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정밀 분석] 제2차 북핵 위기 A to Z

  • 글: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2-11-29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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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탄형으로 만든 우라늄탄, 폭발효율은 낮은 편
    • 내폭형으로 제작한 플루토늄탄 핵실험 필요
    • 플루토늄탄은 수폭을 터뜨리는 밑밥용 폭탄
    • 국군정보사 북한 고폭실험한 흔적 발견, 그러나…
    • 평북 대관군 천마산 지하동굴의 우라늄 정련 시설
    • ”북한-러시아 공동으로 원전 건설 추진중”
    • 북의 2중 전략, 안보문제는 미국과, 민족문제는 남한과
    • DJ, 남북정상회담 후 조명록-올브라이트 교차방문 허용
    • 일본의 장기불황이 초래한 조총련 붕괴
    • 북한 붕괴가능성 보고 6자회담 제의한 일본
    • 미국의 對이라크 전쟁이 김정일 정권의 미래 결정한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지난 10월17일 한국과 미국이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고 동시에 발표한 후 또다시 북핵위기가 높아지고 있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 후 8년 만에 다시 몰아친 이 위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는 무엇이고, 어디에 핵시설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제2의 한반도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신동아’는 공학적인 측면에서부터 국제정치적 측면에까지 제2차 한반도 핵위기의 모든 것을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2차 핵위기는 북한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제2차 북핵 위기의 모든 것을 탐색해 보기로 한다.

    ◇ [우라늄탄] 핵실험 필요없는 포탄형 ‘리틀보이’

    원자폭탄에는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소는 92개인데, 이중 가장 무거운 것이 우라늄이다. 이 우라늄을 이용해 만든 원폭이 우라늄탄이다.

    플루토늄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라늄이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와중에 중성자를 흡수하면 플루토늄이 생기는데, 이러한 플루토늄으로 만든 것이 플루토늄탄이다.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등장했다. 1945년 오키나와까지 점령한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그해 8월6일 히로시마(廣島)에 우라늄탄을 떨어뜨리고, 9일에는 나가사키(長崎)에 플루토늄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우라늄탄은 플루토늄탄과 무게는 비슷했으나 덩치가 작았기 때문에 ‘리틀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리틀보이는 길이 3m, 지름71cm. 무게 4t 정도였다. 폭발력은 TNT 1만3000t을 터뜨린 것과 비슷했다. TNT 1000t이 터질 때의 위력이 1킬로톤이니, 리틀보이는 13킬로톤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에는 화재와 폭풍에 매우 취약한 목조 가옥이 많았다. 또 히로시마는 평지에 건설된 도시였다. 이런 이유로 피해가 더욱 커져, 히로시마시는 중심부 12㎢ 정도가 폭풍과 화재로 완전 파괴되었다. 파괴된 가옥은 6만여 호였고, 사망자수는 7만 8000여명, 부상자수는 8만 4000여명, 그리고 수천 명이 행방불명됐다.

    한국은 우라늄탄 제조 불능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왼쪽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탄 ‘리틀보이’고 오른쪽은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탄 팻맨.

    우라늄 동위원소에는 235와 238이 있다. 천연 우라늄의 경우 235의 비율은 0.7%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238이다. 그런데 리틀보이를 만들려면 0.7%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라늄 235의 농도를 90%로 올려야 한다. 0.7%인 우라늄 235의 농도를 높이는 것을 ‘농축’이라고 한다.

    우라늄탄을 만들려면 첫째로 그 나라 안에 우라늄 광산이 있어야 한다. 남한에는 충북 괴산에 우라늄이 묻혀 있으나, 광석에 포함된 우라늄이 너무 적어 전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반면 북한의 평북 평산우라늄 광산은 경제성이 높다. 따라서 북한은 능력만 있으면 우라늄탄을 만들 수 있는 형편인 것이다.

    우라늄 235의 농도를 90% 이상 농축하려면 ‘원심분리기’를 사용해야 한다. 원심분리기는 길이 3.2m, 직경 22cm 정도의 긴 원통이다.

    우라늄 238보다는 우라늄 235가 가볍다. 원심분리기에 우라늄과 불소 가스를 넣어 빠르게 돌리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우라늄 238이 원심력에 의해 떨어져 나감으로 235의 비율이 높은 우라늄을 얻을 수 있다.

    자동차 계기판을 보면 분당 엔진 회전수를 나타내는 rpm(revolutions per minute) 판이 있다. 자동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단 기어를 넣고 시속 140km로 달릴 때의 rpm은 대개 4000 정도다. 그런데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원심분리기의 회전 속도는 무려 7만 rpm에 이른다. 이러한 원심분리기 한 대를 1년 간 계속 돌리면 235의 농도가 90% 이상인 고농축 우라늄 30g 정도를 얻을 수 있다.

    우라늄은 매우 특이한 광물이어서, 일정한 무게에 이르기 전에는 핵분열 연쇄반응(핵폭발)을 일으키지 않는다. 무게를 한자어로는 ‘질량(質量)’이라고 하고, 일정한 한계는 ‘임계(臨界)’라고 한다. 따라서 고농축 우라늄이 핵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무게를 전문용어로는 ‘임계질량(臨界質量)’이라고 한다. 임계질량은 우라늄 235의 농도가 얼마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90% 농도에서는 약 50kg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는 분당 7만회씩 회전해 사람 귀에는 그 회전음이 들리지 않는다.

    원심분리기 한 대를 1년 간 가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90% 농도의 고농축 우라늄이 30g이라고 했으니, 50kg을 생산하려면 1700여 개의 원심분리기를 돌려야 한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파키스탄은 2000개의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60kg의 농축우라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방국가는 원심분리기를 공산국가에는 팔 수 없는 COCOM(對 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 규제 품목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제조 기술을 도입한다는 보고는 1996년부터 있었다. 파키스탄은 고농축 우라늄 생산 기술을 갖고 있었으나, 우라늄탄을 운반하는 미사일 제조 기술이 취약했다. 북한은 파키스탄에 스커드B 미사일과 노동미사일 개발에서 습득한 기술을 제공하고 대신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핵 제조 기술을 넘겨받았다. 북한은 이 기술을 토대로 우라늄탄 제조에 착수했고, 파키스탄은 가우리 미사일 개발에 돌입한 것이다.

