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21세기 중국의 새 황제 후진타오

  • 글: 홍순도 문화일보 베이징특파원 mhhong@munwha.co.kr

    입력2002-12-02 1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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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제 4세대를 대표하는 후진타오가 13억 인구를 통치하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일찍부터 장쩌민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그는 10여년 동안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권력을 움켜쥐었다. 외유내강형의 지도자로 평가되는 후진타오는 어떤 인물이며 중국은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지난 11월15일은 미래의 초강대국 중국의 ‘황제’가 바뀌는 날이었다. 마침내 공식 후계자가 지난한 인고의 세월을 마치고 대관식에 버금가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1주일 일정의 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이하 16대) 폐막 직후에 열린 이날의 제16기 1중전회(당 16기 중앙위 1차 전체회의)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를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이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선출되면서 공식 후계자는 집권에 실패한다는 40여년이 넘는 징크스를 시원스럽게 깨버렸다. 회의 직후 후총서기는 자신에게 실각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대장정에 나섰다.

    더구나 16대 주석단의 비서장(의장)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 그는 이날 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대표대회의 비서장을 맡는 인물은 총서기에 오르지 못한다는, 지난 1982년 12대 대회 이후의 징크스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 금년 4월 중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표지 인물로 내세운 것 또한 미국도 후진타오의 등극에 대해서 계산이 끝 나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제 ‘타임’은 금년 9월까지만 해도 후진타오의 실각 가능성이 중국 내외에서 적지 않게 나돌았음에도, CIA 등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를 토대로 장주석의 권력 2선 후퇴와 그 후의 권력 승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를 표지 인물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등극에 성공한 공식 후계자

    될성부른 나무로 주목을 받으면서 50세의 나이에 당 최고 권력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후진타오. 10년 전부터 그의 총서기 등극가능성은 널리 예견되었으나 사실 그의 등극은 간단하고 자연스레 넘길 일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 근세사를 통해 공식 후계자나 욱일승천했던 후보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살펴볼 때 후진타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마오쩌둥(毛澤東)시대에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인식되던 류사오치(劉少奇)의 운명부터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 혁명 1세대로 지금까지도 일반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는 1959년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23년간이나 당권을 장악했던 마오의 후계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어 문화대혁명(文革·문혁)이 터지기 직전인 1965년에도 다시 국가주석에 선출돼 2인자 겸 후계자의 자리를 더욱 확고히 다진다. 게다가 그는 마오와 동향에다 후난(湖南)성 창샤(長沙)사범학교 후배라는 프리미엄까지 갖고 있었다.



    같은 혁명동지인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조차 별 볼일 없어 보였을 정도로 당시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의 거칠 것 없는 권력질주는 그게 한계였다. 선배인 마오가 발동한 문화혁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에게도 덮쳐온 것이다. 그는 결국 얼마 안가 당의 공식후계자에서 추악한 당내 주자파 1호 인물로 낙인찍힌 채 일거에 실각의 운명에 봉착하고 만다. 이어 홍위병들에 의해 저잣거리로 끌려나와 고깔모자를 뒤집어쓰는 수모를 당한 후 후난성의 한 감옥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당시 그의 시신을 거둔 측근들에 의하면 그의 머리는 완전 백발에다 웬만한 여성보다 길었고 손톱 역시 10cm 이상이나 자란 끔찍한 상태였다고 한다. 마오의 공식 후계자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류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떠올랐던 인물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국방부장(장관)을 지낸 린뱌오(林彪)는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자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다 추락사해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후계자로 회자되고 있다. 또 화궈펑(華國鋒)은 그나마 자신을 선택한 마오에 의해 문화혁명 이후 최고권좌에 올랐으나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곧바로 실각하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선배가 선택한 화궈펑을 사실상의 무혈 쿠데타로 실각시킨 덩샤오핑은 자신의 후계자들을 직접 벼랑으로 내몬 인물로 유명하다. 희생자들은 한때 그의 오른팔과 왼팔로 불린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이다. 후야오방은 후견인인 덩보다 더 농후한 진보 색채를 보이다가 1986년 1월에 실각하고, 자오는 1989년 4월 후의 사망으로 촉발된 6월의 ‘6·4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실각의 길을 걸어야 했다.

