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타임’의 오만과 편견

한국은 별볼 일 없는 나라?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4-09-06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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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의 전통과 수백만의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타임’이 최근 게재한 한국 관련 기사들이 왜곡, 과장됐다는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시사잡지의 교과서’라는 타임의 권위는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연예기획사 사이더스HQ의 박필원 매니지먼트 팀장.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에게 7월24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담당하고 있는 인기그룹 god가 100일 휴먼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어 마음은 분주했지만, 회사에 출근해서 시사주간지 ‘타임’을 받아들 때는 다소 들뜨기도 했다. 그 주(7월29일자) ‘타임’ 아시아판의 커버인물이 god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 뒤에 붙은 물음표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사진 잘 나왔네’라고 생각했죠. 바쁘니까 꼼꼼히 읽어볼 생각도 못했고요.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서 ‘기사 읽어봤냐’며 난리가 난 거예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Flying Too High?(너무 높이 날았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문제의 커버스토리는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한국 연예산업의 금품수수 비리를 총 일곱 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Paying To Play?(노래 부르기 위해 돈을 낸다?)’라는 메인 기사는 한국 가요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제한된 미디어 출연 기회가 총체적 비리를 불렀다고 결론 내리고, MBC ‘시사매거진 2580’의 관련보도를 인용해 구체적인 금품거래 사례를 소개했다.

    “물론 연예계 비리가 터져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표지에 쓰인 god가 마치 비리에 핵심적으로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촬영할 때는 ‘아시아 한류 열풍의 주역 한국 대중음악 붐’에 관한 기사라고만 했거든요. 큰 공연을 여는 god를 소개하고 싶다는 얘기였어요. 한마디로 속은 겁니다.”

    사태를 파악한 사이더스HQ 법무팀은 곧바로 대응작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우선 ‘타임’ 아시아 홍콩 본사에 구체적인 취재경위를 묻는 질의서를 발송한 상태. 법무팀 관계자는 “이번 일이 감정으로 치닫는 것은 원치 않는다. 냉정하게 법적인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상대가 세계적 명성을 지닌 ‘타임’이다 보니 준비기간이 필요하겠지만, 적당히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What’s printed in Time is Fact(타임에 나온 것은 사실이다)!’ ‘타임’의 기자들이 자사 기사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말은, 1923년 창간되어 전세계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이 시사주간지를 상징하는 슬로건이나 다름없다. 편집과정에서 3단계, 이후에도 전문 조사역이 필자들과 함께 기사에 나오는 데이터와 자료, 고유명사는 물론 그래프에 나오는 숫자 하나하나까지 2단계에 거쳐 추가로 확인한다는 ‘타임’의 막강한 검증시스템은 다른 어느 언론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들만의 강점이라는 자랑이다. 이러한 전통을 갖고 있는 세계 정상의 언론 ‘타임’이 ‘동방의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취재원을 ‘속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이더스HQ에 따르면 표지촬영은 지난 7월3일에 이루어졌다. ‘타임’의 도널드 매킨타이어 서울지국장이 회사 본부장에게 연락해 촬영을 요청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콘서트를 앞두고 바쁜 상황이었지만 지난 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뮤직 어워드에 다녀오는 등 국제무대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god 입장에서는 콘서트 홍보에 좋은 기회가 될 거라 판단했다.

    1시간30분 가량 이뤄진 사진촬영 동안 ‘타임’ 서울지국에서 나온 인턴기자가 진행한 인터뷰는 대부분 앞으로의 계획이나 음악적인 내용과 관련된 내용이었을 뿐 연예비리 이야기는 없었다고 멤버들은 말한다. 촬영은 즐겁게 마무리됐다. ‘날아다닐 만큼 잘 나가는 god’가 촬영 컨셉트이기 때문에 멤버 중 한 사람인 윤호영이 천사날개를 단다는 설정이었다.

