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친구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여인의 통곡기

“그날 이후 13년간 내 인생은 없었다”

  • 곽대중 자유기고가 bitdori21@kebi.com

    입력2004-09-06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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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두 살 정영숙(가명)씨. 지난 5월 그는 13년 전 자신이 일했던 한 방직공장의 문을 두드렸다. 자신과 함께 일했던 친구 양미정(가명)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또래 친구들이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낼 때 공장 먼지에 파묻혀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 했던 지난날을 함께 추억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게 됐고 단란한 가정도 꾸리게 된 그 친구와 서로 도움이나 주고받으며 지내자고 찾아온 것은 더욱 아니다. 영숙씨가 미정씨를 13년 만에 찾은 이유는 엉뚱하게도 미정씨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정씨는 뜻밖에도 13년 전 다니던 그 공장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둘 사이엔 반가움보다 서먹함이 앞섰다.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영숙씨는 미정씨에게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한 미정씨는 영숙씨의 이 질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영숙씨는 왜 13년 만에 친구를 다시 찾았으며, 기껏 만난 친구보다는 그 아버지의 행방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또 미정씨는 아버지의 소재를 묻는 물음에 왜 정색을 한 것일까. 13년 전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두 달 뒤, 영숙씨와 미정씨는 경찰서 형사계의 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영숙씨는 어린 남매를 유괴한 피의자로, 미정씨는 그 아이들의 어머니로.

    여느 유괴사건 같으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으며 경찰서 안이 소란스러웠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취재진이 몰려들고 카메라가 유괴범인 영숙씨의 얼굴을 비췄지만 그녀는 얼굴을 숨기기는커녕 짜증스러운 듯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난 그냥, 미정이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그것만 알고 싶었단 말이에요!”



    아이들을 납치하고서도 그 아이들의 할아버지를 자꾸 거론하는 이 희한한 유괴사건으로 인해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13년 전의 사건이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9년 초 어느날. 열아홉 살 영숙이는 오빠의 구박을 받고는 집을 나섰다. 오빠는 영숙이 일자리를 찾지 않고 놀고 지낸다며 구박하고 때론 손찌검까지 했다. 영숙은 몇해 전 봉제공장에서 만난 친구 미정의 집을 향했다. 미정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며칠 전의 일이 떠올라 좀 꺼림칙하지만 오늘은 거기서 잘 수밖에 없다.

    그날도 영숙은 오빠의 구박을 받고는 미정네 집 대문을 두드렸다. 미정의 형제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아이들이 올망졸망 많은 집에 하룻밤 재워 달라는 게 미안했지만 늘 갈 곳은 그곳뿐이다. 그런데 미정이 집에 없었다. 방직공장에 취직한 미정은 야근이란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어머니도 집에 없었다.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미정의 아버지가 “자고 가라”며 손목을 붙들었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틈에 누우려는데 아버지가 오더니 옷을 벗으라고 했다. 자기 집에서 자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도 말이다. 안 벗겠다고 하자 화를 내며 때리려고 했다. 영숙은 맞는 게 두렵고, 또 지겨웠다. 그래서 그냥 옷을 벗었다. 옷을 벗었더니 미정의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하려고 했다. 무서워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들고 미정의 집을 뛰쳐나왔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오늘도 미정은 야근을 가고 없다. 집에 돌아가려 했지만 오빠에게 맞는 것보다는 그냥 여기서 자는 게 낫다 싶었다. 옷을 벗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녘…. 몸을 짓누르는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깼다. 미정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벌벌 떨기만 하다 그가 몸에서 내려온 후에야 쫓기듯 옷을 챙겨 집으로 달려갔다.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빠에게 맞은 어느날 영숙은 또다시 미정의 집을 찾았고, 같은 일이 반복됐다.

