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노회한 文靑’ 황석영과의 질긴 드잡이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3-01-30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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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 남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밀어붙여 산 예순 살 사내. 그 더운피와 시퍼런 자의식 사이, 매운 말과 글이 칼춤을 춘다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황석영(60)은 뜨거운 사람이다. 단내 나는 삼복에도 저고리 땀 꾹 짜내며, 칼바람 이는 섣달에도 외려 가슴 풀어헤치며,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엉큼성큼 질러왔다.

    황석영은 차가운 사람이다. 객(客)은 도무지 열 수 없는 맘속 열 개의 빗장 친 문이 있다. 날 선 직관, 시퍼런 냉소. 미친 바람의 소용돌이에서도 가슴 한구석은 늘 서늘했다.

    오랜 세월 그는 그 붉고 푸름으로 인해 지나치게 존경받고 지나치게 경멸당했다. 한 사람이 쉬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의 쌍봉 골에서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홀로 위대했으리라. ‘장길산’을 쓰고, 반독재투쟁을 하고, 북한 땅을 누비고, 망명생활을 하고, 감옥살이를 겪고, 이념적 사투를 벌이고. 두 번 이혼하고, 더 많이 연애하고, 더 세게 놀아보고, 그럼에도 늘 생활인이었고, 새로 발견한 일상이 참 소중해, 사람 냄새 폴폴 나게 가슴 뒤흔드는 소설 쓰마, 허나 세상사에 너무 밝은 것이 외려 눈치 뵈는 노회한 문청(文靑). ‘황석영은 이렇게 말했다.’

    빠르고 강하고 두텁게

    “이제는 지루한 거 잘 참아요. 내가 원래 어드벤처에는 강한데 디테일에 약했거든. 사람들이 그래요. 대한민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서울 동소문동 ‘문학동네’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그는 지나치게 ‘신사’였다. 조금은 안심되고 그 두 배로 당혹스러웠다. 그는 불편한 사람이어야 했다. 거칠고 날카롭고 ‘내 것’에 물러섬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부드러웠다. 달변의 속도도 잘 조절돼 있었다. 소문 속의 그를 확인시켜주는 건 큰 목소리,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투뿐이었다.

    이튿날 오전 11시, 고양시 대화마을 그의 집 거실에서 다시 마주앉았다. 그는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사동 어딘가에서 택시 타고 귀가한다더니 그 뜻대로 되지 않았던가 보다. 하기야 그의 ‘앞마당’인 인사동이 제 주인을 고이 놓아 보내줄 리 있겠는가. 미필적 고의의 음주로 괴로운 와중에도 그는 10시간의 난타를 잘도 견뎌냈다.

    황석영은 솔직했다. 소탈하고 사내다웠다. 불편한 질문도 대충 넘기지 않았다. 말은 찰지고 정확하고 확실히 재미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구라’의 현란한 입담을 누가 있어 말리겠는가. “기자들은 듣고 싶은 말을 지들이 다 가지고 온다” 했다. “원하는 말이 뻔하니 해줄 말도 그뿐”이라 했다. 그는 세상의 기대에 과히 어긋나지 않는 몇 가지 버전의 ‘자기 해설집’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제법 ‘맞춰주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슬슬 갑갑증이 나나 보았다. 세계관이 바뀐 것도 아닌데, ‘반미의 선봉, 민족작가 황석영’을 습관처럼 찾는 이들을 보면 왜 문득 씁쓸해지고 부담스레 느껴지는 걸까. 그는 “감옥 가서 생긴 내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98년, 5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황석영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래된 정원’ ‘손님’을 잇따라 상재해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현재도 한국일보에 ‘심청, 연꽃의 길’을 연재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방북,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등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전국 대학의 국문과·문예창작과 교수 및 평론가 109명이 선정한 ‘20세기 한국문학사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기도 했다.

    깊이 들여다본 황석영은 냉정했다. 자존심 강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다 보여주는 것 같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 같고, 때로 흥분하거나 흔들리는 듯도 했지만, 그는 정작 움직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상황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었다. 실수도 있었고 깨지기도 많이 했으되 다음 순간 더 높이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빠르고 강하고 두터운 까닭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제멋대로이고 좌충우돌하며 ‘구랏발’이 하늘을 찌르는 그이 속 또 하나의 그는, 지금 그 어느 진흙밭을 구르며 제 쌍둥이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어느새 대화는 수 읽기가 돼버렸다. 그는 프로였다.

    -몇몇 글에 한두 줄씩 비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 깊더군요. 혹 문학적 감수성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닌지요.

    “아 그걸 어째 알았나. 맞아요. 그 외에도 어머니가 제 인생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크죠.”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우리 어머니는 평양 분이에요. 전문학교까지 다닌 신여성이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전홍걸 목사라고, 평양 사람이면 다 아는 유명한 감리교 목사에 교육자고 민족주의자였어요. 3·1운동이랑 신사 참배 거부로 도합 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그 때문에 일본 유학중이던 어머니는 중도 귀국할 수밖에 없었대요. 그런 어머니에게 자수성가한 사업가이던 아버지가 청혼한 거지요. 그렇게 혼인해서 누나 셋하고 저, 남동생 하나를 보셨어요. 떠밀리듯 한 결혼이라 그랬는지, 어머니는 맏아들인 제게 유난히 집착했어요. 또 평생 일기를 쓸 만큼 문학적 욕구나 소양도 있는 분이었고요.”

    -글에서도 그런 게 보여, 혹 외동아들인가 했습니다.

    “하여튼 굉장히 심했어요. 오죽하면 제 동생이 요즘도 술 한잔하면 ‘엄마는 평생 형만 알았다’며 섭섭해하겠어요. 누나들도 ‘엄마는 너만 갖고 그랬다’고 할 정도니까. 그 무서운 교육열, 엄청난 교육열…. 대단했지요.”

    -그래도 중학생 때까지는 어머니 말씀을 잘 들었나보지요.

    “잘 들었죠. 그때는 방법이 없으니까. 근데 압력이 너무 심하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가출도 몇 번하고 자살 기도도 하고…”

    -초등학교 때요?

    “그럼요. 새끼줄 목에 걸고 광 어디에 매달렸는데, 줄만 툭 끊어지고 말더라고.”

    -그때의 자살 충동이란 전적으로 어머니의 억압 때문이었나요.

    “그렇죠. 형제끼리 투닥거려도 유독 저만 심하게 때리고 그랬으니까. 저에 대한 지적 욕심도 굉장해서 다섯 살 무렵에는 한글을 깨치게 했어요. 덕분에 일찍부터 책을 참 많이 읽었죠.”

    ‘비관적 낙관주의자’의 씨

    황석영은 만주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외가가 있던 평양에 머물다 1948년 다시 삼팔선을 넘어 영등포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여학교 교사가 됐다.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병사했다.

