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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오래 걷다 보니 거기 산이 있었다”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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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그의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서재. 이 곳에서 그는 하루 평균 열 시간씩 공부와 글 쓰기에 매달리다

어느 글에선가 이윤기는 인간 존재를 ‘자기 과거의 상속자, 자기 과거의 퇴적물’로 규정했다. 그 또한 그럴 것이다. 이윤기의 삶은 경상도 북부, 군위와 대구 어름 그 어딘가에 명주실로 꼭꼭 홀쳐 매여 있다.

이윤기의 고향은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두북동 2구다. ‘수성암의 최적층이 생으로 드러나 있는 땅, 네바다의 사막과 유타의 고원에 견주어 나을 것이 없는 땅’에서 그는 9남매를 낳아 7남매를 키운 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첫돌을 지낸 직후 세상을 떴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진 한 장 없다. 다만 ‘체격이 엄장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도량이 크고 도량에 못지않게 발 또한 컸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가진 첫 기억은 만 세 살 때 6·25전쟁의 포화를 피해 피란갔던 일이다. 누나가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 애쓰던 일이며, 벽돌담 아래서 사람이 죽어가던 모습들이 선명히 기억난다.

“동창들이 그래요. 휴지통이라고. 왜 PC 보면 필요 없는 파일은 ‘휴지통’에 버리잖아요. 근데 전 정말 별걸 다 기억해요. 네 살 무렵 뗀 ‘천자문’ ‘명심보감’을 지금도 줄줄 외우니까요. 친구들 부추김에 술자리에서 가끔 재미 삼아 외워 보이는데, 그럴 때면 꼭 “너 어젯밤에 외웠지?” 하고 나서는 녀석이 있어요. 벌컥 화부터 내곤 돌아서서 후회하지요. 내 아직 공부가 멀었구나….”

근 400년을 안동에 터잡고 살다 의성을 거쳐 군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반성(班性)이 강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능참봉을 했어요. 종8품이니 말단이지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빳빳했어요. 정승이 와도 고개 숙이지 않는 게 능참봉 아닙니까.”

게다가 그를 맡아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는 더 꼿꼿한 집안 출신이었다. 강한 반골 기질에 의기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어린 막내손주를 앉혀 놓고 이렇게 가르치곤 했다. “대장부는 남의 편지 받으면 간직하는 게 아니고, 글을 쓰면 구차하게 남기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또한 근동에서 따라올 자 없는 문장가였다. 손자 중 하나 학자로 키우는 것이 소원이던 할머니는 그에게 직접 ‘천자문’을 가르쳤다. ‘명심보감’ ‘동몽선습’ ‘채근담’은 같은 마을 살던 고종형의 어깨너머로 배웠다. 글에 목말라 장형(長兄)의 중학교 교과서까지 달달 외웠다. ‘물상(物象)’이라는 과학교과서에서 본 ‘돌젤라(토리첼리)의 실험’이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두 초등학교 입학 전의 일들이다.

요즘 말로 독서광이던 할머니는 거처에 ‘옥루몽’ ‘숙영낭자전’ ‘조웅전’ ‘류충렬전’ ‘장화홍련전’ ‘권익중전’ 같은 이야기책을 갖춰 놓고 운율 붙여 읽기를 좋아했다. 할머니 방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가 책들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논일밭일 하는 틈틈이 송창 가락에 맞춰 ‘옥루몽’ 한 구절을 눈물나게 자아 올렸다. 그 또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그중 몇 권을 통째로 외웠다.

“나무요 나무요 톱 들어가니더”

글 읽고 노래하며 살았다 해서 살림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군위군에서 손꼽히는 부농이던 가세는 6·25전쟁 끝날 무렵 기울기 시작했다. 장형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운수업이라는 건 요즘으로 치면 헬리콥터 사업 같은 거예요. 그걸 전답 팔아 뒷바라지하려니 남아나는 게 없을 밖에요.”

장형의 사업체는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남은 것은 빚, 그리고 논 일곱 마지기뿐이었다. 위로 형 누나들이 하나씩 대구로 떠나거나 출가하면서, 어머니와 2년 터울인 형과 이윤기, 이렇게 셋이 농사일을 꾸려갔다. 그 때를 이윤기는 “내 고통스럽던 고향살이의 절정”이라 말한다.

“제가 농사에는 지진아 수준이었어요. 일상사도 마찬가지여서, 뭘 깨뜨린다거나 심부름거리를 잊는다거나 하는 일이 잦았어요. 아마 자꾸 딴 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인가 봐요. 한편으로 할머님은 절 ‘맹기(孟氣)’니 ‘아성(亞聖)’이니 하는 별명으로 부르셨는데, 어쭙잖지만 맹자 될 기가 있다, 맹자 버금가는 성인이 될 거라는 뜻이었겠지요.”

바로 위 형은 열 살 무렵부터 아름드리 소나무를 쓰러뜨려 장작을 패 내다 팔만큼 상일꾼이었다. 그 형에게는 ‘참 따뜻한 버릇’이 있었다. 소나무를 자르기 전 톱 등으로 나무를 툭툭 치며 “나무요 나무요 톱 들어가니더”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구처(求處) 없어서 베기는 한다만 백 살 넘은 나무 욕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 형의 말이었다. 이제는 교과서 속 용어가 되어버린 애니미즘, 이윤기는 그 신화와 만물교감의 세계를 몸으로 살았다.

1958년 군위에 남아있던 세 식구마저 대구로 이사했다. 가난보다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사는 숙부가 그 무렵 시작된 재일 동포 북송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게다. 마을에는 북송된 사람의 집안이 더러 있어 그의 식구를 원수로 대했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빨갱이 가족’이란 꼬리표는 이후로도 그의 삶에 이런저런 굴곡을 가져왔다. 장형마저 자동차노조 경북 지부장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한 집안에 요시찰 인물이 둘로 늘었다. 이로 인해 한때 ‘허무주의적 육군 대위’를 꿈꾸던 이윤기는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죽는 날까지 통장이나 지갑을 가져본 적 없는 큰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가장 큰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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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나리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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