찾기 힘들다. 참으로 넘기 힘든 장벽이겠지만 민족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역사 발전에 필수적인 개방적 국제환경과 다원적이며 기능주의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역사의 혜택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골품 신분제가 싫어 당나라로 건너간 사람이 있다. 오늘날도 대한민국이 싫으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갈 수 있는 법이며, 그런 사람을 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민족이란 것 자체는 근대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기획한 정치적 상징일 뿐이다. 15∼19세기 조선왕조의 온 백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생각만큼 비역사적인 유치한 발상도 없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이 추구해야 할 기본과제는 이 땅에 사는 주민들 상호간에 자유롭고 공정한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민족통일을 현대 역사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민족통일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의 마성적인 수령체제가 해체된 다음, 이 땅의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여러 선택의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통일에 요구되는 이러한 선후관계에 혼란이 발생한다면, 그로 인한 역사의 실패와 희생은 이루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맹아론의 대안으로서 18세기부터 1950년대까지의 근세 한국을 소농사회라는 새로운 역사상으로 바라보자는 필자의 제안은 이상과 같은 새로운 틀에 입각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 인구의 대다수는 자급자족경제가 우세한 농촌에서 소규모 가족단위의 농업체인 소농으로 존재했다. 소농이 구성원의 다수를 이루는 사회를 소농사회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농민들의 가족은 부모와 큰아들 부부가 동거하는 직계가족이 표준적인 형태를 이루었다. 조금 전에 필자는 역사란 외래 문물과 전통의 접합으로 발전한다고 말하였는데, 바로 그 전통의 핵심적 내용을 소농사회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토착 전래의 소농사회와 20세기에 바깥 세상에서 들어온 자본주의가 결혼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자본주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첫째, 오늘날 지구상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영위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는 그들 고유의 전통과 세계자본주의가 접합함으로써 성립했다. 그렇게 접합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최초로 자생적으로 성립시킨 영국이나 그에 해당할까,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접합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는 민족과 지역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적당한 수분, 온도, 자양분이 갖추어진 토양이 아니고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원리다.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불가결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우선 사람들 하나하나가 경제의지, 말하자면 자립과 효율을 추구하는 지적 능력으로 훈련되어 있을 것, 다음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해 있을 것을 들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들을 종합하여 사회적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적 능력을 갖추지 않은 나라에서 자본주의는 성립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18세기 이후 1950년대까지의 한국 전통사회에 그러한 사회적 능력이 풍부히 축적되어 있었기에 오늘날의 번영하는 한국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소농사회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까짓 소농이 무슨 대수냐, 그것은 아득한 옛날 원시공동체가 해체된 뒤로 줄곧 있어온 것이 아니냐, 그리고 무슨 경제의지니 사유재산제도니 하는 것도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늘상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음을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직계가족 형태의 소농이 성립한 지역을 꼽으라면 서유럽에서 남부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정도가 고작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구문명권으로서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은 훨씬 규모가 큰 공동체가족이 지배적 형태였다. 거기서는 개인의 자립도와 경제의지의 수준이 떨어진다. 직계가족의 가장 두드러진 경쟁력은 우수한 상속자를 확보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 자식교육에 대한 맹렬한 수요로 나타남으로써 대중의 지적능력이 세계적 수준에 달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식민지기에 대중교육기관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특히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자각과 함께, 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폭발했다. 남자의 경우 1940년대에 이르면 취학희망률이 70%를 넘어섰으며, 시설이 부족하여 일부 학생은 입학도 못할 지경이었다. 해방 이후 국민의 의식수준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학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 팔고 논 팔아 대학에 다니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다. 1997년 OECD가 발표한 한 통계에 의하면, 교육경력 7∼8년생을 대상으로 한 수학능력시험에서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톱을 차지했다. 비록 범용성의 표준화된 지식이라 경제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그만한 국민적 범위의 지적 능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11위 전후의 교역규모를 갖는 한국경제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힘들었을 터다.

