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과신과 집착이 빚은 굴절된 ‘정의감’

김대업 3년 밀착 취재기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2-11-04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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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신과 집착이 빚은 굴절된 ‘정의감’

    9월18일 김대업씨가 국정감사가 열리는 서울병무청앞에서 희망네트워크 회원들과 집회를 갖고 있다.

    김대업씨가 이수연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씨는 최근 검찰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둘째 아들 수연씨의 병역비리의혹을 제기했다. 놀랍게도, 자신이 직접 수연씨 병역면제 과정에 개입했으며 한인옥 여사한테 돈까지 받았다는 주장이다.

    이 엄청난 ‘폭로’는 과연 사실일까. 이후보의 큰아들 정연씨 관련 의혹의 경우 검찰 수사 결과 정황은 있지만 입증하기 어려운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수연씨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지난 3개월 동안 몇 차례의 말바꾸기, 약속 불이행 등으로 김씨 주장의 신뢰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병역비리 전과자에서 정보원으로

    기자는 그동안 김대업씨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서 지켜봐왔다. 2000년 초 병역비리수사 내막을 취재하면서 맺은 인연이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의혹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를 취재원으로 삼은 것은 병무비리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인데다 군검찰과 검찰이라는 국가 기관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기자가 지난 3년 동안 김대업씨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정리한 ‘김대업 보고서’다.

    1998년 7월 군검찰이 병역비리 전과자인 김씨를 정보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한가지 이유에서였다. 수사하는 데 그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마약수사에서 마약 전과자를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씨는 병역비리 커넥션을 꿰뚫고 있었고 병무행정 의무행정 의학지식 등 병역비리수사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병적기록표 등 관련 자료를 보고 병역비리를 찾아내는 능력은 탁월했다. ‘병역비리 족집게’라는 별명이 붙을 만했다. 수사팀은 그가 여자 문제와 관련해 협박죄로 실형을 살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능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그의 언행을 검증하려는 것은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의혹과 관련해 그가 몇차례 말을 바꾸고 입증하기 어려운 무리한 주장을 펴는 등 ‘결격사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정치권은 반부패국민연대라는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으로 뒤숭숭한 상태였다. 이 단체는 기자회견을 통해 병역비리의혹이 있다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명단을 흔들며 병역비리 재수사를 촉구했다. 재수사라는 표현을 쓴 것은 1998년 12월∼1999년 12월까지 진행된 병역비리수사가 축소·은폐의혹을 낳은 채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관심을 끈 것은 이른바 ‘정치인 리스트’였다.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이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선용 정치 공작’이라는 한나라당의 반발은 정치인의 병역비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여론에 묻혀 버렸다. 기자회견 직후 반부패국민연대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명단을 청와대에 제출했다. 청와대는 이를 다시 검찰로 넘겼다.

    기자가 김대업씨를 처음 만난 것은 제3차 병역비리 군·검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가 발족되기 직전인 2000년 1월 하순이었다. 시간은 밤 10시. 장소는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인터뷰는 자못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그가 첫마디에 기무사에 쫓기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들고 나온 길다란 가방은 야구방망이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기무사의 통화감청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록한 휴대폰을 쓴다고 했다.

    김대업이라는 민간인이 군검찰 수사팀에서 정보요원으로 활약한다는 사실은 일부 언론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다. 1999년 5월에 시작된 2차 병역비리수사가 외압시비에 휘말리자 일요신문 내일신문 등이 수사 파행을 보도하면서 김씨의 존재를 익명으로 알렸다.

    김대업씨는 자신이 2차 수사팀에서 배제된 데는 기무사 입김이 작용했다고 여겼다. 김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이명현 소령(1차 합수부 군검찰 수사팀장. 현 한미연합사 법무실장. 중령)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 고석 중령(현 국방부 법무과장. 대령)이 기무사와 유착해 수사를 방해한다고 믿고 있던 터였다. 이에 대해 고부장은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반박해왔다.

    한편 병무비리수사 초기부터 군검찰과 갈등을 빚은 기무사는 김대업씨의 수사참여를 강력히 반대, 국방부장관에게 보고까지 했다. 명분은 “병역비리 전과자에게 병역비리수사를 맡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병역비리수사 칼끝이 기무사 요원들에까지 미치자 수사에 핵심 역할을 하는 김씨를 ‘눈엣가시’로 여긴 것이다.

