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부시의 압박이냐, 김정일의 돌격이냐

北·美의 북핵 게임

  • 글: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3-01-30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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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경수로 공사 중단시키고 重油발전소로 대치할 것”
    • 8억 달러에 이르는 경수로 건설대금 날리게 된 한국
    • 중유공급 중단 조치로 한순간에 북한 팔 비틀어버린 미국
    • 북한은 제네바 합의와 햇볕정책이라는 ‘낚시 바늘’을 삼켰다
    • 핵을 만들 수도, 만들지 않을 수도 없게 된 북한의 딜레마
    • 미국의 핸드 인 핸드 전술에 갇혀 버린 북한의 전격전 전술
    • 한국과 일본 자금으로 대 북한 개입전략 펼치려는 미국
    • 북한정권 섬멸 쪽으로 개정된 작전계획 5027
    • 김정일 향한 부시의 진심 “이놈을 생각하면 나는 배알이 뒤틀린다”
    부시의 압박이냐, 김정일의 돌격이냐

    94년 제네바 합의로 북한이 공사를 중단시킨 평북 태천의 20만kw급 원전 현장.<br> KEDO가 금호지구에 건설중인 경수로. 2003년 현재 25% 정도 공사진척도를 보이고 있다(아래).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작금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북핵 사태는 총성 없는 전쟁 그 자체다. 전쟁 중에서도 아주 속도 빠른 ‘전격전(電擊戰·Blitzkrieg)’이다.

    2002년 12월12일 핵동결 해제 선언, 12월22일 핵시설 감시카메라 무력화와 봉인 제거, 12월31일 북한에 상주해온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추방, 2003년 1월10일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순으로 북한은 매우 빠르게 북핵 사태를 진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전격전과 섬멸전

    중간중간에 박의춘(朴義春) 러시아 주재 북한대사와 최진수(崔鎭洙) 중국 주재 북한대사,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 차석대사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재개할 수 있다”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등으로 초를 쳤으니, 북한이 펼치는 외교전은 더욱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전격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국경 부근에 123개의 사단을 배치한 독일군이, 이 국경선에 92개 사단을 중심으로 천하의 철벽(鐵壁)이라는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군을 뚫고 들어가, 개전 한 달 만에 파리를 점령할 때 보여준 현란한 속도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과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1950년 6월25일의 북한군 남침도 전격전의 범주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전격전의 성패는 보급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전차와 장갑차 등 기동장비는 방어망을 뚫는 데 전력해야 하므로, 많은 보급품을 싣지 못한다. 제 몸 하나 재빨리 놀리는 데 필요한 기름과 적의 방어망을 궤멸시킬 포탄, 그리고 승조원들이 먹고 마실 음식만 갖고 덤비는 것이다.

    이러한 전차와 장갑차의 뒤를 비무장에 가까운 보급차량이 따라가며 즉시즉시 보급을 해준다. 보급망이 이어지고 피로해진 승조원을 제때에 교체할 수만 있다면, 기동부대는 시간당 평균 10여 ㎞씩 하루에 240여 ㎞를 돌파하는 놀라운 속도전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보급이 끊어지면 전선을 돌파한 전차와 장갑차는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 상대는 기름과 포탄과 식량이 떨어진 기동부대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해 궤멸시키는 ‘섬멸전(殲滅戰)’을 구사한다.

    ‘모 아니면 도’. 전격전은 섬멸을 당할 수 있다는 부담을 안고 총력을 다해 펼치는 작전술이다. “전격전이냐 섬멸전이냐.” 비록 외교전의 형태이긴 하지만, 최근 북핵사태가 보여준 현상은 이것이다.

