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만루 위기 맞은 ‘구원투수’ 정운찬

서울대 개혁 실험 성공할까

  • 글: 김현미 khmzip@donga.com

    입력2002-12-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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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루 위기 맞은 ‘구원투수’ 정운찬
    종종 서울대는 한 시기를 주름잡다 멸종한 공룡 혹은 갑옷 속에 갇힌 중세의 기사에 비유된다. 기사와 공룡은 단단한 옷을 입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울대도 국립대라는 단단한 외피와 학벌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공룡처럼 몸집을 불려나가지 않았던가. 완전 무장한 중세의 기사는 불가침의 존재였지만 50kg 이상 나가는 철갑 무게 때문에 한번 쓰러지면 뒤집어진 거북처럼 속수무책이었다. 갑옷기사의 딜레마는 바로 오늘 서울대가 처한 현실과 비슷하다.

    10월9일 서울대 문화관에서는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이하 민교협, 회장 이애주) 주최로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서울대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한다’. 이 토론회를 준비한 서울대 민교협 임홍배 교수(독어독문학)는 “그 동안 서울대 안팎으로 개혁론이 난무했는데 내용적으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답답한 마음에 다시 시작해 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회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울대가 바깥 세상의 비판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교문을 한 발짝만 나서면 서울대 폐교론을 비롯, 서울대의 위상과 구실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안에서는 개별적인 비판의 목소리는 있어도 공론화된 적이 없다. 이번 토론회에는 서울대 안팎의 목소리를 모두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발제를 맡은 김인걸 교수(국사학)는 “서울대의 정체성 위기는 서울대에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특히 정부 지원을 매개로 한 구조조정 요구에서 촉발되고 전면화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면서 극복 방안으로 ‘정부로부터의 자율성 확보(대학정책 수립과 운영의 자율성, 총장의 사무국장에 대한 인사권 및 재정권)’에 무게를 실었다.

    정체성 위기 맞은 서울대



    학생 대표로 나온 서울대 철학과 이지선씨는 “2000년대부터 학사관리 엄정화 방안, 학사 경고, 전면적인 광역화 실시까지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이고 기계적인 취업준비생이 되기를 강요하는 제도들이 실시되고 있다. 이제 학교는 거대한 취업학원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비판한 뒤 “서울대는 대학으로서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서울대 책임론을 주장했다.

    서울대 출신으로 외부자의 시선에서 서울대 비판을 맡은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서울대의 ‘우월의식’을 이렇게 꼬집었다. “한국에 지식생산 사다리가 있다면 서울대는 당연히 그 맨 꼭대기에 놓여 있다. 지식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워낙 오래 있다 보니, 서울대는 특별하게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지방 국립대학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서울대특별법안’도 그런 경우다. 이런 법안이 나오는 데에는 서울대의 사정이라는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특별한’ 법안을 준비하려는 태도 자체가 서울대가 자신을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비슷한 방식으로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에 들어오는 학생은 당연히 최고의 수학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박병덕 전북대 교수(전국국공립대학교수협의회 사무총장)의 ‘국립대학발전계획’과 ‘국립대학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이 갖고 있는 문제점 분석에 이어, 김진균 서울대 교수(정치학), 김길중 교수(영어교육), 김현철 교수(건축학), 강봉균 교수(생명과학)의 토론으로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특히 김진균 교수는 “서울대 문제가 학력·학벌주의 문제의 정점에 속한다는 비판과 서울대가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돼야 하지만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은 정반대의 해결책을 요구한다”며 “혼란스러운 서울대 비판론에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학력·학벌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대의 우수학생 독점과 대학서열화 타파, 대학간 균형발전 등이 해결책이겠지만, 후자의 문제라면 정반대로 더 많은 국가적 지원이 서울대로 집중돼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밖에서는 전자를, 서울대 내부에서는 후자를 주장하기 때문에 서울대 개혁론은 늘 논의만 무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그 해법도 다양한 서울대 개혁론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1975년 관악산 기슭에 새 터를 마련한 후 서울대는 양적 팽창을 거듭했지만 그때부터 이미 국제수준의 대학원중심대학을 목표로 질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비슷한 내용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연구중심대학’이며, 1999년 김대중 정부 새교육공동체위원회가 발표한 ‘국립대학발전계획’으로 이어진다.

