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라블레, 민중의 삶 노래한 유쾌한 상대주의자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2-11-05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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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블레, 민중의 삶 노래한 유쾌한 상대주의자

    라블레

    9월말~10월초, 안동에서 열린 국제탈춤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세상에 다시없이 멋진 무대라 할 하회마을 소나무 숲 모래사장이건만, 나는 탈춤 공연을 보며 허무에 젖었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병신춤을 보며 웃는 관중을 보면서,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우리나라엔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다”고 부르짖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생각했다.

    지금 하회마을은 구석구석 상술에 찌든 완벽한 관광지대다. 그것도 유교니 선비니 하는 우리 ‘전통’은 물론, 대영제국의 할머니 여왕까지 동원해 ‘국제’를 내세우는 ‘세계적 관광단지’가 됐다. 돌아오며 나는 결심했다. 그 곳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 함께 탈춤을 본 외국인들에게 나는 그들이 알고자 하는 ‘옛날’을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우리 역사에서 안동이 어떤 곳인지, 그곳 양반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안동에 머문 며칠간 몇몇 양반 집은 그 큰 대문을 굳게 처닫고 있었고, 개방된 한 두 곳은 여자는 사당에 들 수 없다며 우리 일행의 출입을 금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열린’ 집들의 관광 식당이거나 상점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곳은 옛날부터 ‘쌍놈’의 집이었는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쌍놈은 먹고살기에 바쁜 것인지 또한 모르겠다.

    ‘쌍놈’이란 표현에 화내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쌍놈을 자처하고 자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공부하는 노동법을 쌍놈법이라 부른다. 수업 첫 시간이면 ‘노동자는 쌍놈이었고 나는 그 후손’이라는 말부터 한다.

    1971년, 대학생이 된 나는 그 몇 달 전에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뜻을 새기는 모임을 준비하다 구속됐다. 그 당시 나를 ‘지도’한 교양학부장 이기영 교수는 나에게 자신이 연구한 원효나 퇴계를 비롯한 우리 전통 사상이나 탈춤을 비롯한 민중문화 공부를 권했다. 대신 어제의 민중이 아닌 오늘의 민중 전태일의 민속, 노동현장의 민중문화는 금지 당했다.



    나는 1970~1980년대의 탈춤을 비롯한 민중연희 부활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솔직히, 그 모든 것에 그다지 감동하지 못했음을 이제는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공옥진의 춤을 보며 분노했다는 외국인처럼 우리 문화에 대한 ‘무식’을 공유했음도 고백해야겠다. 그 후 나는 삶의 현장, 데모의 현장 밖에서 민중을 느끼지 못했다.

    월드컵 응원은 민중 축제였나

    지금 우리에게는 민중축제가 있는가? 누구는 ‘붉은 악마’ 응원을 민중축제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 민중을 ‘붉은 민중’으로 본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전부터, 그리고 월드컵 기간의 선거 결과를 보며 더욱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래서 저 올림픽 때와 같이 3S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푸코의 몸 철학까지 들먹이며 새로운 몸의 정치, 심지어 새로운 인권 운동 운운하는 사람들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것이 지금 우리의 민중문화인가? 또는 이미 박제가 된 역사 속의 탈춤 등 이른바 민속놀이가 우리 민중문화인가? 록 페스티벌 등의 언더그라운드가 민중문화인가? 선거판에 벌어지는 막걸리 잔치나 관광버스 속 막춤이 민중문화인가? 저 토끼장 같은 막간에서 벌어지는 가라오케가 민중문화인가?

    역사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민중축제는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 민중축제란 1년에 3개월간이나 계속된 광란의 축제이며 고급문화를 포함한 지배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것은 위계에 대한 반대, 모든 가치의 상대화, 권위에 대한 비판과 개방, 즐거운 무정부 상태, 모든 독단에 대한 조롱, 이단의 주장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우리의 월드컵 ‘붉은 악마’ 응원이 그런 것이었나? 너무나도 익숙했던 관제 응원이 아니라 자발적 응원이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을 민중축제로 볼 수 있을까? 질서로 예찬 받은 그 응원이 과연 광란의 반체제적 축제였을까? 그 응원이 어떤 반위계·반가치·반권위·반독단의 것이었단 말인가?