    6·25가 터지기 전까지 어머니는, 주말이면 어린 석영의 손목을 끌고 연극이며 영화를 보러 다녔다. 뛰노느라 꼬질꼬질한 얼굴을 손수건에 침 묻혀 닦아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사줬다. 1·4 후퇴 후 대구 피란 시절에도 어머니의 책 사 나르기는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재능만 물려준 게 아니라 기본 소양까지 닦아준 셈이네요.

    “그게 우리 어머니의 딜레마였던 거지. 예를 들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꼬박꼬박 일기를 쓰게 하셨는데, 또 잘 쓰면 칭찬도 해주시고. 하지만 작가가 되는 건 결사 반대하셨거든요.”

    -부모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통과의례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아요. 저는 그걸 넘어서서 어머니를 괴롭히는 데까지 갔죠. 결국 엄마가 졌지. 아, 그거 참, 잘못 많이 했어.”

    -죄의식이 큰가요.

    “그런 정도는 아니고…. 왠지 제가 어려운 때면 어머니가 꿈에 뵈어요. 특히 감옥에서 자주 그랬죠. 꿈인지 생시인지, 군용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 머리맡에서 이렇게 절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 힘들고 어려울 때면 꼭.”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이 선생 안에 남겨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늘 벗어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어머니의 유난한 관심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듯도 해요. 전 스스로를 비관적 낙관주의자라 생각하거든요. 평소에는 조울증 비슷하니 낙담할 때도 많고, 그런데 결국은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죠.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힘이 생긴달까.”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기억이 주는 힘이군요.

    “영등포에서 학교 다닐 때도 다른 애들은 무명옷에 검정 고무신이 다였는데, 전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반바지에 블라우스, 양말에다 구두까지 챙겨 신고 다녔어요. 계집아이 같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죠. 교복도 1년에 한번씩 꼭꼭 새로 맞추고, 청년기엔 맞춤 구두에 불란서제 레인코트까지 챙겨 입고. 그 없는 살림에도 예의, 체면, 자존심 그런 거는…. 참 무서운 어른이셨어.”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전국단위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어요. 전국적으로 칭찬을 받은 거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그 상을 받는데, 아, 내가 글을 쓰면 칭찬을 받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거죠. 중·고등학교에 가보니 더 그래요. 영등포 변두리에 사는 촌놈이 말이야. 그게 굉장히 가치 있는 일로 느껴졌어요.”

    몹시 추운 어느 월요일 밤, 편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그와 세 번째로 마주앉았다. 배짱 맞는 친구들 앞에서 그는 비로소 한껏 풀어졌다. 뱃속 깊숙이 숨어 있던 일곱 살 어린애가 반짝 눈 뜬 형국이었다. 대가니 전략이니 서도동기니 하는 말들은 쑥 들어가고 없었다. ‘저것이 진정한 ‘황구라’의 모습이란 말인가’, 입 벌리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런데 그의 입담 한 자락이 심상찮았다. 베를린 망명시절이었다 했다.

    “그때 거기 명상하는 애들, 그러니까 탄트라 수행하고 참선하는 애들이랑 버섯을 먹었거든. 그게 아주 효과가 대단하데. 일종의 강력한 환각젠데, 쪼꼬만 거 하나 먹으니까 12시간이 넘도록 세상이 까마득해. 숨을 들이쉬면 창밖 멀리 보이는 가로수 불이 탁탁탁탁 켜지고, 또 내쉬면 그 불이 탁탁탁탁 꺼지고. 참선에 깊이 들면 머리가 열린다고 하잖아. 난 그때 이마가 열렸어. 뜨거운 것이, 하- 기막힌 경지더라구.

    근데 이게 다 좋은 게 아냐. 깨는 시간이 너무 길고 너무 고통스러운 거야. 방안의 사물이, 뭐 이런 물컵이며 커튼이며 그런 것들이 막 나한테 덤벼드는데. 그 선연한 눈빛, 불타는 적개심. 정말 다 살아 있었어. 존재감이 너무 선명했다구. 참 견딜 수없이 무섭고 숨이 막히고….

    그런데 세상 만사가 다 그런 거야. 갈 때 너무 뿅 갔으니 올 때는 급행료를 내라 이거지. 그러고 보면 깨는 과정도 나름대로 의미 있었어. 괜찮은 경험이었어.”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그가 북에 간 것이나 버섯 먹고 불 켜댄 것이나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 다 그의 피가 시키는 대로, 갈 수 있는 한 멀리 몸 던져본 것 아닌가. 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은 황홀하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때 그의 곁을 지킨 건 더운 피가 아닌 차디찬 자의식이었을 테니.

    그는 ‘환각에서 깨어나 보니 열렸던 이마에 벌건 자국이 남았더라’고 했다. 자국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치러야 할, 문학이라는 이름의 급행료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의 피와 그의 자의식이 맞부딪혀 빚어내는 매운 갈등, 황석영 문학의 본령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닐까. 부디 그의 속 어린아이가 좀 더 자로워지기를. 예순에도 들끓어 폭발하는 소설가라니, 우리도 이제 몇쯤 가져볼 만하지 않나.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습작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중학교 1,2학년 무렵부터 콩트 비슷한 걸 끼적댔어요. 소설 꼴 갖춘 글은 경복고 입학 후부터 쓰기 시작했고. 1학년 때 교내 문학상 탄 소설을 누군가 베껴 부산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일도 있어요. 그게 당선이 됐죠. 마침 부산 사는 친구놈이 알려줘 취소를 시켰지만.”

    같은 해 단편 ‘팔자령’이 학원문학상에 당선됐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학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경복고 2학년 1학기 때 처음 긴 가출을 했다. 1년 뒤 복귀했지만 3~4개월 다니다 또 그만뒀다. 주먹깨나 쓰는 녀석 하나를 뼈가 나가도록 ‘폭격’한 탓이었다. 경복고 퇴학, 서라벌고교 편입, 1주일 후 자퇴, 남도 방랑, 동양공고 야간부 편입, 다시 자퇴. 그렇게 험한 10대 시절을 마감할 즈음,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탔다. 1962년이었다.

    2년 후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 사이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한번은 동백, 한번은 세코나였다. 실존의 고통이 살을 째듯 아팠다. 한일회담 반대시위 중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건설노동자를 따라 남도로 갔다. 신탄진, 청주, 진주, 마산 등지를 떠돌다 칠북 장춘사에 들어갔다. 동래 범어사를 거쳐 금강원에서 행자 노릇을 했다.

    -어찌어찌 찾아온 어머니의 손에 끌려 상경을 했다던데, 왜 그리 쉽게 포기했나요.

    “그 대단한 양반이 절 보더니 무너지듯 주저앉아 웁디다. 그런 걸 내 처음 봤거든.”