    물 건너간 2003년 경수로 완공

    이 싸움의 향방을 예측하려면 사태가 발생한 원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은 북한의 모든 핵시설을 동결시키는 대신 미국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만들어 2003년까지 북한 금호지구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약속했다(제네바 합의). 그런데 지금의 금호지구 사정을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2003년까지는 경수로 2기를 완성할 수가 없다. 공사 진척도가 25%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어진 원전 공사였으면 공기 단축을 거듭해 지금쯤은 시험 가동을 하고 있었을 시간이다. 그런데 금호 현장에는 이제 겨우 원자로를 설치할 격납 건물의 뼈대가 올라가고 있다. 왜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일까.

    KEDO 대표로 금호지구에 1년을 상주했던 한 외교관은 그 이유를 북한의 ‘몰상식한 자본주의’ 탓으로 돌렸다.

    “KEDO와 KEDO로부터 공사를 하청 받은 한국수력원자력(주) 등 회사들은 북한인을 노동자로 고용하려고 했다. 북한도 이를 원했다. 그런데 임금에서 합의점이 나오지 않았다. KEDO와 하청회사들이 북한 평균보다는 후한 임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한국인 수준의 임금을 요구했다.

    여기서 타협점이 나오지 않아 KEDO와 하청회사들은 애초 북한측에 제시했던 것보다 임금이 싼 우크라이나 노동자를 데려오기도 했다.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싸우다 보니 공사 속도가 늦어지게 되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돈독’이 올라 있다.”

    금호지구의 공사상황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도 보고되었다. 김정일은 1998년 조총련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금호지구에 와서 일하는 남조선 놈들을 보면, 깝진깝진하며 건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증손자를 볼 때까지 일할 것 같습니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금호지구에 설치될 경수로는 한국이 설계하고 제작하는 ‘한국형 경수로’다. 하지만 이 경수로 설계와 제작에는 컨버스천 엔지니어링(ABB-CE)이나 제너럴 일렉트릭(GE) 같은 미국 회사가 제공한 핵심 기술과 부품이 사용된다.

    대신 미국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이 경수로를 제3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또 미국은 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지 않을 권한도 갖고 있다.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에 대해서는 미국도 불만이 많았다. 미국 비확산정책 교육센터의 헨리 소콜스키 사무국장은 부시 정부에게 북핵 문제를 자문해주는 인사다.

    2001년 3월 한국에 온 그는 미 대사관 직원 관저에서 기자를 만나 ‘사견’임을 전제로, “북한은 IAEA의 특별사찰을 받지 않았으니 제네바 합의는 무산됐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의 중요 기술이 포함된 경수로를 북한에 짓도록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금호지구에는 경수로 대신 중유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수로를 중유 발전소로 대체하자.’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서는 이러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상이몽이었지만, 북한과 미국은 경수로 완공기간으로 적시한 2003년이 오기 전에는 ‘이몽(異夢)’을 고집할 트집을 잡지 못했다. 벼르고 벼르던 2003년이 왔으니 미국과 북한은 ‘다른 꿈’을 시현해보는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작금의 북핵사태는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를 대비한 한국의 방안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북핵 사태가 벌어진 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당선자는 “북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를 위해 중재역(仲裁役)을 자임하고 나섰다.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회담을 통해, 미국에는 특사 등을 보내며 중재에 나설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한국이 미북간의 북핵 갈등을 중재한다는 것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이다.

    “정몽준의 경고를 잊지 말라”

    16대 대통령선거 직전 국민통합 21의 정몽준(鄭夢準) 대표는 김행(金杏) 대변인을 통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해 큰 충격을 주었다. 정대표측은 ‘노후보가 서울 명동에서 열린 합동유세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고 말한 것을 지지 철회 이유로 거론했다.

    정대표는 미국과 북한이 싸울 때 한국은 중재하지 말라는 것을 내걸고 노후보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정대표와 노후보의 갈등은 우리 사회에 ‘북핵 위기를 중재로 풀어가려는’ 세력이 있는 반면, ‘그러한 중재 자체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작금의 북핵사태가 우리에게 중재를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주한 외교기관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외교전에서는 종종 외교전에 휘말린 나라가 중재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사례가 대만인데, 대만은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지면 ‘국제 항로인 대만해협이 중국의 위협 때문에 위험해지고 있다’며 국제 사회의 개입(중재)을 촉구한다. 이때의 국제 사회는 미국이다.