    바로 그러한 경제인류학적 능력을 갖춘 직계가족이 한국사에서 일반적으로 성립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약 1000년 동안의 오랜 기간은 공동체가족이 가족의 기본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이르러 유교적 질서의 국가체제가 성립한 이래, 차츰 가족제와 친족제 수준의 사회조직마저 유교적으로 변형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이 되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부계 종법의 가족과 친족집단이 성립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한국의 직접적인 문명사적 배경은, 흔히 유구한 반만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3∼4세기 정도가 고작인 셈이다. 바로 그 문명사적 전환 가운데서 20세기 후반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문명능력의 소농사회가 무르익었다.

    한 시대를 조망하는 역사상이 한 개인의 힘만으로 구축될 수는 없다. 문제의식에 공감하거나 비판적인 연구자간의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거쳐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과정에서 필자의 문제제기가 산산조각이 나서 무참히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오히려 그렇게라도 될 수 있다면야,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는 보람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리라. 그런 이유로 우선 필자와 토론을 시작한 최윤오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글을 마친다.

    이영훈 <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 왜곡된 한국사 복원은 시대적 사명

    내재적 발전론은 소농사회론이 가지고 있는 외형적 성장론의 위험성을 확인하고 분배중심의 논리를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적 인간형의 재발견

    우리가 지금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한 흥부의 고달픈 농민상이 아니라 부자 흥부의 세상이며 서로를 아끼며 사는 흥부의 모습이다. 봉건사회가 해체되던 조선후기 농민의 두 유형이라 할 수 있는 흥부와 놀부를 통해 근대사회 인간상의 원형을 발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근대자본주의의 원형을 찾는 과정을 통해 21세기 한국 자본주의가 나아갈 길을 조망해볼 수 있겠다. 그것은 흥부라는 인간상을 통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놀부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무한경쟁의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로 집약된다. 20세기 우리가 놀부 같은 인간형을 통해 성장만능을 목표로 설정하였다면, 이제는 흥부를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과 그런 인간형이 필요한 시기다.

    흥부와 놀부의 세계는 각 시기마다 현실 수준에 맞게 검토할 수 있다. 현실을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을 통해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대상과 범위를 확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는 조선후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시기는 한말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에 이르는 격동기의 배경이다. 아쉽게도 일제에 의해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말았기에 그간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변동기의 시대적 과제를 밝혀내는 작업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서구 중심의 논리로 한국사를 이해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 당시 사회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정에서 왜곡된 한국사의 고유한 발전논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의 전개 방향이 갖는 성격을 밝혀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식민사관 극복을 통해 우리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 한편 서구의 발전논리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한국사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국사 발전의 내적 계기를 중시하는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사학계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외적 계기를 중시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발전논리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 성장만이 지상목표로 삼기 때문에 한국 사회 내부의 사회통합 논리도 없고, 민족간의 민족통일 논리도 배격한다.

    조선후기 이래 내재적 발전이란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추출할 수 있는 내적·외적, 아래·위로부터의 계기를 확인해내는 데 있다. 19세기 이후 한국의 발전은 외적 충격에 직면하여 그 맹아를 싹 틔우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왜곡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시대적 과제를 반봉건·반침략 민족국가 건설로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사회를 설명해내는 것이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이다.

    한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경우는 일제하 경제성장을 오늘날 한국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조선후기의 성장발달사를 정리함으로써 조선후기의 정체성과 낙후성을 밝히는 가운데 한국의 발전은 내적인 역량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라는 것을 강조했다.

    내재적 발전론의 경우에는 분단한국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는 것임에 비해, 근대화론자들의 경우는 일제 시대를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처럼 세계자본주의 입장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취한다. 따라서 그러한 논리는 친일파·친미파를 근대사회의 주역으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또한 근대체제로의 이행과 전환의 논리를 모색하는 데 있어 성장위주의 생산중심 논리를 택하는가, 아니면 분배 중심의 체제전환 방식을 구상하는가에 따라 현실인식 태도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소농론자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산성 지상주의로 극단화하기에 이르렀고, 그 배경을 조선후기의 정체성과 일제하 경제성장의 논리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성장과 발전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곧 생산 중심의 역사 발전 논리가 아니라 분배 중심의 역사전개 논리를 확인할 때다.