    파키스탄이 북한으로 원심분리기를 넘겨주려고 한 사실이 포착된 것은 1998년이었다. 지난 10월24일 신건(辛建)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 연구기관인 칸연구소에서 원심분리기 자재를 구입하려고 해, 미국과 함께 저지했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 원심분리기는 길이 3.2m, 직경 22cm 밖에 되지 않는 원통이라 큰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200∼300평 크기 방이라면 40기 정도를 설치할 수 있고 5000∼6000평 크기 공간이라면, 1000여기의 원심분리기를 설치할 수 있다. 북한은 지하 동굴을 파는데는 명수여서, 지하에 5000∼6000평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자동차를 시속 140km 정도로 몰면 rpm이 올라가 상당한 엔진 소음이 발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5000∼6000평의 공간에서 7만 rpm으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1000여 대를 동시에 돌린다면, 그 소음은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원심분리기는 회전속도가 너무 빨라 인간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소리가 난다. 때문에 바로 곁에 사는 사람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북한은, 지역 주민 몰래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도킹 속도가 결정하는 리틀보이의 힘

    이렇게 해서 북한이 임계질량치의 고농축 우라늄을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고농축 우라늄은 임계질량치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핵분열을 일으키므로,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상공으로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발생한다. 따라서 우라늄을 농축할 때는 임계질량치만큼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하는 것 못지 않게,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군 손에 있을 때는 터지지 않고, 오직 적 상공에 떨굴 때만 터지도록 조작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그림 1> 포탄형으로 제작된 우라늄탄의 구조도.

    리틀보이는 이를 위해 처럼 가운데 차단벽을 설치한 용기안에 고농축 우라늄을 나눠 넣었다. 그리고 한쪽의 고농축 우라늄 뒤에 TNT 폭약을 넣고, 그 뒤에는 정해진 시간에 TNT를 터지게 하는 기폭장치를 설치했다.

    리틀보이는 B-29 폭격기에 실려 5000m 상공에서 떨어졌는데 지상 500m 상공쯤에서 기폭장치가 작동했다. 그 순간 TNT 앞에 있던 고농축 우라늄이 다른 편에 있던 고농축 우라늄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로 인해 두 개의 고농축 우라늄은 ‘착’ 달라붙어 임계질량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핵분열(폭발)이 일어났다.

    이러한 방식은 한쪽에 있던 고농축 우라늄을 ‘포탄’처럼 반대편에 있는 고농축 우라늄으로 쏴준다고 해서 ‘포탄형(Gun Type)’이라고 한다. 히로시마는 포탄형 리틀보이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리틀보이에서 제대로 핵분열을 일으킨 고농축 우라늄은 3%(1.5kg)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나머지 97%(48.5kg)의 고농축 우라늄은 핵분열을 하지 못하고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리틀보이가 위력을 충분히 발휘케 하려면 두 개의 고농축 우라늄이 ‘도킹’하는 속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해줘야 한다. 리틀보이에서 TNT가 한 쪽에 있던 고농축 우라늄을 쏴 준 속도는, 초속 약300m(시속 약 1080km)였다. 이는 오늘날 제트 여객기가 날아가는 속도와 비슷하다.

    1945년의 기술로는 고농축 우라늄을 여객기 속도로 날려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리틀보이는 세게 터지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우라늄탄을 만들 때는 고농축 우라늄 두 개의 도킹 속도를 높이는 기폭장치 개발이 중요하다.

    그러나 포탄형에서는 두 개의 고농축 우라늄을 거리를 두고 떨어뜨려 놓아야 하기 때문에 도킹 속도를 올리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나온 것이 ‘내폭형’이다. 내폭형은 물리적인 거리를 두지 않은 상태에서 고농축 우라늄을 도킹시키는 것인데, 이는 플루토늄탄 부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포탄형 우라늄탄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포탄형으로 제작되는 우라늄탄은 핵실험을 해보지 않고 사용해도 거의 100% 폭발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핵실험을 하면 국지적으로 지진이 일어나 주변국에서 핵실험 사실을 알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재를 가한다. 하지만 우라늄탄은 핵실험을 할 필요가 없어 비밀리에 만들어 두었다가, 상대가 ‘까부는 순간’ 와장창 터뜨릴 수 있다.

    ◇ [플루토늄탄] 폭발 효율 좋은 내폭형 ‘팻맨’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탄이다. 이 플루토늄탄은 273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5m 정도 길이에 직경 1.2m, 무게 4.5t 정도였다. 무게는 리틀보이(4t)와 큰 차이가 없으나 직경이 훨씬 더 커 ‘팻맨(Fat Man: 뚱뚱한 어른)’이란 별명을 얻었다. 팻맨은 실전에서는 리틀보이보다 3일 늦게 사용됐지만,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폭발을 일으킨 것은 팻맨이었다.

    우라늄탄은 임계질량치만 확보되면 거의 100% 핵분열을 일으킨다. 그러나 플루토늄탄은 임계질량치 이하를 갖고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 터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과연 터지는지 실험해 본 후, 터지는 것이 확인되면 똑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플루토늄탄을 제작한 미국은 1945년 7월16일, 뉴멕시코주 아라마고드에서 사상 최초로 플루토늄탄 폭발실험을 감행했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이었다. 그리고 24일 후인 8월9일 똑같은 플루토늄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려 사람을 살상하고 가옥을 파괴했다.