    지금 북핵사태의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다. 한국도 중요한 당사자라고 할 수 있다. 북핵사태에는 이미 IAEA 등이 개입해 있는데 한국은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한미 공조에 균열이 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외교관은 “지금 북한과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중재가 아니라 양자택일이다. 중재는 당사자 중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쪽이 제3자에게 요청하는 것인데, 한국이 미국과 북한으로부터 중재를 부탁 받아야 할 제3자인가.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지금은 정몽준 대표가 우스운 사람이 되어 있지만 돌고 도는 것이 정치다. 언젠가는 정대표가 내건 이유가 옳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북핵위기는 미국과 북한이 ‘미국의 패권질서 유지’와 ‘김정일 정권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갖고 벌이는 거대한 바둑판이다. 이제 양측이 심모원려(深謀遠慮)의 포석을 깔기 시작했는데 간섭을 기다리겠는가. 양 당사자보다 월등한 힘과 실력을 갖춘 세력도 중재하기 힘든 것이 싸움 초기다.

    이 외교관은 “지금의 북핵사태는 중재에 나설 때가 아니다. 그리고 양당사자가 한국에게 요구하는 것은 중재가 아닌 지지다”라고 강조했다.

    적잖은 한국인은 클린턴은 대북(對北) 유화론자였으나 부시는 강경론자여서, 미북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측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부시의 압박이냐, 김정일의 돌격이냐

    1월10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오른쪽)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과 기자회견을 하며 평화적·외교적으로 북핵문제를 풀어가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클린턴 정부나 부시 정부나 북한에 대한 기본 시각은 똑같다. 제1기 클린턴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보았고, 2기 때는 ‘불량국가(rogue state)’로 보았다. 그런데 부시 정부에서는 그 강도가 높아져 ‘악의 축’으로 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클린턴 정부는 북한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경수로를 지어주는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는가”란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이뤄지기 직전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했다. 그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북한 체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미국 역시 머지않아 김정일 체제가 붕괴할 것으로 보고, 2003년쯤에 경수로를 완공해준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김정일 체제가 단단했다.

    1998년 북한이 알래스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포동 1호 로켓을 발사했을 때 미국의 지도층은 1994년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미국에서는 북한이 여전히 호전적이니 제네바 합의를 파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북한이 대포동 1호 로켓을 발사한 1998년 후반기는 1994년 이후 북미 관계가 가장 나빴던 시기다. 클린턴 정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미국 행정부 관리들은 앞다투어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겼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제네바 합의는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지금의 대(對)이라크 전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전략 수정에 들어갔다. 한미연합사에 근무하는 관계자의 말이다.

    “1991년 걸프전쟁 때 미국은 쿠웨이트에 침공한 이라크군을 철퇴시킨다는 ‘전쟁목표’를 갖고 걸프전에 임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철퇴시키면 이라크에서는 패전 책임을 묻는 봉기가 일어나, 자동적으로 후세인 정권이 제거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세인 체제는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1991년의 판단이 틀렸음을 자인했다.

    이후 미국은,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제2의 걸프전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의 목표는 후세인 정권 제거다’로 수정하게 됐다. 지금 미국은 이러한 목표를 갖고 대이라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비슷한 진로 수정을 했다고 강조했다. 즉 2003년이 돼도 김정일 체제는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새로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15대 국회에 참여했던 한 국방전문가는 “1998년 미국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제2의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면, 김정일 정권 붕괴를 목표로 전쟁에 임한다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러한 전략 수정은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OPLAN) 5027 개정으로 구체화됐다”고 말했다.