    서울대 구성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이러한 개혁 추진과정에 서울대가 배제됐다는 부분이다. 즉 정부나 교육관료들이 서울대가 자체 개혁의지나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사이 서울대는 정체성 위기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서울대 개혁론으로 상을 차린 이 토론회가 기탄 없는 대화 속에 열기를 띨 수 있었던 데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 대한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5월 이기준 총장이 사외이사 겸직 논란과 판공비 과다 지출 등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 중도하차하자 교내 젊은 개혁파 교수들 사이에서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 정운찬(56) 당시 사회대 학장이었다.

    예년에 비해 치열한 선거전을 치른 이번 서울대 총장선거에서 5명으로 압축된 후보들은 일제히 ‘서울대 위기론’을 외쳤다. 그 가운데 최연소이며 개혁적 성향이 뚜렷한 정운찬 총장이 55%의 지지를 얻어 제23대 서울대 총장에 임명됐다.

    서울대 구성원들이 정총장에게 거는 기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평소 온화한 성품과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 오열된 대학 공동체를 봉합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합의를 도출해 달라는 것과, 정부의 재벌 및 경제정책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칼날을 세워 교육인적자원부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서울대 구조조정을 견제해 달라는 것이다.

    정총장의 첫 업무는 서울대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권위주의 벗기기였다. 취임식을 앞두고 200여평 규모의 총장 공관으로 이주하는 대신 자신의 40평 아파트에 계속 거주할 의사를 밝혀 화제를 모았다. 권위주의의 상징인 총장공관을 허물어 주택 없는 교수들을 위해 임대 아파트를 짓겠다는 게 그의 선거 공약이기도 했다.

    취임 두 달여 만에 가진 서울대 직원 소양교육에서도 비서실의 높은 칸막이를 예로 들며 관료주의와 행정편의주의를 질책했고, 친절과 봉사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기준 전 총장 시절 총장실 점거농성을 벌여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학생회 간부 3명에 대한 징계를 해제한 것이나 여교수 채용비율을 높이겠다는 소신 역시 사회적 요구와 흐름을 제대로 짚었다는 평이다.

    금년도 서울대 국정감사 때도 정총장은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유연하게 방어했다. 국회 교육위 소속 한 의원은 “2년 전 국감 때 서울대 교수 충원에서 동종교배 현상이 지적되자 이기준 전 총장은 ‘다른 대학에서 교수를 뽑고 싶어도 서울대학 출신이 더 나은 데 어떡하겠느냐’며 뻣뻣한 자세로 일관해 눈총을 받은 반면, 정총장은 차근차근 해명해서 무난히 넘겼다”며 행정경험이 적다는 우려가 기우였음을 확인해 주었다.

    너무 일찍 보여준 카드 ‘지역할당제’

    그러나 너무 일찍 터뜨린 ‘지역할당제’가 정총장의 발목을 잡았다. 파문의 진원지는 총장 취임식이 열리기 전인 7월22일 MBC 인터뷰였다. 기자로부터 ‘서울대 대학입시를 개선할 생각이 없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정총장이 너무 솔직하게 소신을 밝혔던 것.

    “서울대 입시제도를 다양화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인구비례해서 쿼터를 주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5000명을 뽑으면 2000명에 대해서는 쿼터를 정해서 다시 1000명은 내신, 1000명은 수능으로 뽑는 식의 다양성을 추구하겠다”(‘박영선의 인터뷰 사람향기’ 중에서).

    정총장의 지역할당제 발언이 어느 날 불쑥 나온 것은 아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공부한 자신의 체험론과 최근 서울대가 강남 8학군의 대학이 되어 간다는 우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력·학벌주의의 병폐 등이 이처럼 획기적인 조치를 강구하게 했다.

    그러나 발상은 참신했어도 발표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게 교육계의 중론이다. 정총장은 지역할당제에 대해 “여러 교수와 의논해야 할 문제” “개인적인 생각” “형평의 원칙을 많이 따지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을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이 인터뷰가 나간 후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역차별론과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가 언급한 지역할당제는 미국의 ‘적극적 차별금지 조치(Affirmative Action)’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은 ‘다양한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저소득층이나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고용과 대학입시에 ‘할당제’ 개념을 도입했다. 최근 서울대 신입생의 반 이상이 화이트칼라 계층 자녀이며 대도시 출신이 4분의 3이 넘는 등 지역과 계층의 불균형이 뚜렷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지역할당제’는 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제도임이 틀림없었다.

