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해발 8000m 고도에 핀 연어화의 싱그러움

산악인 박영석의 연어냉채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3-02-03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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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전(fusion)’시대. 요리에 더 이상 정석은 없다.
    • 이것저것 섞어도 맛있으면 그만이다. 계절도 상관없다. 냉채라고 해서 여름에만 먹으라는 법 또한 없다. 냉장고에 차갑게 식힌 연어찜에 각종 야채를 곁들여 먹는 연어냉채. 부드러운 연어살에 사각거리는 야채가 어우러진 시원함은 겨울철 색다른 별미다.
    해발 8000m 고도에 핀 연어화의 싱그러움
    매년 10월말, 연어들은 먼 바다에서 돌아와 하천을 거슬러오른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오는 3월 북극점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산악인 박영석씨(40·골드윈코리아 이사). 연어가 모천(母川)을 찾아 회귀하듯 그는 ‘마음의 고향’인 산을 찾아 오르고 또 오른다.

    세계 최고봉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비롯, K2(8611m) 칸첸중가(8586m) 로체(8516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바트(8125m) 안나푸르나(8091m) 가셔브룸Ⅰ(8068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46m) 가셔브룸Ⅱ(8035) 등 그 이름만으로도 아찔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정복하기 위해 31번 도전해 18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2001년 7월22일, 그는 K2봉 등정에 성공, 세계 9번째, 국내 2번째로 14좌 완등기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2002년 11월25일 남극 최고봉 빈슨 메시프를 정복해 세계 7대륙 최고봉까지 모두 섭렵했다.

    그는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순간부터 또다시 오를 준비를 한다. 산을 오르는 것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산을 향한 도전만이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악인이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자연을 사랑하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산과 들을 다니면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가까워졌다.



    중학교 때인 1977년 산악인 고상돈씨의 에베레스트 등정소식에 그의 가슴은 꿈틀거렸다. 고등학교 시절 동국대 산악부 ‘마나슬루 원정대’의 서울시청 앞 카퍼레이드를 보면서 그는 산악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다.

    1983년 재수 끝에 동국대에 입학한 그는 곧바로 꿈꾸던 산악부에 들어갔고, 2학년 때의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시작으로 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두 40여 차례나 원정길에 올랐다.



    오랜 산악생활 덕분(?)에 그의 요리솜씨는 수준급이다. 고산지대 악천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양공급이 필수다. 자신있는 요리는 온면과 육개장, 닭개장, 양곰탕, 김치말이냉면 등.

    하지만 그가 ‘명사의 요리’ 코너에 들고 나온 요리는 연어냉채. 전혀 만들어본 적 없는 음식이지만 한 번 도전해보겠다며 선택한 것이다. 성공한다면 자신의 요리파일에 추가할 것이라고 했다. 연어와 채소를 다루는 그의 칼 솜씨가 요리전문가 뺨친다.

    연어냉채 준비물은 연어와 각종 야채, 해파리, 양념장 등이다. 우선 연어는 살에서 껍질을 떼어내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을 낸 후 양념장(소금, 후춧가루, 포도주, 참기름, 간장)에 재두었다가 녹말가루를 앞뒤 골고루 묻혀 실고추를 얹고 찜통에서 5분 정도 찐다.

    해파리는 납작한 접시에 편 다음 끓는 물을 끼얹어 잠깐 동안 놓아뒀다가 얇게 저민 후 양념(마늘다진 것, 설탕, 식초, 소금, 파인주스)에 잰다. 간이 적당히 배면 냉장고에 넣어 식힌다. 해파리는 슈퍼나 마트에서 양념 포장해 판매하는 ‘즉석해파리’로 대신해도 된다.

    다음은 아채 썰기. 피망과는 달리 단맛이 나는 파프리카는 어슷썰고 밤과 오이, 래디시, 배 등은 얇게 채썬다. 여기에 참소라 등 각종 해산물도 미리 썰어 준비한다.

    다 익은 연어는 냉장고에 넣어 식힌 다음 큰 접시 중앙에 담고 그 주위에 미리 썰어놓은 야채와 해산물을 빙 둘러가며 담은 뒤 마늘소스를 살짝 뿌려 함께 먹으면 된다. 부드러운 연어살과 시원한 야채 등이 어울린 맛은 한겨울 별미다. 연어는 찜통에 익힌 그대로 먹어도 입 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럽고 맛있다. 요리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박영석씨가 친형이나 다름없는 선배 정상욱씨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동안 선후배가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신년 인사 겸 그의 북극점 도전 성공을 기원해주기 위해서였다.

    해발 8000m 고도에 핀 연어화의 싱그러움

    산은 인내다. 살인적인 눈보라와 추위, 갈수록 차오르는 호흡, 눈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백색태양 그리고 적막.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야 산은 사람의 발길을 허락한다.

    ‘산악인 그랜드슬램’. 이제 그는 ‘히말라야 8000m 14좌+세계 7대륙 최고봉+남북극과 에베레스트 3극점’을 모두 정복하는 세계 최초의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에 북극점 도전에 성공하면 남극점 단 한 곳만 남는다. 예정대로라면 오는 11월 남극점에 오를 계획이다.

    그 힘들고 가파른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념무상…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발짝 숫자를 셉니다. 처음엔 100발짝만 가자고 다짐했다가 그 다음부터 70, 50, 20발짝으로 조금씩 줄어들죠.”

    그가 가장 적게 센 숫자가 한 발짝이다.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도전했을 때다. 8848m 정상을 불과 98m 남겨둔 깎아지른 듯한 난봉고지(8750m)를 오를 때 한 번에 한 발짝 이상 떼지 못했다. 숨 고르고 한 발짝, 또 숨 고르고 한 발짝…. 그렇게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올랐을 때? “남들이 생각한 만큼 희열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더 큰 꿈을 향한 한 단계를 넘었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또 당장 내려갈 일이 걱정이죠. 대부분의 사고가 하산할 때 일어나거든요.”

    산에 오를 때마다 커지는 그의 꿈.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언제부턴가 그 자신조차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박영석씨에게는 벌써 ‘그랜드슬램’ 달성 이후의 꿈이 생겼다. 그 꿈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자연에 대한 ‘예(禮)’로 대신했다.

    “자연은 숭고한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함입니다. 자연이 받아들여야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북극점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마치 이미 성공한 것처럼 그 다음의 꿈이나 목표를 말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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