    팻맨의 위력은 22킬로톤이었고 폭발 효율은 20% 정도에 이르렀다. 팻맨이 리틀보이보다 강력하게 터졌으니, 나가사키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나가사키에서는 사망자 2만여 명, 부상자 5만여 명, 완파된 가옥 2만여 호, 반파된 가옥 2만 5000여 호로 히로시마의 절반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첫째 이유는,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달리 산과 언덕이 많았던 것이다. 천하의 원자폭탄이라도 산과 언덕이 많은 곳에서는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둘째로는 나가사키의 인구가 히로시마보다 훨씬 적었던 것이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로 추출

    플루토늄탄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주며 역사에 등장했지만, 곧 우라늄탄을 제치고 원자폭탄의 대명사가 되었다. 플루토늄탄이 원자폭탄의 대표가 된 것은 팻맨의 폭발효율이 리틀보이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왜 플루토늄탄이 우라늄탄보다 폭발 효율이 큰 것일까. 이 의문에 답하기 앞서 잠시 플루토늄 추출 과정을 살펴보자. 앞에서 밝혔듯이 플루토늄은 자연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원소다. 플루토늄은 원자로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때문에 원자로가 없으면 플루토늄탄은 만들 재간이 없다. 플루토늄탄을 이해하려면 원자폭탄(우라늄탄)과 원자로에 쓰이는 핵연료의 차이점부터 알아야 한다.

    우라늄탄은 우라늄 235의 농도가 90% 이상인 것이지만, 원자로에 쓰이는 핵연료는 우라늄 235의 농도가 2∼5%다. 나머지 95∼98%는 우라늄 238로 채워져 있다. 우라늄탄은 무기니만큼 순식간에 폭발해 큰 에너지를 내야 한다. 하지만 발전(發電)용인 핵연료는 원자로 안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에너지를 내며 오랫동안 타야 한다.

    이렇게 장기간 태워야 하기 때문에 핵연료는 우라늄 235의 농축도를 낮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원자로에 쓰이는 핵연료도 농축 우라늄이라 부른다. 원폭에 쓰이는 것은 고농축 우라늄, 핵연료로 쓰이는 것은 농축우라늄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핵연료는 농축도가 낮기 때문에 스스로는 핵분열을 일으키지 못한다. 핵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우라늄에서 중성자가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따라서 핵연료를 원자로에 장전할 때는 핵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중성자를 발생시키는 장치를 함께 넣는다. 이 장치에서 중성자가 튀어나와 우라늄을 때리면 그 우라늄에서 다시 중성자가 튀어나오면서 연속적으로 핵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다 핵분열이 너무 빨라지면 중성자를 흡수할 수 있게 은과 이리듐 등을 섞어서 만든 ‘제어봉’을 집어넣는다. 제어봉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핵분열 속도를 조절해 일정한 출력을 내게 하는 것이 원자로다.

    이렇게 오랫동안 핵분열이 일어나면, 핵연료 안에 가장 많은(95∼98%) 우라늄 238 중 일부가 중성자를 받아 플루토늄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생성된 플루토늄은 우라늄 235 같은 핵분열 물질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원자로에 핵연료를 장전하면, 1년 6개월 후 새로운 핵연료로 교체한다. 원자로에서 1년 6개월간 타다 나온 핵연료를 ‘사용후 핵연료’라고 하는데, 사용후 핵연료에 플루토늄이 들어 있다.

    사용후 핵연료에 들어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남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모아서 지하동굴에 영구 처분하는 것을 ‘재처리’라고 한다. 사용후 핵연료의 무게가 100kg일 경우 재처리해서 얻는 플루토늄은 1kg 정도다. 이러한 플루토늄 2∼5%에 우라늄 238 등을 95∼98% 섞으면 ‘MOX(Mixed Oxide : 혼합 산화) 연료’가 만들어지는데, MOX 연료는 농축 우라늄으로 만든 핵연료와 똑같이 원자로에 사용하는 연료가 된다.

    팻맨은 임계질량치 이하로 폭발

    그런데 플루토늄을 저농축하지 않고 90% 이상으로 고농축해 임계질량에 이르게 하면, 이때는 플루토늄 핵폭탄이 만들어진다. 고농축 우라늄의 임계질량은 50kg인데 반해 플루토늄은 순도가 높기 때문에 10kg 내외가 임계질량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그림2> 내폭형으로 제작되는 플루토늄탄의 구조도.

    그러나 팻맨 방식으로 플루토늄탄을 만들면, 임계질량치 이하인 4∼5kg의 플루토늄만 있어도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팻맨은 어떻게 임계질량보다 적은 플루토늄으로 핵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 비밀은 내폭형(內爆型·Implosion Type)이라는 데 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 235와 달리 중성자가 활발히 발생한다. 때문에 임계질량치 이상의 플루토늄을 둘로 쪼개 한 용기 안에 넣어두면, 양쪽에서 중성자가 발생해 오가기 때문에 막바로 핵분열이 일어나버린다. 그래서 플루토늄탄은 포탄형으로 제작할 수가 없다.

    내폭형이란 한마디로 임계질량치 이하의 플루토늄을 둥그런 공 모양으로 만들고, 이 ‘플루토늄 공’ 위에 TNT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플루토늄 공을 용기에 넣은 후 기폭장치를 통해 TNT를 터뜨리면, 폭발 압력 때문에 플루토늄이 안으로 수축해 들어간다.

    플루토늄이 폭압을 받아 갑자기 수축하면 원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임계질량이 아닌데도 중성자가 활발히 튀어나와 핵분열이 일어난다. 이때의 플루토늄은 ‘도킹’ 과정 없이 바로 분열하기 때문에 우라늄탄보다 폭발 효율이 월등히 높은 것이다.

    리틀보이에는 50kg의 고농축우라늄이 들어갔지만 팻맨에는 그 10분의 1인 5kg의 플루토늄이 장전되었다. 그러나 팻맨의 폭발효율이 리틀보이(3%)보다 월등히 센 20%에 달했기 때문에, 22 킬로톤의 위력을 발휘했다.

