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마음을 비우고인생을 낚는다

  • 예춘호전 국회의원

    입력2004-09-13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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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낚시를 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낚시는 먹을거리를 얻는다는 점과 더불어 고기를 낚을 때의 만족감에 그 매력이 있다.

    낚시에 빠져드는 동기나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취미가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우연한 경험을 통해 몰입할 수도 있다. 또한 건강을 위해서 바람을 쐬러다니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바다가 좋아서 바다낚시, 산이 좋아서 계류낚시에 관심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 흥미의 원천도 각자 다르다. 어신(魚信:물고기가 입질할 때 낚싯대에 전해지는 감촉)을 받은 순간의 스릴이 계기가 된 이도 있지만 바다나 강가에서 모처럼 느끼는 해방감, 자연 감상 등에 매력을 느끼는 이도 있다. 같은 낚시를 하면서도 낚시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는 이처럼 천양지차다.

    낚시를 하다보면 대물을 낚거나 예상 밖의 호황을 맛볼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낚시꾼은 항상 그런 기대감을 갖고 출조에 나선다.

    낚시를 즐겁게 하면 즐거운 취미라는 목적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고 나름대로 수양도 된다. 어탁을 떠보는 것도 좋고 낚시터 풍경을 그리거나 시나 수필 등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대상어의 습성이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낚시를 즐기는 것도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낚시는 혼자 즐길 수도 있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면 더욱 좋다. 취미는 친구를 얻는다는 말도 있듯이 취미가 있는 곳엔 동호인이 있기 마련. 뜻밖에 대어를 낚았던 일, 허탕을 치며 고생하던 일, 낚시터의 그림 같은 풍광, 조행 길의 이런저런 일 등이 모두 낚시의 즐거움이 된다.

    낚시는 대물이든 잔챙이든 각각 낚시하는 맛이 있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낚시 기법도 많이 변했다. 어떤 때는 특정 낚시 기법이 대유행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들이 한다고 따라갈 일은 아니다. 다양한 낚시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참된 낚시인의 자세다.

    갯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일찍부터 낚시의 맛을 알았다. 내게는 낚시가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었다.

    수십년 동안 낚시를 한 지금이라 해서 낚시에 도통한 것도 아니고 이론이나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낚시 그 자체가 좋고 쉽게 자연에 접할 수 있으며, 무념의 경지에 빠져 세속적인 잡념에서 초월할 수 있어 낚시에 매달리는 것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1960년대에는 서울의 경우 근교의 붕어낚시가 고작이었다. 시내 몇 곳 안되던 낚시가게가 주도하던 낚시모임을 따라 주말에 당일치기로 출조했다. 전세버스에 40여 명의 회원들이 오밀조밀 자리하여 통행금지가 풀리기 무섭게 한강을 건너 두 시간 정도면 당도하는 낚시터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중에는 정계에서 막 은퇴한 이재학(전 국회부의장)선생이 계셨는데 이선생은 당시 낚시꾼이 생각도 못할 정도의 동서양 낚시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이선생은 틈만 나면 시내 다방에 앉아 조우(釣友)들에게 담수낚시, 바다낚시, 플라이낚시, 루어낚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그러다가 서로 눈빛이 마주치면 기차 편이나 버스 편을 이용하여 붕어를 낚으러 떠나곤 했다.

    어느 날 낚시터에서 담소하던 중 당시 환상의 낚시 대상어인 돌돔 이야기가 나와 제주도로 돌돔낚시를 가기로 했다. 각종 갯바위 장비에다 복장 등 준비에 며칠이 소비되었다. 나는 당시 성능 좋은 장구통릴을 입수했다. 그런데 사용법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장구통릴을 투박한 3칸 반짜리 갯바위대에 부착한 뒤 멀리 던지는 연습을 하기 위해 뚝섬까지 가곤 했다.