    1966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이듬해 청룡부대 2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닌게아니라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미국이 뭔지, 민족이 뭔지, 마약과 고문과 전쟁이 뭔지 몸으로 알게 됐다. 랭보를 사랑한 탐미적 문학소년은 포연 속에서 숨을 다했다. 1969년 5월 제대. 이후 6개월은 관 속 시신처럼 폐쇄된 나날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펜팔 여자친구가 생명끈이 됐다. 그렇게 겨울을 나면서 쓴 단편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비로소 대면한 여자친구는 그의 첫 아내가 됐다. ‘깃발(1988)’을 쓴 소설가 홍희담씨다. 이들은 십수년의 결혼생활 끝에 1986년 헤어졌다.

    -왜 헤어져야 했을까요.

    “글쎄…, 저는 ‘사회봉사’하느라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다 과도한 사회봉사를 했으니까. 공교롭게도 제가 광주를 잠시 비운 사이 5월 항쟁이 났어요. 아내는 그 불길 속에 있었고. 항쟁 당시에는 도청 여성부를 맡은 송백회 회장이었고 이후에도 오송회며 이런저런 일에 깊이 관여했어요. 저는 뭐 더했지요. 그때쯤엔 아예 전국 문화운동 조직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1974년부터 10년간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한 덕분에 경제 형편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은 두서가 없었다. 가족을 이끌고 남도 땅을 떠돌아다닌 때문이다. 전남 해주에서 해남, 다시 광주로. 1981년에는 제주도로까지 흘러들어야 했다. 공안당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삶은 소설가보다 ‘운동꾼’에 더 가까웠다.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현장문화운동, 지하 선전선동. 가족의 해체는 광주항쟁 르포집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 발간으로 가속화됐다. 글과 편집을 책임진 그는 안기부에 의해 1년간 외유 아닌 외유를 해야 했다. 이때 두 번째 부인인 무용가 김명수씨를 만났다.

    “귀국해 보니 벌써 소문이 났더군요. 전 이혼하기 싫었어요. 하지만 호준엄마(홍희담) 뜻이 워낙 강경해서…. 아이들(1남1녀)과 장길산 인세를 맡겼지요. 그때 마당극 안무 때문에 입국한 김명수씨와 재회했어요. 내 집 가서 함께 살자 그랬죠.”

    방북과 망명, 감옥살이로 이들 부부가 함께한 날은 4년6개월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현재 이혼 소송중이며, 지금 황석영의 곁에는 방송작가인 20세 연하의 새 동반자가 있다.

    지루함 못 참아 떠난 모험들

    -작가에게는 결혼 자체가 부담일 수 있을 텐데, 왜 자꾸 그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한국 사회가 혼자 사는 여자를 불신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남자를 더 불신해. 나이 들어 사회적으로 이름은 있는데 남자가 혼자 살죠? 유럽은 덜한데 미국은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해요. 제가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니까 몇 번씩 이렇게…. 그런데도 그게 굉장한 핸디캡이야. 제가 감옥에서 나와 1년간 혼자 살았잖아요. 아유, 대단히 불편하고. 저 새끼 지금 뭐하지? 바람 피는 거 아니야? 애인 있을 거야…. 뭐 이런 게 아주 굉장해요.”

    -두 번 결혼에서 세 자녀를 뒀는데, 그런 상황이 가슴 아프거나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그런데 말예요, 첨에 한번 허물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부턴 가정의 중요성을 별반 느끼지 못하게 돼버렸어요. 지금도 제게 가정은 호준엄마랑 애들 있는 그곳이에요.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꾸 그 쪽에 전화해서 의논하게 되고. 호준엄마 좋은 사람이에요. 진짜 어머니 대역이라고. (제대 후)가장 힘들 때 정신적으로 날 구원해줬고, 또 감옥 생활 5년 동안 뒷바라지해줬고. 요즘 제가 안정 찾고 맹렬하게 작품 써가는 걸 보고 호준엄마가 그래요, 이제 안심이라고.”

    -이제 방북 얘기를 해보죠. 겁나지는 않았나요.

    “겁이야 좀 났지. 하지만 전 미래를 봤거든요. 곧 냉전이 끝나면 남북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질 거다. 제가 원래 스릴, 서스펜스를 좋아해요. 안락은 지루해서 못 견뎌요. 6개월만 가만히 있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거든.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에 와 당시 쓴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등의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때는 편향적이었어요. 편향이 심했어요.”

    -최근에 낸 어떤 책 서문을 보니, 세상이 너무 우로 가 있어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식의 언급이 있던데, 당시도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었나요.

    “그때는… 인식 못했죠. (손을 왼쪽으로 뻗으며)정말 이렇게 된 거예요. 이렇게. 그리고 광주를 겪었잖아요. 광주에서 살아남았다, 광주에 없었다, 아내는 도청에서 막 뛰어다니고 있는데…. 그런 부채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는 방북 당시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의 방북은 알려진 것처럼 단신 결행이 아니었다. 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작가회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당시 활동중이던 여러 민주화·통일 운동단체의 합의가 있었다. 남북민간교류의 남측 대표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됐어요. 방북 후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전민련 간부로 있던 모모 인사들이 단체로 제도정치권에 들어가버린 거예요. 공식 서한 갖고 간 것까지 조직 보호한다고 다 없던 일로 해달라니. 이유야 충분히 이해됐지만 저만 공중에 붕 떠버린 건데, 사실 좀 괘씸했지요.”

    “김일성 주석 존경했다”

    1989~91년, 그는 베를린에 머물며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미국행을 결심했지만 난관이 적지 않았다. 그런 난감한 상황을 풀어준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 국방성 정보국(DIA)이었다.

    “한 미국인이 나타나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내일 가족을 데리고 베를린 주재 미 영사관으로 오라’길래 그대로 했죠. 바로 영사 집무실로 안내하더니 한번에 문제를 해결해주더군요. 밥을 사며 ‘당신 CIA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국방성 쪽이래요. 명함에는 ‘유러피안 아메리칸 컬처 센터’ 직원으로 돼 있더군요.

    미국에 건너가 그쪽 펜클럽 주선으로 롱아일랜드대학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또 그 ‘유러피안 아메리칸 센터’ 간부와 직원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 중 미8군에서 감청 업무를 봤다는 젊은 녀석은 부인도 한국사람인 게 우리말을 꽤 유창하게 했어요. 롱아일랜드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며 ‘제가 선생님을 보살펴 드리려고 합니다’ 딱 이러는 거야. 그러면서 부탁하는 게 한 달에 한 번 식사나 같이 하재요. 우리집에 자꾸 드나들길래 그랬죠. 내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입장에 있으니 출입을 삼가 달라고.”

    -쓴 글들을 보면 김주석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됐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요. 안기부 조사 받을 때도 ‘존경한다’ 그런 말 했어요. 그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역사상 존경받을 인물이 한둘인가요.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다산도, 전봉준도 다 존경하죠. 제왕부터 반역자까지 모두 역사의 고비마다 어떤 역할을 한 사람들 아닙니까. 김일성이란 이름을 빼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할 수 있어요? 항일투쟁을 했고, 미국과 싸웠고, 수십년 동안 민족의 절반을 통치했고. 그러니 존중할 건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

    -존중과 존경은 다른 것 아닐까요. 그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사상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존경은 가능하죠. 모택동, 호지명, 카스트로까지도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세계 지식인 사회의 존경을 받는데 왜 만날 김일성만 소련 앞잡이고 그래야 합니까.”