    내폭형 원폭은 임계질량치 이하의 핵분열 물질로도 핵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지난 10월24일 신건 국정원장이 비공개로 열린 국회 정보위에서 “1992년 이전에 북한은 7∼22k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따라서 북한은 1∼3개의 핵폭탄을 제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과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3000㎾와 5000㎾의 열출력을 가진 실험용 원자로 두 기를 도입해 평북 영변군에 설치했다. 실험용 원자로는 연구를 위해 만든 것이라 상업용 원자로에 비해 사용후 핵연료 추출이 용이하다. 북한은 이 실험용 원자로에서 뽑아낸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것이다.

    플루토늄탄은 반드시 내폭형으로 제작해야 하나, 우라늄탄은 포탄형으로 만들 수도 있고 내폭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라늄탄을 내폭형으로 만들면, 역시 임계질량치보다 적은 양, 즉 15kg 정도의 고농축 우라늄으로도 원폭을 만들 수 있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의 마지막 승부수

    플루토늄 추출원인 사용후 핵연로를 뽑아냈으리라 추정되는 북한의 실험용 원자로

    그러나 내폭형에는 한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TNT의 배치가 균일하지 않거나 내폭 에너지가 작으면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내폭형 원자폭탄을 만들 때는 내폭 에너지를 균일하고 강력하게 만드는 장치부터 개발하여야 한다. 이러한 장치를 ‘고폭(高爆) 장치’라고 한다.

    고폭장치를 만들려면 수십~수백 번의 고폭 실험을 하며,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플루토늄 대신 플루토늄과 유사한 성질을 가진 다른 물질을 넣고 내폭 에너지가 얼마 크기로 작용하는지를 상세히 체크해야 한다.

    한미 정보기관은 1983년 이후 최근까지 북한이 70여회 이상 고폭 실험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폭 실험을 했다는 것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이용해 내폭형 원폭을 만들려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폭장치가 완성되면 플루토늄이나 고농축 우라늄을 넣고 핵실험을 한다. 이러한 핵실험을 통해서 원폭은 조금씩 개량된다. 핵보유국의 핵 실력은 핵실험 횟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러시아는 1000번 이상 핵실험을 했기 때문에 100번 이하의 핵실험을 한 영국·프랑스·중국의 핵무기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 크게 앞서 있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는 세 나라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원폭을 제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까지 핵실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북핵 위기는 북한이 IAEA의 사찰을 거부하고 한편으로는 고폭실험을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플루토늄탄을 개발하겠다는 북한의 의지가 분명하자 미국은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를, 북한은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을 내세워 미-북 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1994년 10월22일 ‘북한은 현 상태에서 핵개발을 중단(동결)한다. 대신 미국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세워 장기 저리차관 형태로 2003년까지 북한에 100만㎾급 가압경수로 두 기를 지어준다. 그리고 2003년까지는 북한이 연간 30만 ㎾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매년 50만t의 발전용 중유를 장기 저리차관 형태로 제공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월17일(한국 시간) 한국 외교통상부 이태식 차관보와 미국 국무부 제임스 켈리 차관보는 동시에 북한이 새로운 핵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는 북한이 1994년에 동결된 플루토늄탄 개발과는 다른 우라늄탄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되면서 한반도 상공에는 또 다시 ‘북핵 먹구름’이 몰아쳤다.

    플루토늄탄은 미해결 상태

    내침 김에 플루토늄탄을 좀더 알아보자. 내폭형으로 등장한 플루토늄탄은 폭발 효율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우라늄탄을 제치고 원자폭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미·러·영·불·중의 5대 핵보유국에서 원폭은 그 수명이 매우 짧았다. 1952년 미국이, 1953년 소련이 수소폭탄을 개발하면서부터, 5대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원폭에서 수폭으로 교체해버린 것이다. 이제 5대 핵보유국에서 말하는 핵무기는 수폭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폭은 원폭보다 수천∼수만 배 위력이 강하다. 킬로톤보다 폭발력이 1000배 큰 것을 메가톤이라고 한다. 1945년에 나온 리틀보이와 팻맨은 13에서 22킬로톤의 위력을 갖고 있었지만, 5대 초강대국이 보유한 수폭은 수십∼수백 메가톤의 힘을 갖고 있다.

    원폭은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하지만, 수폭은 분열된 핵에너지가 다시 융합할 때 생기는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따라서 수폭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핵분열이 있어야 하는데, 5대 핵보유국은 플루토늄탄을 터트림으로써 핵분열을 얻는다. 5대 핵보유국에서 원폭은 수폭을 터뜨리기 위한 ‘밑밥용’ 폭약으로 전락한 것이다.

    현재의 북한 실력으로는 수폭을 개발할 수 없다. 1945년 미국이 개발한 초기 단계의 원폭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오랫동안 북한 핵문제를 연구해온 이춘근 박사는 “플루토늄탄 문제는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우라늄탄 문제가 추가된 것이 북핵 위기의 본질이다. 1994년 북핵 위기가 해결이 아닌 동결로 끝났기 때문에 8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큰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번 북핵 문제는 반드시 ‘동결’이 아닌 ‘해결’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외면해온 진실] 대북 공작조직 붕괴로 추적 중단

    공학적인 측면에서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의 특징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북한의 핵개발 움직임을 포착하게 된 경위를 추적해 보자.

    조악한 단계의 원폭일지라도 그 무게는 1t 이상이기 때문에 이를 발사하려면 큰 미사일이 있어야 한다(리틀보이와 팻맨도 4t 이상이었다). 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무게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탄두가 무거우면 사거리가 짧아지고, 가벼운 탄두라면 미사일은 멀리 날아갈 수가 있다.

