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작은 것 하나만 바꿔도 산재 없앨 수 있어요”

노동건강연대 임상혁 공동대표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shamora@donga.com

    입력2004-09-06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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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재해와 직업병.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이 단어들은, 어느새 예전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루에 9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나가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노동건강연대 임상혁(39) 대표의 말이다. 산재 노동자들의 치료와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싸우고있는 한 의사의 치열한 투쟁기.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고 반쯤 열린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온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잘 돌아가지 않는 입을 열어 의사를 반기던 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올해 예순다섯 살의 최성규(가명)씨.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을 이렇게 보내야 할 시기도 아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운 없게도’ 1987년 악명 높은 원진레이온에서 일했다는 사실뿐이다. 불과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독가스에 다친 그의 육신은 철저히 망가졌다.

    발작이 일어나는 등 이상한 조짐을 처음 느낀 것은 원진레이온을 떠난 지 5년이나 지난 1992년이었다. 계속 심해지는 증세에 병원을 찾아다니던 그는 2년 후에야 ‘이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증세는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졌다. 당초 신부전증으로 시작됐던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는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2년 만에 그는 자리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최씨는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을 돌보기 위해 경기도 구리시 옛 공장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원진녹색병원에 머물고 있다. 1년 넘도록 병원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다. 그의 병을 수발하는 아내와 딸 등 가족의 삶 역시 함께 일그러져 버렸다.

    “이황화탄소 중독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1987년 처음 발견된 6명의 원진레이온 피해환자들은 모두 사망했어요. 이후 추가로 발견된 많은 분들 역시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 있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꾸준히 악화되죠. 병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진행을 늦추는 것 뿐입니다.”

    오랜만에 휠체어에 내려앉은 환자의 손을 부여잡고 얘기를 나누던 이 병원 산업의학과 임상혁(39) 과장의 말이다. 기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환자의 웅얼거림을 경청하던 그가 말을 덧붙인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산재요양원이 없습니다. 병원은 요양소가 아닙니다.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이 여유 있게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없다보니 결국 캄캄한 병실에 누워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겁니다.”

    임상혁 과장은 바쁜 사람이다. 오라는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원진 녹색병원 의사라는 직업 외에도 병원 부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 보건운동단체인 노동건강연대(이하 노건연)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산업재해 대책마련을 위한 공동대응위원회’ ‘산재보험 공동대책위원회’ 등의 사회단체 공동조직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들어있다.

    직업병이나 산재로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는 전국 어디든 가리지 않고 날아간다. 정확한 발병과정과 현장상황을 파악하고 직업병 여부를 판단하는 일이 그의 몫이다. 직업병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에 맞서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소견을 작성하고 간혹 사회적 이슈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기자와 만나기 수일 전에도 그는 울산에서 벌어진 벤젠 관련 백혈병 사고의 산재 여부를 파악하는 작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러다 내가 산재 피해자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최근 그는 지난해 6월29일 창립한 노건연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산업안전보건체계와 산재보험의 개혁, 소외 노동자 지원을 위해 일하고 있는 노건연은 의사 60명, 활동가 15명 내외로 구성돼 있다.

    “일이 터지면 대책을 만드는 데 급급한 현실에서 벗어나 산업재해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운동을 해보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보건운동전략이나 근거를 제공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하고 싶었고요. 앞으로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 등 산업안전체계 외곽에 방치돼있는 이들에 더욱 더 주목할 생각입니다.”

    산재노동자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산재보험제도 개혁운동 역시 지난 한 해의 주요활동 가운데 하나다. 현장 노동자들의 특수검진 결과를 회사가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조선소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을 둘러싸고 회사와 노조가 극한대립을 벌이는 등 지난 한해 이슈가 불거진 모든 현장에는 어김없이 노건연이 함께했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들어가는 날은 잘 하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가끔 긁히는 바가지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역시 의사인 아내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인데도 가사와 아이 돌보기는 온전히 아내에게 맡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참 나쁜 남편이죠. 한번은 심부름을 시키길래 제가 좀 퉁퉁댔더니 부부싸움이 됐어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는 돈도 벌어, 애도 내가 봐, 집안일도 내가 해, 그런데 그것도 못해줘?’ 속이 다 뜨끔하던데요.”