    물론 후진타오가 류사오치를 비롯한 비극적 후계자들과 다른, 최초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7년까지의 임기를 탈없이 마쳐야 한다. 하지만 정치·경제 상황이 모두 자오쯔양이 실각한 13년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중국 상황으로 볼 때 그가 비슷한 운명에 봉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처럼 공식 후계자로 무난히 권좌를 물려받은 다음 임기를 마칠 최초의 최고 권력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후진타오가 금세기 최초 전당대회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게 된 것은 거저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가장 평가받아야 할 대목은 무엇보다 튀지 않으려는 후진타오 자신의 노력이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에서 보듯 천하를 통일한 한(漢)의 유방(劉邦)에게 하나씩 제거된 한때의 2인자였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 등이나 류사오치 같은 선배들의 한결같은 비극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는 차기 지도자로 떠오른 지난 1992년 이후 이미 이날을 대비하여 은인 자중해왔다. 이에 대해 베이징의 정치 평론가들은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같이 평탄한 대권쟁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그의 이유 있는 굴신(屈身)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그는 모나지 않은 돌이 되기 위한 케이스 스터디도 적지 않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중국 내에서는 마오쩌둥보다 늦게 세상을 떠났더라면 권력을 잡았을 것으로 평가받는 2인자학의 교과서 저우언라이 전 총리, 대만에서는 굴신의 미학을 보여준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을 벤치마킹했다는 것이 분석가들의 주장이다. 그는 리덩후이의 처세를 높게 평가했는데, 리 전 총통은 80년대 행정원장 시절 전임 총통인 장징궈(蔣經國)와 독대시 언제나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나는 전혀 야심 없는 당신의 충직한 신하’라는 믿음을 아예 몸으로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굴신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는 차기 당정 최고지도부 인선 문제를 논의한 지난 8월의 베이다이허(北戴河)회의. 당정의 원로 및 최고 지도부 전원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장주석이 권력 일선에서 전퇴(全退·완전 은퇴)할 것인가 반퇴(半退·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는 유지하는 절반의 은퇴)할 것인가에 관한 격론이 벌어졌다. 분위기는 당연히 이른바 제4세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대거 이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극도로 말을 아끼던 평소와는 달리 장주석이 절대로 은퇴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굴신의 처세에 능한 그가 아니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장주석이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APEC회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10월29일 열린 귀국 환영식에서도 이같은 요지의 주장을 장주석에게 재차 피력, 마지막까지 굴신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타고난 천재성

    노인 정치로 유명한 중국에서 젊은 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된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에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일부 외신은 그의 원적이 안후이(安徽)성 지시(績溪)라는 사실을 근거로 지시 출신이라고 보도했으나 상하이설이 유력하다. 신상에 대해 널리 알려진 바가 없는 부친 후쩡위(胡增玉)는 차(茶)를 팔던 소상인이었다. 혁명원로 및 고위층의 자녀들을 일컫는 태자당(太子黨) 출신이 당정의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중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출신 성분은 썩 좋은 편이 못 됐다.

    그의 유년기는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불우했다. 부친이 상하이에서 호구지책을 위해 그나마 괜찮았던 차 판매업이 완전히 망하는 바람에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로 야반도주와 다름없는 이주를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쓴맛을 많이 봤던 것이다. 게다가 토산품 가게 점원이 된 부친의 수입은 변변치 못했고 그 어려움 속에서 미인이란 평판이 자자했던 모친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천재성을 타고난 행운아였다. 환경은 불우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특유의 총명함으로 주위의 찬탄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이 중국 언론의 전언이다. 후진타오의 천재성은 그가 전혀 기죽지 않은 채 비교적 좋은 환경의 동급생을 가르치면서 줄곧 학비를 벌었다는 일화에서 확인된다. 그가 1959년 명문으로 손꼽히는 칭화(淸華)대 수리공정학과에 동급생들보다 1∼2년 앞서 입학한 사실은 그의 고향 일원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픔도 있었다. 상당히 우수한 실력임에도 좋지 않은 출신 성분 탓에 당시의 인기학과였던 건축학과나 기계학과 등에 지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학 합격과 동시에 그는 곧장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현재 자신의 최대권력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에 가입, 칭화대 지부 문화공작단 서기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사교춤에 능해 그리 많지 않은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2세 연상의 부인 류융칭(劉永淸)은 이때 만난 동급생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5년 학창 생활을 마친 그는 학교에 그대로 남아 졸업생 중 몇 안되는 정치 보도원(輔導員)으로 일하는 기회를 잡았다. 평소에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학교측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에는 졸업 전해에 가입한 공산당 당원 신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권력 일선에서 물러난 3세대 정치지도자들. 주룽지 총리, 장쩌민 국가주석, 리펑 전인대 상무위원장(왼쪽부터). 그러나 장주석은 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절반의 은퇴에 그쳤다.