    물론 민중축제를 르네상스의 경우와 달리 규정하면 답 또한 달라질 것이다. 모두가 즐겁게 참여하여 몸으로 함께 움직이는 응원의 도취를 몸의 정치학이나 민중축제라 보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다면 탈춤도, 록 페스티벌도, 막걸리 막춤도, 가라오케도 민중축제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상 최후였다는 르네상스 민중축제를 라블레를 통해 살펴본다. 물론 그 부활을 꿈꾸면서.

    라블레? 누구인가? 16세기 르네상스 기의 프랑스 작가라는 정도나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인물 아닌가. 더군다나 그의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일반인에게,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없는 그들에게 라블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의 프랑스문학은 이상하다. 괴상한 문학작품들까지 현지에서 나오자마자 속속 번역되는 나라에서 거의 500년 동안 고전으로 남아 있는 ‘팡타그뤼엘’이나 ‘가르강튀아’를 읽을 수 없다니. 왜 그럴까? 아무리 간단한 프랑스 문학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우리는 읽을 수 없다.

    어떤 책에 보면 우리말 번역이 있는 듯도 하나, 그런 책들에도 번역서 소개는 없고 원서만 인용되어 있다. 우리말로 된 라블레 연구서가 두 권, 번역된 연구서가 두 권 있으나 어디에도 라블레 작품의 번역서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네 권 모두 내가 재직하는 대학도서관에는 없어 인터넷을 통해 어렵게 구해야 했다. 허나 읽어보니 너무 어려워 이 글을 쓰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여하튼 불어불문학과가 있는 대학에 라블레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다니! 한글 책도 단 한 권 없다니! 이러니 인문학이 위기일 수밖에! 적어도 우리 대학에는 라블레가 ‘없다!’

    인문학자들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인문학이 망했다고 야단법석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에 의해 학과 선택의 자유가 넓어져 학생들이 인문학 쪽을 선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자유주의 교육이 그런 것이라면 그 자유를 허용한 면에 있어서만큼은 환영이다. 오히려 학생들이 즐겨 선택할 수 있도록 인문학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지만 그런 취지에서, 인문학을 사랑하여 이 글을 쓴다.

    원서로만 읽는 전문가 비밀주의 같은 것에 빠져있는 인문학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일반인이나 학생들이 라블레를 모르는 것은 라블레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이 그것을 독점하고 무슨 비밀처럼 연구하면서 일반인이 몰라준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 친절하고 알기 쉽게 인문학을 말하지 않는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이 사람을 떠나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최소한 도서관에 관련 서적이라도 비치하라!

    까놓고 말해 인문학 까짓것 없어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인문학이 없어 세상이 요지경이 되었다고들 하지만 라블레에 대한 연구자가 몇 명 더 는다 해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라블레가, 우리의 라블레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라블레는 우리 인문학 연구자의 캐비닛 속에서 잠자고 있다.

    하기야 라블레 뿐인가? 우리에게 그 이름만이 전설처럼 떠도는 세계의 고전은 수없이 많다. 물론 읽을 필요가 없다면 그만이다. 500년 전 프랑스 사람이 쓴 기괴한 거인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읽을 필요가 있다면서도 읽을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은 웃기는 짓이다.

    이해받지 못한 대문호

    무엇보다 라블레는 읽을 필요가 ‘없지 않다’. 특히 최근 대화주의 문학이론으로 각광 받고 있는 바흐친이, 민중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 라블레야말로 세계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생산한 작가라 재평가한 이래(바흐친의 그 책, 800쪽에 가까운 ‘프랑소와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가 모신 5대 대가, 즉 단테·괴테·셰익스피어·도스토예프스키·라블레 중 우리가 접근을 금지 당하고 있는 이는 라블레 뿐이다.

