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금지의 위반, 시대의 전복

영혼으로 만나는 세상

  • 글: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학 / 연극평론가 viaantica@hananet.net

    입력2003-01-22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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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연극을 이해하는 일은 공연을 통해 시작되지만 공연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연극 공연을 이해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공연은 시작되자마자 즉시 흔들리고 무너져버린다. 사라진다는 것, 일회적이라는 것, 나약하다는 것, 저장되지 않는다는 것, 복사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의 몸으로 한다는 것,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글을 몰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연극예술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관객이 애써 기억해낸 공연이란 ‘얼음에 갇힌 강물과 같이 잠시 머무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사라진 공연을 글로, 말로 다시 세우고 이해한단 말인가?

    공연은 불안하게 긴장하고 있는 존재와 같아 연극을 이해하려면 역시 그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긴 호흡이란 산에 오를 때 몸이 내는 소리와 같다. 관객이 연극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연극 공연을 통해 바로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것, 곧 자신의 내면 풍경을 읽는 것이다.

    0.2 그런 점에서 연극을 이해하려는 것은 다른 장르와 비교해 많은 약점을 지닌, 패배할 줄 뻔히 알면서 하는 시도와 같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공연을 끝낸 연출가와 배우들을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하다. 따라서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음에도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연극의 이해란 이처럼 관객으로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외로운 등판을 떠올리며 무대 앞에 서는 일이다. 공연은 도판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니체의 아름다운 글귀대로 “마음의 바닥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섬세한 손가락과 눈으로” 공연을 읽고 부수고 다시 세워야 한다.

    0.3 연극 공연은 관객에게나 연극평론가에게나, 읽어야 하는 한 권의 두툼한 책과 같다. 연극은 일회적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아니 사라짐으로써 완성되는 나약한 예술이다. 그러므로 연극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라지는 공연의 허무 속에서 그 허무에 직면해 그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이다. 관객은 막이 내리고 난 뒤 남겨진 허물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새로운 연극 언어를 스스로 건축해야 한다.

    1. 극장에 대하여



    1.1 극장은 어둡다. 극장 바깥의 밝음과 대비되는 곳이다. 어떤 사회에나 극장은 존재한다. 실외에 있는 극장, 실내에 있는 극장, 혹은 원형, 혹은 사각형으로. 극장은 항상 변모해왔다. 이런 변모는 국가·사회·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장이 있는 곳에는 연극을 하는 이들이 모인 극단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극장은 고정적인데 반해 극단은 유동적이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돈다. 우리의 남사당이 그렇고, 서양의 코메디아 델아르테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를 유랑극단이라 한다.

    반면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한곳에 머무는 이들이다. 이런 경우 누가 누구를 유혹하겠는가? 떠도는 자가 멈추어 있는 자를 유혹하게 마련이다. 옛날 유랑극단 시절에는 연극 한 편에 홀려 보따리 싸들고 집을 뛰쳐나와 극단에 들어간 이들이 많았다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연극에 매혹되고, 연극하는 떠도는 삶에 유혹당한 것이다.

    금지의 위반, 시대의 전복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 ‘원각사’(위)와 신파극의 주 무대였던 ‘동양극장’

    1.2 군사독재 시절, 우리 사회에는 ‘극장식 레스토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극장이 극장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식당이 되어버린 예라 하겠다. 그곳은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광고 문안처럼 퇴폐의 온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소극장은 후미진 건물 지하에 들어서는 반면, 국가가 지은 어마어마한 극장들은 대중이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국립극장, 예술의전당 등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각 시·도, 지역마다 건립된 문예회관, 구민회관 내의 극장들 역시 일정한 형태의 외벽과 비슷한 모양새의 무대공간을 갖고 있다. 극장으로서의 다양성은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극장을 우리 삶과 가까운 곳으로, 한복판으로 옮겨놓는 것이야말로 연극과 극장을 부흥시키는 데 가장 시급한 일이다. 극장은 기계가 제품을 생산해 내는 공장 같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은, 멀리서 생산된 제품이 분류되어 지금 이곳에서 유통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멀리 외진 곳에, 휘황찬란하게 자리잡고 있는 극장은 무엇을 반영하는가.