    -전쟁을 치러서겠지요. 남쪽 사람에게 김주석은 ‘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거는 그렇지가 않아요. 제 생각에 그 전쟁은 외세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남쪽에 김구 선생이 집권했으면 뭔가 달랐을 겁니다. 그나마 남에 정통성이 생긴 건 민중들의 끊임없는 싸움 덕분이었어요. 근대화는 지들이 했나, 이름 없는 여공,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지. 지금 정도의 형식적 민주주의도 정치인이 아닌 이름 없는 민중들의 싸움으로 획득한 거예요. 해방 후의 상황만 놓고 보면 사회 각 분야를 다 친일파가 잡고 있었잖습니까.”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그렇다면 민족의 정통성은 북에 있다는 건가요.

    “해방 직후에는 훨씬 그랬죠.”

    -학창 시절에는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기도 했는데 선생은 어땠나요.

    “전 북에서 벅찬 희망과 깊은 절망을 동시에 느꼈어요. 그 순수함,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런 정도의 생활을 이룬 것에 대한 감동(당시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거든요). 남쪽이 그때 너무 엉망이라 감동이 더 컸나 봐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망했지요. 그 숨막히는 통제. 어려운 상황에서 버텨 살아남으려다 보니 사회 통제가 너무 엄격하고, 야,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나…. 서방 지식인들은 오해하는데, 북한에 수용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수용소 체제니까. 그냥 이사만 시키면 돼요. 숙청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당신 가, 직장 바꿔. 그러면서 시골 어디로 배치시켜요. 우리도 도둑놈들은 감옥살이 잘하는데 높으신 분들은 당뇨 터지고 막 쓰러지고 난리잖아요. 그거랑 한가지예요. 주민들이랑 똑같이 김매고 삽질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그냥 가버려요.”

    -주체사상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비해 제 3세계적이라고 봐요. 의식을 추상적 관념이 아닌 가장 고도의 물질적 작용으로 보거든. 유물론 입장에서 보면 참 이상한 건데, 그렇게 규정하면서 ‘사람이 다 결정한다, 사람의 손으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다’, 그렇게 주체로서의 사람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게 제 3세계 형편에는 잘 맞거든. 거기 덧붙여 생존논리인데, 수령론이라든가 그런 거. 세계 최강 미군과 대치하고 있으니 북한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 말대로 빨치산 국가가 된 거지. 국가 자체가 농성 체제라 이거야. 다 머리에 띠 두르고, 누가 화장실 갈라 그러면, 야 이 새끼야 너 어디 가! 그렇게 된 거지. 전 북한 체제가 저렇게 된 데는 자신들의 잘못도 있지만 더 큰 책임은 외세에 있다고 봐요. 너무 막강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좌편향돼 있었구나’ 하는 자각을 한 건 언제였습니까.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였죠. 이건 참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인데…. 해외 친북단체들의 관료주의, 조직이기주의, 전 그런 게 대단히 잘못됐다고 봤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최근 들어 남한이 민주주의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를 통해 좌로 편향된 시선이 어느 정도 정상화한 거죠. 올바른 민주주의야말로 진정한 국가 안보 아니겠어요.”

    -북한 인사들과는 여전히 잘 지냅니까.

    “왜요, 사고도 제법 났지요. 저쪽도 원칙이 없어. 너무 경직돼 있고 무리한 걸 요구하기도 하고. 또 제 근작 ‘손님’이 신천학살의 범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잖아요. 북한은 지금껏 그걸 미제국주의자의 만행으로 규정해 왔거든요. 그래서 지난번 방북 때 ‘섭섭하다’ ‘민족작가가 이래도 되나’ 그런 타박을 꽤 많이 들었어요.”

    죽음 생각케 한 이념적 줄타기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힘겹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뻔하잖아요. 1980년대, 1990년대지.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그 중 제일이었고, 그 다음이 이념적 갈등이었어요. 개인이 혼자 망명해서 버틴다는 게 굉장히 힘들거든요. 북도, 남도 엄청난 국가적 세력인데 거기 외세(미국)까지, 삼면에서 들어오는 압력이 엄청났어요. 이념적 줄타기, 그게 굉장히 힘들었지요. 제 속에 문학에 대한 고집, 꿈이 없었다면 그만 포기하고 그 중 어디로든가 넘어갔을 거예요. 그러면 일단 곤경에선 벗어날 수 있으니. 근데 만약 그랬으면 지금쯤 미쳐 팔짝 뛰다 죽어버렸을 거야. 말할 수 없이 좌절해서.”

    -줄타기를 하려면 줄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제겐 한국의 독자들이었어요.”

    -1993년에 귀국했는데, 그러고 보면 참 적절한 시기에 돌아온 것 같네요.

    “잘했죠. 만일 그때 더 버티다 DJ정권 들어선 뒤 왔으면 독자들이 뭐라 했겠어요. 약은 놈, 그랬겠지.”

    -1980년대 중반부터 1998년 출옥 때까지 작품을 거의 쓰지 못했지요. 고통스럽지 않던가요.

    “하, 아주 고통스러웠죠! 또 하나 빠진 게, 제 내부 말이에요. 가정이 불안했잖아.”

    -그땐 재혼한 다음 아닙니까.

    “사실… 그게 제일 불안했어요. 뿌리뽑힌 가정을 복원시키고자 했던 일련의 몸부림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데서 오는 아쉬움. 방북을 결행한다거나 극단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그런 행동들도 다 그거랑 연관이 있었던 거죠. 뭔가 붙잡아주는 게 없으니 모든 에너지가 그런 쪽으로 몰렸달까.”

    -작가로서 잃어버린 15년에 후회는 없나요.

    “왜 없겠어요. 후회라기보다는 회한인데, 가정이 그렇게 파괴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걸,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겪은 우여곡절…. 누가 물으면 웃으면서 그냥 그래요. 죄 받았어.”

    -하지만 세상에 100% 나쁜 일은 드무니까…. 얻은 게 있다면 그 중 큰 게 뭘까요.

    “제가 그 중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이념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내면에서, 또 무의식적으로. 그런데 저는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양쪽을 넘나드는 긴 고통의 방랑 끝에 얻은 선물이죠.”

    -감옥생활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고 했는데요, 그 얘기로 좀 들어가볼까요.