    나머지 네 사람은 열심히 섬겨지고 있는데, 그 넷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받은 라블레는 제사를 지내기는커녕, 학회라는 이름의 사당은커녕, 부서진 비석 한 쪽은커녕, 그가 쓴 글 한 쪽조차 없는 현실. 그러면서도 바흐친의 책은 번역되고, 우리가 읽지도 못하는 라블레에 대한 바흐친의 논문은 물론, 그 바흐친에 대한 논문조차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라블레는 없고, 그를 논한 바흐친만 있다. 코끼리는 없고, 그 다리를 만진 맹인들의 헛소리만 가득하다.

    바흐친이 5대 세계문학이라고 꼽은 것을 우리가 꼭 수긍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박노자는 그런 ‘보수 반동’이 왜 한국에서 그리도 인기 있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바흐친을 위시한 세계의 문학이론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꼭 그렇게 보고 있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상당히 폄하된 것은 사실이나, 그의 문학을 꼭 박노자처럼 평가하는 것이 타당한지 또한 의문이다.

    나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단히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의심치 않는다. 이는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라블레도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나는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진 않는다. 제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바흐친은 일찍이 라블레가 제대로 읽히지 않는 점을 개탄했다. 세계문학 중 라블레가 가장 인기 없고, 가장 이해되지 않으며,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바흐친은 자신의 책만이 라블레의 작품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주장한다. 여기에는 ‘러시아에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바흐친이 말한 대로 러시아에서라면 몰라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라블레는 매우 인기 있는 작가이며, 프랑스 근대문학의 시조라는 평가마저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볼테르부터 위고까지 프랑스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고, 최근 재평가 받고 있는 스턴과 같은 영국 소설가에게도 스승이었다. 문제는 제대로 이해되었는가 하는 점인데, 이 점에 대한 바흐친의 이의 제기는 주목할 만하다.

    바흐친은 라블레를 도덕적-공식적, 청교도적-순수주의적으로 파악하는 종래의 분석을 ‘오독’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의 손에서 라블레가 민중문화와 고급문화가 융화되는 독특한 시대인 르네상스의 문화적·의미론적 맥락에서 새로 해석되고 있음에 자부심을 표한다. 나는 그런 자부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바흐친이 그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은 올바른 인문학적 태도라고 본다.

    바흐친 역시 인문학이 사멸하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구 소련의 중심문화에서 소외된 문학이론가였다. 그렇다고 그의 상황을 꼭 전제적인 공산국가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공식의 중심문화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심문화는 체제를 단일화하고 폐쇄적-독백적으로 만들며, 유일한 진리의 헤게모니를 독점해 언어를 강제로 통일하고 표준화한다. 이는 구 소련이라는 독특한 시대 공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그런 공식의 중심문화는 비공식의 민중문화를 찬탈하고 지배한다. 그래서 민속이 문학으로, 민속춤은 무대의 볼거리로, 축제의 웃음은 교회의 합창으로, 질펀한 놀이터였던 시장과 뒷골목은 연극과 오페라의 극장 그리고 영화관으로 변질된다. 이처럼 체제화한 민중문화는 마침내 숭고한 것으로 변질되어 민중적 차원의 신성 모독이나 희화, 음란은 철저히 억압된다.

    바흐친이 밝히는 라블레에 대한 오독의 역사는 웃음의 문화가 르네상스 때 절정에 달했다가 쇠퇴해 가는 과정의 역사다. 바흐친은 르네상스에서만큼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가 제대로 융화되었다고 본다. 그는 라블레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보카치오, 세르반테스, 디드로 등에게서도 그런 요소를 발견한다. 바흐친은 그렇게 르네상스를 현실화한 이상향의 하나로 본다.

