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옷이 아닌 가슴을 찢으며 살았어야 하는데…”

레토릭으로 현실을 산 ‘지적 돈 후안’ 이어령과의 논쟁적 대화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2-12-02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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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석하고 창의적인 열정의 휴머니스트, 그러나 한편으론 피 튀는 삶의 현장을 추상의 언어로 감당해온 양극(兩極)의 인간. 그를 당대의 지성으로 받아들여 기꺼이 사랑한 것은, 우리 시대의 기쁨인가 아니면 슬픔인가.
    “옷이 아닌 가슴을 찢으며 살았어야 하는데…”
    이어령(68·중앙일보 고문)은 확실한 사람이다. 어떤 주제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잘 다듬어진 분재처럼 세련된 말과 글이 되어 되돌아온다. 이어령은 명쾌한 사람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식견과 통찰력으로 누구나 고개 끄덕일 만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어령은 창의적인 사람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실험적이며, 탁월한 상상력으로 기성(旣成)의 틀을 깨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한편 어떤 이들에게 이어령은, 모호하고 일반론에 능한 전직 장관이자 또 한 명의 ‘기성세대’일 뿐이다. 한국의 40~50대는 젊은 시절, 그를 사랑하고 숭배했으나, 오늘의 청년들은 더 이상 그의 언설에 열광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가 제 가치의 반만큼도 인정받지 못했음을 한탄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가 지나치게 쓰임받고 찬사 받았다며 삐딱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1950년대, 독기 내뿜던 문화 게릴라 이어령을 기억하는 이들은, 왜 언젠가부터 그는 더 이상 총탄도, 화살도 아니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할 것이다. 그의 생래적이랄 만큼 확고한 정치혐오의식을 아는 이들 또한, 왜 그가 노태우 정권에서 장관직을 수행했으며 이런저런 국가적 문화프로젝트의 단골 장(長) 노릇을 해왔는지 묻고 싶지 않을 수 없다.

    극단과 극단, 쉽게 마음 주거나 거둬들일 수 없는 안타까움은 외부의 시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령의 의식, 학문, 세상 대응 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양 갈래 길이다. 샴 쌍둥이 같은 질곡이요 벗어날 길 없는 숙명이다.

    이 무수한 분열과 이해할 수 없음(혹은 이해받을 수 없음)의 중심에도 분명 경계는 있을 터.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어령의 문지방’이라 하자. 빈(貧)과 부(富), 독설과 포용, 내쳐짐과 크게 쓰임,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사회적 성공과 정신적 ‘왕따’의식. 그 단절의 문지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이어령이게’ 하는 가치와 독자성(uniqueness)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해와 분열의 ‘문지방’

    서울 효자동의 한 밥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몸이 다소 불편해 보였다. 전날 오후 차를 타다 어딘가 모서리에 된통 찧었다고 했다. 그래도 활기가 느껴졌다. 노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하기 힘든 ‘현재진행형’의 감(感)이었다.

    수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이야기가 시작됐다. 툭 던진 가벼운 물음에도 그는 빠르고 논리정연하게 대응했다. 일상적 질문은 소용이 없었다. 무얼 물어도 돌아오는 건 절묘한 메타포(수사법에서의 은유·비유)로 포장된 추상 답안이었다. 이어령에게 일상은 하찮은 것, 화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사생활 보호’ 차원의 대응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문학인이 아닌 생활인, 일상인으로서 온전히 살아온 자신을 못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상의 세계에 사로잡힌 10대 문학소년처럼.

    두 번째 만남은 서울 평창동 비탈길에 있는 그의 집과, 아내 강인숙씨(69·건국대 명예교수)가 관장으로 있는 근처 ‘영인문학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문학관은 몰라도 내 집 서재를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서재에는 모두 7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각기 다른 운영체계로 돌아가는 데스크톱이 3대, 크기와 기능이 다른 노트북 컴퓨터가 3대, 테블릿 PC가 한 대. 그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하였다. 각각의 컴퓨터에 최신 프로그램을 깔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뚝딱뚝딱 손을 보는 것도 그였다.

    8시간 동안 계속된 대화는 자못 전투적이었다. 왜 변했느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어냐는 집요한 물음에 이어령은 그 이상의 끈기와 열정으로 답했다. 연대기적 질문이 불가능하니 대화는 첫 만남에서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소문난 다변가(多辯家)인 그와 대화하려면 우선 그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가는 요령부터 터득해야 했다. 그렇다고 발언에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상정한 기승전결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차마 입을 다물 수 없음이었다. 그렇게 때로는 항변하고 때로는 수긍하며 하루해가 다 갔다.

    중앙일보 고문실에서 세 번째 만난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로 서두를 꺼냈다.

    “후-, 내가 오해받고 있는 점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 꽤나 애를 썼는데, (두 번째 인터뷰를) 끝내고 보니 이것이 더 깊은 오해를 낳겠구나, 이 허깨비 같은, 만들어진 환상의 이아무개를 실체에 가깝게 만들려니까 더 큰 환상이 되는구나. 극단이 아닌 나를 보여준다는 게 실제로는 또 다른 극단을 낳는, 이런 모순을 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런 식의 인터뷰를 할 기회가 앞으로 더 있겠소? 성공해봤자 본전치기도 안 되는 이 곤혹스러움이라도 제대로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남들은 다 화려하고 성공한 사람이다, 부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잔디를 멀리서 보면 흠 없이 파랗잖아요? 다가가 보면 여기저기가 성금성금하고. 반대로 거울을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아무것도 안보이거든. 사람이란 그렇게 양파껍질 벗기듯 벗길수록 새로운 게 나오는 거요. 그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뷰란 것이 사람 하나를 제대로 보여주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 발만 잘못 움직이면 떨어지고마는 그런 긴장이 나와 우리 삶에 숨어 있는데, 그게 곧 나인데….”

    그의 말이 맞다. 누군가를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치기 어린 오만인가. 실존과 소통이 오직 이어령만의 인생 화두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무릇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또한 사람 아닌가.

    -선생은 자신을 양손의 인간, 양면성의 인간이라 말하는데 그 연원은 어디일까요.

    “부모님이지요. 가령 아이디어를 짜내고 창조적 작업에 희열을 느끼는 거, 컴퓨터 같은 기계에 밝은 것은 아버지 계열이에요. 일제 때 아버지는 참 남들이 안 하는 사업만 골라 했어요. 비닐하우스니 병아리 속성 부화니. 새것, 첨단인 것을 아주 좋아했지요. 우리집엔 아버지가 사업하다 실패한 거, 그 부산물들이 여기저기 뒹굴었어요. 발동기, 고무도장, 전표 같은 것들. 그렇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할 때마다 내게 풍성한 장난감을 주신 분이야.

    반면 어머니는 감성적이에요. 독실한 불교신자로 늘 기도를 하셨지요. 병치레가 잦았던 내 머리맡에 앉아 ‘철가면’ ‘장발장’ 같은 책들을 읽어 주곤 하셨어요. 내 문학적 감수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의 언어는 비평의 언어, 어머니의 언어는 시의 언어지요. 내 강의도 그래요. 내가 기호학 강의 같은 걸 하면 듣는 사람들이 막 미쳐. 아주 따분하거든. 군말, 예문 그런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또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은 대단히 재미있다, 구수하다는 평을 들어요. 그렇게 난 양면적인데, 사람들은 대개 그중 한 면만 보려 하지요.”