    다음해 영숙네는 인근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즈음 영숙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무엇을 잘못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간해서 헛구역질은 그치지 않았다. 옆집 아주머니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보았고, 혹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다그쳤다. 임신이 어떻게 해서 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영숙은 지난해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는 펄펄 뛰면서 그 집이 어디냐며 내가 해결해주겠다고 영숙의 손목을 끌고 앞장섰다. 아주머니는 미정의 어머니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목걸이 하나와 현금 20만원을 받아냈다. 그 길로 영숙은 가족계획상담소를 찾아 처음으로 ‘낙태’란 것을 했다.

    지난 8월1일 영숙씨는 미성년자 약취 유인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았다. 실질심사 결과 ‘정신적인 판단능력이 미숙해 일정한 치료가 필요하며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됐다. 혐의를 부인하지 않고 모두 인정한 것도 정상 참작됐다.

    그러나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온 영숙씨는 갈 곳이 없었다. 사건을 담당한 광주동부경찰서 형사와 여성단체 관계자가 영숙씨의 오빠 집으로 동행했다. 시각은 자정 무렵. 실례인 줄은 알지만, 불구속 처리된 피의자를 계속 유치장에 가둬둘 수도 없고, 영숙씨가 예전에 혼자 살던 단칸방은 기거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있어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혈육인 오빠 집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오빠는 영숙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기도 B시에 사는 언니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언니는 “영숙이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 그런 동생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남 A군에 사는 이모에게 전화를 해보았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동네 사람들 보기에 남우세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상담소를 나서면서, 영숙씨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었더니 영숙씨는 “열일곱 살 때”라고 대답했다. 생활이 어렵긴 했지만 언니 오빠들과 모여 살고, 공장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가장 좋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시계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열일곱 살 그 꽃다웠던 시절에 멈춰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괴사건으로 인해 크게 혼이 난 탓인지 이제 영숙씨는 “복수하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 사과받은들 뭘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다만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멈춰버린 인생시계가 다시 박동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사정이 이렇게 되자 ‘광주 여성의전화’ 부설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로 향했다. 이곳은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이 일시적으로 몸을 의탁하는 곳으로 영숙씨와 같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밤중에 다른 도시에 있는 성폭력 피해여성 쉼터를 수소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일단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첫날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발생했다. 쉼터가 자리잡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유리를 영숙씨가 돌로 쳐 깨뜨린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내가 깼노라고 경비원에게 털어놨다. 왜 깼느냐는 상담원의 질문에 영숙씨는 “유리에 ‘보람산부인과’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그랬다”고 말했다. 왜 보람산부인과란 상호를 보고 화가 났느냐고 다시 물으니 “예전에 나와 같이 살던 남자의 아들 이름이 보람이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생각나서 그랬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영숙씨의 새로운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숙씨는 이상한 발언과 행동을 계속했다.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7층에서 뛰어내리면 사람이 죽을까요?”라고 자살을 하겠다는 듯 묻고,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정폭력의 두려움이 뇌리에 짙게 남아있는 다른 여성들은 영숙씨의 이런 행동에 겁을 먹었다.

    특히 그날 밤엔 잠을 자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젖가슴을 만지며 돌아다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상담자가 이유를 물으니 “사실 나는 파리 한 마리도 함부로 못 죽여요”라고 깔깔깔 웃으며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낯선 사람들 틈에서 빨리 친해지려는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일종의 과시(誇示)행위”라고 해석한다. 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들의 경우 사람들과 친숙해지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평소엔 전혀 폭력적이지 않던 사람도 폭력적으로 변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된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쉼터 동거인들은 영숙씨를 무서워했고,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운영자에게 항의했다. 결국 다음날 영숙씨는 쉼터를 나와야 했다.

    낙태를 한 이후 영숙씨는 옆집 아주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아주머니에겐 아들 K씨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도망을 갔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보람’이었다. 영숙씨가 K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인지 자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몇 달 만에 영숙씨는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됐다. 그 사실을 안 K씨의 어머니는 낙태를 하라고 종용했다.