    “거기서 5년을 있었는데 처음 3년간은 정말 제대로 싸웠어요. 제가 양심수 아니유. 반찬만 좀 부실하게 나와도 단식투쟁을 했으니까. 5년 동안 18번, 덕분에 이 11개가 빠져나가 버렸죠. 지금 요 앞니 몇 대만 빼곤 다 가짜(틀니)예요. 독방생활이 3년을 넘어가니 말을 잊어버리고 세상사를 잊게 되더라고요. 정말 힘들다 절감할 즈음 자꾸 꿈에 아주머니 하나가 보여요. 얼굴도 희미한데 하여튼 여자로서 남자인 나를 위로해주고 가는 거예요. 그래 운동시간에 조폭들하고 담배 피우다 물어봤죠. ‘야,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이거 왜 이러냐’, 그랬더니 걔네가 ‘아, 그 아줌마요!’ 하는 거예요. 자기들도 다 만나봤다나. 그래서 우린 이 감옥터에 사는 터주 귀신인가, 어쩌구저쩌구 했어. 나중에 아는 정신과 의사한테 물어보니, 그 여성이 바로 어머니래요. 너무 힘드니까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구원의 여인을 불러올린 거지.

    어쨌든 그 무렵 전 위기를 감지했어요. 이러다 죽겠는데! 감옥 가면 책 많이 읽는다는데, 그렇게 혼자 돌아앉아 읽는 책은 관념일 뿐 피와 살이 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몇 년 더 살다 보면 신비주의에 빠져 도사 비슷하니 되거나, 얄궂은 사상가로 꼬리표를 바꿔 달기 십상이지. 더불어 몸은 자꾸 약해지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작가로서는 끝장 아니오.

    이래선 안 되겠다, 감옥을 저잣거리로 만들어 예행연습하지 않으면 난 죽는다. 딴따라의 세계, 디테일의 세계로 들어가자. 바깥과 소통하자. 그래서 절 풀기 시작했어요. 책 안 읽고 잡범들과 음담패설 주고받고. 운동하러 나가면 애들이 그래요. ‘총장님, 나오셨습니까!’ ‘야 임마, 내가 왜 총장이냐’ 그러면 인석들이 웃겨, ‘여기가 국립대학 아닙니까.’ 그렇게 2년을 보냈어요.”

    -효과가 있던가요.

    “아 있었죠. 사실 작가가 감옥 갔다오면 다시 글 쓰기가 힘들거든요. 저 나올 때도 그랬어요. 황석영이 이제 소설을 다 썼다고. 근데 어쩐지 전 맘이 편했어요. 아마 난 잘 쓸 거야. 난 정직하게, 최선 다해 살았어. 독자들도 그걸 알아줄 거야. 그리고 보세요. 3개월 만에 적응해버렸잖아요. 바깥세상에 본령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게임은 끝나버린 거야!”

    -출소 8개월 후쯤 한 인터뷰를 보니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만남이 몇 안 된다’ 하는, 다소 관조적인 감상이 실려 있던데요.

    “음…, 그건 이런 걸 거예요. 망명, 감옥 생활로 제가 근 10년을 한국 사회와 떨어져 있었잖아요. 특히 감옥 생활은, 그게 죽음이랑 같은 거더라고. 세상은 다 잘 돌아가는데 나만 쏙 빠져 있잖아. 그러다 보니 이전에 가치를 뒀던 인간관계, 사회관계에 냉혹해지더라고요. 다 별거 아니다 하는. 지금도 그 영향이 커요. 섭섭해하는 후배들이 많죠. 하지만 그때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출소 후 이렇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우선 몸이 갔을테고. 김남주 봐요. 여기저기 휘둘리다 아깝게 갔잖아요.

    애들이 막 살갑게 그래요. 석영이형, 왜 이렇게 연락이 없고, 왜 이런 모임 안 나오고…. 전 속으로 냉랭하죠. 그걸 내가 어떻게 다 감당해. 또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꼭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사실 사람 관계나 만남의 80~90%가 사교 아니요. 제가 황구라다 뭐다 그런 별명을 얻은 것도, 그게 다 사람 좋아해서 그런 거거든요. 어떤 자리에 갔을 때 분위기가 좀 침체돼 있거나 하면 꼭 제 책임인 것 같고 스스로 견디질 못하고.”

    -인간관계를 냉소적으로 보게 된 건가요.

    “냉소라기보다는 관계를 절약하게 된 거죠.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보게 됐어요.”

    -작가는 곧 ‘떨어져서 보는 사람’일 수도 있을 텐데, 이전의 선생은 ‘들어가서 보기’를 주로 하지 않았나요.

    “그거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떨어져 볼 줄 알게 되면서 생산력이 왕성해졌어요.”

    “내 속은 세수 안 한 꽃사슴”

    -‘오래된 정원’이나 ‘손님’을 보면 객관성이라는 단어보다는, 깊이 들어가되 떨어져 보는 듯 묘한 느낌이 살아 있던데요.

    “자기 내면으로 많이 후퇴한 거죠. 뒷걸음질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기 안의 것이 밖으로 많이 나온 거고. 다른 말로 하면 일상적인 것에 강해졌달까. 일상적이라는 건 주위니까, 바로 요기니까. 개인·사생활·행복·사랑, 그렇게 1980년대에는 소홀했던 것들. 그 전엔 모험·변화, 그런 데에 굉장히 과감하고 유능했는데, 사실은 그때 가장 부족했던 게 주변, 일상이었던 것 같아. 예전에 전 일상을 못 견뎠거든요. 너무 지루하고. 그래서 백낙청 선생이 ‘한국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란 농담을 하신 거죠. 감옥 가서 그렇게 달라졌으니까.”

    -이전의 문학관은 폐기하고 만 건가요.

    “오히려 확장된 거죠. 사람들이 절 보고 자꾸 민족작가, 민족작가 하는데 저는 ‘민X잡가’라 그래요. 옛날 식의 경직된 사고, 이념편향적인 사고는 한마디로 뭣도 아닌 거야. 지금 전 문학소년 시절의 열정으로 돌아가 있어요. 감옥에서 알았거든요. 난 ‘인생파’구나.”

    -시대의 변화도 한 몫을 했겠지요.

    “제가 굉장히 운이 좋았어요. 감옥 나와보니 IMF사태 충격이 쫙 밀려와 있더라구요. 사회도 흥청망청하기보다는 자기 성찰에 몰두하는 분위기고. 그러다 보니 옛날의 제가 추구했던 여러 서사의 틀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어요. 그 속에서 저는 또 나름대로 다른 ‘패션’으로 자기 정비를 할 수 있었고. 또 이전보다는 아무래도 민주화가 진전된 상태니까.”

    -사실은 대단히 많은 사람을, 대단히 격렬한 방식으로 만나온 삶 아닌가요.

    “저는 세계적인 마당발이에요. 한국사회, 해외동포사회, 그 주변의 외국인들, 북한 사람들. 또 전국을 떠돌며 살아 시골 구석, 제주도까지 다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여야 망라한 정치인 대부분 을 알고. 감옥에서도 마당발이었다니까요. 요 며칠 전에도 강남 갔더니 나이트클럽 하는 주먹 한 놈이 ‘총장님’ 하고 깍듯이 굴대요.”

    -선생은 ‘내가 중심이 아니면 못 견디는 사람’ 아닌가요.