    대포동(북한 명칭은 화성 7호)은 북한이 보유한 가장 큰 미사일이지만, 사거리를 너무 길게 잡아 핵탄두 같은 무거운 폭탄은 탑재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노동(화성 5호) 미사일이 핵무기 탑재 수단으로 지목되는데 핵탄두를 탑재하면 노동 미사일의 사거리는 더욱 짧아진다(일부에서는 현재의 북한 기술로는 노동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핵탄두를 제조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 대상은 한국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지난 10월17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와 한국 외교통상부 이태식 차관보가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발표할 때까지, 북한의 핵개발을 차단시키려는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0월17일 발표도 미국이 발견한 것을 한국이 공동발표 형태로 참여했을 뿐이다. 신건 국정원장이 국회에서 보고한 것도 해외에서 취득했거나 김대중 정부 이전에 획득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고폭실험과 중앙일보 기사 수정 사건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북한 핵개발과 관련한 결정적인 첩보는 끊이지 않고 나왔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해인 1998년 11월20일, 중앙일보는 매우 주목할 만한 기사를 내놓았다. 1면과 3면에 보도된 이 기사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군정보사의 S중령과 K중령, L대령(예비역)이 이끄는 팀은 김영삼 정부 시절(시기는 확인 안됨) 평안북도 대관군 ××리에 침투해 토양을 채취해왔는데, 이 토양에서 (플루토늄탄을 제작하기 위해) 고폭실험을 한 흔적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8년 8월 S중령에게는 화랑무공훈장, K중령과 L예비역대령에게는 인헌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적조서에 기재돼 있는 인적사항은 모두 허위였다. 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로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차관조차도 이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사실을 모를 만큼 이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중앙일보는 초판 기사에서 S중령 등을 국군정보사 소속으로 밝혀놓았다. 그러나 초판이 나온 직후 김인종(金仁鍾·육군 중장, 후에 2군 사령관 역임) 국방부 정책실장 김민석 중앙일보 국방부 출입기자를 상대로 “국가 기밀이 누출되었다”며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김기자가 거부하자 김실장은 중앙일보 편집국을 찾아가 같은 요구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앙일보는 S중령 등이 국군정보사 소속이라는 사실을 삭제했다. 또 이들이 토양을 채취해온 곳을 감춰주기 위해, 당시 많은 사람이 유력한 핵개발 지역으로 보던 대관군 금창리에서 토양을 채취해온 것으로 수정해 주었다(중앙일보는 이러한 기사 수정 사정을 1년 후인 1999년 10월2일자에 자세히 보도했다).

    대관(大館)군은 분단 전에는 삭주(朔州)군으로 불리던 곳이다. 평북 삭주군은 북쪽으로는 수풍댐이 있는 압록강을 끼고 있고(수풍댐은 삭주군 안에 있다), 서쪽으로는 신의주을 안고 있는 의주군과 만나며, 서남쪽으로는 구성(龜城)군과 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러한 삭주군을 둘로 쪼개 수풍댐을 안고 있는 북쪽은 그대로 삭주군으로 두고, 남쪽의 산악지대를 대관군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삭주군 서남쪽에 있던 구성군도 천마(天摩)군과 구성시로 양분했다.

    탈북자들은 대관군을 산으로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한다. 그 정도로 첩첩 산골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국군정보사 요원들은 삭주군을 지나 첩첩산중인 대관군 지역까지 침투해 고폭실험을 한 흔적을 가져온 것이다.

    이들이 가져온 토양을 미국으로 보내 분석했다. 그 결과 고폭실험을 한 흔적이 발견되자, 1998년 4월 패트릭 휴즈 미 국방부 국방정보본부(DIA)장이 직접 서울로 날아와 분석 결과를 브리핑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온 한국 측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국군정보사 요원 세 사람이 무공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메카는 계속해서 금창리로 추정했다. 미국은 국군정보사 요원들이 가져온 정보 등을 토대로 “1997년부터 1998년 사이 북한은 이 지역(금창리 부근)에서 세 차례 고폭실험을 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하며 북한을 압박하다, 1999년 5월20일 찰스 카트먼 특사를 단장으로 한 14명의 조사단으로 하여금 금창리를 조사케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사단은 빈 지하터널만 발견하고 맥없이 돌아왔다

    금창리 실패를 계기로 미국과 한국에서는 북한 핵개발에 대한 보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을 드나들며 탈북자 귀순을 도와온 한 민간인이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이 민간인은 황장엽 씨 망명 사건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사람으로, 대북 첩보 수집에 남달리 강점이 있다.

    1999년 이 민간인은 북한 인민군의 작전국 부국장을 지낸 소장(한국군 준장에 해당)이 북한을 탈출해 중국 공안에 잡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즉시 인민군 소장을 한국에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돈을 마련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1주일 전쯤 중국 공안은 인민군 소장을 북한으로 송환해버렸다. 헛물을 켠 이 사람은 대신 인민군 소장을 조사한 중국 공안의 조서를 입수했다. 이 조서는 통역을 맡았던 조선족이 한글로 작성한 것이었다.

    이춘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인민군 소장은 북한의 핵물질 생산기지는 대관군 천마산(天摩山) 지하 동굴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춘선은 미국이 금창리를 조사한 후 탈북한 듯, 금창리에 대해 이렇게 서술해 놓았다.

    ‘금창리는 천마산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금창리에 있는 지하터널은 천마산 지하터널의 배기구 구실을 한다. 그런데 금창리 지하터널에서 실수로 핵물질을 함유한 기체가 누설돼, 그 일대 수목이 노랗게 말라죽은 적이 있다. 인공위성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미국은 금창리 일대에 핵시설이 있을 것으로 오판하고 빈 지하터널만 둘러보았다.’

    한국에서 발행된 지도에 따르면 천마산은 대관군과 천마군 사이에 있는 해발 1169m의 산이다. 그러나 이춘선이 잘못 알았는지 아니면 조선족이 잘못 받아 썼는지, 조서에는 천마산의 높이를 1116m로 적어놓았다. 이춘선은 조서에 ‘천마산 핵시설은 천마산 발전소란 위장 명칭을 달고 있다. 이곳에 있는 지하 터널은 인민무력부 공병국 산하 제2사단이 1984년 공사에 들어가 1986년 완공한 것이다. 1987년부터는 이 지하터널에 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1989년부터 핵물질 생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어 이춘선은 천마산 발전소는 일곱 개 과로 구성돼 있으며, 각과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했다. 또 이곳에서 처리하는 핵광석(우라늄광석)은 평남 성천군과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채취해 5t 트럭 30여대로 싣고 온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조서를 갖고 돌아온 민간인은 이 조서를 국가정보원과 서울에 나와 있는 미 CIA 요원에게 제공했다(신동아 2001년 8월호는 이춘선의 조서를 입수해 전문을 공개한 바 있다).