    1998년에 개정된 작전계획 5027은 ‘작계-98’로 약칭한다. 그 이전의 작계는 1995년 작성된 것이라 ‘작계-95’로 불린다. 작계-95에서는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미연합군은 북한군을 휴전선 북쪽으로 격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시 한미연합군은 휴전선 위로 올라가지만,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청천강-원산선 이북에서는 작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군은 북핵 격파 수단 갖고 있다”

    그런데 작계-98에서는 ‘북한군의 남침으로 제2의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면, 한미연합군은 북한(김정일) 정권 붕괴라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싸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은 압록-두만강선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미국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작계-98의 등장을 의도적으로 전파시켰다. 이러한 전파는 주로 전 뉴욕타임스 기자인 리처드 핼로란을 통해 이루어졌다.

    핼로란은 ‘북한군이 자포자기에 빠져 남침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미군은 북한 정권 소멸을 목표로 북한을 공격할 것이다’는 내용의 글을 ‘북한 침공을 위한 새로운 전쟁계획’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이 글은 http://www.nyu. edu/globalbeat/asia/Halloran111498.html에서 볼 수 있다).

    그 직후 주한 미대사관 관계자들은 한국 언론에 이 사이트 탐방을 권하는 방법으로 작계-98의 등장을 홍보했다. 한국 언론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으나, 북한은 이를 캐치해냈다.

    1998년 12월의 북한 언론은 작계-98을 비난하는 기사로 도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8년 12월3일 북한 중앙방송(TV)에는 인민군의 이경환 소장 등 주요 인사들이 연이어 나와 작계-98을 비난하고 미제가 북침할 경우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이러한 북한의 반응도 별로 보도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작계-98에 대한 한국군의 반응이었다. 한국군은 북한 정권의 붕괴라는 새로운 작전 목표를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로 이해하려고 했다.

    한국군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제2의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피해를 입어가며 치르는 전쟁인 만큼 이 전쟁은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아니라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쪽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미군측은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또 한국군은 “유사시 한미연합군이 확보하게 되는 휴전선 북쪽의 땅은 한국의 영토이니, 한국군은 이곳에 계엄령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측은 “한국군이 계엄령을 펼칠 수 있는 곳은 한국군 합참과 2군이 통제하는 휴전선 이남 지역으로 국한된다. 휴전선 북쪽은 미군이 주도권을 쥔 한미연합사가 관장하는 군사작전 구역이다. 한미연합군이 새로 확보하게 된 땅에서는 한미연합사가 군정(軍政)을 펼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예비역 대령은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전력은 과대 평가하고, 한국의 전력은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은 이미 발사 준비에 들어간 북한의 핵미사일을 격파할 수단을 갖고 있다. 공군이 도입한 ‘팝아이(Pop Eye)’나 FX 사업과 함께 들여오기로 한 ‘SLAM-ER’ 같은 공대지 크루즈 미사일이 대표적이다. 두 미사일은 최고 180㎞와 260㎞를 비행해 정확히 목표물을 가격한다. 여기에 F-16 같은 전투기의 비행 거리(약 600㎞)를 추가하면, 사실상 한국은 북한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셈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발사시키려 할 때, 이러한 수단으로 먼저 공격한다면 버섯구름은 북한 땅에서 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8년을 경계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반미국가와 충돌할 경우 미국은 그 나라의 정권을 붕괴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전략이 처음 적용된 경우가 명목상으로는 NATO가 주도한 1999년의 대(對)코소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코소보를 침략한 유고의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켰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오사마 빈 라덴을 은신시켜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같은 목표를 이루려 하고 있다.

    북핵위기가 가열돼 북한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이나 일본을 선제공격하면, 이는 곧 미국으로 하여금 작계-5027을 작동케 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反김정일 세력을 키워라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면 한미연합사는 위협의 정도에 따라 작전 준비에 들어가는 ‘데프콘(DEFCON)’, 경계 강화에 들어가는 ‘워치콘(WATCHCON)’, 위협을 막을 준비를 강화하는 ‘쓰레트콘(THREATCON)’ 등을 발동한다.