    몇 달 전 낙태 수술을 받은 곳으로 끌려가다시피 다시 갔다. 수술실에서 영숙씨는 의사에게 “K씨 어머니에겐 낙태했다고 말하고 수술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는 영숙씨가 자살을 기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영숙씨는 낙태를 할 바에야 자살하겠다고 술과 식초, 본드, 진정제 등을 섞어 마신 채 옥상에 쓰러져 있었다. 의사는 “약을 과다하게 먹어 기형아를 낳을 가능성이 높으니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고, 영숙씨는 “기형아를 낳아도 좋다, 내가 기르겠다”고 맞섰다. 그러나 결국 낙태 수술은 진행됐다. 불과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낙태를 한 것이다.

    영숙씨를 상담했던 ‘광주 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 노미덕 소장은 “이때부터 영숙씨가 자포자기 상태에 접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번의 낙태로 인한 충격으로 강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됐다”는 분석이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여성은 대개 극단적인 행동유형을 보인다고 한다. 대부분은 지나치게 몸을 깨끗이 하는 결백증으로 나타나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하고 불결한 것이 몸에 묻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여 몸을 치장하거나 씻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닌다든지, 조금만 잘 대해주는 남성과도 쉽게 성관계를 갖는 유형도 있다고 한다. 특히 정신적 성장이 미숙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주기적으로 당한 경우 성관계만을 인간관계의 모든 것으로 착각해 이에 집착하는 사례도 있다.

    두번째 낙태를 한 이후 K씨는 행방을 감춰버렸다. 지금 영숙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아들의 이름이 보람이었다는 것뿐. 그러잖아도 성폭행으로 입은 상처를 안고 있던 영숙씨에게 설상가상의 고통을 안겨준 K씨를 영숙씨는 지금도 저주한다. 인터뷰 도중에도 영숙씨는 “그놈만 아니었다면…”이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K씨가 자취를 감춘 후 영숙씨는 결혼상담소를 통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그와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남자는 영숙씨가 공장에서 힘들게 일해 모아둔 돈 200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아이는 해외 입양을 보내버렸다.

    이후 식당에서 숙식하며 일했는데,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가 J씨를 소개시켜 주었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더 많아 망설였지만 이내 동거를 시작했고 이번에도 아이를 가졌다. 동거기간은 길지 않았다. 영숙씨는 J씨가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이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J씨와 헤어졌다.

    당시 영숙씨는 임신중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었던 그녀는 산부인과를 찾아가 혼자 애를 낳았다. 그런데 이번엔 오빠와 언니가 찾아와 “무슨 능력이 있어 아이를 키울 것이냐”며 아이를 J씨의 어머니에게 보내버렸다. 지금쯤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아이를 영숙씨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J씨와 헤어지고 나서는 J씨의 형과 가깝게 지냈다.

    1999년 한해 동안 영숙씨는 전남의 한 정신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들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병원을 나온 후 제대로 살아보려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고, 자꾸 과거만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10여 년 전 미정이 아버지에게 몹쓸짓을 당한 후부터 자신의 인생이 꼬이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상받고 싶었다. 아니, 자신에게 그런 몹쓸짓을 한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닿은 곳이 예전에 미정이가 일하던 방직공장이었다. 별 기대도 않았는데 미정이는 여태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미정이는 “이제 와서 아버지를 만난들 뭘 어쩌겠느냐”며 그냥 우리집에 가서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미정의 집에 갔다. 그동안 결혼을 한 미정은 아이가 둘 있었다. 아홉 살인 첫째 아이는 딸이었다. 영숙씨가 10년 전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입양보낸 아이도 딸이었다. 제대로 키웠으면 벌써 이 정도는 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정의 남편은 오토바이 상점을 한단다. 가게에 방이 딸려 있어 집엔 며칠에 한번씩 온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미정의 집에서 먹고 잘 수 있었다. 아이들도 ‘이모’라 부르며 잘 따랐다. 미정의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영숙씨는 13년 전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날 그 일만 아니었어도 나도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럴 때마다 미정에게 “아버지의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애원했지만 미정은 “서로에게 부끄러운 일이니 덮고 넘어가자”고 설득했다.