    정련과정의 비밀시설

    핵물질은 우라늄 광석을 ‘채굴’하고→채굴한 우라늄광석을 옐로 케이크(Yellow Cake)로 만드는 ‘정련’을 거친 후→우라늄 235의 농도를 높이는 ‘농축’을 시키고→마지막 ‘가공’ 과정을 거쳐 핵연료로 만들어진다.

    이춘선은 조서에서 ‘이곳에서는 평남 성천군 등에서 가져온 핵광석을 녹여 제련한다. 제련한 우라늄은 밀폐한 용기에 넣고 직승기(헬기)에 실어, 평안남도 안주시 남칠리와 문덕군 입석리 사이에 있는 안주시 교창리 계곡의 지하 저장고로 옮겨진다’고 밝혔다.

    신동아를 통해 이춘선의 조서를 읽어본 핵전문가들은 천마산 발전소는 우라늄 정련 기지인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들은 “핵광석을 녹여 제련한 다음 밀폐된 용기에 넣는다는 표현은, 우라늄 광석을 정련해 옐로 케이크를 만들어 용기에 보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이춘선은 옐로 케이크를 농축하는 곳이 어디인지까지는 조서에 밝히지 않았다.

    2001년 말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원자력 발전을 많이 하는 원전 대국이다. 원자력 발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1억174㎾, 원자로 수는 103기)이고, 이어 프랑스(6292만㎾, 57기)-일본(4508만㎾, 52기)-러시아(2256만㎾, 30기)-독일(2236만㎾, 19기)-한국(1371만㎾, 16기) 순이다. 한국은 16기의 원전을 가동하기 위해 한 해 평균 800t의 핵연료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우라늄광산이 없기 때문에 정련과 농축은 하지 못하고 외국에서 농축한 우라늄을 수입해, ‘가공’ 만 해서 핵연료를 만든다. 이러한 작업은 대전에 있는 한전원자력연료(주)에서 하는데, 이 회사에는 IAEA (국제원자력위원회)의 감시카메라가 주야로 작동한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 가입 국가로 IAEA가 실시하는 사찰을 성실히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천마산 발전소는 비밀 시설이라 IAEA의 사찰을 받은 적이 없다.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특징짓는 사건이었다. 대북전문가들은 “과거 정부에서는 당국간 대화라는 공식채널 외에 비밀리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비공식 채널을 가동했다. 그런데 현정부 들어 대북정책이 포용과 화해로 바뀌면서 비공식 채널이 스톱됐다”고 말한다.

    정보기관의 대북 공작조직이 와해된 후 NGO들이 그 공간을 파고 들어갔다. 대북 전문가들은 “탈북자들이 베이징(北京)에서 외국 공관으로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탈북자를 돕는 NGO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보기관의 대북공작 조직이 와해되자 그 공간을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NGO가 파고 들어가 탈북자를 빼내오고 북한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리는 “공식 채널로만 대북 첩보를 구하려는 DJ 정부의 심정은 이해되지만 그로 인한 문제도 적지 않다. 우라늄탄 개발 계획처럼 북한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 경우 공식채널로는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한쪽으로는 공식채널을 가동하더라도 다른 편에서는 비공식 채널로 검증해야 한다. 고폭실험이나 정련시설 같은 것도 북한이 ‘그런 적 없다’고 주장하면 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 지금 대북정책의 허점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북한은 지난 5년 사이 우리를 속인 적이 없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탈북자 남광식씨(南光植·46)는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씨는 1999년 12월 비공개로 한국에 온 탈북자인데, 탈북 당시 그의 아버지는 우리의 문화관광부에 해당하는 문화예술부의 당 책임비서(장관급)였고, 형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평양시 부시장에 해당)이었다. 성분 좋은 집안 출신이었던 남씨는 북한으로 납북돼온 영화감독 신상옥씨 밑에서 조감독 생활도 했었다.

    지난 9월17일 열린 북-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거론해 김정일로부터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시인을 받아냈다.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남씨다. 일본 외무성은 남씨로부터 ‘평양 인근의 안산초대소에 납치된 일본인들이 살았다’는 정보를 제공받은 후, 실무회담에서부터 줄기차게 납북자 문제를 거론해, 마침내 정상회담에서 김정일로부터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시인을 받아냈다.

    한국에 오기 전 남씨는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서 원유를 수입하는 일을 했다. 때문에 연해주 쪽 정보는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다. 지난 8월23일 김정일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수호이 27기 제작 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김정일의 방러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분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남씨는 김정일은 원전 건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이다.

    “북-러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북-러 국경선인 두만강 부근에 양국이 공동으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원전을 북한 영토인 두만강 노동자구에 짓자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두만강 바로 건너편인 하산 지구에 짓자고 주장하였다. 원전을 지어 전기를 나눠 쓰자는 데는 합의했으나, 어디에 지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못해 양측은 합의 내용을 발표하지 못했다.”

