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천하제일! 전인화의 드라이브 샷

  • 유동근 < 탤런트·HJ GLOVE 대표 >

    입력2004-09-01 1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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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를 친 지 어느새 18년이다. 나는 아직 처음 골프채를 잡던 그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손끝에 전해오는 그립의 묵직한 감촉.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고 1년이나 병원신세를 졌던 ‘무명 배우 유동근’은 병상을 딛고 일어나자마자 여의도 KBS별관 건너편에 있는 골프연습장에서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배추 20포기는 너끈히 들어가는 노란 박스 가득히 골프공을 담아 하늘로 쏘아 올리며, 언제 올지 모르는 촬영스케줄 전화를 기다렸다. 불과 1년 만에 79타를 기록하며 첫 싱글. 역시 헝그리 정신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깊이 골프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이나 바빠진 요즘, 나는 더 이상 그때만큼 부지런히 골프를 치지 못한다. 골프칼럼을 부탁하는 ‘신동아’ 편집실의 연락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요즘 나에게 골프란 무엇일까. 골프 장갑 회사를 운영하느라 본업까지 미뤘던 적도 있었던 나에게 골프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머리에 맴돈 것은 넓은 그린도, 호쾌한 장타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내 아내의 드라이브 샷이었다.

    ‘아이구, 또 마누라 얘기야?’ 자랑이라도 하듯 곳곳에 아내 얘기를 흘리고 다니는 팔불출 유동근을 기억하시는 분들의 지겨워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요즘에는 유동근하면 바로 전인화에게 관심이 옮겨 가버리는, 솔직히 말하면 몹시도 ‘열 받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곤 한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전인화 남편 유동근’이 아니라 ‘유동근 마누라 전인화’임을 만방에 선포하고자 한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내와의 라운딩을 사랑한다. ‘에이, 그런 입에 발린 거짓말을….’ 또 다시 귓전에 맴도는 환청을 과감히 무시하고 말하거니와, 이것은 절대 진실이다. 그 동안 나는 동료연예인, 정치인, 기업체 대표 등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라운딩을 했지만 아내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컴패니언을 만난 기억이 없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우리 부부의 50%는 골프가 만들어 주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직접 골프에 입문시켰고, 가르쳤다. 나날이 향상에 향상을 거듭해 어느새 90타 대를 기록하며 웬만한 여자 연예인은 모두 평정하고 다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내에게 골프를 권한 이유는 딱 하나, 건강에 대한 염려였다.



    물론 아내는 항상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냥 건강하다’ 정도로는 심야와 새벽촬영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연기자의 생활을 감당하기 힘들다. 팬들의 사랑이 커감에 따라 스케줄은 늘어나고 더욱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고민 끝에 나는 아내에게 골프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부부가 함께 골프 쳐봐야 싸움밖에 더하겠어?” 내 결심을 전해들은 지인들의 첫 반응은 그랬다. 운전과 골프는 아내에게 직접 가르치지 말라는 얘기도 못 들어 봤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왕 먹은 마음, 과감히 실천했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부터 아내와의 골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자신을 떼놓고 골프장에 가버리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원망 섞인 시선을 피하기 위한 묘수였거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전인화의 코치’ 유동근은 기술적인 측면보다 체력향상에 주안점을 두었다. 연습장에 도착하면 가장 멀찌감치 떨어뜨려 주차를 했다.

    전인화 : 여보, 문 앞에도 주차할 데가 많은데 왜 여기 세워요?

    유동근 : 음, 골프는 하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전인화 : (한번 흘겨보며) 이 무거운 백을 어떻게 들어요?

    유동근 : (무시한 채 한껏 목소리를 내리 깔고)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따라오세요.

    힘들어 할 아내를 모른 체하고 앞서 걸어간다. 처음에는 매번 투덜투덜 낑낑대기 일쑤였던 아내는 어느새 단련이 돼 골프백 하나쯤은 핸드백 메듯 척척 걸치고 다닌다(나중에 방송일 없으면 캐디해도 잘할 거다). 다행히 아내는 코치의 훈련방침에 충실히 따라주었고, 요즘은 나보다 낫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기분 나쁘지 않느냐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남(藍)이 청(靑)에게 질투를 느끼겠는가. 코치의 어깨는 으쓱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전인화의 골프를 나의 골프만큼이나 사랑한다. 푸른 하늘과 넓은 그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아내가 옴팡지게 휘둘러대는 드라이브 샷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명품이다. 그 순간 난 짜릿짜릿한 황홀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에게 ‘영원한 애인’임을 확인시켜준다.

    지난 한 해 아내와 나는 거의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각기 다른 방송국 TV드라마에서 왕과 왕비 역을 맡아 궁궐을 다시 드나들기 시작한 후, 맘 편히 늘어져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영화촬영까지 겹쳐 지방을 건넌방 드나들 듯 싸돌아 다녀야 하는 신세였지만, 나는 아내와의 골프를 머리 속에 그리며 참았다. 아이들 뒷바라지와 방송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 내느라 정신이 없는 아내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감히 말한다. 아내와의 라운딩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는 이 세상 어떤 골퍼보다도 불행하다고. ‘당신 마누라는 예쁘니까 그렇게 얘기하지!’ 아이쿠 이런이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골프가 없었으면 지금의 유동근·전인화도 없었을 것 같은 걸요. 그러니 남편들이여, 주말 아침마다 아내 속상하게 만들지 말고, 아내의 ‘애처로운 젖은 손’에 골프채를 쥐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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