    바흐친을 소개한 우리나라 사람들 중 라블레나 르네상스를 바흐친 식으로 해석한 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흔히 쏟아져 나오는 르네상스 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외국에서도 바흐친 식 민중문화라는 시각에서 라블레나 르네상스를 논의하는 견해는 드물다.

    나는 이 문화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르네상스 예술가나 사상가를 다른 측면에서 보고자 노력하며 여러 이설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알튀세처럼 마키아벨리를 민중사상가 내지 사회주의 사상가로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같이, 라블레나 르네상스를 바흐친처럼 보는 것만 옳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시할 수 없는 관점이기는 하지만 또 꼭 그렇게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블레의 작품에 나타난 민중문화성을 바흐친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미 100년도 더 전인 1855년 미슐레가 그런 지적을 했고, 위고도 그런 의미에서 라블레를 ‘육체의 시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런 점들이 중요하다 해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로서의 라블레를 무시할 수는 없다.

    라블레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언제 태어났고 무엇을 하다 죽었는지 도대체가 명확하지 않다. 출생이 1483년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1494년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15세기말이다. 그의 소설 ‘가르강튀아’의 동명 주인공이 태어난 프랑스 투렌느가 고향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에도 이설이 있다.

    아버지는 판사 출신 변호사여서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인 것과 달리 시골 부르주아(시민)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과연 시골 출신이냐에도 의문은 있으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원 묘사나 사투리, 욕설 같은 것을 보면 개연성이 큰 편이다. 그러나 그런 민중적 요소는 고향보다는 오히려 성장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라블레, 민중의 삶 노래한 유쾌한 상대주의자

    구스타브 도르가 그린 삽화 ‘가르강튀아의 식사’

    그의 성장과 공부도 출생지만큼 불명확하다. 변호사 아들인 만큼 법률을 공부했거나, 당시 수도원에서 정해진 인문교육을 받았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역시 의문이 든다. 설령 그렇다 해도, 수도원 교육이라는 것이 주는 일반적 이미지와 달리,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특히 민중생활과 유리되지 않고 공부했으리라 보는 것이 앞뒤가 맞는 짐작일 것이다.

    한편으로 라블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교육의 위선을 철저히 비꼬고 있는 까닭에 교육을 통해 민중문화를 이해하게 됐으리라 보는 것도 꼭 들어맞는 견해는 아니다. 여하튼 젊을 때 수도원의 수도사로 살며 법을 비롯한 폭넓은 공부를 했다는 것 정도가 라블레의 삶 전반기에 대한 개략적 사실인 듯 하다.

    1523년 수도원에서 그리스어 연구를 금지 당하지만 죽을 때까지 성직을 버리지는 않았다. 평생 근엄해야 할 성직자이면서도 당시로서는 거의 포르노 취급을 받은 이야기를 쓴 점이 참으로 기이하다.

    1530년 그는 수도원에서 나와 의과대학에 등록하는데, 그 전부터 의학을 공부했으리라 짐작된다. 1483년 생이라면 47세, 1494년 생이라 해도 36세 때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게다가 사생아를 둘 낳아 1540년 교황에게 친자 확인을 받는데, 수도사가 사생아를 낳은 것도 그렇지만 교황에게 친자라는 확인까지 받다니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좋은 시대였는가, 아니면 썩어빠진 시대였는가. 이런 의문은 1532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 5년 전에 그가 리용 시립병원 의사로 임명된 점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당시의 의대교육이란 의사가 되는 데엔 그다지 중요한 절차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가 리용에 산 것은 그곳이 당시 유럽 상업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인이 많은 지적 도시였다는 점에서, 그가 르네상스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터전이 된다. 그는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를 1532년, 1534년에 각각 발표하고, 기타 의학·법·외교·전략·고고학에 대한 저술도 발표한다.