    조선후기 중세사회 해체기를 거쳐 근대사회로 전환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우선 생산수단이 토지에서 자본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점, 둘째로는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신분에서 계약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토지에서 자본으로의 전환은 곧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근대로의 이행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통하여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유럽자본주의 발전 논리를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토지에서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계량화시켜 적용할 때 생산 중심의 논리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지상목표로 하여 자본을 계량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 발전을 성장 위주의 논리로만 적용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한 논리의 귀결은 성장과 발전에만 주목하며 따라서 친일을 하더라도, 친미를 하더라도 오로지 성장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이다.

    유럽자본주의 발전의 ‘두 가지 길’을 주목한다. 자본주의로의 발전과 전환의 논리를 위해 도식화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인류역사 발전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래로부터의 자본주의화는 주로 신흥 부르주아층의 성립과 이들의 산업자본가로의 발전을 확인하는 방식이고,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는 주로 봉건적 지주층이 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을 보여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두 가지 길이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며 어느 것이 지배적이었는가라는 점에 따라 근대화의 성격이 좌우된다는 점이다. 두 가지 길의 의미는 새로운 생산방식의 등장이며, 주도하는 계층에 따라 이행 경로와 근대화의 내용까지 달라진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 의해 시도된 근대화가 자본 축적의 정도로 환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며 또한 조선후기처럼 그것이 충분히 진행되지 못했기에 환산하기 어렵다면 양적 계량화가 아니라 질적 전환방식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토지에서 자본으로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상업적 농업을 행하던 경영형 부농이 출현한 데 주목하는 것도 경작지 확대를 통해 부를 축적해보려는 계층이 나타났다는 점을 밝히려 한 경우다. 동시에 지주층이 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 양상도 확인되었다.

    자작지 경영을 확대해가던 경영지주층의 경영합리화 방식이라든가, 병작지 집적과 경영확대를 통해 유통경제 발달이라는 상황을 이용한 부재지주층(不在地主層)의 발달이 그것이다. 이들 계층의 등장은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출해 냈다.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유통경제의 발달은 농민층을 양극화시켰으며 농촌사회를 서서히 붕괴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상층부에는 지주·부농층이 확인되며 하층부에는 몰락농이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이행과정에서 어느 계층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는가에 따라 근대화의 정치적 성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이행에서 어느 것이 주요인이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상업이라는 외적 계기를 중시하는 견해와 봉건제의 비효율성을 배경으로 봉건사회 내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란 내적 계기를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내적 계기에 주목하면서 사회변동의 제반 요인 가운데 인구 증가나 가격 변동, 기후 변화 등의 요인에서 기인하는 생산력 감소 등을 중시하는 연구가 출현한 것도 이같은 논쟁의 결과다.

    조선후기의 사회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 내적 계기를 중시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일제하 해방후를 분석하는 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컨대 일제하 식민사관론자들이 한국사회 발전단계를 설명하면서 봉건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봉건사회 결여론’을 통해 일본에 의해 비로소 성장발전의 계기를 맞이했다는 시혜론(施惠論)을 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우 외적 계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 자본주의의 역할을 중시한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대한 연구는 자생적인 내적 계기를 확인하는 작업보다는 외적 계기를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하는 타율적 방법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이건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건 조선후기의 자생적 발전 양상에 대한 내적 계기 확인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논쟁은 결국 생산력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생산관계를 중시하는가의 국면으로 한 단계 상승 발전했다. 전자는 생산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해 생산력적 요소만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소농론자들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이러한 생산력적 측면을 배경으로 확대된 계층간의 갈등과 모순에 주목하는 경우에는 사회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농민간의 계급갈등과 해결 방안을 중시하기에 이르렀다.

    조선후기라는 시점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측면이다. 그것은 곧 자본으로의 전환과정에서 소외되고 매몰되어버린 인간형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놀부식 자본축적 방식을 검토하기 위해 조선후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흥부식 분배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흥부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같은 논의는 근대성 개념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나올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이 대치된 근대는 외형적,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자본축적 방식이 초래한 결과다. 따라서 양적 성장과 발전에 기준을 두고 내적 성장의 계기를 찾는다는 차원에서 중세사회의 해체와 근대로의 이행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구조를 명확히 파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실학자 가운데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73)의 개혁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반계의 개혁론은 토지제도 개혁에 핵심을 두고 있지만, 여기서는 반계가 제시한 새로운 사회상을 눈여겨보자. 반계는 고용법을 통해 인간관계를 신분에서 계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었다.