    한미연합사가 이러한 경계령을 내리지 않는 것은 북핵 위기가 아직은 ‘말싸움’ 수준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미국이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두 번째로 작계-5027은 준비됐어도 미국의 기타 준비가 미흡한 것도 사태를 덜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 예비역 장성은 “미국은 국방부와 CIA가 양축이 돼 전쟁을 치른다. 대 아프간전은 CIA가 주도한 전쟁이었고, 대 이라크전은 국방부가 주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에는 탈레반에 저항하는 북부동맹이라는 무장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무장세력은커녕 후세인에 저항하는 야당세력조차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겼다”고 말했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은 탈레반을 붕괴시키는 세력으로 북부동맹군을 활용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위성을 통해 입수한 탈레반군 정보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열세에 몰려 있던 북부동맹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수도 카불을 점령해 아프간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부시의 압박이냐, 김정일의 돌격이냐

    “김정일은 밥맛없는 놈이야. 이 놈을 생각하면 나는 속이 뒤집혀. 그는 자기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거대한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어 북한주민의 가족을 파괴하고 있어.” (‘BUSH AT WAR’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평가한 말)

    이렇게 북부동맹군을 이기게 하는 데 CIA가 사용한 공작금은 7000만달러였다. 아프간 전쟁에는 미 해병대 원정단(MEU)과 육군 특전단(그린베레)도 참전했지만, 이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고 미 해군기와 공군기, 그리고 북부동맹군에게 폭격지점을 알려주는 역할만 했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반후세인 세력이 없기 때문에 미군 스스로가 ‘북부동맹군’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은 이 임무를 토미 프랭크스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중부군사령부에 맡기고 있다. 중부군사령부는 해병대 원정단이나 육군 특전단 같은 소수정예의 특수부대가 아니라 전차와 장갑차 등을 갖춘 정규 육군 사단을 동원해 이 작전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라크 내부에서 미군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으면 작전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이들은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후 이라크에 친미정부를 구성하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

    정보기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한국 언론은 영국과 독일 등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와 미군이 바로 이라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도하는데, 내 판단은 다르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후 이라크를 통치할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확보는 했으나 그 세력이 너무 미약해 시간을 끄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피해로 후세인 정권을 굴복시키려면, 후세인으로 하여금 조기에 제3국으로 망명케 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 국방부는 CIA가 이러한 공작을 펼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1979년 집권했지만, 김일성-김정일 체제는 1945년부터 60년 가까이 이어져온 체제다. 수차례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해온 북한에서 반김정일 세력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한다면, 그 전쟁은 전적으로 한미연합군 사령부의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전쟁이 된다. 미국은 인적 손실이 너무 큰 이러한 전쟁을 벌일 만큼 바보가 아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해 핵실험을 한다면 온 세계는 북한을 비난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더라도 이러한 비난을 등에 업고 공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국에서는 반미 목소리도 쏙 들어갈 것이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핵무기는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라는 점이다. 북한은 김정일 정권 유지를 위해 핵무장을 한 것이지,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다.”

    예비역 장성은 “미국과 북한이 전쟁을 한다면 그 시기는 북한이 핵개발을 눈앞에 두었거나 그 직후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외교적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외교전은 실질적인 무력충돌이 없기 때문에 양쪽은 끝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중재한다고 중재가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지겨운 외교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려면 차라리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시 “나는 이 놈을 혐오한다”

    대체로 갈등은, 사실보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인접국이 핵무기를 보유해도 위험하지 않다고 인식하면 갈등이 없는 것이고, 탱크만 보유해도 위험하다고 인식하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의 입씨름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를 알려면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김정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부터 추적해보아야 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대우인 보브 우드워드는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해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 한 기자다. 9·11 테러 이후 우드워드는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중요 인물들을 취재해 ‘Bush at War(전쟁중의 부시, 2002)’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Bush at War’ 340쪽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131쪽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2001년 3월7일 부시는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나는 북한 주민에게까지 도달한 이 양반의 리더십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Let me say how much I appreciate this man’s leadership in terms of reaching out to the North Koreans)”고 말하며, 김대통령을 ‘this man(이 양반)’으로 지칭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았는데 이러한 부시는 ‘Bush at War’에서 김정일을 ‘this guy(이놈)’로 지칭했다.