    그런 그에게 아내 박현주(36)씨는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처음 임대표가 현장의료운동에 뛰어들겠다고 말했을 때, 현장진료활동을 하다 만나 결혼에 이른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의사들의 절반도 안되는 월급봉투를 들이밀 때도, 아내는 다른 길을 찾으라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대표가 어린 시절부터 ‘슈바이처’를 동경하며 거창한 사회봉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단지 수학을 잘해 이과를 택했을 뿐이었고, ‘기계나 장비와 씨름하는 일이 적성에 맞을 것 같지 않아’ 의대를 택했을 만큼 의사라는 직업도, 그를 통한 사회참여도 ‘소년 임상혁’의 인생계획에는 애당초 들어있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1984년이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사회에 대해 고민하던 무렵이었죠. 많은 친구들이 공장에 위장취업하며 노동운동현장에 뛰어들었어요. 그걸 보면서 일종의 의무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1987년 한양대 의대 본과 2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산업보건운동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노동과 건강연구회’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산재와 직업병의 무서움을 실감하게 됐다는 회고. 원진레이온 환자들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가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책에 그렇다고 써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분노가 아니라 무서움이었어요.”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은 앞에서 말한 최씨처럼 ‘이황화탄소 중독’에 의해 죽어간다. 이황화탄소가 뇌에 작용해 중풍과 흡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 중풍이 몸의 일부를 마비시키는 반면 이황화탄소 중독은 대뇌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쳐 기괴한 표정을 짓거나 말을 못하는 등의 후유증을 남긴다.

    “싸움은 곧 전국적인 이슈가 됐고 파장도 엄청났지요. 그때 함께 운동을 펼쳤던 청년의사들은 이후에도 대부분 의료운동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원진녹색병원에도 세 분이 남아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그는 1994년 2월부터 산재·직업병 전문 의료기관인 구로의원에서 일했다. 구로의원은 직업병 추방을 모토로 내걸고 여러 사람들이 돈을 갹출해 1986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의료기관. 그가 역대 원장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원장으로 취임하던 당시는, 단순한 ‘재야병원’으로 인식되던 구로의원이 권위를 인정받는 전문기관으로 거듭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엑스선 촬영기도 없이 시작한 볼품없는 병원이었습니다. 60만원이라는 턱도 없는 월급을 받으며 일했지만 열정만은 정말 대단했어요. 1995년 한국통신 114 안내원들의 경견완장해 등 전국 어디서든 이슈가 생긴 조사는 모두 구로의원에서 담당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임대표에게 구로의원에서의 경험은 많은 것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여러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노동건강권’이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아는 계기가 됐다는 것. 이때 만난 많은 환자들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셨어요. 상처를 보니까 평범하지 않아서 캐물었더니, 아이가 그 나이에 벌써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를 불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 그 배경에는 역시 산업재해가 있더군요. 아이 아버지가 구로공단 공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쳤어요. 회사를 그만둬야 했지요.

    보상금으로 동네 떡볶이가게를 차렸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내에게 경제권이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집에만 있던 아버지는 자괴감에 빠져 알코올에 의지했고, 결국 폐인이 된 거죠. 부인이 도망간 뒤에 할머니가 남은 손자를 키웠는데 아이가 그만 탈선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죠.”

    결국 아버지 대의 운명이 아이에게 대물림된 셈이었다. 한번의 산업재해로 시작된 악운의 사이클이 이 아이를 지나 다시 그 아이의 아이에게도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물정에 눈 떠가던 청년의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국 노동자들은 너무 착해요

    “그렇지만 구로의원은 ‘의원’이었어요. 매일 환자를 보면서 직업병 연구와 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새로운 직업병이나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뚝심 있게 완결해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원진녹색병원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겁니다.”

    원진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산재시설 설립기금 90억원을 들여 만든 병원. 임대표는 병원 설립 준비작업에서부터 함께 했다. 주로 산업재해를 당한 근로자들의 치료를 담당하지만 지역 의료기관의 역할도 함께하겠다는 청사진도 마련했다. 결국 1999년 6월 산업의학과를 중심으로 9개 진료과목과 53개 병상을 갖춘 병원이 탄생했다.

    기반은 마련됐지만 오히려 산재추방운동의 열기는 이전보다 식었다는 것이 임대표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선 시민·사회단체의 결집력이 떨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회적 관심은 어느새 산재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며 눈을 돌렸다고 임대표는 지적한다.

    “우선 언론에서 기사를 다루는 횟수도 상당히 줄었어요. 예전 같으면 크게 이슈가 될만한 사건들도 보도가 되지 않으니까요. 늘 같은 얘기가 반복된다고 생각하더군요. 실제로는 전에 발생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 불거진 것인데 말입니다.”