    100일 콘서트에 들어간 7월 중순, ‘타임’에서 다시 ‘공연사진을 찍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도저히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지만 이미 표지까지 찍은 마당에 거절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박팀장의 말이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다른 인턴기자 두 명이 사진작가와 함께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갔다. 이때도 역시 연예비리 관련 질문이나 설명은 없었다.

    god 멤버들 가운데 가장 흥분한 것은 윤계상이었다. 자신이 ‘We are only Tantara(우리는 단지 딴따라일 뿐)’라고 말했다는 기사 본문 내용 때문이다. ‘딴따라는 뜨내기 건달(itinerant lounge lizard)이라는 뜻의 한국 속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였다. 윤계상은 물론 멤버 누구도, 사진촬영 내내 같이 있던 박팀장도 그런 말을 쓰거나 들은 기억이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으므로 정확하게 기억 못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팀장은 “그런 말을 할 만한 대화주제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명백한 작문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타임’ 아시아는 “god가 역동적인 한국 대중음악산업을 가장 잘 대표하는 밴드라고 생각해 커버에 게재했다. god를 공격하려는 의사는 없었다”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있다. 매킨타이어 서울지국장은 “‘타임’은 기사에 있어서 정확성을 견지했고, 특히 god에 대해서는 조사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언급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취재 경위 등에 대해서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표지도, 도입부도, 끝맺음도 모두 god입니다. 기사 한가운데 ‘연루되지 않았다’는 한 문장을 쓰긴 했지만 외국 독자들은 모두 god가 비리의 주범인 줄 알 게 당연하잖아요. 만약 미국 대중음악계의 비리를 다룬다면 관계 없는 사람을 표지로 올릴 수 있었을까요?”

    god 팬클럽 측의 반응이다. 한편 박필원 팀장은 “기사 자체보다도 말 한마디 없는 것이 더 서운하다”고 말한다. 꼭 사과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설명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사이더스HQ 측은 애초부터 ‘타임’이 자신들을 속일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것은 ‘타임’ 아시아 측에서 취재경위서를 보내오면 알 수 있지 않겠냐는 것. 그러나 서울지검 강력부의 발표로 연예비리 사건이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 7월12일 무렵이었음을 감안하면 표지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비리보다는 한류에 비중을 둘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경우 기사주제가 중간에 바뀌었지만 그같은 사실을 god에게는 알리지 않은 셈이 된다. ‘딴따라’ 발언의 경우 기사 작성자인 매킨타이어 지국장이 직접 들은 것이 아닌 만큼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대학원생 인턴기자의 번역전달 과정에서 작문이나 왜곡이 있었던 것 같다고 사이더스HQ 측은 판단하고 있다.

    ‘타임’ 서울지국은 올해 초 정식으로 세워졌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고용된 기자가 한국 기사를 담당했지만, 지난해 일본지국에서 근무하고 있던 도널드 매킨타이어 특파원이 정식으로 부임한 것. 현재 지국장과 함께 2명의 주니어리포터가 일하고 있고, 그때그때 아르바이트 형식의 인턴기자들을 활용해 취재를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인 매킨타이어 지국장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기 때문에 지국장이 직접 하는 주요취재도 상당량은 주니어리포터들의 통·번역을 거친다. 지국장은 이들이 취재해 번역한 내용과 자신의 취재를 종합해 기사를 작성하지만 박스 기사의 경우 주니어리포터가 직접 기사를 쓰기도 한다. ‘타임’ 서울지국의 주니어리포터와 인턴기자는 주로 대학원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공고를 내 모집하고 있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당수가 교포 출신이거나 외국 대학 졸업자들이다.

    오랜 기간 태평양 주변 국가들을 돌며 특파원으로 일했던 심재훈 전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FEER) 시니어라이터는 “특파원에게는 현지에서 좋은 주니어리포터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충분한 취재력이 있거나 언론사에서 정식 훈련을 받은, 능력 있는 기자를 쓰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주니어리포터 한 명을 훈련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는 것.

