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군사정권에 대한 대중의 恨이 내 노래 키웠다”

80년대 관통한 ‘절대 강자’ 조용필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입력2002-12-02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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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분야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경우 조용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혜성처럼 나타난 이래 가요의 형식과 녹음수준, 산업규모 등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팝 음악의 역사가 비틀스를 기점으로 분리된다면, 우리 대중음악은 ‘조용필 이전’과 ‘조용필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정권에 대한 대중의 恨이 내 노래 키웠다”
    한국가요사에서 조용필이 갖는 의미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조용필의 노래만이 초등학교 교실과 노인정에서 함께 울려 퍼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전성기의 화염을 내뿜던 1980년대 초반, 어린아이들은 너도나도 ‘단발머리’의 가성을 흉내냈고, 20대들은 ‘고추잠자리’에 넋을 잃었으며, 중·장년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했고, 할머니들은 ‘한오백년’에 어깨 장단을 맞췄다.

    그래서 가요계 인사들은 말한다. “조용필처럼 노래 잘하는 가수가 또 등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처럼 전국민을 팬으로 하는 가수가 다시 나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노래가 모든 세대와 계층의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음악가의 꿈이다. 전영록 김수철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선희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이 그와 저울추를 맞추려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인자 군(群)에 머물러야 했다.

    한참 후배인 요즘 가수들 역시 ‘조용필처럼 되는 것’을 꿈꾼다. 민중가수 출신인 안치환도 실은 슈퍼스타 조용필처럼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으며 1990년대를 풍미했던 신해철은 심지어 그를 ‘조용필 장군님’이라 부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용필과 비견되는 유일한 인물인 서태지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왕성한 식욕도 조용필이 남긴 경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트로트 가수들이 트로트 부문만 주시하고, 록 밴드는 주로 록의 흐름에 민감하며, 댄스가수들은 댄스음악만 바라보게 되어있다. 그러나 조용필의 경우는 달랐다. 그가 신보를 내놓을 때마다 모든 장르의 음악인들이 ‘이번에는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까’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다. 영원한 국민가수이자 독재자로 한국 가요계를 호령한 지 어느덧 30년, 지금 그는 더 이상 전성기가 아니다. “조용필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던 십대 팬들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앨범을 발표해 신세대 스타들과 순위와 판매량을 겨루는 처지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는 공연에서만큼은 왕년의 가수임을 거부하며 여전히 가요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의 이름이 ‘불변의 현재진행형’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연 준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조용필은 12월7일부터 14일까지 8일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공연 준비로 분주했다. 공연에 관한 보도자료를 일간지들에 막 배포했다고 했다. 사생활보다 음악얘기를 많이 하고싶다고 말을 건네자 “요즘도 내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처럼 옛날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흥분된다”는 말로 인터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막상 인터뷰에 들어가니 조용필은 듣던 것보다 달변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긴장하거나 난처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여유 있었다. 대화를 풀어 가는 방식 또한 과연 한 분야의 일인자다운 풍모를 보였다.

    -전국 순회공연을 막 끝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쉬지도 않고 계속 공연하는 게 피곤할 것 같습니다. 나이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게 제가 팬들한테 할 수 있는 보답인데 피곤할 리 있겠습니까, 오히려 즐겁지요. 서울공연을 끝마치고 나면 바로 수원 부천 부산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2회씩이에요. 빡빡한 스케줄이지만 노래는 힘들지 않아요. 아직 나이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조용필 공연은 매번 엄청난 스케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000년 공연에서 이름의 필(弼)자를 대형으로 만든 장치가 무대 위에 회전하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는데요, 무대에 얼마나 돈을 들이는지 궁금합니다. 개런티까지 쏟아 부어 무대를 꾸민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필(弼)자요? 한 1000만원 정도 들었을 겁니다. 그 정도를 갖고 놀라셨다니 아마 작년 공연을 봤다면 까무라쳤겠네요. 제작사로부터 공연 비용을 모두 지급 받기 때문에 내 개런티까지 따로 들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개런티가 얼마인지는 말씀 못 드리지만, 다른 가수에 비하면 서너 곱절 정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름에 비해 실제로 돈은 많이 벌지 못한다는, 혹은 별로 가진 게 없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벌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싶은데요.

