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권력 분산세력 한데 모여야”

대권도전 나서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

  • 김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4-08-31 2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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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정부는 선진국 정부, 준비 부족 의약분업은 안타까워
    • 나는 검증받은 인물,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다
    • 자민련 탈당, 총리직 유임 후회하지 않는다
    • 책임총리제,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어려워
    • ‘구시대 인물’ 약점, 현정권 참여로 극복했다
    신동아’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을 차례로 만났다. 지난 5월호에서, ‘노풍’이 몰아치는 민주당 경선 현장에서 노무현 후보를 만나 그의 포부를 들어보았다. 7월호에는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를 만나 그가 품고 있는 국가비전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지난 8월호에는 월드컵 열기 뒤끝, 욱일승천의 기세로 정치권 핵심으로 진입한 정몽준 의원을 만나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또 한 명의 대권주자 한 사람이 정치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한동(李漢東) 전 국무총리다. 이 전총리는 아직 구체적으로 대권도전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7년 ‘중부권 역할론’을 앞세워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번 대선에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 전총리는 본격적인 대선행보를 시작했다. 8월7일 여의도 민주당사 옆 호정빌딩 10층에 대선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입구에는 ‘비전2010’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관운(官運)을 타고난 사람이다. 법조인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니 권력의 3부를 두루 거친 몇 안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법조계에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라는 법조3륜을 두루 거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63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생활을 마친 이 전총리는 잠시 변호사 생활을 한 뒤 그해 11월 법무부 법무부검사에 임용돼 검사로서 법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부름’으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이 전총리는 서울지검 검사, 법무연수원 부원장, 대전지검 부장검사, 부산지검 형사3부장 특수수사부장, 서울지검 특수수사1부장 형사1부장 등 검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정계 입문 뒤에도 그는 다른 사람이 따라하기 힘든 기록을 세웠다. 민정당에서 그는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 의장 등 당3역을 모두 지냈다. 그는 또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에서 각각 원내총무를 지냈는데 3대 정권에 걸쳐 집권여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 전총리의 진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고 자민련 총재라는 ‘당수(黨首)’의 이력도 갖고 있다. 1988년에는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1995년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2000년 8월에는 국무총리에 임명돼 정확히 25개월 18일 동안 국민의 정부 내각을 이끌었다. 이력만 놓고 보면 이 전총리는 현재 거론되는 대권주자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 전총리를 아직까지 유력한 대권주자로 보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낮은 대중적 지지도가 그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 전총리도 이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 입으로 내 자랑하는 것이 쑥스러워 자제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를 알릴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총리 재임 기간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 내고 경제회생을 이뤘다는 점이겠지요. 또 한국이 IT강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들었을 때도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최근에는 지난 6월 온 국민이 하나가 됐던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안타까웠던 일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준비가 미흡한 채 출발해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쳤던 의약분업을 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두 아들과 권력 주변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던 점도 두고두고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1988년 내무부장관으로 행정부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행정부의 달라진 점은 무엇이고, 부족한 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내무부장관에 취임했던 1988년은 사회 전반을 강타한 민주화와 자율화 물결로 열병을 앓던 시기였습니다. 반면 공권력은 숨을 죽여 무정부상태에 가까웠죠. 당시 정부의 당면과제는 사회질서 회복이었습니다. 불가피하게 경찰력과 최루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대결의 시대였죠. 하지만 2000년은 IMF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구조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때였습니다. 또 6 ·15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남북화해협력 정책이 꽃을 피웠고, 전자정부 실현, IT강국 건설, 국민기초생활 보장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 민주인권 국가실현 등 국민생활과 밀접한 정책을 위해 힘을 쏟은 시기죠. 한마디로 두 시대의 정부간에는 역할과 추진과제의 내용에서, 또 행정역량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정부는 선진국 정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총리는 “안에서 느끼는 것과 달리 외부에서는 한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우리나라의 교역량이 3500억달러인데 조만간 4000억달러를 돌파하게 되면 세계 10대 교역국에 들고 국민소득도 1만달러에 이를 전망”이라며 “현재와 비교하면 과거 군부정권 시절 한국의 규모는 1개 도(道)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졌다”고 말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나라를 이끌려면 자신처럼 국정경험이 많은 인물이 나서야 하지 않겠냐는 뜻을 전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의약분업과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국무총리로서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먼저 의약분업은 국가 선진화의 필수과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약물의 오남용으로부터 국민건강을 지킨다는 본래의 목표에 부응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실제 의약분업이 실시된 뒤 항생제 주사제 사용률이 낮아졌다는 통계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초기단계에서 시행준비가 미흡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국세기본법에 의한 통상적인 법인세무조사라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미 답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전총리에게 최근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면 지난해 9월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싸고 민주당과 자민련이 심각한 대립에 빠졌을 때다. 결국 자민련이 임장관 해임건의안에 표를 던지면서 DJP연대도 깨졌는데, 당시 자민련 총재 자격으로 국무총리에 있던 이 전총리의 거취가 정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전총리는 장고 끝에 자민련을 탈당하고 DJ정부의 일원으로 남는 다소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총리직 유임을 두고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현정부의 총리에 남기로 결정하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스스로의 결정에 만족합니까.