    어느날 다시 미정의 집을 찾았다. 미정은 출근하기 전에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집 앞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놀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과자를 사주려는 모양이었다. 먹고 싶어하는 과자를 손에 쥐어준 후 통근버스에 오르는 미정의 모습이 보였다. 영숙씨는 문득 미정의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사는 집을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이모!’ 하면서 뛰어왔다. 큰아이에게 할아버지 집을 물었다.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화번호는 아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모른단다. 혹시 아이들의 엄마가, “이모가 그런 것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하라”고 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미정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내친김에 억울한 사연을 말하고 싶었다. 영숙씨는 한참동안 신세 한탄을 했다. 사연을 들은 아주머니들은 혀를 끌끌 찼다. 한 아주머니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보상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는지만 알자는 것인데, 처벌은 아니더라도 사과라도 받고 싶은데 아버지의 소재를 가르쳐주지 않는 미정이 왠지 얄밉게 느껴졌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안 가르쳐 주면 골탕을 먹일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객기가 생겼는지 “1000만원을 주면 용서해주겠다”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1000만원이란 돈을 한번도 만져본 적 없지만, 꽤나 큰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액수지만 ‘과연 그 정도면 잃어버린 내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아무튼 애들을 구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매의 손을 잡고 “이모랑 놀러가자”고 하니 무척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 택시를 탔지만 막상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생각나는 곳이 광주 외곽의 놀이공원인 ‘패밀리랜드’였다. 한참을 달려 패밀리랜드 입구까지는 갔는데 생각해보니 택시비가 없었다. 운전기사가 화를 냈다. 이때 J씨의 형이 생각났다. “택시비를 줄 테니 ○○동으로 가자”고 했다. J씨 형의 집까지 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만날 집안에 있던 사람이 그날은 없었다. 다급한 김에 지나가는 행인에게 1만원만 꿔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난생 처음 보는 여자에게 돈을 선뜻 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택시기사는 재수없다는 듯 바라보았고, 한참 욕을 퍼부은 다음에 그냥 떠났다.

    J씨 형의 집에 들어가 아이들을 먹이고 씻겼다. 오랜만에 외출을 했던 아이들은 방에서 폴짝폴짝 뛰고, 한 구석에 있는 컴퓨터를 켜 게임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저녁이 되자 아이들 집에서 걱정할 것 같아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친구집에서 놀고 있는 중이라 이야기했다. 한참 시끄럽게 놀던 아이들은 피곤한지 금세 잠이 들었다. 영숙씨도 그 옆에 누웠다. 아이들을 이렇게 옆에 누이고 자보긴 처음이었다.

    한편 미정씨 집에서는 밤 늦도록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자 비상이 걸렸다. 집 앞 슈퍼마켓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그 여자가 데려갔나 보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미정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적 판단능력이 부족한 영숙이 그동안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저녁에 아이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추적했다.

    경찰이 곧 영숙씨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이닥쳤다. 현장을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어리둥절한 영숙씨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13년 전의 성폭행 피해자가, 13년 후 유괴범으로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쉼터를 나온 영숙씨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경기도에 사는 막내 오빠가 오라고 해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는 한 기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필자는 영숙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의외로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천진난만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당할까. 별로 낯설어하지도 않고, “여기에 일주일 있으면서 면회 오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기뻐했다. 기도원내 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 귀를 의심했단다.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느닷없이 유괴범으로 몰렸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사연이 알려지고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돼 오히려 다행인 측면도 있다고 영숙씨는 말했다. 그러고는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오랫동안 성폭력 관련 상담을 해온 전문가들은 영숙씨의 경우를 “불우한 가정환경과 그로 인한 가정 폭력, 거기에 성폭력이 결합돼 일생이 굴절돼버린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영숙씨는 전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네 명, 언니가 한 명 있었다. 영숙씨가 세 살 때, 쌍둥이 동생을 낳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음식을 잘못 먹고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6남매는 도움 받을 친척도 없이 어렵게 자랐다. 영숙씨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만족해야 했고, 오빠들도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나섰다.