    -망해도 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건 상당히 부유했다는 뜻일 텐데요.

    “그렇지요. 내가 열네댓 살 될 때까지 우리집은 제법 잘살았어요. 동네 사람이 다 한집안이라 늘 관심의 대상이었고.”

    이어령은 1933년 생이다. 충남 아산군 온양읍 좌부리가 고향이다. 그는 좌부리에서 태어났지만 우봉 이씨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용인에서 살았다. 증조부·조부가 서울 정계에 진출한 경력을 가진, 시골 살림을 살면서도 ‘대처사람’다운 합리성과 균형감각을 지닌 지식인 집안이었다.

    동네 아이들과는 처지가 다르고 감수성이 달랐던 그는 주로 형제들과 어울렸다. 안온하고 평화롭고 지적인 세계였다.

    -맏형과는 16세나 차이가 나는데, 형들이 무섭거나 억압적이지는 않았나요.

    “무섭기야 무섭지요. 그런데 형님들이 잘 놀아줬어요. 큰 형님은 함께 산책하면서 옛날 얘기를 해주시고, 둘째 형님은 기타를 가르쳐주시고, 셋째 형님은 운동을 하니 복싱을 가르쳐주고. 넷째인 누나는 문학 소녀라 같이 네잎클로버도 따러 다니며 정겹게 지냈지요. 참 그 쪼꼬맣고 유치한 애를 데리고 뭘 할 게 있다고. 하여튼 형제끼리 앉아 철학, 문학, 영화 얘기를 많이도 했어요. 그런 것이 다 나에게는 지적 원천이 됐어요. 큰형님만 해도 16년 앞선 그 인생을 빌려 체험한 셈이니까.”

    -대개 위대한 예술가는 콤플렉스 속에서 성장한다는데, 선생은 적어도 가난과 관련한 콤플렉스는 갖지 않아도 좋았겠군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나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10대 후반부터 한 5~6년간은 적빈의 삶을 살았어요. 그야말로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사흘, 나흘 가도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는 나날. 또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리 대단한 고통은 아니었겠지만, 곱게만 자란 나로서는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대가족이 완전히 해체돼버린 것이었고.”

    아직 외가, 친가는 이전의 기세를 잃지 않았던 때다.

    “거기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기와집이고, 하지만 나는 끼니도 못 이을 상황이니까. 그 자의식 때문에 잘사는 친척집에 가도 밥상이 나오면 슬그머니 빠져 나오곤 했어요. 때때로 뒷동산에 올라 보면 밥때가 돼도 우리집 굴뚝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거든. 그럼 그냥 안 들어가요. 가봤자 밥도 없는 걸.”

    “나의 보수성은 휴머니즘”

    이어령은 1952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부산 피란처에서 뒤숭숭하게 보내고 2학년 가을이 되어서야 서울 동숭동 교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울대 문리대 시절은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만이 수북한 파괴와 고통의 지대에서 이어령과 그 친구들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전복과 반역의 꿈을 키워갔다. 이들은 게걸스레 흡수한 서양 이론과 폭발하는 젊음을 무기로, 남북으로 갈려 빈약해질대로 빈약해진 기성문단에 독침을 쏘았다. 대학교 3·4학년 시절, 이어령은 이미 평단의 ‘무서운 신예’로 부상해 있었다.

    -문리대 시절 얘기 좀 해주시죠.

    “그때는 한국인이라거나, 아시안이라거나, 20대라거나, 그런 나에게 씌워지는 일체의 관사를 다 벗어버리고 싶었어요. 이상(李箱·본명 김해경)이 왜 성을 갈았는지 알겠더라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을 난 믿지 않았어. 신분증으로 설명되는 모든 걸 거부한 거죠. 중요한 건 실존적인 나니까. 그래서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에 심취하고, 또 엘뤼아르 같은 저항시인들 좋아하고. 지적 유목민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여.

    근데 그건 내 개인의 성격이라기보다 시대의 성격이었어요. 조국이 일본이라 생각한 게 엊그제 얘긴데, 그야말로 “일본 군대가 졌다”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비칠 정도로. 우리 원수고 지배자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산 내 어린 시절. 바꿀 수도 없고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그 쓰라린 과거. 근데 또 얼마 안 있어 인민군이 들어오고 중공군이 들어오고 미군이 들이닥치고. 여기저기서 잡아가고 잡혀가고, 그런 세상에서 정신 올바로 박힌 놈이 어떻게 이게 내 신념이라 자신할 수 있겠어.”

    그는 자신이 쓴 ‘전쟁 데카메론’을 예로 들었다.

    “그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다 그때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지. 한 소녀가 겁탈을 당해 혀를 물고 죽습니다. 그 소녀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이 국방색 내복 단추 하나요. 그러니까 범인은 군인이란 소리지. 근데 미군인지 국군인지 중공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가 없어. 그래 소녀 아버지가 그 단추 하나를 들고 온데를 헤매요. 그때 누가 말해줘. ‘왜 그걸 찾아다니시오. 미군이면, 인민군이면, 중공군이면 또 어찌하리요. 전쟁이란 그런 단추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거라오.’

    전쟁에 정의가 어디 있고 불의가 어디 있어. 국군은, 인민군은 학살 안한 줄 압니까. 양쪽이 다 참혹하게 죽고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내가 어느 편에 서겠어요. 누구다, 무엇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전쟁은 똑같다는 거, 전쟁은 해선 안되고, 나를 압도하는 것이고. 그러니 어떤 전쟁이든 반대할 수밖에. 다만 한국이 피란 가라 그러면 난 북쪽 아니고 남쪽으로 갔다 이거지.”

    그는 자신에게 ‘보수성’이란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전쟁 때 부역한 사람들 잡아다 깜깜한 데 가둬놓고 나에게 보초를 서라 그러면, 갇힌 사람들이 그렇게 안돼 보일 수가 없어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싶다며 안달들인데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그래 불이랑 담배를 구해다 주면 그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고…. 그럼 난 기분이 좋으냐? 그냥 누구 편이어서가 아니 인간적으로 불쌍해 그렇게 한 것뿐인데, 한편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또 다른 쪽에서는 “너 사상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하고. 양쪽으로부터 오해받는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겠소. 그렇게 이념보다 휴머니즘이 앞서는 것이 나의 보수주의라면 보수주의요.”

    -남들 도움 말고 내적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순수했기 때문 아닐까요. 음흉한 플롯이나 뒷거래, 그런 걸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날 견디게 해준 것 같아요. 어쩌다 결혼식 같은 데 갔다오면 고맙다는 전화가 와요. 난 깜짝 놀라는 거야. 생전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은혜도 모르고 인사성도 없는 나를 어떻게 이 세상이 받아줬을까.”

    -사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뭐 솔직히, 후하게 평가해줬으면 하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참 별게 아닌데 하는, 그런 미안한 마음. 그렇게 나는 언제나 양극단이요. 나에 대한 평가도 그렇겠지. 누군가는 굉장히 과장하고 또 누군가는 한없이 짓밟아버리고. 하지만 적어도 하나, 하늘에 맹세코 어린애처럼 순수한 사람이었다, 재주 피우는 사람 아니었다, 그리고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비록 모든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창의적 열정만큼은 남 못지않았다, 그렇게 말이에요.”