    “정부와 국정의 안정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종필 총재께는 그때나 지금이나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민련을 탈당하고 총리직을 유지한 내 결정에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정기국회 기간이었고 총리직 유임을 결정한 직후 9·11테러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우리 정부가 안정적으로 국내외 문제에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대권에 도전한다면 이 전총리는 공식적으로 두번째입니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 때와 지금의 정치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1997년 정국의 시계(視界)는 좋았으나 예측이 빗나갔다고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현 정국은 안개가 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곧 예측 가능한 정치환경이 조성되리라 믿습니다.”

    -이 전총리는 1997년 ‘중부권 역할론’을 주장할 때도 국민통합이 시대적 과제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이회창, 노무현 후보 등 여야의 유력한 대권주자들은 너도나도 국민통합에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주장합니다. 이 전총리가 생각하는 국민통합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동서갈등 또는 영호남 지역감정해소는 국민통합을 위해 반드시 이 시대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중부권 역할론’을 주장했던 것은 이런 역사적 역할은 갈등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세력, 제3지역의 지도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지금도 그런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 등에서 동서지역감정을 활용하면서 지역주의 정치가 만성화됐고 지역갈등도 심화됐습니다. 지역주의 정치는 인사의 편중과 지역개발의 불균형을 가져왔고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통합을 이루려면 우선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를 권력의 분산, 분립의 방향으로 개정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대선을 제도적으로 없애고 탕평책과 지역의 균형개발을 제도적으로 추진해야 할 겁니다.”

    현재 민주당 안팎에서는 신당논의가 한창이다. 이 전총리는 신당이 만들어질 경우 중요 구성원으로 참가가 예상되며, 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인사다. 인사다. 하지만 신당은 그와는 먼 곳에서 골격을 갖춰가고 있다. 민주당이 중심이 돼 신당 창당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당내 계파간 이해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전자로서, 또 미래의 참가 예상자로서 이 전총리에게 의견이 없을 리 없다.

    이에 대해 이 전총리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복지사회실현 평화통일을 이념으로 하고, 전국정당 국민정당 정책정당을 표방한 중도개혁 지향의 정당, 또 국민통합에 기여하고 국민에게 21세기 초반 세계중심국가 진입을 위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당이라면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신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참여할 계획인 것으로 압니다. 경선 참여와 함께 국민들에게 내놓을 이 전총리만의 국가비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신당의 구체적인 그림도 안 나왔고 신당 참여도 결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질문이 너무 앞서간다는 느낌이군요. 사실 백지상태에서 신당을 만든다고 할때에는 관심을 가졌습니다만 지금 논의를 보니 백지신당이 아닌 것 같더군요. 아무튼 신당 창당과정을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다만 나는 그동안 40여 년 공직생활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국정운영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또 이미 검증받은 도덕성과 정치적 역량을 나 자신의 강점으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조건과 포용력, 친화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년 동안 가장 강력한 개혁지향의 정부에서 총리로 재직하면서 21세기 초반 한국을 세계의 중심국가, 구체적으로 ‘G10’에 진입시키기 위한 비전을 제시, 이를 실천해 왔습니다. 미래를 위해 잘 준비해 왔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을 요구하는 개헌론이 한창입니다. 이 전총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통치구조는 무엇입니까.