    이명현 중령은 그해 7월 유학을 떠나기 전 조성태 국방부장관 앞으로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보내 병역비리수사가 외압으로 축소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김대업씨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2차 수사가 끝난 후 기관(헌병·기관) 요원의 병역비리를 전담수사하는 특별수사팀이 탄생했다. 고부장은 물러났다. 반면 김씨는 기세 좋게 수사팀에 재합류했다.

    그해 10월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기무사의 수사방해의혹을 심층보도하면서 김대업씨의 인터뷰 내용을 내보냈다. 얼굴과 목소리는 가린 상태였다. 이 보도 후 2차 특별수사팀이 편성돼 기관(헌병·기관) 요원의 병역비리를 재수사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 무렵 참여연대는 김씨의 제보를 바탕으로 고석 대령을 명예훼손과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발했다.

    “기무사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김씨의 주장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일까. 몇몇 기무사 직원은 김씨가 관련된 병무비리를 추적했고, 군검찰 조사를 받은 군의관들을 찾아다니며 김씨의 비위사실을 캐내려 했다. 1999년 8월엔 기무사 참모장 조아무개 소장이 청와대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찾아가 김씨의 구속을 건의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그랬던 만큼 김씨가 기무사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자와의 첫 인터뷰에서 그는 병역비리수사의 파행을 기무사와 고석 대령 탓으로 돌렸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으로 보였다. 그는 기무사가 병역비리수사의 몸통이고 군검찰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대감이 지나친 결과 과도한 피해의식이 김씨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2001년 4월 사기혐의로 구속된 것도 ‘기무사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무리한 주장으로 보인다. 기무사가 그를 잡아넣기 위해 애쓴 건 사실이지만, 그 사건엔 엄연히 피해자가 있고 그 피해자의 고소로 그가 구속됐기 때문이다. 즉 기무사의 ‘공작’과 그의 사기혐의는 별개인 것이다.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수사팀(제3차 병무비리 합수부)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암시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군검찰 수사팀에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주로 전화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병무비리 근절에 목숨을 건 사람 같았다. 사명감과 정의감의 화신으로 비쳤다. 그는 “이번 수사팀은 제대로 하려는 것 같다”며 새로 구성된 수사팀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씨는 3차 합수부가 구성되는 데 꽤 중요한 구실을 했다. 참여연대와 접촉한 직후 그는 병역비리의혹이 있는 정치인 명단을 만들어 여권 모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여권 관계자는 김씨의 주장이 담긴 ‘고위층 병무비리 재수사의 필요성’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명단과 함께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전달했다.

    한편 김씨는 몇몇 지지자의 도움으로 민정수석실 관계자를 만나기도 했다. 민정수석실에는 정무수석실보다 훨씬 다양한 문서가 넘겨졌다. 이때만 해도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의혹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김씨를 포함해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병역비리수사가 외압 없이 제대로 진행되기를 바랐을 뿐 이후보 아들의 병역비리의혹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청와대 보고서에도 이후보를 겨냥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김씨가 여권을 접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민주당 중진인 H, J의원 측과 접촉해 병역비리수사의 진행과정과 문제점을 설명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이후보 아들의 병역비리의혹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민정수석실에 올라간 보고서와 정치인 명단은 한달 반쯤 후 반부패국민연대를 거쳐 청와대로 되돌아갔고, 청와대는 이를 검찰로 넘겼으며, 최종적으로는 서울지검 서부지청에 설치된 합수부에 전달됐다. 청와대로 올라간 문서가 청와대를 빠져 나왔다가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는 곡예가 펼쳐진 것이다.

    김대업씨를 만난 후 기자는 두달 여에 걸쳐 관련자 인터뷰 등 보강취재를 한 후 ‘신동아’ 2000년 4월호에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주제는 병무비리수사를 둘러싼 군검찰과 기무사의 갈등이었다. 당연히 김씨가 주인공이었다. 기사에는 김씨의 주요 전과, 즉 협박혐의로 1년 실형을 산 사건도 언급돼 있다. 그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경찰청 특수수사과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김씨의 혐의는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그후엔 간간이 연락하는 정도로만 지냈다. 김씨는 합수부 일로 몹시 바쁜 듯했으며 보람을 느끼는 듯싶었다.