    이어령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령은 문학임을, 언어의 장사꾼임을 역설했다. 실제로 그는 아직 ‘소년’이었고, 칠순을 눈앞에 둔 ‘주류 인사’라기엔 지나치리만큼 순수했다. 문제는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건, 많은 이들에게 그는 한국의 대표적 논객이요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오피니언 리더라는 점이다. 명석하고 창의적인 열정의 휴머니스트, 그러나 한편으론 신문도 잘 읽지 않고 피 튀는 삶의 현장을 추상의 언어로 감당해온 양극의 인간. 그런 그를 당대의 지성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우리 시대의 기쁨인가 아니면 슬픔인가. 아직도 실존을 향한 회의(懷疑)를 멈추지 않은 노석학의 겸손한 말은 그래서 더 아프고 오히려 당당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나 자신이에요. 어떨 땐 멍하니 앉아, 내 나이 벌써 70인데 뭘 위해 살아왔나, 이것이 행복인가…. 예수는 “너의 옷을 찢지 말고 가슴을 찢으라”고 했는데, 찢으면 피가 나는 게 삶이지. 난 찢으면 가슴이 아니라 옷이 찢겨요. 옷 찢는 데서 글이 나오는 거라. 문학의 뿌리는 언어인데 그 언어가 마치 양말 위로 발 긁는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언어로 만들어진 나와 실제 피와 살로 만들어진 나는 왜 이다지 다른가….

    아무리 잘 만들어진 언어도 실제 그 자체일 순 없는데, 그래서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나오고 선문답이 있는 거라. 선문답이 뭐요. 언어 뛰어넘기고 언어와 격투를 벌이는 것 아닌가. 그러니 과연 문학은 옳으냐. 리얼한 삶이란 ‘강물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인데, 그것이 참 문학일 텐데. 나는 상징의 숲을 헤맸어요. 행위로서의 삶과 상징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 나는 과연 엎어지면 무릎 깨지는 그 삶 속에 발 담그고 고통스레 몸부림쳐 봤는지….”

    “옷이 아닌 가슴을 찢으며 살았어야 하는데…”
    오해받음, 소통의 불능으로 인한 좌절과 분노는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니는 ‘업보’ 같은 것이었다. ‘양면성이라는 생래적 특질은 무시당한 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무도하게 단죄되고 오해받아 왔다’는 좌절. ‘권력에 아부한 적도, 패거리를 만든 적도, 문학 지상주의를 외친 적도 없는데 문단 일각으로부터 반동이요 반개혁주의자라는 비난을 듣고 말았다’는 참을 수 없는 억울함. 나의 진실과 남의 진실 사이, 참으로 진실인 것은 무엇이며, 그런 것이 진정 있기는 한 것일까.

    -최초의 ‘오해받음’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이건 참 창피해서 안 하던 얘긴데.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학교 사친회 임원인 아버지를 따라 운동회에 갔어요. 아버지가 단상에 앉으니 나도 그랬지. 그때 웬 아첨 잘할 듯한 사람이 와서 “밤 던지기를 할텐데 아기한테 줍게 하라”고 해요. 정말 조금 있다 내 앞쪽으로 밤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난 그게 나만 주우라는 건 줄 알았지. 그런데 학생들이 와 몰려나와 막 주워가는 거야. 나는 내 밤인데, 내 밤인데 하는 마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그만 뻗대고 누워 왕 하고 울어버렸어요. 그럼 내가 밤을 그렇게 좋아했냐. 아니에요. 내 욕망은 밤이 아니라 내 권리였거든. 근데 사람들한테는 그런 내가 어떻게 보였겠어요. 참 그 녀석 욕심도 많다, 그러지 않았겠어요?

    내 인생이 그래요. 내 욕망은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지적 호기심, 지적 욕망. 내장이 없는 욕망. 그래서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쓰고 비평도 하고 칼럼도 쓰고 강연도 하고 문화행사 기획도 하고…. 그게 다 내게는 문학이고 지적 탐구의 한 길인 거요.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지요. 대학교수가 연구나 하지, 국문학자가 소설이나 읽지. 그렇게 내 욕망은 늘 오해받아 왔던 거요.”

    그러나 이어령이 가장 절통한 오해, 억울함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4·19 이후 일어난 그의 문학적 방향 전환에 대한 문단 일각의 비판일 것이다. 이는 자신의 ‘비체제 정신을 인정치 않는’ 진보(반체제) 혹은 보수(친체제) 진영 사람들에 대한 항변으로 이어진다.

    4·19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4·19 혁명 전, 선생은 저항문학의 젊은 기수 아니었습니까.

    “4·19를 전후해 내 글과 문학론에 큰 변동이 옵니다. 그것은 마치 사르트르에서 카뮈 쪽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4·19 시점까지 나는 저항문학, 참여문학의 선두에 서서 젊은이의 기수 노릇을 했어요. ‘만송족’이라고 하여 이기붕을 찬양하고 옹호하던 기성문단과 논쟁을 벌였고, 4·19 직전에는 당시 야당지인 ‘새벽’의 편집을 맡아 “지성에 방화하라” 등의 기획으로 자유당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지요. ‘새벽’ 지면의 반 이상을 할애해 흐라스코의 ‘제 팔요일’, 최인훈의 ‘광장’ 같은 작품들을 소개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4·19 공간의 무엇이 선생을 저항문학에서 순수문학으로, 신비평과 문명 비평의 세계로 옮겨가게 한 겁니까.

    “4·19 이후 같이 싸우던 정치가, 문인 중 많은 수가 권력지향적이 된 거예요. 시류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각종 정치단체가 난립하고 과격한 시위와 소요로 사회는 혼란스럽고. 그렇게 순수하던 4·19 정신이 특정 정치세력에 이용되고 왜곡되는 것을 보면서 정치에 깊은 회의와 실의를 느끼게 됐어요. 혁명이란 것, 역사결정론이라는 것은 이래서 안되겠구나. 권력의 언어로는 아무것도 안되겠구나. 권력으로 뭘 바꾼다는 건 ‘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는’ 악순환이구나. 내가 믿을 건 천년의 역사라도 이미지네이션으로 창조된 세계, 인공낙원의 그 세계이겠구나. 그래서 학생 모임이나 여러 사회단체에서 무슨 제의가 와도 모두 뿌리치고 문학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신념을 구축하게 된 거지요.

    존경받는 혁명가도 집권하면 또 한 명의 폭력주의자가 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자. 2000년 전 유대가 로마의 압제하에 있을 때, 수많은 유대인이 저항하다 붙들려가고 죽임을 당할 때, 예수는 태평스럽게도 하늘나라 얘기를 했어요. 그게 당시 사람들한테는 반동으로 보였을 거 아니오. 내가 예수라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예수한테는 하늘나라가 있었던 거고 나한테도 그런 게 있을 것 아닌가. ‘로마인’과 싸우다 보니,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그렇듯 큰 변화를 몰고 오기엔 4·19 정국이라는 것이 너무 짧지 않았나요. 일부 인사의 시류영합주의에 염증이 났을 수도 있겠으나 그로 인해 문학적 태도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는 건 좀 설득력이 떨어지네요.