    “그래요? (크게 웃으며)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요. 공연은 한해 수십억원 규모입니다. 이번 공연 역시 그다지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표가 50%가량 팔렸어요. 다음 주면 100% 매진될 거라고 봅니다. 앨범도 꾸준히 팔려요. 제 앨범은 불황이 없거든요. 특히 베스트 앨범이 잘 나가는 편이라고 하더군요. 저작권 수입도 만만치 않습니다. 공연, 앨범, 저작권 세 곳에서 수입이 나오니까 괜찮은 편인데… 글쎄요 정확한 액수는 잘 모르겠습니다.”

    ‘숫자는 얘기하지 않는다.’ 조용필은 과거부터 독특한 화술과 화법으로 유명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남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적지 않게 말도 건네는 편이어서 겉보기에는 ‘충분히 주고받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대화를 끝내고 나면 후련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 좀처럼 ‘내면’을 탁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구체적인 숫자나 타인의 이름은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창 때는 이런 말도 돌았다. “조용필은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가슴에 깊이 보관한 사람이다.” 평범한 자연인 조용필이 한 말이 아니라 최고스타 조용필의 말로 치환되는 데서 오는 부담감, 쉽게 한 말이 본의 아니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곤 했던 경험과 상황이 그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오해와 낭설에 둘러싸여

    “제가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 탓도 있을 겁니다. 그 때문인지 저에 관한 얘기는 이상하게 부풀려진 게 많아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얘기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놔두거든요, 특별히 나쁜 게 아니면.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 나중에 들어보면 어처구니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술에 관한 얘기도 부풀려진 건가요. 눈감으면 잠, 눈뜨면 술이라는 소주광(狂)에다, 때로는 한자리에서 소주 한 상자 스무 병을 물 마시듯 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흥이 나면 술좌석에서 즉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도 하고요.

    “말도 안돼요. 20병 먹으면 죽지, 그게 사람입니까. (웃음) 물론 술을 좋아하지만 많이 마셨어도 소주 다섯 병 정도였을 걸요. 지금은 그나마도 못 마셔요. 공연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자제하느라 맥주만 조금 하는 편입니다. 말술이니 주정뱅이니 하는 말은 다 헛소문입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한다는 얘기도 처음 듣네요. 노래는 노래방에서 해야지 왜 술자리에서 하겠어요.”

    -그럼 ‘창 밖의 여자’ 얘기에 대해선 들은 적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조용필씨가 대마초 사건으로 교도소에 있던 당시, 연인을 소재로 쓴 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과 다른가요.

    “(웃으며) 그것도 말이 안 되죠. 그 노래는 라디오드라마 주제곡이었거든요. 곡은 내가 썼지만 가사는 드라마에 맞춘 거예요. 작사가 배명숙씨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읽은 겁니다. 제 실제 상황과 관계가 있을 수가 없지요.”

    당대 최고의 스타 조용필에게는 무수한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쓰이던 시절이다 보니 그에 관한 얘기들은 아무런 여과 없이 세인의 입에 곧장 올랐다. 조용필 본인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인물과 자취가 보통명사가 됐을 정도였다. 그 시절 사람들은 ‘부산항’ ‘위대한 탄생’ ‘창 밖의 여자’ ‘오빠부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박지숙(전 아내)’ ‘가수왕’ ‘이주일’ 등의 단어를 상식이나 되는 것처럼 끼고 살았다.

    “군사정권에 대한 대중의 恨이 내 노래 키웠다”

    슈퍼스타도 세월은 어쩌지 못하는 것일까.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조용필의 모습 또한 많이 변했다.1979년(왼쪽 위) 1989년(오른쪽 위) 1996년(왼쪽 아래) 2002년(오른쪽 아래)

    -음악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처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한 후 트로트를 했다는 사실이 창피해 사람들을 피하고 다녔다는데요. 그때 상황을 듣고싶습니다.