    북한과 러시아가 함께 원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1990년 이후 소원했던 양국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이 신의주 행정특구장관인 양빈(楊斌)을 연행한 배경에는 북한이 그동안 중국이 베풀어준 후의(厚意)를 외면하고 러시아에 접근하는 데 대한 경고의미도 담겨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동북아의 국제정치] 북한 붕괴를 알리는 전주곡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북한 전문가 A씨는 “북한이 전쟁에 의한 통일(무력통일)은 포기한 지 오래다. 이번에 시작된 북핵 위기도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그 이유를 6·25전쟁에서 찾았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미연합군이 북진해 올라가자 김일성은 평북 강계로 도주했다. 6·25 전쟁 초기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 정부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느라 노심초사했듯이, 강계로 도주한 김일성도 청천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이때 김일성이 있던 곳이 ‘별오리’인데, 지금도 북한 문헌에는 ‘별오리에서 고생하던 때를 잊지 말자’는 구호가 자주 나온다. A씨는 “6·25 전쟁을 통해서 김일성은 미군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는 남한 지도자들이 북한군의 남침을 염려하듯이, 김일성-김정일과 그 추종세력 역시 한미연합군(특히 미군)의 북침을 두려워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북침을 두려워하는 증거로 그는 1994년 중지된 팀스피리트 훈련을 거론했다.

    이 훈련은 황군과 청군으로 나눠 실시됐는데, 어느 한쪽(북한군 역)이 도하작전을 감행해 밀고 들어오면, 반대쪽(한국군과 주한미군)은 어느 정도 후퇴해 이를 막는다. 그러다 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면 전세를 역전시켜 밀고 올라가 도하작전을 성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두 차례의 도하작전인데, 도하작전에는 휴전선을 넘어 진격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진주만 공격을 비롯한 큰 전쟁에는 기동훈련을 핑계로 병력을 출동시킨 후 상대를 선제 공격한 예가 적지 않다. 때문에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한미연합군이 그대로 북진해 올까봐 긴장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곤 했다. 이러한 북한의 두려움을 감안해 한미연합군은 남북이 아닌 동서로 이 훈련을 펼쳤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중단된 지금 한미연합군은 워게임을 통해 제2의 한반도 전쟁에 대비한 훈련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독수리훈련과 RSOI 훈련 등을 통해 상륙작전이 포함된 연합훈련을 벌이고 있다. A씨는 “상륙작전이 포함된 훈련은 북한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준다. 한반도 문제를 살필 때는 남한이 받는 위협뿐만 아니라 북한이 받는 스트레스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북한인들을 접촉해온 B씨는 “무력통일을 포기한 북한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적화통일이다”라고 설명했다. 적화통일은 남한에 공산주의 정당이 생겨 선거나 민중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으면, 북한의 노동당은 이 정당과 합의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B씨는 “무력통일과 적화통일은 크게 다르다. 적화통일은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공산주의가 일어나 권력을 잡는 것을 전제하므로 북한 쪽에서는 평화통일이 된다. 따라서 이 남한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베트남식 통일 방안

    이런 점에서 적화통일 방안은 남한의 보수인사들이 꿈꿔온 흡수통일 방안과 흡사하다. 흡수통일은 북한에서 반(反)김정일 세력이 봉기해 정권을 잡고 남한과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한 후 국민투표를 통해 남한과 합치는 통일방안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남한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고 미군이 철수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오기 전에는 북한이 대규모 군사 도발을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치학자 C씨는 1965년 4월14일 인도네시아의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을 방문했던 김일성이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적화통일 방안을 처음으로 공표했다고 설명했다(이 연설문은 신동아 1989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발매된 ‘원 자료로 본 북한’ 234쪽에 전문이 실려 있다). C씨는 “북한은 무력통일을 포기하는 대신 베트남식 통일 방안을 채택하기 위해 남조선 혁명을 강조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리된 가운데, 남부 베트남에서 베트콩이 발호했다. 이들의 세력이 너무 세서 남부 베트남 정부는 힘을 잃고 미국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가운데 1968년부터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은 미국과 북부 베트남 그리고 베트콩 대표였다. 김일성은 무력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남한에서 혁명세력이 일어나 힘을 가진 후, 이들이 미국·북한과 함께 테이블에 앉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적화통일이라는 방안을 마련했다.”

    C씨는 “이러한 결정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이산가족 만남이나 경제협력 같은 민족내부 문제는 남한과 협상하나, 군사 문제와 한반도 통일방안 같은 안보문제는 미국과 협상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1974년 북한은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북한이 제의한 평화협정에 불가침 조약 부분이 있었다. 평화협정은 다른 말로 하면 강화협정인데, 강화협정은 전쟁을 치른 나라가 전쟁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때 맺는다. 북한과 미국이 강화협정을 맺으면 미군은 한국에 주둔할 이유가 적어진다.

    이러한 북한의 공세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한반도 안보문제를 놓고 미국이 북한과 바로 대화하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카터 정부는 남북한과 미국 3자가 앉아서 한반도 안보문제를 논의하자(3자회담)고 제의했으나, 북한이 거절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지나면서도 미-북간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1990년 동유럽이 연쇄적으로 붕괴했을 때 북한은 큰 두려움을 느낀듯, 안보문제를 남한과 논의했다. 그 결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고(1991년), 남북한 불가침합의가 이루어졌다(1992년). 북한은 불리하다고 느낄 때는 남한과도 안보문제를 협의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 때인 1993년 북핵 위기가 터져나오면서 북한은 불리하게 진행돼온 남북관계를 역전시키고 20여년 간 고대해온 미-북회담을, 그것도 북한에서는 부부장(강석주)이, 미국에서는 차관보(갈루치)가 나오는 고위급 회담으로 여는데 성공했다(이른바 강-갈 회담).

    강-갈 회담의 의제가 북한 핵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이 회담은 한반도의 안보 문제를 거론하는 마당이 되었다. 이 고위급 회담의 결과물이 1994년 10월에 나온 제네바 합의다. 강-갈회담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의했다.

    4자회담은 강-갈회담을 여는 전제조건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에, 1997년부터 열렸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해 남북회담을 추진한 후로는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4자회담은 남북한이 안보문제로 마주 앉았다는 의미를 남겼지만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남북회담에서는 안보문제가 거의 논의되지 못했다.

