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서울 인사동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세월의 더께

  • 글: 민병욱 사진: 박수룡

    입력2002-12-04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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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옥 기와가 어깨를 맞대고 담벼락에선 정이 풀풀 솟지만 인사동은 빠를게 변하고 있다. 편한 바지 같던 동네에 예리한 각이 생기다고나 할까.
    서울 인사동

    옛것의 향취 어린 인사동 거리. 골목속 숨겨진 풍경이 더 매력적이다.

    변덕스러운 건 바람인가 사람인가. 된 바람 한번 몸짓에 우수수 떨어져 뒹굴거나 흩날리는 노란 잎새들. 그걸 밟으며 사람들은 낭만과 멋진 추억을 얘기할까, 아니면 흘러가는 세월에 덧댄 아쉬움과 서글픔을 달래는 걸까.

    서울 종로구 인사동, 그 좁은 동네에서 우리는 실로 변화무쌍한 감정을 경험한다. 한 집 건너 화랑이요 골동품점이며 전통찻집과 주점이 들어선 그곳 네거리에 부는 바람은 자못 향기롭다. 좌판에 피운 향내가 좋고 구수한 된장찌개와 고향의 전 냄새, 그리고 골동품이 뽐내는 여유까지 버무려 바람은 낙엽과 정을 함께 실어 나른다.

    하지만 거기서 한 블록만 나서면 바람은 칼처럼 속살을 파고든다. 운현궁과 탑골공원을 휘감는 바람은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솔잎을 사정없이 날리고 흩날린 그것들은 분풀이하듯 노인들의 뺨을 찌른다. 실없이 지나가버리 세월을 원망하는지 낙엽은 부끄럼도 없이 고궁마당을 뒹군다.

    속절없이 잊혀지는 과거

    그런데 왜 인사동인가. 시작이 거기이듯 마지막 또한 거기였으면 싶은 고향의 향취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아니면 문화 예술이 살아있고 역사 전통이 숨쉬며 멋스런 분위기도 넘쳐나니까? 또는 ‘인사동 사랑’을 신붕의 징표처럼 읊어대는 사람들의 엘리트 의식에 함께 젖고 싶어서? ”꼭 그렇진않다”는 답이 나오지만, 그런 온갖 역설을 다 알면서도 탓 없이 웃을 수 있기에 우린 인사동을 찾는지 모른다.



    사실 인사동이 자랑하는 전통과 역사는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근세 한국사에서 주목받는 역할을 한 ‘태화관 터’ 는 지금 누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다. 인사동 네거리 서쪽으로 일백 보쯤 거리에 자르잡은, 그렇고 그런 수많은 현대식 건물 중 하나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입구에 알림돌이 없다면 아무 뜻 없이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매국대신 이완용과 그 무리들이 을사조약 모의처로 사용했던 장소요, 그걸 무효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13세기부터 왕족과 세도가들의 집이었고 후궁의 사당도 됐다가 나중엔 요릿집으로 변한 곳이다. 그 터가 지닌 역사의 더께가 무거웠을까, 신식으로 들어앉은 12층 건물은 지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거기서 불과 몇 발짝 옆에 있는 ‘서울 중심 표지석’도 그렇다. 1896년에 놓인 이 기념물은 태화빌딩 옆 하나로빌딩의 자투리 화단에 방치돼 있다. 북악산 남산 인왕산에 둘러싸인 예 서울의 한복판임을 알리는 기념물인데도 차밥 취급이 완연하다. 화감암 표지석 주변엔 쓰다 버린 화분과 철근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박영효 생가 터에 잘리잡은 경인미술관에선 전시실을 새로 들이는 공사가 한창이다. 마당 가득 장비가 널렸고 끊임없이 쿵쾅대는 소음이 운치를 앗아간다. 그 주변 한옥 화랑이나 음식점들은 내부는 물론 겉모습도 현대식으로 뜯어고치는 공사를 연중 벌이지 않는 때가 없다.

    ‘도시구조와 건축물이 옛 모습 그대로인 서울의 유일한 전통문화 공간’이라는 인사동의 자랑은 물론 아직 유효하다.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여전히 한옥기와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고 담벼락에선 정이 풀풀 솟는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인사동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헐렁하니 편했던 바지 같던 동네에 점점 예리한 각(角)이 생기고 있다고나 할까.