    “우리 국민은 오랜 세월 우리 헌법이 규정한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경험해 왔습니다. 현행 5년 단임의 한국형 대통령제는 권력의 1인 집중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는 과거 정권에서 정경유착에 의한 대형비리가 발생하는 원인이 됐고, 그 후로도 권력주변의 비리 등 부패가 지속되는 원인이 됐습니다. 이제 권력분산에 중점이 있는 내각제, 권력의 분립과 견제, 균형을 중시하는 미국식 대통령제, 이 두 가지를 절충한 이원집정부제 등을 깊이 연구 검토하고 우리 정치환경과 풍토, 국민의 정치의식 등을 감안해 하루라도 빨리 우리 체질에 맞는 권력구조로 바꾸는 개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총리직을 경험한 결과, 노무현 후보가 주장하는 책임총리제, 즉 헌법개정 없이 총리의 실질적인 권한을 강화하는 시스템의 도입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나도 한때 우리 헌법에 규정된 내각제적 요소를 실질적으로 운영한다면 권력의 1인 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가운데 총리권한의 실질적 강화도 물론 포함되죠. 하지만 권력의 속성상 실천이 어렵습니다. 이상적인 생각일 뿐, 현실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총리도 민주당의 반노·비노 세력처럼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한 대안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현행 대통령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는 권력독점으로 인한 폐해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독점이 아니라면 분산일 텐데, 이 전총리는 자민련과의 인연과 신뢰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내각제적 요소가 강한 권력구조의 도입의사를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신당이 창당돼 당내 경선을 치를 경우, 이 전총리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자민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민련과는 지난해 총리직 잔류로 사이가 틀어진 바 있습니다. 퇴임 후 김종필 총재와 만난 것으로 압니다만, 자민련과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나는 자민련의 정치적 정통성을 신뢰하며 그 정강정책은 나의 정치적 소신과 궤를 같이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했습니다.”

    -자민련을 신당에 포함시킬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한창입니다. 이 전총리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정작 당사자인 자민련은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민련을 신당에 포함시킬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도 아니구요.”

    -노풍과 정풍 등 최근 정치인에 대한 지지도 변화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가 지도자를 뽑기 위한 선택이라면 적어도 그 정치인의 인망(人望)의 수준에 근거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의 지지도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한때의 감성적인 인기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망이란 세상 사람들이 우러르고 따르는 덕망이라는 뜻인데, 그런 인망 있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국가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대통령후보를 선택하면서 탤런트 고르듯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풍과 정풍은 곧 세대교체를 향한 열망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총리를 ‘구세대 정치인’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극복할 대안은 있습니까.

    “세대교체는 인간사회 발전과정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한 세대가 역할을 마치면 다음 세대가 이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과거는 미래의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현재는 찰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옛것과 경험은 미래를 개혁하는 경륜과 지혜의 근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5, 6공화국에 몸담았던 민정계 정치인이라는 점이 이 전총리의 최대 약점인 것 같습니다. 민주당을 모태로 한 신당의 정서와도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계획입니까.

    “나의 정치색을 중도보수, 또는 중도 온건보수라고들 지칭합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가장 강력한 개혁 지향의 정부에서 총리로서 행정각부를 총괄하며, 각 분야의 국정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이미 지적한 약점을 실천적으로 극복했다고 봅니다.”

    1984년을 통틀어 가장 큰 뉴스라면 그해 가을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사태였을 것이다. 당시 이 전총리는 민정당의 사무총장이었다. 민정당의 핵심 당직자로서 당연히 이 전총리는 대학생들의 점거농성을 비판적 시각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도 정치권으로 흘러들어왔고 그중 상당수는 민주당에 자리를 잡고 있고 일부는 현역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신당논의의 주체는 민주당, 그러니까 민주당을 중심으로 신당이 구성되고 이 전총리도 여기에 합류할 경우, 과거 민정당사 점거농성의 양대 주역이 같은 정당에 몸담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셈이다. “그럴 경우 어색하지 않겠느냐”고 느닷없이 물어보았다. 이 전총리는 인터뷰 시작 후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민정당 점거사태 관계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투였다.

    -지지율이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데 이에 대한 복안이 있습니까.

    “사람을 알고 지지하는 것과 모르고 지지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동안 국무총리로서 행정에 전념하고 민생을 챙기느라 나 개인의 지지도를 올리는 노력을 소홀히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는 국민이라면 냉정하게 판단할 겁니다. 행정부 2~3급 이상 공무원들에게 물어봐도 당장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국정운영 능력과 검증된 도덕성, 국민통합을 이끌 수 있다는 세 가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나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면 지지도는 오를 것으로 봅니다.”

    이 전총리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쑥스러워했다. 간신히 이 얘기를 마쳤을 때 배석했던 김영진 전의원이 “종이배는 접시 위에서도 뜨지만 큰 배는 물이 차야 뜬다. 이 전총리는 한번도 정치적 쇼나 자기과시를 한 적이 없는데 우리 지지자들이라도 나서서 물을 대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정부의 통일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서해교전으로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여론도 적지 않습니다. 아시안게임에는 인공기가 휘날리는 ‘초법적’상황도 벌어질 전망이고 이에 따라 남남갈등도 심화될 전망입니다. 이 전총리는 남북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갈 계획인가요.