    반계는 용역법(傭役法)을 통해 신분제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노비제도의 점진적 개혁을 통해 세습제를 없애고 고용노동력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사회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노비가 감소하고 고공제도가 일어난 후에야 노비제도를 혁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급진적인 개혁방법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반계의 개혁론은 고용제도의 점에서 본다면, 당시의 인간관계를 지배예속관계로부터 고용-피고용 관계에 의한 계약관계로 이행시켜야 한다는 논의였다. 반계는 이와 같은 견해를 17세기 이후의 사회경제 발전과 중세사회의 봉건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계약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신분에 관계 없이 누구든 자유롭게 고공이 될 수 있도록 명분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즉 차별로 다스리지 않고 은혜로써 사역한다면 모두 고용노동을 하려고 할 것이며 자연히 고공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반계는 나아가 고용법이 시행되고 노비제도가 혁파되면 고용관계는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고주(雇主·집주인)와 고공(雇工·집주인의 부림을 받던 사람, 머슴)이 신분적 예속관계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인을 택할 수 있게 된다.

    이와같은 고용-피고용 관계를 발전시켜갈 때 대등한 인간관계가 싹틀 수 있고 결국 화고(和雇)라는 쌍방합의에 의한 계약관계로 발전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층민의 저항에 의해 강제적인 예속노동은 점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층이 고용-피고용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의 신분적 예속성을 탈피해가고 있었던 점은 곧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에 성립되는 화고야말로 고주와는 단지 고임을 중심으로 ‘대등한 관계’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의 대등. 평등관계는 봉건적, 인신 예속적 관계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며, 사적 고용관계가 경제적 강제를 매개로 대등한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고용노동의 발전은 농업 외에도 광산업, 수공업과 국가의 각종 부역노동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용노동의 양적, 질적 발전은 이후 근대사 전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갔다.

    조선후기 역사상의 재검토

    한국사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에 대한 이해는 논자마다 다양하다. 그 차이는 맹아(萌芽)를 통해 조선후기를 설명하려는 역사인식 방식의 차이, 또는 도식적인 역사이론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이같은 연구방법론은 한국사의 고유한 내적 발전논리를 통해 그 특질을 확인해내는 데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맹아란 곧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양적, 질적으로 차이는 있을지라도 조선후기 사회변동은 그것을 통해 더욱 확대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논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중 맹아론에 대한 부정을 통해 조선후기의 특질론을 부각시키는 논지가 소농사회론에 편승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편향적인 해석은 조선후기에는 서양에서와 같은 맹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서구 기준의 논리를 통해서 시작된다. 양적인 차원에서 검토하는 경우 농촌공업의 수준 때문에 맹아를 추출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적 차원만에 주목하지 말고 중세 말기 새로운 계약관계의 출현까지를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질적 전환의 양상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질론처럼 아시아적 고유성을 내세우며 서구적 보편논리를 부정하는 이론의 뒤편에는 일본 중심의 아시아관이 도사리고 있다. 즉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논리를 부정하는 논리와 연결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중세국가의 전제성과 나아가 국가의 수탈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사고는 동양적 전제주의 아래에서 지주적·농민적 상품경제에 대한 국가적 상품경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설명하는 방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세 봉건제에 대한 이해도 그러한 기준에서 출발한다. 소농이론의 입장에서 정의한 봉건제의 경우, 특수성 차원에서 한국의 그것은 부정되고 있다. 조선후기의 지주제 성립과 발달 양상도 국가적 토지소유의 가혹한 수탈성에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정학체계(靜學體系)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농층은 하강분해를 통해서만 확인되며, 양극분해를 전제로 한 경영형 부농이나 서민지주 출현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농업생산력 발달은 소경영의 자립과 집약화의 방향을 통해 설명되며 광작(廣作)은 부정된다.

