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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베이징 속의 시골’ 후통(胡同) 기행

  • 권삼윤·문화비평가 tumida@hanmail.net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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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축조한 만리장성과 50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동양 최대의 톈안문(天安門) 광장, 베이징에 들른 조선조 선비들이 서책과 지필묵 등을 사면서 청조의 문화와 접했던 ‘베이징의 인사동’ 리우리창(琉璃廠), 쯔진청 동쪽의 고급 상가와 드넓은 보행자 거리를 끼고 있는 왕푸징 거리 등 볼거리와 명소가 한둘이 아니다. 때문에 빡빡한 일정으로 베이징을 찾은 외국 관광객은 이들을 한번 둘러보기에도 벅차 그중 겨우 몇몇만 보고 떠나기 일쑤다.

700년 동안 왕도 노릇을 했고, 그 사이에 몇 차례 겪은 왕조의 변혁기에도 궁궐의 주인만 바뀐 터라 베이징의 도시 구조와 건축물들은 이렇다할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다. 때문에 베이징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서민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골목과 주거공간들을 지금껏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대표적 공간이 후통(胡同)이다.

은신 혹은 애정행각의 공간

흔히 ‘주거지역에 있는 좁은 골목’이라 번역되곤 하는 후통은 몽골어로 우물(井)이란 뜻의 ‘후툭’에서 유래했다. 물이 귀한 메마른 땅을 터전 삼아 유목생활을 영위하며 살던 몽골인들은 우물을 파고 그 주위에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는 전통을 갖게 됐는데, 원 왕조가 지금의 베이징을 ‘대도(大都)’라 부르며 천도하자 몽골인들 또한 남하해 왕성 주위에 후통을 건설한 것이다. 그때가 원의 태조 쿠빌라이 칸의 치세(1285)였으니 후통의 역사도 어언 700년을 헤아린다. ‘베이징’이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이 명의 3대 황제 영락제 때(1403)이고 보면 후통의 역사는 베이징의 그것보다 118년이나 앞선다.

후통은 몽골족 치하에서 조성됐지만 명·청 시대에도 그대로 살아남아 청나라 말기(19세기 초)에는 성 안에 1200여 개, 성 밖에 600여 개에 이르렀고, 1980년대 후반에는 도합 6000개를 헤아릴 만큼 ‘성황’을 이뤘다. ‘후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만도 1316개나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국의 농촌을 무대로 한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펄 벅은 ‘베이징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에서 1900년대 초 베이징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베이징은 보석과도 같은 도시였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꾸며졌고, 오랜 세월과 역사로 찬란한 금박을 입힌 것처럼….”

일제하의 베이징에서 1년 동안 살았던 조선의 문인 한설야는 ‘옌징(燕京)의 여름’(1940)이란 글에서 “궁성·관아·주택 및 도로 등 제반 설계가 완벽에 가까워서 우리 조선처럼 이미 있던 집을 파헤치고 새 길을 내는 일은 하지 않고 건물의 외양만 조금 손질해도 아주 번듯한 새 거리가 되오. 북경의 외국인 거류지나 근대식 신시가지도 파헤치고 지은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손질하여 만든 것이니 중국의 도시계획 기술은 그저 놀라운 따름”이라며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후통이 밀집한 지역은 왕궁인 쯔진청 주위, 다시 말해 구시가지다. 그 좌우를 이루는 동·서 면에는 왕실 측근과 고관대작들이, 남·북 면에는 상인과 일반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집은 사각형태의 쓰허위안(四合院)이 주류를 이뤘고, 집의 크기는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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