    정총장은 8월13일 출입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좀더 분명하게 지역할당제 방안과 도입 시기를 밝혔다. “미국 하버드대도 사우스다코타주 같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의 학생들을 쿼터제로 뽑고 있다. 임기(2006년)내 각 군(郡)별로 일정 수의 학생들을 선발하는 ‘지역할당제’를 도입하고 전국의 각 군에서 1~2명씩 의무적으로 선발한다 해도 전체 인원은 200~300여명에 불과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처음 신입생 2000명을 쿼터로 뽑겠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후퇴한 내용이지만 이 제도를 소신대로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만루 위기 맞은 ‘구원투수’ 정운찬

    서울대 댄스동아리 회원들이 신입회원 모집을 위해 신입생을 대상으로 깜짝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초기 대세는 정총장 쪽으로 기울었다. 일단 이상주 교육부총리,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이 “지역할당제 도입은 이를수록 좋다”며 적극 지지를 표명했고, 전교조와 학부모단체가 잇달아 지지를 선언했다. 초기에는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달던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학들도 ‘지역할당제’의 득실을 계산해 보더니 어느새 찬성 쪽에 줄을 섰고 자체적으로 시행방안 마련에 들어가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국민 여론 역시 정총장 편이었다. ‘리서치 앤 리서치’가 9월17일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서울대 전체 신입생의 10% 정도를 지방에 할당하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52.7%가 찬성했다. 반대는 26.5%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론의 지지를 업고 급물살을 타던 ‘지역할당제’에 제동을 건 것은 지방대학들이다. 광주·전남지역, 대구·경북지역 대학 총장들은 “수도권 대학이 앞장서서 지역할당제를 실시하면 지방대학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며 “지역할당제가 정원외 모집으로 시행되거나 이에 대한 교육부의 추가지원이 이뤄질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교육인적자원부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가뜩이나 학생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대에 서울대의 지역할당제는 두려운 제도임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서울대가 정원외로 지역할당을 채울 경우, 학생선발 과정에 수능 상위 점수자 5000명을 독식하고도 모자라 지방에서 ‘+α(알파)’로 인재를 빼내가려 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지방대학이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기색이 보이자 대선 후보들도 적극 지지에서 슬그머니 유보로 돌아섰다. 서울대 국정감사장은 지역할당제의 교육기회 균등을 지지하는 민주당 의원들과 지역할당제가 취지와 달리 서울대 줄 세우기가 될 수 있다는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 지역할당제 찬반 토론회장이 되기도 했다.

    점차 제도 도입에 신중론이 고개를 들면서 논의의 중심은 누구를 위한 지역할당제인가로 모아졌다. 비판자들은 이 제도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서울대의 인재 독점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지역할당제에 대해 ‘원칙적 찬성’을 분명히 하면서 “그러나 서울대 우월주의, 서울지역 중심주의를 전제로 하는 대학입시의 지역할당제는 가뜩이나 벌어지는 서울과 지방 간의 교육격차를 가속화할 공산이 높다”(동아일보 8월23일자 칼럼)며 속도 조절을 권했다.

    ‘지역할당제’에 대해 실효성 여부를 떠나 기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안재오씨(홍익대 강사)는 “교육의 소외지역인 한국의 농어촌에서 각 군에 한두 명씩 서울대에 공짜로 입학시켜 준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라는 본래의 의도와 반대로 명문대의 주가를 더 올리고 사회적 고착화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학벌없는사회만들기’ 사무처장인 김동훈 국민대 교수(법학)는 “서울대의 구조적 변신에 대한 사회의 압력을 피해가려는 눈가림 혹은 최고 교육권력기관이라는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서울대 내부의 반발이었다. 서울대 ‘대학신문’이 재학생 1687명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대학입학 지역할당제’에 대해 학부생의 47.1%, 석사과정 재학생 48.6%가 반대한다고 응답해, 찬성보다 반대가 2배 가량 높았다. 서울대 교수들도 내부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내용인데다, 총장의 앞서간 소신발언으로 혼란만 가중되자 난감해 하는 눈치다. 한 서울대 교수는 “총장이 되자마자 우리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입시문제를 건드린 것은 실착이었다. 대학 내 다른 문제들의 가닥을 잡은 다음 학내 여론수렴을 거쳐 발표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사실 취임 초기 지역할당제 문제로 진을 뺀 정총장 앞에는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울대 내부에서는 ‘모집단위 광역화’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고 이로 인해 총학생회의 총장실 점거 등 학내분규까지 일어났다. 오죽했으면 정운찬 교수를 비롯한 5명의 총장 후보들이 선거공약으로 입을 모아 “현행 7계열 16개 모집단위로 광역 선발하는 신입생 선발제도는 획일적이어서 부작용이 많다”며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걸었을까.