    ‘타임’ 서울지국 주니어리포터의 능력과 관련해 한 국책연구기관의 중견 연구원은 최근 겪은 달갑지 않은 경험을 기자에게 전했다.

    “최근의 주요 시사이슈에 대해 묻는다며 전화가 왔는데, 질문요지를 알아듣기가 어렵더군요.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한국관련 기본지식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죠. 결국 취재에 응한 게 아니라 교육을 시켜준 셈이 됐어요.”

    얘기를 계속했는데도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것 같자 연구원은 “전화로는 안되겠으니 직접 건너오라”고 청했다. 정상적으로 시사에 관심을 가져온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내용부터 2시간 가량 설명해줬다는 에피소드였다.

    “영어 발음이 미국인 수준인 걸 보고 교포겠구나 생각했죠.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 말을 영어로 잘 옮길 수는 있을지 인터뷰 후에도 계속 걱정되더군요. 상급자 누군가가 핵심이나 가이드라인을 짚어주기는 한 걸까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기사 관련 번역문제에 대해 해당 주니어리포터는 “어릴 때 외국에 건너가 대학을 마친 후 대학원은 한국에서 졸업했다. 전문 통역사는 아니지만 모든 주니어리포터와 인턴기자들이 두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기 때문에 번역이나 통역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높이 날았나’ 기사의 다른 구절에 담긴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기사 중반에서 매킨타이어 지국장은 “한국은 진정한 로큰롤 전통이 없으며, 라디오 방송국이나 레코드 회사에 녹음 테이프를 보내는 가난한 아마추어 밴드의 역사가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은 작업할 만한 음악적 재료가 거의 없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기자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문가나 관계자의 의견을 들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한국의 로큰롤이 40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 대학밴드와 인디밴드 등 웬만한 나라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밴드음악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타임’ 아시아의 홍콩 본사 편집자들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는 한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은 “유감스럽게도 ‘타임’ 아시아 편집자들이나 조사역 가운데는 한국인은 물론, 한국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없다. 서울지국에서 주니어리포터나 인턴기자들이 잘못된 정보를 보고하고 이를 지국장이 그대로 믿고 기사화할 경우, ‘타임’의 막강한 검증시스템도 한국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을 잘못 적은 오류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특정인 주장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교차 확인(Cross Checking)’이라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사를 보도하는 경우 이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취재방법론의 기본. 한 사람의 말에 의존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2월19일 ‘타임’ 미주판에 실린 ‘JUAN QUIXOTE? (후안 키호테?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후안(Juan)’을 ‘돈키호테(Don Quixote)’에 끼워넣어 만든 패러디)’ 기사 역시 한국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보도다. 기사는 “2004년 올림픽 개최지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국의 서울로 옮기는 작업이 은밀히 진행중이며, 여기에는 올림픽을 통해 남북한 통일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자 하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이 나서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올림픽조직위원회(KOC) 백성일 국제부장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난리가 났었죠. ‘LA타임스’ 등 외신 기자들이 KOC에 계속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당연히 상당히 기분 나빠했죠. 혹시 한국이 무슨 장난을 치는 게 아니냐는 눈초리도 있었고요. 남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옆에서 새치기하려는 꼴밖에 더 됩니까.”