    “1975년 10월쯤이었는데 그 무렵 나는 밴드로 활동하고 있었죠. 기타 연주자면 됐지 가수로 불리기는 싫었습니다. 앨범을 녹음하려고 ‘너무 짧아요’와 ‘생각이 나네’ 두 곡을 준비했는데 한 선배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권하더군요. 그 분이 이회택씨(현 프로축구팀 전남 드래곤즈 감독)였어요. 저와는 절친한 사이죠.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편집과정에 보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두번째 곡으로 올라와 있더라고요. 바로 음반사에 밑으로 내려 달라고 했죠. 록 음악 하는 사람이 트로트 부른 것을 자랑스레 내걸 수는 없잖아요. 창피한 것을 떠나 그 곡이 그렇게 인기를 얻으리라는 생각을 못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시로는 아주 혁신적인 트로트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의 독특한 음색에 홀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대마초 사건 후 ‘창 밖의 여자’가 그토록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그 음색을 다시 듣고싶은 심리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은데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요.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려준 곡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사실 신경을 꽤 많이 써서 만든 곡입니다. 뮤지션이라면 다 그렇지만 잘 만들고 싶었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실은 록 스타일이에요. 일단 형식은 트로트지만 리듬은 록을 사용했고 전주의 기타연주도 내가 직접 했어요. 김동성씨의 바이올린 연주도 매끄럽게 들어갔고요. 글쎄요, 트로트가 우리 정서를 지배하던 때 만들어진 ‘록 리듬이 결합된 신(新)트로트’라고 할까요. 이 곡이 나온 다음에 최헌의 ‘오동잎’이나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곡들이 뒤를 이었지요.”

    그의 말대로 80년대 ‘조용필 현상’의 바탕에는 바로 이전 시기인 7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던 트로트의 새 물결 ‘트로트 고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1976년 그가 만든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정’이 크게 히트하면서 경기도 파주 장파리와 용주골, 서울 이태원의 야간업소를 전전하며 밴드생활을 하던 조용필의 무명시절은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휘몰아치던 성공도 잠시, 곧바로 터진 대마초사건의 충격이 순탄할 것 같던 그의 행보를 정지시켰다. 공식적인 음반활동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 공백기에 조용필은 판소리 창법을 공부하는 등 한층 보컬을 연마했고, 마침내 1980년 신년벽두에 그의 백업 밴드 이름처럼 또 한차례의 ‘위대한 탄생’을 이뤄냈다. 이후 그의 전성기는 그대로 한국대중음악의 역사가 됐다.

    돌아온 조용필의 음악은 록, 발라드, 뉴 웨이브, 소울, 민요, 동요 등 장르의 백화점이라 할 만큼 다채로웠다. 특히 ‘한오백년’이나 ‘황진이’ 같은 국악풍 노래는 ‘당대의 절창(絶唱)’이란 찬사를 받았고, 젊은 세대는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의 전형적인 록에 전폭적인 갈채를 보냈다. 가요사상 최초의 오빠부대를 형성한 그의 최대 응원군인 십대들은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사랑을 몰라’ 같은 곡에 목이 터져라 ‘용필 오빠!’를 연호했다.

    여론에 밀려 만든 ‘허공’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대전블루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 ‘허공’으로 대표되는 트로트를 빼놓지 않고 발표했다. 그가 국민가수로 연착륙하는 데 이 트로트 곡들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조용필은 “트로트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음반사를 비롯한 ‘외부의 간청’에 의한 것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팬들은 언론이 조용필씨를 ‘트로트 가수’로 규정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듯합니다. 조용필씨도 근래 공연에선 기성세대가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트로트를 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트로트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팬들은 저의 음악세계를 단순화하는 게 싫어서 그러겠지만 제가 트로트 부르기를 꺼리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근래 공연자료를 보시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허공’ 같은 곡들을 무대에서 부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1986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허공’은 십대를 겨냥한 노래들이 한창이던 때 발표됐습니다. 그 곡을 취입한 것도 주변 권유에 따른 것이었습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비교해 그때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상황이 유달랐어요. 그 곡을 취입한 것은 상당히 전략적인 결정이었고 내가 원하던 바였습니다. 당시 제 팬은 청소년들이 주축이었죠. 그러다 보니 ‘여의도가 온통 애들 천지여서 학부모들 반발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노래가 너무 젊은 애들 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습니다. 대중가수가 대중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방향을 기성세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허공’은 트로트로 분류되지만 사실 4분의 3박자에 왈츠 리듬도 들어가서 고전적 트로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가사가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취입에 적극적이었죠.”