    문제는 모집단위 광역화를 조건으로 두뇌한국(BK)21 자금을 지원한 교육인적자원부와의 마찰. 서울대는 모집단위 광역화를 조건으로 교육부로부터 매년 BK21 전체 지원금 2000억원 중 절반 가량인 970억원을 받고 있다(1999년 당시 서울대는 모집단위를 7계열 10개 단위로 광역화하고 입학정원을 1225명 감축하기로 약속했다).

    이미 교육부는 지난 3월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가 모집단위를 대폭 세분하자 BK21 자금지원 약속위반이라며 지원금을 상당액 삭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에 정총장 부임 후 사범대와 농생대까지 나서 2004년 입학전형부터 모집단위를 세분하겠다고 발표하자, 지역할당제를 놓고 잠시 서울대와 의기투합했던 교육부가 발끈했다. “대학 구조조정의 핵심인 학부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며 비난하자 서울대 측은 또 해명에 나섰다. “사범대와 농생대의 발표는 서울대의 공식입장이 아닌 단과대의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 정총장은 직접 ‘모집단위 광역화 폐지’를 언급한 적이 없고 다만 선거공약 중 ‘단과대의 자율성 존중’ 부분이 확대 적용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미 서울대는 10월에 발표된 BK21 중간평가에서 사업실적은 양호하나 제도개혁은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 15개 사업단 중 8개 사업단이 사업비 10∼20% 삭감, 2개 사업단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교육개혁지원금도 50%가 삭감됐다. 그러자 학교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각 사업단이 떠맡았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서울대 BK21사업단 단장인 김상구 교수(생명과학)는 ‘대학신문’ 인터뷰에서 “서울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연구성과가 우수한데도 제도개혁 부분 때문에 불이익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는 사업단 평가에 제도개혁 종합평가를 이중 적용한 행정상 오류라고 생각한다”며 “잘못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부 내부에서는 서울대의 BK21 파동에 대해 “애초에 BK21 사업과 서울대 개혁을 연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지만 일단 그것을 전제로 정부가 많은 지원금을 서울대에 몰아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BK21사업과 서울대 제도개혁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학부정원 감축이나 모집단위 광역화와 같은 약속을 하나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분명 서울대의 잘못이다. 각종 지원만 받고 책임은 지지 않는 서울대라면 지탄받아 마땅하다”며 서울대의 이기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위기다.

    ‘모집단위 광역화’ 문제에 이어 또 한 차례 서울대 중심주의가 성토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8월초 서울대가 발표한 ‘2005년도 입시안’ 때문이다. 쟁점은 논술고사 부활과 ‘교과목 최소이수단위제’ 도입. 일단 서울대가 입시안을 발표하면 다른 대학들이 줄줄이 따라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2005년도 입시안’으로 또다시 구설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상주 부총리가 논술고사의 본고사화를 우려하면서 ‘유감’을 표시한 데 이어, 교육청과 일선 학교들은 ‘교과목 최소이수단위제’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심지어 서울지역 국공립고교 교장들은 ‘법적 대응’까지 검토할 만큼 강경한 자세였다.

    서울대가 ‘교과목 최소이수단위제’를 내건 것은 최근 심화되고 있는 기초학력 저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즉 서울대 지원자격을 얻으려면 고교교육 과정 총 이수단위(192단위) 중 130단위 이상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 과학과목의 경우 선택의 여지없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다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다.

    서울대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일선 학교들은 교과배정 시간표를 다시 짜고, 부족한 교과목 개설을 위해 새로 교사를 모셔와야 하는 등 큰 변화가 요구된다. 더욱이 서울대 입시안은 선택형 교육과정을 강조하고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크게 줄인 7차 교육과정과 정면충돌하는 것이어서 교육당국도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서울대 입시안은 7차 교육과정의 가장 큰 특징인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자율권을 근본적으로 무시한 것이며 전국 각 고교의 교육과정 편성에 혼선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서울대가 “최소이수 단위를 130에서 120단위로 줄이는 등 개선안을 마련하고 일선 학교의 교사수급 및 교실여건 등이 개선됐다고 판단될 때까지 최소이수단위 기준을 완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 논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수준별·선택형 학습을 강조하는 교육정책과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서울대 사이에 낀 일선 고교에서는 당장 “우리가 서울대를 위해 존재하느냐”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역할당제, 모집단위 광역화 재검토, 논술고사 부활과 교과목 최소이수단위제 등 입시와 관련한 서울대 정책을 내놓자마자 거센 반발과 함께 번복과 해명, 수정이 반복되면서 정운찬 총장은 임기 초부터 흔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정총장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위축시킨 설화(舌禍)사건이 터졌다.