    당시 KOC 위원장이었던 민주당 김운용 의원은 “당시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IOC에서는 사마란치 위원장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대단했다. 그 기사 역시 누군가가 고의로 흘린 것이라고 본다. 기사를 쓰기 전에 나에게 확인전화 한 통만 있었어도 사실무근임과 우리 입장을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시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같은 주제의 기사가 나가더라도 한국 측 입장이 반영된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7월 서울·경기지방에 쏟아진 폭우로 21명의 행인이 감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타임’ 아시아 인터넷판의 지난해 7월26일자 서울특파원 발 칼럼 ‘Seoul Searching’은 “유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답변”이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고 당시 서울시가 가동했던 조사팀이 유족들에게 감전이 아닌 익사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이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면 지하철이 물에 잠기는 서울은 어김없이 제3세계를 연상케 한다”며 “내년 월드컵 때 서울을 방문한 팬이나 선수가 수도 서울 길거리 한복판에서 튀겨진다면(fried), 공동개최국으로서 한국의 열기는 쓸려가 버릴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시청 도로운영과의 담당 공무원은 “심지어 한국언론도 ‘거짓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능력부족이나 책임감 부족이라면 모르겠지만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왜곡”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대책이 미비했고 그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죠. 그렇지만 그것과 우리에게는 확인도 없이 ‘거짓말했다’고 기사를 쓰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타임’의 기사가 지적하는 ‘거짓말’은 사고발생 직후 시설전문가 중심의 1차 조사단이 초기에 밝힌 “가슴까지 물이 찬 상황에서 모든 사망을 감전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 이후 서울시는 감전 원인이 지자체가 관리하는 가로등이냐 경찰이 관리하는 신호제어기냐를 놓고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1차 조사단의 목적은 사망원인이 아니라 사고이유를 밝히는 것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조사 이후 감전사 사망자가 추가확인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망원인의 최종 판단이 국과수의 몫이라는 사실은 시에서도 계속 강조했던 것”이라며 “뜻밖의 사고에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유족들의 말만 듣고 보도한 것은 세계 유수 언론답지 못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도 폭우 때 유사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제3세계’라는 표현을 썼는지 궁금하다는 지적도 덧붙여졌다.

    ‘타임’이 한국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나라’로 보는 시선을 갖고 있음은 ‘Seoul Searching’ 시리즈의 다른 기사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이 칼럼에서 한국은 종종 “한편으로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이 독일 나치풍의 실내장식을 한 술집을 즐겨 찾는 수준의 역사교육을 받는” 나라인가 하면(2001년 4월15일자 ‘Back to School’), “경기장 금연을 선언한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가 주식의 ⅓을 갖고있는 담배회사에서 특별담배를 만들어 파는” 나라이기도 하고(2002년 4월6일자 ‘Unsportsmanlike’), “단지 스케이트 종목일 뿐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결과를 두고 흥분하며 반미감정을 불태우는, 마치 옛 동구권 국가처럼 스포츠대회 결과를 경제발전의 척도인 것처럼 여기는” 나라이기도 하다(2002년 2월21일자 ‘Seeing Red’).

    물론 이러한 시선에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외신기자들은 한결같이 “제3자의 시선에서 한국인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약점이나 불합리를 지적하는 것은 한국에도 좋은 일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외국인 특파원과 현지 고용된 기자 중 그 나라 소식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은 오래된 고민이라는 것. 이에 대해 한 외신기자는 “결국 문제는 문화적 편견이다. 특히 한국말을 잘 배우려 들지 않는 서방 출신 외신기자들의 경우 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정확한 질문의 여론조사

    지난해 3월19일자 ‘타임’ 아시아판의 커버기사였던 ‘Sex In Asia(아시아의 성)’는 그 신뢰성이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커버스토리는 한 개의 해설기사와 일본 등 아시아 각 지역의 다양한 성 풍속도를 담은 부속기사, 설문조사 그래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사 자체에는 한국 관련 내용이 없었지만 홍콩 등 5개 지역의 성인남녀 200명씩 도합 1000명을 상대로 이루어진 설문조사에는 한국이 포함돼 있었다.