    그러던 중 첫째 오빠가 생활고를 비관해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혼한 둘째 오빠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전 부인의 집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된 셋째 오빠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막내 영숙을 보면 화를 냈다. 공장에 보내도 작업 숙지도가 낮아 얼마 일하지 못해 쫓겨나거나 제 발로 나오길 반복했던 것이다. 영숙씨에게 물으니 지금까지 직장에 가장 오래 다닌 기간이 9개월이라고 했다.

    영숙씨는 속된 말로 덜된 사람이 아니었다. 심성이 깨끗하고 말도 제법 잘했다. 사리판단 능력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부족한 게 있다면 ‘자신감’이었다.

    오빠에게 맞고, 직장을 옮겨다니며 영숙씨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듯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자신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거기에다 친구 아버지로부터 당한 성폭행의 기억은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불결하게 보고 또 자기와 친해지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영숙씨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사람들은 한발 물러섰고, 그래서 자신에게 조금만 잘 대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로 갔다. 그런 영숙씨의 피해심리를 이용해 K씨, J씨 같은 남자들이 스쳐간 것이다.

    인터뷰 도중 영숙씨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제가 죽일 년이죠, 제 몸 하나 간수 못하고…. 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됐어요.” 이는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행동유형 중 하나다.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거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버린다. 실제 자기와 관계 없는 사건까지도 자신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자신이 박해를 받아도 “나는 이런 수모를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렇게 과도한 자기귀속적 태도가 나중에는 폭력적인 공격성으로 급전환한다고 말한다. 그 시점은 대개 극한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다. 이렇게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초기엔 모든 어려움을 다 ‘내 탓’으로 돌리며 인내한다. 나에겐 그러한 일이 없었노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기도 한다. 피해여성이 이런 과정을 겪고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때론 본인조차도 그것이 “이제 상처를 극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과정에 대한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자신이 도저히 풀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제 더 이상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됐을 때 그동안 속에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는 일순간 외부로 폭발한다. 바로 성폭력 가해자를 향해서다.

    ‘김부남 사건.’ 아홉 살 때 자신을 성폭행한 이웃집 아저씨를 21년 후 찾아가 살해한 사건으로, 성폭행 피해여성의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남는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결혼을 한 김씨는 남편과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성폭행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자꾸 남편의 손길을 거부했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모든 분노가 가해자에게로 옮겨갔고, 어떻게든 그가 처벌받는 모습을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고소를 하려했으나 이미 공소시효를 훨씬 넘긴 뒤였다. 그래서 스스로 가해자를 벌하기로 마음먹고 흉기를 들고 찾아가 ‘21년 전의 아저씨’를 살해했다. 당시 그녀는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이번에 드러난 영숙씨의 성폭력 피해 사건 역시 공소시효가 지났다. 그러니 법적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방도는 없다. 고소를 하더라도 13년 전의 성폭행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영숙씨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그 사람이 그때 나를 왜 그렇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했다. 왜 성폭행했는지 알고 싶다니, 이것은 영숙씨가 모든 불행의 근원을 최초의 가해자에게서 찾고 있다는 증거라고 정신과 전문의는 말한다. ‘왜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 그랬는지 알고 싶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제라도 사과를 받고 싶다”고, “아니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자백이라고 듣고 싶다”고 영숙씨는 하소연했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이나 성폭력 상담소 상담원들은 “성폭력 피해의 경우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가해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앞날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게 되면 극도의 분노를 느끼게 된다. 세상에 정의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모든 남성을 적대시하는 경우로까지 치닫는다.