    하지만 1년 후 찾아온 문화혁명의 광풍은 그를 학교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자신이 다닌 학과의 당 서기와 주임을 비판하라는 홍위병의 압력을 끝까지 거부했으나 이로 인해 반혁명 분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온갖 고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1968년 다른 지식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하방(下放·문혁 당시 농촌 등으로 가서 노동에 종사하던 유행) 대열에 합류, 오지 중에 오지인 서부 간쑤(甘肅)성으로 쫓겨가기에 이른다.

    불운한 사람은 자빠져도 코가 깨지나 그는 정반대였다. 하방된 지 얼마 안돼 평생의 후원자인 쑹핑(宋平) 간쑤성 당시 서기를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 저우언라이의 비서 출신에다 칭화대 학장, 노동부 부부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한 쑹은 과연 거물다웠다. 마치 명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처럼 대번에 후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오로지 그를 중용하기 위한 인사만도 수차례 실시했다. 후는 이로 인해 20대 후반의 일개 기술자에서 일거에 중견 간부로 몇 단계나 뛰어넘는 수직 출세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조차 서막에 불과했다.

    성 건설위 비서, 부처장, 부주임을 최연소 기록으로 역임하면서 1980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부부장급에 해당하는 간쑤성 공청단 서기로 발탁되는 출세 가도를 정신없이 내달린다. 이 기간 그는 쑹의 배려로 당 간부 양성학교인 중앙당교에 입학, 고급 간부에게 필요한 소양을 쌓기도 했다.

    당의 고급 간부이기는 했으나 벽지 간쑤성에서만 지내 중앙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는 1982년 드디어 중앙에 이름을 알릴 결정적 기회를 잡는다. 쑹의 전폭적 후원이 그에게 중앙에서 출세를 약속하는 보증 수표와 다름없는 공산주의청년단 서기라는 막강한 자리를 안겨다줬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행보는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었다. 당시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이 79세, 총서기인 후야오방이 67세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 40세에 불과한 나이에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전국청년연합회 주석 등의 요직을 겸직하며 승승장구를 구가했다.

    중앙에서 후진타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자 젊고 패기 있는 인재의 등장에 목말라하던 덩샤오핑의 눈은 번쩍 뜨이게 된다. 후에게 반한 덩은 자신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던 후야오방 총서기에게 “이 사람은 진짜 쓸 만한 인물이다.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그를 더욱 크게 키울 것을 은연중에 부탁하고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5년부터 구이저우(貴州)성과 티베트 자치구 서기 및 당 중앙위원을 차례로 역임한 후 50세의 나이에 7명 정원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덩의 지원을 고려할 때 경천동지할 사건은 아닌 셈이다. 덩의 관심은 물론 평생의 후원자인 쑹핑이 1992년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나는 은퇴해도 좋다. 단 내 자리는 그에게 넘겨달라”고 당시 실력자 차오스(喬石)에게 간절히 부탁한 상황에서 그가 상무위원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후는 상무위원에 진입한 후 차기 최고 권력을 이어받을 공식 후계자로 사실상 자리매김한다. 그가 1993년 공산당 사상 이론 연구의 총본산이자 간부 양성의 요람인 중앙당교 교장을 비롯하여 1998년 국가부주석, 1999년 군사위 부주석에 잇따라 임명되거나 선출되는 행보를 계속한 것은 후계 수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2년 11월 15일 그는 10년 동안의 은인자중 끝에 그토록 고대하던 총서기의 자리에 올랐다. 더불어 중국 정계에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으로 대표되는 1,2,3세대를 잇는 제4세대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10년 동안이나 국내외의 각별한 주목을 끌었으면서도 후총서기의 성향이나 정치 스타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비운의 황태자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은인자중한 데에도 원인이 있으나 워낙 신중한 그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작년 10월과 금년 5월 각각 유럽 및 미국을 다녀온 뒤 ‘런민르바오(人民日報)’ 등의 관영 언론에 자신에 대한 보도를 축소하라고 지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 혹 있을지도 모를 불필요한 견제를 피하려는 신중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적인 일로 고향인 상하이 부근을 방문할 때에도 생가에는 들르지 않는 결벽에 가까운 자기관리는 그가 아니면 감히 실천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또한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아내와 2명의 자녀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상당한 제약을 가하고 있다. 최고의 태자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녀들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없는 이유는 그의 철저한 집안 단속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일견 딱딱함과 직결될 것 같은 그의 신중함은 외모에서 나타나는 신사의 풍모를 만나면서 많이 완화된다. 실제 그는 쑹핑 등의 당 원로에게 언제나 깍듯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부녀자와 아동들의 집회에도 가능하면 자주 참석하는 탓에 대체로 부드러운 이미지의 지도자로 기억된다. 정치인이면서도 주변에 적이 없는 무난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듣는 데에는 다 이런 인화를 중시하는 성격이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우선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외유내강형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속 모를 지도자라는 인상은 분명 득보다 실이 많다. 상대방이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말을 많이 해 자신의 속내를 120% 그대로 드러내는 장쩌민 주석이 대하기에 오히려 더 편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선이 굵지 못한 이미지의 백면서생 같은 용모도 지도자로서는 크게 내세울 장점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은 지도자들이 보여준 강렬한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조직 장악력이 필요한 중국 공산당에서 그가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할지 벌써부터 의문시된다.