    1.3 왜 극장이 필요한가? 밝은 곳이 일터라면 어두운 극장은 놀고 꿈꾸는 곳이다. 일하는 공간이 효용을 얻기 위해 조건에 억압당하는 곳이라면, 놀고 꿈꾸는 공간은 효용이 아닌 무용(無用), 억압이 아닌 즐거움을 낳는 곳이다. 극장에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상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밝은 곳에서 소통하는 언어와 어두운 곳에서 소통하는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밝은 곳에서의 걸음걸이가 직립보행이라면, 어두운 곳에서의 그것은 몸을 뒤틀고, 뒹굴고, 기고, 뛰고, 날고 하는 짓이다. 당연히 극장에는 후자의 몸짓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1.4 연극의 장(場)인 극장과 교육의 장인 교실을 비교해보는 것도 연극의 특성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극장에 오는 걸음걸이와 학교로 가는 걸음걸이는 같지 않다. 연극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이라면, 교육은 반듯한 걸음걸이를 요구한다. 뒤틀림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려는 것이 연극이라면, 교육은 학생들을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는 직선적 통로다. 연극이 옷을 벗어 헐벗은 몸을 빛내는 일이라면, 교육은 옷을 입어 몸을 가리는 일과 같다. 교육이 포상과 훈장으로 존재의 상처를 가린다면, 연극이 있는 극장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상처를 드러내 있는 그대로 비춘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처가 꽃이 되는’(정진규, ‘몸시’ 55) 바로 그것이다.

    학교라는 제도에 입문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좌측통행’ ‘앞으로 나란히’ 같은 말들일 것이다. 교육이 있는 교실은 학생들에게 먼저, 모든 사물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사물에 고정된 이름이 있다는 것, 고정된 쓰임새가 있다는 것, 사물은 고정된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것. 이렇듯 교육과 교실은 사물에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대물림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문화적이다. 아니, 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육과 교실이 문화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단선적인 길이라면, 극장은 자연적인 것으로 우회하기 위한 깊고 넓은 공간이다. 사유하고 꿈꾸며, 그것들을 드러내는 곳, 그곳이 바로 극장 공간이다.

    1.5 사유하고 꿈꾼다는 면에서 극장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허락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극장에게 이 같은 기능을 부여했다고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장이 이와 같은 기능을 얻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극장에서의 꿈과 극장 바깥에서의 윤리는 서로 감시한다. 사회는 부여하면서 극장을 감시하고 극장은 얻어내면서 사회를 반성케 한다. 극장 안의 꿈은 사회를 감시해서 반성하게 하고, 극장 밖의 윤리는 극장 안의 꿈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극장에서 교육을 하면 교육받는 대다수는 졸기 마련이다. 꿈꾸는 장소에서 교육이란 듣는 이의 몸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든다. 고개를 떨군 채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극장에서 행해지는 예비군 혹은 민방위 교육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금지의 위반, 시대의 전복

    연극은 철저히 배우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슬로베니아 출신 연출가 토마스 판두르 작 ‘신곡-지옥, 연옥과 천국’ 중 ‘연옥’

    2.1 연기는 혹은 놀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것은 연기와 놀이 모두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연극은 몸으로 하는 예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몸으로 하는 연기를, 놀이를, 배우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연극에서 몸의 회복이란 서양 연극식으로 말하면 디오니소스의 재발견, 그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연극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는 애초부터 몸에 상처를 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다. 그는 다른 신들이 자신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고통과 불만을 느껴 주위에 몰려든 제자들에게 술의 미학을 가르치는 방탕한 술꾼 ‘호모 비뷔러스(homo bibulus)’다. 그는 때로 광포하고 무절제했으며 피에 굶주린 자이기도 했다. 한 축제에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광란의 주연을 벌이자 팬테우스 왕은 그들을 내쫓아버렸다. 디오니소스는 나중에 그 나라의 모든 여인들을 취하게 하고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광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왕에게 덤벼들게 했다. 팬테우스 왕은 어머니를 비롯한 여인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삶의 일상적 구속과 한계를 파괴하는 극단의 황홀감을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인간은 이때 자신의 모든 상징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도록 자극받는다. 그것이 바로 상징으로서의 몸짓이다. 놀이하는 몸, 상승하고 추락하는 춤의 움직임이 여기서 태어난다.

    몸이 상징성을 잃어버리면 타락하고 추락한다. 몸의 상징이 과거에 묶이면 제의가 되고, 미래와 연결되면 환상이 된다. 하비 콕스에 따르면 축제는 제의와 환상의 결합이다. 축제는 몸에 관한, 몸으로만 이루어지는 행위의 결과이며 절정에 오른 행동양식이다. 상징으로서의 몸짓은 정상적인 몸짓이 아니라 ‘지나친’ 몸짓이다.

    축제는 그러한 내용적 측면을 유도해내기 위해 그를 표현할 실제 도구인 몸에 부딪힌다. 서양 연극의 기원인 디오니소스 찬가는 인간의 몸이 지닌 모든 상징의 소산자, 능산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극하는 노래다. 상징은 광란, 광기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때 솟구쳐나오는 행위가 춤이다. 춤은 지적인 질서가 아니라 몸의 질서다.