    “문학은 역사, 정치의 예속물이 아니에요. 문학이 정치나 이념의 종속물 혹은 도구로 떨어질 때 문학은 부재합니다. 내가 그거 할 생각이었으면 정치가나 사회과학자가 됐을 거요. 사회개혁하기에 문학처럼 속절없고 둔하고 위선적인 게 없어. 4·19를 겪으며 문학의 언어가 얼마나 나약한 날갯짓인가를 깨달은 거지. 내 관심은 계층, 정치, 사회 같은 소유의 언어에 있지 않아요. 관계, 소통, 존재의 문제가 내 본령이지. 나는 정치하는 이들의 순수성을 믿지 않아. 내가 한대도 믿지 못할 거요.”

    -그렇다면 문학은 세계의 변혁에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건가요.

    “이전에는 문학을 총탄이고 다이너마이트라 생각했지만, 4·19 이후에는 빙산을 녹이는 난류 같은 거라 믿게 됐어요. 빙산에 총알을 쏴 봐. 그저 조금 부서질 뿐 그 밑동은 그대로잖아요. 또 좀 있으면 다시 얼 것 아니오. 그러나 기후 자체를 바꾸는 것은 근본을 바꾸는 거여. 난 그렇게 상상력과 창조력이라는 바다, 혹은 하늘을 택함으로써 인력에 구속된 지상의 땅으로부터 풀려나고자 한 것이지. 언어라는 구명대에 기대를 걸고.”

    -그 역시 또 하나의 극단주의 아닐까요.

    “내가 문학이 정치를 대신한다거나, 혹은 문학이 최고라고 한 적 있어요? 그런 게 있는지 한번 찾아봐요.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고? 그건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요. 나의 한쪽 면만 보면서. 내가 역사성(역사결정론 혹은 역사발전론)이라는 걸 문제삼는 것은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문학에서만큼은) 마이너 개념이라는 거요.”

    -개인주의자시군요.

    “그래요. 난 개인주의자예요. 문학은 앞에서도 말했듯 개인이니까. 조국도 중요하지만 애인 잃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 거고, 애인을 조국과 바꿀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요. 그걸 누가 씁니까. 문학자밖에 못 쓰는 거요. 그런 게 귀중하다는 거야. 국가라는 게 뭐고 사회라는 게 뭐요. 개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어. 근데 사람들은 그런 말을 못해요. 비난받을까 무서워서. 어떻게 민족과 사회와 국가가 지상(至上)이야. 난 지상 자 붙는 거 참 싫어. 문학지상주의도 싫어. 난 여태껏 살면서 지상이라는 말이 제일 싫어. 극단적인 언어가 싫어. 그래서 종교를 안 믿는 거요. 종교도 도그마화하니. 문학의 도그마화도 나는 싫어.”

    -집단적인 것에 염증을 느끼나요.

    “나는 연판장에 도장 찍는 그런 걸 도무지 싫어하는 사람이요. 무슨무슨 성명서, 그런 데 도장 안 찍어요. 그 문장 하나하나에 진정으로 동의할 수 있어? 그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도장을 찍어. 집단적 행위는 내 가치가 아닌데 그런 양 위장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로마를 망하게 한 한마디가 뭔지 아시오?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성경구절 하나요. 이 한마디로 로마의 모든 지적 토론, 담론, 신전과 예술과 목욕탕이 다 문을 닫고 말았어요. 그걸 되살린 게 르네상스 아니오.”

    ‘불온시’ 논쟁 그 이후

    -자신을 있는 그대로, 통째로 이해해달라는 건 무모한 욕심 아닌가요.

    “그렇죠. 소통 불능은 인간의 숙명인걸. 누구라도 세상을 볼 땐 자기만의 카메라 앵글로 보지. 그러니 내가 원망한 적 있는가. 왜 내 한쪽만 보냐고 날 세워 글쓴 적이라도 있는가. 사람이 집을 사러 가면 절대로 그 집을 한눈에 다 보지 못해요. 뺑뺑 돌아다녀야지. 그런데 그걸 가능케 하는 세계가 있어요. 바로 문학이고 상상력이지. 난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면 분열증 환자요. 한편으로는 지극히 수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니까. ‘공간의 기호학’ 같은 책을 봐요. 그게 수학책이지 어디 문학책인가. 그러면서 또 ‘말’처럼 아주 메타포릭한 책도 쓰고.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세상엔 꼭 찬반(贊反), 친체제, 반체제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회색지대도 있고 비(非)체제도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거요.”

    -그럼 내 견해만이 옳다, 그런 뜻은 아니라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당연하지요. 나도 옳고 너도 옳은 거지, 너만 옳고 나는 틀리다 하면 안된다, 그거예요. 난 입지가 다른 문학자라도 문학 자체로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장점도 이해하고. 황석영의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할 수 있게 한 게 누구요. 아주 심플한 거지.”

    -선생에 대한 문단 일각의 시선은 아직도 1967~68년 김수영 시인과 벌인 참여시 논쟁에 붙박혀 있는 듯한데요.

    “그로 인해 평생 반사회파다, 반혁신파다, 반진보파다 하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그러나 김수영씨랑 나처럼 친하고 문학관이 잘 맞는 사람도 없어. 논쟁을 하면서도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내가 김수영론도 쓰고. 그렇게 우린 죽는 날까지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겐 기본적인 공통분모가 있었거든. 언어의 존재론적 의의에 동의하는.”

    -김수영 시인의 “서랍 속에 숨은 불온시가 세상에 나올 때 비로소 영광된 사회가 온다”는 주장을 문제삼은 것으로 아는데요.

    “‘불온시’라는 단어는 내가 아니라 김수영씨가 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어떻게 시를 불온하다 하느냐, 그건 중앙정보부에서나 쓰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양쪽 다 똑같은 것이 되고 만다, 왜 시를 불온이냐 아니냐로 보느냐. 가뜩이나 정보부 사람들이 이게 시냐 하고 붙들어다 패는데…. 불온한 시가 좋은 시라면 가장 훌륭한 평론가는 불온을 가려내는 정보부원 아니겠나. 불온한 시라 해도 시가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도 있는 게지, 그런 식의 획일성은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내가 ‘불온한 시는 나쁘다’는 주장을 폈다면 이런저런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난 ‘불온한 시가 밖으로 나올 때는 또 하나의 불온한 시를 써야 한다’는 문학의 본령을 말한 것이거든. YS, DJ 정권 들어선 후로 봤잖아요. 그들과 함께 저항했지만 민주화하고 나면 그때의 불온시는 서랍 밖으로 나오고 또 다른 불온시가 탄생하는 것. 그것이 영원한 참여문학이고 저항의 문학인 거지.”

    그가 사용하는 ‘저항’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저항, 정치적 저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의 ‘저항’은 운명 혹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저항이다. 지극히 문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 22호에서 이어령을 이렇게 비판했던가.