    그런데 막상 출조일이 다가오자 동행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재학 선생을 비롯해 나와 정선생 세 명만이 가게 되었다. 우리들이 제주도로 출발한 것은 돌돔낚시 철을 벗어난 11월 초였다. 우선 본 섬에 가서 선편과 미끼 등을 준비한 뒤 다음날 통통배를 대절하여 관탈도에 닿았다. 다소 바람이 강했던 모양으로 멀미가 심해 섬에 내렸을 때 나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한 가마나 되는 밑밥용 소라고동은 당시 60대 후반의 이재학 선생이 혼자서 꿰고 찧고 해서 준비해 놓았다. 해지기 전에 낚시 채비를 넣어야 했고 야영준비와 식사도 해야 했기에 그저 바쁘기만 했다. 허겁지겁 준비를 끝냈을 때 수평선 저 멀리로 붉은 태양이 빠져들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밤 10시가 채 안되었는데 지친 탓인지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끝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공군 장군복을 입고 있었기에 추위는 몰랐지만 발끝이 시려서 잠을 깨고 말았다. 벌써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때까지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월남담요를 발에 감고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 4시경 잠을 깬 나는 미끼를 갈아 끼우고 낚싯대를 응시했다. 밤을 꼬박 새운 두 사람은 갯바위에 기댄 채 코를 골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낚싯대가 수면으로 내려꽂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낚싯대를 세워봤지만 오히려 내 몸이 빨려들 것만 같았다. 당황한 나는 토막잠을 자고 있는 두 분을 깨웠다. 정선생이 뛰어와 낚싯대를 받쳐주었고 이선생은 뜰채를 펴고 있었다. 몇 번인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조금씩 끌어당겼지만 만만치가 않았다. 10여 분 실랑이한 끝에 간신히 고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세 번 공기를 먹여서 벼랑 끝으로 당겨왔다. 이선생이 뜰채를 두세 번 갖다댔지만 돌돔은 그때마다 교묘하게 빠져나가더니 마침내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선생이 자기 실수라며 몹시 미안해 하다가 “예의원, 우리들이 다 함께 얼굴을 봤으니 낚은 걸로 합시다”라고 해 우리는 파안대소했다. 그러나 이선생은 나를 위로하면서도 나보다 더 애석한 눈치였다.

    서둘러 채비를 던져놓고 대끝을 응시하고 있는데 어느새 먼동이 트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일몰 못지않은 장관이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이 갑자기 어신이 느껴졌다. 먼저 이선생이 돌돔을 낚아 올렸다. 우리들은 조심조심 호흡을 맞추었다. 고기를 뜰채에 담는 순간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여태까지 겪었던 온갖 신고가 일시에 가시는 느낌이었다.

    햇살이 바다 위에 퍼지기까지 이런 감격이 몇 번 더 있었다. 이선생이 두 마리, 정선생이 두 마리를 낚았지만 나에겐 운이 따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입이 바싹바싹 타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초릿대가 수면으로 곤두박칠쳤다. 나도 모르게 힘찬 채질을 했고 두 분이 달려들어 고기를 끌어냈다. 줄무늬가 선명한, 말로만 듣고 그림에서만 보던 환상의 고기 돌돔을 마침내 손에 쥐었을 때의 희열과 감동은 정말 대단했다.

    1960년대에는 제주도 어디에서든지 감성돔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외도나 차귀도, 모슬포 쪽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섬이나 서귀포 쪽에서도 곧잘 나왔는데 그래도 감성돔하면 추자도를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어느날 우리들은 벼르고 별러서 추자도 감성돔 원정에 나섰다. 마침 음력설을 앞둔 대목이어서 비행기 편이나 배 편 모두 몹시 붐볐다. 서울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지만 추자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새벽같이 통통배를 타고 푸랭이섬으로 향했다. 한 시간쯤 걸려 현지에 도착했는데 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벼랑을 타야 했다.

    가지고 간 짐은 현지인들이 운반해 주었지만 낚싯대만 들고도 가파른 벼랑을 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포인트에 도착했지만 맨몸으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벼랑에 붙어 세찬 바람을 받으면서 파도가 내리치는 후미진 골에 4칸대로 미끼를 쳐넣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번 자리를 옮기며 입질을 노렸으나 첫 날은 고생만 실컷 했을 뿐 누구 하나 어신을 받지 못했다.

    다음날은 먼동이 틀 때 가파른 절벽을 타고 포인트를 찾아들었다. 그날 따라 운이 좋았던지 첫 투의 찌가 서기 바쁘게 어신을 받았다. 한참 실랑이 끝에 60cm 전후의 대형 감성돔을 건져올렸다. 옆자리의 배사장도 대형 벵에돔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었다. 20m쯤 떨어진 벼랑에서 이재학 선생 역시 한 마리 걸었다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어느 초봄에 이재학 선생, 최경씨와 함께 강릉에 있는 심동섭씨 안내로 연곡천을 찾았다. 그가 말하는 고기가 산천어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고, 계류낚시의 가능성 여부도 궁금해서 총총걸음으로 강릉으로 출발했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연곡천을 찾았다. 눈 녹은 새하얀 물이 강심 빽빽히 박혀있는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흐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우리는 날쌔게 포인트로 생각되는 바위에 올라서서 준비해간 연어알 미끼를 던져 넣었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로 어신이 있었다. 끌어낸 고기는 책에서만 보던 산천어였다. 남달리 우리 고유어종과 생태 등에 관심이 많던 이선생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후 나는 본격적으로 계류낚시에 입문했다. 계곡이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만 빼고는 전국의 계곡을 찾아다니며 세월을 낚았다. 연곡천말고도 진부령의 북천, 한계령의 오색천, 양양의 남대천, 강릉의 남대천, 삼척의 오십천에도 산천어가 서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계곡들은 울적한 심사를 달래주는 좋은 휴양지 역할을 했다.