    2.2 여기 한 배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급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사팔뜨기였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구구단을 외울 때마다, 학우들은 ‘사팔(4 8)’에 ‘32’라고 외치는 대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미 집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거울을 무수히 깨뜨렸던 그는 교실을 박차고 나와 떠돌다 영화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안은 어두워 남들이 그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대신 화면의 배우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극장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어두운 극장 안에 슬그머니 숨어들어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닌 상처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보여지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그를 배우로 만든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는 화면 속의 배우를 본 것이 아니라 화면 안으로 들어간, 변모한 자기자신을 본 것이다. 극장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그러나 그는 결국 변모가 아닌 정체된 삶을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상품으로 만든 모노 드라마만 몇년간 공연하다 마흔넷의 나이로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2.3 연극은 인간에게 놀이를 통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자기와 타인, 그리고 주변 환경과 조정·동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배우란 그 가운데 있는 인물이다. 연극의 특성은 참여하는 이들을 기쁨 속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한 해방의 몸짓이 있기 때문이다.

    2.4 전래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자유롭기 위한 놀이의 원칙을 설명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을 금지당할 때 병이 생기고, 금지를 위반할 수 있을 때 삶은 다시 회복된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개인의 표현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에서 이야기, 놀이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배우다.

    2.5 배우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이라 정의할 수 있다. 주어진 역할이란 일상에서의 그것과 다르다. 거칠게 말해 일상에서의 역할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로써 이른바 ‘주어진 역할’을 반성케 한다. 카뮈의 말을 빌리면, 배우는 정체성을 무력화시키고, 스러지는 것 속에서 군림한다. 배우는 역할을 확인시키고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할 것을 요구당한다. 우리 사회는 인물과 가면에 관한 사회학적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 가면이란 단어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깃들어 있어, 뭔가 거짓된 것이란 선입견이 퍼져 있다. 그러나 ‘가면’과 ‘인물’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다.

    가면이란 뜻을 지닌 ‘persona’에서 인물 ‘person’이란 단어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인물이란 일상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가면을 잘 쓰고 그 가면에 맞게 행동해야만 하는 이를 의미한다. 주어진 역할과 그 가면은 참여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반성토록 요구한다. 그리고 이 반성적 요구는 개인에게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놀고 있네’ ‘놀아나다’와 같은 비속어, ‘연극하지 마’와 같은 언어들에서 놀이와 연극에 대한 우리의 숨은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말과 표현 속에는 엄숙한 기존 질서만을 사회의 적자(嫡子)로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결국 이런 말은 연극에 대한 몰이해와 연극을 부정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것은 그대로 교사와 학생에게 전달된다. 학교는 이데올로기를 수행하고, 학생은 반발한다.

    2.6 연극과 예술의 경험 : 과연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연극은 사소한 이야기, 일상적 이야기, 사소한 짓, 일상적 행위들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허구라는 인식 안에서 가능하다. 이를 통해 억압과 수동에서 탈피할 수 있고 상황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그 속에서 ‘세속적 트임’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극은 일상적 삶의 새로운 근원과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게 하며, 몸으로 행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연극에 대하여

    3.1 연극은 모순 어법으로 하는 사유이며 은유다. 세계의 질서란 ‘정체성의 분명함’을 통해 가능해진다. 정체성의 위기는 세계 질서의 위기와 같다. 배우를 포함하여 연극예술은, 그 정체성의 위기를 벗어난 여러 삶을 당당하게 사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울고불고하네. 멍청이뿐인 크나큰 무대로 나오게 되어 우는 것이네.”(리어왕 4막 6장 중)

    세계를 멍청이들이 모인 무대라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울고불고한다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세상을 알고 있다는, 오래 산 어른보다는 방금 태어난 아기가 더 현명함을 말해주는 모순 어법이다.

    “사람살이는 걸어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광대다. 무대 위에서 한껏 재보고 큰소리쳐도 종치면 끝장이다. 천지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리와 노여움은 요란하지만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맥베스’ 5막 5장 중)

    사람을 그림자, 광대로 여기고, 세상을 연극의 무대라 여긴다. 말하고 소리치는 것, 모두 종치면 끝장이라는 것, 세상은 그렇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모순 어법이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무의미가 아니다. 연극을 세상의 거울이라 할 때, 거울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좌우를 바꾸어 보여준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그 거울이 온전치 않고 깨져 있다면 되비친, 즉 재현되는 세상의 모습 또한 조각조각 파편이 돼 있을 것이다.

    금지의 위반, 시대의 전복

    백설공주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해 큰 인기를 모은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

    3.2 연극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기록, 저장, 반복과 그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전화는 목소리의, 칼과 쟁기는 팔의,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 연극은 배우를 통해 현실과 꿈을 기억시킨다. 연극에서 기록, 저장, 반복 그리고 확장의 가능성을 지닌 도구는 우선 배우임이 틀림없다. 연극예술은 바로 배우를 통해 세상을 번역해 기억하고, 관객은 그것을 보고 세상을 달리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의 생명인 배우의 연기는 흐르는 말(言)과 같다. 연극은 인쇄물로 남는 글이 아니다. 연극이 말처럼 흐른다는 면에서 연극예술은 물과 같이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배우는 유랑한다. 떠돈다는 면에서 배우들은 무정부주의적이다. 떠도는 삶의 극단적인 태도가 아나키즘이다. 중앙의 제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세운 규칙을 지키며 사는 태도를 말한다.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서 뜻이 생겨나는 것.