    “그래서 어떤 여성이 그러더라고. ‘당신들 다 메시아 콤플렉스야!’ 아 젊을 때야 그랬죠. 지금은 아니에요. 많이 노숙해졌어요.”

    -어쨌건 선생은 자신의 직관이나 판단력에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 선생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그런 은밀한 오만함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저 그런 면 있어요. 그래서 되려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고. 하지만 그게 꼭 직관에 대한 자신감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보다는 당대 흐름보다 늘 몇 걸음 앞서 왔달까, 황아무개가 뭘 하면 꼭 그 일이 핵심으로 떠오른다는 식의…. 글쎄, 그게 자신감인가.”

    -후회도 하지 않는 분으로 보이거든요.

    “아니에요. 사주를 보면 ‘자책을 아주 깊이, 많이 한다’ 그렇게 나와요.”

    -주로 어떤 것에 대한 건가요. 말? 행동? 글? 관계?

    “글은 아니고 행동양식, 사람 관계. 남들이 보면 큰 잘못도 아니고 큰 실수도 아닌데 괜히 불안해하고. 제가 속은 세수 안 한 꽃사슴이잖아요. 세수 한 사슴은 너무 이쁘니까.”

    가정 상실의 고통 … “죄 받았어”

    -선생에 대한 외부의 시각 중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게 있다면요.

    “흔히들 절 투사다 뭐 그렇게만 생각하는데, 또 그런 시각의 기사들이 워낙 많이 나왔고. 하지만 제 작품 읽은 사람이라면 이 인간이 참 서정적이구나 하는 걸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또 한가지는 뭐냐면, 워낙 여러 일을 겪다 보니까, 이를테면 똥을 많이 싸놓고 다니잖아요. 일이건 사생활이건 뭐건. 필요 이상으로 절 오해해서 비난하거나, 이를테면 구설수라 그럴까. 전 전혀 그런 사람 아닌데, 또 제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그렇다고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저는 만날 두들겨맞고 살았어요. 끌려가고 감시받고. 국가조직 전체가 절 비난하기로 마음먹은 시대를 살았는데요 뭐. 그래서 젊은 문인 시절부터 그런 시선들에 대해선 포기하고 살았어요. 하지만 상처는 되죠. 안타깝고 약오르고. 요즘은 외려 무덤덤해졌어요.”

    -예술가 중에는 인간적 흠집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은 어떤가요.

    “제 치명적인 약점은 가정을 잃어버린 여러 원인들, 바로 그거예요. 가정을 왜 그렇게 소홀히 했을까…. 애들한테 참 미안하죠.”

    작가의 생명은 오직 세계관

    -민중문학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잘살아도 되나, 뭐 그런 비난도 들어보셨죠.

    “그냥 웃죠 뭐. 저보다 훨씬 게을렀던 작가들도 제 나이 되면 다 잘사는데. 저 처음 감옥 나와서는 갈 데가 없어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 웅크리고 있었어요. 한 4년 부지런히 일해 겨우 이 정돈데…. 하지만 뭐라 하겠어요. 치사하게.”

    -나이 들면서, 또 감옥 생활을 거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편해졌어요. 욕망에 대해 편해지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뭐였죠.

    “어… 그런 게 꽤 있었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여러 가지요.”

    -혁명이요?

    “그렇죠. 혁명적인 거. 남북 사이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한다든가 하는 거.”

    -왜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죠.

    “이젠 글 쓰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예술가로서의 자아에 더 충실하고 싶은 거죠. 평화가 좋고, 이데올로그로서 무언가의 얼굴마담 노릇 하는 것도 마땅찮아요.”

    -세대를 뛰어넘는 문학이란 결국 현실밀착적이기보다는 시대초월적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도그렇지만 결국 문제는 세계관이에요. 동시대(이건 최소한 60~70년을 뜻하는 겁니다)의 시대정신을 뭉뚱그려 짚어낸 작품이라면 고전이 될 자격이 있겠죠. 또 당대를 얘기할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되는 기념비적 작품도 있겠고요. 한마디로 말해 당대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작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분단시대 작가이니 분단시대의 문학을 하고 있는 거지요. 제가 뭘 쓰건, 연애 얘기를 하건 뭐건 간에 그건 우리 시대의 산물이에요. 훗날 이 시대를 논할 때 더불어 기억되겠죠. 시대와 밀착한 작품은 역사에서 규정을 받는 거니까. 고려시대 청자, 신라시대 불상 하는 식으로.”

    -그런 기준으로 선생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고전도 있고 기념비적인 것도 있다고 봐요. 고전은 역시 ‘장길산’이고, 이건 세대를 뛰어넘어 읽힐 거고, 기념비적이라면 ‘한씨연대기’ ‘객지’ ‘손님’ 같은 걸 들 수 있겠죠.”

    -선생 문학의 강점, 미학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전부 세계관이죠. 작가는 관점이 다예요. 첫 문장부터 마지막까지 바로 세계관.”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선생 인생의 자부심은 무엇입니까.

    “이 정도 먹고살면서 타작을 쓰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삶으로서의 세계와 작품세계를 일치시키려 노력해왔다는 거죠.”

    -뭔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가 있다면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발자크나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같은 대가가 나오지 못했어요. 전들 이왕 문학을 시작한 바엔 왜 대가가 되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아시아적 정신을 세계적 보편성의 그릇에 담는 작업이 선행돼야죠. 노벨상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만약 한국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건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릴 겁니다.”

    -요즘 독자들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서사지요. 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이 거기에도 잘 맞으리란 확신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당대 대중의 감수성이 어디로 가고 있다’ 하는 것을 잡아내는 데는 자신이 있거든요. 그 다음이 ‘애매모호함에 대한 위무’예요. 현대 삶의 특징이 애매모호함 아니요.”

    -요즘 소설이라는 게, 그 애매모호함을 강화하는 쪽이 더 많잖아요.

    “그것도 필요하겠죠. 하지만 위무와 해명이 더 중요해요. 왜 현재의 삶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죠.”

    -선생은 예술가이길 원한다지만, 또 많이 변했다 하시지만, 자꾸 작가가 아닌 거물로 느껴지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글쎄 그게 문젠데…. 살아온 전력 땜에 그래요. 일부는 전설이 되고, 그게 또 무너지면 무참하게 무너지잖아요.”

    -예전에도 예술가로 소비되다 예술가로 죽고 싶다는 생각 했습니까.

    “예전에는 못했죠.”

    -요즘 개인주의자임을 선언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죠. 개인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 그 이분법이라는 거, 전 원체 싫어해요.

    아마 그런(개인주의적) 풍조의 배경에는 1980년대의 과도한 사회의식 편향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1990년대로 넘어오고 또 저쪽을 가차없이 버리고 개인·사생활·행복·가족, 그런 주변부로 쑥 내려와 버렸잖아요. 전 그 두 가지 가치가 어떤 지점에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이뤄지는 서사, 그런 게 중요하지요.”

    -문학적으로 성숙하면 절로 그리 되지 않을까요. 자기 선언과 관계없이.