    그러나 ‘팡타그뤼엘’은 발표 1년 만에 소르본(신학원)에 의해 고발당했고, 1534년에는 가톨릭 미사의 우상숭배를 비판한 벽보 사건으로 인해 1535년 로마로 도망친다. 교황은 관대하게도 수술용 칼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용서해 라블레는 의학 선생이 된다. 이어 1546년에 ‘제3의 책’, 1548년부터 ‘제4의 책’을 냈으나, 후자 역시 소르본에 의해 고발당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데, 그 연도 역시 불분명하다. 1553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저서라는 ‘제5의 책’은 그의 사후 11년 만에 나온 것이 된다. 그 마지막 저서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여하튼 그가 16세기 중반에 죽었고, 네 권의 책을 낸 것은 확실하다.

    그의 생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존경하던 에라스무스처럼 유럽의 방랑가로 살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를 르네상스인의 특징인 유럽인이라 보는 것이 옳지 프랑스인이라고만 봄은 문제다. 여하튼 그의 주인공 팡타그뤼엘처럼 그는 ‘언제나 보고, 배우고자 한 떠돌이’였다. 특히 수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했으며, 국제법을 익힌 일종의 외교관이기도 했다.

    라블레는 문학은 물론 의학, 법학 등 당시의 모든 지식에 통했고, 당시의 난해한 주석적 견해를 비판한 관련 저술까지 남겼다. 그의 문학작품에는 의학과 법학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이 배어 있다. 특히 법률가들의 독선적인 태도나 복잡한 소송절차에 맹목적인 존경을 표하는 것에 대한 풍자, 모호한 법해석, 인문적 소양이 결여된 법 이해에 대한 비판 등을 담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토마스 모어와 쌍벽을 이룬다.

    라블레를 기억하게 한 대표작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는 모두 거인의 이름이고, 소설은 그 거인들의 모험담이다.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다. 그 이름은 중세의 성사극(聖史劇)에 나오는 소악마에서 딴 것이나, 라블레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작가 불명의 ‘가르강튀아 연대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라블레는 그 작품을 페러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팡타그뤼엘’은 풍자의 활기로 가득 하고, ‘가르강튀아’에는 상징주의와 사실주의가 엿보이며, 팡타그뤼엘이 고대 철학과 기독교를 체득한 완전무결한 성인으로 등장하는 ‘제3의 책’은 박식함, ‘제4의 책’에는 정치풍자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 속에는 고전, 민간전승, 학문, 현실 체험, 그리고 시대정신에 관한 여러 주제가 깔려 있다. 그것들은 놀라운 활기, 유례없는 언어 구사, 현란한 박식함으로 꽉 짜여 있다.

    다양한 문체, 다종의 장르, 옛날 이야기, 기사도 이야기, 대화, 독백, 소극, 연설, 설교 등이 뒤섞여 그야말로 총천연색을 방불케 한다. 따라서 소설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로 부름이 적당할 듯하다.

    “자연의 선물을 향유하라”

    흔히 라블레는 프랑스 문학에 근대적 문체를 확립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의 프랑스어는 변동기 언어로 뒤에 몽테뉴가 그 불명확성과 불안정성을 지적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라틴어가 여전히 고귀한 언어, 교양인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당시 휴머니스트들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프랑스어를 라틴어처럼 구사하고자 했다. 라블레도 작품 속의 편지나 연설 또는 설교에선 키케로 풍의 웅변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그것은 교양인을 위해, 또는 교양인인 척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풍자적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라틴어적 문체 또한 라블레 문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라블레는 민중의 언어인 중세 프랑스 어휘로 된 일상어, 매도의 언어, 그리고 표현력이 풍부한 풍자나 격언 또는 속담을 폭 넓게 사용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인 대화 부분은 대부분 그런 민중어로 썼다.

    여기 학자들의 언어, 구어, 농민·학생·법률가의 언어 등을 포함시켜 그야말로 언어의 백화점이나 환상이라 불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당시 모든 계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바흐친이 라블레의 민중언어에만 주목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바흐친이 자부하는 것처럼 종래에는 무시하던 라블레의 민중언어를 재발견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라블레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차원을 넘어, 유럽 지배문화의 공식적 평가에 바흐친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바흐친은 공식 문화 밖인 광장·거리·도시·시골에서 공식 언어에 대항하는 표현을, 정치적 권위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으로 중시한다.