    우드워드는 텍사스주 크로포드에 있는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부시 대통령의 날짜는 대아프간 전쟁이 끝나가고 대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던 2002년 8월20일이었다. 부시는 왜 김정일을 this guy로 지칭했을까. 9·11테러 후여서 테러세력을 포함한 반미세력에 대해 극도의 증오감을 표출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을 굶기고 가정을 해체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봐서 그는 진짜로 김정일을 싫어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중유 공급 중단으로 팔이 비틀린 북한

    이러한 부시가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한 소식통은 “부시가 말한 악(惡)’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과 같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부시 대통령 재임중에 미국과 북한이 화해할 가능성은 제로로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this guy로 보는 부시 대통령이 외교적인 방법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또 북한 체제를 보장하겠다는 서한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하겠다고도 했다. 김정일을 싫어하는 부시 행정부가 이렇게 나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KEDO에 관계했던 한 외교관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중유 공급 중단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통계청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이 수입한 총 석유류는 60만6300여t이었다. 이 중에서 50만t이 미국에서 공급한 중유였다.

    대한무역진흥공사 북한실에 따르면 2001년 세관 통과 기준으로 북한이 수입한 석유류는 미국에서 받은 중유 50만t과 중국에서 도입한 원유 38만9000여t이 전부였다. 1999년에는 미국에서 중유 50만t과 중국에서 원유 31만7000여t만을 수입했다고 한다(한국은 연간 1억3000여만t 정도의 원유를 수입한다).

    그 외 특수 루트(군사 관계)를 통해 수입했다고 해도 북한의 연간 석유류 수입량은 90만t을 넘기 어렵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미국이 공급해주는 중유가 북한이 수입하는 석유류의 60∼80%에 이르고 있었고 근년으로 올수록 그 비율이 높아져왔던 것이다.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중유를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시인함에 따라 끊어버렸다. 상당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이번 겨울이야말로 북한에겐 가장 추운 겨울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로써 북한은 ‘산업의 쌀’인 전기를 수풍수력이나 태천수력 등 몇 개의 수력발전소와 석탄발전소로 해결해야 할 상황을 맞게 되었다.

    북한 철도는 대부분이 전기 철도다. 미국이 중유 공급 중단을 발표한 후 북한을 방문하고 온 한 인사는, “평양에서 청진까지 700㎞를 가는데 기차로 사흘 걸렸다. 전기가 끊어질 때마다 서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번은 굴 속에서 서는 바람에 10시간 동안이나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객차는 빨리 가는 거다. 화차는 더욱 형편이 나빠서 평양-청진을 보름이나 한 달간 간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북한 소식통들은 “중유 공급 차단만으로 미국은 충분히 북한의 팔을 비틀 수 있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한 번 결정된 다음에는 뒤집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인 강석주 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핵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 이상, 중유를 다시 공급받으려면 북한은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북한의 국가 체면과 충돌한다. 이것이 북한의 고민이다. 북한이 핵시설 봉인을 제거하고 IAEA 주재관을 추방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한 것은 결국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부시의 압박이냐, 김정일의 돌격이냐

    1월13일 특사자격으로 내한한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왼쪽)는 노무현 당선자를 예방해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전했다.