    게다가 전근대 시장경제는 자율적 경제영역이 아니며 보완 역할에 머문다는 폴라니의 연구를 적용하여 그 자급자족적 성격을 말하고 있다. 또한 소농층이 농촌시장을 무대로 상품생산을 행하지만 내권화(內卷化·involution)수준에 머문다는 필립 황의 논리도 전근대 시장경제 분석의 주요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역시 서구의 봉건제와 근대로의 이행이 절대적 기준이며 한국의 것은 따라서 비봉건적이라는 논리전개다. 서유럽 봉건제와 한국 봉건제의 특수성을 전제한 중세사회의 일반적 성격이 검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 일본의 논리가 중심에 서있다.

    서구의 이론틀을 차용할 때는 그것을 한국의 입장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왜냐면 서구의 특수성과 한국의 특수성이 결합되는 가운데 일반적 성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맹아론에 대한 부정은 한국자본주의 발전과정이 서구와 다르다는 점에서 서구식 기준을 근거로 부정되는 것이다. 한국을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분석방법은 당연히 서구의 모델을 차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중세말기 맹아론의 성격에 대한 분석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중세말기 사회구성의 변동과 그를 통한 내적 갈등, 그리고 외인론(外因論)에서 연유하는 분단상황 극복논리를 찾는 방식이어야 한다.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근대’의 의미는 현단계 세계체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세계체제를 자본주의 입장에서 근대를 설명하는 단극체제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북한과 자본주의 남한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양극체제로 이해할 것인가의 차이다. 후자의 경우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이같은 점에서 1894년 농민전쟁을 통해 중세 말기의 내적 모순을 확인하고, 나아가 좌우합작 시도와 통일전선 운동에서 외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은, 한국근대사의 당연한 시대적 과제 설정방법이 된다. 조선후기의 생산력 수준과 그로부터 유래한 모순의 폭발이 농민전쟁이었다면,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외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좌우합작과 통일전선이야말로 한국근대를 근대사로 설명해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근대로의 이행은 결국 내재적 발전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타율적·정체적 논리를 넘어서는 논리로 등장했지만) ‘외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잘 받아들여 이용할 수 있는가의 내재적 기반’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전자의 경우 농민층과 부농층, 지주층의 동향을 통해 체제전환의 논리를 찾으려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서유럽 근대의 지표를 비교사적 준거로 사용하는 전도된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일부에서도 소농이론의 입장을 취하면서 그것을 추종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와의 접합이 근대 이행의 완성 계기라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변형된 이해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검토를 요한다.

    1950~70년대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관에 대한 타율성론과 정체성론 극복논리로 등장하였다. 이후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단순하게 자본주의 맹아를 확인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렇더라도 맹아 전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내재적 발전론의 본래 의미는 서구 중심적 모델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보조적 수법이 아니다. 그것을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중세에서 근대로의 사회변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사발전의 기본동력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기층민중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계기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지배계급에게 자극을 주는 가운데 위로부터의 계기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제국주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한편, 그것을 통해 안으로부터 저항주체를 확인하게 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론이 아니라 한 나라의 고유한 발전원리와 법칙을 검토하는 것이다.

    한국근대사 연구와 21세기

    한국근대사 연구는 민주사회 건설과 민족국가 수립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로 대치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이미 탈근대·탈민족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은 아직도 분단이라는 상황 아래 자유롭지 못하다. 탈민족을 부르짖기에는 남북을 분단시킨 외압의 규정성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농론자들이 주장하는 ‘친일·친미파 역사주역론’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친일 문제는 단순한 한국자본주의의 경제성장발달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부정하고 분단 한국을 초래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까지 포함하는 문제다. 한국근대사는 남북이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다.

    세계 양극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왜곡된 한국 근대사를 복원하고, 근대한국으로의 체제전환 논리를 재정리 하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선택한 방법을 확인해야 한다. 오늘의 과제는 생산 중심의 운영방식이 아니라, 분배를 중심으로 한 체제운영 논리를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나, 선건설 후통일의 발전논리가 갖는 함정은 이미 시대의 뒷전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따라서 이전의 정체성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좀더 먼 안목을 갖고 한 단계 진전된 사회를 만드는 방법으로서 조선후기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치열한 역사의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조선후기 연구만이 21세기 우리가 나아갈 길을 올바로 제시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서구의 아시아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농론자들이 주창하는 경제성장 발달사 중심의 인식논리를 극복해야만 한다. 양적 성장발달사가 아니라 질적 성장발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절실한 고민이 필요할 때다.

    최윤오 <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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