    행정구역상 인사동은 0.2㎦에 불과하다. 북쪽 안국동 교차로에서 남동쪽 종로2가까지 500여m의 비스듬한 길 주변이 실제 인사동이다. 거주인구는 고작 800명. 그러나 흔히 ‘문화지구’로 인사동을 얘기할 때 주변 관훈동 공평동 견지동 낙원동과 경운동 일대를 포함다며 하루 유동인구는 7만~8만명을 육박한다.

    빨리 걷자면 인사동 길은 5분이면 관통한다. 그걸 어떤 이는 ”3년을 헤집고 다녔지먄 항상 못 본게 있는 느낌” 이라고 말한다. 한 문인은 ”20년 넘게 드나들어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다.” 고 했다. 반면 토박이 상인 일부는 ”요즘 인사동은 타락했다. 문화는 달아나고 장삿속이 판친다.”며 흥분한다.

    어떤 게 진짜 인사동인지 정답은 물론 없다. 보면 볼수록 소록소록 정이 든다는 말도, 또 매일 출근하다시피 찾아도 새로운 볼거리가 있다는 말도 맞다. 하지만 우리 화백의 지적처럼 ”입으로 그리고 로비로 전시하는 그림” 들이 애호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가짜 골동품, 고서화가 버젓이 눈먼돈을 노리는 곳인 것도 사실이다. 속임수가 두려워 눈을 부릅뜨고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않는다면 보고 멱고 즐길 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동네다.

    수천만원 대 진품 도자기나 전통 목가구를 전시한 한켠에선 동남아산 싸구려 공예품이 눈을 흘긴다. 옛 부채나 물레 삼태기 짚신 놋숟가락에 곰방대와 말총 갓을 파는 상점 앞에선 포터블 오디오 볼륨을 한껏 높인 엿장수가 가위를 찰각대며 신나게 가락을 뽑는다. 분필 모양 향을 피워놓고 싸구려 귀고리나 반지를 파는 외국인 노점상도 낯설지 않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 풍경은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부추긴다. 인도를 반쯤 메운 좌판대마다ㅣ온갖 잡동사니가 그득하고 잘고르면 싸고 쓸 만한 걸 건질 걱 같은 설렘이 인다. 상점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마냥 밝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놓쳐선 안될 꺼리라도 본 양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북적대고 흥겨운 광경을 연출하는 건 길가 상점들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음식점과 주점에서도 살가운 정이 묻어난다. 등을 후리는 찬바람을 뒤에 남기고 미닫이문을 열면 안경에 훅- 서리는 김이 우선 정겹다. 주모가 부치는 빈대떡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람회를 연 화가들이 시골집 분위기가 나는 주점을 잡고 지인들을 부르지요. 처음에 서로 진지하게 작품을 얘기하다 술이 거나해지면 소리가 높아져요.‘니들이 그림을 알아’하는 호통도 나오지만 웃고 떠드는 편한 분위기를 해치진 않죠.”

    언젠가 눈 내리는 밤 손을 호호 불며 인사동 주점을 찾았다가 그런 분위기를 보고 홈빡 빠져 벌써 수년째 인사동 골목을 배회한다는 어느 직장인의 얘기가 생소하지 않다.

    인사동 길을 따라 번지던 정다움과 흥겨움은 동쪽으로 불과 한 블록도 못 가 차단된다. 탑골공원과 그에 등댄 낙원상가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노년지구. 서글프고 구성진 쓸쓸함이 찬 공기처럼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7,80년대엔 공원에서 노인들의 즉흥 정치 토론장이 서고 작은 생필품 시장도 열렸지만 이제 모두 옛 얘기가 돼버렸다.공원정비를 이유로 한시간 이상 공원에 머무르지 못아게 하고 벤치 등 앉을 것을 아예 없앴기 때문이다.그러자 노인들은 공원 담 바깥쪽에 서성이기 시작했고 1000원짜리 두세 장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장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1500원짜리 해장국집, 3500원짜리 이발소가 연중무휴 노인 손님을 받는다. 포장마차형 점집에서는 거꾸로 노인들이 2000원짜리 사주 궁합을 봐주고 운세를 알려준다.

    돈 없는 노인들은 그런 시장조차 싫은지 공원 안에 들어가 화단 옆에 쭈그리고 않았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팔각정을 독점해 살다시피 하는 비둘기들은 그런 노인들이 못마땅하다. 공연한 날갯짓으로 바람을 만들어 노인들을 괴롭힌다.

    ‘문화지구’ 인사동 지역의 판이한 두 얼굴에 저녁놀이 비낀다. 골목 안 주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흥겨운 밤을 준비하는 사이 밤바람이 모질까 두려운 노인들은 집에 갈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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