    -‘한오백년’ 같은 국악 곡들은 어떤 계기로 부르게 됐습니까.

    “대마초로 활동이 묶여 있던 1978년 어느 날 TBC의 한 특집프로를 보니까, 오프닝에 한 노인이 나룻배를 타면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길로 ‘한오백년’이 수록된 음반 일곱 장을 사서 종류별로 들었습니다. 밴드와 연습해서 제 스타일로 다듬었지요. 이후 대한극장에서 가진 리사이틀에서 시험 삼아 불러 봤는데 반응이 썩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1월 TV 컴백쇼에서 본격적으로 공개했죠.”

    -공식적으로 조용필 1집은 ‘창 밖의 여자’와 ‘단발머리’가 수록된 1980년 앨범입니다. 하지만 지금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의 뇌리에는 그 이전 앨범들, 특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실린 음반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1집 이전 앨범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 앨범은 1971년에 낸 경음악 음반입니다. 김대환씨 등과 함께한 연주 앨범이었죠. 이듬해 ‘사랑의 자장가’를 제목으로 한 앨범이 내 이름을 달고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이후 1975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님이여’ 앨범을 냈으니까 모두 넉 장이네요. 이 앨범들을 독집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앨범의 경우 LP의 다른 한 면이 그룹 영사운드 노래였고, ‘님이여’의 경우는 대마초 사건과 맞물려 제대로 빛도 못보고 묻혀버렸기 때문이죠.”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조용필은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영향받는다. 우연찮게도 그의 전성기는 전두환의 5공화국 통치기와 정확히 맞물렸다. 1980년 3월에 발표된 그의 1집 앨범에서 ‘창 밖의 여자’ ‘단발머리’를 비롯해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슬픈 미소’ ‘대전블루스’ 등 7~8곡이 동시에 히트했던 시점은, 공교롭게도 ‘80년의 봄’을 지나 ‘5·17 계엄’ ‘5·18 광주항쟁’ 등을 통해 신군부의 강압통치가 마각을 드러내던 때였다. 당시 한 연예주간지는 “계엄확대와 광주라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조용필의 노래에 빠지게 했다”고 분석하기도했다.

    조용필을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가수’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물론 둘 간에는 아무런 끈도 없었지만, 세종로 1번지 청와대의 주인과 TV프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주인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시대를 동행했다. 과연 그는 이 우연 아닌 우연을 의식하고 있을까.

    -조용필씨의 음악은 전두환의 5공 시대 한복판에 꽃을 피웠습니다. 본인의 음악이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데 정치 사회적인 측면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지금은 한(恨)이란 말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 때만 해도 우리 국민정서의 핵심은 한이었습니다. 시대는 80년대가 됐지만 대중의 열망과는 다르게 군사정권이 계속 이어졌지요. 사람들 가슴에 더욱 한이 서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한오백년’이나 ‘미워 미워 미워’를 부르며 숨막히고 두려운 시대상황에 대해 일종의 ‘한풀이’를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암울한 시대가 반대급부로 조용필의 소리, 조용필의 노래를 더 리얼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달리 생각하면 이런 측면도 있을 겁니다. 대중문화는 80년대 들어 급변했습니다. 모노시대, 흑백시대였던 70년대에서 멀티시대, 컬러시대인 80년대로 접어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대중문화와 달리 정치상황이나 흐름은 거의 달라진 게 없었죠. 대중들이 갖고 있던 변화에 대한 욕구를 당시 대중문화와 조용필의 음악이 일정 부분 해소해준 것은 아닐까, 그를 통해 대중들이 대리만족을 얻은 것은 아닐까 풀이하고 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도 낮에는 구호와 민중가요를 외치다가 밤에는 조용필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실제로 학생들의 데모가 일상사였던 무렵 시위대는 ‘친구여’를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감옥에 끌려간 친구를 그리는 곡으로 부르기도 했고요. 그런 민주화 운동의 흐름이나 정서를 반영한 노래에는 전혀 뜻이 없었는지, 심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도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불러달라는) 운동권 사람들의 요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김지하씨도 만났으니까요. 그분들이 제게 상당히 호의를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접촉한 게 당국에 포착된 모양이에요. 그 무렵 안기부 사람들이 제게 왔다 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주화 운동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내 시각과 무관하게 그런 메시지를 음악에 반영하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오로지 나의 예술적 욕구에 봉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군사정권에 대한 대중의 恨이 내 노래 키웠다”