    “이어령의 그런 좋은 뜻은 알겠는데, 문제는 과연 ‘중앙정보부와 ‘민중 비평가’를 평면적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것일 게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상호 힘의 관계를 전혀 따지지 않는 ‘추상의 폭력’ 또는 ‘상상력의 폭력’ 아닐까.” 일면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이다. 한편 참여문학에 대한 이어령의 비판적 시각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상당부분 ‘검증’된 측면이 없지 않다.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문학과 문인은 점차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참여문학 진영에서 선생에게 문제제기했던 것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을 때 행동으로 한 사람과 글로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중 글로 투쟁한 사람은, 사르트르나 카뮈도 그랬지만 끝없는 콤플렉스를 느꼈어요. 누가 나한테, 우리가 민주화투쟁하며 고난당할 때 너는 마누라 자식 다 거느리고 편안히 살지 않았느냐…. 그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것까지 아니라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정치적인 투쟁을 하고 싶었는데 비겁해서, 나 편하려고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요. 쓰고 싶은데 겁나서 못 쓴 게 아니라 내 문학은 원래 그렇지가 않은 거야. 행위의 세계는 언제 변할지 모른다, 나는 영원한 것에 걸겠다는 결심이 있었거든. 내가 무죄하다는 말이 아니오. 그러니까 그냥 ‘저런 것도 삶의 한 방식이구나’ 하고 알아주면 되는 거여.”

    그의 부연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사회적 발언도 아니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 본 거요. 다만 나는 그것을 나만의 문학적 언어로, 나만의 문명 비평, 메타포로 표현한 것이지. ‘박정희 정권 타도하라’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진 않았지만 나는 신문 칼럼, 에세이, 강연과 방송을 통해 정권의 반휴머니즘, 물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독선을 끊임없이 비판했어요. 특히 권력이 문학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는 가차없이 일어섰어요.”

    -1967년 2월, 작가 남정현의 반공법 위반 사건(소설 ‘분지’ 사건)과 1975년 3월, 변호사 한승헌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증인으로 출두한 것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도 한 예지요. 출두를 결정하기까지 내면적 갈등이 왜 없었겠어요. 사회운동 한다는 사람들도 꼬리를 뺄 때인데. 난 그때 신문사 논설위원이고 대학교수고 집과 자가용과 가족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다 버릴 생각으로 법정에 선 거요. 어느 한편에서라도 영웅이 돼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법정 분위기는 어땠을까.

    “그때야 어디 요즘 같은가. 증인으로 나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길로 법정구속당하고 마는데. 속으로 오돌오돌 떨고 있는데 웬 고등학생들이 우- 몰려 있는 게 눈에 띄어요. 라디오에서 “이어령이 증인 선다”는 뉴스를 듣고는 그걸 보겠다고 찾아온 거지. 그 아이들이 내게 용기를 줬어요. 쟤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내 문학을 좋아하는 애들인데. 문학에도 순교자가 있다는 걸, 목숨과 가정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있다는 걸, 인간에겐 그렇게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지….”

    -하지만 일각에서는 선생의 문학적 방향 전환이 사회적·경제적 안정과 함께 온 것이다, 그러니 일신의 영달을 위한 선택 아니었느냐는 비판을 합니다. 실제로 선생이 신문사 최연소 논설위원(27세)이 된 것이 4·19가 일어난 1960년이었으니까요.

    “내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경향신문 연재 칼럼 모음집)를 내고 인기몰이를 시작한 게 1963년입니다. 그 전에도 이름은 있었지만 그건 허우대만 멀쩡할 뿐 돈이나 탄탄한 지위와는 상관이 없었어요.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에 참여문학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현실참여 문인이라는 공적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해 행위를 한 거예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내가 순수문학을 선언한 것은 4·19 얼마 후 동아일보에 발표한 ‘까스트로여 현실에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거라’는 글을 통해서였어요. 남들이 순수문학에 안주할 때 사회참여론을 선언했고, 반대로 문인들이 이전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모두 나서 사회참여의 기치를 높이 들 때 나는 외로이 문학 순수론을 선언한 거요. 천 사람이 가도 혼자 앉아 있을 때가 있고, 천 사람이 앉아 있어도 홀로 떠날 때가 있는 것이 문학 아니요.”

    -선생은 자신을 비체제라 하는데 사실은 친체제 아닌가요.

    “그럼 예를 들어 봐요. 내가 새마을운동을 찬양했습니까, 육영수 여사 전기를 썼습니까. 무슨 기념시라도 쓴 게 있으면 찾아와 봐요. 옛날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하고 선거 나올 때, 한국일보 누군가가 나보고 연설 한번만 해주면 평생을 보장하겠대요. 그래서 내가 물었죠. “정말 그렇게 해주신답니까?” 그렇다기에 쏴줬어요. “그럼 평생 정권 안 내놓겠다는 말이네?” 두말없이 돌아가버립디다. 난 문화부장관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와 연을 맺은 적이 없어요. 또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휴머니즘에 입각해 정부를 비판했고요. 그 당시에는 반체제를 용공으로 몰았잖아요. 나는 앞장서서 “그들은 용공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요. 내가 친체제였다면 왜 나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변호했겠어요.”

    그는 특유의 ‘메타포’로 말을 맺었다.

    “나는 동전을 안쪽이나 바깥쪽이 아니라 그것을 세워놓고 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동전은 원이 아니라, 표리의 차이가 아니라 선이 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최소한 상안적(象眼的) 분류로 문학을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정치 혹은 이념의 잣대로 문인과 문학작품을 재단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 내 일관된 견해예요.”

    -선생은 한국이 낳은 대표적 미디어 지식인입니다. 선생이 각광을 받는 데 미디어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데요. 미디어야말로 체제 그 자체 아닐까요.

    “당시 누군들 미디어에 글쓰지 않았나요. 반체제도 마찬가지였어. 필화사건은 모두 미디어에서 시작됐다고. 반체제 자체가 미디어를 통해 컸는데, 그렇게 말하면 체제주의자, 반체제주의자 아닌 사람이 없겠네요. 그리고 내 글이 지지를 받은 건 미디어의 열광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이 내 글을 원했기 때문이요. 영향력은 미디어가 아닌 독자에게서 오는 것이거든. 흑백논리, 정치지향적 글에 염증 느낀 사람들이 전혜린을 읽듯 나를 읽은 거지.”

    누가 누구를 이용했나

    -그런데 그토록 정치를 혐오하는 분이 장관직은 왜 맡게 된 겁니까.

    “당시 언론에 다 보도된 일이지만, 그 전에 난 이미 문공부장관으로 오라는 걸 거절한 적이 있어요. 문공부 일이 결국 정권 홍보하고 신문 입 막는 거 아닙니까. 근데 문화부장관 맡을 때는 상황이 좀 달랐어요. 그때 난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장남 결혼식 때문에 잠깐 서울에 들어왔거든. 어떻게 알았는지 청와대에서 사람을 보낸 겁니다. 그래도 안 통하니 이번에는 저와 가까운 강원룡 목사를 찾아갔어요. 거기서 강목사가 “문공부장관은 안해도 순수 문화부장관은 할거요” 라고 말해버린 거지.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데 텔레비전에 내 이름이 나와요. 문화부장관이라고. 아,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됐구나. 좋다, 문화부장관이라면, 그것도 초대(初代)라면 밑그림 그리는 셈치고 한번 들어가 보자, 그렇게 된 거요. 또 어쨌거나 노태우 정권은 국민투표를 통해 선택된 정부였고. 무엇보다 나처럼 어디 정당 사무실 가서 차 한잔 얻어 마신 적 없는 사람을 고른 걸 보면,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내칠 수만은 없지 싶었어요.”

