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골프에서 배우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박용곤·두산 명예회장

  • 입력2002-12-02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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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에서 배우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지름 4cm, 무게 45g. 그 자그마한 녀석 하나를 내 뜻대로 다루지 못해 끙끙댄 것이 어느새 45년 세월이다. 남들은 그 정도 구력이면 도술이라도 부려 골프공쯤이야 보내고 싶은 곳으로 척척 날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아직도 그 녀석 앞에 서면 몸에 긴장이 감도는 것을 보면 도술을 익히기는커녕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비우지 못한 모양이다. 속 모르는 이들은 나이 들어 주책이라 할지 몰라도 필드에만 서면 마음은 타이거 우즈 못지않으니까.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던가. 골프만큼 이 말이 어울리는 스포츠도 아마 없을 것이다.

    골프와의 인연은 1958년 워싱턴대를 졸업할 당시 학교 골프장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처음 필드에 섰던 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곡괭이질도 아닌데 계속 땅만 파대고, 도대체 어디로 날아갔는지 볼조차 찾을 수 없고, 제대로 맞았다 생각하면 어김없이 슬라이스나 훅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골프의 첫인상이었다. 그날 골프장은 왜 그렇게 크고, 내 자신은 또 왜 그렇게 초라해 보이던지. 흡사 골프가 의욕만 앞세우곤 했던 젊은 날의 방황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되겠다 싶었다. 그날부터 코치와 함께 기초를 다지고 관련 서적도 탐독하면서 매달렸다. 이듬해 귀국한 뒤에는 부친이 이사장으로 계시던 서울CC에서 실력을 다듬었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 내게 골프는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골프도 잘될 때가 있고, 마음먹은 것처럼 안 풀릴 때가 있건만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베스트 스코어 73타에 핸디캡 12라는, 나이에 비해 빠지지 않는 실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 그 승부욕 덕분임에는 틀림없다. 게임에서 지거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는 밤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욕심이 없어졌다. 어느 때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도 기억에 없다. 그렇다고 골프가 싫어진 것은 절대 아니고, 물론 도통하거나 성불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좀 잘 치고 못 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뜻 맞는 동지들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 되지.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을 등지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흥겨워졌다. 가급적 캐디 없이 동반자들끼리만 오붓한 시간을 즐기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다.

    2000년 두산 마주앙 여자오픈대회 때 프로암 대회에서 정일미 프로와 플레이를 한 적이 있다. 처음 인사를 건네는 순간 정프로의 얼굴에는 ‘웬 할아버지…’하는 먹먹한 표정이 역력했다. 내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표정은 홀을 거듭하면서 진지해지더니 17~18번 홀에서는 언뜻 당황하는 기색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고희를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생각 이상의 솜씨를 보여준 탓이리라. 그러나 정프로가 몰랐던 것이 있다. 그날 스코어는 내 실력보다는 정프로 본인 때문이었다는 것. 공이 잘 맞은 것은 오직 국내 최고의 여자 프로와 같이 라운딩한다는 사실을 내가 충분히 즐기며 편하게 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골프는 이름하여 마인드 게임 아닌가.



    세계 이곳 저곳의 골프장을 다니면서 코스에 대해 갖게 된 ‘철학’도 따지고 보면 같은 결론이다. 나는 골프장도 골퍼가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칠 수 있는 곳이 가장 좋다고 믿는다. 코스가 너무 밋밋하면 재미가 없고 너무 어렵게 설계되면 스트레스만 쌓인다. 스트레스를 풀러 온 골프장에서 스트레스만 받고 돌아가면 곤란한 노릇 아닌가. 그러려면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가능한 한 그린이 보여야 하고 페어웨이는 약간 눈 아래 있는 것이 좋은 듯했다. 그렇다고 대충 쳐도 될 정도라면 곤란하다. 벙커나 해저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으로 스릴은 놓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요행으로 온 그린이 되는 것도 탐탁지 않은 일이니 그린이 포대그린처럼 약간 높은 게 좋았다.

    1990년 개장한 두산의 춘천CC를 설계할 때 이런 네 가지 생각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전문가인 설계자는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괜히 참견한다’며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요즘도 많은 골퍼가 춘천CC를 호평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철학’이 들어간 골프장을 꾸미고 싶던 욕심이 영 헛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웃음이 어린다.

    반세기 가까이 골프를 쳐온 원로로서 결론을 말하자면 골프는 스코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매너 있게 임할 때 가장 재미있다. 솔직히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군들 버디, 이글, 알바트로스, 홀인원을 잡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얘기를 하는 나부터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글 머리에 고백했으니. 그러나 골프는 사심이 생기면 절대 제대로 된 스윙이 나올 수 없다. 타이거 우즈처럼 멋진 스코어를 기록하려면 먼저 타이거 우즈처럼 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야말로 ‘해탈’이다.

    사돈간인 김인기 전 공군참모총장이나 최호중 전 부총리, 김덕주 전 대법원장, 김선길 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현식 두산 고문, 그리고 80년 언론통폐합 당시 사장으로 있었던 합동통신 멤버들로 구성된 합우회 친구들은 고희를 넘긴 지금도 시간만 나면 라운딩을 함께하는 오랜 동반자들이다. 이들과 함께 골프장에 나서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되뇌는 것은 더 즐겁고 젊게 골프를 치고 싶다는, 아직도 골프에서 다 배우지 못한 게 있다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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