    이는 그의 사상과 작품이 모두 체험을 통해 얻은 광범한 지식에 근거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민감했고, 그 시대의 모든 민중적·지적 경향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에 놀라운 생명력과 활력을 부여한 명석하고 관대한 정신으로 휴머니스트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으로 세계를 개혁하며 자유와 행복 속에 개인이 살 수 있는 더욱 공정한 사회를 꿈꾸었다. 그 점에서 그는 분명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의 범주에 들지, 민중 쪽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휴머니즘은 당시의 타협주의적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라블레의 싸움에서 중심 공격 대상은 스콜라 철학과 소르본 파 신학, 그리고 칼뱅의 경건주의였다. 그는 교육·결혼·사회제도·정치·법·전쟁 등을 비판하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향유하자고 주장한다. 즉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용과 여유, 삶을 전적으로 포용하는 낙관과 환희를 노래한 것이다.

    라블레의 작품에는 르네상스적 주제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것은 중세의 부정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 생명에의 애착, 육체의 복권, 진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속세의 문학과 예술 및 과학에 대한 찬양이다.

    특히 라블레의 작품에는 중세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로 육체적 이미지, 먹고 마심, 배설, 성욕 등의 자연적 기능이 그 어떤 르네상스 예술가의 작품에서보다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라블레의 작품에는 일찍부터 외설이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예컨대 볼테르는 라블레가 술에 완전히 취한 상태에서만 글을 썼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라블레 생존시에는 그런 외설론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의 책이 금서가 된 이유도 아니었다. 이는 중세 이래 당시까지의 전통이었으며, 기아와 금욕의 현실을 부정하는 중요한 창작 방식이자 소재이기도 했다.

    바흐친은 특히 라블레가 중세 기독교의 금욕주의를 부정하고 물질생활을 찬양한 민중적 시각을 도입한 점을 강조하나, 이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라블레가 그런 민중정신을 그대로 수긍한 것이 아니라 절도 있는 쾌락을 추구한 점도 역시 르네상스인다운 것으로 주목되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라블레가 르네상스기 휴머니스트로서 세계의 개조를 인간의 의무라 본 점이다. 당연히 교육이 중시된다. 에라스무스가 말했듯 “인간은 태어나면서 인간인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라블레도 공유했다. 나아가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자유교육에 공감했다.

    그의 작품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여성도 혐오스럽게 그려져 페미니스트라면 당장 집어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페미니즘은 당시 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도리어 라블레가 연애결혼을 옹호하고 다산의 부부관계를 찬양한 점은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현실 정치에 실망해 토마스 모어처럼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라블레는 그런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모어와는 달리 당시의 군주제를 긍정하되, 이상적 정치를 추구했다. 보수주의자이긴 하되, 진보를 받아들인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현실주의를 추구한 마키아벨리와 달리, 인민 속에 사는 계몽 군주를 요구하고 침략전쟁을 부인한 점에서 에라스무스와 유사하다.

    라블레의 군주는 플라톤의 철학자 군주와 유사하다. 그 군주는 법이 아니라 민중의 솔직한 신뢰에 호소해 통치한다. 군주도 민중도 도덕을 따르며 군주는 엄격한 법이 아닌 관용으로 민중을 다스린다. 처벌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으나, 그 역시 인도적이어야 한다.

    에라스무스가 전쟁을 악으로 보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라블레도 철저한 평화주의를 견지했다. 따라서 정복전쟁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자위전쟁만 허용된다고 했다. 문제는 식민지 개척인데, 라블레는 그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당시 이미 시작된 캐나다 개척에 대해 인도적 통치를 주장했다.