    부드러운 이미지, 강력한 실천력

    그렇다고 그에게 강인한 일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상상을 뛰어넘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면서 유약해 보인다는 주위의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낸 적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1989년 티베트 서기로 재직 중 발생한 독립시위를 무력진압한 단호함이다. 그는 당시 임명된 지 1년 남짓해 현지 사정에 밝지 못했으나 철모를 쓴 채 직접 진압 병력을 진두지휘, 소요를 초기에 진압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이와 같은 결연함은 줄곧 그를 적극 지원해온 쑹핑마저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덩도 이 사건을 계기로 그에게 결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총서기 재목으로 키울 것을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덩이 3년 후인 1992년 1월 역사적인 남순(南巡 : 개혁·개방의 모범 지대인 남부 지방 순시)에 나서면서 젊은 지도자의 발탁을 강조한 것은 이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청단 서기시절 평등의식 고취를 위해 간부들에게 부여된 청소 의무를 과감하게 거부한 사례 역시 그의 숨어 있는 강단을 보여준다. 당시 그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동갑내기 전임자 왕자오궈(王兆國)가 군말 없이 청소를 한 것에 비해 그는 “서기가 청소를 하는 것은 평등 의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서기가 할 일은 엄연히 청소부와 구분돼 있다”면서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다고 한다. 이후 공청단에서 이와 같은 형식적 행사가 바로 자취를 감췄다.

    이런 바탕 위에 그에 대한 평가는 신중한 찬사 일색이다. “그는 최고 지도자의 풍모는 상당히 갖추고 있으나 그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으로 과감하게 자기 색깔을 선보이면서 장점을 살려나간다면 약점으로 지적되는 유약한 인상, 조직 장악력 부족 등은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어쩌면 숨겨진 특유의 강인함과 리더십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식의 평가가 그것이다.

    후총서기는 전임자가 다져놓은 틀을 대책 없이 뒤흔들 성향이 아니다. 또 그럴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는 장쩌민주석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는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가 16대 개막식 이후 후총서기가 장주석의 정책을 일관되게 견지할 것이라는 보도를 수차 내보낸 것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경제 분야에서는 그간의 개혁·개방 정책을 유지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론으로는 100여년을 내다보고 추진중이라는 서부대개발, 양쯔(揚子)강을 포함하는 대륙 남부의 풍부한 수자원을 물이 부족한 베이징을 비롯한 북쪽으로 끌어오는 대역사인 남수북조(南水北調), 베이징과 상하이간 고속철도 건설사업 등을 역점 프로젝트로 선정,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장주석이 11월8일 16대 개막식에서 발표한 정치 보고에 담긴 경제 분야의 각종 청사진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일 것이다. 예를 들어 2020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을 2000년의 4배로 늘리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매년 8% 안팎의 고도 성장은 반드시 달성시키려 할 것이다. 차오쓰위안(曹思源) 등의 유명학자들이 언급한 시장주의적 공업화와 경제 시스템 선진화 등의 논의가 당장 제기될 것이다.