    이선생은 은어 놀림낚시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그것은 플라이낚시 이상으로 여러가지 장비를 요하는 낚시인데 그 당시에는 낚싯대, 뜰채, 걸통, 살릴통, 줄, 바늘, 코걸이, 바지장화, 신발 등 어느 하나 구할 수 없었다. 단지 바다 민대 하나만 들고 밀양, 섬진강 등을 찾아다녔으니 애당초 풍성한 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무렵쯤 알게 된 것이 바로 견지낚시다. 견지낚시는 견지에 낚싯줄을 감고 이것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물고기를 낚는 우리 전통 낚시법. 보급된 지 500년이 넘었다고 한다. 견지낚시는 물에 들어가서 하는 흘림낚시와 배에 앉아서 하는 앉음낚시(또는 배낚시)의 2가지로 구별된다. 이 밖에 챌낚시, 겨울낚시(구멍치기) 등 특수한 것도 있다

    이선생과 나는 1970년대 초 수소문 끝에 견지대와 부수장비를 준비하여 이렇다할 지식도 없이 막 완공된 잠실대교 아래 견지낚시터를 찾았다. 그러나 경험부족 탓인지 고기 얼굴을 구경할 수 없었다.

    아마 붕어낚시만큼 정감 있는 낚시도 없을 것이다. 또한 붕어낚시야말로 가장 동양적인 낚시로 우리 정서에 잘 어울린다. 붕어낚시를 하다보면 주위 경관에 빠져 낚시 친구들과 담소도 하며 고기와 대화라도 할 수 있을 듯한 느긋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붕어낚시는 비교적 쉬운 편이어서 낚시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적격이다.

    바다낚시도 어종에 따라 각양각색의 낚시가 가능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다소 위험한 대물 위주의 낚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재미도 보고 생선맛을 즐기는 편이 바람직하다.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대천 근교의 섬을 찾는다. 비용이 적게 들 뿐더러 여건이 맞을 때에는 50cm 이상의 숭어를 하루에 20마리 이상 낚을 수 있다.

    낚시경험이 쌓이고 기술이 향상되면 1박2일로 거제, 남해, 여수, 녹동, 마량, 완도 주변에서 바다낚시를 시도해 볼 만하다. 안전을 도모하고 풍성한 결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두세 명이 한 조가 되어야 한다. 5월 한 달은 마리 수는 적어도 산란 감성돔을 노릴 수 있고, 8월부터 추워지기까지는 25cm 전후의 2년생 감성돔을 실컷 잡을 수 있다.

    나는 3, 4명의 낚시 친구들과 함께 12월에서 4월경까지는 감포나 구룡포에 출조하여 열기낚시를 즐긴다. 또한 방파제 인근에서 학꽁치나 망상어를 잡아 싱싱한 회를 즐기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여울 견지낚시가 좋다. 낚싯대는 쓸만한 것으로 두 대, 낚싯줄은 가급적 좋은 것을 준비하자. 물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가족과 함께 단양, 충주 조정지댐, 인제 내린천, 홍천강 등으로 출조하면 물놀이도 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할 수 있다.

    낚시 기법은 고기의 습성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첫째가 감, 둘째가 일기, 셋째가 포인트와 채비라 한다. 러시아의 작가 악쇼노프가 ‘조어잡기’라는 낚시고전을 통해 남긴 열여섯 가지 낚시 기법은 기억해둘 만하다.

    ①낚싯대를 능숙하게 만들고 고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곧고 가벼워야 하며 끝은 탄력이 있되 부드러워야 한다. 낚싯줄은 딱딱하지 않아야 하며 원줄과 목줄은 곱게 묶고 바늘은 예리해야 한다. 미끼는 살아있는 것을 쓰되 채비는 균형이 잘 잡혀야 한다.

    ②좋은 날씨와 때를 잘 이용해야 한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새벽이다. 이 시각은 물이 불투명하고 고기가 적극적으로 대담하게 미끼를 먹는다. 밤이 낮보다 입질이 좋고, 비오는 날과 추운 날에는 새벽낚시를 할 필요가 없다.