    북한의 군사력은 이라크보다 우세하지만 석유 확보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산유국인 이라크는 산업 시설과 군사 시설을 돌릴 석유가 있으므로 미국으로서는 군사력을 동원해 압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북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받는 고통이 커지기 때문에 굳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총력을 기울여 핵을 완성하고 이를 대포동이나 노동미사일과 결합해 한국이나 일본을 향해 발사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곧 전쟁이므로 한미연합군은 작계-98에 따라 전쟁에 들어간다. 이 전쟁에서 북한이 이기면 상관없지만, 패배한다면 김정일 정권은 생존하기 힘들다.

    결국 북한핵은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된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일본과 한국·대만 등에서도 핵무장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동북아는 위태위태한 무장 평화시대로 들어간다. 이 상태로 간다면 한반도는 현상유지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 고립은 가속화할 것이므로 북한의 고통은 커진다.

    이라크는 산유국이라 석유 수출을 재개하면 경제가 부흥하지만, 북한은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미 무너진 북한 경제는 재기하기 힘들 것이므로 미국으로선 경제가 부흥하면 다시 재무장을 하기 쉬운 이라크부터 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유 공급 중단’이라는 방법으로 북한 팔을 비틀어놓고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핵이 없으면 한국에 흡수통일되거나 미국에 먹힐 것 같다는 게 북한의 고민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핵을 만들어 보유하면 경제력은 더욱 허약해진다. ‘없어도 고민이고’ ‘있어도 고민이고’ ‘사용해도 고민인’ 애물단지가 북핵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직면한 이러한 모순을 발견했기에, 중유 공급을 중단시켜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미국에 팔을 비틀린 북한은 한국에게도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다. 이런 점에서 몇몇 학자들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온 햇볕정책이 성공을 거뒀다고 지적한다. 한 학자의 지적이다.

    “햇볕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을 한국을 비롯한 세계와 연계시킴으로써, 세계가 변하면 북한도 따라서 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살아 있고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 남과 북은 완전히 따로 놀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된 후 외톨이가 된 북한은 햇볕정책을 받아들이면서 남한 경제와 연결되었다.

    미국이 중유 제공을 차단하면 북한과 가장 많이 교류하는 나라는 중국과 남한이 된다. 이제 북한은 중국과 남한이 기침만 해도 독감에 걸리는, 두 나라의 경제 종속국이 된 것이다.

    피폐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햇볕정책이 낚시 바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제네바 합의에 응할 때부터 이미 북한은 미국이 던진 낚시 바늘을 삼켰다. 이제 북한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한·일 자금으로 反金 세력 키운다

    팔이 꺾인 북한이 핵개발 포기라는 항복의사를 보이면 미국은 당근을 제시할 것이다. 당근으로는 중유 공급 재개가 거론될 수 있다. 그와 함께 미국은 금호지구의 경수로 건설을 중단시키고 대신 중유나 석탄을 때는 화력발전소 건설안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파월 미 국무장관은 1월14일 ‘월스트리트지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북핵 폐기를 전제로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 미국은 경수로 2기 건설을 지속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에너지므로, 원자력이 아닌 다른 형태의 에너지(화력발전소)를 지원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금호지구에 건설되는 경수로 건설대금은 한국과 일본이 각각 70%와 30%씩 맡았다. 공사 진척도가 25%이면 금액으로는 대략 12억달러가 된다. 여기서 한국은 70%를 부담하니 경수로 건설이 중단될 경우 한국이 날리는 돈은 8억달러 정도가 된다.

