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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취재

‘주먹’은 가고 ‘돈’이 말한다.

‘야인시대’ 건달세계의 달라진 풍속도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주먹’은 가고 ‘돈’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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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위 관찰에 따르면 서울 주먹계는 슬림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조폭을 전담하는 수사기관이 강력하게 감시하는 데다 대부분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신한 까닭에 과거처럼 대규모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조직들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생의 길을 찾기 때문이다.

“조직원 수가 50명 안팎인 군소조직이 난립해 있다. 예전엔 한군데에 모여 있었지만 지금은 분산 배치돼 있다. 예컨대 호텔 나이트클럽에 6명, 대형상가에 7명, 사채시장에 5명, 슬롯머신업소에 6명… 하는 식이다. 하지만 통신수단의 발달로 일이 터질 경우 집합하는 시간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반면 지방 조직들은 여전히 몰려다니며 세를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 유지들과 결탁한 토착주먹들은 서울보다 운신의 폭이 넓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한다. 웬만한 사건은 피해자가 신고도 잘 안 하고 수사기관에서도 적당히 눈감아준다는 것이다. 안경위에 따르면 서울에 있는 조직은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데 비해 지방 조직은 눈에 띌 정도로 활성화돼 있고, 대형화 통합화하는 추세다.

전설적인 주먹들이 갖던 카리스마의 부재, 군소조직과 신흥조직의 난립, 전통과 계보의 단절. 현 주먹계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의리와 충성심, ‘정의감’, 낭만이 흐르던 ‘야인시대’는 전설일 뿐이다. 신흥조직의 젊은 주먹들은 전통과 계보에 얽매이지 않으며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바야흐로 ‘너도나도 보스’인 시대다. 김홍일 검사는 “조직 규모가 작아지면서 과거와 달리 특정 1인의 장악력이 약화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10월8일 오전 서울 시내 P호텔 커피숍. ‘현역’ 주먹 5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인천 등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3명은 보스급, 2명은 그 아우들이다. 명함을 보니 다들 번듯한 사업체를 갖고 있다. 네트워크(다단계판매) 사업체, 생활용품 제조업체, 수산물 가공업체 등의 대표이사나 고문을 맡고 있다. 커피숍에서 식당으로 옮겨가며 2시간 이상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검은색 양복에 짧은 머리를 한 체격 좋은 청년 대여섯 명이 주위를 경계했다.



‘잘 나가는’ 호남주먹인 B씨(50대 초반). 전북 출신인 그는 약 200명의 동생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 정도 규모면 상당히 큰 조직이다. 과거 양은이파 계열이던 C씨(40대 중반)와 인천 출신인 K씨(50대 초반)는 인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지난해 이용호 게이트 수사과정에 문제가 된 호남주먹과 현 정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 정부에서 오히려 피해를 입고 있다. 호남주먹이라고 덕본 게 없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 경호를 두 차례 한 적 있다.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지금처럼 압박 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주먹계는 불가분 관계다. 같은 지역 사람끼리 인사를 나눌 수도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가지고 유착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권을 줬다면 모르지만, 우리가 알기로 그런 것은 별로 없다.”

97년 대선 때 DJ 경호

B씨는 주먹들의 선거개입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97년 대선 유세 때 DJ 경호를 맡았는데 부산 같은 데 가서는 많이 맞기도 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유세 때는 어쩔 수 없이 맞는 경우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에 관여하는 주먹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치권에서 요청한다 하더라도 응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들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서울에서 호남주먹 대표주자로 부각됐던 양은이파 서방파 ○B파 등 3대 패밀리는 명성만 남아 있지 실체가 없다. 조양은 김태촌 이동재씨 등 두목들이 오랜 수감생활이나 해외도피로 ‘현장’을 떠나 있어 조직관리가 되지 않은 데다 핵심 조직원들이 두목에게 등을 돌리거나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조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업가로 변신한 일부 조직원은 서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뿌리가 잘린 상태라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한때 ‘양은이 식구’였던 C씨는 3대 패밀리의 위력이 언론과 수사기관의 과대 포장으로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3대 패밀리가 한때 셌던 건 맞다. 대전 광주 등 전국적으로 3대 패밀리의 명성이 통한 적이 있었다”며 한때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C씨와 B씨에 따르면 검찰 시각과는 달리 현재 3대 패밀리는 철저히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김태촌이 다시 나와도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부하들이 다 떠났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전쟁을 많이 했는데, 돌이켜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선배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이택○(서방파 부두목. 지난해 검찰에 구속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남)도 조직이 없다. 김태촌이나 조양은을 위해 10년 또는 20년 동안 옥살이해봐야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 다들 등을 돌렸다. 김태촌 부하 중엔 돈을 번 사람이 꽤 있는데도 옥중에 있는 김태촌을 도와주지 않는다. 조양은도 출소 후 동생들을 챙겨주지 않아 인심을 잃고 욕을 먹었다. 서울에서는 3대 패밀리가 약화된 후 동아파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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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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