    ③고기가 어느 곳, 어느 계절, 어떤 날씨에 잘 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④낚시인은 가능한 한 조용하게 움직여서 고기가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⑤처넣을 때는 물을 치지 않아야 하며 다소 먼 곳에 던지고 조용히 끌어 당겨서 원하는 곳에 안정시킨다.

    ⑥필요 없이 낚싯대를 자주 올리지 않아야 한다.

    ⑦많은 낚싯대를 사용하지 말라.

    ⑧챔질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는데 입질을 빨리 읽고 강하지 않게 다소 위쪽 방향으로 채야 한다.

    ⑨낚싯대를 물 위에 놓거나 손잡이가 물에 젖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⑩낚싯대 끝에서 찌까지의 원줄이 너무 많이 수중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며 특히 원줄이 길 때는 주의해야 한다.

    ⑪고기는 힘을 다해서 올려선 안된다. 적은 것은 입이 찢어져서 빠질 수 있고 큰 것은 줄이 끊어지며 낚싯대가 부러지기도 한다.

    ⑫뜻밖에 큰 고기가 걸려 반대방향으로 돌진하여 대를 세울 수 없거나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되면 낚싯대를 수중에 던져야 한다. 낚싯대가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⑬대어를 걸었을 때 낚싯줄을 잡아선 안된다.

    ⑭걸린 고기가 수초 안에 들어가면 끌어당기지 말고 오히려 줄을 풀어서 스스로 수초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⑮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대를 다 써서 깊은 곳 낮은 곳을 모두 더듬고 가지고 온 미끼를 다 써보기 전에는 장소를 옮기지 말라.

    고기는 8월과 9월에는 반드시 깊은 곳에서 헤엄치고 그 외에는 얕은 곳을 다니지만 일기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10년이 흘렀다. 나는 대학입학을 앞에 둔 아들과 대학졸업반인 딸에게 인생을 말해줘야 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렌즈를 갈아 생활한 철학자 스피노자를 말해주었다. 내가 아들에게 품는 소망은 노동하는 철학자, 참 신앙을 가진 평신도가 되는 것이다.

    ‘잘살고 싶다’면서 법대를 지망했던 나를 근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을 이제야 약간 이해할 것 같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고전들은 사십여 년이 지나면서 누렇게 찌든 고서(古書)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그 책들은 ‘주인님은 돌아가셨지만 나를 버리지 말고 읽어주세요’ 하면서 내게 사정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했다.

    십년 전 나는 사무실 지하서고에 그 책들을 가져다놓고 굳은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돋보기를 쓰고 확대경까지 동원해서 한장 한장을 섭렵해 갔다. 때묻은 ‘쿼바디스’ 속에서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 십자가에 매달린 신도들을 보고 있었다.

    ‘테스’가 갇힌 감옥 위에 검은 깃발이 날리고 있기도 했다. 아버지의 책 외에 나는 청계천의 총판, 중고서점, 시내의 대형서점을 다니면서 수집한 몇 천권의 책들을 추가시켰다. 아버지의 책 마지막 장에 난 이렇게 써넣었다.

    ‘나의 아들아! 할아버지가 사랑하던 책을 아버지가 읽었다. 낡은 책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이 책을 읽어 영혼을 풍성하게 했으면 한다. 옷보다 몸이 중요하듯 재물보다 정신이 진짜란다.’

    아버지의 의식화 교육은 내 직업적 태도와 시선에 영향을 미쳤다. 4·19 때 총 맞아 죽은 구두닦이 소년의 얘기는 변호사가 되어 피고인의 낮은 자리로 함께 내려가게 했다. 나는 빠삐용 같이 절대고립의 상태에서 신음하는 죄수를 자유의 땅으로 건네다주는 뱃사공이 되고 싶다.

    1아버지는 수줍게 원고지를 메우고는 책장 속에 감추어두곤 했었다. 나도 그렇게 됐다. 나는 매일 내가 겪었던 일들을 정직하게 쓴다. 그리고 그것들을 장 깊숙이 숨겨두고 있다. 나만이 보고 느끼고 쓸 수 있는 것을 그냥 내 방식대로 쓰는 그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글짓기 대회장에서 아버지께 들은 ‘가장 정직하게 마음을 그려내라’는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산 소시민이었다. 아버지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로 스며들게 되어 있다. 성경 속의 탕자처럼 잠시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국은 돌아오게 됐다.

    나의 사무실 뒤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다. 지난해 앞집 이삿짐센터 주인이 거기에 심은 누런 호박 한 개를 내게 선물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그 조그만 땅에 핀 보랏빛 나팔꽃처럼 가슴 시린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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