    그러나 시점이 오래된 사건일수록 대다수 남성들은 혐의 자체를 부인한다. 오히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정신상태를 거론하고 명예훼손 등으로 맞고소하기 일쑤다. 이럴 때 피해여성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래서 영숙씨처럼 “제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시인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여성의 후유증은 얼마나 오래갈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심각한 경우 평생 동안 가기도 하고, 자신의 아들과 딸로 대를 이어 계속되기도 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한 성폭력 상담소에 상담을 요청한 대학생 L양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학생인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셋방살이를 하던 처지라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수차례 괴롭힘을 당했던 L양은 성장을 해서야 그때 자신이 당했던 일이 성폭행이란 것을 알았다. 이성교제를 할 나이가 됐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남성을 거부하는 원인이 돼버렸다.

    고등학생 P양은 “성교육을 하지 않는 학교로 전학을 보내달라”고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P양은 초등학교 5학년때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 성폭행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애가 어리니까 자라면서 자연히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다. P양도 별 문제없이 자랐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 성교육을 받으면서 달라졌다.

    지난해부터 전국 초·중·고교에서는 연간 10시간씩 성교육을 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문제는 그 내용에 있었다. 고등학교의 성교육은 대개 ‘순결’에 초점을 맞춘다. P양은 성폭행당한 것을 ‘순결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게 됐고, 교육을 받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당시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성교육을 하지 않는 학교를 찾게 됐고, 나중엔 학교 자체를 기피하게 됐다. 딸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는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또 하나의 악순환을 낳게 됐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아이를 낳게 되면, 특히 딸 아이의 경우 안전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과 같은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자녀가 성장하면 어머니의 이런 과보호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성폭력 가해자에겐 공소시효가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시효 없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필자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영숙씨는 다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가 보니 작은 돗자리 하나가 잠자리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 지낼 수는 없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오빠가 쉼터를 알아봐 준다고는 했는디, 어찌게 달랑가 모르겄어요.”

    그녀는 전라도 사투리로 말했다. 가능하면 가장 오래 살았던 광주로 가고 싶지만 그곳엔 성폭력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가 없다. ‘광주 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 노미덕 소장도 이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2002년 7월 현재 전국의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은 14곳. 서울·부산·경기·전북·경남·제주뿐이다. 그 이외의 지역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이 보호시설 입소를 바랄 때는 인근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며, 그나마 수용인원도 보통 10명 정도다. 여성의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성폭력 피해에 대한 대처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런 쉼터와 상담소를 찾는 여성들이 부쩍 늘고 있지만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취재를 마무리하며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들렀다. 그 시각 안양 모고교 1학년 J양(15)이 영아를 살해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사건이 속보로 떠올랐다. J양은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체중 4㎏의 남자아이를 출산한 뒤 창문을 통해 5m 아래 바닥으로 던져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J양은 신원을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후 임신했다고 한다. 성폭행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정부의 지원으로 낙태가 가능한데 이를 알지 못했고, 주위에 알려질 게 두려워 혼자 끙끙 앓다 결국 출산 직후 살인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날 상담소엔 방송기자들이 찾아와 성폭력 실태 및 대처요령에 대한 취재를 하느라 분주했고, 상담소 직원들은 자료를 제공하고 촬영에 응하느라 점심식사도 못하고 있었다. 2002년 상반기 이 상담소엔 1632건의 상담이 접수됐는데, 이중 1347건이 성폭력 피해상담이다. 이 상담소 부설 ‘열림터’ 시설장인 조중신씨는 “성폭행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우가 많이 보도되지만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된 경우도 많다”고 강조했다. 조원장이 말하는 건강한 방법이란 전문적인 상담기관과 치료기관을 찾아가는 경우, 주위의 관심 속에서 함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경우를 말한다.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대개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에만 압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전반을 넓게 바라보지 못하고 평생을 이에 짓눌려 살아가게 됩니다. 이럴 때는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가 중요합니다. 피해여성들은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좌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근엔 피해자에 대한 교육과 함께 주변인에 대한 상담교육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피해여성들이 ‘몸가짐을 똑바로 하지 못해 당한 여자’라는 자기 내부와 주위의 손가락질 속에 주눅들어 살아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니 가해자들이 죄책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피해여성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사회적인 애정과 관심이 성폭력을 막는 근본 해결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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