    -선생의 명망, 혹은 이미지를 군사정권의 색깔을 완화시키는 데 이용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이용했는지는 내가 한 일을 보면 알 것 아니요. 문화부장관 하면서 내가 한 일이 국회와 청사에 그림을 걸고, ‘이 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고, 달동네에 쌈지공원 만들고, 안숙선씨처럼 가난한 예술가들 위해 후원회 결성하고, 예술종합학교를 세운 거요. 국립미술관에 걸린 그림 가져다 보훈병원, 정말 돈 없고 몸 불편해 어디 가서 좋은 그림 한번 보기 힘든 사람들 위해 전시하고. 차라도 뒤집혀 작품이 손상된다면 내가 어떻게 될 일이었겠소. 미술관법, 박물관법을 문화부로 가져와 누구라도 쉽게 미술관을 열 수 있게 했더니, 또 언론에서는 그게 재벌 컬렉션 도와준 거라 그래요. 아, 그러지 않았으면 그들 창고 속에 잠자고 있는 그 문화의 보고들을 어찌 대중이 접할 수 있었겠소.”

    이어령은 노정권 최장수 장관이었다. 자리에서 물러날 때 상황은 어땠을까.

    “처음 들어갈 땐 1년만 하겠다고 했어요. 내 할 일 끝나면 손 털 작정이었지. 그런데 그만둘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벌여놓고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한 2년 돼가니 더 못하겠습디다. 국무총리 찾아가 말했더니 청와대에서 비서실장을 보냈어요. 그래 부탁했지요. “이번 개각에 나 포함시켜 주지 않으면 내 발로 나가겠소. 그러면 또 그 꼴이 얼마나 우습소. 다른 장관들께도 폐가 되고. 그러니 제발 나가게 해 주시오.” 그래서 참 홀가분한 마음으로 놓여나게 된 겁니다.”

    “옷이 아닌 가슴을 찢으며 살았어야 하는데…”
    -선생이 문학에 대한 권력의 검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검열하는 정치가 위에만 있나, 아래에도 있지. 민중 검열이라는 건 없어요? 제도와 권력에만 폭력이 있는 게 아니오. 내가 문화부장관할 때 ‘태백산맥’이 나왔어요. 그걸 가지고 정보부에서는 못 팔려나가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문화부는 “나름의 가치를 지닌 문학 작품”이라며 더이상 응하지 않았어요. 그건 소설을 쓴 작가도 알고 있는 부분이오. 영화 ‘남부군’도 그때 나왔어요.

    검열 없는 나라는 없어요. 이솝 시절에도 검열은 있었어요. 문학은 지금껏 그런 사회적 도덕적 억압의 조건 속에서 성장해온 거요. 거기서 레토릭,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기법과 기교가 나온 것이지. 검열이 문학의 모든 제약조건은 아니에요. 언제 문학이 100% 자유를 누린 적이 있던가. 검열이 없으면 멋있게 쓸 텐데, 이것만 아니면 기가 막힌 작품이 나올 텐데 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문학이란 원래 검열에 잘릴 만한 그런 거칠고 현실적인 말보다 더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언어를 써야 하는 거거든. 역사와 사회라는 유동적인 세계를 온전히 파괴하고 재창조할 수 있을 만한.”

    -혹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선 한국적 전통가치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던 선생이 올림픽 이후로는 다시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게 된 이면에도 그런 보수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는데요.

    “내가 1950~60년대 서구주의적 교양에 빠져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어요. 서구의 철학, 시, 유럽 풍광을 담은 엽서, 프랑스 인형…, 그런 것들을 사랑했지요. 저기 멀리 내가 못 가본 곳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젊은이들이 노를 저으며 사랑을 나누는 호수가 있고 만년설로 빛나는 몽블랑이 있다. 그런 꿈, 희망, 삶의 전율이 없었다면 20대의 난 죽고 말았을 거예요. 당시 우리 사회는 어떤 압도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사대주의라 매도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늘 보던 대추가 바나나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새롭기 때문에 바나나에 열광하는 그런 차원이었으니까.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몇 차례 해외여행을 하면서 생각에 많은 변화가 왔어요. 더 결정적인 건 1978년에 주역, 정확히 말해 이원구의 ‘심성록’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요.”

    -일련의 여행이 선생에게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처음 유럽 여행 때부터, 내가 책과 그림 엽서를 보며 키웠던 꿈과 환상이 곧 현실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서구의 물질적 풍요, 길거리에 빵과 소시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모습은 그런 갈등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어요. 굶주리는 사람이 지천에 깔린 한국을 생각할 때, 산업사회의 모순보다는 그 장점이 더 크게 들어왔던 것이죠. 하지만 1988년 미국에 가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것이 한국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혹은 정보사회에 대한 비전 확립으로 이어진 건가요.

    “그렇지요. 그때 이미 미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세계가 다 미국이 되고 있었으니까. 내가 거기서 본 건 산업사회의 영광이 아니라 몰락이었어요. 뉴욕의 마천루가 우리 모델인 줄 알았더니 거기 이미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너무도 황막한 그들의 삶, 현대문명이 만들어 놓은 얼굴 없는 삶, 이방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도 느낄 수밖에 없을 절대 고독의 아스팔트. 사람이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 이런 데선 새로운 21세기가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그 와중에 정보사회의 태동을 감지한 겁니다. 오랜 고민에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지요. 정보사회는 나눌수록 부자가 되는 독특한 지평입니다. 남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남이 있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가 있는 쌍방향의 세계. 우리 것, 정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적 문화는 정보사회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어요.”

    사실 정보화사회에 대한 이어령의 이해는 깊고, 비전 제시는 매우 설득력 있다. 요즘 그가 하는 강의의 상당수는 정보화에 대한 것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열정이요,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1988년이라면 이미 55세 아닙니까. 왜 안정된 생활, 올림픽 성공으로 한껏 높아진 위상을 뒤로한 채 미국행을 감행했나요.

    “그게 바로 내 나름의 저항이요 혁신이고 모험이에요. 10년에 한번씩은 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정체된 삶은 지옥이거든. 나는 늘 우물을 파지만 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구덩이를 포기해버려요. 내게 필요한 건 목마름이지 물이 아니니까. 그래서 한 분야를 진득하게 붙들지 못하는 거요.

    이건 내가 안정을 누리면서 보수화되지 않았느냐는 비판과도 연결되는 건데, 사실 나이들어 먹고살만해지면 얼마간 독기가 빠지는 거, 그걸 누가 부인하겠어. 하지만 나는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왜 자꾸 안정된 모든 것을 버리고 외국으로 가 그 고생을 하겠어요. 더군다나 미국 갔을 때는 몸도 너무너무 안 좋았는데.”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요.