    ‘오럴 섹스를 해본 적이 있는가’ ‘이제까지 몇 사람과 성관계를 가져보았는가’ 등 성에 관한 민감한 문제를 다루었던 이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단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배우자나 애인 대신 다른 사람과의 성 경험을 묻는 질문. 조사 대상이었던 한국 남성의 65%, 여성의 41%가 경험이 있다고 대답해 남녀 모두 5개국 가운데 1위를 차지한 것이 국내 언론에 인용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사결과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의문이 증폭되자 조사를 담당했던 다국적 시장조사전문기업 아시아 마켓 인텔리전스(AMI)는 설문내용을 공개했다. 문제는 해당 질문의 번역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 홍콩의 ‘타임’ 아시아 본사와 AMI 본사가 작성한 설문지 가운데 ‘Have you ever been unfaithful?’이라는 영어 질문을 우리말로는 ‘귀하는 배우자나 파트너(애인 등)에게 충실하지 않은 적이 있으신가요? (외도 등)’로 옮겼다는 것이 AMI 한국지사의 설명이었다. “영어의 ‘unfaithful’을 단순히 ‘충실하지 않은’으로 번역해서는 뜻이 쉽게 전달되지 않아 ‘(외도 등)’이라는 구절을 덧붙였다”는 것. 문제는 이 한국어 질문을 받은 조사 대상자가 외도가 아닌 다른 불충실했던 경험을 갖고 있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확률이 있다는 사실이다.

    “글쎄요. 길을 가다가 이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피조사자가 설문이 목적한 바대로 오직 외도만을 기준해서 판단했을까요? 괄호를 덧붙인 것은 잘한 일이지만 질문의 목적성을 충분히 살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조사대상, 방법, 오차 등 통계기사의 필수요소들이 기사에 없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군요.”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사회조사학)의 말이다. 이런 설문이었다면 조사결과를 전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 설교수는 “긍정과 부정을 떠나 한국인들의 성관념 수준이 외국인들에게 사실과 다르게 알려졌으리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Sex in Asia’를 비롯해 최근 ‘타임’이 다룬 한국 관련 기사들 상당수가 선정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지영 비디오 사건’을 다룬 지난해 1월1일자 ‘Sex, Lies & Internet’, 인터넷 성인방송의 섹스 쇼에 관한 지난해 3월12일자 ‘Shock Jock’, 주한미군 기지촌의 외국인 여성접대부 문제를 다룬 올해 8월12일자 ‘Base Instinct’ 등 성에 관련된 기사들을 비롯, 성형수술, 원정출산, 조직폭력 등의 기사들이 정치나 경제, 북한문제 못지않은 비중으로 ‘타임’을 장식했다.

    이와 관련해 심재훈 전 시니어라이터는 “냉전이 끝난 1990년대부터 미국 시사잡지에서는 ‘적(敵)’이 사라진 자리를 ‘선정주의’로 메우고 있다. 몇 년 새 미국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팔리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한다. 심씨는 “기사를 다소 과장해서 쓰는(Overwriting)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미국 언론의 위기”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국내 대기업 홍보실의 한 외신담당 간부는 “최근 ‘타임’에서 단편적인 부분을 부풀려 과대포장하거나 선정적인 기사들을 늘린 것은 사실”이라며 ‘타임’ 미국 본사에서 만난 한 중견기자의 이야기를 전했다. “‘타임’이 워너와, 다시 AOL과 합병하면서 예전의 정통파 기자들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

    김승수 전북대 언론심리학부 교수는 “이제는 ‘타임’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외신이 객관적이라거나 외신기사는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믿음’을 버릴 때가 됐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오보가 없는 언론매체는 세상에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만이 ‘외신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는 거죠. 외신도 돈을 벌어야 하고, 장사를 생각하고, 판매부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타임 신화’인 셈이죠.

    우리 스스로 자신이 없을 때는 바깥의 권위에 의지하게 됩니다. 군사독재 시기 국내언론이 할 말을 다 못하던 무렵 외신에 입혀진 권위가 아직도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있는 그대로 외신을 보고, 잘못된 것이나 문화적 편견이 있으면 당당히 지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의 지식인들은 타임의 미몽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신의 한계를 감시하는 언론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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