    “작가가 섣불리 무슨 주의자임을 선포하는 게 굉장히 자승자박하는 거거든요.”

    -선생도 1980년대에 자승자박을 겪었잖아요.

    “예 한번 겪었죠.”

    -이쯤에서 선생의 사상적 궤적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제대 후 사회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진보적 서적을 보기 시작했죠. 민중문학을 하면서는 사회주의 이론서, 문학비평서, 마르크스주의 기본서들을 봤고요. 현장에서 겪는 일들이 있으니 그만큼 흡수가 빨랐어요. 1980년대 초부터는 북한 서적도 봤죠. 하지만 쭉 견지한 것이 있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신념이었어요. 때문에 사회과학 쪽에 과도하게 편향됐던 1980년대에는 소설을 거의 쓰지 못했죠.”

    -북한 방문에 이어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는 걸 목격했는데, 어떻던가요, 충격이 오잖아요. 희망이라는 것도 사실 초라한 측면이 있고.

    “그렇죠, 초라하죠. 아주 초라하고 남루한 거죠. 특히 하나둘 밝혀지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체주의적 통제·만행·관료주의. 아주 지긋지긋하잖아요. 그래서 망명 시절 정신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웠어요. 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죠.

    “결국은 문학이 절 살렸죠. 오직 써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래서 또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 거고. 저는 선택의 여지가 굉장히 많았어요. 여러 제안도 많이 받았고요. 북한에서도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북에서도요?

    “미국 가기 전 들어갔더니 김주석이 ‘거긴 캥구단(갱단)도 많은데 어찌 살겠냐’며 같이 살자 그래요. 김주석이야 해본 말이지만 밑의 사람들한텐 교시 아니요. 우리 식구 잡아놓으려고 난리가 났죠. 여권도 안 주고 비행기 표도 안 주고요. 그래, 우리로 치면 안기부장을 하는 강모라는 지식인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형님, 난 이북 체제에서 못 삽니다. 월남자나 월북자는 분단 체제에 봉사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난 남한 역사의 산물입니다. 내가 통일운동 하려면 내 땅 가서 해야지 왜 여기 있습니까. 또 내 독자가 수백만명이오. 그들을 버리고 내가 어딜 갑니까. 대신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할 때는 꼭 인사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설득해서 겨우 나왔어요. 제가 귀국할 때 김주석에게 공개 편지를 쓴 것은 다 그런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북에서도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과거지사 때문이에요.”

    -사회주의 붕괴 후 우리 지식인 사회에는 엄청난 혼란이 왔죠. 일종의 전향 선언도 적지 않았는데요. 선생의 경우에는 그 혼란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귀국해 감옥생활 하면서 비로소 정리가 됐어요. 사회주의적 명제는 살아있다, 문명이 계속 이런 식(자본주의식)으로 갈 수는 없다, 하지만 꼭 그 방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냐…. 그래서 아시아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상을 고민하게 된 거죠. 이제 제 전망은 동아시아주의입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겠군요.

    “냉전시대에는 ‘미 제국주의’라는 말을 썼지요. 그것이 이젠 ‘세계화’라는 두리뭉실한 말로 대치됐어요. 하지만 전략은 훨씬 더 노골화됐거든. 이제 중요한 건 반미가 아니라 반세계화예요. 동아시아주의가 곧 반세계화주의고. 정보화시대니 뭐니 패션은 바뀔 수 있어요. 하지만 세계사적 문제의 본질은 심화될 뿐이죠. 미국식 소비양식이나 생활문화를 거부하면 종족이 소멸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게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닌 서도동기(西道東器)예요. 여기서 ‘서도’란 ‘동도’의 비판을 통해 거듭난 ‘서도’예요. 서도와 동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또 다른 문명관인 거죠.”

    -그걸 문학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어떤 건가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보세요. 그게 사실은 강간당한 문화야. 백인 피의 농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니까요. 참 재미있는 게 남미 문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건 결국 아즈텍, 잉카의 신화, 설화, 전설이거든. 백인들은 가질 수 없는 그 무엇. 그런데 도구는 스페인 말, 침략자의 언어를 써요. 그게 오히려 그릇이 된 거야. 우리 문학도 마찬가지예요. 분단 상황이라든가 그런 걸 어떻게 세계적 보편의 언어로 전달,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그걸 고민해야죠.”

    -그렇다면 선생이 요즘 힘주어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란 결국 문학적 범위에 국한한 건가요.

    “아니죠. 종래 해온 것처럼 시민운동으로서의 연대지요. 지식인운동, 문화운동. 전 항상 새로운 문학을 하게 되면 제가 갈 길을 스스로 개척해왔어요. 내 판을 내가 만드는 거죠. ‘객지’를 쓰면서는 노동판에 들어갔고, ‘장길산’ 쓸 때는 또 문화운동 하면서 연희패, 놀이패, 소극장 같은 걸 도처에 만들고 다녔고요.”

    -작품을 쓰는 것과 그를 외면화해 판을 짜는 것은 층위가 다른 문제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글을 쓰면 그게 전파되고 시대화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야죠. 젊었을 때는 그게 참 빨리 진행됐어요. 밀어붙이는 힘이 강했으니까. 이제는 조심스럽고 아무래도 준비를 오래 하게 되네요.”

    찰랑한 잔에 물 한방울 더하기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나요.

    “그 전에 작가적 욕망이랄까 그런 건데, 글을 쓰면 그게 책이 돼 나오고, 그것들이 다시 자기 생명력 가지고 사회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의 일감으로 연결돼 새 판으로 형성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그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그렇다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인의 본령일까요.

    “꼭 그렇다기보다 저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힘닿는 대로 그렇게 살 거예요. 전 평생을 제 행동과 삶, 문학, 세계관, 이런 것들을 합치시키려 노력하며 살았어요. 물론 다른 작가들이야 안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저도 이젠 문화적 행위 이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어 그는 작가라면 모름지기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새로운 글에 도전하며 늘 변화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둘째, 컴퓨터건 사회과학이건 뭐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 미묘한 문제이긴 하지만, 문학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 다 해내기 힘들면 그 중 두 가지라도 실천해야죠.”

    -하지만 역시 꽤 무겁군요. 같은 맥락에서 말이죠, 일각에선 선생이 과도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는데요.

    “민족작가다, 참여작가다 해서 여전히 절 ‘경성(硬性)’으로 딱딱하게만 보는 거, 저도 그건 싫어요. 저는 문인이니까요.”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만 해도, 사람들은 그걸 단지 한 소설가의 발언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게 사람들 기대예요. 그 사건만 해도 안티조선운동 쪽 요구하고 맞아떨어지면서 문학인선언에 지식인선언까지, 일이 아주 커졌으니까요. 황석영씨가 찰랑찰랑한 잔에 물방울 하나 넘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들 말하대요.”

    -안티조선운동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심사 거부를 선언한 건 아니었나요.