    10월23일 여교수 채용 확대를 논의하기 위해 한명숙 여성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정총장이 1993년 발생한 ‘신교수의 성희롱’ 사건을 언급한 게 화근이었다. 정총장이 신교수를 두둔하면서 “잘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은 문제”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여성계가 들고일어나자 정총장은 곧바로 두 차례에 걸쳐 사과했다. 그러나 이미 상처받은 ‘개혁총장’ 이미지는 회복할 길이 없었다.

    교육계 한 인사는 “서울대 개혁은 총장 한 사람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서슬 퍼렇던 이해찬 교육부장관의 실패는 정작 개혁돼야 할 교육관료들을 개혁 중심세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내부의 저항을 제압하고 개혁을 추진할 세력을 만들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서울대 개혁은 서울대의 기득권을 포기할 때 주위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내부의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게 분명하다. 민주적 절차와 의견수렴을 강조한 정총장이 과연 서울대 내부에서 그런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동안 서울대 내부에서는 서울대 개혁의 핵심을 ‘자율성 확보’에 두었다. 지난해 서울대가 외국 석학들을 초청해(일명 블루 리본 패널) 학교 운영 전반을 진단받은 결과 미국의 중·하위 주립대학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자 사회적 반향이 컸다. 그러나 서울대 송호근 교수(사회대)는 “보고서의 핵심은 ‘자율성’과 ‘재정지원’ 문제였다”고 강조했다.

    “(그 보고서는)‘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을 가지고 있는 대학에서 관료제적 통제와 재정 통제 속에서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이다’ 라고 표현했다. 결론은 서울대의 자율성 확보가 서울대 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입각해 서울대가 나름대로 창의적인 모델을 창안하고 자구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 좌담회에서).

    서울대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자율성’만 강조한다면 자칫 1996년 논란이 됐던 ‘서울대특별법’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온갖 특권을 누려온 서울대가 자신의 특권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비치면서 서울대 독점과 독주에 대한 거부감만 키워놓은 상황이다.

    특권적 지위 어떻게 버릴 것인가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 좌담회에서 안상헌 충북대 교수(철학)는 “서울대 개혁과 관련해 이전론, 분산론, 폐지론, 민영화론 등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런 산발적 논의들을 광범위하게 수렴할 수 있는 논의구조가 아쉽다”고 했다. 지금의 논의 방식이라면 국립대 죽이기, 서울대 죽이기, 교수 죽이기밖에는 안 된다는 것. 이미 서울대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서울대생 10명 중 3명은 외국대학을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갈수록 대학원 지원자가 줄어들어 2003학년도 박사 과정은 정원을 37명이나 줄였다. 거꾸로 가는 연구중심 대학이라는 빈정거림에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김진균 교수는 “서울대 개혁문제는 단지 한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학문-교육이 어떻게 발전해 가야 하는가’라는 총체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부터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취해야 한다는 철학적 충고이기도 하다.

    강내희 교수는 “서울대 개혁의 방향이 ‘탈식민화와 공공성 강화를 위한 지식생산의 개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울대를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서울대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특권적 지위를 어떻게 떨쳐버릴 것인가? 그 동안 축적한 지식권력, 상징적 권력을 벗어 던질 자세가 되어 있는가?”

    8월1일 취임식 이래 정총장의 100일은 유난히 길었다. 기대감만큼이나 거센 저항과 비난이 정총장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서울대는 무거운 철갑을 벗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100일 전 정총장은 이런 취임사를 남겼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울대가 한국 제일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서울대는 더 이상 과거에 안주해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돼서는 안됩니다. 저는 진리의 개방성을 굳게 믿고 있으며, 이에 바탕을 두어 우리 대학을 운영해 나가려 합니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위해 외국에 대해서도, 그리고 국내의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에 대해서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국민에 대해서도 봉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열린 대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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