    음악과 영화와 같은 예술과 비교해서 연극은 완벽한 저장과 반복이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연극예술은 대한민국 정부만이 구분하고 있는 장르에 따르면 무형문화재에 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 연극에는 문화부가 생활비를 보조하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란 것이 없다. 연극은 ‘그대로’의 전승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3.3 연극의 주된 법칙은 ‘배우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연극은 배우의 연기를 관객이 봄으로써 이해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연극 최초의 저장 방법은 배우의 몸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연극에서 배우의 몸은 왕이다. 몸에 의미를 담게 되면 그 몸은 춤이란 언어로 변한다. 춤은 배우 몸의 격렬함, 그 욕망에 다름 아니다. 격렬함이란 바로 ‘누르는 짓’이다. 그래서 표현(expression)이란 욕망을 눌러(press) 밖으로(ex)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연극을 몸으로 하는 가장 직접적인 예술이라 함은 몸 이외에 다른 매체, 즉 미디어가 없다는 뜻이다. 미디어가 없을 때 비매개적, 즉 직접적(im/mediat)인 예술이 된다.

    음성적인 말 이전에 연극은 배우가 몸의 격렬함으로 뜻을 만들어 시각적으로 전하고 이야기를 설명한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 올라가면 연극과 춤은 같은 뿌리를 지닌다. 특히 동양 연극과 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의 코드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그 속에 ‘몸부림’ ‘몸서리’ 같은 언어가 있다. 몸 바깥의 가면은 배우의 덧없이 사라져가는 영광의 몸을 대신하는 또 다른 저장의 하드웨어가 된다. 연극과 춤에서 가면은 배우의 몸을 숨기면서도, 곧 몸의 부재 가운데서도 다양한 발언이 가능토록 하기 위해 고안된 훌륭한 저장 방법이다. 몸으로 기억하는 것은 고통과 잔혹함이라는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관객은 배우의 몸이 그려낸 실존을 보며 전율한다.

    3.4 오늘날 연극의 문제는 무엇인가? 오늘날 현대연극의 문제는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배우의 몸이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놀랄 정도로 증가한 기억, 저장, 확장의 양과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미 우리 시대 과학의 발전은 윤리뿐만 아니라 미학의 문제까지도 변화시켜 버렸다. 이것이 현대연극에 서 배우가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나 분열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몸의 위기와 같은 분열은 경계의 와해를 뜻한다. 물론 몇몇 연출가들이 새로운 매체와 협력해 저장과 반복의 가능성에 대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연극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많은 연극배우들이 연극무대와 저장·반복이 가능한 텔레비전이며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분열된 증후의 한 가지 예에 속한다. 스턴트맨이란 직업은 바로 이러한 확장의 한 부분을 대신해주는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연극예술이 영화와 비교해 훨씬 뒤져 있는 것은 이 기록과 저장 그리고 반복의 메커니즘에 기인한다. 일회적이고 그래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연극의 순수와 위와 같은 메커니즘이 놀라울 정도로 증식하는 시대는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저장·반복되지 않는 연극은 소비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되지 않는 형태의 예술이 주변 예술로의 전락이라는 위기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이것이 옛 권위와 영화를 계속 누리지 못하는 현대연극의 가슴 아픈 자백이다.

    3.5 배우로 하여금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반복하게 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가 요구하는 고통스런 일이다. 저장과 반복의 확장이 강화될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더 이상 배우는 자신이 저장하는 내용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턴트맨이나 대역, 새로운 매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연극은 다시금 배우의 몸, 우리들의 몸으로 매우 느리게 되돌아오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느린 몸, 느린 움직임이다. 보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느린 동작으로, 현대연극은 보이지 않는 매체, 빠른 시대와 싸우고 있다.



    이제 연극은 가냘픈 몸과 느린 움직임으로, 시간과 공간상의 모든 거리가 수축되는 세상에 저항한다. 새로운 미디어의 융단폭격은 인간 경험을 무거리(無距離)의 단조로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렇게 무거리성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은 모든 사물이 폭발해버리는 것보다 더 섬뜩한 일 아닐까. 상징적 교환으로서 연극의 구체성은 무엇보다 기호학적 질서의 일의성에 반하는 다의성에 있다. 억압 없는 매개와 소통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복제되지 않는 몸을 지닌 연극이 시대와 어긋나면서도 처절하게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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