    해가 바뀌어 2001년 2월, 서울 강남의 P호텔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3차 합수부가 해체된 직후였다. 그날 대화의 화제는 잠적한 지 2년이 넘도록 잡히지 않고 있는 박노항 원사였다. 김씨는 박원사 체포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수사팀과 별개로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적하고 있는데, 곧 잡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합수부는 해체됐지만 군검찰은 박원사 체포를 위해 전담 수사팀을 두고 있었다.

    김씨를 다시 만난 것은 그해 4월 서울지방법원 재판정에서였다. 3월말 김씨는 사기혐의로 긴급체포돼 4월초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구속됐다. 조아무개씨(여·60)로부터 3억7700만원을 가로챈 혐의였다. 김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조씨가 기무사와 연결돼 자신을 고소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김씨의 사기혐의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였다. 그 즈음 김씨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김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돈은 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업의 ‘사기 행각’

    기자는 이 사건의 내막을 ‘주간동아’를 통해 기사화한 후 김씨를 면회했다. 그는 구치소에서 기사를 읽었다며 조금 섭섭해했다. 아울러 돈을 떼먹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사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이 사건은 박노항 원사 체포를 앞두고 자신이 수사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특정기관의 공작이라고 강변했다. 박원사는 김씨가 구속된 지 3주쯤 지난 4월 하순에 검거됐다.

    ‘주간동아’ 기사가 나간 직후 한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대업씨 고소인을 만나보겠느냐고 물어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는 김대업씨 재판이 열렸던 날 법정에서 본 남자였다. 그날 기자는 재판이 끝난 직후 김대업씨 고소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40대 남자와 함께 재빠르게 법정을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뒤를 좇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신분을 밝힌 후 “김대업씨를 아느냐”고 묻자 두 사람은 “모른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그날 법정에서 봤던 두 남녀가 있었다. 여자가 바로 김씨를 고소한 조씨였다. 2시간 가량 인터뷰를 했다. 조씨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김씨의 ‘사기행각’을 설명하며 고소장, 합의서, 김씨의 글씨가 적힌 메모지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기자는 인터뷰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중이라는 게 큰 이유였지만 조씨 옆에 따라 다니는 남자의 정체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대업씨 변호사에 따르면 이 남자는 김씨가 체포된 직후 경찰서에서 조씨와 대질신문을 벌일 때부터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이상하게도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자에게도 끝내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저 조씨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러잖아도 김대업씨 체포과정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던 터라 기자는 이 남자가 기무사 요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씨와 그의 변호인도 그런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 무렵 ‘신동아’ 2001년 6월호에 ‘병무비리수사 청와대 보고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000년 1월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이 청와대와 관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후 다시 김대업씨를 면회했다. 박원사의 혐의와 정치인 병역비리의혹을 취재하는 데 그의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김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작은 글씨로 편지지 3장을 빼곡이 채운 것이었다. 병역비리 척결에 대한 사명감과 정의감이 넘치는 글이었다. 그 중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항상 정의와 진실을 위하여 정의와 힘없는 약자 편에서 힘이 되어 주시고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만성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의 병폐인 병무비리 척결을 위하여 함께 앞장서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또한 병무비리수사를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과 병무비리 은폐·축소 관련 세력, 그리고 비호하는 세력에 대해 철저하게 밝혀 국민들의 심판과 법의 심판을 받게 하여 정의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 주신다면 모든 국민들로부터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그해 가을 김대업씨가 수감자 신분으로 매일같이 서울지검 특수1부로 출두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벌써 몇 달 됐다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군검찰과 검찰에 확인한 결과 김씨의 수사참여는 사실이었다. 불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지난 4월초 출소한 직후 한 시민단체를 찾아갔다. 기자는 우연히 불청객으로 그 자리에 동석했다. 김씨에게 “고생했다”며 악수를 건넸고 그도 반가워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기자회견을 제의했다. 안건은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의 구속사건에 기무사가 개입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회창 후보 아들 정연씨의 병역비리의혹이었다.

    정연씨 병역비리의혹 얘기가 나오는 순간 기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김씨는 지난 1월 김길부 전 병무청장을 조사했을 때 확인한 것이라며 은폐대책회의 의혹을 거론했다. 또 정연씨가 102보충대를 거쳐 국군춘천병원에서 면제받게 된 과정, 신검부표 파기의혹에 대해서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설명했다.