    그는 이외에 3개 대표(3個代表·당이 선진문화, 선진생산력,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론이 당장(黨章·당헌)에 삽입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인정하게 된 민영 기업인들의 입당 및 이와 관련한 각종 현안 역시 적극적으로 풀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그의 시대는 당원 기업가를 뜻하는 홍색 자본가와 적극 보호될 사유재산, 그리고 활성화의 길을 걸을 민영기업 등과 같은 고도의 자본주의적 개념이 사회주의 체제에 도입되는 세계 공산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혁명적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외교 분야는 아마도 중국의 전통적인 구동존이(求同存異·가급적 같은 입장을 추구하되 다른 경우는 그대로 남겨둔 채 계속 논의함) 원칙에 따라 정책의 틀을 짤 전망이다. 이 경우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관계 악화가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더욱 강조·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상당히 원만해 보이는 그와 부시 미 대통령의 관계는 이런 분위기에 더욱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지난해 중국을 방문하여 칭화대에서 특별 강연을 가진 부시와 강연 내내 동석하는 등 두 차례 만남에서 각별한 우의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앞으로 ‘대 테러 전쟁’이나 북한 핵문제에 있어 미국의 발목을 잡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이런 정황 때문이다.

    물론 정 반대의 분석도 있다. 그가 티베트 독립 시위를 무력 진압한 데에서 보듯 민족 문제에 있어서는 강성인만큼 미국이 대만문제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상징적 의미에서 갈등을 불사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 의견일 뿐 미국의 정계는 그의 온화하고 합리적 이미지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 베이징 주재 서방 소식통들의 중론이다.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후진타오의 중국 역시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월 칭화대를 방문한 부시 미 대통령이 후진타오 총서기와 악수를 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대만이 될 수밖에 없다. 대만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민진당 정권이 중국 권력교체기의 어수선한 틈을 타 대만독립의 여론을 부추길 경우 그로서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관측통은 양 지도자가 젊다는 점에서 대화가 잘 통할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크게 충돌하여 양안 긴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후총서기는 젊은 중국 최고지도자들 가운데 드물게 북한의 김정일(金正日)위원장과도 친분을 자랑한다. 1993년 7월 방북 때와 김위원장의 최근 두 차례 방중 때 수차례 만나 술자리까지 갖는 등 상당히 깊은 교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1999년 김위원장이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베이징(北京) 중관춘(中關村)을 방문했을 때는 동행하여 직접 소개하면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하기야 나이가 동갑인 데다 오랜 시간 최고 권좌 등극을 준비해온 비슷한 처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런 탓에 그가 총서기 취임 후 북한에 더욱 동정적 입장을 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확고하다. 남북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설사 후총서기가 심정적으로는 김위원장과 북한에 애틋한 생각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정책을 쓰기는 이미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에도 그와 가까운 정·재계 지인이 적지 않다. 여기에 경제 분야에서 한국과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상기하면 얘기는 더 달라진다. 마음은 북한, 몸은 한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북한과 중국의 현실적 관계다. 후총서기가 자신의 재임 중에 이뤄질 남·북한 방문시 먼저 북한을 배려한 다음 한국행은 경제 측면을 고려하려 단행할 것으로 분석되는 것은 이와 같은 현실에 기초한다. 물론 후총서기는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중국의 외교 노선상 평화적 해결을 통한 적극적 반대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후총서기의 시대가 과연 성공적일지에 대해서는 긍정적 시각이 회의적 관점보다는 훨씬 우세하다.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유지한 채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장주석이 비록 심복인 쩡칭훙(曾慶紅)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내기는 하겠으나 후총서기가 어쨌거나 자신이 인정한 후계자인만큼 전폭적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주석과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등 은퇴한 원로들이 조만간 원로회의 성격이 강한 국가안전회의를 창설하여 막후지원을 할 것으로 예상돼 그의 위치와 사회적 안정이 흔들릴 개연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또한 앞으로 당정 지도부가 집단 지도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고 사회 전반에 안정희구 세력이 많아진 사실도 그의 시대가 철옹성은 아니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케 한다.