    안보문제의 비중을 줄인 가운데 줄기차게 남북대화를 요구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로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미국이 마주앉을 수 있게 허용했다. 김대중 정부는 북-미간 직접 대화가 한반도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 문제에 관련해 C씨는 흥미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이 민족문제를 풀기 위한 통일방안으로 내놓은 것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주 내용으로 한 고려연방제 안이다. 6·15 공동선언에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요소뿐만 아니라 북한이 제의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인정하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된 5개항은 민족문제에 대한 것만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북한 쪽에서 보면 남북정상회담은, 남한과는 민족문제만 논의한다는 전략을 성공시킨 것이 된다. 이렇게 민족문제가 일단락되자 북한은 미국과 안보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9일 김정일은 조명록(趙明祿)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미국에 보냈고, 그에 대한 답례로 클린턴 정부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냈다. 클린턴의 임기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미-북 정상회담도 열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고 보수적인 부시 정부가 등장하면서 미-북 고위급 회담은 끊겼다.”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달리 북한과 대화를 거부했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에는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북한으로 향하던 돈줄을 차단하고 북한과 파키스탄 간의 핵 거래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조총련이 와해되면서 북한의 돈줄이 차단된 것이다. 조총련은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붕괴됐다. 과거 조총련은 자발적인 헌금이나 합영기업을 만드는 형식으로 북한에 돈을 제공했다. 그런데 일본은 1990년대 내내 장기불황에 빠져 버렸다.

    조총련계 기업은 대개 조총련계 은행에 부동산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려 북한에 투자했다. 조총련계 은행은 대체로 이들이 맡긴 부동산을 후하게 평가했다. 이들이 맡긴 부동산 중에는 조총련계 학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북한은 경제가 붕괴돼, 한번 들어온 돈은 절대로 내뱉지 못하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대북사업에 실패해 부도를 내게 되었고, 조총련계 은행은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담보로 확보한 부동산 매각에 나섰다. 그러나 헤이세이(平成) 불황으로 거품이 걷힌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조총련계 학교는 헐값에 팔려나갔고 부실채권을 떠 안은 조총련계 은행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일본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려줬으나, 그 과정에서 은행 주인을 바꿨다. 이런 가운데 공작원 양성소 노릇을 하던 조총련 학습조 요원들이 조직을 배반하고 일본의 잡지에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조총련이 총체적으로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김정일은 “조총련 사무실에서 김일성 부자 사진을 떼어내라”는 유화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는 조총련 이탈자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조총련은 북한의 돈줄 기능을 완전 상실했다.

    국제정치학자인 D씨는 “이런 사태를 지켜본 일본은 머지 않아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보고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9월17일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의 북한 방문을 성사시켰다. 고이즈미 총리가 6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전략이다”라고 분석했다.

    對이라크 전쟁이 바로미터

    부시 정부 출범 후 계속되는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북한은 부시 정부와 담판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방북하자 북-미 회담을 정례화하기 위해 북핵 카드를 꺼냈다는 것이 D씨의 분석이다.

    북핵 카드를 꺼내 예의 벼랑끝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잡고 미국으로부터는 김정일 정권을 인정받겠다는 것이 북한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빼든 핵카드가 다른 부작용을 불러왔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이어 북핵문제가 이슈가 되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6자회담까지 제의했던 일본이 180도 방향을 바꿔 미국 노선에 동조한 것. 실제로 일본은 이후에 열린 북-일 실무회담에서, 납북자 문제와 북핵 문제를 거론하며 북한측 대표와 언성을 높였다. 한국에서도 북한은 물론이고 김대중 정부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3~94년에도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는 보수파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북한은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고, 2000년에는 조명록과 올브라이트 교차 방문까지 이끌어냈다. 또다른 국제정치학자인 E씨는 “1994년은 9·11 테러 이전이고 지금은 이후다”란 말로 북한의 의도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E씨는 “미국은 현재 한 형제나 다를 바 없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그 어떤 동맹국의 협조도 없이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위세 앞에 러시아와 중국·프랑스 등은 감히 반대 의사를 표시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이 핵카드를 꺼내든 것은 실수다”라고 말했다.

    D씨도 “북한이 핵카드를 꺼내든 것은 김정일 정권이 살아남기 위한 술책이다. 그런데 이 술책이 9·11 테러로 화가 난 미국에 통할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다루듯이 북한과 담판을 거절하고 대테러전쟁의 연장선에서 위협을 가한다면, 북한은 우라늄탄이나 플루토늄탄을 꺼내 일전불사를 외칠 것이다. 예비역 장성 F씨는 최후의 순간 북한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가란 질문에 “핵무기는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라고 단언했다.

    그는 “핵무기를 사용한 나라는 그 즉시 국제사회로부터 집단 공격을 받기 때문에 생존할 수가 없다. 핵무기는 생존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역설도 성립되는 무기다. 따라서 남한의 차기 국가 지도자들이 북한은 무력통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과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없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하고 대처한다면 북한 붕괴는 생각 밖으로 빨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核은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

    D씨는 앞으로의 한반도 문제를 이렇게 예측했다.

    “부시 정부가 전쟁을 치르지 않고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면, 김정일 정권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간단한 전쟁을 통해 붕괴시킨다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이라크전이 오래 가고 후세인 정권이 건재하다면 김정일은 자신감을 갖고 오히려 핵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미래의 김정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코앞에 닥친 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북한은 핵카드를 꺼내든 직후 미국에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지금 북한은 당황하고 있다.”

    9·11테러로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고, 일본은 6자회담을 제의할 정도로 북한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 중국이 양빈 장관을 연행한 것은 북한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가시밭 같은 이런 구도 속에서, 김정일 정권은 과연 생존에 성공할 것인가.

    F씨는 “북한이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면 내부 모순이 증폭되고 그 과정에 김정일 정권이 약화되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전쟁없는 독일식 통일 단계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전계획 5027 말고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상황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우발계획 5028이 있다. 지금은 북한 급변책을 재점검할 때다. 한국군의 대북 조기경보 능력을 높여 놓고 미국의 대(對) 이라크전을 지켜보면, 통일 해법이 눈에 보일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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