    KEDO와 북한은 차관 형태로 경수로 2기를 짓기로 약속했었다. KEDO가 경수로 2기를 지어주면 북한은 이를 30년 동안 사용하며 원리금을 갚아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중단되면 이미 투자된 12억달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북한과 KEDO, 그리고 KEDO와 한국·일본 사이에 복잡한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 학자는 “미국은 KEDO와 북한의 갈등을 방치할 것”으로 예상했다. 갈등의 형태이긴 하지만 북한과 KEDO가 만나는 것이 북한에 자본주의를 불어넣는 방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수로 건설 중단이 관철되면 미국은 중유 공급 재개와 함께 또 다른 당근을 제시한다. 지난해 9월17일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t)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북·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밝혀진 일본인 납치 문제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이 학자는 미국은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일본의 ODA 원조를 가능케 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 미국은 현대그룹이 약속한 북한의 개성공단 개발건도 활용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바늘을 삼킨 쪽은 북한이다. 중유 공급 중단으로 팔목이 비틀린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경수로는 토해놓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이나 불가침 보장을 받는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이 약속했으나 북핵문제로 중단된 지원을 받아내는 선에서 미국과 합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때 미국은 한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직접 투자를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직접 투자한 한국이나 일본 기업이 북한에 건설한 공장에서 한국·일본인 간부와 북한인 근로자가 함께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장에서는 금호지구 현장에서 KEDO와 북한이 마찰을 일으켰듯, 상당한 마찰이 일어난다. 이러한 마찰이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원인(遠因)이 된다. 미국은 한국·일본 기업이 북한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북한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흘러들고 이것이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키우는 씨앗이 될 것을 기대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일본군은 종심 깊숙이 들어간 후 전과(戰果)를 확대하는 전격전을 즐겨 구사한 반면 미군은 어느 깊이까지 들어간 다음에는 진격을 멈추고 라인을 정비했다. 설사 상대에게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더라도, 모든 부대가 함께 진격할 수 있도록 진격 속도를 조율했다. 이른바 ‘핸드 인 핸드’ 작전인데, 6·25전쟁을 지휘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그가 구사한 작전을 실제로 ‘핸드 인 핸드’로 명명한 바 있다.

    거대한 미국 체스판 위의 말

    북핵 사태는 북한의 전격전과 미국의 핸드 인 핸드 작전이 충돌한 경우다. 봉인 제거와 IAEA 사찰관 추방 등을 실시한 북한이 ‘보급선’을 유지하며 전격전을 펼쳐나가려면 핵무기를 제조해 핵실험을 하거나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군사적 제재 등 상당한 고통을 불러오므로 펼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미국의 핸드 인 핸드 그물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

    한 전략가는 “미국은 북한에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 혹은 무장 세력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군 같은 세력이 생긴 이후에 북한을 상대로 작전을 펼쳐야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북한의 팔을 비튼 채 자본주의 사회(한국 일본)와의 교류를 활성화시켜 북한에 반김정일 세력이 나올 때를 기다릴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자금으로 김정일 정권을 고사시키려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핵 문제에 관련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노무현 당선자를 상대하는 미국의 외교술이다. 노당선자와 미국(부시 정부)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소지를 많이 안고 있는 관계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해 12월20일,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가 가장 먼저 노무현 당선자를 만나 부시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지난 1월 중순 서울을 방문해 노당선자를 만난 켈리 차관보도 미국 방문을 요청했다.

    통일을 위한 用美

    왜 이렇게 미국은 적극적일까. 국정원 출신의 국제정치학자의 말이다.

    “미국은 한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북한을 상대로 그들의 전략을 펼치려면 차기 정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부시 행정부가 이회창 후보에 비해 노무현 당선자를 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호불호를 따지기에 앞서 필요하면 ‘당기는’ 것이 미국이다. 노당선자가 미국을 방문하면 부시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당선자의 의중을 타진하며, 그를 미국의 영향력 안에 묶어놓는 방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전략 차원에서 거대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와 허장성세(虛張聲勢),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을 구사하고 때로는 강태공처럼 느긋하게 기다리기도 한다.

    미국이 두는 체스판에서 동북아는 한귀퉁이에 불과하고 남북한은 작은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력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 예비역 대령은 “한국이 북핵 사태를 중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북한이 보유한 핵은 통일 후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나며 은근히 북한을 지원하는 태도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만 늦추는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이 만든 체스판에 갇힌 우리는 미국을 등에 업고 빠른 시일 내에 통일을 꾀하는 용미(用美) 전략을 세워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같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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