    물론 그가 직면할 시련이나 시급히 풀어야 할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제면에서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함이 우선 대표적 시련으로 꼽힐 것 같다. 현재 중국의 실업률은 3~4%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짧은 시간내에 국제 수준의 두 배 이상으로 높아지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중국인들이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말을 들을 만큼 실리적 성격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사회 안정을 해칠 시한폭탄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최근 랴오닝(遼寧)성의 랴오양(遼陽)등지에서 대규모 근로자 시위가 폭발, 적지 않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 중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국유기업 개혁을 대대적으로 실시할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최소한 3000만명이 길거리로 내몰릴 것이라는 게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지난해 이후 중국 경제학자들의 관측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특단의 대책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평가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금융 문제 역시 위기의 한 복판에 있다. 현재 외면적으로 중국 금융위기는 실업 문제처럼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은 끔찍할 지경. 곳곳에 숨겨진 금융권 부실 채권이 최소한 3000억달러(4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이 IMF 금융 위기 때 쏟아부은 공적 자금이 200조원에 채 미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외에 전국적으로 심각한 양상을 보이는 무분별한 부동산 건축 붐과 이에 따른 엄청난 거품, 복지 축소정책에 따른 민심 이반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경제 분야는 차기 총리가 유력한 원자바오(溫家寶)가 총괄한다고는 하나 총서기의 책임도 막중하기만 하다.

    정치 분야에서는 좌파의 공격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하느냐가 정권안정에 열쇠가 된다. 장주석의 16대 정치보고에서 드러났듯 중국이 앞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더욱 심화된 형태로 사회주의 기본이상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다. 더구나 민영 기업가들을 홍색 자본가로 양성하기 위해 입당시킨다는 방침은 ‘뉴욕타임스’가 지적했듯 ‘중국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친근한 벗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파격일 수 있다. 이런 조치는 아직도 중국내에 상당 세력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인물도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당 선전부장을 지낸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인 올 88세의 덩리췬(鄧力群)이 그 주인공. 90년대 중반 이후 수 차례의 만언서(萬言書·약 만자에 이르는 성명서)를 통해 덩샤오핑 노선을 비판해온만큼 어떤 형태로든 후총서기에게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 특히 덩리췬은 좌파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셈이기에 그의 준동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할 경우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

    반대의 경우, 즉 우파의 발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경제분야의 자본주의화가 속속 진행되는 현실에 고무 돼 내친김에 서구식 민주화로 가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에 망명한 웨이징성(魏京生), 왕단(王丹) 등의 반체제 인사들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자칫 단속에 소홀할 경우 제2의 톈안먼 사태 같은 혼란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항상 내재돼온 당 내부의 권력 투쟁 가능성은 좌파나 우파의 위험에 비한다면 오히려 쉽게 조율 가능할 것으로 분석된다. 장주석 등 전임자들이 미리 안배하여 알력의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총서기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겠다면서 지나치게 지분을 주장할 경우 의외로 갈등이 커질 수도 있다. 더구나 그는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다. 권력의 버팀목인 군부와 직접 통하지 못하고 군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

    그를 향한 직접적 위험도 없지 않다. 2년 전 불법화된 이후 생존의 활로가 막히자 기를 쓰고 덤벼드는 파룬궁(法輪功)의 존재가 단연 그렇다. 이는 16대 개막일인 11월10일 수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들어와 톈안먼 광장에 반체제 전단을 살포한 사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해외에 영향력 있는 수련생들이 존재하는 파룬궁이 중국의 위상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만큼 일방적 탄압만도 어려워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건륭·강희황제에 비견되는 관상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의 내로라하는 관상 전문가들은 후총서기의 관상이 원만구족(圓滿具足)형 지도자 상이라고 말한다. 굳이 왕조 시대와 비교하자면 태평성대의 제왕인 청대 건륭(乾隆)황제나 강희(康熙)황제에 버금가는 치세(治世)의 지도자가 될 그릇이라는 평가가 성급하게 나오는 것.

    그를 잘 아는 주위 인사들은 그가 영국형 신사로 남에게 척(戚)을 지지 않으면서 원만하게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과 성향 등을 살펴보면 실제로도 이와 같은 평가는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후총서기가 진정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안을 무리 없이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비 시험에서는 일단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결정적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본고사를 눈앞에 둔 수험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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