    시종 자신감 있는 말투,그러면서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속내. 인터뷰에서도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외부 환경이나 시대적 요인말고 조용필씨의 노래가 대성공을 거둔 음악 내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노래는 극에서 극으로 흐르지 않고 그 중간 지점에서 대중정서와 호흡을 맞췄다고 봅니다. 밴드 출신이지만 록에만 집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트로트에만 전념하지도 않았습니다. 양극이 아닌 중도노선을 유지하며 이 노래 저 노래 다한 셈이지요. 장르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때 떠오르는 예술적 충동과 표현욕구를 기록으로(음반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저는 대중가요의 핵심이 되는 미덕은 중간지점, 좋게 말해 중용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 점에서 감히 제가 우리 대중가요의 뿌리를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조용필은 1980년 1집을 시작으로, 82년을 휩쓴 ‘미워 미워 미워’ ‘고추잠자리’가 수록된 3집, ‘못 찾겠다 꾀꼬리’의 4집, 86년을 석권한 ‘허공’의 8집, 91년 ‘꿈’을 컨셉트로 한 13집, 이듬해 ‘슬픈 베아트리체’가 수록된 14집을 거쳐 98년 말에 내놓은 17집까지 정규앨범만 열일곱 장을 발표했다. 베스트 앨범만도 일곱 장에 달한다. 이쯤 되면 그의 노래제목 ‘고독한 러너’가 무슨 뜻인지 알 만하다.

    한국가요사에서 앨범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된 것 또한 조용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시각이다. 전성기 그의 앨범에서는 보통 서너 곡이 히트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기 곡 하나를 듣기 위해 통째로 앨범을 사야 했던 음악팬들은 적어도 조용필 앨범만큼은 돈이 아깝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노래를 ‘건국 이후 최고의 가창력’이라는 말로 추켜세우곤 했다.

    -조용필씨에 대해 리듬을 잘 타는 가수, 정확히 말하면 비트를 가장 잘 타는 가수라는 평판이 지배적입니다. 혹자는 비트를 타는 정도가 아니라 비트를 쪼개 나눠 부른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요. 그런 역량은 천부적인 것일까요, 훈련의 산물일까요.

    “노래에 목숨을 건다는 자세에서 나온 거겠죠. 저는 가수이기 전에 연주자였습니다. 그것도 리드기타를 연주했어요. 리듬이나 비트를 타는 것은 기본이지요. 기본을 놓치면 감정 표현이고 뭐고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앨범을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대중들은 3집, 평자들은 4집을 최고로 치는데 정작 본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조용필이 뽑는 조용필 최고의 노래’는 무엇인지도 골라주시죠.

    “뭘 꼽아야 하나…. (앞에 놓인 자료파일에서 앨범 수록곡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3집과 4집 중에서는 4집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만든 작품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최고의 노래라기보다는 고민을 많이 한 노래를 꼽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생명’이 그랬고, ‘못 찾겠다 꾀꼬리’와 ‘난 아니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남겨놓으려는 의도를 실은 곡들이었어요. 13집에 실린 ‘꿈’도 작곡은 물론 작사까지 했는데 굉장히 공을 들인 곡이었죠. ‘슬픈 베아트리체’는 아무것도 아닌 듯 들릴지는 몰라도 대중성과 앞으로의 지향을 두고 고심했던 곡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조경구씨와 김남수씨 사이의 3남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조용필은 경동중을 거쳐 경동고에 다니던 무렵 뮤지션을 꿈꾸었다. 고교 2학년 때 도서관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과 그룹결성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음악에 전념했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했지만 대학에 진학할 뜻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그 이후 그는 한결같이 노래만 부르면서 살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던 초기나 쉰세 살을 앞둔 백전노장인 지금이나 그의 한결 같은 소원이자 신조는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쓰러져 죽는 것’이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음악이 먼저고 가정은 다음’이라고 잘라 말했더군요. 노래에 전념하다 보니 아무래도 가정생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떠들썩했던 전 아내 박지숙씨의 음독사건은 연예인으로는 드물게 9시 뉴스로도 방영됐는데요.