    앞에서 보았듯 라블레는 평생 가톨릭 수도사로 살았다. 에라스무스 같은 당시의 휴머니스트처럼 라블레도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순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라블레의 종교관은 에라스무스보다 더 과격했다. 그래서 아나톨 프랑스는 라블레를 회의론자로 보았다. 그를 종교의 해방을 추구한 합리주의자, 무신론자로 본 사람도 있다. 허나 당시로서는 그런 주장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루시앙 페브르의 지적(그의 방대한 책도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래 라블레는 복음주의자였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를 바흐친은 부당하다고 비판하나,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축제의 본질은 미완·생성·모호함

    나는 앞에서 바흐친의 라블레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몇몇 문제를 떠나 바흐친은 우리가 라블레를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사실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우리말로 번역된 클라크 등이 쓴 ‘바흐친’에는 라블레를 “엄청난 양의 소시지와 포도주를 먹고 삼키는 투명한 육체의 서사시인” “끝을 모를 정도의 음식을 먹는 기쁨, 지칠 줄 모르는 섹스의 희열을 노래로 읊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바흐친은 정반대로 “금욕적인 학자, 추위와 기아로 점철된 어두운 시대의 시민”으로 묘사된다.

    이런 묘사는 평생 성직자였던 라블레가 과연 그랬을까 하는 당혹감을 불러 일으킨다. 아마도 그의 작품을 통해 그렇게 유추했으리라. 도리어 위 전기에서 라블레와 바흐친은 “웃음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이나 세상을 어느 정도로는 미친 것으로 볼 줄 아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 점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동질성은 그들이 역사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중세가 끝나는 르네상스 초기를 산 라블레나 러시아 혁명이 터진 뒤의 사회를 산 바흐친 사이에는 시대적 공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라블레가 그 작품을 판금당했듯 바흐친도 당시 러시아에서 소외당했다.

    바흐친이 라블레 문학의 본질이라고 분석한 축제는 종교나 예술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것은 세상의 다양성에 미친 듯 즐거워하고, 열린 세상을 축복하며, 늘 새로운 모습으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놀라게 하는 능력을 축하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위협한다.

    동시에 축제는 지나간 황금 시대에는 민중 전체에 속해 있던 세계를 향한 특출한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지향하며, 세계와 개인을, 개인과 다른 인간들을 변화의 기쁨과 흥겨운 상호 의존성으로 밀착시켜 모두가 해방된 친밀의 영역에서 하나되게 한다. 축제는 본질적으로 자유와 연관되고 웃음으로 표현된다. 반면 지배문화는 공포, 억압, 권위로 결코 웃음의 언어를 갖지 못한다.

    이처럼 라블레를 통해 축제를 강조한 바흐친의 의도는 분명하다. 즉 당시 러시아 당국에 대한 반항과 개별적인 문학적 목소리의 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축제는 바흐친이 말하는 시민의 자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축제를 거부하는 중세는 바흐친에게 이상적인 사회일 수 없다. 물론 바흐친은 축제적 사회가 대안이라고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유토피아적 차원으로 역사를 변모시키려는 사회와 문화에 비판적 비전을 제시한 것은 분명하다.

    바흐친은 스탈린주의의 억압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즐거운 상대성’이라는 정신을 끌어들인다. 축제는 공식적 의식의 절정에 이른 사회적 공기를 한숨에 날려보낼 수 있도록 언어나 계급을 격하시키고 민주화시키는 것이다. 축제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으며, 보편적 형제애가 나타나고, 모든 규범과 독단은 공격당한다. 축제에서 모든 것은 늘 움직이고 변하는 탓이다. 그 본질은 미완, 생성, 모호함이다.

    바흐친은 라블레를 “혁명적 정신을 깊이 간직한 인물”로 묘사한다. 라블레는 언어실천의 상대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독특한 특권을 주장하는 모든 세계관들을 상대화시켰다.