    김씨는 기자회견이 열리기 전까지 기사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기자는 그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확인 취재 없이 그의 주장을 기사화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검증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기자회견은 5월말쯤 예정됐다. 기자회견에 맞춰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 취재가 필요했다. 김씨를 몇 차례 만나 좀더 구체적인 증언을 들었다.

    양심선언 연기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5월 하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정연씨 병역비리의혹 기사가 실린 것은 뜻밖이었다. 김대업씨가 시민단체에 털어놓았던 바로 그 얘기였다. 김씨에게 기사가 나가게 된 경위를 물으니 “기자회견 전까지 기사화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얘기해줬는데 약속을 어겼다”고 ‘오마이뉴스’에 책임을 돌렸다.

    기자는 관련자 확인 취재를 거쳐 ‘신동아’ 7월호에 정연씨의 병역비리의혹을 기사화했다. 김씨는 신검부표 파기와 이정연씨가 불법으로 면제된 과정을 잘 아는 군병원 관계자가 양심선언을 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당사자 설득작업도 끝났기 때문에 시민단체 기자회견에 그 사람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기자회견은 열리지 않았다. 시민단체에서 부담스러워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7월말 김씨는 민주개혁국민연합이라는 생소한 시민단체와 함께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기자회견에도 양심선언을 한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씨는 이에 대해 “녹음까지 해뒀는데, 사정이 있어 나중에 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녹음테이프를 들어보자고 하자 “걱정 말라. 꼭 주겠다”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8월12일 녹음테이프가 나타나기는 나타났다. 그런데 평소 얘기해오던 녹음테이프가 아니라 김도술씨의 목소리가 담겼다는 녹음테이프였다. 이때부터 병풍은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대검의 성문분석 결과 녹음테이프는 증거능력을 갖기 힘든 것으로 판가름 났다. 인위적으로 편집됐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병역비리수사에 참여한 수사관계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정연씨 관련 진술이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검찰관들 사이에 회자됐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 검찰관은 김도술씨의 간이진술서를 봤다고까지 주장했다. 기자는 ‘신동아’ 9월호에 관련 기사를 썼다. 그후 1999년 병역비리수사에 참여한 몇몇 검찰관은 국회에 출석해 ‘김도술 녹음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정황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기자는 김대업씨가 말해온 ‘양심선언 예정자’와 접촉해 김씨의 주장이 맞는지 철저히 확인했다. 수차례에 걸쳐 대화한 결과 김씨가 그와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후 김씨와 연락을 끊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 방배동의 P병원에서였다. 맹장염으로 입원한 김씨를 병문안차 찾은 것이다. 두달 만에 만난 자리에서 김씨는 “양심선언 예정자가 실은 다른 사람”이라며 “사정이 있어 그렇게 말해왔으나 꼭 약속을 지킬 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지난해 4월 김대업씨 구속사건 당시 고소인 조씨를 돕던 남자가 김대업씨의 주장과 달리 기무사 요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그 남자의 이름과 근무처까지 대며 기무사 요원이 확실하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름도 직장도 달랐다. 이 남자에게는 신분을 밝히기 곤란한 사정이 있었다.

    조씨는 지난해 6월8일 김대업씨 재판에 증인으로 나간 적이 있다. 이 재판은 방청객을 내보낸 상태에서 열린 비밀재판이었다. 기자가 최근 확인한 법정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씨의 증언 중엔 이런 내용이 있다. 질문자는 김대업씨 변호인이다.

    “피고인(김대업씨)은 증인(조씨)에게 자신은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독대까지 했고, 자기에게 매월 국가에서 지급되는 판공비가 1000만원 정도 된다고 하면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특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피고인은 증인에게 독대를 했다고 이야기했고 고위층을 사정한다고 했습니다.”

    조씨는 그보다 앞선 지난해 4월10일 서울지검 김진원 검사 앞에서는 이런 진술도 했다.

    “삼청동에서 근무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삼청동은 청와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청와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무비리 수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씨는 2001년 2월 수사팀을 떠날 때 “청와대 특보로 임명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김씨는 1999년 병역비리수사에 참여할 때 주변에 청와대 김중권 비서실장과의 친분을 과시했다고 한다. 김중권씨는 이에 대해 “김대업이라는 사람을 전혀 만난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고 부인했다.

    김대업씨가 제기한 이정연씨 병역비리의혹의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 모른다. 김씨는 의혹을 제기하는 선에서 멈췄어야 했다. 병역비리가 있다는 과도한 확신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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