    “돈 후안이 1003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눴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적 돈 후안이요. 생명이 허락하는 한 지적 모험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난 별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낯선 곳에 가면 괜히 슬픔이 밀려와요. 고개 한번만 돌리면, 언덕 하나만 넘으면 내 평생 보지 못했던 어떤 거리, 어떤 사람들이 있을텐데 그걸 다 못 보고 지나쳐 가는구나. 그런 아쉬움이 나를 끊임없이 방황하고 지치게 해요. 집이 책으로 넘치는데 지금도 ‘아마존’ 들어가고 ‘예스24’ 가서 자꾸 책을 사요. 그걸 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련만 책장 하나를 넘기면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 그걸 놓쳐버리는 게 너무 아쉬워서.”

    -그럼 왜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강연이며 각종 문화 프로젝트에 적극 나서는 거죠.

    “다 지적 호기심 때문이에요. 아, 내가 무슨 돈으로 그 커다란 스타디움, 막막한 푸른 잔디 위에 은빛 굴렁쇠를 굴려봐.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일이란 그렇게 리얼라이즈(현실화)가 동반돼야 하는 거요. 그게 바로 창조적 욕망이고 지적 흥분이지. 보통 교수들은 올림픽 같은 거 같이 해보자면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뒤로 빼는데, 난 그 세계사적 의미를 보고 그냥 뛰어들었어요. 말꼬리만 잡지 말고 말 등에 올라타라 이거지요.”

    -일부 학자들의 글을 보면 독자가 아닌 ‘동업자’들에만 신경썼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선생은 어떻습니까.

    “난 지금껏 남 눈치 보며 글쓰고 강연한 적 없어요. 다만 청중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해시킬까, 그 방법만 생각하지. 그들을 내 신도로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해요. 또 이때껏 강연료 얼마 주냐 물어본 적도 없어. 강연하는 그 순간 형성된 공감대, 그것이 내겐 대가요. 근데 전혀 안 먹힐 때가 있거든. 반응이 전혀 없을 때, 뻥하니, 젊은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 그래서 내가 대학 강의를 안 가잖아요. 그거 끝내고 돌아왔을 때처럼 내가 바보스럽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나와 그들, 절벽 같았던 한 시간의 그 어색한 강의. 서로 나누고 싶은데 감동이 안 나눠지는 거요.”

    -왜 그런 것 같으세요.

    “특히 서울대 같은 데 가면 더 그런데, 애들 머리가 딱 굳어 있어요. 결론이 이미 다 나 있어. 내 얘기가 너무나도 생소한 거지. 선생, 친구들 모두 역사결정론, 정치·경제 그런 것만 얘기하는데. 고정관념이, 그렇게 막혀 있을 수가 없어. 난 딱 보면 알아요. 저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인생에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이구나.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래서 요즘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실망뿐인가요.

    “아니에요. 사실 내 나이 일흔인데 요즘 젊은이가 내 강의에 열광하면 걔 인생은 뭐여. 그래도 이 친구들은 개그맨 보면서 웃고 데모도 하고 오빠부대 노릇도 해보고, 그러면서도 직설적이고 총명하잖아. 그러니 너희들은 날 닮지 말고 너희들의 인생을 살아라…. 그런데도 글을 쓰는 건 그들도 20~30년 후에는 나처럼 화석이 되리라는 것, 그런 화석들이 모여 긴 물결을 이루리라는 믿음 때문이지요.”

    1988년, 미국 맨해튼 슬럼가에 방을 얻은 이어령은 랩톱 하나를 사 컴퓨터 학습에 몰두했다. 집주인이 새로 이사왔다며 문에 페인트칠을 해주었는데 사흘 내리 복도 한번 안 나가고 몰두한 나머지 그만 페인트가 엉겨붙어,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그렇게 그는 영문 도스 매뉴얼 한 권을 통째 소화하는 것으로 정보화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뉴욕은 불야성이잖아요. 그런데 아직 해 뜨려면 먼 시간인데도 가로수에 잠들어있던 새들은 용케 아침 햇살을 느끼고 짹짹 노래를 불러요. 처음에는 한 마리가 자신 없는 소리로 삑삑거리는데 곧 여러 마리가 그 뒤를 따르고, 그러면 어느새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지요. 쑥스러운 말이지만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에게도 저 새들처럼 얇고 예민한 눈꺼풀이 있어, 21세기가 열리는 그 순간을 내 소리로 울 수 있으면 좋겠다….”

    -아까 주역을 말씀하셨는데 그건 또 뭔가요.

    “이거 참, 이것도 안 하던 얘기예요. 내가 주역까지 들여다 봤다면 또 사람들이 참 욕심 많다, 안 하는 게 없다고 수군거릴 테니까. 뭐냐 하면, 철학자 박종홍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쓰신 글에 “주역을 풀어 쓴 이원구(18세기 실학자)의 ‘심성록’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구절이 있었어요. 궁금했지요. 그게 뭘까. 근데 1978년인가, 그 책이 신기하게도 내 손에 쏙 들어온 거예요. 내가 ‘문학사상’을 운영하며 한 일 중 큰 것 두 가지가, 하나는 수용미학이론이니 프랑크프루트 학파니 마르케스니 카잔차키스니 하는 해외문학 이론·작가를 소개한 거였고, 또 하나가 국학이나 고전작품을 발굴하는 일이었어요.

    어느날 허름한 차림의 한 시골 어른이 보자기에 책 몇 권을 싸 오셨는데 그게 바로 ‘심성록’이여. 비싸기도 하고 내 한자 실력도 별 볼 일 없고 해서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혹시나 싶어 카피를 했지요. 그날 밤 가만히 펼쳐보니 이게 뭐 그렇게 어려운 한자가 아니야. 술술 읽어내려가다가 무릎을 탁 쳤어요. 서양과 동양의 기본적 차이가 선명히 드러나는데, 이걸 기호학적으로 풀면 기가 막히겠더라고.”

    이어 ‘심성록’이 제시하는 동양적 세계관의 정수에 대한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자신이 발휘해 온 상상력, 예컨대 텅 빈 스타디움에 굴렁쇠를 굴리는 식의 창의력은 심성록을 통해 촉발된 점이 적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재정립된 ‘동양의 눈’으로 세기말의 뉴욕을 보니 정보사회의 장점과 가능성이 한꺼번에 보이더라는 것이다.

    -선생의 현란한 추상의 언어는 때때로 사람을 숨막히게 합니다.

    “나 역시 추상성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래도 그것이 바로 나의 진정성인데, 진정성은 추상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그건 어느 만큼은 우리 세대가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봐요. 요즘 젊은이들은 셰익스피어와 고우영 만화를 함께 즐길 줄 알지만, 우리 세대는 ‘목포의 눈물’ 하면 그냥 무시해버렸거든. 서양적 교양에 완전히 치여버린 세대고. 거기서 돈과 권력을 무시하는 지적 오만이 생겨난 거요. 그게 바로 속물적 지식인 근성, ‘모름지기 지식인이란 어때야 한다’는 식의 행태로 나타난 거지.”

    -그럼 선생 개인의 콤플렉스는 무엇입니까.

    “사회성이 부족한 거.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듣게 귓속말 할 때, 그들이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굉장한 소외의식을 느끼지요.”