    “아니 그런 것보다, 한마디로 굉장히 약오르고 욕스러웠어요. 내 나이 육십이 다 됐는데, (심사위원·후보의) 반 이상이 문단 후배들이고.”

    -그럼 안 되나요.

    “아니, 글쎄, 그건 좋다구. 그런데 그걸 공개적으로 젊은애들하고 막 섞어서 잔류, 탈락, 어쩌구저쩌구. 그건 말이 안 되지. 한마디로 권력을 보여주려 한 것 같아요. 뚜렷한 경향성을 가진 신문사가, 일정한 혹은 애매한 경향성을 가진 문인들을 모아 종신 심사위원으로 만들고 자기 경향에 합당한 작품 뽑아서 공개적으로 민다는 건, 그건 권력 과시지. 전 거기 휘둘리고 싶지 않았어요. 원래 제가 무슨 상 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글 쓰는 게 뭔 대단한 일이라고 상 주고받고 난리들이야. 그리고 아무 이념적·정치적 흔적도 없는 그런 상이란 존재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따라 고를 수 있는 거지요.”

    -상으로 빳빳하니 줄 세워 장사하는 건 메이저 출판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데 액수, 영향력, 그런 게 천지차이잖아요. 동인문학상 상금이 5000만원이오. 상대가 안 돼요.”

    -안티조선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일부 언론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조선일보의 행태도 괘씸하고요. 하지만 전 안티란 말을 싫어해요. 안티가 뭐요. 정치적 용어로 말하면 ‘충실한 반대당’ 아니에요. 그것에 반대하면 또 그것과 비슷한 체계가 생겨나는 거야. 전 그거 딱 질색이거든요.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걸 바꿔야 되지 않나. 편집권 문제, 재벌화하는 문제, 뭐 그런 것들. 전 그런 면에서 언론운동협의회 논조가 훨씬 어른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안티조선 쪽에서 좀 섭섭해하는 것 같긴 한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안티조선운동은 유효하고 또 결과적으로 거기 힘 실어주게 된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이건 좀 다른 거지만, 저는 어디 나와 ‘좌파다, 정통 좌파다’ 하고 목청 돋우는 사람들을 보면 막 소름이 돋아요. 애들도 아니고, 세상 옳은 것은 자기가 다 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노작가 중에서도 무슨 천상의 벌을 받아 쫓겨난 신선인 양 온갖 고고한 폼은 다 잡고 엄살 부리는 사람들, 영 맘에 안 들어.”

    -또 맘에 안 드는 게 있나요.

    “패션 다르다고 무시하는 거. 꼭 지 말만 맞다고 우기는 거. 그런 거가 아주 딱 싫어요.”

    -그럼 이문열씨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나요.

    “이문열 김성동 김훈, 그런 후배들을 보면 꼭 6·25 때 길바닥에 버린 어린 동생 같아. 이문열만 해도 생각은 서로 다르지만 둘이 있을 때는 속내도 털어놓고 하는 사이거든. 사실 지난번 그 일은 저도 많이 불편했어요. 언론에서 무슨 적수 다루듯이 저랑 이문열을 딱 붙여놓고…. 생각은 다르지만 애정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이문열 책 모아다 태운 일 있잖아요. 그건 좀 심한 거 아뇨? 무슨 책을 태우고 그래, 안 읽으면 그만이지. 생각이 다르면 논리적으로 싸워야지. 하지만 안타까운 게, 어느 한 쪽에 과다하게 활용당하는 거 아니냐 하는 우려가 되고…. 제가 전화 걸어 그랬어요. 아 좀 조용히 글이나 써라.”

    그를 불로 몰고 가는 DNA

    -선생은 활용당한 적이 없나요.

    “난 없어요. 출마시켜주마 하는 동교동 쪽 제안도 물리쳤고,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도 가지 않았죠. 뭐 무슨 대단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쑥스러워서요. 그런 원칙은 있어요. 개인적 만남이 아닌 정치 행사에는 가지 않는다. 친한 정치인들이 꽤 많거든요. 사실 이전의 정치적 활동도 마땅히 나설 사람이 없으니 우리(예술가)가 한 거지…. 그런데 지금도 철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엉뚱한 요구를 해요. 가령 여기 일산 오기 전에 제가 충남 덕산에 살았거든요. 어느날 웬 농민이 전화를 해서 무조건 도와달래요. 당신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왜 나보고 그러느냐 했더니, 아주 낡은 얘기들을 해요.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작품은 어쩌고…. 화를 버럭 내고 끊어버렸지.”

    -사실 그거, 몇 년 전만 해도 선생이 가장 강조하던 말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건 옛날에, 말하자면, 대중적 힘 갖고 있으면서 사회적 발언할 사람이 드물 때, 그걸 뭐 연예인이 하겠어? 우리가 해야지. 그런데 지금처럼 시민단체가 수백 개 되는 국면에선 오히려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제 능력을 까먹는 일이기도 해요. 저는 글을 써서, 글을 통해 해야죠. 지금은 글을 쓰는 게 실천이거든요.

    요즘도 무슨무슨 집회에 나와달라, 그런 부탁들이 많이 와요. 하지만 시간도 없고, 저말고도 사람 많고, 또 이젠 수천명이 버젓이 시위를 해도 뭐라 그러는 사람도 없고, 잡아가지도 않고, 고문도 없고. 뭐 이름이나 걸어달라 그러면, 이렇게 보아 합당하고 보편적인 사안이면 그렇게 하라 그러지요.”

    -눈앞에 둔 계획이 있으신지요.

    “동아시아 연대 잡지 내는 것하고, 영국 가서 한 6개월 영어공부 하는 거하고. 또 아직 공식적으로 얘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모임을 하나 만들려고요. 문화 각 분야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 100명 혹은 150명, 그렇게 모아 계를 조직하는 거죠. 그렇게 모여 한두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공부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고. 뭐 한번 놀아보는 거죠.”

    -모임의 목적은 친목도모뿐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주된 이슈가 있으면, 예를 들어 대중이 정말 납득할 만하고 한 목소리 내는 데 부담 없는 그런 일이 있으면 힘을 실어주자. 독일도 보면 47그룹이라고, 문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리더들이 있거든요. 모임을 기초로 문화정보주간지도 내고 FM방송도 하고. 괜찮을 거예요.”

    -꼭 그런 걸 해야 할까요. 그냥 글만 쓰면 안 되나요.

    “근데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피에 그런 게 있나 봅니다. 활동가적 기질 같은 것.

    “하하하, 글쎄 말이야….”

    -그런데 말이죠, 말씀 나누다 보니 자꾸 무슨 막 같은 게 느껴지네요. 왜 이렇죠.

    “잘 아네. 그런 거 있어요. 청소년기부터의 습관인데, 위악적이라고 할 정도까지 비교양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 교양 있는 말을 교양 있게 하면 그걸 촌스럽게 생각하고 돌려서 얘기하고,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게 말하기. 그걸 우리끼리는 공중전이라 그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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