    라블레, 민중의 삶 노래한 유쾌한 상대주의자

    15세기 판화가 S.메트로가 당시의 축제를 묘사한 작품 ‘연인들의 향연’

    그런데 역사상 축제라고 하는 것이 과연 바흐친이 말한 그것과 같은 것이었는가? 중세나 르네상스기에 축제란 민중의 자발적 집회가 아니라 지배당국에 의해 사전에 허가된 행사로, 당국이 주장하는 체제에 반항하기는커녕 그 반항의 감정을 일정 수준으로 발산하게 해 결과적으로 체제의 이익에 봉사토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축제가 민중반항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예컨대 1580년 프랑스 동부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학살은 축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다.

    바흐친은 축제를 다분히 낙관적인 향수에서 이상화했다. 우리는 바흐친의 그런 관점을 넘어, 더 객관적으로 축제를 볼 필요가 있다. 축제가 허가 받은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즐기면서 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하는, 힘없는 민중에게 힘있는 지배자들의 위선이나 허위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공개적 장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함에 인색할 필요는 없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유토피아, 공상, 허구에 불과했다는 점 또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더욱이 축제는 때때로 강자가 아닌 약자, 특히 여성이나 소수인종, 또는 종교적·사상적 소수자를 악마로 몰거나 공격하는 위험한 행위를 동반하기도 했다.

    바흐친의 축제는 이처럼 ‘바흐친의 것’이다. 웃음, 생명력, 에로스,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 모든 것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상대주의, 좌우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는 민중성 등으로 요약되는 그의 축제는 이상적인 축제다. 우리는 그런 이상적 축제를 거부하지 말고 그런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 주변의 축제와 유사한 것들을 경계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야외의 불고기 파티나 대학생들의 소비 지향적 페스티벌은, 축제를 억압된 자들의 저항문화이며 하층민들의 새로운 질서라는 시각에서 볼 때 축제가 아니다. 미인 선발 대회, 패키지 여행, 집단 오락이나 취미 활동, 국수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인 합창, 권위주의적 음악회, 운동회의 응원, 포르노, 수많은 광고회사의 이벤트, 소비자로 가득 찬 백화점이나 슈퍼 또는 교회 부흥회의 흥청거림 같은 것도 축제가 아니다.

    축제는 몸의 움직임이고 부딪힘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그것과 유사한 대중 음란물을 몸의 정치학 운운하며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축제에서의 접촉은 자유롭고 친밀한 것이되, 음란물에서는 몸이 철저히 상업화되어 있다. 또한 축제가 공공적이고 집합적이며 참여적인 데 반해, 음란물은 수동적이고 단세포적이며 자학-가학의 관계다. 축제는 무료지만 음란물은 유료다.

    진정한 축제의 부활을 위해

    라블레와 바흐친의 축제는 단순히 축제 문제를 넘어서 모든 문화를 공식화한다. 라블레 이후, 르네상스 이후 축제는 없어지고 공식의 고급스러운 중심문화가 배타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축제의 언어·연극·음악·서커스는 축제로부터 분리돼 상품이 된다. 이처럼 문화가 소비 대상이 되면서 문화는 순수를 주장하고 자폐적이 되어 사회적 의미를 담지 않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비사회화는 제도적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다. 예컨대 17세기 후반부터 극장이나 연주회장은 공식적 연극의 상연과 공식적 음악의 연주를 위한 배타적 장소가 된다. 19세기에는 대중음악도 폐쇄돼 카바레나 카페 연주로 제한된다. 또한 저작권법이 발전해 예술의 상업화를 뒷받침한다. 왕이나 귀족에게 예속됐던 예술가는 이제 작품의 제작 및 판매자로 등장하여 노골적인 스타 시스템에 경쟁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문화는 본래 축제였다. 문화는 광장 혹은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상 생활의 투쟁에서 비롯된 욕망이나 기대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가 그러한 축제로 부활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예술가들은 직접 예술을 제작하고 민중에게 보급하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일들이 서양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문화만으로는 안 된다.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문화는 역사 안에서 형성된 것이어서 광범한 사회적 대화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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