    패거리 혐오, 그리고 ‘왕따’의식

    사실 이어령은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도 문단 내에 패거리를 만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그 주간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창비파(창작과 비평)’ ‘문지파(문학과 지성)’는 있으되 ‘문사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혹 그런 반(反)패거리 의식은 생래적인 사회성 부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나는 패거리주의를 경멸해요. 내가 펜클럽, 무슨 문인회 같은 데 회원이나 임원으로 참여하는 거 봤어요? “

    -그럼 왜 무리 속에 끼지 못하는 것을 콤플렉스라 생각하지요.

    “어쩌면 하고 싶었는데 못 한 건지 모르니까. 하여튼 난 그게 정말 잘 안돼요. 대놓고 남한테 싫은 말 막 하고. 또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는 한 시간을 앉아 있어도 입을 열지 않아요. 의례적인 인사치레 같은 건 도저히 못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말 참 많다 하는데, 나한테는 그게 곧 대화거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지요. 한편으로 옆에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또 숨막혀 못 살아요. 계속 위대해야지 하는 부담감 때문에. 그러니 이른바 ‘꼬붕’을 못 두는 거지. 또 하나는 경험의 소산이에요. 문단에서 내가 취직시켜주고 알게 모르게 마음 썼던 사람들이 오히려 날 욕하고 배신해요. 아, 내가 잘 하면 할수록 상처도 크구나, 어느새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 박혀버린 거지요.”

    -그래도 선생처럼 유명한 분이 “나는 왕따”라고 말씀하시면 정말 왕따당하는 사람들이 속상할 것 같은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비체제, 반체제 그런 거하고도 연결돼 있어요. 비체제도, 반체제도 나를 자신들의 친구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지난해 이화여대에서 석좌교수 고별강연을 할 때, 처음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헤어질 때 보니 후배 몇 명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진짜 손님은 그들일 텐데. 글쎄, 내가 과민반응하는 건가.”

    -그런데 왜 문화권력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요.

    “권력은 휘두를 때 권력인 거요. 예를 들어 뉴턴은 엄청난 문화권력을 행사했어요. 반대 이론자들을 철저히 분쇄했으니까. 대한민국의 문단 권력은 무엇보다 신춘문예에서 나오는 것 아니오. 또 조직을 갖고 있어야 하고. 문단에서 “이어령이한테 밉보이면 큰일”이라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대학입시에 내 작품이 거론되고 예문으로 나오는 거 봤어요?”

    -다시 추상성이란 주제로 돌아가죠. 선생은 누구 못지않은 사회생활, 사회적 발언을 해왔고, 또 경제적 안정·행복한 가정·명예와 권위라는 세속적 가치들을 모두 누린 것 같습니다. 그렇듯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상상력·언어로 대변되는 정신적 추상성 사이에는 어떤 ‘문지방’이 있는 건가요.

    먼저, 랭보와 보들레르에 심취했던 선생이 어떻게 결혼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장치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나도 20대 초반까지는 애를 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 때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서른이 넘어도 죽지 않데? 그러니 천재가 아니지. 어쨌건 그때는 이 느글느글한 세속과 접점을 갖는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얼음에 금간 거. 인생에도 다 그런 금이 있는 거야. 나한테는 그게 결혼이었어요. 가정의 편안함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그때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고.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대가족이 해체된 후로 맛보지 못했던 안정을 느껴보고 싶었던 거지요.”

    그는 “당시에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속물스러워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학을 위해 결혼을 안 하겠다, 무슨 상을 타겠다 안 타겠다, 이런 건 뒤집어 말하면 그 결혼이나 상에 대단히 큰 의미를 두는 거거든. 난 그렇지 않았어요. 그저 생존의 파트너를 만난 거였지. 당시는 독신이라도 요즘처럼 자유롭게 여행 다니고 보헤미안처럼 떠돌 자유 같은 건 없었어요.”

    -하지만 자녀를 갖는다는 건 분명 남다른 경험이었겠지요.

    “그럼요. 첫딸이 태어나면서(1959년) 비로소 내 안의 독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어제까지 없던 생명이 나로 인해 생겨났다는 그 신기함, 또 책임감. 그때 속으로 말했어요. 너는 세 끼 밥 안 굶게 해줄게,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줄게, 아버지가 못 가져 경멸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것들, 콤플렉스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게. 그래서 그때부터는 아침에 취직했다 저녁 때 보따리 싸들고 나오는 짓은 더이상 하지 않게 됐지요.”

    ‘세속적 삶’에 대한 죄의식

    -그래도 선생 말씀을 들어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죄의식 같은 게 묻어나는데요.

    “성직자가 가족을 안 갖는 건 왜겠어요. 작가도 마찬가지지요. 문학적 순결성에 온몸을 던져야 할 사람이 세금 내고 애 키우고, 그런 일상적 삶에 가치를 두는 건 맞지 않아요. 그러니 내겐 가정 생활이 끝없이 모순으로 다가오고, 내면은 아웃사이더인데 외면은 영락없는 인사이더인 삶. 그런 속물로서의 나에 대한 자조, 멋쩍음이 없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젠 그런 것들을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근데 아니에요. 손주 녀석들 안고 있다 누구랑 마주치면 막 창피하고.”

    -아직 문학소년 같은 데가 있으시군요.

    “맞아요. 사실 난 시장으로 상징되는 사회생활은 거의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상아탑으로 상징되는 일종의 방파제 안에 머물러 왔으니까.”

    어쩌면 그러한 ‘경험 부족’이 오늘의 그를 추상이 일상을 압도하는 자아의 세계로 이끈 것 아닐까.

    -일상적인 건 선생에게 중요하지 않은가요.

    “글쎄…, 난 생활을 주제로 한 대화는 잘 안 나눠요. 누가 “건강은 어떠십니까” 해도 “육체의 건강은 중요치 않다, 정신적 건강이…” 어쩌구 하는 대답을 늘어놓으니까. 생활, 현실 그런 것들을 모두 상상, 언어, 메타포 같은 것으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거지. 난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요. 내 손으로 편지 한 장 부쳐본 적 없는 걸. 그렇게 따지면 사실상 현실과의 접점이 별로 없는 거지.”

    -그렇게 바닥에서 10㎝쯤 붕 뜬 상태로 살아왔는데도 아주 정상적으로, 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무슨 이유지요.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사람이 정상적인 가정을 갖고 큰 고비 없이 살아온 게 신기해요. 나를 잘 아는 사람, 그러니까 형제들만 해도 다 기적이라 그래. 만약 내가 사업이나 정치를 했으면 완전히 망가졌겠지. 그나마 문학, 이미지의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됐지 싶어요.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문화인이고 교육자고.

    또 초기에는 독자가, 그 다음에는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 같은 분이, 또 올림픽위원회 박세직씨 같은 사람, 그렇게 날 ‘참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게 결정적이었어요. 세속적인 부분을 감당해 준 아내도 빼놓을 수 없겠고. 이건 참 말 안 되는 거지만, 혹시 돌아가신 어머니가 날 봐주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요. 하지만 남들은 그걸 믿지 않겠지. 얼마나 약삭빠르게 끈 대고 아부했으면 정권을 바꿔가며 장관도 하고 새천년준비위원장도 했을까, 그러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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