    “(빙그레 웃더니) 사실이 아니었을 겁니다.”

    -세간에는 지금의 아내인 안진현씨와도 불편한 사이여서 사실상 파경상태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난 처음 듣는 말이네요.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아내와 저는 그렇지도 않고 그럴 상황도 아니에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내는 지금 심장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는 매번 공연장에 와서 객석에 자리했는데 올해는 연말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다면 그건 한마디로 황당한 낭설이지요.”

    -얼마 전 타개하신 코미디언 이주일씨와는 막역한 사이였던 동시에 좋은 연예계 선후배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상가에도 다녀오셨죠? 술자리를 같이하는 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예계 대권(大權)을 두고 인기를 겨루는 경쟁상대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전성기에 소속사가 같아서 함께 자주 술을 마셨지요. 그렇지만 활동분야가 달랐으니 라이벌은 아니었죠. 생각해보면 함께 열심히 뛰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조용필은 내년에 새 앨범인 18집을 낼 계획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가 묻어나는 록 음악을 기반으로 빠른 곡이 다섯 곡 수록되고, 대형 오케스트라 연주가 앨범 전체를 떠받치는 작품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소개다. 이미 외국 연주자들도 섭외를 끝마쳤다는 것. 내년에 있을 공연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이번 앨범의 기획포인트라고 그는 덧붙였다. 음악행보를 계속하는 한 그는 ‘영원한 오빠’이자 ‘불후의 청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엄연히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가요계의 베테랑이자 큰 어른이다. 80년대와는 전혀 달라진 지금의 가요계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후배가수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가 노래를 잘하던가요.

    “후배들에 대한 평가는 무리예요. 후배들을 알려면 방송이나 공연을 함께하면서 접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가요계 풍토는 많이 달라졌지요. 요즘 가수들은 비주얼한 측면, 외모, 춤, 노래실력이 모두 요구되니까요. 제가 한창 활동하던 때하고는 달라요. 그런 변화를 고려하면 후배들이 오히려 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거나 충고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가수의 기본은 가창력입니다. 따라서 라이브 공연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TV에 대해 말하면 TV가 가수를 이용하듯이 가수도 TV를 적절히 이용하는 긴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자기고집이 필요해요. 더불어 가수에게는 ‘튼튼한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위 사람이나 팬들은 언젠가 떠나게 마련입니다. 팬들과 오래오래 함께 가려면 ‘절대 강자’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자신의 음악이 80년대 대중에게 준 의미나 기여한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선 가요에 질적 변화를 주었다는 점, 대중음악 무게중심을 팝에서 가요로 돌렸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강조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추억을 주었다”

    “제게는 지금도 공연이 열리면 몰려오는 ‘같이 살아온 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둘도 없이 확실한 청소년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줬다고 자부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빠부대에서 아줌마부대가 돼도 저를 잊지 않고 지켜주는 거겠지요. 그게 저에게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과연 조용필이 있었겠습니까. 다른 그 무엇보다 저와 함께 해온 팬들이 가장 큰 의미로 남습니다.”

    공연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무대를 꾸미는 것은 결코 자기과시가 아니라 팬들에게 멋진 공연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공연도 많이 다를 겁니다. 레퍼토리도 새로울 거고요. 많이들 놀라시겠지만 그래도 만족하는 공연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80년대 저 때문에 많은 분들이 행복했다면 앞으로도 그러실 수 있으면 합니다. 노래를 계속하는 한 그게 가장 큰 목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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