    “현정부의 대북정책을 ‘대북포용정책’이라고도 하고 ‘햇볕정책’이라고도 하고 ‘대북 화해협력정책’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북 화해협력정책’이라는 표현이 그중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시대의 대결정책을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기조로 하는 대북정책, 대결관계를 화해협력관계로 바꾸는 정책이라는 겁니다. 화해협력의 기조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될 수도 있고 서해교전 같은 사태로 남북관계가 냉각될 수도 있습니다. 경의선 복구 작업이 제대로 안되고 이산가족방문이 중단되는 등 구체적 시책은 추진하다 보면 돌발사태로 중단될 수도 있지만 화해협력의 기조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게 내 소신입니다.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교류협력을 강화하다보면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국민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는 지금 정전(停戰)체제에 살고 있습니다. 정전체제를 하루빨리 종전(終戰)체제로, 이어서 평화체제로 바꿔야 합니다. 이 일은 앞으로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차원, 정부차원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은 지속돼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국 비리로 얼룩진 정권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임기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들문제, 측근 비리 등 부패문제에 관한 한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아울러 이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의 친인척이 비리문제에 빠져들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나는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우리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중심제에 따른 지나친 권력집중이 문제라는 겁니다. 권력의 중심인 대통령은 깨끗해도 권력의 주변은 외부의 잘못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부패하고 만 것입니다. 두번째는 권력주변을 제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높은 도덕성 확립을 위한 제도적 개선과 보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신보수주의’의 출현

    -월드컵 열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정치지도자라면 월드컵에서 나타난 국민적 열기와 에너지를 국운상승의 힘으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도 고민해야 할 텐데요.

    “월드컵에서 분출된 국민적 에너지의 바탕에는 애국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 못지않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런 것이 월드컵을 통해 표출된 것이 아닐까요. 정치권은 국민적 에너지가 확고히 결집되도록 해야지요. 결집된 힘으로 21세기 초반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에 진입시키고 통일기반을 확고히 다져야지요. 그 원동력으로 월드컵에서 확인된 국민적 열망을 활용해야 할 겁니다.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들 가슴속에 잠재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번에 분출된 것인데 이런 현상을 ‘신(新)보수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이 어떠냐는 겁니다. 20~30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애국심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얘기죠.”

    -지난 1997년 대권도전 때 내세웠던 ‘중부권 역할론’을 대신해 ‘신보수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계획인가요.

    “아닙니다. 그때 주장했던 중부권 역할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월드컵을 계기로 20~40대가 보여준 정열적인 에너지는 결국 애국심이고 미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라고 할 때 이를 국가의 선진화와 통일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하는 것은 정치지도자의 할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란 포용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노·장·청’이 나름대로 역할을 할 때 조화롭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개혁의 열정만으로 모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바탕에는 경륜과 지혜가 있어야 실질적 개혁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중도개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보수는 수구도, 급진적 개혁도 배척합니다.”

    최근 한 중앙일간지에 이 전총리는 이회창 후보와는 판사시절 자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사소한 일도 상의하던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정치를 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는 내용의 칼럼이 실려 화제가 됐다. 그 기사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적지 않은 정치적 악연을 갖고 있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후보에게 패한 것이 그렇고 그 뒤 이 전총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는 게 주변의 얘기. 하지만 이 전총리는 “사실과 다르다. 총리가 돼서도 한나라당을 방문해 만났다. 별다른 감정은 없다”고 말했다.

    “글쎄요, 그 기사의 내용에 사실과 다른 것도 있는 것 같은데요. 비록 이회창 후보와 정치적으로 상반된 길을 걷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변한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변하지도 않을 겁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서운한 감정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리고 감정으로 다룰 문제도 아니구요.”

    이 전총리는 현재 이인제 정몽준 박근혜 의원 등과 더불어 ‘반창연대’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대권 본선에 나서려면 이들과 협력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부담도 있다. 어쩌면 노무현 후보도 이 전총리가 만나게 될 예선전의 상대가 될지 모른다. 한마디로 산 넘어 산, 앞날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하지만 각오는 대단해 보였다. 이 전총리는 정치적 소신을 얘기하면서 대중연설이라도 하듯 몸을 크게 움직였고 목소리도 크고 우렁찼다. 과연 그의 꿈은 이뤄질까. 이한동 전총리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권도전의 길에 막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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