    노동조합운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역설적으로 ‘산재는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사업장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한 원인이 됐다고 임대표는 진단한다.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노동조합이 1차 역할을 담당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오히려 본질이 희석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아직도 건강보다는 급여를 근로조건의 핵심으로 두고 있습니다. ‘건강한 환경에서 자신의 몸에 해가 가지 않도록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몸이 좀 상하더라도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권리’에 가까운 거죠.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에 상황은 더 악화됐습니다.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인원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생산라인의 속도가 빨라졌죠. 교대시간 등 노동강도나 환경도 열악해졌고요.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은 악화된 노동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가 IMF 사태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기업이 위기를 겪고 구조조정 바람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작업환경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노동자 스스로 고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곧 산재이고 직업병이라고 인식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너무 착하다고 할까요.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1999년 11월경 대기업 공장에 근무하던 한 환자가 유기용제 중독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이건 회사와는 관계없다.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 환자의 당부였다. 그러나 검사를 해보니 분명한 직업병이었다.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공장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회사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재판에 들어가야 했다. 임대표는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면 절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근골격계 질환’이 대표적인 경우다. 어깨결림증, 요통 등 인체의 근육과 골격에서 나타나는 질환을 통틀어 일컫는 근골격계 질환은,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은행창구 근무자나 전화안내원, 자동차 조립라인 근무자, 조선소 작업자 등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임대표가 소장을 맡고 있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국내 노동자의 10∼30%가 이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흔히 ‘그게 무슨 병이냐’고 말합니다. 회사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한 해 근골격계 질환으로 인한 손해가 500억달러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직업병 환자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근골격계 질환이에요. 프레스에 손이 잘려나가고 쇳물에 화상을 입을 일이 없는 사무직 노동자들도 늘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거죠.”

    원진녹색병원은 지난해 6월 근골격계 질환센터를 열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임대표는 이런 ‘잠재적 직업병’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한다.

    “‘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신체에 작은 이상이 생기면 이것이 직업병이 아닌지 전문가와 상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 동료들은 어떤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상이 생겼는지 노동자 스스로 작업현장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체크할 수 있도록 노사가 합동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회의를 정례화해야 합니다. 불만을 얘기하면 들어주는 분위기, 작은 일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마련되면 직업병의 50%는 줄어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통계상 OECD 가입국가 가우데 우리나라가 산재 발생률이 가장 낮은 나라라는 점입니다. 독일이 우리나라보다 4배나 많죠.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간단합니다. 외국에서는 산재라고 인정되는 질환이 우리나라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겁니다.”

    특히 최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는 추세다.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현장에 달려가 보면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이라고 임대표는 말한다.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맡겨지다 보니 정작 산재에 노출돼 있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 그러나 이들의 경우 정기건강검진 등의 점검도 부족할 뿐더러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일은 언감생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대부분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조직 노동자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지난 1월의 일이다. 직업병으로 허리에 이상이 생겨 1년 동안 집에서 쉬고 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병원을 찾았다. 유족들에 따르면 환자는 요양에 들어간 지 수개월 후 회사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원래 직업병은 깨끗이 완치되기 어렵습니다. 이 환자가 앓았던 근골격계 질환은 특히 더 그렇죠. 그렇지만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은 완전히 나은 다음 복귀하라고 권했습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겠죠. 그렇지만 1년이나 누워있는 동안 증세는 오히려 악화됐습니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다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환자는 아파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회사와 공단은 꾀병이라고 생각했다. 말다툼과 실랑이가 벌어지고 그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환자는 복귀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긴 시간 쉬면서 느낀 무기력, ‘내가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봅니다. 실제로 상당수 산재 피해자들이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지난해만도 1년에 14명 내외의 산재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보고된 숫자만 그 정도입니다. 이 경우 과연 누구 책임일까요?”

    현재의 피해자 지원방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러한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임대표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의사나 상담전문가가 꾸준히 상태를 체크해 가장 적절한 복귀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근로복지공단이 채택하고 있는 관리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임대표의 지적이다.

    “어쩌면 근로복지공단 담당 직원에게 산재 피해자는 서류상에 존재하는 일거리에 불과했을 겁니다. 보상비와 생활비 내주고, 진단서 제출받으면 끝나는 관계죠.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맺으면서 꾸준히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현장에 복귀할 준비가 됐는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근로복지공단은 그렇지 못합니다. 직업병 환자들이 직접 서류를 만들어 신청해야 할 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원진녹색병원은 2000년 의약분업과 관련해 병원들이 문을 닫았던 기간에도 환자를 돌보았다. 우선 산재환자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세워진 병원이기 때문이었지만, 의사로서의 의무라는 공감대가 의사들 사이에 형성됐기 때문이었다고 임대표는 회상한다. 하루 수백명의 갈 곳 없는 환자들이 좁은 병원바닥에 장사진을 쳤고, 다른 의사들은 뜻에 동참하지 않는다며 비난의 화살을 날렸지만 그들은 끝내 병원을 지켰다.

    얼마 전 국내 유수의 한 대학병원이 산재요양기관 신청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해 도마 위에 올랐다. ‘산재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노동부가 인정하는 요양기관 자격은 매년 새로 신청해 자격을 갱신해야 하는데, 그 병원은 이를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산재환자는 돈은 안되면서 병실만 차지하고 있으니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다른 의사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의사이고 그들이 느끼는 고민이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제가 하루 9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나가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사명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임대표는 말했다. 의사들에게 적은 보수나 초인적인 환자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임대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느새 만난 지 십년이 넘었다는 젊은 의사 임상혁과 그의 환자 최성규. 두 사람이 부여잡은, 이황화탄소의 끔찍한 독성 때문에 떨리는 두 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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